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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7. 사순3주일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계명을 새겨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20:1-17
  • 시편 – 19
  • 2독서 – 1고린 1:18-25
  • 복음서 – 요한 2:13-22

사순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르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의 기원은 ‘부활절’에 세례받을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한 옛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시어 그들을 ‘해방’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과월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이 ‘오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종살이와 출애굽, 홍해를 건넘과 광야 생활, 가나안 정착 등은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본보기’입니다(1고린 10:6,11).

예비 신자들 역시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은총의 사건을 사순절에 배웁니다. 먼저 ‘인류’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노예’로 살고 있음을 그들은 인식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을 믿고, ‘세례의 물’을 적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방’과 ‘자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연 ‘부활절’에 세례할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려는 목적이 사순절에 담겨 있었습니다.

사순절 주일마다 낭독하는 <전례독서>도 이 목적을 반영합니다. 우선 예비 신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이란 무엇인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이것이 사순 1주일 전례독서 주제입니다. 사순 2주일에 그들은 ‘믿음’이란 무엇인지, 어떤 각오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 확실히 교육받습니다. 이것은 ‘제자도’를 언급한 지난주 전례독서 주제입니다.

이제 사순 3주일, 예비 신자들은 ‘십자가 사건’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배웁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방된 이스라엘은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통해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 예비 신자들도 ‘은총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영원한 계약의 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합니다. 또한 그들은 십가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우주 안에서의 ‘독보적’ 위치에 대해 배웁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요,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이자 힘(능력)임을 배웁니다. 이런 교육의 목적으로 배정된 <전례독서>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예비 신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이미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숙고하게 하는 초대입니다. 앞으로 남은 사순 4, 5주일도 우리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다주신 은총의 선물들을 묵상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전례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들려줍니다.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려주신 ‘열 마디 말씀’입니다. ‘생명과 신뢰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온 명령들입니다. 모든 율법의 기초이자 계약 백성인 그들이 ‘생명’처럼 지켜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십계명을 해설하는 다른 설교를 보고 싶은 분은 2020. 10. 4. 연중27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크게 두 개의 축입니다. 전반부는(1-11절) 하느님과 이스라엘, 후반부는(12절-17절) 이스라엘과 이웃과의 관계를 축으로 합니다. ‘살아있는 공동체’, ‘신뢰하는 공동체 관계’를 위한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들은 혼자만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실현해야 할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공동체, 즉 ‘새로운 생명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그들을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역사의 시초가 되는 사건을 상기시키는 하느님의 ‘자기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 출애 20:2

하느님께서는 ‘이미’ 자기 백성들을 위해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은총의 사건인 이 ‘최근 경험’(과거 경험)을 통해 수립된 ‘권위’가 계약의 근거이자, 이스라엘이 계약을 준수해야 할 충성의 기초입니다.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고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 출애 20:3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독점권’을 갖습니다. 어떤 경쟁 상대도 하느님 얼굴 앞에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그들만 독점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보아야 합니다(참고 1고린 13:12). 하느님과 그들이 마주할 수 없도록 사이에 있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4-5절a).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이러한 ‘배타적 권한’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5절b). 자신들을 해방하신(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완전한 충성’을 바치는 일이 이스라엘의 ‘절대적 의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순종과 충성은 ‘구원의 하느님’을 향한 당연한 ‘응답’이지 강요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계약 조항들을 ‘~하지 못한다.’, ‘~하여야 한다’라는 형태로 명백히 제시하십니다. 그 조항들은 ‘생명과 신뢰의 공동체’로 살기 위한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준수해야 합니다. 어길 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묻는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습니다(5절c). 그러나 준수하는 이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받습니다(6절). 고대는 개인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 중심 사회’라는 점을 알려주는 요소들입니다. 참고로 이것은 ‘에제키엘’ 예언자 시대에 가서는 새롭게 정립됩니다(에제 18장).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 출애 20:7a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인 ‘야훼’(יהוה Yahweh)를 알려주십니다. 참고로 유대인들은 ‘야훼’라는 이름이 나오면 ‘아도나이’(אדני Adonay, 나의 주님) 또는 ‘하-셈’(השם ha-shem, 그 이름)이라고 읽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에도 ‘이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이름을 알면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배력’(통제력, 영향력)을 갖는다고 믿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일도(창세 2:19-20), 광야의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은 이유도 이런 사고의 반영입니다(출애 3:13).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그만큼 그들을 ‘신뢰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마저 아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섰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것인지는 그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름을 ‘존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일은 ‘모욕’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7절).

가령, 일상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둘러대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개인의 목적’을 위해 ‘거룩한 이름’을 ‘오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저주하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악한 목적’을 위해 ‘거룩한 이름’을 ‘오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아서 ‘거짓 맹세’가 되게 하는 일도 ‘신성모독’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했기 때문입니다(레위 19:12; 민수 30:2; 신명 23:21-23; 마태 5:33-37). 더욱이 ‘이름’은 한 인생이 걸어온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생의 스승인 분으로 ‘신영복 선생님’이 계십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학교 동기 중에 그분을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학교에 계실 때 처음 만드신 ‘서도반’(書道班) 회장이 저였습니다. 자식들 이름도 지어주셨고, 2003년 두 권의 묵상집을 낼 때는 직접 ‘제자’(題字)를 써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언젠나 그 ‘향기’를 숨길 수 없는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됩니다.

벌써 5주기가 지났습니다. 그분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신영복의 이름으로’라고 하면, 이것은 ‘신영복이 살아온 인생길’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고 ‘기도’를 끝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살아온 길을 따른다’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길’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 ‘야훼’(주님이라 읽습니다)도 ‘주님이 살아오신 길’입니다. 결국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라는 명령은 ‘길’(생명)이신 하느님을 따라 걷지도 않을 거면서 ‘함부로’ 부르는 ‘신성모독’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엉뚱한 길’(죽음의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이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허상’, ‘망상’, ‘공상’으로 만드는 ‘죄’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 출애 20:8

‘안식일 준수’의 근거는 ‘창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창세 2:1-3, 출애 16:23-30, 31:12-17). 안식일 준수는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일이자, 창조주의 ‘쉼에 참여’하는 일입니다(비교, 신명 5:15).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쉼’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구약성서에 ‘거룩하다’(qadash)라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세속이나 부정한 것에서 ‘구별함’(분리됨)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께 속한 것을 ‘거룩하다’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일을 ‘쉼’(멈춤)으로써 안식일을 하느님께 속한 날로 ‘구별’한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그 이름에 맞게 섬기는(예배하는) ‘영광’(히브리어로 kabod)이 됩니다. 한마디로 공동체가 준수하는 ‘시간의 거룩함’(시간을 구별함)이 ‘안식일 준수’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이 ‘봉헌’하는 모든 ‘전례의 초석’(礎石)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하루, 하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근본이었습니다. 분명히 ‘안식일의 쉼’은 가부장제 속에 살던 아이들, 종들과 일하는 가축이나 얻어먹던 사람들(외국인)을 포함하여 공동체 전체에게 보장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약시대에 와서 안식일은 제 팔일, 즉 진정한 평화인 주님 부활의 날로 안내하는 ‘문’이 됩니다.

지금까지 앞선 4개의 계명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큰 축, 즉 다른 신들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대해 교훈 받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이웃과의 관계, 즉 ‘생명과 신뢰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큰 축이 등장합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 출애 20:12

이 계명은 본래부터 성인(成人)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주 이 계명은 초등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지켜야 할 계명인 것처럼 말해져 왔습니다(에페 6:1-3). 그러면 ‘부모’란 누구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어디일까요? 일차적으로 그 부모는 우리 생명의 기원인 육신의 부모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축소할 일은 아닙니다. 그 부모는 우리를 ‘영적인 삶’(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이들도 포함합니다. 말하자면 ‘영의 부모’입니다. 그 부모를 공경하고, 인도함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 즉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습니다.

이어서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계명들이 등장합니다. ‘생명과 신뢰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직접적으로 행위들을 금지하는 명령입니다. 살인, 간음(거짓 사랑), 도둑질(특히 요즘 같은 시절은 타인의 생각이나 이론, 논문이나 설교 표절), 거짓 증언은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와 사회의 토대를 위협하는 심각한 ‘악행들’입니다(13-16절). 끝으로 ‘탐욕’(가부장적 성(性) 편견을 보이긴 합니다)을 다루는 계명이 등장합니다. 십계명 중 유일하게 행위가 아니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계명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배웁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어떻게 경외하며 살았고, 그들 서로와 어떻게 관계했는지를 배웁니다. 이런 점들로 비추어볼 때 모든 율법의 중심인 십계명은 참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십계명과 예수님이 어떤 관련이 있어서 우리가 오늘 <전례독서>로 살펴본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율법)을 ‘재해석’하시고,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17). 실제로 ‘율법’은 종종 독특한 문화적 가치 또는 관습을 포함합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 경계를 넘어설 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를 없애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이신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기대를 성취하신 분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그 자체보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3:1-7; 요한 5:1-18).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 마음, 즉 ‘숨은 의도’를 더 중요시하셨습니다(마태 5:21-22,27-28,31-37). 십계명(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마르 12:28-31). 사도 바울로도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로마 13:9-10).

《시편》으로 노래한 <19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계시하는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하느님의 영광과 솜씨를 드러내는 ‘자연’이라는 ‘일반계시의 책’입니다. <성가 260장>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생각나셨다면 <성경>을 가까이하신 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본문에서는 법, 법도, 분부, 계명, 말씀, 법령으로 표현)이라는 ‘특별계시의 책’입니다. 간단히 <성경>입니다.

시인이 소개하는 이 두 권의 책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솜씨를 선포하고, 인생이 걸어야 할 ‘하느님의 길’을 제시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론자로 꼽히는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편>을 가리켜 《시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詩)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서정시’ 중 하나라고 썼습니다. 루이스처럼 <19편>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이라는 음악가입니다. 가장 유명한 곡은 ‘천지창조’라는 ‘오라토리오’(oratorio)입니다. ‘헨델’의 사후(死後) ‘메시아 공연’을 영국에서 관람한 후 그 영향을 받아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와 《시편》,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을 내용으로 한 대본에 곡을 붙였습니다. 전체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를 마무리하는 14번 곡이 “저 하늘은 주의 영광을 속삭이네”입니다. <19편>을 가사로 한 유명한 합창곡입니다. 시간을 내서 전곡을 들어보신다면 영혼의 고양(高揚)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두 계시,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책을 소개하는 <19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1-6절)은 ‘자연’이라는 ‘일반계시의 책’이 하느님을 ‘창조주’로 선포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자연’(自然, 스스로 그렇게 있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창조 솜씨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용하기에 조심스럽습니다.

시인은 비록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피조물인 하늘과 창공, 낮과 밤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솜씨를 선포한다고 노래합니다. 마음의 귀가 열리면 우리는 그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함께 경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우리에게 선물 된 생명의 터전입니다. 그중 어느 것도 제2계명에서 금지하듯이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무신론자들은 우주와 그 만물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 주장합니다. 수많은 ‘우연의 일치’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리수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이지 밤하늘을 보면서 그 모든 별이(시편 기자는 ‘해’마저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밝힙니다) 우연히 생겨났다고, 우리 몸의 그 정교한 작동이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습니다. 차라리 하느님께서 그 모두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 정직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솜씨를 찬양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두 번째 단락(7-10절)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성경)이라는 ‘특별계시의 책’에 대한 예찬입니다. ‘율법’(성경)이 예찬받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일반계시의 책인 창조 세계와의 대조가 재미있습니다. 하늘과 창공, 낮과 밤이라는 피조물이 전하는 창조의 메시지는 분명 우주에 가득합니다.

그러나 시인처럼 마음이 맑은 사람이 아니면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은 일반계시의 책인 창조 세계만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반계시의 책인 창조 세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마음이 오염된 인간에게는 ‘부분적’이고 ‘희미’합니다. 창조 세계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에게는 충분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특별계시의 책인 ‘율법’(궁극적으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7-9절). 특별계시의 책인 ‘율법’(성경, 말씀)에는 인간의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은 완전하고(이지러짐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그릇됨이 없고(정직하고), 티 없이 맑으며(순수하며), 참되기에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지혜를 주며, 기쁨과 깨달음을 줍니다.

이런 이유로 시인은 율법이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송이꿀’보다 더욱 달다고 예찬합니다(10절). 자연이 육체적 생명의 터전이라면, 율법은 온전한 삶, 즉 영적 생명의 터전이라는 찬미입니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해’(해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의 지배를 받듯이 우리의 영적 삶은 하느님의 지혜인 ‘율법’(말씀)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두 번째 단락은 특별계시의 책인 율법에 대한 예찬입니다.

마지막 단락은 자신이 ‘율법’을 통해 깨달은 진실을 가지고 바치는 시인의 기도입니다(11-14절). 시인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백히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율법)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를 기뻐하시고, 그에게 후한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11절). 율법에 대한 참된 예찬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순종’하는 삶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고 보니 시인은 자신의 실상이 보였습니다. 자신이 ‘허물 많은 죄인’임을 보았습니다. 그런 자신을 참아주신 ‘용서의 하느님’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죄의 길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12-13절). 그 ‘말씀’(율법)으로 자신이 날마다 ‘깨우침’을 받고, ‘정화’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을 바위, 즉 ‘견고한 구원자’로 확신하면서 생각과 말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들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합니다(14절). 흠 없게 살기를 원한다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차지하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하며 삽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율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율법’(하느님)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엄격한 지시사항’(율법교사)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1독서 《출애굽기》에서 보았듯이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계명)은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평화롭게 영위하는 길을 깨우쳐주는 ‘진리’입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율법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합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율법)은 순금덩이보다 더 소중히 여겨져야 합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위해 의도하신 질서를 반영하며, 생명과 신뢰의 공동체로 살기 위해 존중할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여러분도 이 시인처럼 창조 세계가 들려주는 찬미를 들을 수 있습니까? 창조 세계는 분명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책’(일반계시)입니다. 창조 세계는 하느님을 알려주는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로마 1:19-23). 바라기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창조 세계를 창조주의 목적에 맞게 적합한 방법으로 읽게 하는(해석하도록 하는) 과학자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신론자들처럼 눈과 귀가 어두워져서 우주는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음 없는 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율법)에서 ‘생기’를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덕택에 ‘진실’(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까지 포함하여)을 보는 눈이 더욱 밝아졌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언제나 하느님 마음에 드실 만큼 맑습니까? 사순절 여정 속에 있는 우리가 고요히 성찰해 보아야 할 중심 주제들입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하느님의 힘과 지혜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힘과 인간의 힘,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를 대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인류를 ‘하나의 중심’으로 불러 모은 하느님의 힘과 지혜입니다. 같은 십자가인데, 구원받을 사람들과 멸망할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작용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허튼소리) 보입니다(18,23절). 왜 그렇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처럼 무능력하고 불명예스럽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일을 허용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범죄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 그 실패자가 숭배의 대상인 ‘신’(神)일 수 없다고 사고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힘과 지혜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십자가는 ‘모순’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입니다. 십자가는 완전한 실패이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이치’는 인간의 죄와 허물과 곤경 속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기쁜 소식’(福音)입니다(21절). 이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치)이 하느님 사랑의 깊이와 힘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표현입니다(18절, 25절).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 죽음에서 사랑의 힘을 봅니다. 하느님은 십자가 복음에 가슴을 여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입니다(24절). 진정한 특별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참 지혜가 알려집니다. 동시에 성육신하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가리키시는(하느님께 이르는) 진정한 길입니다(요한 6:6).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그 유명한 ‘성전 정화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시라는 ‘자기 선언’입니다. <공관복음>에는 단지 한차례의 ‘과월절’이 언급됩니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세 차례’에 걸쳐 ‘과월절’을 언급합니다(요한 2:13, 6:4, 11:55). 이것을 근거로 교회는 예수께서 약 3년 동안 공생애를 사셨다고 가르칩니다.

<공관복음>은 ‘성전 정화사건’이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인 ‘성주간’에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이 일로 인해 종교지도자들과 충돌을 빚고 구속되어 사형에 넘겨집니다. 그러니까 ‘성전 정화 사건’이 예수의 ‘최후 운명’을 결정짓습니다(마르 11:18). 반면에 《요한복음》 기자는 ‘공생애 초기’에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예수의 최후 운명을 결정한 일은 성전정화 사건이 아니라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일입니다(요한 11:45-53). ‘라자로’는 살고 ‘예수님’은 죽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성육신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건이 일어난 시기도 다르고, <복음서> 안에서의 위치도 차이가 납니다. 세부적인 사항들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과월절’ 전, 즉 ‘명절을 준비하는 기간에 있었다’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과월절’이 다가오면 명절 전에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곤 했습니다(요한 11:55).

먼저 사건의 배경인 ‘과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과월절 축제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고, 그 구원의 정신을 다시금 구현하고자 지키는 축제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성전’에서의 축제(제의)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해방’에 더는 이바지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축제’나 ‘참된 예배’가 봉헌되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성전은 ‘장사하는 집’(다른 복음서에는 강도의 소굴, 루가 19:46)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누가 장사하는 집일까요? 제물로 봉헌될 가축들을 파는 ‘장사꾼’이나 ‘환금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단지 ‘깃털’입니다. ‘몸통’은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같은 유다 사회의 특권층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정치, 종교, 경제의 최대 수혜자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정치, 종교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장 중요했습니다. 도시 전체의 경제가 ‘성전’에 의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해마다 ‘3차례’ 의무적으로 ‘성전’을 순례하여 ‘축제’를 지키도록 명령합니다(출애 23:14-17).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다른 축제들도 지켰지만, 이 세 축제는 근본적으로는 ‘출애굽’과 연결된 사건이기에 더욱 특별했습니다.

현실은 어땠을까요? 해마다 3차례나 성전을 순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은 내국인이라면 해마다 1번은 성전에 올라오도록 가르쳤습니다. 세계에 흩어져 살던 일명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평생 1번은 ‘성지’를 순례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물론 평생의 꿈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1세기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합니다. 그 도시가 명절 기간이 되면 30만 명까지 인구가 치솟습니다. 찾아든 순례자들 때문입니다. 엄청난 수의 순례자들이 명절 기간 유입되면 ‘물’과 ‘숙박’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은 식수로도 중요했지만 ‘정결례’를 위해서도 꼭 필요했습니다. 한편, 그 많은 순례자는 도시에 ‘부’(富)를 가져왔습니다. 명절 기간 ‘숙박비’로 많은 돈을 썼고, 기념품도 샀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는 그야말로 도시 경제의 중심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성전’은 예루살렘에 엄청난 ‘수익’을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대사제들’(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진짜 몸통)은 해마다 열리는 연속된 ‘축제들’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습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희생 제물’ 거래입니다. 순례자들은 성전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결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연 ‘희생 제물’이 필요합니다. 멀리서부터 ‘희생 제물’을 가져올 수 없으니 ‘현지조달’ 해야 합니다. 그 일은 대사제 가문이 ‘부’(富)를 축적하도록 도왔습니다. 잠시 후에 설명하겠지만, ‘이방인의 뜰’을 차지한 ‘상인들’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성전세 환전’입니다. 로마제국은 ‘세리’를 통해 제국의 통치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세금에는 ‘속주세’(屬州稅)와 기타 ‘직접세’(인두세, 토지세, 소득세)와 ‘간접세’(관세, 통행세, 판매세)가 있었습니다. 이 세금 외에도 20세 이상의 유대 성인 남성이라면 일종의 ‘종교세’(성전세, 십일조 등)를 성전에 냈습니다.

‘성전세’는 율법에 따라 반 ‘세겔’을 냅니다(출 30:11-16). 오늘날로 계산하면 성인 ‘이틀 치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성전세’는 반드시 유대인의 공식 화폐인 ‘세겔’로 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의 공식 통용 화폐 이름은 ‘세겔’입니다. 당시 ‘성전세’로 통용되던 ‘세겔’은 ‘띠로’에서 주조된 ‘동전’이었습니다. 그 동전도 ‘로마인의 동전’처럼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십계명’에 어긋났습니다. 하지만 ‘무게’가 정확하고, ‘순은’(銀)에 가깝다는 이유로 율법학자들은 ‘공식 화폐’로 인정했습니다. ‘성전세’는 ‘거주지’에서 제사장들이 거두었고(마태 17:24~27), ‘종교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의 땅을 제사장들은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외국에서 성지를 찾은 순례자들의 경우는 로마 동전을 ‘세겔’로 ‘환전’해서 직접 성전에 냈습니다. 안 내고도 낸 척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평생에 1번 순례까지 온 이들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면서 거짓말할 리는 없습니다. 더욱이 ‘성전세’는 ‘율법의 명령’입니다. 여기에도 ‘환전상’과 ‘대사제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당시 ‘환전상’(환금상)은 주로 ‘레위 지파’ 사람들이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순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헌금’도 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과 순례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엄청난 양의 ‘성전세’와 ‘십일조’, ‘구제 헌금’은 어디에 보관했을까요? ‘여인의 뜰’에 있던 성전 ‘보물창고’에 쌓여 있었습니다. 축제가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사제 가문’의 막대한 ‘부’(富) 축적의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또 하나의 ‘몸통’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율법’을 보존하고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거룩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백성은 그들을 ‘랍비’라고 부르며 신뢰했고, 존경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대사제 가문의 ‘이권 개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백성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마태 23:4), 말솜씨를 부려 가난한 이들을 ‘착취’했습니다(마르 12:40). 그들도 돈을 좋아하던(루가 16:14-15) ‘위선자들’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마태 23:2-39).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마지막 ‘몸통’은 ‘산헤드린’(의회, 최고법정)의 ‘원로들’입니다. 그들도 ‘대제사장 가문’과 한 통 속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사두가이파’ 출신입니다. 사두가이파는 주전 2세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의 운영권을 쥐고서 세력을 키웠던 이들로 ‘제사장 조직이 정치화된 당파’입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로마제국’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산헤드린’(의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산헤드린의 ‘의장’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회)은 현실 종교, 정치, 경제의 실세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해방’에 이바지하기보다는 타락과 부패, 억압과 착취의 상징이었습니다. ‘참된 예배’가 아니라 특권층만의 ‘부’(富)와 상인들의 영리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성전체제’라면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전 정화사건의 배경’입니다. 열정 가득한 예수께서 ‘성전’에 가신다면 그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운명이며, 시대 구조입니다. 사순 2주일 복음 이야기에서 들은 것처럼 예수께서는 ‘첫 번 수난 예고’를 하시면서 당시 특권층들, 즉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임당할 것임을 자신의 운명으로 이미 예고 하셨습니다(마르 8:31).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도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반대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성전 뜰’에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전 뜰’은 어디일까요?

‘성전’은 본래 3구역으로 나뉩니다.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의 뜰’, 이스라엘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 여인들도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여인의 뜰’을 거쳐 ‘이스라엘의 뜰’을 지나 제사장에게 ‘희생 제물’을 건네는 구조입니다. ‘성전’은 ‘제사’가 바쳐지는 곳이기에 봉헌할 ‘희생 제물’이 필수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제물’을 마련할 수 있는 ‘장터’가 필수입니다. 그 장터는 ‘성전 경내’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 경내와 가까운 장소에 ‘제물’(소, 양, 비둘기)을 살 수 있는 ‘장터’가 생깁니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상거래는 합법적입니다.

흔히 말하는 ‘이방인의 뜰’은 본래 있던 ‘성전 구역’(성전 경내)이 아닙니다. 그 구역은 헤로데 대왕이 제 2성전인 즈룹바벨 성전을 확장하면서 늘어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장터’ 역할을 했습니다. 순례자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노점상’ 역할을 했습니다. 거기서 순례자들은 ‘봉헌물’을 구입하고, 로마 동전을 ‘세겔’로 ‘환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방인의 뜰’까지 ‘성전 경내’가 되었습니다. ‘성전 제사’와 ‘성전체제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공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순례자들은 ‘이방인의 뜰’로 불리는 ‘편의시설’이 있는 구역을 지나 ‘여인의 뜰’을 거쳐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성전 구조이기에 꼭 장사꾼이 아니더라도 ‘계산’에 빠른 사람은 그 공간을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경쟁률이 심하더라도 일단 ‘임대’하면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임대허가권’을 누가 행사했을까요? ‘대사제 가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체제’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병폐’를 발견합니다. 대사제들은 본래 성전 구역 밖에 있어야 할 ‘편의시설’이 성전 경내에 들어오도록 용납했습니다. 직접 상점들을 운영하거나 ‘임대허가권’을 갖고서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성한 직책을 오용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지금 그 구역을 지납니다. 명절을 앞두고 있었기에 수많은 인파가 붐볐습니다. 여기저기서 제물로 바쳐질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거기서 특히 부산을 떠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셨습니다. 그들은 ‘참된 예배’을 도와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의 뜰’까지 내려와 장사꾼들 사이에 끼어 ‘장사’하면서 부산을 떨었습니다. 다른 장사꾼들처럼 제물로 쓰일 소와 양들을 팔거나 흥정하면서, 또 ‘세겔’로 환전해주면서 ‘폭리’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성전’은 신성한 전당이 아니라 ‘탐욕의 소굴’로 변해 있었습니다. 영적 정화의 장소가 아니라 이득에 눈먼 이들로 ‘오염’되었습니다. 가축들의 울음소리와 흥정 소리로 가득 찬 단지 영리 목적의 ‘시장’일 뿐이었습니다. 기도나 참된 예배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부(富)의 축적’ 공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성전’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갑작스럽게 행동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끈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우며 지나가셨습니다. 자리에 앉아 그 끈들로 조심스럽게 시간을 들여 ‘채찍’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하실 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신 예수께서는 채찍으로 양과 소를 향해 휘두르며 쫓아내기 시작하셨습니다. 환금상(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그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요한 2:14-16). 우리가 알고 있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비교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이 행동을 ‘거룩한 분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비둘기 장수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으십니다.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 요한 2:16

비둘기는 새장에 갇혀있기에 그들이 직접 거두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극도로 분노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참된 예배’가 봉헌되어야 할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영리 목적의 ‘시장판’이 된 것을 아버지의 아들로서 견딜 수 없다는 뜻입니다. 놀란 순례자들과 장사꾼들은 예수님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피해 다녔습니다. 극도로 분노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특히 순례자들은 ‘정결례’를 준비하는 자신들의 거룩한 행동을 방해하는 미치광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혀 다르게 보았습니다.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의 머리에는 《시편》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당신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 시편 69:9a

<시편 69편>은 불의하게 고발당하여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 이가 하느님을 신뢰하며 바치는 탄원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예식 순서 중 ‘재축복’을 하기 전 ‘교송’(交誦)했던 《시편》이 바로 <69편> 1-3, 5, 16절입니다. ‘교송’하면서 사순절 여정을 출발하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했습니다. 몇몇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기에 <69편>은 ‘메시아 시’(詩)라고도 불립니다.

가령, 《요한복음》에는 <69편> 9절 a외에도 4절 a가 예수님의 설교에 인용됩니다(요한 15:25). <69편> 21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맛보신 일에서 성취되었다고 《요한복음》은 기술합니다(요한 19:28-30). 또 ‘모욕’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69편> 9절 b는 십자가에서 죽음의 쓴잔을 마신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하는 《로마서》 15장 3절에 인용됩니다.

이외에도 시인을 고발하는 이의 거처는 “사는 사람이 없어질” 정도로 ‘황폐’해지기를 탄원하는 <69편> 25절은 가리옷 사람 유다가 산 ‘피의 밭’을 묘사하는 《사도행전》 1장 20절에 인용됩니다. 더욱이 <69편>은 참된 예배와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나 황소를 바치는 일보다 ‘찬미가’로 하느님의 이름을 기리고, ‘감사의 찬송’으로 하느님을 높이는 일을 더 기뻐하신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시편 69:30-31).

이처럼 <69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연결되고, 참된 성전 예배와도 연결됩니다. <69편>을 알고 있는 제자들이 보기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결례’를 방해하는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집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 ‘의로운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예수를 사로잡았습니다. ‘성전’이 ‘특권층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 되게 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성전’이 ‘하느님의 집’에 맞는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어야 한다는 ‘열정’이 예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사명을 완수하는데 자신을 바치실 분입니다.

실제로 그 열정과 사명이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반대자들, 즉 ‘성전체제’로 ‘부’(富)를 축적해 온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공생애 동안 그들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당하셨습니다. 라자로의 부활 후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겪으셨고, 끝내 체포되어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향하는 이 일련의 과정에 하느님의 집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과 사명이 맨 처음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한바탕 일어났던 소동이 잠잠해질 무렵 ‘유다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도 유다인이고, 거기서 장사하는 이들도 유다인인데, 그때 나타난 유다인들은 또 누구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반대자들인 ‘종교지도자들’(원로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장사꾼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을 입었고, 재산상의 손해를 봤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심문하듯이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 요한 2:18

그들의 질문은 정당해 보입니다. 대사제 가문은 ‘성전’ 주인 노릇 하면서(실제 주인은 하느님이신데)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도록 허가를 내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장사꾼들은 대제사제 가문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일을 하시려면 그럴만한 ‘권한’(권위)이 있음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는 권위를 주었는지 그 ‘출처’를 물었습니다.

만일 대사제 가문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 사람이라면 그는 누구일까요?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입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 땅에서는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다가 죽임당한 이들이 많았기에 그 권위 증명은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신이 하느님이 보내신 메시아인가?”라고 질문한 셈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할만한 ‘메시아로서의 기적’(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들의 기적 요구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 2:19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말씀 안에 드디어 ‘성전 정화사건’이 갖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종의 ‘첫 번 수난 예고’이자 ‘부활 예고’입니다. 예수께서는 상거래 장소로 변질한 ‘성전’에 분명히 반대하셨습니다. 그런 성전이라면 필요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특권을 누리는 ‘성전체제 전체’를 반대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성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예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1장에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증언했습니다(1절). 그런데 지금 2장에서는 ‘성전’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19, 21절).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산헤드린’(의회) 재판에 회부 된 예수님의 혐의 중 하나였습니다(마태 26:57-61; 마르 14:53-58). 그들은 예수께 이렇게 대꾸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 요한 2:20

《요한복음》 기자에 따르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요한 2:21). 자신의 몸을 허물도록 십자가 수난에 내어주시지만, 사흘 안에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몸을 다시 세우십니다(요한 2:22). 하지만 예수님의 반대자들인 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성전은 예수께서 탄생하던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19년에 증개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성전정화’ 사건이 있던 그때까지도 ‘헤로데 대왕’ 때 시작된 성전 바깥뜰 공사가 계속 진행 중입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걸린 기간이 46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정화사건이 있던 시기는 서기 27-28년경입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성전공사가 완료된 총 공사 기간은 80년입니다. 완료된 그때는 서기 65년경으로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헤로데 아그리빠, 사도 25:13)가 분봉왕으로 있던 때입니다. 더군다나 불과 5년만인 서기 70년, ‘유대 독립전쟁’을 진압한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그 ‘헤로데 성전’을 바닥까지 철저히 파괴해 버립니다.

이런 비극을 전혀 예상할 리 없는 ‘헤로데’(헤로데 대왕)는 즈룹바벨이 소박하게 세운 제 2성전을 엄청난 크기로 증개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바깥뜰’(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구역)을 넓히기 위해 밑에서부터 쌓아 올린 거대한 돌들의 일부가 여전히 ‘서쪽 벽’(western wall, 통곡의 벽)의 형태로 오늘날도 남아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고고학자들도 헤로데가 증개축한 성전이 예수님 당시 고대근동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을 것이라 평가합니다.

이 위대한 건축물이 세워진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선 천문학적으로 유대인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배꼽)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이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지리학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위치한다고 믿었습니다.

또 ‘예루살렘 중심’에는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이 그들 공동체의 한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으로의 ‘중심 위치’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된 곳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이런 세계관에 근거 해 예루살렘을 천국과 지옥과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이야기를 재밌게 펼쳐갈 정도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위치와 그 안에서 봉헌되는 일 때문에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자신을 ‘성전’, 즉 ‘새로운’ 성전이라 하신 말씀은 무엇을 내포한 선언입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예루살렘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과 현실 세계라는 세 세계의 우주적 소통이 일어나는 ‘거룩한 몸’이라는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만나 예배할 수 있는 참된 성전’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인류 공동체의 가장 중심에 머물러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선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느님의 계시라는 뜻입니다(요한 1:18)

이처럼 참된 예배로부터 멀어진 예루살렘 성전이 ‘새 성전인 예수님의 몸’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밝히신 것처럼(요한 4:19-24),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실로 엄청난 ‘자기 존재’ 선언입니다. 이 ‘성전 정화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그 깊은 영적 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참된 성전’(하느님을 알려주시는 참된 계시)이시라는 이 선언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참된 성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께서 ‘우주의 중심’이며,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현존’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삽니까?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우리 삶이 그 고백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된 성전이신 분을 삶의 중심으로 살아갑니까? 우리 몸을 값을 치르고 사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1고린 6:20)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값을 치르고 얻으신 교회를(사도 20:28) 사랑하는 열정으로 불타오릅니까?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전례독서>에서 살핀 것처럼, ‘십계명’으로 대변되는 ‘율법’과 ‘우주의 중심’을 표상하는 ‘성전’이라는 거대한 두 종교 제도는 유대인들의 삶 속에서 면면히 하느님의 지혜(힘)와 현존을 상징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대한 종교 제도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예수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 빛이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지혜(힘)와 현존은 고상한 ‘교훈’(율법)이나 ‘웅장한 돌’이 아니라 깨지고 찔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오히려 완전히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전하는 서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이 선언을 어리석음이나 걸림돌로 간주할 것인지, 아니면 믿음의 근거로 간주할 것인지를 발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때 사람들은 ‘십계명’에 만족했습니다. 행위로 그 계명들을 위반하지 않으면 완전하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 행동 이전의 ‘마음자리’를 물으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 신화는 종식(終熄)되었습니다. 한때 사람들은 하느님이 오직 하늘에서만 산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모세와 판관들 시절에는 ‘계약궤’를 모신 ‘성막’에 하느님이 거주하신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솔로몬 시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느님이 그 인상 깊은 ‘웅장한 건축물’에 거주하신다는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헤로데 대왕’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도 당시 사람들은 그런 신화를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과 함께 그러한 신화들은 종식(終熄)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주목해 보십시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 2:19

예수님은 지금 하느님이 계신 곳을 옮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원한다면 내 몸을 파괴할 수 있지만, 사흘 안에 하느님이 거하시는 곳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부활 후에 사도들은 비로소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22절). 나아가 성령을 받은 후에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1고린 6:19). ‘교회’ 말입니다. 결국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흘 안에 새 성전, 교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세우신다”라는 뜻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그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코로나19로 예전처럼 쉽진 않지만, 불과 1년여 전만 하더라도 많은 신자가 하느님이 계신다는 곳을 찾아 ‘예루살렘’, ‘바티칸’, ‘산티아고’, ‘캔터베리’ 등의 성지(聖地)를 순례하곤 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런 곳을 다녀와 더 깊은 신앙의 길을 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곳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있다면, 더는 성경의 땅 ‘성지’나 건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음을 오늘 복음에서 드러내 주십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 깨달음에 근거해 ‘교회’야 말로 ‘하느님의 집’이라고 가르쳤습니다(1고린 6:19).

그렇습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아무리 작더라도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둘도 없는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고 싶을 때 우리는 교회로 모입니다. 교회로 모여 함께 성찬례를 바침으로써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자 하느님을 모신 성전임을 재확인합니다(1고린 6:19). 그리고 일상의 자리, 즉 우리가 거하는 곳으로 이 성전을 확장해 나갑니다.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중심의 확장’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 되어 살도록 이 모든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을 가져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으로 부르심 받은 이유를 명백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전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줍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주고, 상처 입은 사람들과 고난을 겪는 사람들 편에 섭니다. 그렇게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됩니다. 이 모든 일은 탐욕에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 보이는 이 십자가의 일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임을 세상에 증언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제 가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십계명의 참 정신인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참 말씀이신 예수님,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모신 우리입니다. 우주의 중심이신 분을 모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로마 황제나 원로들이나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정치, 종교, 경제의 기득권층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성령 받은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그대로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발밑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과거와 미래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우리 마음을 지금 여기 현재로 불러 모아 중심을 잡고, 균형을 잡으십시오. 가서 교회인 우리를 통해 세상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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