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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17. 사순 25일(수요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의 연약한 본성이 풍성한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9:8-15
  • 성시 – 시편 145:8-17
  • 복음서 – 요한 5:17-30

사순 25일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으로 초대된 사람임을 되새기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자선과 단식과 기도 수행의 목표는 결국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고 큰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즉 원로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과 ‘전통’을 신성시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하는 힘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느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유일한 중재소’라는 그들의 주장을 허망하게 여기셨습니다(요한 2:19; 4:20-24; 마태 23:38; 24:2). 예수님은 ‘율법’이나 ‘전통의 권위’에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들었듯이 ‘하느님의 전권’(全權)을 받은 분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안식일 법 준수’와 관련한 거짓된 선민의식에 저항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정해 놓은 율법해석에 따르면, 병자는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에만’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제 복음 이야기(요한 5:1-3,5-16)에서 들은 것처럼, 율법학자들이 정해 놓은 그런 ‘규정’을 ‘초월’하셨습니다(어기셨습니다). 베짜타 못 가의 삼십팔 년 된 병자의 경우는 ‘급성’(急性)이 아니라 ‘만성’(慢性)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고쳐주지 않고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치료 행동을 하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덧붙이자면 치료된 사람이 ‘요’를 들고 간 것은 ‘짐’을 나르는 일에 해당했습니다. ‘짐을 나르기’는 ‘일’에 해당합니다. 안식일은 노동을 금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어기도록 가르치신 분이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율법’을 어긴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위태롭든 그렇지 않든 병에 묶인(귀신 들린 자들) 이들을 고쳐주심으로써 어떤 규정도 ‘사람이 자유와 치유를 얻는 일’보다 소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 본래의 뜻’을 되살리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한숨 돌릴 수 있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자비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안식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마르 2:27; 3:4). 또 예수께서는 ‘정결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소외된 자) 취급 받던 이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실천은 ‘하느님께 전권’을 받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실천이었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인간의 철학이나 종교, 전통이나 제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천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이렇게까지 직접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 요한 5:17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이런 예수님은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과 ‘전통’을 무시하고 어길 뿐 아니라 ‘신성’을 ‘모독’하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결정은 이 위험인물을 ‘죽음’에 넘기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누구신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욱 똑똑히 드러내 주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할 따름이다. …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은 올바르다. – 요한 5:19b,30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아버지를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따릅니다. 이 말씀 속에 드러난 예수님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모든 일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은 우리처럼 ‘자기 성취’나 ‘자아실현의 욕망’이 아닙니다. 자기 주도적이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꿈을 이루는 일이 당신 삶의 기준이고, 일의 원동력입니다. 마치 사랑받는 어린 자녀가 아빠에게 일하는 방법과 일하는 목적을 묻듯이 그렇게 예수께서는 행동하기 전에 항상 사랑하는 아버지를 친밀히 바라보았습니다.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따라 하면서 삶을, 정확히는 ‘사랑’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친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주목받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자기 이름을 떨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지만, 정확히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봉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와 방향도 아버지의 영광입니까? 지금 하는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이유가 ‘내’가 세상에서 위대해지는 자아 성취나 자아실현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버지의 영광입니까? 사랑받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와 사랑의 친밀 속에 살고 있습니까? 내 모든 행동의 근거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입니까? 사랑에 근거한 행동이 아니라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서 멀어집니다.

고요히 기도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와 나와의 사랑을 성찰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을 나누도록 초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제 마음을 열어주소서. 저도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경청하며,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당신이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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