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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9. 사순 35일(성주간 월요일)

본기도

창조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깨달아, 그 크신 겸손을 본받게 하시고 마침내 부활의 영광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2:1-9
  • 성시 – 시편 36:5-11
  • 2독서 – 히브 9:11-15
  • 복음서 – 요한 12:1-11

성주간 월요일입니다. 복음 이야기는 그 유명한 ‘도유(塗油)사화’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을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가온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계실 때 ‘마리아’가 다가왔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비스듬히 누워계신 자리로 가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옥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옥합’에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이 들어있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나르드’ 향유는 이스라엘에서는 나지 않고 동방에서 들여왔습니다. 향도 향이려니와 피부병에도 효과가 높았습니다. ‘한 근’이라고 번역한 원문의 무게 단위는 ‘리트라’입니다. 1리트라는 약 ‘327’그램입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360ml ‘소주 1병’ 정도에 들어가는 양입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있던 ‘마리아’는 허리를 깊숙이 구부렸습니다. 그런 다음 ‘밀랍’으로 봉인된 ‘옥합’의 뚜껑을 깼습니다. 갇혀 있던 ‘향기’가 비로소 자유를 찾는 순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고요히 봅니다. 먼지투성이의 뜨거운 길을 지칠 줄 모르고 누비시며 ‘하느님 나라’를 전해 오신 ‘발’입니다. 그 ‘발’이 이제 모든 사명을 내려놓고 쉬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그 발에서 다가올 ‘상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옥합’을 기울여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향기가 빠르게 번져갑니다. 마지막 한 방울이 너무 빨리 흘러나왔습니다. ‘향수’가 아니라 ‘향유’(원액의 기름)입니다. 소주 1병 정도의 양이니 ‘향수’로 만든다면 수백 명이 쓸 수 있는 엄청난 양입니다. 온 집안에 음식 냄새가 아니라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봄밤을 맞아 문가에 찾아온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오래도록 퍼져갔습니다. 자신이 구세주로 믿고 있는 예수님의 이름이 이 향유 냄새처럼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예수님의 ‘생’(生)이 여기서 끝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은 오래오래 그 말씀을 간직할 것을 다짐합니다. 마치 주인의 발을 씻기는 ‘종’처럼, 그 경건한 예식을 치르고 있는 ‘마리아’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라자로’와 ‘마르타’ 역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는 분명 오빠를 살려주신 일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보기에 그 행동에는 ‘감사’를 넘어선 그 무엇도 표현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사순절 여정을 걸어온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합니다. 우리는 지난 3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고요히 ‘찬미’를 바치고, ‘감사’를 바쳐 올렸습니다. 날마다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묵상했고, ‘참회 연도’를 바쳤으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도록 이끈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마리아’나 ‘우리’가 표현하는 ‘감사의 행동’은 ‘사랑’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족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아침’을 차리고, 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온화한 미소와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회적 소수자들 편에 서며, 자연을 보호하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 그것이 우리 ‘행동의 이유’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감사’는 실천됩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의 행동에는 더 근본적인 목적(이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갖는 그 근본적인 목적(의미)이 무엇인지 곧 말씀하실 참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내려놓은 다음 ‘수건’으로 감싼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삼단 같은 머리’로 향유가 흘러내리는 ‘발’을 닦아내기 시작합니다.

이 역시 관례에 어긋나는 ‘파격’입니다. 이 행동에는 ‘마르타’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는 여성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성차별적 언사지만 당시는 여인네들의 머리카락에 남성들이 유혹받을까 봐 노출을 금하던 시절입니다. 관례적으로 ‘기름’(향유)은 발이 아니라 ‘머리’에 발랐고, 여인들은 잔치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여러 사람 앞에서 남자와 신체접촉을 하는 일도 금하던 시절입니다.

나르드 향유와 예수님의 발과 ‘마리아’의 긴 머리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선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민망한 사태가 불편했던지, ‘가리옷 사람 유다’가 나서서 ‘핀잔’을 줍니다. 정말이지 그가 내뱉은 충동적인 말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 요한 12:5

그의 ‘눈썰미’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옥합의 크기를 잠깐 보고도 향유값이 최소 ‘삼백 데나리온’임을 알 정도입니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인 것을 고려한다면(마태 20:2), 1년 치에 해당하는 ‘상당한’ 돈입니다. 특히 ‘베다니아’가 ‘빈민촌’인 것을 고려하면 마리아의 예물은 정말 대단한 봉헌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지금 ‘가격’에 주목하면서 ‘마리아’의 행동이 ‘낭비’라고 비난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는 ‘사치’라고 비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물건의 ‘유용성’과 행동의 ‘효용성’에 주목하면서 ‘마리아와 예수님’ 둘 다를 싸잡아 ‘비난’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향유’는 ‘세간의 가격’이 아니라 ‘감사 예물’로 바쳐질 때 비로소 그 ‘가치’를 갖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유다는 ‘경제적 논리’로 그 향유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랑’보다 ‘물질’을 높이 사는 ‘속물’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물건의 ‘유용성’과 행동의 ‘효용성’은 살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아님을 꼭 기억하십시오. 오히려 ‘관계의 유일한 기준’을 말하라면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도 마리아의 이 ‘감사의 예물’과 ‘파격적인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유다’가 ‘도둑’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요한 12:6; 13:29).

더욱이 마리아의 행동에는 ‘감사와 사랑’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목적’(이유, 의미)이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것을 밝히십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의 일에 참견하지 마라. – 요한 12:7

이 말씀은 ‘마리아’를 향한 예수님의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혹시라도 상처 입었을지도 모를 ‘마리아의 마음’을 ‘옹호’하십니다. ‘마리아의 행동’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의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는 ‘감사와 사랑’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가슴에 두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수난과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감행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으로 사명을 마감하더라도 자신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신다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치고, 머리까지 풀어 보일 정도로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으며, ‘죽으실 예수께’만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감사와 사랑의 행동’에 담긴 진정한 의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1독서 《이사야》의 야훼 종의 첫째 노래처럼, “인류와 계약을 맺기 위해”(이사 42:6) 수난하시고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제물’을 가지고 왔기에 예수께는 소중했습니다. 2독서 《히브리서》 말씀처럼,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시기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미리 제물’을 가지고 왔기에 예수께는 소중했습니다.

마리아 혼자만 유일하게 예수님의 지상 사명이 끝나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이 귀했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선’(慈善)처럼, 마리아의 행동은 반복될 수 있는 그런 헌신이 아닙니다.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단 한 번의 ‘결정적 예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임박한 죽음을 앞두신 예수께 자신이 해야 할 ‘최선과 최고의 헌신’을 ‘실존적 결단’으로 드렸습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 곁에 있겠지만(베다니아가 빈민촌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는 이제 지상 생애를 끝내실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곁에는 늘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지국가를 꿈꾸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은 이기적이고, 돈을 좋아하며, 소유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는 침묵하고, 제자들도 침묵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으로부터 ‘위안’을 얻었으며, 가난한 사람들 역시 우리로부터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해졌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성주간의 첫날,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은 사건을 기념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진정한 ‘그리스도’(메시아,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로 증언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 ‘도유 사화’ 후에 예루살렘에 ‘왕’으로서 입성하십니다(요한 12:12-15). 더욱이 우리는 이 도유사화를 통해 또 하나의 ‘발 씻음’으로 인도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에 전해지지 않는 ‘중요한 사건들과 가르침들’이 전해집니다. 그중의 하나가 수난 직전에 행하신 ‘세족례’입니다(요한 13:1-15). 이 사건은 평범한 섬김이 아닙니다.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심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시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세족례 후에 예수께서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요한 13:14).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요한 13:17). 결국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발 씻김’이라는 ‘사랑의 행위’를 미리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首)제자’라 불리던 ‘베드로’조차도 ‘발 씻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 13:7).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비록 남성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닐 순 없었지만 분명 ‘재가(在家) 제자인 마리아’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했습니다.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단 한 번의 ‘결정적 헌신’을 감행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최선과 최고의 헌신’을 위해 ‘실존적으로 결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하나를 이룬 ‘참 믿음의 제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미리 보여준 ‘참 사랑의 제자’로 증언됩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발 씻김’ 자리에서 사흘 전 ‘베다니아’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헌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보여준 그 ‘독창적인 감사와 사랑’을, ‘계산하지 않는 감사와 사랑의 위대함’을 사도들은 기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일’을 미리 준비한 ‘마리아’의 그 위대한 믿음을 두고두고 기념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님께 최선의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실존적 결단’에서 우러나온 자신만의 행동을 통해 마리아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묵묵히 자신의 일들을 수행하는 이는 ‘베다니아의 마리아’입니다. 자신이 주님의 ‘참 제자’이며, ‘사랑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기억할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어떤 여인’, ‘마리아’,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항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며 우리도 이미 사랑받은 사람답게 주님께 ‘최선과 최고의 헌신’을 보일 것을 다짐합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이웃들이 우리를 통해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마리아처럼 사랑의 봉사자, 사랑의 향기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시편》 기자처럼(시편 36:10),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저희의 구원을 위해 최선과 최고의 사랑을 보이신 주님, 찬미합니다. 당신의 장례를 준비한 마리아처럼 저 역시 저의 구원에 중요한 이 순간에 당신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도록 마음을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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