2021. 5. 2. 부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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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이 변화 많은 세상에서 주님을 떠나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8:26-40
  • 시편 – 22:25-31
  • 2독서 – 1요한 4:7-21
  • 복음서 – 요한 15:1-8

부활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부활의 열매를 맺는 우리’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 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고관’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 즉 교회가 전도의 열매를 맺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성령이 역사가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신비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넘어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으로(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에티오피아는 가장 먼 나라, 곧 세상 끝으로 통했습니다)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입니다.

‘필립보’는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입니다(사도 6:5). 그는 ‘스데파노’와 더불어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가 탁월한 설교자이자 기적을 행하는 ‘부제’로 묘사됩니다.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 8:4-13). 이 일은 승천하시기 전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 사도 1:8

어느 날, ‘사마리아 땅’에 있던 그는 ‘가자’(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통치 지역으로 이스라엘이 봉쇄해 버린 그 가자지구를 말합니다)로 내려가라는 ‘성령(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사마리아에서 ‘가자’까지는 130km나 떨어진 먼 거리로 ‘광야길’(인적이 없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복음 전도에 여념이 없는 그에게 그런 지시를 하신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루가’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전도의 열매’(구원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하느님께서 예비’하시고, ‘개입’하신 사건임을 처음부터 명백히 증언합니다.

‘필립보’는 길을 가다가 ‘마차’(병거)를 타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신비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상적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습니다. 단지 ‘루가’는 그 사람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케’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라고만 알려 줄 뿐입니다. ‘간다케’(Candace)는 이름이 아니라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왕’의 칭호입니다.

‘루가’가 말하는 ‘에티오피아 왕국’은 어디일까요? ‘에티오피아’(Ethiopia)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불에 타다’(I burn)란 뜻의 ‘아이쏘’(αἴθω)와 ‘얼굴’(face)이라는 뜻의 ‘오프시’(ὤψ)의 합성어입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태양(불)에 그을려 ‘초콜릿’ 색깔을 띤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이 왕국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투스’가 언급했고, 그리스 서사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도 언급됩니다.

그 왕국이 있던 땅은 어디일까요? 고대에는 오늘날의 ‘이집트’ 남부와 ‘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을 ‘누비아’(Nubia)라는 지명으로 불렀습니다. 그 ‘누비아’에 있던 ‘쿠시 왕국’(Kingdom of Kush)이 본문에 나오는 ‘에티오피아’입니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쿠시 왕국’을 ‘에티오피아’라 불렀습니다. ‘쿠시 왕국’은 다윗의 시편(68:31)에도 언급되고, 에제키엘 예언서(29:10)에도 언급됩니다. ‘나파타’(Napata)를 수도로 시작된 ‘쿠시 왕조’(BC 1070년)는 한때 고대 이집트를 정복하고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기도 했습니다(BC 715년).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오듯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 제국’의 공격으로(BC 663년) ‘쿠시 왕조’는 다시 남하하여 수도를 본래의 ‘나파타’로 옮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페르시아 제국’에 밀려 수도를 ‘메로에’(Meroë, 그래서 ‘에티오피아’를 ‘메로에 왕국’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로 옮깁니다(BC 591년). 그 뒤로 ‘쿠시 왕조’는 ‘메로에’를 중심으로 서기 320년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제국’과 ‘로마제국’ 시기에도 ‘쿠시 왕국’은 오늘날의 ‘사하라 사막’ 남쪽 ‘수단’과 ‘에티오피아’에 걸친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쿠시 왕국’(메로에 왕국, 에티오피아 왕국)를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땅 악숨’에서 시작해(서기 80-100년경) 나중에는 홍해 건너 ‘예멘’까지 영토를 확장한 ‘악숨 왕국’(Kingdom of Aksum)이 서기 4세기 초에 정복합니다. 이 ‘악숨 왕국’과 관련한 재밌는 ‘신화’가 서기 13세기경 만들어졌습니다. 그 옛날 솔로몬 왕의 명성을 듣고 ‘지혜’를 구하고자 찾아왔던 ‘세바의 여왕’(열왕상 10:1-10, 복음서에는 남쪽 나라의 여왕 루가 11:31)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인’들은 그 ‘악숨 왕조의 시조’를 솔로몬 왕과 세바 여왕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메넬리크 1세’(말하자면 그는 유대인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도 있으며, 대다수는 오늘날의 이스라엘에 거주합니다)입니다. 그들이 믿는 신화에 따르면 성인이 된 ‘메넬리크’가 아버지 솔로몬 왕을 찾아갔다가 받아 온 선물이 ‘두루마리 성경’과 ‘계약궤’입니다. 그 ‘계약궤’가 오늘날도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교회에 보존되어 있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그렇게 믿고 ‘에티오피아’ 헌법도 ‘악숨 왕조의 메넬리크 1세’를 ‘에티오피아 왕조의 시조’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후대 왕들과 왕조의 정통성을 ‘솔로몬’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입니다. 한때는 국기에 ‘솔로몬 왕조’를 상징하는 ‘사자 문장이 들어간 적도 있었고, 오늘날 사용되는 국기의 노란 별 문장은 ‘솔로몬의 별’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 본문에 나오는 고대의 에티오피아는 같기도 하지만 다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무슨 일로 ‘누비아 사막’을 건너 ‘예루살렘’에까지 그 먼 ‘순례’를 왔을까요? 몇 가지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왕의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으니 ‘쿠시 왕국’의 사절단 대표로 고대 근동의 1세기 명물인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메로에’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과월절 축제’에 맞추어 개인적인 순례를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가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 즉 그리스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을 갖고 있었음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그가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 시절에 강제 이주한 디아스포라 유대교 공동체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그 관점에서 말씀 나눔을 합니다.

그는 한 나라의 ‘고관’입니다.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할 정도로 전적으로 ‘신임’을 받는 사람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그는 ‘권세를 가진 강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 유대인인 그가 그 ‘지위’까지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말입니다만, ‘그는 불구의 몸인 내시’입니다. 그가 가진 세상 권세는 강력하나 신체는 성적으로 ‘무력’합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그는 ‘죽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남자이나 남자가 아닌 ‘무력한’ 그가 평생을 어떤 ‘고통’과 ‘정체성의 투쟁’ 속에 살아왔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율법에 따르면, 그의 신체조건으로는 ‘야훼의 대회’(이스라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레위 21:16-23; 신명 23:2).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주시지 않는 한 그는 ‘참된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소외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까지 머나먼 ‘순례’를 감행했습니다. 그가 가진 몸의 장애(더 깊은 차원에서 보자면 성적 지향)가 ‘자비’를 베푸실 하느님을 향한 ‘거룩함(예배)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 같은 그의 순례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에게는 세상의 성공이나 권력으로 채워질 수 없는 ‘영적 갈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인종과 민족이든, 어떤 성적 지향과 정체성이든, 학식과 재물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세상의 성공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가 찾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시편 22편 말씀처럼 그는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이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26절).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이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25절). ‘약함’ 속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오랜 ‘고통’에서 ‘구원’되기를 갈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읽던 이사야 예언서에는 이런 말씀도 있기에 그는 충분히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야훼께로 개종한 외국인은 “야훼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에게서 제명시키리라.” 하고 걱정하지 마라. 고자들도 “나는 마른 나무 같은 신세구나.” 하고 염려하지 마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고자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의 뜻에 맞는 일만 하고 나의 계약을 굳게 지키면,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 – 이사 56:3-5

이 약속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필립’보를 보내시어 그의 간절한 찾음에 응답하실 참입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신비하고 인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필립보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70인역 ‘필사본 두루마리 성경’입니다. 오늘날은 책이 흔하지만, 2천 년 전은 오늘날과는 다릅니다. ‘필사본 두루마리 성경’을 ‘개인적’으로 가졌을 정도이니 그는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길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탐구하는 그 ‘지식인’의 모습에서 ‘구도자(求道者)’의 풍미가 느껴집니다.

그가 읽고 있던 구절은 ‘고난받는 종의 넷째 노래’라고 불리는 대목입니다(이사 52:13-53:12). 그리스어로 기록된 ‘70인역 성경’이기에 히브리어 본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그 대목을 읽으며 ‘고통을 겪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받고 굴욕만 당하는 그’, 결국은 ‘후손조차 없이 생애가 끝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고심 중이었습니다. 어쩌면 ‘후손’이라는 말에 그는 더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 성령께서는 필립보에게 마차에 바싹 다가가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에 따르려면 ‘담대함’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성령의 음성에 익숙한 필립보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 구체적인 지시에 따릅니다. 그렇게 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던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필립보는 마차에 바싹 다가갑니다.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소리 내어 있는 대목을 듣던(이사 53:7-8) 순간, 필립보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성령께서 자신을 ‘사마리아’에서 이곳으로 인도하셨고,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를 말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였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둘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갑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설명해 주어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겸손하게 필립보를 초대합니다. ‘성경’을 설명해 달라는 그의 겸손한 초대에 필립보는 마차에 오릅니다. 필립보는 “그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 즉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그에게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이 핵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재미있는 대조가 발견됩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필립은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대조는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도 불평이나 원망 없이 묵묵히 고난을 견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담대히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드디어 우리는 어째서 ‘부활 5주일’ 전례독서로 이 만남의 사건이 배정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읽던 대목은 장차 오실 ‘메시아’(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구원)을 예언하는 구약성경 말씀 중 하나입니다(이사 52:13-53:12).

우리가 믿다시피 ‘성경’은 ‘하느님의 계시’(하느님의 영감)로 이루어진 책입니다(2디모 3:16). 따라서 ‘성령께서’ 가장 잘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지금 ‘성령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 종의 고난과 부활을 믿는 ‘후손들’을 많이 나타나게 하시겠다(이사 53:10)는 예언이 둘의 만남을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라는 주님 말씀의 성취되고 있기에 <전례독서>로 배정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소개받자 그 ‘에티오피아 사람의 초콜릿 빛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결단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복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기쁜 소식’임이 믿어졌습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 종의 후손’이 되고 싶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그는 ‘복음’을 통해 ‘자신’에 대해 전혀 다르게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신 얼굴 앞에 서 있는 자신에 대해 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자신을 주님의 백성, 자녀로 받아들여 주시는 하느님이 믿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부색이나 신체조건이나 사는 곳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는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먼저 ‘세례’를 청합니다. ‘개종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의 ‘세례 요청’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 전 대화에 ‘세례’란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경에는 빠졌지만(37절이 없습니다), 후대 사본 전승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전해집니다.

필립보가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후대 사본에 삽입된 이 구절을 참고하면 ‘필립보’가 먼저 복음을 전한 후에 믿음의 표시로 ‘세례’를 받도록 권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의 초대’를 ‘자신을 위한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그 ‘에티오피아 사람’의 말을 통해 ‘세례의 필수조건인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발견합니다. 사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란 신앙고백은 초대교회 이래 지금까지 전해 내려 온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문’입니다. 물론 이 모든 믿음의 응답에 필립보의 역할이 컸습니다. 하지만 필립보는 그것을 자신이 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역사였습니다.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정확히 말하면 복음의 초대에 참여하기 위하여 필립보와 함께 물 있는 곳으로 내려가 ‘세례’(정확히는 침례)를 받습니다. 필립보는 정말 좋은 ‘인도자’였습니다. ‘전도의 열매’, ‘구원의 열매’가 맺어지는 순간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던 오랜 고통에서 ‘건지심’(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고통’에서 살아나는 ‘부활의 힘’을 경험하였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물하는 ‘영원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39절).

그렇습니다. 복음이 들려지자 그는 예수 안에서 ‘진짜 나’를 발견하였습니다. 남자, 여자, 성적 정체성, 피부, 민족, 권력, 빈부와 이념투쟁,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나’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초대된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사도행전은 고르넬리오와 그의 가족을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로 묘사하기 때문에 이 표현을 썼습니다. 사도 11:18), 즉 그 당시로서는 ‘땅끝’에 살던 사람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습니다(시편 68:31).

‘전도의 열매’(구원의 열매)가 맺어지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옛날 ‘엘리야’ 예언자처럼 필립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필립보를 ‘낚아채서’ 어디론가 데려가셨습니다. 신비한 현상입니다. 성령께서 둘의 만남을 통해 이루실 성부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을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만남도 성령의 역사였고 헤어짐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 ‘그의 후손’이 된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기쁨에 넘쳐’(부활하여 찬송하며) ‘홀로’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가족이 된 그와 함께 성령께서 동행하십니다. 그의 진정한 정체성, 즉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건지심을 받은, 죽음에서 부활한) 그 에티오피아 사람의 ‘기쁨’을 그 무엇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랜 ‘구도자’(求道者)의 삶을 끝내고, ‘전도자’(傳道者)의 길을 갔다는 것이 그에 대한 교회의 전승입니다. 그도 입을 열어 ‘그의 후손’(그 종의 후손과 에티오피아 사람의 신앙의 후손)이 되어 기쁨 속에 살아갈 사람을 초대하며 살아갔다는 것이 교회의 전승입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는 ‘필립보’를 이방 세계의 ‘복음 전도자’로 사용하십니다. 그는 ‘가자’에서 30km 떨어진 ‘아스돗’에서도 전도했고, ‘아스돗’에서 100km 떨어진 항구도시 ‘가이사리아’, 즉 ‘로마 총독’이 상주하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며 머물렀습니다(사도 21:8). ‘성령’이 임하시면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계속해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 요한 10:16

이 말씀이 초대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차별 없이 ‘하느님의 자녀’와 ‘가족’이 되는 기쁨의 일, 아버지이신 농부가 돌보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일이 계속해서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인종과 민족(유대인과 이방인), 국가와 사회제도(자유인과 식민지인), 신분과 종교의 장벽(신명 23:2 참고)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합니다. 복음 이야기처럼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로 창조합니다(갈라 3:28).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힘’(부활의 힘)이 있습니다. ‘복음’을 만나면 우리는 ‘진짜 나’로 살아갑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차별과 편견도 통용될 수 없는 ‘하느님 안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항상 인간의 노력이나 믿음의 고백보다 앞섭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만남이나 일들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이웃)를 구원하시려는 ‘선하신 계획’을 갖고 계시고, 때가 되면 성령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성취해 가십니다. 우리도 필립보처럼 그 ‘거룩한 일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장자리’에 있는 이들을 끌어들여 그들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일에 필립보처럼 성령님께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2편>은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서 건져주심을 받은 다윗의 노래입니다. 그리스도교는 <22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詩)라고 해석합니다. 특히 1-2절, 6-8절, 17-18절이 그렇습니다. 이 구절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외치신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성공회는 성목요일(성찬제정) 예식이 있는 날, 영성체 후 ‘제대보를 걷을 때’ <22편> 전체를 ‘교송’(交誦)합니다.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처한 다윗의 ‘절박한 탄원’입니다(1-10절). 두 번째 단락은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기도’입니다(11-21절). 세 번째 단락은 ‘구원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경험하고 바치는 ‘영광과 승리의 찬미’입니다(22-31절). 자신이 완전히 버려진 것 같았던 다윗의 두려움과 절대고독이 감사와 찬미로 바뀝니다. 이렇게 시의 분위기가 ‘절박한 탄원’에서 영광과 승리, 감사와 기쁨의 찬미로 급격히 바뀌기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시’(詩)가 같은 시기에 지어졌는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 배정된 본문(26-31절)은 주님 덕분에 살게 된 ‘감사와 감격’, ‘영광과 승리의 찬미’ 단락입니다. 말하자면 ‘전세(戰勢) 역전’의 기쁨이 가득합니다. 다윗은 그 전세 역전의 감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합창단’을 꾸리기로 합니다(22절).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하자는 초대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합창단의 규모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처럼 소수로 시작합니다(23절). 이어서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후손들”로 커집니다(23절). 이런 식으로 점점 규모가 커져서 ‘큰 회중’에 이릅니다(25절).

나중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 확장됩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들”(26절), “온 세상 만백성”(27절)입니다.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규모의 합창단을 형성하는 셈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들”(29절), “오고 오는 미래의 후손들”(30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31절)까지 주님의 구원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합창단’에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온 인류, 삶의 자리를 달리하는 사람들, 과거, 현재, 미래의 사람들까지 다 포함하여 생명과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하자는 초대로 마감됩니다.

‘부활 5주일’ <전례독서> 시편으로 본문이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야훼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그들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라. – 시편 22:26-27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서 영광과 승리의 자리로 옮겨진 다윗의 이 기쁨의 노래, 어둠이 가시고 새벽을 맞은 다윗의 이 기쁨의 노래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 ‘에티오피아 사람’을 시작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시편 끝에서 언급된 ‘후손’(30절)과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읽던 ‘고난 받는 종의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의 10절에 기록된 ‘후손’이 같습니다. 그 ‘후손’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한마디로 “온 세상, 만백성, 오고 오는 후손(세대)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받은 오늘의 ‘교회’인 우리 자신을 예고했습니다.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응답을 교훈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초대받은 이는 “서로 사랑하며 산다”라는 교훈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기록 배경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적대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위한 ‘특별한 지식’(靈知)을 소유한 양 은밀히 사람들을 포섭하고 다녔습니다. 일종의 ‘비밀지식 과대주의’입니다. 오늘날 이단들이 하는 행태들입니다. 특히 ‘성육신’을 부인하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지상의 예수님은 다른 분이라 주장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세례 받던 순간 인간 예수 위에 영적으로 내려와 앉았고, 인간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앞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떠나갔다고 주장한 적대자들입니다. 한마디로 ‘가현설(假現說 Docetism)’, 즉 하느님의 아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는 거짓 가르침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영지주의’에 물든 적대자들을 반박합니다. ‘비밀지식 과대주의’에 현혹당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식의 본질, 즉 구원에 필요한 지식의 정수(精髓)는 더 이상 특정 집단에게 비밀로 맡겨지거나 전수(傳授)되지 않다고 교훈합니다. 누구도 그것을 비밀스럽게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본질을 선물처럼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본질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8절, 16절)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분을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영접)하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에서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진실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위해 행해진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말고, 구원을 위해 인간이 깨달아야 하거나 획득해야 할 비밀지식 같은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은총으로) 받아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구도 이 사랑의 의무로부터 예외이지 않습니다. 영지주의 적대자들처럼 하느님(구원)에 관한 특별한 지식을 획득했다고 하면서도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머리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오늘 여기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는 절대적 근거는 현재 ‘우리에게서 실천되고 있는 사랑’ 말고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행하는 ‘현재의 사랑’ 말고 달리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배정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가르침은 ‘교회의 사명’과 ‘공동체 상호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이고, 포도나무(교회)로 산다는 것은 진정한 공동체성에 기반하여 ‘상호 의존’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임을 교훈합니다.

부활 5주일에 본문이 선정된 이유는 교회가 이제 곧 다가올 ‘승천일’과 ‘성령강림일’을 염두에 두도록 하려는 의도입니다. 이야기에는 간단명료한 ‘표상’(表象)들이 등장합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농부이신 아버지, 많은 열매를 맺도록 명령받은 가지인 제자들(우리들)입니다.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덩굴’이나 ‘이파리’를 감상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바라서입니다. 그것이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포도나무의 존재 의미와 가치는 ‘많은 열매’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 역시 ‘많은 열매를 맺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농부이신 아버지는 많은 열매를 바라시어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시편 80:8).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해방하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사건에 대한 ‘시적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나무’를 그 땅에 심으신 이유는 열매를 풍성히 맺어 ‘세상에 기쁨’을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 세상의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나무는 ‘들포도’를 맺고(이사 5:2), ‘악한 가지’가 되어서 하느님께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예레 2:21). 그들이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악행’을 일삼았다는 뜻입니다(호세 10:1).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그 ‘포도나무’를 그 땅에서 ‘뽑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이사 5:1-7; 에제 17:9).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려던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언자 이사야’는 대반전을 예언합니다(이사 27:2-6). 하느님께서 열매가 가득히 맺힐 ‘포도원을 다시 일구실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이전에 심은 포도나무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심으실 포도나무’는 농부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기대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포도나무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 누구나 알고 있던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해, ‘이사야’가 예언한 그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성취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중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열매가 가득히 맺힐 ‘포도원의 꿈’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성취될 것임을) ‘십자가 수난’을 앞둔 고별설교에서 가르치시는 중입니다.

나는 이전에 들포도나 맺었던 그런 거짓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입니다. 여러분은 나로부터 수액(樹液)을 공급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을 건강한 가지들입니다. 여러분과 나, 모두가 전체로 아버지께서 심으신 참 포도나무이고, 오직 아버지만이 이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께 연합한 우리가 하느님이 심으신 전체로서의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느님께 받아 누리던 ‘선민’으로서의 지위와 특권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파기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은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참 포도나무를 통해 그 계획이 성취되는 길이 다시 열렸습니다. 더욱이 이어서 말씀드릴 ‘교회’를 통해 그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로 영접하고 ‘새 이스라엘’이 된 ‘교회’에게,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새 포도원’이 된 ‘교회’에게 세상에 기쁨을 전해주는 특권과 지위와 책무가 옮겨졌습니다. 알렐루야!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특별하게 묘사하십니다. 지난주에는 ‘착한 목자와 양’으로, 이번 주에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입니다. 한 주 만에 둘 사이의 거리가 아예 없어져 버렸습니다. 당신과 우리가 둘도 아닌 ‘하나’라는 묘사입니다. 우리 서로도 별개(別個)가 아니라 연결된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바다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은 언뜻 보기에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해저 깊이 내려가면 섬들은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마치 각각의 손가락들이 한 손의 갈래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의 은유는 예수님과 우리, 우리 서로가 물질적 차원에서는 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 즉 본질적 차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라는 진실을 가르치십니다. 삶의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 ‘진실에 눈을 떴다’라는 뜻입니다. 근원의 한 조각, 전체의 작은 일면에 집착하던 삶에서 ‘큰 전체’, ‘하나로 연결된 삶’을 보는 눈으로 성장하는 일이 ‘지혜’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 중에는 이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가다 영혼이 병든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에서 뻗어난 가지처럼 ‘서로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있습니다. 물질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적 차원에서도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줄기로부터 전해진 ‘수액’(樹液)을 가지들이 서로에게 전해주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통로요, 전달자로 연결되어있습니다. 한 가지가 병들면 다른 가지도 영향을 받듯이 서로의 삶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결코 독립적이거나 자립적이지 않고 ‘상호 의존적’입니다. ‘코로나19’ 감염병은 이 진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진실을 빨리 깨닫는 만큼 우리의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도 어리석습니다. 동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곧 인간들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다른 생명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자연에 가하는 폭력은 반드시 인간에게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서로 ‘하나로 연결된 생명의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신학적 개념으로 하느님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현실에서 ‘사랑의 하느님’은 결코 그렇게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항상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하듯, 하느님도 우리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열매’라는 표상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책무와 지위와 특권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심지어 이 ‘열매’라는 표상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가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참 포도나무인지, 거짓 포도나무인지를 판별하는 근거는 ‘가지가 맺는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거짓’ 포도나무를 염두에 두시고서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라 하셨으니, 그 말씀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가지인 우리’(교회)를 통해 드러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과 성장 역시 당신(당신의 말씀)에 ‘붙어 있어야’(함께 있어야) 지속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시고, 우리 모든 행동의 힘은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입니다(5절).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어있는 한 ‘수액’(樹液)처럼, ‘성령의 권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끊어지면, 우리는 시들고 죽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을 떠나서는 할 수 없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서로를 존재케 하는 ‘상호공속적 관계’이고, ‘상호내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전체로서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교회’인 우리의 존재 가치와 지위(특권)를 높여주시고, 그 책무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사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일에 있어서 이파리와 가지와 줄기와 뿌리는 모두가 서로를 위해서 필요한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하고,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며,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전체로서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특권을 가능케 하는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영접한 삶입니다(요한 1:12; 3:16). ‘성찬례’에 참여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하는 삶입니다(요한 6:54,56). ‘예수님의 말씀’을 새기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요한 8:31; 15:9-10).

저는 이 모든 것을 농부이신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 즉 ‘예수 사건’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 사건은 ‘말씀’이라 할 수도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 예수의 삶에 대한 ‘기억’을 실어 나르는 ‘복음’(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입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이 우리 속에 진정으로 살아 활동하는 실재가 될 때(이 일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이 우리를 차지하여 자신의 의지가 되어 작동할 때(이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그 정신인 “서로 사랑하라”라는(요한 15:12,17; 1요한 4:7,11) 계명이 나무의 ‘수액’(樹液)처럼, 우리 몸에 흐르고 있을 때(오직 성령께서 이 계명대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가 교훈하듯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의 수액’이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형제들에게 흘러가도록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요, 전달자들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통해 그 말씀과 정신, 즉 ‘사랑의 수액’이 우리 속에서 흐르고 있을 때,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열매 맺음의 전제이자 기도 응답의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매가 맺힌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아와 그리스도의 의지가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때 교회가 갖는 소원 역시 예수님의 소원처럼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것입니다. 그런 소원은 다 이루어질 것이고, 아버지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포도나무의 생존과 성장은 전적으로 농부의 손에 달렸습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날 수 없듯이 나무 역시 농부의 손길을 떠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농부이신 하느님 손에서 자라는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둘도 없는 ‘하나’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가 됩니다. 우리 서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기대를 받는 한 몸의 식구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머물러야 할 자리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도’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는 일’을 의미하며, 동시에 ‘열매 맺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가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따라 우리는 지금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풍성한 결실’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 세상 어두운 곳에까지 우리의 가지를 뻗어 ‘구원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자신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빗나갈 때 우리의 삶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목적과 뜻을 성취하려는 교회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느님이 가꾸실 것입니다.

이런 희망과 체험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정신), 즉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계명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속에 ‘수액’(樹液)처럼 살아 흐를 때 우리의 기도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부합하기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 사랑과 부활’을 전파하여 구원의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공급된 그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가지에게 흘러가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함께 참 포도나무에 붙은 건강한 가지로 살아가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지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필립보처럼 더 많은 이들이 참 포도나무에 연합하도록 ‘복음’을 전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받은 ‘교회’입니다. 우리 각자는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을 열매 맺게 하는 일에 ‘가지’로서 소중한 한 부분을 맡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건강한 가지로 잘 가꾸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포도나무의 건강에 우리 각자가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가득히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함께 머물러야 할 곳은 언제나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 송파교회가 하느님의 구원과 뜻을 ‘성령 안’에서 성취해 가는 참 포도나무의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교회로 농부이신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이 잘 가꾸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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