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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30. 사순 36일(성주간 화요일)

본기도

창조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깨달아, 그 크신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9:1-7
  • 성시 – 시편 71:1-14
  • 2독서 – 1고린 1:18-31
  • 복음서 – 요한 12:20-36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 사람들이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뵙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예수께서 하신 수수께끼 같은 유명한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 12:24

물론 실제로 밀알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흙 속에서 씨앗으로 존재해 온 자신의 모습을 ‘놓아줌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변형’됩니다. 단지 ‘한 알’이었지만,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돋아나며, 자라나 풍성한 결실을 가져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 전하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나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치를 틀고 애벌레로 살아온 모습을 ‘놓아주는 일’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변형’됩니다.

예수께서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놓으실 작정입니다. 그 일을 통해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우리 역시 전혀 새로운 삶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구원의 열매)을 가져올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은 온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결실’을 풍성히 가져오는 궁극적 원인이 될 것입니다. 밀알의 비유는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이들을 ‘대속’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생명의 섭리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 요한 12:25

분명히 예수께서는 영적 생명의 섭리를 말씀하신 후 온 세상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처럼 ‘자기 목숨’을 놓아야 합니다. 자기 목숨이란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목숨을 아낍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기적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육체적 수명’을 사랑하고 거기에 붙잡혀 ‘자기’에만 몰두하는 그런 삶은 도리어 자기 목숨을 잃게 만듭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언젠가 목숨처럼 아끼는 그 목숨을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 온 바에 따르면 신앙이란 결국 ‘자기’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인간이 그 본성상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면 그 ‘나’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법이기도 합니다. 피부 안으로만 ‘자기’라 규정하던 삶에서, 가족, 이웃, 공동체, 민족, 타민족, 인류, 다른 종(種), 심지어 지구 전체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남’을 ‘내 몸’처럼 여기고, 섬기며 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지구 살기’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 즉 ‘이기적인 자기를 놓아주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라는 말씀은 자신을 학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가치, 더 큰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가장 첫 자리에 두는 삶입니다. 이웃의 생명을 이롭게 하며, 섬기는 삶을 말합니다. 선로로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씨처럼, 빈자의 어머니였던 ‘마더 테레사’처럼,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밀알 하나처럼 자기중심적인 목숨,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을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갔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이렇게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 요한 12:26a

‘제자의 삶’이란 밀알처럼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마태 10:38; 16:24).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이기적인 나의 욕망과 뜻, 자기중심적인 목숨, 일시적인 육체적 수명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자인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목숨을 놓아주는 ‘골고타’까지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일에 자신을 봉헌하는 그 ‘갈보리’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예수께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 존재의 근거처럼 ‘보이는’ 것을 놓기가 두렵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예수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 요한 12:27a

《요한복음》 기자는 이 짧은 문장으로 <공관복음>에 기록된 ‘게쎄마니의 기도’를 함축합니다( 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가 22:39-46).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놓아주는 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픈 마음’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 사이에서 느끼는 심각한 ‘갈등’과 ‘괴로움’과 ‘두려움’입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용기’를 내어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 요한 12:27b

예수님의 이 결단, 하느님의 뜻을 향한 ‘예’라는 신뢰와 순종과 용기가 결국 온 세상에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십자가’로 어둠에 속한 세상을 ‘심판’하셨고, ‘부활’로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해온 마귀를 그 자리에서 ‘추방’하셨으며, ‘승천’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께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며 ‘정치적 메시아’로 환호했던 군중들에게는 ‘수난의 메시아’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자신들 눈앞에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모셔두고서도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합니다.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 요한 12:34-35

그 질문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눈먼’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들임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선입견과 편견, 민족적 우월감이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는 논쟁할 생각이 없으십니다. 다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 요한 12:35-36a

그들이나 우리나 필요한 일은 한 가지입니다. ‘회개하고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을 ‘미워’하며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악마에 속한 자식들임을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총’으로 ‘눈’을 떴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았습니다. 지나는 사람들이 화단 앞에 멈추어서 허리를 굽히고 사진을 찍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더 예쁜가 봅니다. 새로 만든 화단 앞에도 옹기종기 어린이집 아이들이 둘러서서 재잘거립니다. 어떤 꽃 빛깔이 눈길을 사로잡는지 선생님께 이야기합니다. ‘보는 눈’을 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피어납니다.

문득, 우리도 주님의 화원에 피어난 꽃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보시고 미소 지으실까요? 꽃이 피어나는 시기는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도 바람과 비에 젖고 흔들립니다. 예수님도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수난’에 나서실 때 몹시 흔들리셨습니다. 바람과 비에 몹시 젖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밀알처럼 자기 목숨을 용기 있게 내어놓으셨습니다. 인내의 뿌리를, 사랑의 꽃잎을 따뜻하게 피워내셨습니다. 사명의 열매인 영원한 생명을 결실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절당할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있으며,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1독서 《이사야》의 ‘야훼의 종’처럼, 《시편》 시인처럼, 다시금 신앙의 줄기를 곧게 세우고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따라 ‘사랑’으로 피어나는 일은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찬미한 《시편》 시인처럼,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흔들리는 꽃대들을 보호하시는 주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코로나19로 몹시 흔들리는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시고 당신과 함께하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용기를 간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제가 붙잡고 있는 허망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놓아버릴 수 있게 하소서. 당신처럼 아버지만을 붙잡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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