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8. 사순17일(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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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 하느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시어 종의 굴레를 벗기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하 5:1-15
  • 시편 – 시편 42:1-2, 43:1-4
  • 복음서 – 루가 4:24-30

복음 이야기는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거기서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자신의 사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셨습니다(루가 4:17-21).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탄복했습니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서 기적을 행했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은총의 말씀에 놀라고 탄복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생각과 논리, 자기 옳음)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진짜 신분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친숙함’(익숙함)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단지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반응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가 4:24

이 말씀을 하신 다음, 구약성경이 전하는 유명한 두 예언자를 소환합니다. 그들은 예언자가 자기 민족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 다른 민족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제쳐두고 ‘이방인’을 보살펴 주신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거절한다면 그 기회가 ‘이방인’에게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수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자신을 ‘예언자’로 ‘신분 세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예수의 정체를 이미 잘 알고 있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기꾼’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이방인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이방인의 하느님으로’ 가르치는 ‘신성모독’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폭도’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회당 안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말렸으나 그 사나움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옳음’(생각과 논리)과 ‘친숙함’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루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예언자’로 묘사할 뿐 아니라 앞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나자렛은 산 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산벼랑까지 예수님을 끌고 가서 밀어뜨릴 참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죽을 때까지 돌 팔매질을 할 것입니다(민수 15:35; 사도 7:58).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오처럼 ‘헤로데’도 아니었고(마태 2:13-17), 마르코처럼 ‘바리사이파나 헤로데 당원들’도 아니었습니다(마르 3:6). 하마터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고향 사람들 때문에 시작하자마자 끝날 뻔했습니다. 예언자 팔자치고는 참 사납습니다.

어째서 예언자 팔자가 이렇게 사나울까요?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불편한 진실’입니까? ‘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자기 옳음’(생각과 논리)에 붙잡혀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나를 직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면 예언자는 ‘자신의 사명’을 그만두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 루가 4:30

예수님은 윤동주처럼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얻는 인기를 성공의 척도로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적대하는 그들의 한 가운데를 ‘용기’ 있게 걸어가십니다.

그 순간 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구원의 힘’이 그분을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던 것처럼 그들은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악의에 차 있었고 자신들의 ‘지식’(생각과 논리, 자기 옳음)과 ‘익숙함’을 고집하며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마음’으로 우리 곁의 ‘이웃’을 대합니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오래된 지식’(생각과 논리), 즉 ‘자기 옳음’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편안함’이라는 ‘친숙함의 방식’에 사로잡혀 이웃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독서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나안만 장군 이야기를 통해서 이 점을 성찰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옳음’과 ‘자기 편안함’(익숙함)에 사로잡힌 우리를 상징합니다. 그는 엘리사로부터 그런 자기를 ‘갱신’할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그는 ‘분노’하며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나아만은 자기 곁에 있는 그들을 오랫동안 알아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들을 필요조차 없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하들은 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져다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논리, 자기 옳음과 친숙함에 사로잡혀 있던 나아만은 그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절은 ‘오래된 지식’으로 대변되는 ‘자기 옳음’과 ‘자기 편안함’을 상징하는 ‘친숙함’을 돌아보는 시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갱신’하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교회가 ‘자선’과 ‘단식’과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옳음에 붙잡혀있고, 분노와 불안과 걱정에 휘둘리는 마음을 정화하여 더 순수하고, 평화롭게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자신을 ‘극기’하고, 이웃에게 ‘관대’하며,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께서 제공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제공하시는 그 방법들이 너무 ‘단순’해서 시시한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거기에 우리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지혜’가 있습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애타게 주님을 찾는 우리에게 오늘도 주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 곁의 사람들을 통해 ‘갱신’이 필요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듣는 귀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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