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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7. 사순 34일(토요일)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37:21-28
  • 성시 – 시편 121
  • 복음서 – 요한 11:45-57

복음 이야기는 우리가 성주간의 문턱에 와 있음을 알려줍니다.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 사건의 결정적인 배경입니다. ‘산헤드린’(의회)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놀랍게도 그 음모의 결정적인 계기는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기적)입니다.

그 ‘표징’(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그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심각한 인물로 여겼고 멈추게 해야 한다며 일러바쳤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대항하는 길로 갔습니다. 하긴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나중에 예수님께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듣고 몹시 난감해진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산헤드린)를 소집했습니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로 ‘법정’ 역할까지 겸합니다. ‘의회’로 모인 그들은 걱정하며 이렇게 의논합니다.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 요한 11:47-48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섬긴다고 행세하던 경건한 ‘종교인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사랑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기적 사건’(표징) 앞에서도 불신앙과 선입견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보는 눈이 없었기에 예수께서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두려웠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전혀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랑의 원리’로 행동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안식일 법’을 대수롭지 않게 어기는 ‘무법자’였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통치체제, 즉 율법과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거짓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간직한 ‘메시아 기대’, 즉 ‘다윗왕’과 같은 ‘강력한 전사적 풍모’를 예수에게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더욱이 그와 함께 다닌다는 떠돌이 제자들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로마’에 맞설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인기를 가라앉게 할 방도를 찾습니다. 명분은 ‘자치권’ 유지였습니다. 본래 ‘산헤드린’(의회)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유대 땅의 내정을 유대인들 스스로가 관장하도록 허락한 일종의 ‘자치정부’입니다. 로마제국은 자치정부가 제국의 평화와 체제에 순응한다는 조건으로 정치, 사법, 종교적 자치 권한을 ‘산헤드린’에 부여했습니다.

‘의회원들’은 깜냥도 안 되는 예수를 백성들이 ‘정치적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일을 내버려 두면 자칫, ‘폭동’(로마에 저항하도록 선동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로마가 군대를 보내 ‘성전’과 ‘민족’을 짓밟을수도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되면 선조들처럼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결론을 내렸습니다. 민족을 위한 염려 같지만, 실상은 ‘자신들을 위한’ 염려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누려온 정치적, 사법적, 종교적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때 ‘산헤드린’의 의장인 그 해 대사제인 ‘가야파’(주후 18-36년 재임)가 나섭니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 요한 11:49-50

‘죽입시다!’ 이것이 그가 제시한 ‘해결책’입니다. 놀랍습니다. 너무나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윤리적’이진 않습니다. 역사에서 기득권자들이 내세우는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해야 한다”라는 무지막지한 말입니다. 정작 그 ‘한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 한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앞에서 그 ‘죄책’(罪責)을 어찌 다 받으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들’을 토대로 진정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인지 알아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협력자’다운 말입니다. 그는 ‘사람의 아들’을 알아보는 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민족이 멸망’을 피하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기득권의 상징인 ‘성전’(거룩한 곳, 예루살렘 성)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일 만큼 ‘성전’이라는 ‘우상’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권력은 타락하고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무의식중에 ‘예언’한 셈입니다(51절).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가야파’를 칭찬한 것은 아닙니다. 가야파가 제시한 해결책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다 민족을 대속하는 죽음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1독서 《에제키엘》의 예언처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까지 한데 모으는 구속의 죽음이 된다는 뜻입니다(51-52절). 《시편》으로 노래한 <121편>의 내용처럼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기자의 해석입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특정 민족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적 구속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아파와 산헤드린은 예수님의 죽음을 정치적 골칫거리 제거 정도로 생각했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그들의 손을 통한 인류의 대속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 요한 11:53

가야파의 제안은 ‘산헤드린’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위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린’ 최대의 표징(요한 11:1-44),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징(요한 11:4)은 역설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죽이기로 음모하는 표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이 예정하신 ‘십자가의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55-57절).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 여정의 대단원인 성주간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오늘(넓게는 금주간)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공식적으로 ‘산헤드린’에서 논의되고 결정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정치적 힘을 가진 의회원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이익’을 지키려고 혈안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1독서 《에제키엘》의 선포처럼(에제 37:21-28), ‘유대 민족만’(정확히는 자신들만)을 위하려는 그들의 음모를 오히려 온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구속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보궐선거도 불과 10여 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자칫 기득권자들의 특권과 이득을 위해 투표하기 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에 투표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한’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산헤드린’의 의원들에게서처럼 나의 한 표는 정치인들에게는 언제나 ‘위협’입니다. 진정 국민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공의를 실천할 인물들이 선출되어야 합니다. 우리와 가난한 이웃들과 후손들을 위한 신성한 한 표를 잘 행사할 수 있도록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 주시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시편》 시인처럼, 당신 자녀들을 모든 재앙에서 항상 지켜주신다 약속하신 구원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로 들어갑니다.

사랑의 주님, 제 눈을 열어주소서. 저는 당신을 더 깊이 알고 싶나이다. 어제보다 오늘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나이다. 그 힘을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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