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22. 사순 5일(월요일)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레위 19:1-2,11-18
  • 시편 – 19:7-14
  • 복음서 – 마태 25:31-46

사순 1주간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성사할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 언약을 준비시키는 교육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물론 예비 신자들만을 위한 여정은 아닙니다. 이미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거룩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삶을 기억하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자발적 수난이 나를 위한 사건임을 깊이 되새기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그 십자가의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점검하고 성찰하도록 초대됩니다. 회개할 것을 회개하도록 초대됩니다. 그 초대에 따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갱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으로 ‘극기’(克己)를 수행합니다. 자신의 ‘세례 언약’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우리가 동참하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진실하게 이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며 걸어간 이는 이 순례길 끝에서 분명히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 순례길 끝에서 창조의 하느님께서 빚어주시는 ‘진정한 자신’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 이야기를 통해 나의 어떤 삶의 태도를 갱신하고, 개혁해야 할지 배웁니다. 어떤 눈을 ‘확’ 떠야 할지 배웁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껏 수도 없이 오늘 복음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의 설교가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말씀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할 만큼 사회 전복적이고, 교리 전복적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삶의 자리를 같이해야 하는지를 엄숙히 일깨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몹시도 ‘가난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노숙인, 쪽 방촌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18세가 되면 갈 곳을 고민해야 하는 18세 보육원 청소년, 가출한 청소년, 청소년 미혼모, 한 부모 가정의 아이로 만드십니다. 사장이나 고객으로부터 ‘갑질’을 당하는 저임금 계약직 노동자, 임금 체불을 당하고서 항의조차 할 수 없는 외국인 노동자, 소수자, 난민, 전쟁고아로 만드십니다. 병원비가 없어 치료조차 포기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자신을 ‘인간의 존엄성’(자존감)을 ‘박탈’당한 사람으로 만드시어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십니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잊히고, ‘보호’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시어 우리 곁에 이미 와 계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과 ‘관심’과 ‘보호’와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곁에 살고 계십니다.

그런 자신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에 대한 ‘존중 의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 서로는 인간에 대한 존중 의무’를 잊은 채 ‘차별’과 ‘모멸’의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을 통해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 서로는 ‘사랑의 참 의미’를 잊은 채 ‘자기 행복’에만 ‘몰두’해 살아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을 통해 ‘따뜻한 손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 서로는 ‘나눔’보다는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을 통해 ‘사랑받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십니다. 우리 서로는 마치 ‘사랑받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인 ‘자선’(선행)을 실천하라고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은 인간을 ‘수익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는 ‘학력주의’ 세상에서 ‘대학’이란 곳은 이미 ‘사회적 차별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노출되어 살아가는 세상이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해 가는 ‘구조’라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서로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양심’을 되살려내야 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차별’과 ‘모멸’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투쟁’과 ‘자기 수행’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런 사회에 노출되어 살아가더라도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철학자 ‘칸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도구’(인력人力, 다시 말해 노동력)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내 형제에게 무슨 일을 했든 그 일은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네가 사랑으로 대했던 그가 바로 나였다.
네가 편견으로 거부했던 그가 바로 나였다.
나는 모든 일을 기억한단다…
네가 진정으로 눈을 떴으면 좋겠구나…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가난한 예수’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우리의 ‘동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랑할 기회’를, ‘존중할 기회’를 일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분명 우리 곁에 온 ‘구원자’입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사순절’은 ‘눈을 뜨자’라는 여정입니다(시편 19:7-8). 이미 주님께 받은 엄청난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음성을 듣고 싶습니까? 우리는 오로지 ‘사랑’으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레위 19:2).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야, 내 형제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자꾸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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