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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4. 2. 사순 39일(성금요일 주님의 수난일)

본기도

의로우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사람들의 배반으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나이다. 비오니, 크신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자녀로 받아주시어 십자가의 수난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52:13-53:12
  • 성시 – 시편 22
  • 2독서 – 히브 10:16-25
  • 복음서 – 요한 18:1-19:42

1년 중 유일하게 성찬례가 없는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비탄’의 날입니다. 누구를 위한 수난이었고, 누구를 위해 죽기까지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까? 보잘것없는 나를 위한 수난이었고, 죄인인 나를 위해 죽기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고백이 우리에게서 온전히 응답 되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수난일 예식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말씀의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입니다. 차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제는 아무 말 없이 입장하여 제단 앞에 꿇어앉아 침묵한 후 ‘본기도’로 말씀의 전례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된 ‘성서독서’가 있습니다. 독서의 정점은 ‘요한이 전하는 수난복음’입니다. 다음으로 교회력에서 가장 긴 ‘장엄기도’가 바쳐집니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십자가 경배’로 이어집니다. 십자가 경배는 연극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사제는 ‘자색보’로 감싼 ‘경배용 십자가’를 들고 제단 앞으로 나오면서 세 번에 걸쳐 회중에게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머리 부분을 벗겨 높이 쳐들고, 두 번째는 오른팔 쪽을 벗겨 높이 쳐들며, 마지막으로 십자가 전부를 벗겨 높이 쳐듭니다. 그때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 구세주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를 보라.
◉ 모두 나와서 경배합시다.

이 응답 후에 제단에 모셔놓은 십자가에 차례로 나와 경배합니다. 경배가 진행되는 동안 성가를 부릅니다. 이때 부르는 성가는 비탄의 노래인 ‘책망가’나 ‘십자가 찬가’입니다. ‘책망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나의 죄 때문임을 깨닫고 참회합니다.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우리를 위한 구속의 사랑을 되새깁니다. ‘십자가 찬가’를 통해 우리는 십자가 나무의 의미를 더욱 깊이 되새깁니다. 생명과 구원과 화해의 상징이 십자가 나무입니다. 경배가 끝나면 십자가는 적절한 장소에 둡니다. 제대에 촛대를 올려놓고 촛불을 켠 후 성체포를 펴고 성목요일 성찬례에서 새로 축성한 성체를 모셔옵니다.

이어서 ‘영성체’가 있습니다. ‘죄의 고백’으로 시작해 ‘주의 기도’를 바친 후 모든 교우가 영성체를 합니다. 영성체가 끝나면 ‘폐회기도’로 주님의 수난 예식을 마칩니다. 그 시간 이후로 우리는 부활밤 예식이 있는 성토요일 저녁까지 비탄에 잠긴 제자들과 여인들처럼 됩니다. 그들처럼 ‘주님의 부재’로 인한 세상의 어둠을 우리는 침묵 속에서 견뎌야 합니다. 그 견딤의 힘은 죽으시고 묻히셨으나 죽음과 지옥의 사슬을 끊고 무덤에서 영원하신 승리자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올해도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적 거리두기로 전례를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고통과 고난의 현실은 1년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에덴에서 추방된 이래로 고통과 고난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은 단지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고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친구’로부터 받는 ‘속임수’의 고통, ‘동지들’로 받는 ‘배반’의 고난도 존재해 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득을 위해 변절하고 ‘동료’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나 ‘동지’를 살리기 위한 희생의 가치는 역사에서 예찬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친구’나 ‘동지’가 아닌, ‘원수’나 ‘적’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절대 흔하지 않습니다. ‘원수’나 ‘적’을 위한 고난은 너무나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5:9-11).

몇 해 전, 가을 ‘성경의 땅’을 다녀왔습니다. 순례 일정 중에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에서의 기도도 있었습니다. 해마다 사순절 성주간이면 바치는 기도였지만 그 길에서 기도를 바친다는 감흥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역사성이 가지고 있는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제가 서 있던 ‘십자가의 길’은 평소 마음에 그리던 성스러운 의미의 거룩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기념품을 팔기 위해 순례자들을 상대로 호객하는 상인들, 세계 도처에서 찾아온 많은 순례자, 시간에 맞추어 각각의 처소를 방문해야 하는 팍팍한 일정, 인증샷 찍기 등등. 불과 800여 미터 남짓한 거리를 둘러싸고 이 모든 것들이 뒤엉켜내는 ‘소음’은 그야말로 ‘시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순례를 떠나며 2천 년 전, 그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의 사랑을 고요히 묵상하고자 했던 결심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초보 순례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대부분이 이슬람교 지역이기도 하였지만, 거기서 마주친 대다수 사람은 순례자의 마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각처마다 조용히 기도할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한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어쩌면 과거의 그 날, 그 길도 지금과 같은 소음과 무관심으로 가득 찼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날, 그 길도 엄청난 ‘소음’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무관심의 공기’가 사람(원수)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예수께서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과 질병 치유를 봤던 사람들, ‘왕이 오신다!’라고 ‘호산나’를 ‘연호’(連呼)했던 사람들이 조롱과 모욕, 침 뱉음과 발길질,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엄청난 고함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처럼 취급했습니다. 주님은 진실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죽음의 길로 끌려가고 계셨습니다. 누구도 “저분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외쳤다 한들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맹세’하며 ‘장담’했던 베드로, “주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장담’했던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도 ‘원수의 길’로 갔습니다. 그 길은 분명 주님이 예고하신 것처럼 ‘자신을 버리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뿐 아니라 사랑을 쏟아부었던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은 길’이었습니다.

더욱이 나중에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길이었습니다. 탈진한 주님을 위해 누구도 물 한 잔 건네지 않았습니다. 군중 속에서 몰래 뒤를 쫓는 제자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주님이 당한 ‘억울한 판결’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주님이 걸으신 길 그대로구나…. 아니 그래도 나는 훨씬 낫구나….

그랬습니다. 제 ‘등’에는 단지 작은 ‘배낭’ 하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무슨 ‘희생’을 감행하기 위해 제가 그 길 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슨 사랑을 실천하려고 거기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랬습니다. ‘사랑이 희생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결합한 희생’이 그 길 위에 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무런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아무런 조건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 그것이 그 길에 가득 찬 ‘소음’과 ‘무관심’ 위를 덮고 있는 진정한 공기였습니다.

비로소 저는 그 상업적인 길, 그 무관심의 길 위에서 깨달았습니다. 참사랑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조건 없는 ‘진정한 사랑’이심을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오면서 뭐 좀 진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다. 여전히 제 안에 작동하고 있는 ‘조건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제로 살아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께 많은 것을 바라는 탐욕스러운 내면의 자아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바로 주님의 ‘원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런 조건 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삶이 우리에게 세상적인 축복을 보장해 주지 않아도 순전한 마음으로 따를 수 있습니까?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적인 출세와 안락과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망스럽습니까?

아마 우리 교우들은 이 정도는 이미 꿰뚫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은 분명 우리를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빚어간다’라는 진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조건이 없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원수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간다는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만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 해답입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만큼 우리 인생이 믿을만한 것은 없습니다. 돈, 권력, 인기, 우정, 이념만큼 미덥지 못한 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손안에 쥔 것 같지만, 내일이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과 같습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인생에게 변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사랑뿐입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오늘’을 있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사랑의 날이 오늘입니다. 하느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그렇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흔히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꾼 군중들 때문이 아닙니다.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때문도 아닙니다. 배반자 유다나 도망간 제자들 때문도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한 헤로데 안티파스 때문도 아닙니다. ‘신경’에 기록된 본티오 빌라도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사람 중 누구도 주님께 그 수난과 죽음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구입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자원’해서 그 길로 가셨습니다. 누구도 억지로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배반을 당하고 붙잡혀 가셨습니다. 하지만 원수인 우리 곁을, 죄인인 우리 곁을 절대로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고, 그 살점은 뜯겨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붙어있는 당신의 피부밑에 ‘원수’인 우리를,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숨겨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권세를 가졌었고 그것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원수인 ‘우리를 위해’, 죄인인 ‘우리를 위해’ 당신을 못 박도록 건네주신 분은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결코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사탄은 세상 모든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유혹하다 실패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고 끝까지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결코 그 ‘자원하는 희생’을 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 희생이 ‘십자가’입니다. 역사상 존재한 인류와 앞으로 존재할 인류가 짓게 될 죄의 총합보다도 더 강력하고 효과를 지니는 사랑과 희생이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사랑과 결합한 희생’의 상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상징인 ‘십자가’로 원수와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완성’하시고(요한 19:30)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것을 강조했고, 반복해서 예수께서 사용하신 ‘에고 에미’(나는 이다)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증언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 덕택에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삶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사랑’임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며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답임을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진실을,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다는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 희생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고 오늘도 전 인류를 향해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장례’가 있는 날입니다. 여러분께 미소 띤 얼굴을 보이지 못하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저는 비탄으로 가득 찬 ‘상주’(喪主)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말입니다. 사실 이미 39일 전에 모두에게 ‘부고’(訃告)를 냈습니다. ‘부고’를 받으셨다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주인 저는 지켜야지요. 소홀히 할 수 없지요. 저와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아니, 저와 여러분을 가장 사랑해주신 분이니까요!

성금요일을 준비하며 <요한이 전한 수난복음>을 다시 묵상합니다. <성가> 182장을 고요히 부르며 마음을 울리는 그 노랫말을 다시 되새깁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을 무덤 속에 뉘일 때….

언제 불러도 울림을 주는 성가입니다. 이 성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구원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속으로, 가장 불확실한 순간 속으로 기어이 마지막 한 걸음을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결코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곧 부활이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아직 서두르진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제자들처럼, 여인들처럼 영적 어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온 세계관과 미래를 향한 모든 기대가 전복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확실의 현실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영적 어둠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참으로 원수들을 향한 ‘희생이 결합 된 끝없는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일찍이 선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 이사 53:3-6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용서받게 하시려고 《히브리서》 말씀처럼(히브 10:16-25)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인 우리가 사랑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엄청난 ‘희생’을 드리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며, 지금도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임을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쳐 온 세상에 드러내고 계십니다

《시편》 기도를 성취하신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제와 임종 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심판에서 구해주소서, 산 사람들에게는 자비와 은총을, 죽은 이들에게는 용서와 안식을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교회에는 평화와 일치를,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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