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4. 사순 14일(목요일)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우리가 감히 바랄 수 없는 신비한 일을 우리 안에서 시작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진리와 사랑으로 이끌어주시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예레 17:5-10
  • 시편 –  1
  • 복음서 – 루가 16:19-31

복음 이야기를 낭독하고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리는 ‘성찬례’와 매일 봉헌하는 ‘아침 저녁기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믿고 기다리나이다. – 니케아신경

…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 사도신경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온 날의 심판과 후세 영원한 삶의 약속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부활로 죽음을 이기시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셨음을 믿습니다. 죽음의 날이 영원한 안식의 날이며, 하느님의 낙원이 평화로운 새 거처가 된다고 믿습니다. 죽음은 새 생명으로 변화되는 길이며, 이 세상 나그네 집을 떠난 우리의 영혼이 하늘의 영원한 거처로 이동하는 길이 죽음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 빛 가운데 안식하던 우리의 영혼이 마지막 날에 주님의 부활 생명을 얻어 새 몸을 입고 영원한 복락에 참여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가 심판과 사후세계의 삶을 믿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의 삶을 어떻게 살게 될까요?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할까요? 지금 내가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심판과 영원한 삶의 약속을 믿는 행동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복음 이야기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사후세계의 삶을 들려줍니다. 둘의 삶의 처지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을 즐겼던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온갖 복을 다 누렸던 부자는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거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은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들의 처지가 이렇게 뒤바뀌었을까요? ‘부자’는 막대한 재산 그 자체 때문에, 혹은 남을 괴롭혔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늘 다른 <전례독서>에서 교훈하듯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을 ‘하느님’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자기의 행복에 몰두한 나머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길로 갔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는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인 ‘거지 라자로’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자기의 행복에 몰두한 나머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선한 의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자신’만의 호화로운 생활과 ‘자신을 위한’ 시간에만 관심하는 길로 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세상을 ‘개선’하는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로 가장 가치 있고, 명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나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심판의 하느님과 후세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불꽃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자기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생전 했던 행실에 따라 ‘갚음’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심판의 하느님과 후세를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거지 라자로, 즉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과 가까운 사이(잠언 14:31; 17:5; 19:17)라는 것을 이 땅에서부터 그가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라자로가 그의 곁에 찾아온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니, 그는 유대인이었기에 분명히 이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심판 비유에서 이렇게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 마태 25:45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을 돕는 일,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은 예수 자신을 도와드린 셈입니다. 한마디로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별개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선과 단식과 기도를 사순절 신앙 수행으로 강조합니다. 모두가 자기 인생을 즐기는 일에만 관심하던 시간에서 ‘하느님을 위한 시간’을 내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자기 행복에만 관심하던 시간에서 ‘하느님 일을 위한 시간’을 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천국과 지옥 교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가 가진 ‘돈과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이 이야기를 통해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던(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는 하느님을 주목한) 루가의 ‘재물관’과 ‘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본문에 속하기 때문입니다(루가 16:14).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한 채 ‘혼자’만 쌓아 올린 ‘부’(富)는 허망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부자처럼 냉담하거나 무시합니까? 아니면 울부짖는 그들과 삶의 일부를 나누고, 그들의 삶이 개선되도록 목소리를 내고 행동합니까? 정부가 할 일이라고 뒷짐 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돈과 재물’을 가지고 지금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는지가 우리가 누구에게,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그 생활은 자신의 ‘든든한 미래’하고도 직결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 곁에 나타난 예수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느냐는 주님의 눈에 결정적입니다. 말뿐인 사랑, 말뿐인 기도는 무가치합니다. 실천 없는 고백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시간’을 내어 오늘도 행동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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