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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1. 사순20일(목요일)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7:23-28
  • 성시 – 시편 95:1-2,6-11
  • 복음서 – 루가 11:14-23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라고 거룩한 고백을 전해줍니다(1요한 4:8).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당신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탄식했듯이 종종 그 ‘사랑의 관계’를 스스로 떠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하느님께 얼굴을 보여드리기보다 ‘등’을 보여드립니다. 종국에는 그분의 얼굴을 등지고 ‘어두운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불효한 작은아들처럼 제멋대로 ‘악한 생각’에 끌려 찬란해 보이는 ‘세상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기도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발견합니까? 행복한 자신이 아니라 불행한 자신, 비참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외로움과 고립, 불안과 두려움, 허무와 절망에 빠진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론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그런 순간조차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외면하고 세상의 숲을 헤매는 가련한 우리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십니다. 어두운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어리석은 우리를 향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예레미야도 이 진실을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가 우리에게 보내신 하느님의 메신저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수단이든 다 사용하십니다. 심지어 외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시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지금도 “어서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랑의 관계’로 반복해서 불러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차지하신 집’이어야 함을 반복해서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누가 차지한 집입니까? 우리는 그 음성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그 음성을 듣고 우리가 ‘마음의 벽’을 허물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평화입니다. 하느님께로 다시 얼굴을 돌리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사랑의 연결입니다.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마주합니까? 돌아온 우리와 함께하려고 다가오시는 사랑의 하느님, 다정하게 웃고 계신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신을 발견합니까? 희망의 자신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우리입니다.

사순절은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악한 생각’에 끌려 하느님을 등진 우리를 부르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아오라는 거룩한 손짓입니다. 고집 센 자아를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라는 초대입니다. 듣지 않겠다고 닫았던 귀를 사랑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다시 만져주시는 접촉입니다. 두려워서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지 못했던 입술을 다시 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에 사랑을 더 많이 부어주시는 초대입니다. 하느님이 차지하신 집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 그 부르심을 들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사순절에 수행하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악한 생각에 끌려 하느님께 등진 우리가 그 사랑에 감복하고 항복했다는 표시입니다. 자기를 갱신하여 다시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다는 거룩한 표시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집이라는 문패를 다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시고 그 인도 속에 살아간다는 거룩한 증언들입니다. 나는 사랑의 하느님께로 완전히 얼굴을 돌렸습니까? 그 일을 방해하는 내 안의 장애물들을 치우고 있습니까?

복음 이야기는 예수께서 ‘언어장애인’(벙어리로 부르기보다 이 순화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을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해방의 이야기입니다. 그 기적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놀란 사람 중에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대신 예수님을 ‘악령의 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요구함으로써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을 증명하라고 고집을 부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편견’과 ‘시기심’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사람이 편견과 시기심에 사로잡히면 진실보다는 ‘거짓’을 말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귀가 막힌 ‘청각장애인’이고, 진실을 말하는 입술을 잃어버린 ‘언어장애인’입니다.

예수께서는 간단한 논리로 그들의 뒤틀린 논리를 반박하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으며, 그 일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의 표시라고 반박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마귀를 무찌르시는 ‘더 힘센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사단’은 ‘속임수’를 통해 인류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사단이 저질로 놓은 일,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1요한 3:8). 인간을 자신의 집처럼 장악하고 있는 사단을 공격하고 몰아내어 ‘하느님의 집’이어야 할 인간을 차지하려고 오셨습니다. 사단의 손에서 인류를 구속하러 오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을 차지하시면 그는 악, 증오, 분노, 정욕, 이기주의로부터 풀려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가 사랑의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우리에게 보내신 메신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와 당신과 함께 살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수단이든 다 사용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가가’가 그 절정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편견’과 ‘시기심’으로 우리의 눈과 귀가 닫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과 손길을 잘 알아차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 겪는 일들 속에서 그런 알아차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힘에 오늘도 눈을 뜨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독생자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차지하신 하느님의 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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