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25. 부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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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한 무리로 모아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양 무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4:5-12
  • 시편 – 23
  • 2독서 – 1요한 3:16-24
  • 복음서 – 요한 10:11-18

부활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착한 목자 예수, 그 이름 아래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구원의 이름 예수를 선포하는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예루살렘을 지배하던 유다 지도자들을 향한 베드로의 연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산헤드린’(최고 법정, 의회)을 손에 쥐고 흔들던 ‘대사제 안나스 가문’(성전 귀족)을 향한 설교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지금 스승을 유죄로 판결한 ‘배심원들’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사제 가문’이라는 권력의 협박 앞에 서 있습니다. 대사제 가문이 장악한 ‘산헤드린’은 불과 몇 주 전, 예수님을 ‘신성모독자’와 ‘국사범’으로 단죄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총독에게 넘겼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 귀족’인 대사제 가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있고, ‘착한 일’을 계속해서 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사역’(치유와 봉사와 가르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특히 ‘사두가이파 출신의 대사제 가문’에게 ‘예수가 살아있다’라는 소문은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민거리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신학을 붕괴하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달리 ‘죽음 이후의 삶’, 즉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라자로의 부활’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입니다(요한 11:47-53,57; 12:10-11).

게다가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도 잘 알고 있는 태생 장애인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했다는 소식도 충격이었습니다. 대사제 가문은 그 일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제자들을 잡아 오게 했습니다. 예수에게 한 것처럼, 여전히 자신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는 현실 권력임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들은 심문합니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 사도 4:7

 

한때 베드로와 요한은 죽음이 두려워 스승을 버리고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평생토록 그 일이 불명예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완전히 제기했습니다. 당대 권력자들 앞에 서 있는 베드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언(설교)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루가 4:14)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루가 12:11-12). 새롭게 살아나 완전히 제기한 베드로는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는 그 운동의 심장이자 영혼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권력자들 앞에서 전혀 겁먹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치유된 장애인을 가리키며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합니다(10절). 대사제 가문(그들로 대표되는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버렸지만(죽였지만), 하느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높이신(부활시키신) 분이라 증언합니다(시편 118:22). 예수님도 이 시편(118:22)을 인용하시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루가 20:17) ‘머릿돌’은 토대를 이루는 큰 돌들 가운데 하나나 둥근 천장(아치)을 지탱하도록 그 정수리 부분에 놓는 ‘쐐기돌’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놀라운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 사도 4:12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베드로의 고백이자 복음 선포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고백과 선포는 단지 ‘종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고백과 선포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제사’가 아니라 ‘예수’를 힘 입어야 구원받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가 생명을 주는 ‘주님’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신은 가짜입니다. 한마디로 종교, 사회,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을 총 망라하여 세상의 참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포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뿐입니다. ‘예수’는 구원에 이르는 여러 방편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과 선포를 통해 그가 완전히 눈이 열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 죽음을 넘어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과 선포를 싫어하거나 우습게 여깁니다. 애써 종교적 차원으로만 축소해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도 우주 안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절대성’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는 단지 구원에 이르는 여러 방편 중 하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자신을 다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라 자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미움과 경멸을 받고 싶지 않다면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선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까? 물론 타종교인이나 세상 사람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초대교회의 신앙이라 말하진 마십시오. 그것을 그리스도교가 믿는 ‘성경’의 가르침이라 말하진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예수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구원한 ‘유일한 이름’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종교, 다문화 환경에 살아갑니다. 지금보다 나은 평화의 세상,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타종교인의 신념을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코로나19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존중과 연대, 환대와 상호개방이 더 필요한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간직하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신앙 전통’에 대해 분명하게 증언할 ‘책무’ 또한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태생 장애인’은 ‘인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 위에 있지 않은 우리 말입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죄와 허물 속에 처한 우리 말입니다. 자기 의지로는 ‘완덕’에 이를 수 없는 가련한 우리 말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셨습니다. ‘영혼의 병자’인 우리를 치유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당신의 ‘의’(옳음)로 우리를 옷 입혀 주심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래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진짜 갈망과 해야 할 일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착한 일을 하신 예수님을 ‘대사제 가문’으로 대변되는 ‘불의한 세력’은 붙잡아다 죽였습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에 도전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을 보였다며 득의양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그분의 삶이 옳았음을 증명하셨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의 재판을 ‘원심파기’하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이들은 죽음마저도 넘어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 궁극적 생명, 예수의 부활 생명을 선물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받은 선물입니다. 이 전에는 우리가 길 잃은 양이었지만 이제는 영혼의 참 목자요, 보호자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과의 교제 안에 있습니다(1베드 2:25). 교회라는 ‘양 무리’ 말입니다.

끝으로 1독서 《사도행전》을 읽는 동안 여러분들의 마음에 일어났던 질문에 답하고 싶습니다. 그 구원의 이름, 이 생명의 복음을 못 들은 이들을 위한 질문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존귀한 그 이름 예수,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못 들은 이들을 하느님은 분명 자비롭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듣고도, 이 복음을 듣고도 고집부리며 거절한다면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아니 다른 사람 말고 우리는 잘 응답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완전히 눈이 열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사람,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3편>은 그 이름 목자이신 주님, 자비의 집주인이신 주님을 고백하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에는 첫 구절이 “야훼는 나의 목자”로 시작하지만,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1절이 “다윗의(다윗에 의한) 노래”(미즈모르 레다비드, מִזְמוֹר לְדָוִד)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는 현악기를 가지고 하는 ‘시’(찬미)라는 뜻입니다. 본래 시편(테힐림, תְהִלִּים)은 그냥 ‘시’(詩)가 아니라 ‘찬미’(노래)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이 간결하고 확신에 찬 노래의 첫 구절을 암송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지, 특히 시련과 질병의 상황 속에서도 묵상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바치고 싶은 찬미(기도)도 이 시편의 마지막 ‘서원’(誓願) 구절입니다. 그만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에 ‘위안’을 가져다줍니다.

《시편》 전체의 메시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23편>은 다윗이 생의 어느 시점에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노래’(詩)에 담긴 ‘깨달음’과 ‘서원’을 볼 때, ‘정오’(正午)를 지난 인생길, 즉 인생의 풍파를 지나온 ‘후반기’라고 보는 것이 무난합니다. 노래(詩)의 배경은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고, 찬미의 대상인 주님에 대한 은유도 바뀝니다. 이렇게 ‘이동’(밖에서의 움직임)에서 ‘주님의 집 안’에서의 잔치와 정주(定住)로 옮겨지고 있기에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주님을 ‘그 이름 목자’라고 은유하는 전반부(1-4절)와 주님을 ‘환대하는 집주인’으로 은유하며 영원히 그 집에 살기를 서원하는 후반부(5-6절)입니다.

어느덧 다윗은 생의 후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운은 예전 같지 않으나 내면에는 ‘지혜’가 영글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인생을 더 높은 차원, 즉 ‘하느님의 관점’(전체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법을 터득한 ‘깨달음’이 고요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의 눈’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복’ 가운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영화처럼 회상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속에 살아온 자신의 인생, 그 크신 사랑과 자비 가운데 살아온 자신을 고요히 돌아봅니다. 그의 마음에서 맨 먼저 솟아 나온 찬미는 무엇입니까?

야훼는 나의 목자 – 시편 23:1a

이 고백과 선언에 그가 살아온 인생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압도적이고 단정적인 고백이자 선포입니다.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주님’ 뿐이라는 ‘감사 찬미’입니다. 참고로 ‘야훼’, 이 단어가 나오면 유다인은 ‘그 이름’ 또는 ‘주님’이라고 읽습니다.

물론 신과 사람을 ‘목자와 양’으로 은유하는 일은 다윗만의 독특한 생각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을 ‘목자’로, ‘왕’을 신으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은 ‘지상의 목자’로 여겼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느님과 왕과 지도자를 백성들의 ‘목자’로 묘사합니다(창세 창 48:15; 49:24; 시편 23:1; 74:1; 79:13; 95:7; 100:3; 전도 12:11; 이사 40:11; 44:28; 49:9-10; 63:11; 예레 23:1-4; 50:6; 에제 34:2-8,11-16, 23, 31; 미가 2:12; 7:14; 즈가 9:16; 11:15). 특히 ‘이스라엘의 참 목자’로 불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에제 34:11-16).

그러면 다윗의 고백이 갖는 ‘독특한 점’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 ‘목자’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로에’(רֹעֵה), ‘노케드’(נֹקֵד, 열왕하 3:4; 아모 1:1), 보케르(בּוֹקִר, 아모 7:14)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로에’(רֹעֵה)이고, 본문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을 놓아 기르는 일’을 히브리어로 ‘라아’(רָעָה)라고 합니다. 비유적으로는 ‘사람을 먹이는 일’도 ‘라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확장되어 ‘라아’는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적 권위’(통치권)로도 사용됩니다. 이렇게 ‘방목하다, 풀을 뜯다, 먹이다, 돌보다, 지키다, 사귀다’라는 뜻의 ‘라아’(רָעָה)라는 동사에서 ‘로에’(רֹעֵה, 목자)라는 단어가 유래합니다. 다만, 이 단어는 ‘대규모 목축업자’가 아니라 작은 무리를 치는 ‘목자’를 지칭합니다. 무리가 많지 않기에 ‘목자’는 양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 같은 친밀함’을 유지합니다. 깊은 사랑으로 열정적으로 보살핍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작은 무리의 양을 돌보던 ‘목동’(牧童) 출신입니다(사무상 16:12; 사무하 7:8). 자신이 사용하는 ‘목자’(רֹעֵה, 로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는 ‘개인적’이고, ‘친숙한’ 가족 관계를 떠올리며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찬미합니다. 이 표현, 즉 ‘나의 목자’(רעי, 로이)가 그의 고백의 독특함입니다. 자신은 ‘자상한 목자’(가깝고 살가운)에게 속한 ‘사랑받는 양’이라는 ‘자신감’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약한 양’이라는 ‘자각’입니다.

사실, 양은 별로 ‘똑똑’하지도 않고, 겁도 많고, 느립니다. 포식자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만한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목자에게 ‘의존’합니다. 우리도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노래하기 전에, 자신을 ‘어리석고 연약한 양’이라고 먼저 온전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필요’와 자신에게 ‘최선인 일’을 가장 잘 안다고 고개를 치켜듭니다. 대단한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우리는 결코 ‘나의 목자’이신 주님만큼 알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인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신에 대해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양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이 고백이 나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나 자신이 먼저 ‘양’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양이 된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내가 아쉬울 것이 없어라(내가 부족하지 않도다) – 시편 23:1a

‘무엇’이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인지 목적어가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함축적’입니다. ‘아쉬움’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하사르’(חָסֵר)는 ‘부족’, ‘결핍’, ‘감소하다’, ‘사라지다’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내가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이고,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채워질 것이다”입니다. 살가운 목자이신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에게 공급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필요의 궁극적 해결자’이심을 깨달은 이의 고백입니다. 자신을 돌보시는 목자가 먹이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필요 이상으로 욕심내지 않겠다는 삶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나의 목자’이신 주님의 대우를 받는 그 행복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펼쳐 보입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목자’는 너무나 자상하셨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친절하게 대우하여 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살갑게 대우하여 주신 그 ‘구체적인 행동들’을 차례로 들려줍니다.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 시편 23:1b-2

‘맛있는 풀’, ‘새로운 풀’이 풍성한 푸른 풀밭에 ‘나의 목자’는 나를 풀어놓아 ‘마음껏 놀게 해’ 주십니다. 나는 거기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얻고 ‘행복하게 늘어져’ 놉니다. 만족한 상태입니다. 목을 축일 수 있는 ‘쉴만한(고요한, 잔잔한) 물가’로 ‘나의 목자’는 ‘이끌어’ 가십니다. 쉼의 상태입니다. ‘나의 목자’가 이끄시는 곳은 더럽고 썩은 물가나 물살이 사나운 위험한 물가가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어디에 내가 눕고 놀 수 있는 ‘푸른 풀밭’이 있고, 어디에 내가 ‘쉴만한(잔잔한, 고요한) 물가’가 있는지 잘 아는 성실한 목자처럼, 주님은 “아쉬울 것이 없도록” 자신의 필요를 자상하게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사실, ‘양’이 진실로 ‘알고 있어야 할 한 가지’는 ‘푸른 풀밭’이나 ‘쉴만한 물가’가 아닙니다. 주님의 양인 우리는 이 점을 똑똑히 알아들어야 합니다. 양의 ‘필요’는 목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양에게 ‘최선인 일’도 목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단지 양은 ‘목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그것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 양의 ‘필요’와 ‘최선’은 저절로 채워집니다. 목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 일이야말로 양에게 절대적입니다.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 시편 23:3a

개역 성경은 이 구절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표준새번역은 ‘새 힘을 주십니다’로 옮겼습니다. 원문대로 직역하자면, “나의 영혼을 그가 돌아오게 하신다.”입니다. 의역하면 “나의 삶을 그가 회복시켜 주신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영혼)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사실 요즘처럼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 우리는 영혼(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런 우리를 ‘나의 목자’이신 주님은 가만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지치고 피곤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친절하게 다가오시어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주십니다. ‘새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나의 영혼(생명)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나의 영혼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시고, 용기를 주시며, 삶을 다시 ‘조율’해 주십니다. 지친 이 몸을 회복시켜 주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 몸을 만져주시는 그 주님의 손길을 지금 여기서 체험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다윗은 ‘나의 목자’가 인생길을 걸어오는 동안 자신을 ‘어떤 길’로 인도하시며,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지를 노래합니다.

그 이름 목자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 시편 23:3b

주님은 나를 “언제나 곧은 길들”(의의 길들)로 인도하십니다. ‘곧은’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체데크’(צֶדֶק)는 ‘의’(올바름, 정의, 공정, rightness, righteousness)라는 뜻입니다. ‘길’(길들)로 번역한 히브리어 ‘마갈’(מַעְגָּל)은 많은 사람이 밟고 다녀서 평평해진 ‘넓은 길’(大路, דרך, 데레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00m미터 육상경기를 보신 적이 있지요? 육상선수는 다른 경주로가 아니라 자기가 배정받은 그 ‘좁은 레인’(트랙, track)으로만 달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 경주로(옮은 길, 정해진 길)가 아니라 다른 경주로로 달리면 실격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도 그가 가야만 하는 ‘정해진 길’, ‘마땅히 가야 할’ 생명과 은혜의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길’, ‘행복의 길’입니다. 그 ‘곧은 길들’(의의 길들) 안으로 가도록 ‘나의 목자’이신 주님이 다윗을 ‘자상하게’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그 ‘곧은 길’이 아니라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른 넓은 길’을 선택해서 가려고 합니다. 오늘날 그 넓은 길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철학이나 이념, 예수를 여러 구원의 길 중 하나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때로는 눈부신 과학기술이나 그것이 이루어낸 물질문명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신자 중에도 그 길에 현혹되어 따라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그 ‘넓은 길’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를 통해 ‘율법’이라는 ‘생명의 길’(행복의 길)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출애 19:1-20:19). 모세는 그들이 가도록 정해진 길, 즉 그 생명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거듭 설교했습니다(신명 5:32-3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길을 ‘벗어나’ 풍요를 자랑하는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길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번번이 예언자들을 보내어 ‘곧은 길’로 돌아오도록 일러 주셨으나 그들은 고집을 피우다 결국은 멸망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다윗을 그 ‘곧은 길들’(의의 길들) 안으로 자상하게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까? 다윗이 무엇을 잘 했거나 ‘인간적 됨됨이’가 훌륭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그 이름 목자시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이름 예수”를 선포한 1독서 《사도행전》과의 연결점을 찾습니다.

‘이름’은 한 존재의 정체성과 본질(성품)과 사명을 나타냅니다. ‘나는 곧 나다’라고 모세에게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야훼’입니다. 우주와 모든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을 있게 하시는 하느님은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을 알려주시면서 당신의 본질(성품) 또한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하느님”입니다(출애 34:6). 이런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은 그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이름에 걸맞은 자기 명예를 위하여 다윗을 ‘곧은 길들’(의의 길들)로 인도해 가십니다. 가장 선하고, 가장 사랑 크신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존귀한 이름을 위하여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를 ‘곧은 길들’(의의 길들)로 인도해 가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속성, 사명)을 신뢰해야 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이 언제나 우리를 우리가 가야만 하는 정해진 길, 즉 ‘곧은 길들’(의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어놓으신 참 생명의 길, 참 구원의 길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밖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그 이름에 걸맞게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갑자기 인생의 ‘어두운 순간’, ‘시련이 순간’을 불러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시편 23:4a

앞서 다윗은 자신의 삶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와 ‘생명의 회복’과 ‘곧은 길들’로 인도함을 받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나의 목자’이신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여기서는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 아주 캄캄한 골짜기, 깊은 계곡)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나의 목자’이신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는 그가 통과해 온 시련의 날들에 대한 회상입니다. 그는 숨김없이 자신이 지나온 삶의 진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을 피해 다니며 오래도록 고난의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유다 광야로 도망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시기는 분명히 그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 속에 있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어디 다윗뿐이겠습니까? 우리도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을 항상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과 쉼의 상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밝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어둡고 낮은 골짜기’를 지나기도 합니다. 쓰라린 패배와 낙심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하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인생은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살고 있다”라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도 노래한 바 있습니다(루가 1:79). 그러나 다윗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 시편 23:4a

그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는 푸른 풀밭이나 쉴만한 물가처럼 우리의 최종 목적지나 집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도 목자이신 주님이 이점을 가장 잘 아십니다. ‘즈가리야’가 노래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 ‘시련의 시기’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루가 1:79).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어리석고 무능한 나’를 결코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의 목자’이신 주님은 삶의 어두운 순간들조차도 나와 ‘동행’하십니다. 이것이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헤쳐나온 다윗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한 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악’(惡)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원문에는 ‘악’(惡)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라’(רַע)가 쓰였는데 공동번역 성경은 이 단어를 생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을’ 무서워(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 쓰라린 패배와 낙심과 시련의 시기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동행’하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착한 목자이신 주님,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서는 그 그림자의 실체인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믿음, 즉 부활하시어 동행하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깨어있으면 어떤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로 걸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악’(惡)을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사실, ‘악’에 대해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경우든 ‘악’은 생명 지향적이지 않고, 파괴적이며,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 특히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사탄의 전략’(덫)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도, ‘죽음’도 그 무엇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에게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동행을 의식하고 신뢰하는 이에게 ‘악’도, ‘죽음의 그림자’도 그 실체인 ‘죽음’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나의 목자’이신 주님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에 있는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계십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 시편 23:4b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기’나 ‘돌팔매’ 같은 공격용 무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사무상 17:40). ‘웅덩이’에 빠져 울고 있는 ‘양’을 건져내고, 양들을 통제하고 지시하기 위해 긴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포식자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했습니다(사무상 17:34-36).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막대기’와 ‘지팡이’는 양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였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다윗은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도 양인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하신다 믿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막대기’와 ‘지팡이’의 효력을 여러 차례 체험한 바 있습니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때 온 이스라엘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도 그 골짜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막대기를 사용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무기가 다윗의 돌팔매였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다윗’ 자신이 사랑하는 양 떼인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주님이 사용하신 ‘막대기’였습니다.

또 ‘나의 목자’이신 주님은 ‘웅덩이’(삶의 어두운 순간)에 빠져 울부짖던 다윗을 건져내기 위해 ‘지팡이’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목숨을 쫓는 사울의 추격과 아들의 반역으로부터 살아남은 일 등은 울부짖던 자신을 ‘나의 목자’이신 주님께서 ‘지팡이’를 사용하시어 건져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여러 차례 목자이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의 효력, 즉 그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체험했기에 앞으로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 원수인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악에서 건지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그 ‘막대기와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경’이 그 도구라고 믿습니다. ‘성경 말씀’은 사탄의 공격과 이기적인 시대의 풍조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는 빛입니다. 광야의 주님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막대기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인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합니다(2디모 3:16).

그러니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마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와 동행하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상기하십시오. ‘성경’을 가까이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상기시키며, 혼란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막대기와 지팡이’가 됩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말씀 안에서 ‘새 힘’과 ‘위로’를 얻습니다. 여기까지가 목자와 양의 은유를 통한 다윗의 찬미였습니다. 이제 밖에서 안으로의 이동인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 시편 23:5

바로 앞의 암울한 장면이 극적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다윗은 주님을 ‘환대하는 집주인’으로,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환대를 받는 ‘존귀한 손님’으로 묘사합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전반부의 서두(1-3절)를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통해 다윗이 ‘존귀한 손님’으로 대우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까? 바닥에서 먹는 일상의 식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바닥에서 먹는 일이 일상이었기에 ‘상을 차리는 일’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상을 차린다’라는 것은 ‘접시’가 놓인 식탁에서의 ‘공식적인 잔치’를 의미합니다. 마치 왕을 위해 차린 식탁처럼 격식있는 잔치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나의 원수들 보라는 듯 그렇게 해 주십니다.

우리 전통도 그런 면이 있지만, 고대 근동에서 ‘화친’을 맺을 때는 식사라는 방식을 취합니다. 밥을 같이 먹으면 원수의 관계가 아니라 화해의 관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주님께서는 화해의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힘으로 화해할 수 없는 원수들과 화목할 수 있도록 직접 내 앞에서 밥상을 차려주시는 중입니다.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그 환대의 주인은 내 머리에 기름이 스며들도록 듬뿍 발라주십니다. ‘바르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다쉔’(דָּשֵׁן)은 ‘살찌다’, ‘자라다’의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얻듯이, 기름을 발라주심으로 ‘새 힘을 얻게 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환대의 주인은 ‘나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주시어 여러 사람 앞에서 나를 존귀한 손님으로 높여주십니다. 주인으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는 다윗은 탄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 시편 23:6a

다윗은 지금 감탄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번역에서는 그 단어(아크, אַךְ)가 빠졌습니다. ‘은총’과 ‘복’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토브’와 ‘헤세드’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처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토브’(טוֹב)는 최고의 아름다운 선(가장 좋은 것)을, ‘헤세드’(חֵסֵד)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는 ‘극치의 사랑’(차고 넘치는 사랑)을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사랑입니다. 개역 성경은 각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목가적인 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그 뒤에 갖다 붙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지나치게 의역 했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단어는 ‘추격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라다프’(רָדַף)입니다. 군사용어입니다. 바로 이 단어가 이 시의 극치입니다. ‘토브’와 ‘헤세드’를 자신의 속성으로 하시는 하느님께서 나를 끝까지 ‘추격’하십니다.

그런데 어느 때까지 나를 추격해 오십니까? ‘한평생’입니다. 본문대로 직역하면 “나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입니다. ‘토브’와 ‘헤세드’를 자신의 속성으로 하시는 하느님이 나의 생명이 붙어있는 날 동안 나를 날마다 추격해 옵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은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아멘’이라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제 서원 기도를 바치며 이 확신에 찬 노래를 마칩니다. 여러분과 저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시편 23:6b

다윗은 자신을 환대하는 그 자비로운 주인의 집을 떠나야 하는 ‘손님’이 아니라 집의 ‘일원’으로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겠다고 자신의 미래를 노래합니다. 단지 ‘일시적인 위로’를 줄 뿐인 ‘푸른 풀밭’이나 ‘물가’를 사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나 나에게 주님의 집이 되는 삶, 온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사모했습니다. 우리의 성찬례가 다윗의 노래가 터져 나온 그런 환대의 성취이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는 무언이 사랑의 삶인지, 어떻게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분명 ‘아멘’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권면이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 1요한 3:16b

차라리 이 구절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를 고민스럽게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축복받는다고 해서 교회를 다녔는데, 좀 다니다 보니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니 고민스럽습니다.

우리가 충격받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사도 요한은 다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합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진 ‘재물’로라도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말과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권면은 지난주에 언급한 헛된 구원 교리를 전하는 적대자들(1요한 2:18-19), 즉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을 향한 반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육신적 삶의 요구와 유혹들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양태에 도달했기에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1요한 2:9-11; 3:1-18; 4:7-21). 특히 ‘형제(자매) 사랑의 계명’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진 ‘재물’로라도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습니까? 말과 혀 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이 권면이 우리를 ‘더’ 고민스럽게 합니다.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은 ‘박해 시절 순교한 성인들’에게나 해당했던 ‘권면’이라면서 지금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형제(자매)를 돕는 일은 어떻습니까? 이 일은 특정 시기만이 아니라 어느 시절에나 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려면 당장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이 일도 쉽지 않습니다. 성찰해 보면, 가지고 있는 ‘돈’(재물)도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들어간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재물’로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돕는 일이나 그 의미로는 ‘자신을 내놓는다’라는 차원에서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어떤 식의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이든지 그 일은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으로써 우리는 허망한 지식인 ‘영지주의’(1요한 2:18-19; 4:2-3)에 물든 이들이 아니라 ‘진리’에 속해 있음을 증명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증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양 무리’ 속에 살고 있음을 ‘형제(자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삶과 죽음의 권세를 가지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을 더 깊이 묵상하라고 배정된 독서입니다.

착한 목자와 삯꾼이 대조됩니다.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평소의 행동이기도 하지만 특히 양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삯꾼은 평소에도 양들을 잘 돌보지 않습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몸만 생각합니다. 반면에 착한 목자는 평소에도 양들과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양들에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양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양들이 살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바칩니다.

삯꾼은 누구입니까?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 같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들이 고통당하는 일을 피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백성들을 이용하고 착취했습니다. 착한 목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의 지도자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위하여 ‘자발적’으로(아버지의 명령에 순동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18절)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죄에 빠진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교회)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교회와 함께 계시며 목자의 직분을 완성해 가십니다.

이렇게 복음 이야기는 요한의 공동체가 예수님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로 선포했음을 들려줍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떤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명백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찬양받으실 하느님이시자, 오늘날도 모든 교회 지도력의 모델입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복음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1독서 《사도행전》이 태생 장애인을 고쳐준 후에 이어지는 설교인 것처럼, 복음 이야기도 태생 장애인을 고쳐준 후에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 요한 10:11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아마 자신을 ‘사목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전부 가슴이 철렁할 말씀입니다. 착한 목자의 기준은 단 한 가지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리로부터 양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동’입니다. 양들을 책임지지 않고 자기 목숨부터 챙긴다거나 양들을 통해 이득을 누리려 한다면 그는 ‘삯꾼’인 동시에 ‘악한 목자’일 뿐입니다. 사람은 속을지 몰라도 하느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목자’로 존중한다면 제가 ‘삯꾼’처럼 ‘직업’이 아니라 ‘착한 목자’처럼 ‘사명’에 충실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예수님의 양이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 요한 10:14

예수님의 양들인지 아닌지의 기준도 단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라는 사실입니다. 가족처럼 친밀한 정서적 유대감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시는 것처럼,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관계입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도 예수님을 통해 양들과 친밀한 관계입니다. 과연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압니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안다는 것이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고대 근동에서 목자들은 집을 나서면 며칠씩 양떼를 몰고 다녔습니다. 식량으로 빵, 말린 무화과, 치즈 같은 것을 준비했습니다. 대부분은 항상 혼자였기에 외로웠고, 피리나 단순한 악기를 만들어 다니며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항상 양들과 같이 지내고 돌보면서 맹수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양들을 골짜기 아래로 데려가거나 비바람을 막아 줄 동굴을 찾아 밤을 지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입구를 지키는 ‘문’ 역할도 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근처 마을로 양떼를 몰고 내려와 ‘공동 우리’에 들여보낸 다음, 여관에 들러 먹을 것을 보충하거나, 밤을 쉬었습니다. 다음날 일찍 목자가 오면, 문지기는 지난밤에 양을 맡긴 사람인지 확인하고 문을 열어줍니다. 몇 마리를 데려왔는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를 알고 자기 목자만 좇아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거나 지팡이로 땅을 치면서 목소리를 내면 양들은 그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듣고 밖으로 나와 뒤따라갔습니다. 자기 양인데 따라 나오지 않으면 목자는 다시 가서 소리를 냈습니다. 양들도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아는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입니다. 한마디로 양들의 생명은 자신을 “찾아온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데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데려가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자기 백성이 아닌 이들에게는 찾아가시지도 않으며,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이들은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정하신 때에 그 계획을 완벽히 이루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이사 43:1-7, 요한 6:37).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십시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 요한 10:14

우리는 과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까? 아는 양들인지 아닌지는 딱 하나를 통해 증명됩니다. ‘행동’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는 양이 아닙니다. 아는 이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오늘 낭독한 <전례독서>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아는 이는 1독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처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 이름’을 증언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이들이 의지하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라 ‘그 이름’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노래한 <시편 23편>처럼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봅니다. 더 갖지 못해서 혈안인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도 “아쉬울 것 없어라”고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비우며 살아갑니다. 그 이름의 명예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아쉽지 않은, 주님이 ‘생의 전부’가 되어주시는 ‘참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필립 1:21).

예수님을 착한 목자로 아는 이는 《요한의 첫째 편지》처럼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으며 살아갑니다.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형제(자매)를 도우며 살아갑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아쉬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으며”, “걱정할 것이 없는” 은총과 복을 누립니다. 공동체와 형제(자매)를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내주고도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복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찬미합니다. 재물로는 살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이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처럼 이미 구원 얻은 자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이구나”라고 인정할 만합니까? 착한 목자이신 ‘예수의 이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까?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이 아니라 아쉬운 것이 너무나 많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욕심은 얼마나 내려놓았습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낍니까? 아니 얼마나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까? 내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아쉬움(부족함)은 ‘갈증’입니까? ‘갈망’입니까? 갈증은 말 그대로 육체적(물질적)이고, 정서적이며, 일회적입니다. 반면에 갈망은 단지 정서적인 것 같지만,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영적 씨앗’과도 같습니다. 다른 말로 참된 ‘희망의 씨앗’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사슴’이 아니라 ‘양들’을 이끌고 다니십니다. 사슴이 갈증이라면 갈망은 양들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는 갈증이 많습니까? 갈망이 많습니까?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갈증인지, 아니면 갈망인지부터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이것을 식별하고, 또 그 갈망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참된 희망으로 인도함을 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도 신자 중에는 그저 갈증이나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입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을 통해 그 갈증을 풀 수 있다면, 더는 예수님을 목자로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교우 여러분, 인생에는 예수님을 만나야 풀리는 ‘갈망’이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이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잘 압니다. 어디에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있는지 잘 압니다. 언제 이동 해야 하고, 어디에 피난처가 있는지 잘 압니다. 식별입니다. 만일 양들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러 들거나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려고 하면 지팡이로 말립니다. 이리가 양들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막대기를 던지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리를 물리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생겨난 그 많은 갈망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를 식별토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갈망들이 ‘참된 희망’으로 향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참된 희망’이 아닌 곳에 머물러 있을 때 소리쳐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단박에 ‘참된 희망’으로 가는 경우가 드물기에 예수님은 일단 ‘갈망들’이라는 일종의 ‘떡밥’을 사용하십니다. 착한 목자를 만나서 그 떡밥이라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참된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 참된 희망을 간직한 이는 비로소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는 자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얼마 전, 주차장 옆에 새로 화단을 만들고 여러 꽃들을 심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꽃 따라 밝아집니다. 모두가 성당 분위기를 예쁘게 하려는 ‘갈망’에서 나온 수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갈망의 최종 종착지가 단지 거기였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의 “내면을 아름답게 돌보는 일”로 인도하고 싶어서 주님이 ‘화단 가꾸기’라는 떡밥으로 부르셨던 게지요. 이 일을 시도하지 않고 단지 거기서 멈춘다면, 화단을 만들고 형형색색의 꽃들을 심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 같은 ‘직무 사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가장 앞에서 본받아야 할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비상시에는 ‘양 무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목숨을 바칠 자세를 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직무 사제’는 신자들이 ‘갈증’과 ‘갈망’을 ‘식별’하는 일을 돕는 ‘교사’입니다. 그 식별을 위해 ‘성서’를 가르치고, ‘기도’로 초대하며, 성찬례를 인도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갈망들이 ‘참된 희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식별하고, 이끌어주기 위해 파송된 이들입니다. 이것이 <성공회 기도서>에 적시되어 있는 ‘관할사제의 직무’입니다. 여러분이 이 연약한 사제를 위해 날마다 기도해 주셔야 할 이유입니다.

아무쪼록 ‘유일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양 무리에 속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사랑합시다. 한평생 동행하시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그 무엇도 아쉬울 것이 없는 참 생명의 교제를 영원토록 나누어 갑시다. 삶과 죽음의 권세를 가지신 착한 목자이신 주님,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시는 ‘의의 길’이신 예수, 우리를 구원하신 그 ‘유일한 이름’을 찬미합시다.

부디 주님을 본받아 서로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우리를 통해 아직 주님을 모르는 가족과 이웃이 주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도 우리와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서” 영원히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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