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2021. 3. 20. 사순 28일(토요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1:18-20
  • 성시 – 시편 7:1-2, 9-11
  • 복음서 – 요한 7:40-52

사순 4주간이 끝납니다. 우리는 주간 <본기도>를 통해 무엇을 ‘목표’로 금주간의 여정을 걷고 있는지 날마다 안내받았습니다. 그것은 ‘새로움’, ‘변화’, ‘새로운 삶’, ‘거듭남’입니다. 한마디로 욕망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기 갱신’입니다. 그 무엇보다 ‘새로움’, ‘자기 갱신’이 필요한 영역은 우리의 ‘연약한 본성’, 즉 ‘마음’입니다. 금주간 이 ‘목표’를 얼마나 성취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기원’을 둘러싼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발견하는 ‘명문장’이 나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말들 말입니다. 제 경우는 그렇던데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예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선포 후에 이어집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 요한 7:37

예수께서는 당신 마음에 있는 것을 숨김없이 온전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초막절’ 축제가 끝나가는 마지막 날 선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속 깊은 곳에서 ‘시원함을 긷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시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더 큰 소리로 맞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기원’을 두고 서로 갈라졌습니다. 서로들 자신들의 지식과 전통에 근거해서 주장을 펼치는데, 상대방을 이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전 경비병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1독서 《예레미야》가 탄원하듯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던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상관에게 ‘복종’해야 하는 자신들의 임무대로 하자면 그들은 ‘예수를 체포’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의 고백 속에 나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빈손’인 것을 보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경비병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 요한 7:46

가슴에 ‘울림’을 주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명문장’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 그만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속 깊은 곳에서 ‘시원함’을 길어 올렸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온 ‘목적’에 대해 ‘양심의 거리낌’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밀스러운 ‘추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용기’를 냈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가까이하고, 깊이 묵상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새 삶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명’을 발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용기’를 내고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 4:12). 정말 우리가 ‘한 말씀’ 듣고자 하는 경외심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우리 역시 ‘성령 안에서 그 신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노발대발(怒發大發)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천박한 사람이라 멸시합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지식(정보)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함부로 ‘판단’하며 ‘저주’합니다.

너희마저 속아 넘어갔느냐?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 요한 7:47-48

그 ‘불편한 자리’에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속단’하기보다는 좀 진정하라며 조언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같은 동료인 니고데모마저 ‘조롱’하고 ‘소외’시킵니다. 그것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부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말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 같은 그 ‘알량한 지식’은 자신들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성전 경비병들과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경비병들처럼 때로는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하며 ‘용기’를 냅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때로는 누군가가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작은 목소리를 보태며 편을 들지만, 공개적으로 용기를 내어 투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십시오. 우리도 언젠가 니고데모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에 전적으로 투신할 정도로 성장할 것입니다(요한 19:39). 고난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한 사랑에 공개적으로 투신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하는 분’이 없어서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만일 ‘붓다’나 ‘무함마드’에게 감명을 받았다면 불자나 이슬람교도가 되었겠지요. 우리는 예수의 말씀에 붙잡혀 하느님의 자녀로 빚어져 가는 변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하며 마음을 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말씀’ 주실 때 우리는 다른 누구를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하지만 신앙인 중에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자랑하려 들거나 논쟁하려 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교파의 ‘특정 신학’이나 ‘신앙체험’을 열심히 설파하려 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완전한 성공회 신학으로 무장했고, 동료 사제들과 신자들은 교육의 대상인 것처럼 아래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완성된 영성가라도 되는 듯 하느님이 세우신 사제들과 하느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신자들을 판단하며, 스승 노릇 하려는 이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인 이가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무슨 특별한 ‘영적 지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떠벌리는 이도 있습니다. 거기서 좀 더 나가면 이단이 됩니다.

그 모든 자랑과 논쟁은 공동체에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에서 ‘사랑’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심오한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이미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사도 바울로가 교훈했습니다(1고린 13:1-3). 그런데도 정작 그들만은 자신이 보아야 할 이 ‘불편한 진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이나 체험은 단지 자기 교만의 표현이며, 공동체에 더 많은 분열과 차별을 초래할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식 자랑은 아무것도 아닌 ‘이기적인 자신’을 보여주는 일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 지식이나, 특정 신학이나, 신앙체험은 좀 부족하더라도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용서, 겸손, 검소함, 온화함, 친절, 공감, 연민의 삶을 일상에서 보여줍시다. 가정이든, 교회든 나라든 공동체가 망하는 것은 ‘정보’나 ‘지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에 따르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특정 교파의 신학, 가령 성공회 신학을 몰랐기 때문에 책망받을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서 확인하시는 것은 오직 ‘사랑의 성적표’ 하나뿐입니다(마태 25:35-40). 이기적인 내가 ‘말씀’ 안에서 변화되어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교회)가 그리스도께 영향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요,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는 유일한 길임을 오늘도 기억합시다.

십자가의 길

《시편》의 시인이 찬미한 것처럼(시편 7:9), 우리의 마음, 뱃속까지 헤쳐 보시는 하느님을 부르며 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주님, 제가 마음에 있는 그것을 말해야 할 그때, 당신처럼 용기를 내도록 도와주소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