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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2. 사순21일(금요일)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호세 14:2-10
  • 성시 – 시편 81:6-10, 13, 16
  • 복음서 – 마르 12:28-34

동의하실지 모르지만,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가 있습니다.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 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삶의 신비’를 담고 있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성가’(聖歌)도 아닌데 마음에 ‘울림’이 있습니다. 자연과 인생에 관한 질문, 특히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힘겨운 시간들’에 대한 시인의 통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실패의 시간들에 눈물짓고 저항하던 시인은 어느 날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왜 나만?’이라고 묻는 일을 그만두기로 합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힘겨운 시간들’을 겸허히 껴안는 일, 즉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 자신이 찾은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그 인정과 수용의 삶을 시인은 ‘사랑’이라는 거룩한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 ‘사랑’이 자신이 찾아낸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통찰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신비’에서 찾아낸 ‘해답’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찾아낸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께서 ‘살아가시는 방법’에 대해 듣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모든 시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교의 실천 강령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우선순위’, 즉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관한 통찰입니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이 계명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두 계명은 나눌 수 없는 하나입니다. 율법의 정신에 대한 요약이며,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이야기에는 잔잔한 ‘감동’이 흐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동한 율법학자는 그 대답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사랑의 삶’이야말로 그 어떤 예배보다 낫다고 덧붙입니다. 천 번의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보다 ‘사랑의 삶’이 하느님께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슬기로운 대답에 예수님의 마음에도 ‘울림’이 일어났습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 마르 12:34a

‘사랑’이 하느님의 우선순위, 즉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율법의 정신임을 깨우쳐주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봅니다. ‘사랑’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시는 방법임을 들려주신 예수님의 가르침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봅니다. 비켜 갈 수 없는 ‘힘겨운 시간들’ 속에서 ‘왜’라고 질문하면서도 정작 ‘사랑의 결핍’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이 가르침 앞에 고요히 세워봅니다.

아시다시피 모든 ‘사랑’은 ‘인정’과 ‘수용’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기 ‘존재 그대로’ 수용해 주기를 원합니다. 누구로부터요?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이웃에게서 얻는 인정과 수용에 목말라합니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수용해 줄 사람을 찾아 오늘도 헤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권을 타인에게 넘깁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모두가 그렇게 ‘결핍’ 속에 살아갑니다. 모두가 ‘빈약한 자아상’(자기 결핍)과 미래에 대한 ‘자기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수용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저라면 차라리 그런 ‘구걸’을 그만두겠습니다. 이제껏 들고 다닌 허기진 마음의 깡통은 저 멀리 던져버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존재근거이신 창조주 하느님, 그 사랑의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수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인정하시고 수용하셨다는 사랑 가득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사랑의 복음’이 온전히 믿어질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먼저’ 인정하고 수용하며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화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온전히 믿어질 때 우리는 타인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잘 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분명히 이 같은 진실을 포함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그 많은 고통을 치유하는 길은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신 주님을 깨닫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이웃 사랑’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든 문제의 ‘해답’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과 사회와 세상이 겪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진정한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기득권자들의 마음에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눈물 흘리는 비정규직은 없을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의 마음에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눈물 흘리는 가난한 청년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무상한 권력과 돈’을 더 사랑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었기에 우리는 남보다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짐으로써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중받으려 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점점 이 ‘사랑의 복음’을 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마음과 목숨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일을 훨씬 더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용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 나라로 변화해 나가기보다 점점 지옥을 닮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삶의 방법으로 삼으신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사랑하기’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만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해 본 분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감정이나 기분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한 끝에 ‘도달’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면’ 이미 그렇게 하면서 삽니다.

이 순서를 뒤집어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항상 ‘진정한 사랑’이 먼저고, ‘행동’은 그 사랑에 뒤따릅니다. 그렇게 해야 사랑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 살고 있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보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면’, ‘이미 사랑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미 사랑 안에 들어갔을 때는 순서가 바뀝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을 온 존재로 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만이 둘째가는 계명을 온 존재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사랑의 계명으로 살아오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회개합니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계명’이라고 오늘도 ‘한 말씀’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사랑’이 하느님이 살아가시는 방법이라고 깨우쳐주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 가르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목마른 우리에게 그 사랑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아니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사실, 오염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하려는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언제나 ‘진정한 사랑’의 ‘진위’(眞僞, 참 거짓)는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위대한 계명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어 모든 문제의 해답이 ‘사랑’임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게 되는 일에 우리 존재를 헌신합니다. 자신이 사랑 안에서 이미 인정받고 수용된 존재임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를 통해 ‘자신의 진실’을 보게 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봉헌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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