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5. 사순 8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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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스 4:17(12-16), 17(23-25)
  • 시편 – 138
  • 복음서 – 마태 7:7-12

지난 ‘사순 6일’ 복음 이야기(마태 6:7-15)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이미 나눈 바 있습니다. 오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만큼 ‘기도 수행’이 우리에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독서 《에스델》은 민족을 구한 왕후 에스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만의 계략’으로 멸절 위기에 처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자기 민족을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 즉 ‘목숨’을 걸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자기 민족의 구원에 ‘하느님의 명예’가 달려 있다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민족의 구원을 위해 ‘아하스에로스 왕’ 앞에 나서는 자신에게 “모든 신 중의 왕”이시고, “모든 권세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용기와 지혜를 주시어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편》으로 노래한 <138>은 ‘에스델’의 찬미처럼 들립니다. 높은 계신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힘을 한껏 북돋우어주셨습니다.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고생길을 걷는 민족을 오른손으로 붙들어 구원해 주셨습니다(에스 6:1-8:17). 기도를 들어주신 사랑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음 다하여 감사 찬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도 ‘기도’와 ‘황금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특히 전반부(7-11절)는 ‘기도’에 대한 더 많은 ‘설명과 지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구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라고 다시 한번 우리를 초대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세 가지 표현에서 우리는 기도의 새로운 면을 배우고, 더욱이 ‘보상’이라는 면도 배웁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기도’는 ‘요청’하는 일이고, ‘발견’하는 일이며, ‘두드리는’ 일입니다. 우선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느님께 아뢴다’라는 점에서 ‘요청하는(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께 구하는(요청하는) 사람은 받을 것’입니다. ‘받는다’라는 것은 ‘요청한 일’의 ‘보상’입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추구한다)라는 점에서 ‘발견하는’(얻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 뿐 아니라 ‘기도’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적용의 ‘한 말씀’, 즉 ‘하느님’을 찾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얻음’(발견하기)은 추구한 것의 ‘보상’입니다.

끝으로 ‘기도’는 ‘문’이 열려질 때까지 ‘두드리는’ 일과 같습니다. ‘문’이 열려있다면 두드릴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문’은 닫혀 있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기’ 위해서 ‘집의 입구’에 있습니다. 분명 ‘문’은 열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누구나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찾고 있습니다. ‘벽’은 아무리 두드려봐야 열리지 않습니다. ‘벽’으로는 하늘나라로 못 들어갑니다. ‘열린 문’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두드림’에 대한 ‘보상’이며, 모든 보상 중에서도 ‘최고의 보상’입니다. ‘하늘나라 문’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두드리는 일’ 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나라 문’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믿음’이 바로 그 ‘두드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다른 일은 결코, 필요치 않습니다. 그 ‘문’을 ‘순수하게’ 두드린다면 주님은 누구도 차별치 않으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열정’을 갖고, ‘성실히’, ‘끈기 있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 기도는 ‘응답 된다’라는 약속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끈기 없이’ 어쩌다 한 번씩 바지는 기도는 우리가 그만큼 ‘열정’도 없고, ‘성실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기도 제목들에 대해 하느님께서 신경 써 주시기를 바라는 일은 ‘불성실’입니다. 분명 주님은 기도의 ‘끈기’와 ‘열정’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루가 18:1). 끈기와 열정을 갖고 바치는 기도는 그만큼 우리가 그 일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우리가 ‘끈기’와 ‘열정’을 갖고 기도한다고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이것이 《루가복음》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읽을 때 조심할 점입니다(루가 18:1-8). 하지만 ‘끈기’와 ‘열정’을 갖고 바치는 기도는 우리가 그만큼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실, ‘끈질긴 기도’를 바치다 보면 어느 사이 우리 ‘기도의 지향’은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쪽’으로 ‘변화되어 간다’라는 것이 ‘진실’입니다. 성령께서 더는 ‘헛된 기도’를 하지 않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에서 ‘끈기’와 ‘열정’은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기도에서 ‘하느님을 설득’하거나 ‘달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에게 빵뿐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무지’하기에 철없이 ‘뱀’을 달라고 요청할 때도 있지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부정’(否定)하는 일은 그야말로 ‘신성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느님을 ‘악한 부모’보다 더 나쁜 분으로 만드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것’이란 자녀가 아니라 ‘아버지의 관점’에서 ‘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 점을 착각하곤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세상 그 어느 선량한 부모보다 더 ‘사랑 많으신 분’이라고 일깨워주십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되새기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후반부(12절)는 하느님이 주신 책인 《성경》 전체의 ‘정신’(황금률)입니다. 전반부와 연결해서 말씀드리면 ‘기도하며 산다’라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웃과 관계’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시는 ‘황금률’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대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마음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남을 위해서도 ‘더 좋은 것’을 식별하고 행동하십시오.

고요히 눈을 감고 기도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주님은 ‘기도’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까? ‘기도하라’라는 명령과 그 ‘보상’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니 결국 ‘주님’이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상을 살면서 우리는 함께하신다는 주님이 ‘부재’(不在)하시는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곤 하지 않습니까? 중병에 걸린 형제의 치유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묵주’를 돌려보지만 별로 신통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터를 찾는 자매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묵주를 돌려보지만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우리의 형제가 병의 고통을 겪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어째서 우리 자매가 실직의 아픔을 겪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언제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처럼 “받고, 얻고, 열어주신다”라는 말씀입니까? 주님이(기도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시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 아니신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세상을 살면 살수록 주님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 가진 가장 큰 문제, 즉 ‘궁극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구원)이심도 저는 믿습니다. 그 궁극적 문제는 무엇입니까? ‘죄’, ‘죽음’, ‘지옥’ 말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가 많으나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또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궁극적인 문제’가 있을까요?

오늘 복음 이야기인 기도를 ‘그림’처럼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줄다리기’를 생각해 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가 ‘하나의 줄’을 잡고 있음을 기도로 표현하셨다고 말입니다. 줄의 한쪽 끝은 우리가, 다른 한쪽 끝은 예수님이 잡고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과 우리는 ‘하나의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방향은 ‘위’와 ‘아래’입니다. 우리는 ‘아래’에 있고, 예수님은 ‘높은 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볼 수 있든지 아니면 볼 수 없든지 간에 이것이 우리 인생의 ‘진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에스델 왕후’의 기도처럼,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에 노출됩니다. 질병, 실직, 실패, 모함, 배신, 불화, 다툼, 이혼, 죽음의 위험, 사별 등등. 게다가 코로나19 감염병의 경우처럼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차원에서도 ‘문제’(고난)를 겪습니다.

제가 배운 바에 따르면 우리는 ‘문제 그 자체’와 ‘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에서는 문제 그 자체보다 ‘문제에 대한 나의 의미주기’(해석) 때문에 삶이 힘겹다고 말합니다. 또는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라고 보고 있는 ‘나’가 문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고, 저도 마음공부 강의를 하러 다닐 때는 그런 말을 많이 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기도’와 관련해서는 다르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삶에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문제들’이 있고 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주십니다. 어느 순간이든 우리는 줄의 다른 한쪽 끝을 잡고 계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상대로 줄다리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도대체 왜요?’ 이러면서 하지 않아도 될 ‘줄다리기’로 공연히 힘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높은 곳에 계신 예수님은 내가 지금 잡은 ‘인생’이라는 줄의 한쪽 끝을 ‘항상’ 잡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인생의 끝’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줄을 ‘위쪽’으로 ‘홱’ 잡아당기시면 좋든 싫든 상관없이 우리는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문제 속에 있는 우리가 잡은 그 줄을 ‘위쪽’으로 ‘홱’ 잡아당기십니다. 다른 ‘누구’나 ‘무엇’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가 잡은 줄의 저 위쪽 끝에 계시게 하십시오. 높은 곳에 계신 예수께서 자신을 향해 그 줄을 ‘위쪽’으로 ‘홱’ 잡아당기실 때 저항하지 말고 순응하십시오. ‘어리석고 거만한’ 사람들은 그 순간 저항합니다. 만일 우리가 저항하지 않고 힘을 뺀다면 우리는 오늘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시편 138:3, 6-7), ‘문제들’ 속에 빠져드는 일 없이 언제나 ‘위쪽’(구원)으로 ‘홱’하고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에 마음을 기울여 주십시오. ‘궁극적’으로 ‘주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시고, 우리에게 ‘문제들’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 ‘문제들을 통해 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어서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사실, 문제가 없으면 신자 대부분은 구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들’을 주시어 우리가 주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그 ‘문제들’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들을 기꺼이 취할 수 있는 ‘에스델’ 같은 용기와 힘도 주시기를 간청합시다. 정말이지 우리가 ‘에스델’ 같은 기도의 태도로 주님께 나아간다면 ‘문제들 위쪽’으로 ‘홱’하고 들어 올려지는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보다 더 심오한 뭔가가 있습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위한 수단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네비게이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는 ‘네비게이션’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예수님은 ‘문지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비스러운 문을 여는 비밀스러운 ‘두드림’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들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문제들을 다루는 법’을 ‘기도’로 가르쳐 주십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문제들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모본’(模本)을 보이셨고, 문제들을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증오, 악, 고문, 죽음의 상징인 그 ‘십자가’를 가져다가 믿음, 희망, 인내, 헌신, 희생, 사랑의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왕후 에스델의 경우처럼, 오직 예수님만이 ‘눈물의 밤’을 ‘기쁨의 아침’으로 바꾸실 수 있고, 통곡하는 슬픔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십니다(에스 4:17(14); 시편 30:5, 11).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 주시고, 재 대신 화관을 씌워주시는 ‘모든 신 중의 왕’이십니다(에스 4:17(23); 이사 61:3). 상복을 입었던 몸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주시고, 침울한 마음에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해 주시는 ‘모든 권세의 주권자’이십니다(에스 4:17(23); 이사 61:3). 죄를 은혜로 바꾸실 수 있는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끔찍했던 ‘죽음의 금요일’을 온 인류를 위한 ‘희망의 금요일’로 바꾸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끈기 있게, 열정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수행을 이어가십시오. 언제나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수행’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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