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1. 사순 38일(성목요일 성찬제정일)

  • by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성체성사를 세우시어 구원의 신비를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의 새 계명을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2:1-4(5-10), 11-14
  • 성시 – 시편 116:1-2, 12-19
  • 2독서 – 1고린 11:23-26
  • 복음서 – 요한 13:1-17, 31하-35

교회력의 정점인 ‘성삼일’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성삼일은 구원 사건의 절정인 3일을 가리킵니다. 오늘 저녁 ‘성찬제정일’ 성찬례로 시작하여 성토요일 ‘부활밤 예식’ 때 절정에 이릅니다. 오늘부터 부활밤 예식까지 모든 전례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은 두 번의 성찬례가 봉헌됩니다. 오전에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성유 축복 성찬례가 봉헌됩니다. 사제와 주교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구 모든 성직자가 참여합니다. 사제들은 성찬례에서 사제직의 의미를 되새기며 말씀 전례 끝에 ‘성직 서품 서약’을 갱신합니다. 또한 세례성사와 조병성사에 사용할 기름을 축복하여 나누어 받습니다.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교무구 성직자 임원만 참석합니다.

저녁에는 지역 성당에서 ‘성찬제정’ 성찬례가 봉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밤, 제자들과 과월절 저녁 만찬을 드시며 제정하신 ‘새 계약’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새 계약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하여 영광송을 하는 동안 성당의 모든 종을 울립니다. 이후 부활밤 예식 때까지 종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섬김의 모본과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선포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섬김으로 가득 찬 오늘을 ‘세족례 목요일’(Maundy Thurs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설교 중에 사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새 계약의 성사, 즉 ‘성체성사’를 세우시어 ‘구원의 신비’를 나타내셨음을 선포합니다. 자신을 내어주신 거룩한 사랑과 희생과 나눔을 선포하기에 교회력으로 오늘을 공식적으로는 ‘성찬제정일’이라 부릅니다.

설교 후에는 ‘세족례’를 거행합니다. 올해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이마저 생략합니다. 신앙고백과 평화의 인사도 생략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로 대변되는 제자들의 배반을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찬기도에서 성금요일 영성체를 위해 새로운 성체를 넉넉히 축성합니다.

영성체 후에는 새로 축성한 성체를 모시고 따로 마련한 제대에 옮겨 ‘성체수직’을 합니다. 따로 마련한 제대는 ‘게쎄마니’를 표현합니다. 닥쳐올 수난을 생각하시며 인간적인 고뇌와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결단하시는 그리스도의 ‘게쎄마니 기도’에 동참합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신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으로 ‘산헤드린’에 넘겨지십니다. 동참한 신자들도 자정 전에 고요히 흩어집니다.

어제 사순 37일에 섬김과 나눔을 주제로 한 오늘 복음 이야기의 전반적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자기를 소외’(疏外)시키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세계 내 현존재인 인간에게 ‘성삼일’이 갖는 전체적인 의미에 관해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 나눔을 대신합니다.

‘성삼일’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며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사람의 마지막 시간을 이토록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만큼 그 ‘마지막 시간’, ‘마지막 사건’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수성과 보편성, 역사성과 현재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계 안에서 우리는 ‘본래적인 나’가 아닌 ‘그들’로 평균적으로 살면서 괴로워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일상에서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과 기준을 의식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불안해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익숙한 길과 다른 길을 가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세상과 타인의 지배 아래’ 두고 ‘평균적’으로 ‘익숙하게’ 살아가면서 ‘안정감’을 느끼려고 합니다. 우리가 만나서 잡담, 상식, 정보를 쏟아놓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며, 어떤 분야에 권위 있다는 전문가의 말과 해석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 삶, ‘자기 이해’, ‘자기 해석’, ‘자기 결정’이 없는 삶에서 얻는 ‘안정감’은 ‘거짓 위안’이 주는 ‘착각’입니다. 자신을 점점 ‘소외’시켜 ‘그들’로 만들 뿐입니다. 그것은 ‘비본래적인 삶’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을 따라, 타인의 지배 아래 살아가기에 어떤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책임성’조차 크게 느끼지 못합니다. 대한민국이 그 많은 사건 속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귀한 영혼을 지닌 인간, 즉 자기 초월성을 간직한 인간은 결코 그런 나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자기 세계를 창조’하도록 창조된 ‘영혼’은 자기를 잃어가는 일을 끔찍이 싫어합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이해와 해석을 쫓고, 세상과 타인의 결정과 지배 아래 사는 우리는 더 괴로운 ‘기분’에 빠지고 맙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거짓 위안과 익숙함, 안정감과 편안함이 주는 ‘착각’에서 깨어나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결정하는 일입니다. 재산, 권력, 명예처럼 ‘수단’에 불과한 것을 ‘목적’으로 여겼던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결정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할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방식을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 하는 그 일과 지금 걷고 있는 그 길과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내가 진정으로 실존적이고, 신앙적인 고민의 결과일까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하고 편해서라는 것이 솔직하지 않습니까?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사는 일도 쉽지 않다고 항변하면서도 정작 ‘괴로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 정직합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거룩한 시간’이 또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본래적인 자기’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자기 세계를 창조’하는 ‘영혼의 본성’처럼 ‘본래적인 자기’를 ‘선택’하며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되고자 하는 자신’, ‘가능한 자신’을 선택하고, 결단하기 위해 ‘진정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성삼일’이 주어졌습니다.

이 ‘거룩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라고 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생명이 돋아나는 봄을 예찬하지만, ‘지금 여기’ 침투해 있는 ‘나의 죽음’이라고 하는 ‘불안’에 시달리는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소유’와 ‘명예’와 ‘권력’을 자랑하지만 ‘죽음의 독침’인 ‘죄’의 종노릇 하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나’입니다(1고린 15:55-56).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잊고 살아온 ‘나’를 마주하게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없다’라는 진실이 역설적으로 ‘지금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살아온 우리 자신이 그 ‘올가미’와 ‘그물’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줍니다.

‘죽음의 불안’은 언젠가 그 있던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우리의 ‘유한한 삶’을 자각시키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각성’시킵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 나의 고유한 삶’인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그 ‘죽음의 불안’은 타인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시간’을 살도록 합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 존재로 자신을 놓아 보내지 않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주목하게 합니다. 그 ‘죽음의 불안’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존재를 껴안고, 나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미래’로 ‘다가가게’ 합니다. ‘자기 존재의 가능성’ 아래서 나의 ‘미래’를 계획하며 적극적으로 나의 ‘현재’를 살도록 합니다. 한 번뿐인 나, 내가 걷는 나의 길, 내 존재의 삶을 책임지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삼일’은 세상과 타인의 눈과 기준에 맞추어 살던 우리를 깨우는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그런 삶이 편하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우리의 영혼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도록 돕는 ‘궁극적 변화의 시간’입니다. ‘본래적 존재의 의미’를 묻는 ‘현존재’인 우리 자신에게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 주는 ‘구원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사건에서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여주는 세상과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가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가정에서 기도로 지키는 이 성삼일의 전례 속에서 우리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일이 가능한 나를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신만의 길을 보고, 그 실현으로 뛰어 들어가는 ‘현재의 용기’를 주님으로부터 얻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언제나처럼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기도로 들어갑니다.

“겸손과 섬김의 왕이신 주님, 으뜸이 되고자, 주목을 받고자 고개를 치켜드는 교만한 저를 봅니다. 제가 추구할 것은 당신의 그 겸손과 섬김임을 다시 일깨워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저를 자신에게서 소외시키는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려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시는 당신의 은총을 어찌 다 보답하겠습니까! 다만 날마다 당신의 마음을 닮아 이웃을 섬기며 살다가 제 인생이 가장 아름답게 여물은 그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