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4. 사순 31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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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하늘에 계신 성부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다니 3:14-20, 24-25, 28
  • 성시 – 시편 24:1-6
  • 복음서 – 요한 8:31-42

그리스도의 제자란 어떻게 살아갑니까?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그 안에 들어가’ 살아갑니다. ‘마음에 새기고’로 번역한 그리스어 ‘메노’(μένω)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러 살다(stay, abide, remain)의 뜻입니다. 어떤 때 우리는 누군가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가르치신 그 ‘말씀의 영향력’이 자신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이야말로 제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를 세상 사람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참된 믿음을 소유했던 1독서 《다니엘》의 세 명의 유다 청년들처럼 말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기자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그 안에 들어가 사는 ‘사랑의 사람, 섬김의 사람’이 ‘제자’라고 전해줍니다(요한 13:34-35).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제자가 되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요한 8:32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 안에, 정확히는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경우 우리에게 일어날 결과입니다. ‘진리’(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는 ‘봉인을 뗀’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숨기지 않고 공개되고 열린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학문적(철학적, 추상적, 과학적) 진리’(사실, 진실)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 ‘하느님의 실재’(현실)를 가리키는 데 쓰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난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관계’를 말씀합니다(요한 14:6). 즉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결합’함으로써 인간은 ‘죽음의 원인’인 ‘마음의 욕망’과 ‘죄’와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자신을 가두고 얽어매는 생각들, 즉 교만과 자존심과 온갖 관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33절).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초대하시려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자존심’을 다쳤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이 분명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세상 권력’에 종처럼 ‘억압’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살이’를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합니다(38절). 1독서 《다니엘》에서 들었듯이 역사에서 그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대와 페르시아’, ‘그리스제국’의 종이었으며, 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그들은 육체는 제국의 종이었지만 마음만은 결코 그 제국들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 권력’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독립, 해방)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궁극적 차원, 즉 인간을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의 노예’로부터의 ‘자유’(해방)를 말씀하고 계십니다(34절). 다시 말해 ‘내적 자유’입니다. 한 민족과 나라가 ‘정치적 자유’(독립, 해방)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민족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창조된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인류에 속하는 한 ‘죄의 종’이며(로마 3:9-18),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종’은 ‘아버지 집’에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35절).

그들은 다른 민족보다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우월’하고 하느님과 가깝다며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39절)라고 대듭니다. 그들은 ‘교만’했고, 자신들만의 ‘관점’에 여전히 갇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유일한 아버지는 ‘오직 하느님입니다’라고 계속해서 대듭니다(41절).

예수께서는 명백히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창세 12:1-4a; 15:6; 로마 4:3,11-25), 하느님을 영접하고 대접하였으며(창세 18:1-8), 하느님의 명령을 지켰고(창세 22:1-18), ‘그리스도의 강생’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요한 8:56). 따라서 그들이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37,42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37,40절). 예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한 그들을 향해, 교만한 그들을 향해 그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한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 요한 8:40-41a

‘그들의 아비’는 누구일까요?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그는 정녕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 요한 8:44

실제로 나중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통해 자신들이 ‘죄의 종’이자, ‘악마의 자식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요한 8:39). 유다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은 아닙니다(로마 4:13-24). 더군다나 ‘하느님의 자녀’는 더더욱 아님을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넘겨줌으로써 입증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다니엘》은 ‘주님 안에 거하는 충실한 믿음’에 대한 교훈입니다. 세 청년은 ‘고난의 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주님을 향한 ‘충성스런 믿음’을 간직했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들과 이 시대의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의 ‘한가운데’ 계셨으나 아버지를 향한 ‘충성스런 믿음’을 간직하셨습니다. 세 청년과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와 세계인들이 ‘코로나19’라는 활활 타는 화덕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말씀 안에 살아갈 것을 오늘도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자신의 집으로 삼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덧없는 세상의 쾌락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 안에 집중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포기하고 세상의 가르침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을 자유롭게 한 진리임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세상과 자신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더욱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를 통해 진리를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사람들이, 특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까지 다녀온 교회를 통해서는 ‘해방’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세의 천국을 강조하면서 교회가 현재의 자유를 희생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새로운 관점을 성취했고, 진정으로 자유와 해방을 맛보며 지금 여기를 살고 있습니까?

사순절은 우리 마음과 삶의 중심을 더욱 성찰하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마음과 삶의 중심에 더욱 모시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생각과 관점이 변화되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행동으로 더욱 실천하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우리 안에 새기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말씀, 우리에게서 실천되는 그 말씀이 결국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고, ‘구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유와 팔복의 주인이신(마태 5:3-12)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고 겸손히 주님을 우러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차지하시어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과 나 자신을 보는 방식을 철저히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으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진리로 이 몸을 이끄시어 오늘도 자유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선택하고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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