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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26. 사순 33일(금요일)

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20:10-13
  • 성시 – 시편 18:1-6
  • 복음서 – 요한 10:31-42

우리는 자신의 신원(身元)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며 삽니다.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부르심 받아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신의 ‘궁극적 신원’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말보다는 일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통해 드러납니다. 말은 종종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행동은 자신의 신원을 증언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랑과 평화의 행동들, 생명과 나눔의 행동들, 정의와 용서의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착한 행실’을 했다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거나 우리의 ‘신원’을 인정해 주기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저 우리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는 착한 행실이 시기와 질투, 오해와 모독, 심지어 ‘박해’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각오하십시오. 정말이지 ‘자신의 신원’에 투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어떤 공격도 용기 있게 맞설 수 있고, 어떤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기와 질투, 오해와 모독, 박해가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영혼이 깨어나 우리와 마음을 함께 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복음 이야기는 그런 증언입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1독서 예레미야처럼 ‘폭력의 위협’ 앞에서 서 있는 예수님을 전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그런 위협에 처했습니까? 본문 바로 앞 구절은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 요한 10:30

유대인들(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자’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33절). 그들은 율법에 따라(레위 24:16) ‘돌로 처형’하려고 했습니다(31절).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신성모독’은 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하느님 상’(像)을 전하는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준수’에 따른 ‘심판의 하느님 상’을 가르쳐왔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준수와 상관없이 한없는 ‘자비’와 ‘용서’, ‘사랑’과 ‘희망의 하느님 상’을 예수께서는 그 말씀과 행동으로 전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1독서 예레미야가 그 시대의 예언자들과 다른 메시지를 전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그런 예수님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느님 상’이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이 다스리는 ‘종교 왕국’을 위협한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일’(선한 일, 거룩한 일)을 하신(33,36절) 예수님을 ‘지도자’로 따르자 유대인들(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지도력’을 예수님께 빼앗길까 봐 ‘질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온갖 구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성모독자’로 고발하는 이들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 요한 10:34-35

예수님은 율법서로 대변되는 성경, 특히 《시편》 82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시편 82:6). 고대에는 ‘왕’이나 ‘재판관’이나 ‘예언자’를 하느님께서 직접 임명하여 세우셨다고 믿었습니다(신명 1:17; 출애 21:6; 시편 2:7; 이사 41:1-4, 25; 예레 27:6; 요한 19:11; 로마 13:1). 그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을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느님의 대리자’로 일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신’(神)이라 불렀습니다. 게다가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진실을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해 오신 일들을 통해 호소하십니다. 예수께서 ‘행하시고 있는 일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거룩한 일을 맡겨서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임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한 말씀 때문에 ‘신성모독’이라 하는 그들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36절). 이렇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그 ‘표징들’로써 자신의 신성과 하느님과의 관계, 즉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증명하셨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37-38절).

자신이 하시는 일을 통해 절박하게 믿음을 간청하시고 호소하시는 예수님의 책망 속에는 그들의 ‘시기’와 ‘질투’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자신들의 ‘불편한 진실’을 보게 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레미야에게 ‘폭력’을 가하고, ‘핍박’하며, ‘고발’하려던 사람들처럼(예레 20:10), 그들은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사면초가’라 생각하며 붙잡으려 했습니다(39절a). 그들의 마음은 완전히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하는 그 일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악마의 자식들’임을 증명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편》 노래처럼(시편 18:4-5) ‘죽음의 올가미’(죽음의 물결, 멸망의 물살, 저승의 그물)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습니다(39절b). 몸을 피하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통제하셨다는 뜻입니다. 아직은 ‘궁극적 봉헌’(십자가)이 일어나야 할 그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실 일이 더 있었습니다. ‘궁극적 희생’의 시간은 그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께서 결정하실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며 죽이려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마음을 열고 증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41-42절). 그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요즘 우리는 예레미야와 시인과 예수님이 겪었던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비단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만은 아닙니다. 기후는 말 그대로 ‘기후변화’를 넘어 ‘기후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했던 인간의 ‘탐욕’은 이제 인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심화, 약자에 대한 만성적인 억압과 폭력의 일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희망이 없는지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신원에 맞게 세상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의 세상에서 과연 ‘교회’는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믿음’과 ‘사랑의 증거자’여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탐욕에 빠진 세상에서 그 행실로 ‘희망의 증거자’여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과연 세상의 ‘생명’이요, ‘희망’이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증거자로 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정말 절망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고통받으시는 예수님, 우리와 함께 지금도 고난을 겪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생명을 바쳐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 예수님을 발견하고 불안과 공포, 폭력과 억압의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스승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신원’을 했으니, ‘하느님 자녀’다운 착한 행실로 불안과 고난 속에 있는 이웃과 더불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나누리라 다짐합니다. 그런 삶만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시편》 시인처럼, 우리의 힘과 구원이신 주님을 신뢰하며, 불안과 공포, 폭력과 고난이라는 ‘죽음의 물결’에 휩싸인 인류를 위한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도 당신처럼 어떤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자녀답게 착한 행실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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