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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11. 부활 2주일

본기도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시어 평화를 전해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기운을 부어주시어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4:32-35
  • 시편 – 133
  • 2독서 – 1요한 1:1-2:2
  • 복음서 – 요한 20:19-31

부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교회, 사랑의 사귐으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어느덧 4월 중순입니다. 금주간 세월호 참사 7주기를 맞습니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닷속에 스러졌지만 새 시대의 문을 열었던 희생들을 기억합시다. 하느님도 한때는 불의한 세력들로 인해 아들을 잃고 우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이들답게 아물지 않은 고난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부모형제들의 원통함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참사의 진실을 찾아 호소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그날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부활의 주님이 희생자들과 유가족, 고통 속에 살아가는 생존자와 모든 우는 이들을 보듬어 안아 주시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독서 《사도행전》은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담대히 증언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그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복음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와의 사귐’ 속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 ‘사귐’ 속으로 들어온 신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사도들이 전하는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은 이들’이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었을 뿐인데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귐’으로 하나가 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특히 이전까지 붙잡혀 살아온 ‘본능적 욕망’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본능적 욕망’이란 무엇입니까? 이기심에 바탕을 둔 물질에 대한 ‘탐욕’과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신도들은 성령이 역사하시자 ‘이타적 삶’인 ‘나눔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유의 자리’에 내어놓았습니다. ‘물질의 소유권’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물질보다 소중히 여기는 삶의 자리로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의 친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축복을 받는 공동체였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을 통해 탄생한 ‘사랑의 몸’(교회)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한 이들만이 살아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해 탄생한 교회는 ‘한마음 한뜻’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귐’이 꽃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와 목표와 방향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물질로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가 한 형제자매임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오늘날, 성공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모본’(模本)으로 삼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우리는 ‘성찬례’를 통해 ‘생명의 주인’이신 부활하신 주님을 먹고 마시는 ‘사랑의 사귐’을 갖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사람’인지, 그 ‘사귐’이 잘 되고 있는지는 우리가 본능적 삶의 태도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를 통해 증명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까? 이기심에 바탕을 둔 ‘탐욕’과 ‘소유의 덫’에서 온전히 해방되었습니까?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살고 있습니까? 사람을 물질보다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공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것을 ‘나누는 사람’으로 점점 변화되고 성장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화려한 말솜씨’가 아니라 ‘사랑의 행동’으로 자신이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임을,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있는 ‘거룩한 자녀’임을 증명할 뿐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3>은 형제(자매)들이 함께 살아가는 일(친교)이 선하고 즐겁다고 찬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미 시인이 찬미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형제가 한데 모여 사는 일이 관습이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연합적 경영을 통해 조상의 세습 재산을 보존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족(혈연)의 확고한 결속력과 연합이 국가 공동체의 힘의 근간이자 근본 질서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물론 아담의 아들들인 카인과 아벨, 노아의 아들들인 셈과 함과 야벳, 이삭의 아들들인 에사오와 야곱, 야곱의 열 두 아들의 경우처럼 형제가 한데 어울려 산다는 일은 어렵습니다. 열거한 가족은 하나같이 시기와 질투, 음모와 속임수, 반목과 불화를 겪었습니다. 심지어 부자지간도 별로였습니다.

우리의 가족관계는 어떻습니까? 향기 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성향이 다르고, 이기적이며, 성인이라도 미성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한 부모에게서 나온 형제자매이면서도 갈등과 다툼으로 서로 등지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정말이지 가족이나 공동체 속에서 관계 맺기가 가장 어려운 일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개체성’ 대 ‘공동체성’은 인류 모두의 숙제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울려 살기 위해 우리는 지속해서 성숙해야 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를 훈련하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합니다.

시인도 자기 마음에 ‘이상적인 가족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이 한데 모여 화목’하게 사는 모습입니다. 시인도 ‘형제자매들이 함께 살아가는 일’(친교)이 어렵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일이 참으로 귀하다는 진실을, 어떤 영적 가치를 가지는지를 ‘그림 언어’를 통해 교훈합니다. ‘수염’, ‘기름’, ‘이슬’이라는 아름다운 ‘그림 언어’로 ‘가족(형제)의 화목’을 찬미합니다.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산에서 시온 산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 시편 133:2-3상

‘아론’은 모세의 형이자 제사장의 선조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동양 전통에서 길게 흘러내린 ‘수염’은 남자다운 준수함과 존엄함의 표시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에도 성별 된 ‘사제’가 지켜야 할 규정 중 하나가 ‘수염’을 기르는 일입니다(레위 21:5). ‘정교회’ 사제들도 이 전통에 따라 수염을 기릅니다. 따라서 옷깃까지 흘러내린 ‘아론의 수염’은 단지 남성을 장식하는 차원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 사제의 수염은 ‘사제직’이라는 ‘영적 권위’나 ‘명예의 대명사’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성한 표시’가 ‘아론의 수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직’을 세우기 위해서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야 했습니다(출애 29:1, 7). 그 기름은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임재의 표시’, 즉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 향긋한 ‘기름’이 ‘아론의 수염’을 타고 옷깃으로 흘러내립니다. 기름이 머리에서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릴 정도의 양이라면 한두 방울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결국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 옷깃까지 흘러내리게 한 그 향긋한 기름은 ‘풍요’와 ‘축복’이라는 상징의 의미도 갖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느님의 임재와 풍요와 축복의 ‘기름’ 같다는 것입니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즉 ‘가족의 화목’입니다. 향긋한 기름으로 잘 정돈된 ‘아론의 수염’이 대변하는 것처럼, 형제들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보여주는 신성한 한 모델’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형제자매가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일을 하느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또 시인은 밤사이 충분히 내린 ‘이슬’로 신선함과 화려함을 뽐내는 ‘헤르몬산’의 아름다운 전경을 통해 ‘형제들이 한데 모여 사는 일’의 아름다움을 찬미합니다. 지난 성지 순례 때 골란고원에 올라 ‘헤르몬산’(Mount Hermon) 전경을 보았습니다. 그 산은 이스라엘 북쪽 경계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백두산’이 갖는 위상처럼 일종의 ‘영산’(靈山)입니다. ‘시온산’은 다윗성이 있던 곳으로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이기에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 시어(詩語)이기도 합니다.

두 산의 거리는 상당한데도 시인은 한껏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메마른 이스라엘에 밤사이 ‘이슬’이 내리면 땅은 ‘풍성한 생명력’으로 가득합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하느님의 한없는 ‘은총과 풍요’를 상징합니다(창세 27:28; 이사 45:8).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일이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찬미입니다.

더욱이 시인은 수염, 기름, 이슬의 공통적인 특징을 잡아내어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라드’(יָרַד)입니다. 본문에는 ‘흐르는’, ‘흘러내리는’, ‘내리는’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아래로’(to come or go down, descend)의 의미를 갖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라드’라는 단어를 통해 시인이 형제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은 이 단어를 통해 하느님께서 형제들이 한 데 어울려 사는 가족공동체 위에 내려주시는 축복, 즉 ‘하느님의 축복’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실제로 수염, 기름, 이슬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잘 어울립니다.

이처럼 시인은 ‘수염’, ‘기름’, ‘이슬’이라는 아름다움과 향기와 생명력을 지닌 그림 언어를 통해 ‘가족의 화목’이 갖는 영적 가치를 찬미한 후 이렇게 시를 마칩니다.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 시편 133:3

시인이 말하는 ‘그곳’이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언뜻 듣기에 지금까지는 ‘가족의 화목’을 찬미하다가 갑자기 방향이 틀어진 느낌입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형제가 한 데 ‘어울려’ 살아가는 일에 담긴 신비를 더 깊이 풀어헤칩니다. 그 ‘어울림’은 단지 ‘윤리적 차원’에서만 선하고,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차원을 뛰어넘어 그 어울림은 ‘종교적 차원’과 관련됩니다. 종교적 차원이란 인간의 ‘궁극적 갈망’에 접촉된다는 뜻입니다. 그 갈망이란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입니다.

‘시온’에서 있었던 ‘계약갱신 축제’(예배)에서 하느님은 계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공동체’(하느님의 가정)를 위한 ‘축복’과 ‘생명’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계약을 맺고 하나의 가족이 된 이 공동체가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주십니다. 또 정기적으로 바쳐지는 ‘제의’를 통해 하느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구원을 갱신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인 우리가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이 ‘성찬례’, ‘이 예배의 자리’야말로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 자리이자 ‘영생’과 연결된 자리입니다. 성찬례 안에 담긴 이러한 신비를 우리의 눈이 열려 볼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시어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 덕택에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한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요한 20:17).

<133편>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에게도 하느님의 복과 ‘영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분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부끄럽습니다. 마치 고립된 섬처럼 살고 있으면서도 영남 대 호남, 진보 대 보수, 친미 대 종북, 좌파 대 우파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느라 그 귀한 세월을 허송해 왔습니다. 그나마 물꼬가 트이던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헤르몬산에서 시온산”까지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입니다. 남북한이 서로 화해하고 통일을 이루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삼천리에 가득히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이들, 난민들과 다문화 가족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그 은총의 날을 꿈꿉니다.

2독서 《요한의 첫째 편지》는 요한공동체가 누리는 ‘친교’에 대한 증언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다른 구원 교리를 전하는 적대자들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습니다(1요한 1:1-2).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적 영지주의자들’입니다(1요한 2:19, 22; 4:2-3).

빛이신 ‘하느님과의 친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이 누립니다(1요한 1:5-7; 4:9; 5:9-12, 13, 20).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을 믿는 사람이 누립니다(1요한 1:1-2; 3:5; 4:2-3).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속죄 제물’로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이 누립니다(1요한 2:2; 3:5, 16; 4:10; 5:6).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모든 구원 선포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에 근거합니다(1요한 4:9; 5:9-12,20).

그렇지만 자신이 정말 하느님과 친교를 누리는 ‘영원한 생명’(1요한 4:9; 5:13)의 소유자인지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증명됩니다. 그 행동이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인데,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1요한 2:10; 3:11, 16, 23; 4:7, 20-21; 5:1).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빛이신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 합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 공동체에 ‘발현’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친교’를 다시 시작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죽은 것 같던 영혼들이 소생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네 번의 ‘발현사화’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발현사화’의 목적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임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과 토마의 의심,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까지 망라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를 묵상할 때면, 우리 성가 <622장>이 떠오릅니다.

주여 내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니 주 말씀 한마디면 내 영혼 낫겠네.

물론 이 성가는 백인대장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나온 감동적인 고백이 배경입니다(마태 8:5-10). 하지만 복음 이야기에서 펼쳐지고 있는 제자들의 심정과 고백을 담고 있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 자신의 심정과 고백 또한 담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주님이 지금 내게 오시면, 답답한 내 마음이, 병든 내 영혼이 나을 텐데, 내가 나을 텐테…

사실, 우리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와 ‘묶임’이 있습니다. 분노, 슬픔, 죄책감, 두려움, 절망감, 즉 ‘죽음’으로 출렁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의 제자들처럼, ‘문’을 다 닫아걸고 홀로 있고 싶은, 누구하고도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런 ‘고통의 밤’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 성가 <622장>을 마음에 담아 두십시오. 아마 채 5번을 반복하기 전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1절만 고요히 반복해서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뭔가가 있을 것입니다. 올라오는 그것이 ‘하소연’이어도 괜찮고, 한바탕 ‘통곡’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속에 있는 분노, 슬픔, 죄책감, 두려움, 절망, 죽음을 주님께 정직하게 토해내고 나면, 어느새 나를 품에 안으시고 ‘사랑’으로 토닥여 주시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슬픔’(하소연, 통곡)을 긷고, 긷고, 긷다 보면 어느새 슬픔이 맑아지면서 형언할 수 없는 위로가, 평화가, 기쁨이 길어 올려지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5번만 고백처럼 불러 보십시오. ‘찾아오신 주님’을 감당치 못해 기쁨의 눈물범벅이 된 제자들의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이고, 건네시는 그 한 말씀에 영혼이 치유된 제자들이 바로 나이며,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던 ‘토마’가 바로 자신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뉩니다. 첫 단락(19-23절)은 토마가 없을 때 일어난 ‘발현사화’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스승처럼 자신들도 체포되어 똑같은 처형을 받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이전에 스승에게 들었던 ‘확신의 말’, 즉 ‘수난과 부활 예고’는 모두 잊혔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그 모습을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첫 장면부터 강렬한 대조가 돋보입니다. 밖으로 나온 이의 ‘사랑과 생명’, 안에 갇힌 이들의 ‘두려움과 죽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무덤을 열고 나오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죄책감’과 ‘절망’과 ‘상처의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덤’으로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을 무덤에서 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만 ‘두려움’과 ‘죄책감’과 ‘절망’과 ‘상처’라는 ‘무덤’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들도 그들처럼 어떤 식으로든 무덤에 갇혀 있습니다. 특히 요즘 코로나19 상황이 그렇습니다. 예전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니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집안에 갇혀 지내는 일도 길어지고 있습니다. 밖을 나서더라도 상대방이 방역지침을 잘 지켰을지 조심스럽고, 때로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봅니다. 혹시 저 사람이 유다처럼 우리를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의심의 눈초리로 서로를 경계하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문이 모두 잠겼는데도 들어오셨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예수께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들 한가운데 서신 예수께서 인사를 건네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샬롬’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입니다. 하지만 충격적입니다. 충격적이지 않다면 그런 분은 아직 깊은 묵상을 해보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렇게 장담한 바 있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 마태 26:33,35

베드로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맹세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어쩌면 우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저를 이 위기에서 건져주시면, 이 인생의 문제로부터 도와주시면 평생토록 주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그러나 어땠습니까? 다 잊힙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서처럼 제자들에게도 배반을 당했습니다. 그런 제자(우리)들에게 주님이 오시어 건네신 인사가 ‘평화’라서 충격입니다. 더욱이 그 인사를 건네시는 분은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불과 사흘 전, 유대 특권층인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국사범’과 ‘신성모독자’로 몰려 처참히 처형당하셨습니다. ‘정의’가 아니라 ‘불의한 재판’을 받고 가장 치욕스럽게 희생당하셨습니다. 그런 분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평화의 기원’입니다.

사실, ‘평화’는 단지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황이나 내적 갈등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정의가 실현’된 상황이고,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상황도 포함합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면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대속적 죽음’으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으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과 유대 특권층으로 대변되는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 나라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가 바로 세워진 ‘정치적 사건’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세상의 참된 통치자, 세상의 참 주인이 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라고 ‘정치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그렇게 정치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아담의 죄로 무너져버린 ‘인간 존엄’이 바로 세워진 ‘인권의 사건’이라는 점도 같이 증언했습니다.

동시에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인사를 듣던 이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스승이 잡혀갈 때 도망쳤던 ‘배반자’입니다. 자신들의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절망’하던 이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이들입니다. 평생토록 ‘배신자’라는 ‘치욕’을 안고, 자신들의 ‘기억’(의식)이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 난 영혼들’입니다. 의식이 존재하는 한 ‘나는 배신자’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 ‘상처난 이들’입니다.

‘상처’라면 예수님도 그들 못지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어 그들 한가운데 서신 예수의 첫 마디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처를 받고 돌아가셨던 분이 참혹한 고통 속에 머무는 제자들, 그 무덤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자기 억울함, 자기 치욕, 자기 상처, 자기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 그것이 ‘부활’입니다. 온전히 부활한 이들만이, 완전히 해방된 이들만이 자신이 받았던 그 치욕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억울함과 치욕을 안겨 준 이들에게 다가가, 아직 ‘죄책감’과 ‘상처’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진정으로 ‘평화’(용서)를 기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이미 ‘부활’한 이들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일본’(북한)과 우리나라와의 관계가 떠오릅니다. 일본(북한)과의 관계만 생각하면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진정으로 부활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가 부활했다면 일본(북한)이 어려움을 겪을 때 어떻게 했겠습니까? 어떤 나라보다도 앞장서서 일본(북한)을 돕겠지요. 그런 나라야말로 부활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억울함, 치욕의 상처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불행입니다. 민족정기를 살리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오랜 대립 너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두려움과 상처의 고통 속에 있는 그들에게 가져오십니다. 그 ‘평화의 인사’는 부활의 아침, ‘마리아야!’하고 부르신 음성처럼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압도하는 ‘한 마디’입니다. 살다 보면 수천 마디 미사여구의 빈말보다 ‘평화’라는 그 한 마디가 모든 것이 되는 순간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끌고 들어가는 어떤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식(기억)이 있는 한 나는 이것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라고 묶여 있는 그 뭔가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모든 ‘죄’는 단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주님을 향해 저질러진 그 ‘죄’를 생각할 때 우리는 괴롭고, 슬프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우리 마음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나는 네가 평안하기를 바란다. 네가 나를 배신했어도 괜찮다. 나는 네가 나를 밟고 갔어도 괜찮다. 나는 네가 나를 무시했어도 괜찮다. 그렇게 해서라도 네가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면 나는 괜찮다. 다만 나는 네가 그 일로 괴로워하기보다 이제는 평안했으면 좋겠다. 너를 향한 나의 용서와 사랑을 네가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나는 기쁘다. 네가 괴로우면 나는 더 괴롭다. 나는 네가 평안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잘되면 좋겠다. 내 사랑이 너의 죄보다도 크다. 나는 괜찮다.

이제,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들(우리)에게 전해지는 ‘평화’입니까? ‘목숨을 바쳐’ 이루신 평화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자기 헌신’, ‘자기 부인’, ‘대가를 지급한’ 평화입니다. 그 ‘평화의 인사’를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평화의 인사’를 돌아봅니다. 우리의 삶은 자신이 건네는 평화를 ‘보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태도로 관계하며, 서로에게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까?

‘공동체’로 살아가는 이들이 ‘자기 헌신’이나 ‘희생’, ‘대가를 지급함’ 없이 건네는 평화는 ‘빈말’일 뿐입니다. ‘공동체’는 빈말하는 사람들보다 ‘자기 참여의 책임’을 다하는 이들이 많아야 합니다. 더욱이 ‘공동체의 평화’는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남모르게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이전과는 다르게 공동체와 관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시어 ‘평화’를 건네십니다. 코로나19라는 절박한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이 건네시는 그 평화는 너무나 절실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그 평화로 서로를 축복합니다. 축복하면서 우리 역시 다짐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이미 대가를 지급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이 공동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에 기꺼이 대가를 지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 자신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임을 행동으로 증명하겠다고 다짐합니다(마태 5:9).

주님은 ‘평화와 인사’와 함께 ‘해방된 상처’를 보여주십니다. ‘유령’이 아닙니다.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명’ 주심도, 새 창조의 ‘성령’ 주심도, ‘사죄의 권한’을 주시어 ‘화해(용서)의 사도’가 되게 하심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이것이 진실임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여드레 뒤’에 주님이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도 여전히 두려워하며 그 ‘무덤’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에서 들은 것처럼, ‘하느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라는 ‘거룩한 사명’을 받아 이미 ‘파송’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2독서 《요한일서》에서 들은 것처럼, 하느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와 정의, 용서와 화해, 친교와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거룩한 사명’을 받아 이미 ‘파송’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창조와 정의, 용서와 화해, 친교와 평화의 대리인, 사도가 되라는 그 ‘거룩한 임무’(지상명령)를 그들은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자기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들을 타인에게 개방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받은 그 ‘거룩한 사명’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그들에게 하신 ‘지상명령’은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단락(24-29절)은 토마가 있을 때 일어난 주님의 ‘발현사화’입니다. 그를 ‘두려움’과 ‘죄책감’과 ‘절망’이라는 ‘죽음의 자리’(무덤)에서 ‘생명의 자리’로 ‘부활’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배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 소식을 전해 들은 토마는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봐야지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토마의 말이 아니라 1세기 교회가 당면한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그들이 순교하고 난 후 이어진 세대는 주님을 보지 못한 이들로 점점 채워졌습니다. 물론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이는 ‘성찬례’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믿음’ 안에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토마가 바로 그런 신자형을 대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님은 그가 있는 자리에 다시 발현하시어 당신의 상처 난 몸을 맡기십니다. 완전히 자기 억울함과 치욕과 분노와 미움의 상처로부터 ‘해방’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사랑으로 배려’하시는 주님께 토마는 이렇게 외치고 맙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 요한 20:28

토마는 자신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보고자 했던 신자형의 대표로부터 터져 나온 신앙고백입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경우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요한 20:29

요한 공동체는 토마라는 사도를 통해 ‘보는 믿음’에 경도된 이들에게 지금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중입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자신들이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즉 ‘들음에 근거한 믿음’이 ‘보는 믿음’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1세기 이후 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대상으로 한 격려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단락(30-31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종국에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2천 년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요한복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요한의 증언이 사실임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름으로써 누구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 목표, 방향’을 발견했고, 성취했습니다. 요한이 증언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그 수많은 사람 중에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도 포함됩니다. 우리도 요한처럼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믿음의 단계’에 도달하도록 돕는 삶을 살 것을 되새기는 오늘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회인 우리는 사랑의 사귐으로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오늘 배정된 <전례독서>에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과의 친교 속에 들어온 초대교회 신도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사랑의 사귐’을 이어갔습니다. 물질의 탐욕과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나눔’과 ‘공유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랑의 친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교회 신도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과 서로의 관계를 거울처럼 들여다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참 평화로 감싸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무덤에서 빛으로 나오게 찾아오시어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찾아오시어 우리가 붙잡혀 있는 두려움과 죄책감, 자기 억울함과 치욕, 자기 고통과 절망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해방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상처를 내보일 수 있는 그런 ‘안전한 공동체’, 상처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평화(용서)를 건네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이기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한마음 한뜻’으로 묶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입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사귐’이 있는 이 성찬례가 오늘 《시편》에서 노래했듯이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 자리이자 ‘영생’과 연결된 자리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한 그리스도인답게 ‘이타적’인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진정으로 우리 서로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임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피 값을 치르고 사신 교회인 우리가 ‘두려움’과 ‘죄책감’과 ‘절망의 상처’ 속에 갇힌 이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내시는 ‘생명’과 ‘평화의 선물’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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