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8. 부활3주일

  • by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실 때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오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3:12-20
  • 시편 – 4
  • 2독서 – 1요한 3:1-7
  • 복음서 – 루가 24:36-48

부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착한 행실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입니다.

내일은 4.19 혁명 61주년 기념일입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일어났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합시다. 그 숭고한 정신에 우리의 현대사는 빚지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도 현실은 어두웠지만, 자유와 민주를 위해 떨쳐 일어났던 ‘기억’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 기억에 대한 눈만은 감을 수 없었던 이들이 오늘을 있게 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우리가 존재하기 전보다 나은 시간의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날의 희생들이 오늘의 우리를 통해 살아있게 해야 할 ‘거룩한 책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도 죄와 죽음과 사탄의 묶임으로부터 자유와 해방과 용서를 가져온 사건입니다. 창조 세계에 새롭게 일어난 하느님의 시간, 이미 일어난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살라는 초대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살라’는 초대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롭게 시작된 창조의 시간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며,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에 용기 있게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지나온 어둠의 시간은 회개를 통해 마감하고, 오늘 이후를 하느님의 시간으로 용기 있게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 실천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 믿음의 사람임을 ‘증언’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선포)입니다. 동족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당하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설교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약속된 메시아라는 증거입니다. 그 이름을 믿고 회개하면 모든 죄가 용서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도 베드로의 반복적 ‘연설’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는 ‘연설’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본문은 ‘오순절 설교’(선포) 이후 두 번째 연설에 해당하는 베드로의 ‘선포’(설교)입니다. 그 선포에는 ‘복음의 핵심’(복음의 의미)이 명확히 담겨 있습니다.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맞추어 두 사도, 즉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그들은 ‘장애인’으로 태어난 한 사람을 만납니다(사도 3:1-8). 평생토록 걸어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을 ‘치유’해 줍니다. 치유된 사람은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극적인 치유 소문을 듣고 놀란 사람들이 두 사도가 있던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옵니다.

베드로(물론 요한을 포함합니다)는 그 상황을 지혜롭게 이용합니다. ‘기적’에 압도된 그들에게 하느님의 섭리인 ‘부활의 복음’을 들려줄 기회로 삼습니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치던 ‘겁쟁이’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힘’을 가득히 입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 군중들이 관심해야 할 일은 다른 사람의 치유 기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구원’입니다. ‘회개’와 ‘믿음’으로의 초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일’입니다. ‘구원’은 ‘눈으로 보는 기적’이 아니라 그 이름, 즉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일’에서 언제나 생겨나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베드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정확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특권층들, 그들의 선동에 놀아난 이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강력히 ‘고발’합니다.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강조 용법입니다) ‘하느님의 종’을 붙잡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고발합니다.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을 배척했다고 고발합니다. ‘하느님의 종’과 ‘거룩하고 죄 없으신 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으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어서 더 놀라운 고발을 합니다.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생명의 근원이신 분, 생명의 창조자)을 ‘죽였다’고 고발합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그분이 인간이 아니라 ‘신성한 분’, 즉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종,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실’을 연설하고 있지만 절대로 쉽지 않은 직설적인 선포입니다.

그 강력한 고발 뒤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부활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실 ‘루가’에게는 ‘십자가’보다도 ‘부활’이 더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으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신 ‘예수’를 증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선포는 하느님께서 예수가 옳았음을 부활로써 입증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금요일에 있었던 권력자들의 ‘불의한 재판’을 하느님께서 부활로써 ‘원심파기’ 했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그 부활의 ‘목격자’라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더욱이 군중들이 관심하는 그 치유 기적도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함이 일으킨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자기 공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하신 일이며, ‘그의 이름에 모든 것을 건 믿음’, 즉 ‘예수님을 통해 나오는 믿음’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명백히 ‘복음’을 증언합니다.

그의 선포(설교)는 온통 예수님, 즉 그 십자가와 부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의 사람’으로 그는 어느새 변화해 있었습니다. 제게는 이 일, 그의 ‘담대한 복음 선포’와 ‘겸손한 사람으로의 변화’가 예수 이름으로 행한 치유 기적보다 더 놀랍기만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 주신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깨우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척을 받아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고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사 52:13-53:12)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선포해 오신 ‘성서 말씀’의 ‘성취’라는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제자들도 포함하여) 이 ‘성서 말씀’에 ‘무지’(無知)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섭리, 즉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무지’(無知)했습니다. 무지하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고난받는 메시아’는 낯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척’하고 ‘죽인’ 예수가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메시아, 하느님의 종)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거룩하고 죄 없으신 분이자, 생명을 주관(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하시는 분을 중상과 모략으로 죽였습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성서’에 기록된 예언 말씀의 성취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지’(無知)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지’(無知)했기에 ‘지식의 나무 열매’(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우리가 인생에서 저지르는 수많은 죄악은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누구나 지금 가는 길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온전히 안다면 돌아섭니다. 오늘 시편에서 노래했듯이 다윗도 이점을 교훈합니다(시편 4:2).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뭘 좀 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하느님께 여쭙지 않습니다. 자기 경험과 지혜와 인맥으로 인생길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한껏 ‘교만’을 부리다가 결국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들의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저지른 죄악이 ‘하느님의 섭리’(계획)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꿈쟁이 요셉의 경우처럼(창세 50:20), 구원의 하느님은 인간이 무지하기에 저지른 죄악마저도 ‘선’(善)으로 바꾸시는 분(로마 8:28)이라고 베드로는 선포하는 중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선포합니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무지’(無知)했기에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롭게 창조하신 현실’에 ‘마음을 열라’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2고린 5:17)이 될 ‘회개의 기회’가 아직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단지 인간 중심적인 ‘대속’만이 아닙니다.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행동’(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사도 베드로가 그들의 죄악에 대해 고발한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을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죄의 용서’와 ‘위로의 때’를 맞이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특히 ‘위로의 때’는 ‘주님이 재림’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완전한 회복의 날’(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때, 사도 3:21)에 대한 약속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는 이 같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성찰합니까? 오늘날 신자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의 회개’를 선포하는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용어와 이야기들은 세련되지 않고, 오늘의 과학 세상에 맞지 않으며, 어리석어 보이고, 걸림돌(장애물)이며,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1고린 1:18-25). 그러면서 ‘산상수훈’처럼 ‘고상하게’ 들리는 가르침에 주목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십자가와 부활, 회개는 비위에 거슬리고, 무능력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입니까?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일’(사도 5:28-32,40-42)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세련되지 못한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증언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죄의 회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피조 세계 전체와 연결된 복음의 핵심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께서도 ‘세련되지 못한’ 방식인 ‘회개’를 선포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자신에게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그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세련되지 못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라는 ‘유혹’을 이기며 꿋꿋이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습니다.

더욱이 그 길을 온전히 다 걷고 난 분이 선포하신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듣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였습니다(루가 24:47). 이렇게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선포 역시 우리 가운데 임한 하느님 나라 앞에서의 ‘회개’였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에 따르면 복음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후예가 될 것인지 아니면, 듣기 좋은 소리를 외치는 다른 이들의 종이 될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어떤 증인이 될 것입니까? 초대교회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라는 ‘복음’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인간의 ‘회개’야말로 자연을 포함하여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들어가는 ‘문’(門)입니다. 지금 여기 그러나 아직 아닌,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꼭 알아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선포처럼, 인생길에는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반드시 보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깨우치면 ‘영원한 생명’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소멸입니다. 일상의 ‘기도와 성경 묵상’은 이 진리에 ‘무지’(無知)한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희미한 앎에서 실천이 있는 명확한 앎으로, 즉 ‘어둠의 자리’에서 ‘빛의 자리’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순간들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고, 얼마나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까?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교회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무지’(無知)했기에 ‘하느님의 섭리’(진리)를 거스른 우리의 죄악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거든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십시오. 피난처이신 ‘예수를 믿음’으로 자연을 포함하여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4편>은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바치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평안과 피난처를 찾은 다윗의 기쁨의 노래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 즉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시고 주관하신다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은 어떤 곤경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고, 은총의 하느님을 믿고 평안히 쉴 수 있다는 절대적 감사를 노래합니다.

전통적으로 <4편>은 ‘저녁 기도’, 즉 성전에서 봉헌되던 저녁 제사 때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1절)은 응답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 단락(2-5절)은 자신의 대적자들을 향한 충고(회개 요청과 하느님을 의지하라)입니다. 마지막 단락(6-8절)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기쁨의 노래입니다. 배정된 이유는 1독서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십자가 고통(곤경)을 참아내시며,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간직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머리에서 다윗은 자신이 겪는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무죄함’을 밝히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곤경’ 속에서 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1절). ‘큰 소리’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열정적으로 매달립니다. 들어주시면 좋고, 안 들어주셔도 어쩔 수 없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향해 ‘의의 얼굴’(밝은 얼굴)로 바라봐주시라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기도의 열정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한때 고난을 겪던 다윗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이미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 체험은 그가 지금 겪는 곤경(그 곤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속에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갖고 ‘기도’를 바칠 수 있게 한 근거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은총의 과거를 ‘오늘과 미래의 구원’을 위한 근거(하느님의 섭리)로 사용할(알아차릴)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단락에서 다윗은 자신을 ‘비방’(誹謗)하는 원수들을 향해 외칩니다. ‘헛일’을 좇고 ‘거짓’을 찾아 헤매는 ‘무지’(無知)한 삶을 그만두라 촉구합니다(2절). 예수님도 다윗이 겪었던 그런 악의에 찬 비방과 거짓말을 당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겪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 사역을 통해 드러내신 하느님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처럼, 어떤 비방(誹謗)이나 고난도 하느님을 향한 다윗의 ‘절대적 경외와 믿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이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하느님께서 구별한 존재임을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3절). 하느님께서 어떤 이를 사랑하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자들에게 충고합니다(4절a). 그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다 하여도 그들은 한낱 인간임을 상기시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신앙’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촉구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그 끝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행위의 끝이 멸망임을 진정으로 ‘알고 있으면’ 그만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다음 다윗은 어떤 ‘수행’이 죄를 짓지 않는 경건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권유합니다(4절b). ‘고요의 시간’, ‘침묵의 시간’, ‘명상의 시간’입니다. 오롯이 하느님과의 고독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 ‘고요의 시간’이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자기 성찰’입니다. ‘침묵’은 우리 존재의 중심인 하느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무지’(無知) 때문에 발생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성찰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그 고요의 시간이 주는 힘이 나를 ‘예배의 자리’로 데려갑니다(5절). 예배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포함하여 하느님과 ‘믿음의 관계’를, ‘기쁨과 감사’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해 오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눈’을 뜹니다.

모든 이들이 다윗의 이 권유에 귀를 기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세 번째 단락의 시작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윗의 권유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6절a).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무지’(無知)하기에 냉소적입니다. 그 믿음이 없기에 고난을 겪으면 “하느님, 나에게 왜 이러십니까?”라면서 불신과 분노와 원망을 토로합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 너무나 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깊은 ‘회의’(懷疑)를 표출합니다. 고난에 압도당하여 결코 희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난 속에 있지만, 그들처럼 자신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순결’하게 지켜갑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느님의 섭리에 무지한 이들, 불신앙 하는 이들, 고난에 압도당한 가련한 이들을 책망하기보다 ‘축복기도’로 다가갑니다(6절b). ‘공감의 능력’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고난 속에 있던 자신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직접 나타나셨던 것처럼, 그 ‘밝으신 얼굴’을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그들과 자신에게) 비추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리되면 그들도 ‘무지’(無知)로 인한 ‘회의’(懷疑)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향한 ‘절대적 경외와 믿음’의 자리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읽어버린 삶에서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4편>이 ‘부활 3주일’에 선정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4편> 후반부의 ‘현실화’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지’(無知)로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빈무덤을 확인한 여인들과 예수님의 발현을 전하는 엠마오 제자들의 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헛소리와 헛것을 본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누가 좋은 일을 보여줄까?”라며 절망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밝으신 얼굴”을 보여주시고, ‘성서’를 풀어 주시자 그들은 차츰 ‘의심’에서 ‘확신’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삶을 회복해 갑니다. ‘무지’가 ‘앎’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참 기쁨’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행복’입니다(7절). ‘물질의 소유’(곡식과 포도주)에 얽매여 살던 나로부터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탐욕에 물든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물질’의 풍요에서 ‘참 기쁨’을 찾지 않습니다. 사실, 인생의 ‘참 기쁨’은 자기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고등종교는 기쁨의 근거를 ‘자기 내면’에서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물질의 풍요’를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毒)이라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 진실을 깨우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물질의 넉넉함이 우리 ‘영혼의 보장’이 되지 못함에도(루가 12:15,20) 어찌 그리 구별된 사람답게 살지 않는 것일까요? 물론, 그리스도교는 그 기쁨의 근거가 자신의 내면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활동하시는 ‘성령’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無知)해서 여전히 자기 바깥과 물질의 풍요에서 기쁨을 찾아 헤맵니다.

끝으로 다윗은 여전히 자신이 고난 속에 있지만, 참 기쁨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평안히’ 잠자리에 듭니다(8절). 그를 향한 원수들의 비방과 거짓말, 고난마저도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섭리’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을 ‘안전하게’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절대적 경외와 믿음’ 때문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는 이가 받는 축복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와 믿음’은 우리 안에 ‘참 기쁨’과 ‘안식’(평안, 평화)을 선물합니다. 그 기쁨과 안식(평안, 평화)을 가지고 우리는 이웃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들이 ‘무지’(無知)에서 벗어나도록, 그들도 하느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는 ‘안내자’(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는 크신 사랑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를 닮아 순결한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부활 7주일까지 2독서으로 배정됩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1요한 1:1-2), 다른 구원 교리를 전하는 적대자들로부터(1요한 2:18-19) 신앙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적대자들은 ‘무지’(無知)보다 더 나쁜 허망한 지식, 즉 ‘영지주의’에 물든 이들입니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다소 복잡한 당대 정신 사조들의 얽힘이기에 필요한 부분만 간단히 언급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은 선(善)하고, ‘물질과 육신’은 악하다는 철저한 ‘영육이원론’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육신 속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이 유배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천상의 존재’라는 ‘특별한 지식’(靈知, gnosis)을 영혼이 직관할 때 가능합니다.

이렇게 인간이 ‘지식’(앎)을 통해 자신의 영적 본성을 찾아 육체적 요소를 벗고 영적인 존재로서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구원’이라 보았습니다. 일종의 ‘비밀 지식 과대주의’입니다. 육신을 악한 것으로 보는 그들 눈에 ‘하느님의 아들’이신(신성)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육체성, 인간성)으로 오셨다는 ‘성육신’과 ‘몸의 부활’은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1요한 4:2-3).

그렇다면 <복음서>에서 증언하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어떤 분으로 보았을까요? 단지 육체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인 ‘환영’(phantom)이라는 입장으로 발전합니다. 신학에서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은 전부 ‘환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시어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을 그들은 ‘그리스도’로 보지 않았습니다(1요한 2:22; 3:5,16,23; 4:9,14; 5:1,5-6,11-12,20). ‘인간의 본질이 하느님과 동등하다’라는 ‘비밀스러운 영적 지식’을 전해 주러 온 분으로 보았습니다. 이 경우 ‘그리스도’는 단지 ‘천사’ 정도의 ‘영지(靈知, gnosis)의 전달자’이지 하느님과 똑같은 분일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이처럼 ‘영지주의’는 신약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 ‘몸’의 부활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어째서 신약성경이 그토록 ‘성육신’과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지, 그리고 부활절기 때마다 교회가 ‘몸을 입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전례독서를 선택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대부분의 ‘이단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리스도로부터 그 ‘천상적 지식을 비밀스럽게 전달받아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육신적인 삶의 요구와 유혹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양태에 도달했기에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했습니다(1요한 2:9-11; 3:1-18; 4:7-21). 눈을 떠서 보면,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지상의 모든 ‘의무’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그들의 ‘영지’(靈知)에 대한 반박입니다. 먼저,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회상해 보라고 권유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덕택에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의 목표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를 온전케 하는 참된 ‘회복의 날’(1독서의 위로의 때, 즉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올 것이니 ‘방종한 생활’을 살지 말고, 죄로부터 떠난 ‘순결’한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고, 죄를 없애시려고 성육신하시어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분입니다(1요한 2:2; 3:5, 16; 4:10; 5:6).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알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차 나타날 ‘심판의 빛’을 명심하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순결하게 살라는 ‘회개의 초대’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그리스도인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복음 이야기 《루가복음》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께서 성서를 깨우쳐 주시고,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배경은 언제입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입니다. 어떤 집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리둥절했습니다(루가 24:33). 아침에는 여인들이 전해 준 소식으로, 밤에는 엠마오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전해 준 소식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제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유령’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사랑의 주님’을 유령 취급하다니! ‘무지’(無知)입니다. 하긴 영화에도 보면, 죽은 사람이 나타나면 유령이라고들 소리치긴 합니다. 사실, 제자들의 특기는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세대를 향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향한 질문입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괴로워하느냐? 어째서 그렇게 평화가 없느냐?

이 질문에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실 것입니까? 예수님과 솔직하게 대화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나무라시기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대답한다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실 것이고, 새로운 믿음의 길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놀란 그들에게 예수님은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유령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발현 사화’의 목적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아뿔싸!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놀람과 무서움, 기쁨과 의심의 감정이 뒤범벅됩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사람이 찾아왔으면, 밥 좀 줘!’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저녁 식사를 드시러 오셨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변형된 새 양태의 몸’이지만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고, 저녁 식사 때가 지났으니 당연히 음식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구운 생선 한 토막으로 저녁 식사를 하십니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양태의 몸, 즉 우리가 가진 몸 그 이상인데 과연 음식을 드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일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루가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육체성’입니다. 더 넓게는 ‘성육신’처럼 예수님의 인간 되심의 강조입니다. 부활 사건이 보여주는 그 위대한 영광(신성)에만 빠져 있지 말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인간 되심도(인성) 늘 기억하라는 경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 기자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처럼 고난받으신 이야기를 다시 이어갑니다.

예수께서는 잡숫던 일을 멈추고 수건으로 손가락을 닦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눈빛은 경계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씨익’ 웃으시며 ‘밝은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정말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눈빛을 마주친 이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회개의 눈물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따라 ‘배신’과 ‘놀람’, ‘무서움’과 ‘의심’, ‘무지’와 ‘절망’이 말갛게 씻겨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 밝은 얼굴을 보이시면 영혼은 봄볕 아래 새싹처럼 소생합니다. 스미어든 그분의 낯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부활의 주님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마음과 마음이 닿으면 울고 있어도 ‘기쁨’이 솟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무지’(無知)해서 깊은 절망에 빠진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어느새 그들은 주님을 붙들고 흐느낍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 주십니다. 그런 다음, 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당신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섭리)인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책입니다. 오래도록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려온 믿음의 기록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모든 민족이 하느님과 완전한 화해로 들어가는 기쁜 소식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도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전체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모두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섭리’의 일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야기는 ‘우리’가 포함되기 전까지는 결코 전체 이야기가 아닙니다.

놀라운 표현을 봅니다. 마음은 자신 말고 그 누구도 강제로 열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마음을 열어주셨다”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에게 ‘부활’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부활’이 믿어진다, 즉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진다는 말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열어주셨다는 뜻도 됩니다. 그만큼 우리가 크신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체 이야기에 우리를 꼭 포함하겠다는 하느님의 사랑이자, 의지입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서’가 증언하는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성서’의 증언을 깨달은 사람은 ‘하느님이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 즉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음을 열어주신 목적은 그들을 조종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절망의 자리에 찾아오시고, 때로는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것처럼,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창조해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성서’가 누구를 증언하는지를 재확인합니다. ‘성서’에 대한 이해가 왜 중요한지를 재확인합니다. ‘성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복음’, ‘하느님의 섭리’, 이것이 ‘성서의 주제’입니다.

끝으로 부활의 주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부활의 증인’, 즉 ‘복음’을 전파하라고 파송됩니다. 베드로는 그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우리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픈 말을 위해 ‘성서’를 끌어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조명’해 주시는 ‘성령의 빛’을 따라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성서’에서 다른 주제를 찾는 일도 본질에서 어긋납니다. 인문 교양으로 성서를 읽는 일은 필수이지만, 단지 그 차원으로 권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철학자 ‘니체’는 구약성서의 사건이나 인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표로 읽는 방식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철학자의 눈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닌 ‘성서’ 읽기는 헛일이고, 논쟁만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주제들을 찾기에 앞서 겸손히 듣고자 한다면 ‘성서의 진정한 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의 전례’를 봉헌하는 중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주님께서 ‘성서’를 펼치시고 ‘무지한’ 나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무지한’ 제자들을 일깨우신 것처럼, 다락방에 모인 ‘무지한’ 제자들을 일깨우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입니다. 오로지 사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일깨우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말씀 나눔을 전합니다. 사제를 사용하시어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면서 말씀 나눔을 준비합니다. 그 일에 성공해야 비로소 우리가 봉헌하는 ‘성찬의 전례’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 눈으로 주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밝은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쁨을 주시는 그 얼굴 말입니다. 배신과 놀람, 무서움과 의심, 무지와 허물을 말갛게 씻겨 주시는 그 사랑의 눈빛 말입니다. 회개하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끌어주시는 그 따뜻한 눈빛 말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무지’(無知)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더 깊은 통찰로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경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어떤 ‘죄’든지 ‘용서’받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이 완전히 ‘정복’되었음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참된 ‘회개’는 바로 이 ‘성서의 진리’를 믿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교회처럼 예수님의 최고 가치인 하느님 나라 실현에 우리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그 실천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전히 세상은 ‘평화의 인사’를 기다립니다. 많은 사람이 절망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약물과 술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돈, 권력, 명예가 참 행복이라도 되는 듯 쫓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평화도 행복도 쉼도 아닙니다.

세상은 오늘도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평화’를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의 주님’을 전해 줄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돈, 권력, 명예가 아니라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우리, ‘참된 기쁨’을 발견한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예수 안에서 삶의 의미와 평화와 행복을 발견한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꾸셨던 하느님 나라의 꿈에 동참할 우리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의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선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진실입니다. 이 진실에 눈이 뜨이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걱정하는 삶이 아니라 기도하는 삶을,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평화의 삶을,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삶을 살아갑니다. 순결하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자녀 된 삶을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어떻게 그런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이신 하느님처럼,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사랑’으로 대할 때, 그 순간 그 사람은 우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올바른 일을 실천’할 때 그런 우리를 통해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하느님의 자녀는 그렇게 삽니다. 예수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날마다 그런 실천 속에 있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