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5. 사순 32일(성모수태고지,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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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 하느님, 천사의 예고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자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육신하심을 알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이루신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7:10-14
  • 성시 – 시편 40:5-10
  • 2독서 – 히브 10:4-10
  • 복음서 – 루가 1:26-38

‘성모수태고지’ 축일입니다. ‘성탄일’처럼 감사와 찬양의 날입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방문하여 아기 예수의 잉태를 알려준 날을 경축합니다. ‘생일(탄생일) 축하’에 익숙한 우리이기에 ‘잉태일’을 축하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잉태’(성육신의 시작)가 시작되지 않았다면 ‘생일’(흔히 말하는 성육신, 성탄)도 없습니다.

우선, 축일의 명칭처럼 오늘은 ‘이중 축일’에 해당합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어머니’ 되심을 예고한 축일이자, 동시에 아버지께 순종하신 독생 성자께서 ‘성육신(강생)하신 시작일’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토대인 ‘성육신’이 현실이 된 복된 날입니다. 사순절을 지내고 있으나 모두가 특별히 감사하고 찬미할 기쁨의 날입니다.

오늘이 축일로 정해진 이유는 ‘성탄절’인 12월 25일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임신기간인 9개월을 교회력에 적용한 셈입니다. 교회사에서 ‘오늘’(3월 25일)을 축일로 지내게 된 시작은 6세기 중반 동방교회에서부터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날짜는 다르지만 ‘성모수태고지’를 기념했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7세기부터 ‘오늘’을 축일로 지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오늘을 경축하면서 먼저 모든 임산부와 태아를 위해 특별한 의향으로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미래의 성인(聖人)을 위탁’받아 양육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부모’라는 온전한 깨우침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수행하도록 맡기신 모든 일을 충성스럽게 이루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대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이렇게 ‘성육신의 시작’ 소식을 알립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 루가 1:28

‘성모수태고지’ 축일을 경축하며 우리가 깨우쳐야 할 ‘진실’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심은 분명히 ‘특별한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이 ‘유일무이’한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특별히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을 더 친밀히 알고 더 깊이 사랑하도록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물론, 그 부르심의 시기와 방법은 우리 각자의 나이와 성향만큼이나 달랐습니다. 그렇게 시기와 방법은 달랐어도 우리는 이제 하느님만이 우리 인생이 찾아온 ‘궁극적 해답’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모든 인생이 추구하는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며 앞으로도 항상 그러실 것입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라고 인사합니다. 하지만 그 ‘축복의 인사’는 마리아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나를 향한’ 인사임을 믿습니다. 나 역시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 ‘자각’이 가장 중요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들, 가령, 부모, 친족, 학벌, 공동체, 재산에 근거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천만에요!

진짜 나는 그런 것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나는 오직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제외하고 나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주님’을 빼놓고서 나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가 그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할 때 천사가 다시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루가 1:30-31

‘아기 예수’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마리아께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주신 하느님의 ‘가장 특별한 선물’입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강생’(降生,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는 ‘신성’(神性)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탄생’도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어머니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 세상에 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이 되는 특별한 선택과 은총을 받았고, 그 존재에 있어서 ‘유일무이’합니다. ‘나’ 역시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은총으로 지금 여기 존재하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독특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가 되라고 나의 이웃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자신을 하느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자신을 ‘완전히 독특하고,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로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지 발견하셨습니까? 하느님처럼 ‘거룩하게’(신성) 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성인’(聖人)이 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의 길을 걸으라고 지금 여기에 나를 보내셨고, 존재케 하십니다. 사도 바울로가 고백했듯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다.”(갈라 2:20a) 주님은 나의 생명입니다. 주님 없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나는 모든 일을 선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주님과 함께”(갈라 2:20b)라면 나는 그리스도처럼 ‘생명의 일’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는 나의 전(全)생애를 걸쳐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그 모든 단계에 이르기까지 ‘당신과 함께’하자고 부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성인과 거룩함의 모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全)생애에 걸쳐 가장 닮아 가신 분의 모본이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입니다.

오늘 ‘성모수태고지’ 축일을 경축하며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예’라고 ‘대답’하는 삶을 말합니다.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방법’에 언제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그 ‘대답’은 진정한 ‘믿음’을 표현하는 ‘작은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분명 ‘인류의 구원’을 돕는 위대한 ‘도약’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되고픈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날마다 그 ‘대답과 순종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아침을 시작하면서, 일과를 진행하는 중에, 그리고 하루의 창문을 닫으며 성모 마리아의 그 말씀을 기도로 바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가 1:38

성모 마리아의 이 ‘자발적 순종’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결정적인 ‘응답’이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한 성모 마리아의 ‘예’라는 응답은 자발적으로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아니오’를 뒤집는 가장 중요한 응답이었습니다. 겸손한 성모 마리아의 ‘예’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아담과 하와의 후예를 치유하는 가장 충성스러운 ‘예’였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충성스러운 ‘예’는 하느님과 멀어진 인류에게 하느님께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사순절은 성모 마리아의 이 ‘응답’이 우리 속에서 ‘기도’로 터져 나오도록 수행하는 여정입니다. 인생 전체가 이 기도에 맞추어져 가는 여정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수행하도록 맡기신 모든 일을 성모 마리아처럼 충성스럽게 이루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진 삶임을 깨닫고 자신을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하느님의 뜻대로 돌려드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응답은 어떤 삶입니까?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한마디로 ‘사랑을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의 삶’을 살라고 은총으로 선택되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로가 가르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도록”(1고린 13:7) 은총으로 선택되고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증오와 불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정복’하도록 여기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원수까지도 사랑의 대상에 포함하며 그 누구도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사랑이신 아버지처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모 마리아께서, 모든 성인이 이미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본질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죽음’을 필수요소로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순종하여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져야 했고, 아버지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는 ‘자기 생명’과도 같은 ‘아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무리처럼 유혹합니다.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라고 말입니다(마르 15:30).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심을 축하합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수태’이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가 ‘닮고 싶은’ 믿음과 순종을 간직하셨기에 공경받아 마땅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단지 말로만 ‘예’라고 말하는 것은 ‘순종’하는 일보다 훨씬 쉽습니다. 단지 사랑을 예찬하고 노래하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죽음’이 없는 사랑은 끊임없이 자기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회사든, 나라이든,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죽음의 사랑’이 없어서 무너집니다.

오늘 ‘성모수태고지’ 축일은 우리에게 이 진실을 가르칩니다. 분명히 ‘성육신’은 ‘즈가리야와 시므온’의 찬미처럼(루가 1:68-79; 2:29-32), 인류의 오랜 기도의 응답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방법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방법에 대해 우리의 ‘대답과 순종’은 항상 성모 마리아와 같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데려오는 거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날도 하느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예’하면서 따르기보다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감동을 주는 힘을 잃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따르기를 기뻐한 오늘 시인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던 시인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예’라고 순종한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고 우리 역시 살아가는 동안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섬김을 통해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는 강생의 도구이기를 기도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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