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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10. 사순19일(수요일)

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4:1, 5-9
  • 성시 – 시편 147:12-20
  • 복음서 – 마태 5:17-19

사순절에 우리 교회는 《욥기》 필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루 한 장씩 필사하자고 했지요. 오늘은 <22장>을 필사할 차례입니다. 이렇게 필사해나가면 성주간 화요일이면 마칠 수 있습니다. 몇 장을 필사 중이신지요? 필사하는 동안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고 있습니까?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필사의 진정한 목적인데, 혹시 의무감과 달려가는 글씨만 노트에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외에도 우리는 정오에 묵주기도 바치기와 아침 성찬례 <전례독서>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전례독서>를 통해 치우치지 않고 종합적으로 성경을 읽도록 안내합니다. 그렇지만 자주 읽고 묵상하는 <성경>의 책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책을 자주 읽는 편입니까? 신약을 자주 읽는 편입니까? 아니면 구약을 자주 읽은 편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서통독을 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어떤 분은 구약은 잘 읽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까지는 ‘이야기’라서 그나마 견딜 만한데, 희생 제사 예절과 단조로운 율법이 반복되는 《레위기》에 이르면 그만 포기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약의 하느님은 다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정복 이야기에 등장하는 전쟁의 하느님, 이스라엘만을 편애하시는 하느님이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구약에 대해 오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로마서》를 많이 읽은 분들은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는 것이지 구약처럼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구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에게 ‘권한’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구약의 가르침은 ‘무효’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랬을까요? 율법과 예언서로 대변되는 구약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복음 이야기는 산상수훈에 속하는 단락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똑똑히 밝혀주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 5:17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의 말씀인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당대의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육신의 목적을 밝히시면서 ‘없애다’와 ‘완성하다’라는 두 단어를 대조하십니다. ‘없애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카탈루오’(καταλύω)는 ‘폐지하다’, ‘파괴하다’, ‘철거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무효화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자신이 ‘율법’(토라)으로 대변되는 구약 전체를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완성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플레루’(πληρόω)는 ‘가득 채우다’, ‘이미 시작한 것을 완료하다’, ‘설계된 목적을 이루고 이행하다’, ‘보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목적대로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재차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 마태 5:18

‘분명히’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우리가 잘 아는 ‘아멘’(ἀμήν)입니다. 기도를 끝맺음할 때처럼 ‘아멘’이 말이나 문장 마지막에 나올 때는 앞의 내용에 ‘동의’하거나 ‘그대로 되기를 원한다’라는 뜻입니다. ‘아멘’이 말이나 문장의 맨 앞에 나올 때는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부터 하는 말씀이 가장 확실한 영적 진리라는 엄숙한 ‘확언 공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멘’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이 ‘율법’을 얼마나 깊이 존중하는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큰 주제(메시아)만을 성취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예언과 구절까지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마치 율법 선교사처럼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그다음에는 율법(토라, 613개의 계명)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더 강력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 마태 5:19

이 말씀은 ‘은혜’만을 강조하는 우리를 긴장시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구약의 가르침’(율법과 계명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혹여라도 그런 생각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새겨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계명 실천과 계명을 가르치는 일 둘 다에 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 분명히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자의 삶은 스승을 배우고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배경에서 이 같은 가르침을 주신 것일까요? 반대자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자유로운 율법 해석’을 트집 잡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토라), 즉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나쁜 선생’이라고 그들이 ‘악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장로들의 전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비유로 말하면 자신들은 ‘모세’로부터 ‘교원자격증’을 받았는데, 교원자격증도 없는 예수가 ‘교사’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 예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토라)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것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전해 준 모세 정도가 아니라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느님께’ 직접 교원자격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에 담겨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초대된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치십니다. ‘율법’(토라)이 ‘근본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본문에 뒤따라 나오는 단락(21-48절)에서 예수님은 이 점을 명백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21-26절), ‘간음하지 말라’(27-30절), ‘이혼하지 말라’(31-32절), ‘거짓 맹세하지 말라’(33-37절), ‘보복하지 말라’(38-42절), ‘원수를 사랑하여라’(43-48절). 이 여섯 개의 단락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깊이와 높이와 정신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완성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따르면 당대의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강등’(격하)시켰습니다. 물론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기를 원했습니다. 시대 상황이 변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분석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규정하고 제한했습니다. ‘장로들의 전승’도 이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문자만능주의’, 즉 그 문자 규정대로 따르기만 하면 율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 문자적 엄격함과 철저함으로 인해 그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율법의 참된 준수는 각각의 규정을 문자적으로 엄격하게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 즉 ‘문자만능주의 법해석’은 오히려 율법을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율법의 참된 준수는 ‘마음’과 ‘생각’에 있음을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 ‘행동’으로 율법에 규정된 ‘문자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았느냐보다 상황에 서 있는 인간의 ‘속마음’에 주목하셨습니다. 행동보다는 속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의 해석이 아니라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원래 의도’에 더 주목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더 높은 의식의 단계’로 넘어가도록 제자들을 이끄십니다. ‘율법의 원래 의도’를 새기도록 가르치십니다. 율법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자들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아버지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목적을 이루시며, 율법이 바라는 그 정신을 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주목하면 ‘율법의 정신’, 즉 ‘하느님의 원래 의도’를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나라’(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모본’하여 스스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그의 자리를 결정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모본’하여 우리도 좋은 스승이 되어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인생길의 진리’를 주신 하느님의 뜻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가장 잘 배워야 할 ‘율법의 정신’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던 율법교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 마태 22:37-40

‘골자’라는 말씀은 ‘요점’이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율법, 즉 《성경》의 ‘정신’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를 주신 하느님의 원래 의도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삶이며, 《성경》을 완성하는 삶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무엇을 통해 표현할 것입니까? 우리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무엇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심지어 사랑의 책인 《성경》을 가지고 ‘영원한 사랑’(영원한 생명)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소외시키는 무기로 사용하는 나쁜 스승들도 많습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갱신하는 사순절입니다. 다른 사람들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돌아봅니다. 문자만능주의 법해석에 빠졌던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 같은 태도는 없는지 성찰합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수행’을 잘 이어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새로움’(거듭남)을 수행해 가는 이 절기에 참으로 하늘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임을 증명하라고 오늘도 주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사랑’이 전부임을 배웠습니다. 선한 일, 옳은 일인 ‘사랑’을 하라고 세상으로 파송된 우리입니다. 오늘도 사랑을 삶으로써 우리가 언젠가 좋은 스승이 될 착한 학생이기를 기도합니다. 착한 학생답게 오늘의 숙제들을 수행하는 모두에게 맑은 기운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마음에 필사하는 《욥기》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은총 입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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