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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1. 사순 5주일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나이다. 비오니, 연약한 우리를 성령으로 도우시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쳐진 씨앗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31:31-34
  • 시편 – 51:1-12
  • 2독서 – 히브 5:5-10
  • 복음서 – 요한 12:20-33

사순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새 계약을 성취할 수난(영광) 때의 도래’입니다.

사순절의 기원은 ‘부활절’에 세례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 기간에서 유래한다고 말씀드려 왔습니다. 그 교육을 위해 배정한 <전례독서>를 복음 이야기를 중심으로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사순 1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을 들으며 곧 받게 될 ‘세례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일어난 사랑의 사건, 즉 ‘성령의 세례’를 이어받는 일입니다.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로 거듭나는 길이 세례라고 되새겼습니다. 사실, 교회는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는 선언을 받은 순간 이미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사순 2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첫 번 수난 예고’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출발하게 될 ‘믿음의 각오’를 굳게 되새겼습니다.

사순 3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와 ‘십자가 사건’이 가리키는 의미를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요, ‘십자가’는 ‘영원한 계약’에 들어가는 세례를 통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하느님의 지혜이자 힘(능력)임을 되새겼습니다.

사순 4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는 절대성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은총의 선물들(특히 영원한 생명)을 되새겼습니다.

오늘은 사순 5주일입니다. 예비 신자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오늘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할 예비 신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르칩니다. ‘새 계약의 성취인 십자가 수난’, ‘새 이스라엘인 교회’,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서 감당할 ‘제자도’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기도록 안내합니다. 이제 <전례독서>를 차례로 보겠습니다.

1독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라는 약속입니다. 이 ‘새 계약’은 지난날 이스라엘과 맺은 ‘옛 계약’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영원히 파기되지 않을 새 계약입니다. 사실, 사순 여정을 지나는 우리에게 ‘계약’이란 말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온 ‘사순 주일’마다 ‘계약’을 언급하는 <구약성경>의 본문들을 1독서로 낭독해 왔기 때문입니다. 차례로 살피면 이렇습니다.

사순 1주일, ‘노아 계약’(창세 9:8-17), 사순 2주일, ‘아브라함 계약’(창세 17:1-7), 사순 3주일 ‘십계명 계약’(출애 20:1-7), 사순 4주일, ‘구리뱀 계약’입니다. 오늘은 ‘새 계약’입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항상 먼저 하느님께서 ‘계약의 주체’로서 인간을 초대하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하여 ‘계약’이 성사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새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창세 32:29).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야곱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단일 민족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뿐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사회의 하층민’, ‘가난한 사람’, 그 땅에 합법적으로 거주할 자격이 없는 ‘떠돌이’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물론, 이집트에 내려가 살게 된 야곱의 후손들도 ‘히브리인들’에 속했습니다(참고, 창세 39:14; 47:9).

그러면 같은 혈연관계가 아닌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야곱의 후손’으로 이집트 땅에 내려가 살게 된 70명은 430년 후 무섭게 불어났습니다(출애 1:1-7; 12:40).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 내용의 성취 중 하나’였습니다(창세 12:1-9; 26:1-5; 28:10-15; 46:3).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원수의 편에 붙어 자신들을 치고 나라를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불어났습니다. 결국 파라오는 사내아이 살해로 ‘히브리인들’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출애 1:8-22). 그때 태어난 인물이 ‘모세’입니다(출애 2:2).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고역(苦役)에 시달리던 그 ‘히브리인들이 울부짖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또 하나의 계약 내용’을 ‘기억’하셨습니다(출애 2:23-25; 6:1-9).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세우시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출애 3:10; 7:14-30). 그들뿐 아니라 그 땅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역사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빠져나올 때 많은 ‘잡식구들’(여러 민족), 즉 수많은 ‘히브리인들’도 따라나섰습니다(출애 12:38). 홍해를 건넌 그들과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출애 19:1-8; 24:1-11; 34:10-27). 그들은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로 ‘약속’합니다(출애 24:7). ‘이스라엘’이라는 ‘계약 공동체’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섬기며 살겠습니다’라고 ‘신앙’으로 ‘응답’하여 ‘계약을 맺은 백성’을 가리킵니다. ‘계약’은 히브리인들을 하나로 묶는 줄이었습니다. ‘히브리’라는 ‘사회적 약자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의 울부짖음에 역사적 체험으로 응답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근거’였습니다. 그 ‘계약’에 대한 ‘순종’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보호와 축복 속에 존속할 수 있습니다(신명 28장; 레위 26장).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순종’은 ‘심판’과 ‘추방’입니다. 한마디로 그 계약은 ‘조건적’으로 ‘거래적인’ 성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느님과의 계약’을 통해 ‘특별한 백성’이 된 그들이 어떻게 살지를 ‘조건으로’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출애 19:4-6; 20:1-17). 이제부터는 뭇 민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제의 직분’을 맡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조건’이자 ‘명령’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약 공동체’로 출발합니다.

이후 그들의 삶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자주 ‘불순종’하고 ‘계약을 파기’합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지파 동맹체였던 판관 시대, 왕정국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왕정 시대 이후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의 살마네셀 5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2열왕 17:1-6). 불과 100여 년이 못 되어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 제국이라는 거대한 바람 앞의 등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1독서로 낭독한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위기와 혼란’에 처했던 40년 기간 동안 활동한 예언자의 이름입니다. 유다의 기득권자들은 북쪽의 아시리아와 바벨론 제국,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외교술’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약 백성’[참고, 조건 없는 다윗 계약(2사무 7:1-17)으로 더 공고히 됨]이라 할지라도 ‘율법’, 즉 ‘하느님과 맺은 계약 말씀’을 무시하는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예언자 ‘예레미야’는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죄’를 들춘다는 것은 큰 ‘용기’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의 몰락을 정치나 외교술에서 찾지 않고 ‘시나이산 계약’의 위배에서 찾는 역사관을 가졌던 셈입니다. 사실, 이런 역사관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형성됩니다. 그것을 ‘신명기 역사’라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위기와 혼란의 시기’에 장차(바빌론 포로기 이후) 다가올 ‘은혜로운 새 계약의 날’, 즉 ‘희망과 위로와 변화의 날’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31절). 놀라운 통찰입니다.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만군의 하느님께서 ‘새 계약’을 세워 ‘이스라엘 가문을 온전히 회복시키겠다’라는 약속입니다(33절). ‘새 계약’을 통해 탄생할 ‘하느님의 택한 백성’에 대한 ‘위로의 약속’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유일한 ‘새 계약’ 예언입니다. 새 계약은 그들 조상이 시나이산에서 받은 ‘옛 계약’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본문은 이 차이점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시나이산’에서 히브리인들과 ‘옛 계약’을 맺으시면서 ‘율법’을 ‘조건’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 그들이 살아야 할 ‘법’을 ‘돌 판’에 새겨 모세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출애 19:4-6; 20:1-17). ‘율법’은 그들 ‘외부’에 존재하면서 ‘외적 행동을 규정’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을 진지하게 대하셨고, 그들 역시 그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긴밀하고 동등한 관계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32절). <구약성경>에서 보듯이, 율법은 겉에서 맴돌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뜻을 권고하고 가르쳐주어도(신명 6:3-4,6-7,12) 그들은 ‘불충실’(불순종)했고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은혜의 계획’을 세우십니다(31절). ‘남왕국 유다’에 재난을 내리시어 소수만 남기실 것입니다. 이른바 ‘남은 자’ 사상입니다(이사 4:3). 그들을 상대로 하느님은 ‘은혜의 새 계약’을 세우실 것입니다(31절, 이사 54:9-10). ‘새 계약’은 ‘옛 계약’과 달리 ‘조건적’이지도 않고, ‘형식적’이지도 않으며, ‘거래’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그들과 그야말로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법’(토라, 하느님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법’은 ‘외부’가 아니라 각 사람의 ‘내면’, 즉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33절). ‘마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레브’(לֵב)는 일차적으로 ‘심장’이라는 말이지만, ‘속사람’, ‘마음’, ‘의지’, ‘선한 뜻’,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사람, 의지, 사랑) 속에 ‘하느님의 율법’, 즉 ‘말씀의 진리’를 심어 준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은 인간을 움직여 ‘야훼(주님이라고 읽습니다)의 심정’을 깨우쳐 줍니다. ‘내면’에서부터 각 사람을 인도하여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변화의 힘’이 됩니다. ‘마음’에 ‘법’을 새겨주시는 은혜의 행동, 즉 하느님의 ‘새로운 행동’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새로운 행동을 가져올 것입니다. 불순종과 반역은 과거의 일이 될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옛날처럼 위계질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부부관계처럼 됩니다. 이렇게 ‘계약의 새로움’은 내용이 아니라 ‘내면화’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맹세’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 예레 31:33

이 말씀은 주님을 올바로 섬기는 이에게 약속하신 《레위기》 말씀의 반복입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살며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 레위 26:12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새 공동체의 탄생’을 예고하십니다. 엄청난 ‘위로와 은혜의 말씀’입니다. 물론 옛 계약의 백성들처럼, ‘새 계약의 백성’도 하느님 앞에서 ‘독특성’과 ‘배타성’을 갖습니다. 과거에 맺었던 ‘옛 계약’은 이스라엘의 파기로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음에 새겨진 법’을 따르는 이들로 인해 하느님께서 주신 ‘새 계약’이 어김없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34절). ‘하느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에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저절로’ 실행될 정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일이 마치 사람들의 ‘본래 성격’인 것처럼 실행될 정도입니다.

더욱이 ‘새 계약’의 선언은 미덥지 못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맹세’입니다. 따라서 그 선언은 당연히 ‘실행력’을 가집니다. 하느님이 ‘선언’하시고, ‘맹세’하시며, ‘보증’하시는 계약이기에 그대로 ‘효력’을 미칩니다.

‘은혜의 새 계약’을 예언하는 1독서 《예레미야》가 그리스도교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 계약’이 우리가 ‘성찬기도’에서 선포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피 계약’(새로운 계약의 피, 마태 26:28; 마르 14:24; 루가 22:20; 루가 22:20; 1고린 11:25)을 예표 하기 때문입니다. ‘새 계약’에 담긴 약속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생애,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계약에 기초해 온전히 회복될 이스라엘은 성령이 강림으로 탄생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새 계약에 기초하여 재건될 예루살렘 성은 ‘하느님 나라’를 예표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은 ‘십자가 수난’을 통해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 ‘계약이 성취되었다’라고 선포합니다(히브 8:6-13; 9:15; 2고린 3:3-6; 로마 11:27).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하는 ‘신약’(新約)이라는 말도 ‘새 계약’에서 유래합니다(2고린 3:6,14; 히브 9:15-16). <신약성경>은 오늘 본문을 여러 번 인용할 정도입니다(히브 8:8-12; 10:16-17; 로마 11:27; 마르 14:24; 마태 26:28, 요한 6:45).

이렇게 1독서 《예레미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특히, ‘십자가 수난과 부활’, ‘교회’를 앞서 보여주는 ‘착상’(着想)이기에 중요합니다(이것을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형론’이라는 성서해석법을 통해 언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느님과 인류의 관계를 갱신(회복)하고,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새 계약의 성취’라고 그리스도교는 선포합니다. 인류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약속은(34절)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이사 52:13-53:12; 1고린 11:25; 히브 8장; 9:15; 10:14-18).

또한 ‘새 계약’에 기초해 탄생할 ‘새로운 공동체의 약속’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의 성취’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법을 ‘마음’에 새겨주시어 창조하고자 하셨던 ‘새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는 옛 계약의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새 계약 공동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인 우리 ‘마음에 새 계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새겨주셨습니다. 지금도 교회인 우리 안에, 각 사람의 마음 안에 현존하시며, 강하게 활동하십니다(로마 8장; 2고린 3:5-18; 에페 1:19). 성령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교회)를 대신해서 지금도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로마 8:27). 이 시간도 교회인 우리 ‘심장’(마음)에는 하느님의 소유라는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원토록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51편>은 다윗 왕의 참회, 용서와 회복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구구절절이 ‘부서지고 상한’ 다윗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전체 150편 중에서 7편의 참회시(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가 있는데, 본문은 ‘네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참회’하며 묵상해 왔습니다. 악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주시고 생명을 회복시키는 ‘은총의 십자가’와 ‘부활의 기쁨’까지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 계약’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새 계약의 자녀’로 ‘창조’(회복)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찬미이기에 <전례독서>로 선정되었습니다. 다윗이 발견한 그 계약 내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다(1-2절, 7절). 오로지 ‘하느님’만이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새롭고 충성스러운 영, 새롭고 올바른 영, 견고한 심령)을 새로 세워주실 수 있습니다(10절).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마음을 새롭게 하실 수 있다는 놀라운 통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한 기쁨을 주실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용서를 위한 다윗의 직접적인 간청입니다(1-2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던 다윗, 즉 죄악을 저지른 다윗이 깊은 죄책감 속에서 용서를 간청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크신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토록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신뢰했습니다.

둘째 단락은 ‘죄의 고백’과 ‘몸과 마음의 정화’에 대한 간청입니다(3-13절).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알고 있습니다(3절). 그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사람에게 행한 죄뿐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죄를 지었음을 공개적으로 진실하게 인정합니다(4절). 왜냐하면 ‘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행동’이며,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파괴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본질은 항상 ‘하느님을 향한 반역’이고, ‘관계 파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느님’께 자비를 간청합니다(5절). 부서지고 상한 마음으로 죄악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느님께 나아갑니다(6절). 감히 용서를 청할 수 없는 비천한 몸이지만 주님은 선하시고 어지시다는 지혜를 마음에 주셨기에 그 지혜를 붙잡고 자비를 간청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7절), 기쁨과 즐거움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는 신뢰로 나아갑니다(7-9절). 하느님께서 친히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새롭고 충성스러운 영, 새롭고 올바른 영, 견고한 심령)을 새로 세워주시기를 간청합니다(10절). 1독서 《예레미야》와 연결하자면, ‘하느님의 법’을 ‘참회(懺悔)하는 마음에 새겨달라’는 간청입니다.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서 자신을 쫓아내지 마시고, ‘주님의 거룩한 영’(당신의 거룩한 뜻을)을 자신에게서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간청합니다(11절). 인간은 ‘하느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야 비로소 ‘하느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변치 않는(자발적인) 마음을 주시라고 간청합니다(12절).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태도와 의지의 사람으로 ‘새로 빚어주소서’라는 간청입니다. 그릇된 욕망과 덧없는 일에서 돌아서서 주님이 원하시는 새 인생길을 가겠다는 다짐입니다. 그의 참회하는 심령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자신을 하느님께서 받으실만한 합당한 제물로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14-17절). 마지막은 예루살렘을 위한 간청입니다(18-19절). 오늘은 배정한 시편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을 배정했습니다.

우리는 <51편>을 통해 무엇을 묵상하고 배웁니까? 비록 죄악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랑과 긍휼의 하느님’을 향한 다윗의 ‘궁극적 신뢰’입니다. 자신이 죄악보다도 크신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 창조 세계를 향한 의무를 자주 저버리고, 허물 많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때때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분노합니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낙심, 불안과 공포, 우울과 깊은 ‘죄책감’에 공격당하기도 합니다. 자신과의 관계마저 어긋나 자유를 상실하고 죽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사랑과 긍휼의 주님’은 우리 인생의 그 ‘어두운 순간’마다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파기될 수 없는 ‘하느님의 새 계약의 자녀’임을 마음에 속삭여 주십니다. 마음의 정화와 용서를 가져다주는 ‘은총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참회할 마음을 품게 됩니다(즈가 12:10). 하느님은 우리의 ‘부서지고 상한(고장 난)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해 주십니다.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창조하시고), 꿋꿋한 뜻(새롭고 충성스러운 영, 새롭고 올바른 영, 견고한 심령)을 새로 세워주십니다. 간단히 ‘의식과 존재의 변화’입니다. 그 ‘십자가’ 속에서 우리는 악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풀려난 ‘새 계약의 자녀’로 다시금 일어섭니다. 하느님과 이웃, 창조 세계와 조화롭게 사는 한 가족으로 회복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앙하는 덕분에 부활의 기쁨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2독서 《히브리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원’과 ‘대사제’로 임명받으셨다는 증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약을 성취하셨다’라는 증언입니다.

독특하게도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마태 26:36-46; 마르 14:32-42; 루가 22:39-46). 예수께서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증언합니다(7절). 이 증언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돌아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 마음의 게쎄마니’에 현존해 계십니다. 우리가 당신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며 살아가기를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계신지도 모를 일입니다.

놀라운 증언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처럼 ‘고난’을 겪으심으로 ‘복종’하는 법을 배우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우는 이’로 계시합니다. 죄 없으신 하느님의 아들이 몸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복종’하는 법을 배워 우리 인생과 연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본능적 욕망과 육정을 따르려는 ‘이기적 자아’는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 합니다.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고난이 유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 주는 증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을 몸소 겪으심으로써 인간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성육신’과 ‘수난’의 일들로 인해 그분의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하신 예수님의 연민 덕택에 회개의 길이 열렸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대사제(大司祭)로서의 섬김’을 통해 새 계약의 원천, 즉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완전하신 구세주이십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 계약을 성취하실 ‘수난(영광)의 때’가 도래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배경은 언제, 어느 곳입니까?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과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입니다. 한마디로 ‘성주간’입니다.

과월절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이 명절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왔습니다(요한 11:55). 그중에 ‘그리스인’(외국인, 이방인)들도 몇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그리스인들로 일종의 ‘구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요한 12:9-11). 그런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구도자로 살아 온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요한복음》 기자는 과월절 순례자로 ‘외국인’을 등장시키는 것일까요? 지금 《요한복음》 기자는 ‘민족들’(외국인)이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오리라는 구약의 종말론적인 예언의 성취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외국인’도 ‘하느님의 백성’에 참여하는 ‘구원의 날’을 선포했습니다(이사 56:3-8). 하느님께서는 혈통이나 신분을 초월하여 외국인들도 ‘거룩한 산에 있는 기도처’(예루살렘 성전)로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구원의 예배’에 참여하게 해 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이 뭇 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옛 계약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외국인’일지라도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메시아 왕국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통해 ‘우주적(보편적) 구원’이 성취되는 종말론적 때를 예언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그리스인들의 존재를 통해 그 종말론적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밝히는 중입니다. 더욱이 그 그리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예수님께로’ 더 끌립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공생애 초기 ‘성전 정화사건’(요한 2:13-22)의 주제를 다시 한번 밝히는 중입니다. 그들이 ‘끌린’ 예수님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자, 하느님의 영광과 현존의 장소인 ‘참된 성전’이라고 증언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사순 3주일 복음 이야기를 통해 이 점을 살핀 바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하는 그리스인들 이야기를 읽을 때면, 성탄 이야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성탄 하셨을 때,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공생애 끝을 앞둔 지금은 ‘서방’에서 ‘구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요람’에 계신 ‘아기 왕’을 경배했다면, 서방에서 온 구도자들은 ‘십자가’에 오른 ‘영광의 왕’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다리를 놓아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제자 중에 ‘그리스식 이름’(필립보와 안드레아)을 가진 이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 기뻤습니다. 연줄이 닿은 사람은 ‘필립보’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가르침’을 청한다는 소식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요청을 일종의 ‘전조’(前兆)로 알아차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조냐면 당신의 ‘참 본성’(참 하느님, 참 인간)을 드러내고, ‘사명을 완성할 시간의 도래’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와 연결하자면 ‘새 계약을 완성할 시간의 도래’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 요한 12:23b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번번이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의 ‘참 본성’이 드러나고, ‘사명이 완성’되는 시간을 말합니다(요한 2:4; 7:6,8,30; 8:20; 12:23,27; 13:1; 17:1).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큰 영광을 받으실 때가 왔다”라고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참 본성과 사명이 완성되는 ‘영광의 시간’입니다.

그 ‘영광’은 무엇을 통해 성취됩니까? 역설적으로 영광은 ‘고난의 시간’을 통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냐면 ‘십자가에 높이 들리는 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 죽음’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처음부터 ‘십자가 죽음’을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사순 3주일(요한 2:13-22,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과 4주일(요한 3:14-21,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복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이 ‘십자가 표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저주’나 ‘허무’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생각하듯이 ‘어리석은 일’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모두가 잘 아는 자연계의 비유를 들어 ‘십자가 죽음’을 이렇게 극적으로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 12:24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시기 위해 발설하신 <공관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겪으실 ‘수난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발설하십니다. 수난을 통해 성취할 ‘새 계약의 풍요로움’을 비유하신 셈입니다. 고난 없는 편안한 삶만을 추구하는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계’나 ‘영계’나 ‘새로운 생명의 원리’는 같다는 점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연계와 영계의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듣는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흔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썩으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밀알을 살펴보면 안에는 유정란의 흰점처럼 씨의 알, 즉 ‘씨눈’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생명’이라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뿌리내리고 싹이 나려면 일단 ‘씨눈’이 제 몸이 가지고 있는 영양분을 다 먹어야 합니다. ‘씨눈’이 ‘씨앗 전체’를 다 먹는 셈입니다. 그런 다음 이듬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는 ‘새 계약의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이라 새길 수도 있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있는 ‘씨눈’, 즉 ‘진정한 생명’ 하나 살리기 위해서 우리 육신 전부를 버릴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진정한 생명’을 더 사랑하고, 우리 ‘육신을 덜 사랑’할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 ‘진정한 생명’과 대화하는 시간을 자주 갖는 일이 ‘명상’이고,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묵상도 추가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시면 좀 더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같이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 요한 12:25-26

<공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수난 예고 뒤의 ‘제자도’와 어울립니다. 우리를 ‘또 하나의 밀알’로 부르시는 ‘제자도’입니다. 그 ‘그리스인들’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제자(종)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또 하나의 밀알’이 되라는 이 말씀을 단단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새 생명’(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고차원적인 생명)은 그 그리스인들처럼 단지 예수님께 오거나 예수님을 뵙고 싶다는 열망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새 삶’(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고차원적인 생명)은 오직 ‘옛 삶(거짓 자기, 자연적 생명, 일시적인 생명, 후차적인 생명)이 죽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새 삶’(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옛 삶(자연적 생명, 일시적인 생명)을 미워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최우선순위’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나라’인 사람은 ‘옛 삶’(거짓 자기)이 죽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제자로 살려는 이는 ‘진정한 생명’(영원한 생명)을 열매 맺는 그분의 ‘죽음’까지도 따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쉬운 길’, ‘넓은 길’을 찾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너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고 나만 십자가를 지면 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우리는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김’으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는 ‘종’(제자)이라는 인식 속에서 모든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옛 삶’(거짓 자기)은 죽은 셈입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미워하여 ‘자기 죽음을 통과’한 이들, 예수님을 섬기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0:38; 16:24) 날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부활의 예수께서 계신 그 ‘하늘’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예수님처럼 누리게 될 것입니다(26절).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일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죽음을 통과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진정한 생명)을 가져다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마음의 귀를 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삶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참 본성과 사명을 완성할 ‘영광의 때’를 기다리고 굳게 결심했다 하더라도 자기 죽음의 십자가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정직하게 토로하십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주소서.’ 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 요한 12:27

이 장면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를 대신합니다(마태 26:36-46; 마르 14:32-42; 루가 22:39-46). <공관복음>은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세상의 죄를 대속하는 ‘새 계약의 잔’을 피하고픈 인간적 ‘고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미’(인성)를 느낍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예수님도 ‘꽃’이셨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신 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독특하게 《요한복음》 기자는 ‘게쎄마니’가 아니라 여기에 그 ‘고뇌의 장면’을 편집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 즉 성육신의 이유를 ‘흔들림’ 속에서도 ‘굳건히’ 하셨다고 전해줍니다. 제법 긴 <공관복음>의 기록보다도 ‘신속히’ 결론이 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잔’을 마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새 계약을 성취’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환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라고 자신의 ‘사명’을 확신하십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당당히 청원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 요한 12:28a

원문에는 “아버지, 당신의 ‘이름’(ὄνομα 오노마, 명성)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주의기도’ 첫머리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를 듣는 듯합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이름’이라는 단어가 빠져있지만, 이름이 그 존재를 지칭하기에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긴 합니다. 또한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를 마무리하며 바치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와 같은 청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 청원은 수난이 가져올 ‘새 계약의 풍요로움’을 이미 내다보셨음을 알려줍니다. 그 ‘고난의 때’(시간)를 온몸을 바쳐 완수하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 성취됩니다. 진실로 하느님께서 ‘계약에 충실하신 분’임이 온 세상에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살아서도, 죽음을 통해서도 오직 ‘하느님께 영광’ 돌리길 원하셨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긍휼함’이 크신 분인가를 드러내길 원하셨습니다. 이 목표에 붙잡혀 살아가신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모본’이 됩니다. 우리 역시 그런 예수님을 닮아가겠다고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청원에 하느님마저 감동하십니다. 그 감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 – 요한 12:28

하늘에서 들려온 이 음성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주님의 세례’와 ‘주님의 변모’에 이어 세 번째로 예수님의 ‘신원’(정체)을 증언하는 보증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이 음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가 어땠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과 ‘부활’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둥이 울렸다”라고, 어떤 이들은 “천사가 말했다”라고 반응했습니다. 제자들은 알아들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 들려온 음성이다. – 요한 12:30

당황스러워하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 들려온 음성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려고 들려온 음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청원을 들으시는 분임을 확인해 주려고 들려온 음성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 ‘수난’을 통해 앞으로 드러나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 명백히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 요한 12:31-32

그렇습니다. 십자가 수난은 ‘세상이 심판을 받는 때’입니다. 반대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심판받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십자가 수난은 세상의 통치자가 사탄임을 증명해 주는 일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해 온 사탄이 쫓겨나는 일’입니다(골로 2:14-15).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사탄은 승리의 노래를 부르겠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십자가 수난은 죄악과 죽음의 세력 속에서 시달리던 인생을 ‘해방’하여 ‘새 세상으로 옮겨주시는 때’입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주시는 때’입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에게 비쳐질 ‘부활의 빛이 준비되는 때’입니다.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과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효력을 미치는 ‘궁극적인 구원의 때’가 완전히 도래했습니다(요한 3:14-19,36; 5:24; 9:39; 16:8-11).

예수님의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마치 자신을 ‘자석’에, 우리를 ‘쇠’에 비유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은 어떤 자석입니까? ‘구원의 자석’, ‘사랑의 자석’, ‘자비의 자석’, ‘용서의 자석’입니다. 구원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필요한 모든 사람을 이끌어 당신에게 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 구원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서 차별받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것처럼(이사 56:8), 쫓겨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외국인과 흩어진 모든 사람을 모아들이실 것이라는 하느님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모두를 위한 ‘구원의 자석’, ‘사랑의 자석’, ‘자비의 자석’, ‘용서의 자석’으로 살고 있습니까?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하느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밀어내고 있는 겁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새 계약의 성취인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과 사탄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사도들이 맺는 새로운 관계, 즉 ‘새 계약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새 계약은 사도들의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효력을 발휘합니다. 새 계약의 근원이자 대사제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주시고, 영원한(온전한,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 계약 공동체’에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교회인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승리를 나눌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다운 삶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응답은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어느덧 사순절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는 많은 열매(진정한 생명)를 맺습니다. 우리는 이 밀알이 새 계약을 성취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하느님 나라)을 위해 ‘또 하나의 밀알’로 부르시는 그 ‘제자도’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어떤 행실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나눌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 평화를 열매 맺기 위해 죽어야 할 내 안의 그 하나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이기에 지금도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떠올립니다. 특히 군부 쿠데타로 고통당하는 ‘미얀마’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새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밀알로 바치며 수난당했던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이 하느님의 말씀을 심장에 새기고 살아가는 이들의 마땅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의 응답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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