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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28. 사순 2주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수난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주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7:1-7,15-16
  • 시편 – 22:23-31
  • 2독서 – 로마 4:13-25
  • 복음서 – 마르 8:31-38

사순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신실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꿈과 일을 실현하도록 선택된 구원공동체’입니다.

지난 주일에 사순절의 유래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성사’를 받을 ‘예비 신자’들을 교육하는 준비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그 틀에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에서 ‘믿음’으로 언약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복된 ‘새 이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이런 복을 받은 교회인 우리는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대한 꿈’(비전)을 실현하는 삶을 살라는 교훈이 <전례독서>입니다.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올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전례독서> 배정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계약의 재확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부부에게 새 이름을 주시어 그들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납니다. 앞선 <15장>에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창세 15:18). 본문의 배경은 그 계약이 있고 난 후 한참 세월이 지났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99세, 사라는 90세가 되던 해에 오랜 세월 침묵하시던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신이다. – 창세 17: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5절까지는 ‘아브람’이라 불림)에게 자신을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소개하십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들려주시는 자기 계시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Almighty God)으로 번역한 ‘엘 샤다이’(אל שדי)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아직도 논쟁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느님은 나의 가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가슴’이라고 하니까 좀 엉뚱하게 들리지만, 갓난아기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아기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든 필요를 풍성히 공급하시는 절대적이고 강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사도신경> 첫 문장처럼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의 근본 이름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소개하신 후에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흠 없이 살아라. – 창세 17:1

이것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행동입니다. “떠나지 말고”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할락’(הָלַךְ)은 ‘걷다’(walk)라는 말이고, “흠 없이”로 번역한 히브리어 형용사 ‘타밈’(תָּמִים)은 ‘완전한’(complete), ‘온전한’(integrity)이란 말입니다. 항상 하느님 얼굴 앞에서 걷고, 믿을만한 사람,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그의 생애가 하느님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하며, 전혀 비난할만한 일이 없는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드린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들었던 노아와의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십니까? ‘무지개’로 표현되는 그 영원한 계약은 ‘무조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분명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강력히 ‘요구’받고 있습니다(창세 6:9). 그러니까 앞선 <15장>과 본문인 <17장> 사이에 있는 <16장>에서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은(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당당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래 켕기는 일이 있으면 사람은 ‘대면’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16장>은 아브라함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이야기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습니다(창세 16:16). 그 이후 13년 동안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켕기는 일이 있는 아브라함과 얼굴을 마주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의 침묵을 깨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처럼 ‘자신과 동행’하는 삶을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전과는 달리 ‘완전한’(온전한) 사람으로 서기를 기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이 계약의 당당한 당사자로 하느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명령은 실제로 노아가 어떤 사람인지 묘사한 설명과 일치합니다. 《창세기》 6장에 노아를 ‘흠 없이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 번역했는데, ‘할락’(הָלַךְ, 완전한)과 ‘타밈’(תָּמִים, 걷다)이라는 똑같은 말이 본문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처음의 ‘언약’을 잊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줍니다(창세 12:1-3).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창세 12:4).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 99세니 그 언약은 무려 25년이나 지났습니다. 그 세월 동안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언약을 잊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스마엘’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느끼기에 그만하면 인생이 성공적이었습니다. 타향이지만 잘 정착했습니다. 재산은 점점 늘어나고, 생활은 안정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들 이스마엘은 무럭무럭 커가고 있습니다. 딱 한 분만 빼놓고 그와 집안 식구들은 별 탈 없이 인생이 잘되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일까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혼자만 만족하는 그런 삶을 시시하게 보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러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찾아오시어 ‘자신과의 동행’을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의 언약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창세 12:1-3). 정확히 말하면 그 언약이 실행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바꾸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라는 것은 ‘삶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브람’(אַבְרָם)은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אָב)와 ‘높아지다, 칭송하다’라는 뜻의 ‘룸’(רוּם)이 합성어입니다.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 ‘데라’가 ‘높임 받는 아버지’(큰 아버지, 존귀한 아버지, 한 집안의 가장)가 되라고 지어 준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이름을 ‘아브라함’(אַבְרָהָם)으로 새롭게 바꾸어주십니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조상)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 끝에 ‘헤’(​ה, h, ㅎ소리)라는 히브리어 글자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인데 의미가 ‘대전환’을 이룹니다.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공적인 인물’로 변화됩니다.

하느님께서 옛 이름에 추가해 주신 글자 ‘헤’(​ה)는 ‘후음’(목구멍소리)입니다. 글자 모양의 유래와 그 상징적 의미에 관해 ‘랍비들’마다 주장이 다릅니다. 그 주장들을 종합해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입 앞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목구멍소리로 ‘헤’라고 한번 발음해 보십시오. 손바닥에 ‘숨’이 내쉬어지는 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헤’(​ה)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하느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거룩한 숨’(생명의 기운, 생기)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그래서 ‘헤’라는 글자는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시편 기자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입김’(입 기운)으로 모든 별들을 창조하셨다고 찬미합니다(시편 33:6). ‘헤’가 바로 ‘사람의 생명’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입김’(숨)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생명’을 상징하는 ‘헤’라는 글자가 ‘아브람’이라는 이름 끝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인류에게 생명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그야말로 이제 ‘아브라함’은 하느님 덕택에 ‘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간직하신 원대한 ‘비전’(vision)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만 잘사는 삶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복’ 있게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그 비전,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간직하신 하느님의 ‘꿈’입니다(창세 12:3).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는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겨우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내의 몸종을 통해 겨우 ‘고귀한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겨우 아들 하나뿐인 그가 그 나이에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하느님께서 사태를 너무 크게 키우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그가 감당하기에 너무나 버거운 이름 아닙니까? 그가 이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바꾸겠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그 이름을 듣는 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뜻은 확고하십니다. 하느님의 꿈은 원대하십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주신 이름대로 성취하실 참입니다. 하느님은 그를 계약의 당사자로 세우실 참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이미 그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창세 12:2). 다만 여기서는 ‘왕손’(왕들)도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고 단단히 ‘언약’하십니다(7절). ‘하란’에서 그를 부르실 때 하신 그 처음의 약속(창세 12:1-3)이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포함한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어서 하느님은 그의 아내의 이름도 바꾸어주십니다. ‘사래’(שָׂרַי)와 ‘사라’(שָׂרָה) 둘 다 ‘족장’, ‘통치자’, ‘대장’, ‘왕’, ‘왕자’라는 뜻의 ‘사르’(שַׂר)를 어근으로 합니다. 여성이니까 ‘공주’(princess), ‘여주인’(Lady)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사래’라는 이름에 단지 ‘헤’(​ה)라는 글자 하나만 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사라’를 ‘많은 민족의 어미’란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본문에는 ‘어머니’란 말은 생략되어 있고 “민족들(히브리어로 ‘고이’, גּוֹי)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나이 많은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신실한 유대인뿐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 부부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말은 ‘새로 태어났다’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하느님의 꿈과 일을 성취하는 사람들로 새로 태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이름들 안에 하느님의 원대한 꿈, 즉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 누릴 민족을 낳고 기르는 아버지,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까지만 배정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하느님의 이 같은 엄청난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었을까요?

아브라함은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우스워서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고 중얼거렸다. – 창세 17:17

참 인간적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믿지 않고 의심했습니다. 그도 복음 이야기의 베드로처럼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이나 귀여움을 받으며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한 일이 그 뜻입니다(창세 17:18). 그러나 인간은 의심할지라도 하느님은 신실하십니다. 인간의 불신앙이 하느님의 꿈과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의심하는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의 탄생을 예고하시고 다시 한번 영원한 계약을 보증해 주십니다. 그런 다음 그를 떠나 올라가십니다(창세 17:19-22).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오롯이 아브라함의 몫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의 시구처럼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침내 흔들림 속에서 피어납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무엇을 통해 그가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계약을 당장 실행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 계약이 무엇입니까? ‘할례’(포경수술)입니다(창세 17:23-27). 오늘 본문은 그 단락은 생략하고 배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신 그날, 집에 사는 모든 남자와 자신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원대한 꿈’이 실현되도록 자기 자신을 봉헌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2독서 《로마서》도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칭송합니다(로마 4:17-21).

더욱이 사도 바울로는 ‘할례’를 행하기 이전부터 하느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더 깊이 칭송합니다. 아직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무조건’ 하느님을 믿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이 하느님 앞에서 ‘의’로 여겨졌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그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하느님께서 ‘상속자’로 삼아주신다는 점을 간파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영원한 계약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십니다. 사실, 바울로뿐 아니라 《마태오복음》 기자도 이 믿음의 진실을 ‘족보 이야기’에서 강조합니다. 《마태오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 마태 1:1

예수님을 소개하는 데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밝힌 부분이 참 중요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그리스도’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의 그리스도’도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의 그리스도, 즉 모든 인류의 그리스도이심을 앞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써 내려가겠다는 예고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보기에 ‘이방인’일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그 ‘믿음의 힘’ 덕택에 하느님의 약속인 구원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러면 ‘계약의 재확인’과 ‘새로운 정체성’ 부여의 이야기가 오늘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의 화살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라는 과녁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인류에게 약속하신 원대한 꿈과 일을 몸소 그대로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믿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일을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들은 것처럼 ‘십자가의 길’을 통해 성취하실 것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 은총의 새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세례한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 교회의 지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새로 나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십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2편>은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구원받은 다윗이 바치는 영광의 찬미입니다. 주님 덕분에 다시 살게 된 다윗이 바치는 승리의 찬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22편>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예언한 ‘시’(詩)라고 해석합니다. 특히 1-2절, 6-8절, 17-18절이 그렇습니다. 이 구절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극심한 고통 중에 외치신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성공회는 성목요일(성찬제정) 예식이 있는 날, 영성체 후 제대보를 걷을 때 <22편> 전체를 ‘교송’(交誦)합니다.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은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처한 다윗의 ‘절박한 탄원’입니다(1-10절). 두 번째 단락은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기도’입니다(11-21절). 세 번째 단락은 구원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경험하고 바치는 ‘영광과 승리의 찬미’입니다(22-31절). 자신이 완전히 버려진 것 같았던 다윗의 두려움과 절대고독이 감사와 찬미로 바뀝니다. 이렇게 시의 분위기가 절박한 탄원에서 영광과 승리의 기쁨으로 급격히 바뀌기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시’(詩)가 같은 시기에 지어졌는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 배정된 본문은 주님 덕분에 살게 된 ‘감사와 감격’, ‘영광과 승리의 찬미’ 단락입니다. 말하자면 ‘전세(戰勢) 역전’의 기쁨이 가득합니다. 다윗은 그 전세 역전의 감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합창단’을 꾸리기로 합니다.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하자는 초대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합창단의 규모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처럼 소수로 시작합니다(23절). 이어서 “야곱의 후손들”, “이스라엘의 후손들”로 커집니다(23절). 이런 식으로 점점 규모가 커져서 ‘큰 회중’에 이릅니다(25절).

나중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으로 확장됩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들”(26절), “온 세상 만백성”(27절)입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들었듯이 이스라엘 자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주님의 구원을 찬미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정말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엄청난 규모의 합창단을 형성하는 셈입니다. 심지어 시인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들”(29절), “오고 오는 미래의 후손들”(30절),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31절)까지 주님의 구원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합창단’에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온 인류, 삶의 자리를 달리하는 사람들, 과거, 현재, 미래의 사람들까지 다 포함하여 생명과 구원의 하느님을 찬미하자는 초대로 마감됩니다.

<22편>이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실 ‘영원한 은총의 계약’에 대한 찬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1독서 《창세기》에서 선포하듯이 아브라함과 그 믿음의 후손들 모두를 위한 ‘영원한 계약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세대와 인류를 아우르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하느님은 십자가에서 탄원하시던 외아들의 기도를 우리를 위하여 외면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침묵’과 ‘부재’(不在)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 있던 다윗이 ‘구원’(생명)이라는 ‘전세 역전’을 경험한 것처럼, 수난받으시고 죽으신 예수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인류와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으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려고 영원한 승리자로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탄원을 부활로써 기어이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느님, 부재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의 예수처럼 버려진 심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외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은 고통받는 우리를 외면치 않으십니다. 괴로워 울부짖을 때 우리의 탄원하는 소리를 분명코 들으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외아들을 보내어 죄짐에 눌린 우리를 해방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신 구원의 하느님은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고 믿음의 선조들은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계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날을 고대하며 우리는 어떤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고난 속에 있는 우리는 마음을 열어 구원의 하느님을 고요히 찬미함으로써 다윗과 하나가 되고, 특히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2독서 《로마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교훈합니다. 바울로가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행위, 즉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의’(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의로움)가 아니라 하느님께 보내신 외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얻는 ‘의’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영원한 생명’과 직결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의로움을 옷 입지 않고는 누구도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원대한 꿈을 갖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창세 12:1-3).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가도록 명령하십니다.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창세 12:4). 하느님의 약속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라 무조건 믿었습니다(창세 15:6).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에 감동하셨고, 징표까지 주시며 약속을 보증해 주셨습니다(창세 15:7-21). 바울로는 아브라함이 굳게 믿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 로마 4:17b

아브라함의 믿음은 정말 깊습니다. 그가 믿은 하느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창조의 하느님’이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솟아나게 하시고 반드시 그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느님을 ‘무조건 믿음’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마침내 약속의 성취를 맛본 ‘만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바울로는 칭송합니다.

더욱이 바울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고 그의 생애를 생명과 희망으로 이끄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도 똑같이 행동하셨다고 교훈합니다. 특히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행동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그 ‘믿음’ 덕택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된다고 강력히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원대한 꿈을 간직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약’(새계약)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계약이 은총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성취되도록 구상하신 분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선물 된 그 ‘믿음’을 통해 당신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오도록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신실한 믿음의 반응’만이 중요합니다. 정말이지 우리의 궁극적 희망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활동하신 ‘전능하신 하느님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칭송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샘으로 인도하기 위한 ‘마중물’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미 완성하셨고, 성령 안에서 지금도 성취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성취해 가실 ‘원대한 꿈’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다리’입니다. 물론 그 샘물을 마시고,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그 ‘구원’(의로움)을 가져다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입술의 고백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그 믿음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악행으로 인해 하느님의 원대한 꿈의 성취가 불가능해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올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첫 번 수난 예고’와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근거한 ‘자기희생’이 그 계약의 보장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로 대표되는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 꾸짖으십니다. 그런 다음 그 유명한 ‘제자도’를 가르치십니다. 새 계약의 자녀답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엄숙한 요구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서약한 우리의 세례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 마르 8:31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십니다(마르 8:31-32, 9:31-32, 10:32-34). 예수님은 이 예고를 오직 ‘제자들’에게만 하셨습니다. 우선 첫 번 수난 예고는 어떤 배경에서 나왔습니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리스도’(마르 8:29)라는 칭호를 안겨드린 후에 따라 나옵니다. 《마태오복음》과 달리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거부도, 긍정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마르 8:30).

그런 다음 ‘그리스도’라는 칭호와는 대조적으로 ‘사람의 아들’로 자신을 지칭하십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감추려는 의도와 그들의 저항을 고려해서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기서는 장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명백히’ 밝히십니다. 그것이 복음 이야기 서두입니다.

첫 번 예고를 들은 베드로는 마치 다른 동료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듯 나섭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뜁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이 수난 예고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전말(顚末)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속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당시에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예수님의 예고는 자신이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이란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대에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최고 법원’(또는 의회) 격인 ‘산헤드린’ 구성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도층이고, 명성이 자자한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 죽어야 할 정도라면, 예수께 ‘큰 죄목’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항의’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라는 표현은 그 뜻입니다. 본문에 쓰인 그리스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꾸짖다’(rebuke), ‘책망하다’(admonish), ‘경고하다’(warn)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공동번역 성서>는 멋지게 풀어놓았지만 아쉬운 감이 있습니다. 웃깁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꾸짖다니요! 가만히 있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틀린 말을 할 만한 가장 정확한 순간을 포착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의 속내를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선생님, 그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이 만일 범죄자 취급을 받고 생을 끝내버리신다면 당신을 따라다닌 우리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지금 잘못하시는 겁니다.

자신과 동료들을 위태롭게 만들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더 깊은 속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자신이 붙여드린 ‘메시아’(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맞게 정치, 군사적인 왕이 되어주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향해 매몰차게 ‘책망’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마르 8:33b

베드로를 ‘사탄’(Σατανᾶς, Satan)이라 ‘책망’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라고 할 때, 즉 ‘꾸짖다’(rebuke)라고 할 때 쓰인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와 똑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악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가 악마적인 영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본래 그리스어로 ‘사탄’(Σατανᾶς, Satan)은 재판정에서 ‘검사’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피고인의 무죄를 증명하는 사람이라면, 검사의 책무는 무엇입니까? 피고인에게 잘못(죄)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책망하신 것은 ‘검사여!’라는 뜻입니다. 마치 재판에 회부 된 ‘피고인’처럼, 뭔가 ‘잘못하고’ 있는 분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께 잘못이 있다는 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식으로 영원한 구원계약을 구상하신 하느님께 잘못이 있다는 식입니다.

또 “물러가라”로 번역한 그리스어 원문은 “가! 내 뒤로”(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휘파게 오피소 무, Get behind me)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나를 따르라”(마르 1:17, 20; 8:34 참조)는 주님의 부르심을 다시 듣고 있는 장면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를 따르라”도 원문에는 “내 뒤로!”(ὀπίσω μου, 오피소 무, Come after me)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가 ‘펄쩍 뛰었다’라고 할 때의 그 ‘기세’(氣勢)를 능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그 유명한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 마르 8:34b

‘버리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는 ‘부인하다’(deny), ‘의절하다’(disown), ‘거부하다’(repudiate), ‘무시하다’(disregard)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다. ‘옛사람’인 ‘자신의 욕망’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세상적 가치’를 따르려는 ‘이기적인 자기’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욕망과 이기심의 자기를 버리라는 ‘제자도’의 요청 앞에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세례성사를 받고도 여전히 욕망과 이기심의 노예로 살아온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자기를 버리라’라는 ‘자기희생’과 ‘자기 죽음’의 말씀 앞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를 오염시켜온 ‘번영과 성공의 신앙’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축복과 평안만을 간구하는 입술은 ‘자기희생’과 ‘자기 죽음’을 요청하시는 그 엄숙한 말씀 앞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순교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있습니다. 독일 루터교회 목사요, 신학자며, 히틀러 암살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옥살이를 하다 순교했습니다. 해마다 4월 9일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는 악에 저항하지 않고 ‘나치당’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히틀러를 구원자로 숭배하던 독일 제국교회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나치당’에 영합(迎合)했던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했습니다. 고난의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 신앙, 신학, 삶은 ‘값싼 은혜’이자 교회를 죽이는 일이라며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습니다.

그의 삶은 독재자 박정희, 전두환과 손잡고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침묵하며 교세 성장에 앞장섰던 한국교회의 ‘자칭’(일부) 원로들과는 너무나 대조됩니다. 이명박, 박근혜의 조찬 기도회에 초대받기 위해 줄을 대던 거짓 예언자들, 그 자리에서 그들을 칭송했던 거짓 사목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신학’과 ‘삶’을 일치시킨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였고, 20세기 인물 중 예수님의 삶을 가장 닮은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 이야기 본문으로 시작하는 그의 책 「The Cost of Discipleship」(국내 출판: 나를 따르라) 제 1장, 4절 Discipleship and the Cross(제자도와 십자가)’에서 ‘제자도’를 이렇게 묵상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신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아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인 너무나 힘든 길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시니, 그분을 굳게 붙들라는 것이다.
To deny oneself is to be aware only of Christ and no more of self, to see only him who goes before and no more the road which is too hard for us. Once more, all that self-denial can say is: “He leads the way, keep close to him.” 「The Cost of Discipleship」 – 4 Discipleship and the Cross – p43.

본회퍼에 따르면 “자기를 버린다”(자기를 부인한다)라는 말씀은 탐욕에 물든 ‘옛사람’과 ‘세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오직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전부로 알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고, 어떻게 사셨기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당시의 권력과 영합(迎合)하지 않았습니다.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삶은 위선이며,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르 12:38-40; 마태 23:2-36; 루가 11:37-52, 45-47). ‘율법과 전통’의 이름으로 아픈 이들과 장애인, 여성과 이방인, 과부와 가난한 이들에게 행해지는 정죄와 편견, 차별과 멸시에 저항하셨습니다. 더 큰 ‘선’(하느님 나라)이 통치하는 세상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신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란 앞서가신 스승처럼 ‘행동’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회 속에서 고난받는 약자들과 자신을 일치시키신 예수님을 입술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기화’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행동으로 봉헌’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지금도 고난받는 이들 속에 함께 계시며 거기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안락’(安樂)을 버리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행하는 일, 그 ‘좁은 길’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라는 것이 순교자 본회퍼 목사의 고백입니다.

더욱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라는 말씀은 더욱 생생하게 ‘자기희생(고난)’과 ‘자기 죽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로 번역한 그리스어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는 처형당하는 범인이 운반하는 ‘가로보’(the transverse beam)입니다. 로마는 제국에 저항하거나 반역한 이들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당시 권력이 예수님께 걸어 넘긴 ‘죄목’도 ‘국사범’과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총독 빌라도는 ‘신성모독’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왕’이라 했다는 고발은 골칫거리였습니다.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골고타까지 자신이 달릴 ‘십자가’(가로보)를 지고 가셨습니다(요한 19:17). 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과 굴욕, 죽음의 상징이 ‘십자가’입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걷는 그 길 끝에 분명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이미 그 길로 가고 있기에 제자로 따르려는 사람은 ‘심사숙고하라’라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만둘 것이지 ‘양자택일’하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르 8:35-38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란 말이 생각납니다. 이 세상에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거든 그 ‘절대적’ 목숨을 당신께 ‘봉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목숨을 ‘옛사람’의 완성과 ‘세상 가치’의 실현을 위해 봉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복음’을 위해, 하느님의 원대한 꿈을 위해 봉헌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제자도’는 ‘옛사람’과 ‘세상 가치’에 대한 철저한 ‘죽음’, ‘자기희생’입니다.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자기’가 무엇인지 성찰합니다.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일상에서 버려야 할 자기’는 어떤 모습의 ‘나’입니까? 꼭 큰 이상(理想)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부인해야 할 자기’는 어떤 ‘나’입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생활에서 버려야 할 자기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짊어지고 따라야 할 ‘자기 십자가’는 무엇인지 성찰합니다. 십자가는 ‘옳은 일’을 하다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받는 고난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우리 근현대사에는 남들이 자기 성공과 번영의 길, 즉 옛사람의 완성을 위한 이기적인 길을 갈 때 오롯이 이 땅의 해방과 민주화, 평화와 인권을 위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짊어진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세상 가치보다 더 소중한 하늘의 가치를 추구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와 일소하지 못한 적폐로 인해 그들의 자기희생과 죽음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런 ‘제자도’를 감행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십자가는 항상 개인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다고 깨달은 이가 짊어집니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큰 진리’(眞), ‘큰 선’(善), ‘큰 아름다움’(美)이라 부릅니다. 아마 이 모두를 담아내는 말이 ‘큰 생명’일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나’, ‘복음’, ‘말씀’이라 합니다(35절, 38절). 큰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화’할 수 있는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덕택에 ‘나로부터의 자유’라는 빛을 발견한 이들이 ‘제자도’를 감행합니다. 큰 진(眞), 선(善), 미(美)를 향한 이타적 ‘자기희생’으로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 말입니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그 ‘절대적인 목숨’을 ‘당신’과 ‘복음’을 위해 봉헌하라고 당당히 선언하실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절개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마르 8:3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목숨’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완성되어야 할 생명입니다. 장차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시어 ‘준엄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의 ‘목숨’이 ‘완성’에 동참하느냐 아니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를 실천했느냐”에 따라 판결 날 것입니다(참고 마태 25:31-46).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고난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믿음의 실천’으로 살았느냐에 따라 판결 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옳았습니다. 그분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하느님의 ‘값비싼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이들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역사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짊어져야만 부활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의 목숨은 완성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당대에 지도층이고, 명성이 자자한 높은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한마디로 자칭 옳다는 사람들입니다. 그 옳은 사람들이 어째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로들은 살아있는 전통’을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사제들은 특권, 자기 주도성’을 상징합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지식)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랍비’(선생)라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가르침’(지식)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깥으로 나가지 말고 내면으로 가져와 묵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자아(ego)’입니다. 내면의 ‘원로’란 나의 오래된 ‘습’(習)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는 과거로부터 형성된 오래된 ‘자기 인식’(생각), ‘습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은 정말 뿌리가 깊습니다. 내면의 ‘대사제’는 ‘자기 주도성’(특권)을 상징합니다. 대사제가 제사의 우두머리, 대장 노릇을 하듯이 우리 내면에는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대사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면의 ‘율법학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 특히 ‘과거의 지식’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참 많습니다. 그 지식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안다고 하는 그 지식이 나뿐 아니라 관계를 죽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재단(裁斷)합니다.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에 맞지 않는 그리스도를 만나면 여지없이 처형해 버립니다. 이렇듯 원로, 대사제, 율법학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내 안의 ‘옛 자아’입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던 베드로가 바로 그런 인물이고, 베드로는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율법’과 관련하여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 23:2-3

예수께서는 “다 실행하고 지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율법’은 우리가 실행하고 지켜야 할 것을 상징합니다. 쉽게 말해 ‘하기 싫어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기 싫어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순절’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하기 싫어 하는 일입니까? ‘기도’입니다. 어째서 ‘기도’가 ‘하기 싫어하는 일’입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는 일이 즐겁습니까? <성가>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했는데(성가 2015. 430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제 경우에는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려면 일단 시간을 내야 합니다.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기 생각을 멈추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물었으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들어야’ 하는 데 그 일이 싫습니다. 그렇게 묻고, 듣고 하는 일이 불편합니다. 그냥 제 말만 하고 빨리 끝내버립니다. 기도의 결론도 자신이 다 알아서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수도 없이 기도를 해왔지만, 기도가 아닌 ‘빈말만’ 되풀이해 온 역사입니다.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일종의 ‘규칙들’이고, 기도처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데 ‘완성의 길’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하기 싫은 기도를 하기 위해 앉아 있으면 우리 안에서 ‘예언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의 ‘예언자’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내 안의 나만이 아는 ‘불편한 진실들’입니다. 내 마음의 감정들, 시끄러운 소리들 말입니다.

애완(반려) 동물과 함께 사시는 분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기도 속에서 고요히 자신을 성찰하고 있으면, 개처럼, 돼지처럼, 뱀처럼, 원숭이처럼, 여우처럼, 사자처럼, 하이에나처럼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들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기 모습이 나옵니다. 기도하느라 앉아 있으면 “내가 꼭 이렇게 기도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라고 불편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사실, 어려워서 기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해서’ 기도를 안 하려고 합니다. 내 안의 불편한 진실들, 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이 자꾸만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엉망으로 살아왔는지 그것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기도하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면 하기 싫어도 기도하느라 앉아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이 무엇을 하십니까? 나를 완성해 가십니다. 나의 ‘의식’과 ‘존재’의 변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묻고, 묻고, 또 물어서 ‘주님께 듣는 기도’라는 그 ‘율법의 길’을 통해서 말입니다. 본래 묻고 듣고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자 ‘사랑의 본질’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묻고 들어서 실천하는 그 ‘사랑의 길’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완성’되어 갑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교훈했습니다(로마 13:10).

그러나 우리에게서 이렇게 묻고 듣는 기도가 희미해져 갈 때,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내 안의 오래된 습(習), 내 맘대로 하려는 ‘자기 주도성’,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지식’이 주님을 죽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복음 이야기의 ‘베드로’ 역시 ‘원로’나 ‘대사제’나 ‘율법학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그는 자기의 오래된 성격적 습관, 자기 맘대로 주님을 주도하려 드는 교만, 자기 지식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태도를 가진, 한마디로 사탄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끝으로 ‘제자도’를 말씀하시기 전, ‘군중과 제자’를 한 자리에 불러놓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군중’은 ‘자기 이득’을 따라 주님을 따라다닌 이들입니다. 언제든 주님을 떠날 수 있는 이들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들입니다. ‘제자’는 ‘배우겠다’라는 이들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승으로부터 배워서 살겠다는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자아와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주님은 이 둘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둘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군중’으로 살아가고 있는 ‘옛사람’인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가 되려면 알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지식의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이 전의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위한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에 맞는 ‘적절한 행동’으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가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들’입니다. 더 큰 선을 위한 ‘자기희생’을 감행하며, ‘고난의 자리에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하듯이 자신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이들입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자신의 기대와 꿈만을 위해 살아가던 삶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선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원대한 꿈’(비전)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봉헌한 이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처럼, 새 이름을 받고 새 정체성으로 세상에 복을 가져오는 인생,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 돌아선 이들입니다. 순교자 본회퍼의 묵상처럼,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겠다고 결단한 이들입니다. 입술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 마르 8:36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는 금주간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으로 초대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의 물음’에 어떻게 적절히 ‘응답’할 것입니까? 우리의 ‘목숨’을 어디에 봉헌할 것입니까? 순교자 본회퍼 목사는 ‘믿음대로 행동’했습니다. 우리도 기꺼이 ‘자기희생’으로 응답할 것입니까? 물론 희생적인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희생’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기본 원칙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십자가에 도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로 이끄실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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