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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4. 부활대축일

본기도

영광의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어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우리도 죄와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도 10:34-43
  • 시편 – 118:1-2,14-24
  • 2독서 – 1고린 15:1-11
  • 복음서 – 요한 20:1-18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오늘은 교회인 우리에게 가장 기쁜 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는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지배해 온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장 큰 적’인 ‘죽음’을 ‘정복’하신 날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새로운 창조의 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재결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해방의 날’입니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 덕택에 우리가 더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된 ‘자유의 날’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도록 초대된 ‘가장 복된 날’입니다.

물론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육체를 가진 이상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빗겨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의 죽음은 영원히 정복되었습니다. 우리 육체의 목숨이 마지막을 맞는 순간, 오히려 우리의 죽음은 ‘영원히 파괴’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우리에게 죽음은 더는 ‘지배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1독서 《사도행전》과 2독서 《고린토전서》에서 사도들이 선포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무덤은 결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지 ‘개인적(또는 종교적) 해방과 구원의 의미’에 머물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느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정치적 의미’, 즉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세상의 변혁’을 포함하는 의미도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도들은 부활 사건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지배체제’를 고발합니다. 자기 이득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세상 권력’(빌라도로 대변되는 로마 황제와 유대 종교 특권층들)을 당당히 고발합니다. 그들의 음모와 술수와 폭력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옳았음’을 하느님께서 절대적으로 ‘인정’하신 사건이 부활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 사건이 부활입니다. 세상의 ‘주인’과 ‘주님’은 현재의 지배체제를 주무르는 불의하고 폭력적인 ‘기득권자들’이 아니라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절대적으로 증언한 사건이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단지 개인적인(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정치적 변혁의 사건임’을 사도들은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자신의 구원과 새로남을 위한 사건이며 동시에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하느님께서 증언하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만 있고 부활 사건이 없었다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에서 잊혔을 것입니다. 로마가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십자가형에 넘긴 사람은 ‘예수’ 외에도 역사에서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처형한 폭력적인 로마제국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는 분명 ‘불의한 권력’에 의해 처형당했으나, 죽은 이들의 땅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시고 높이시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온 우주의 ‘주님’(로마 황제가 아니라)으로 삼으셨습니다(필립 2:9-11). 그리스도교는 절대로 개인적이기만 하거나 비정치적이지도 않습니다. 일부의 특권층만 행복한 ‘세상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약자들도 행복의 분깃을 나누어 받는 하느님의 정의, 연민, 사랑, 즉 ‘하느님의 나라’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의 중심 주제였음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따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었기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인 우리가 오늘날도 존재합니다. 부활 사건이 있었기에 불의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역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비폭력으로 예수의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일으키신 ‘변화의 세상’을 향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면면히 존재해 왔습니다. 자신들도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처럼,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일으키실 부활에 동참할 것이라 믿으며, 하느님 나라와 의를 위해, 역사의 정화와 변혁을 위해 순교자처럼 헌신한 이들이 면면히 존재해 왔습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무덤에서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1고린 15:14).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죄 용서를 바랄 수 없습니다(사도 10:43).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시편이 노래하듯이 ‘감사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의 몸의 부활도 영원한 생명도 우리가 믿거나 바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사랑과 진실의 세상,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향한 투쟁에도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평화의 세상, 더 연민 가득한 세상을 향한 꿈도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었기에 우리의 믿음과 희망은 의미가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향한, 즉 변화의 세상을 향한 우리의 모든 투쟁은 의미가 있습니다. 더욱이 그 세상은 우리 바깥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욕망만을 위하려는 이기적인 우리 자아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세상,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내면 세상’도 포함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내면 세상과 바깥세상의 변화 모두를 포함하는 초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는 ‘평화의 길’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되는 ‘영원한 영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 복음’을 들고 거짓의 ‘세상’을 향해 나갑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우리의 ‘시선’을 결정적으로 ‘교정하는 사건’이기에 그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가련한 자신, 이기적인 자신, 자기 욕망에 집착하지(붙잡히지) 않도록 결정적으로 ‘교정’해 주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시선’이 변화무쌍한 이 지상의 사건들에 ‘고정’되지 않도록, 우리의 고개가 ‘거짓이 지배하는 땅’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진실’을 향해 열어주시고 들어 올려 주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의 세상, 용서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핍박하는 이 ‘불의한 세상’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오게 하는 ‘진실의 일들’에 자신을 투신하도록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을 결정적으로 열어주고 계십니다.

정말이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복음서가 전하는 그 ‘세부적인 차이들’(진리를 역사적 사실성과 동일시하는 이들은 실망하겠지만)에도 불구하고 ‘참된 진실을 향한 우리 시선의 교정’입니다. 하늘과 땅의 진정한 왕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진실’을 보도록 ‘우리의 시선을 교정’시킵니다. 참된 본향, 즉 영원한 안식을 누릴 ‘아버지의 품’(아버지의 나라)으로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향하도록 들어 올린 대전환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지만, 그 어둠과 절망과 죽음 속에서도 ‘빛’과 ‘생명’과 ‘창조’를 보는 눈뜸으로의 초대가 부활 사건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복음으로 증언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빈무덤과 발현 사화’인 복음 이야기를 통해 이 ‘진실’을 좀 더 깊이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교정’되어 ‘지금도 살아계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여기서 만나기를 축복하면서 시작합니다.

복음 이야기는 《요한복음》이 전하는 네 번의 ‘발현 사화’ 중 첫 번째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갔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라고 시간 배경을 밝히고 있지만, 진실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을 때’입니다(요한 1:5). 정확히 말하면 참 빛이신 주님이, 부활의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절망의 어둠’ 속으로부터 먼저 부르셨습니다. ‘상실의 슬픔’ 속으로부터 먼저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큰 상심 속에 있던 마리아는 아직 이 ‘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진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진실’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기에 마리아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죽음의 현실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리아는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만 확인했을 뿐인데, 시신을 도난당했다고 상상했습니다. ‘죽은 예수’, 즉 ‘우리’(그리스어 본문에는 ‘오이다멘’이라는 1인칭 복수가 쓰였습니다. 따라서 마르코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니라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 번역은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대로 하자면 “어디에다 모셨는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입니다)는 ‘예수의 실종된 시신’을 찾아야 한다고 ‘억측’하며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희망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두 제자는 즉시(혹은 숨 가쁘게 뛰어) ‘무덤’으로 향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두 제자도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음을 ‘똑똑히, 샅샅이, 명확히, 실수 없이’(본문에서 보다는 의미는 그런 뜻입니다) 확인합니다. 흩어진 수의와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는(잘 정돈된) 수건”을 확인합니다. 이것은 누가 시신을 훔쳐 간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놀랄 일입니다. 이렇게 ‘빈무덤’을 똑똑히 확인한 그들에게 ‘믿음’이 생겼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숙소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눈을 떴으나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숙소로 돌아간 정도가 아니라 그들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죽음의 현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의 절망적인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 요한 20:19a

한편,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또 한 번의 눈뜸의 기회를 얻습니다. 두 제자들처럼 마리아도 ‘빈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마리아는 두 제자와 다른 경험, 즉 천사들을 만납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누구인지 무신경합니다. 그들의 질문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전했던 대답을 합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 요한 20:13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간 것인지 걱정했고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그때의 ‘몸의 형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도 우리의 관심을 거기로 이끌지 않습니다. 다만 ‘몸’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몸’은 플라톤이나 그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와 분명히 다릅니다. 그들은 ‘몸을 악하다’라고 보았고, 몸을 제거해야만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분명히 ‘몸’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새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입니다. ‘새 몸’을 가지고 부활한다는 이 독특성이 다른 모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구별시켜줍니다.

마리아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놀라 뒤돌아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이전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물으십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 요한 20:15

예수께서는 사흘 전,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을 향해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음성에는 닥쳐온 배신과 부인의 공기가 묻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들리는 그 음성에는 사랑의 공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단지 “뒤를 돌아다 보며” 말할 뿐입니다.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 – 요한 20:15

마리아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과거의 예수에 매달려 대답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대단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분의 시신만이라도 자신이 가져다 돌보겠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그런 ‘음조’로 그녀를 불러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눈은 몰라보았지만, 그녀의 귀는 여전히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완벽한 부활절 설교입니다. 가장 감동스러운 부활절 설교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부럽습니다. 아니 그런 마리아가 부럽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완전히 예수께 ‘돌아서서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듯합니다. 마리아가 알던 그분이 돌아왔습니다. 분명 사랑하는 임은 죽었는데, 지금 돌아오시어 눈앞에 서 계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그분을 알아봅니다.

라뽀니!

이렇게 기쁘게 외치며 부활의 예수님을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려’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돌볼 수 있는 무덤에 안장해 ‘붙잡아두려’ 했습니다. 자신이 알았고, 사랑했던 ‘과거의 그 친밀한 예수’에 ‘집착’했습니다. 더는 친밀히 대화할 수 없더라도 사랑하던 예수님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자신이 사는 날 동안 보존하기 위해 ‘시신’이라도 ‘소유’(붙잡아둠)하려 했습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갈망은 이 ‘발현의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붙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환영’(유령)이 아니라 ‘실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발현하신 주님께서는 ‘그만하라’라고 요구하십니다. 정확히는 ‘경고’가 아니라 ‘권고’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하더라도, 아무리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소유’하려(붙잡아 두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족’과 ‘자기 옳음’을 위해 예수를 은밀히 이용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도록 나 자신을 내드려야 하고, 겸손히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붙잡고 있음’을 금지하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 참된 사랑의 실재이신 아버지에게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시선’을 부활하신 자신의 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품’(요한 1:18)이 성육신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하신 분의 ‘참 목적지’입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축하는 우리는 항상 이점을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아버지의 품’이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 몸이 어떤 상태였느냐를 두고 논쟁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의 본향, 참 목적지인 아버지의 품으로 향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도, 부활하신 후에도 오로지 아버지를 향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목적지로 올라가시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요한 14:6

이 말씀처럼 우리를 아버지께로 연결하는 ‘궁극적 길’이 되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분에게로 가장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요한 16:5). 거기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버지의 품’에 이르는 예수의 길 위에 있도록 날마다 인도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품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적지입니다. 마리아, 베드로, 요한, 바울로뿐 아니라 그들의 후예인 우리도 아버지께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이것을 깨닫고 산다면 진리의 성령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기쁨에 겨운 마리아에게 ‘사명’(임무)을 주십니다.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전하여라. – 요한 20:17

부활의 소식이자 승천의 소식입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내 형제들”(자매들)이라 부르는 제자들에게 가도록 파송됩니다. 예수께서는 ‘여성’인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문화 배경을 아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부활’은 실재였다는 뜻입니다. 부활 소식의 첫 번 대상은 남성 제자들이었습니다. 배반으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죽음의 현실 속으로 들어간 ‘남성’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의 사건’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상상할 수도 없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사건’을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소식은 ‘책망’이 아니라 ‘화해’입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로의 초대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품’으로 그들의 ‘시선’을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이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종’, ‘친구’라 부르셨으나 부활하신 후에는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본래 그 친밀함은 아버지와 외아들의 것이었으나 부활하신 예수 덕택에 예수의 형제가 된 제자들에게로 확장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에게로 확장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즉 예수님의 형제인 우리도 우리의 참 목적지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시선’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을 아버지의 품으로 오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아 파송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아버지의 품으로 오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아 파송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과거’에 시선이 붙잡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로 돌아선 다음 마리아는 정말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놓아야 하고 누구의 뒤를 따라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시선’이 닿아야 할 곳이 언제나 ‘아버지의 품’임을 부활하신 예수께 배웠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시선이 바뀐 마리아는 부활의 온전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화해를 말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전령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절망과 두려움에, 과거에 시선이 고정된 이들에게 ‘아버지의 품’을 바라보게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어두움’, 즉 배반으로 인한 죄책감과 유다 당국자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숨어있는 사도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어둠’(자기 안의 어둠을 포함하여)과 맞서도록 그 이른 ‘새벽’에 부르심 받았음을 마침내 알아차렸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부활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의 어둠’(자기 안의 어둠을 포함하여)과 맞서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진실을 가리는 ‘현재의 어둠’을 불식(拂拭)시키도록 ‘빛’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부활의 예수님처럼 우리의 시선은 ‘아버지의 품’입니까? ‘착한 행실’을 통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로 인도해내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의 길’ 위에 있는 부활의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바라보며 사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탐욕과 소유를 부추기는 ‘세상 나라’에 살지만, 열린 눈과 목소리로 ‘하느님 나라’를 사는 부활하신 예수의 형제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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