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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21. 사순 1주일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홍수로써 이 세상 죄악을 씻어내셨듯이 세례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세례를 통하여 거듭난 우리가 마귀와 세속과 정욕을 이기며 성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9:8-17
  • 시편 – 25:1-10
  • 2독서 – 1베드 3:18-22
  • 복음서 – 마르 1:9-15

사순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 계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재의 수요일’부터 앞으로 6주간 우리는 거룩한 사순절 여정에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은 그 여정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 첫 번째 주일에 우리가 들은 <전례독서>는 앞으로 걷게 되는 사순절의 기원과 여정 전체의 주제와 개요를 알려줍니다. 무슨 말씀인지 좀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복음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지난 ‘주님의 세례주일’과 ‘연중 3주일’에 이미 똑같은 복음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째서 같은 이야기를 또 배정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본래 사순절의 기원이 ‘부활절에 세례 성사할 예비 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교육 기간’에서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예비 신자들은 앞으로 있게 될 6주간의 여정 동안 <전례독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차근차근 배워나갑니다. 차례로 언급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순 1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전례독서>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이란 무엇인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사순 2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전례독서>를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지, ‘어떤 각오’로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지를 확실히 배웁니다. 특히 복음 이야기를 통해 ‘첫 번째 수난 예고’와 ‘제자도’에 대해 듣습니다(마르 8:31-38).

사순 3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전례독서>를 통해 ‘십자가 사건’이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배웁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방된 이스라엘은 율법의 기초이자 중심인 ‘십계명’을 통해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거듭났습니다(출애 20:1-17). 예비 신자들도 ‘은총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영원한 계약의 바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합니다(1고린 1:18-25). 예비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에서의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중심인 새 성전’이요(요한 2:13-22),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이자 힘(능력)임을 배웁니다(1고린 1:18-25).

사순 4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전례독서>를 통해 우리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절대성’과 십자가가 가져다주신 ‘은총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배웁니다(요한 3:14-21). 사순 5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전례독서>를 통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히브 5:5-10), 새 계약의 성취인 십자가 수난, 새 이스라엘인 교회(예레 31:31-34, 요한 12:20-33),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서 감당해야 할 ‘제자도’에 대해 배웁니다(요한 12:25-26).

사순 6주일에 예비 신자들은 ‘수난복음’을 들으며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 성취되어 가는 그 위대한 이야기 안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참여한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느님 구원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를 자랑하고 증언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처럼 사순절의 여정은 ‘부활절에 세례 성사할 예비 신자들에게 세례 언약을 준비시키는 교육 기간’에서 유래합니다. 물론 예비 신자들만을 위한 여정은 아닙니다. 이미 신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거룩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삶을 기억하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 자발적 수난이 나를 위한 사건임을 깊이 되새기는 거룩한 여정입니다.

그 십자가의 여정을 기억하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점검하고 성찰하도록 초대됩니다. 회개할 것을 회개하도록 초대됩니다. 그 초대에 따라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갱신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으로 ‘극기’(克己)를 수행합니다. 자신의 ‘세례 언약’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우리가 동참하는 거룩한 순례의 여정입니다. 진실하게 이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며 걸어간 이는 이 순례길 끝에서 분명히 ‘부활의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이 순례길 끝에서 창조의 하느님께서 빚어주시는 ‘진정한 자신’을 만날 것입니다.

사순절 여정이 갖는 이런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오늘 배정된 <전례독서>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피조물과 맺으시는 계약 이야기입니다. ‘대홍수’ 후에 하느님께서는 땅에서 ‘숨 쉬는’ 모든 것들과 ‘일방적’(은총)으로 계약을 맺으십니다. 노아로 대표되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짐승이 계약 당사자로 포함됩니다. 계약의 내용은 다시는 물로 땅 위에 사는 피조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의 분노가 ‘은총’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모든 계약에는 당사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조항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계약에는 아무런 ‘의무조항이 없다’라는 사실이 돋보입니다. 그 계약의 표시로 쓰인 중요한 도구는 낭만적이게도 ‘무지개’(히브리어로 케쉐트, קֶשֶׁת, rainbow)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홍수와 무지개의 기원에 대해서, 그리고 그 표시가 종국에는 누구를 위한 ‘신호’(sign)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태초의 일이나 자연현상(또는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신’(神, 초자연적 존재)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세계관을 ‘신화’(神話)라고 합니다. 문자로 기록된 역사 이전, 인간을 둘러싸고 이 우주에서 ‘진실’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한 민족이나 집단에게 진실한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이야기가 ‘신화’입니다. 신화는 그것을 공유하는 민족이나 집단을 하나로 결합할 뿐 아니라 그 들의 정체성과 자부심에 영향을 끼치는 삶의 경험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근동에는 대홍수와 그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 사람에 대한 신화가 전해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공포를 느끼게 하는 ‘홍수’는 자연재해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기후변화’마저도 신들이 벌인 전쟁의 결과라 해석했습니다. 특히 홍수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를 뜻하는 신화적 상징이었습니다(창세 1:2).

창조와 질서의 ‘신’(神)은 혼돈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다시 말해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는 ‘늙은 혼돈의 신’(神)과 맞서 싸우는 ‘젊은 질서의 신’(神)과의 우주적 전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神)의 약속은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를 통제하기 위한 태고(太古)의 전쟁으로 창조 신화는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태고의 전쟁이 끝났고, ‘질서의 신’(神)이 최종 승리했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비가 갠 후에 하늘을 영롱하게 물들이는 ‘무지개’를 통해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처럼 단지 자연현상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전사(戰士)인 신’(神)이 사용한 ‘하늘의 활’(bow, 본래 히브리어도 이 뜻입니다)이라 여겼습니다. 그것은 ‘신’(神)의 ‘신성한 무기’입니다. ‘혼돈의 신’과 벌인 태고의 전쟁에서 승리한 ‘질서의 신’이 이제 더는 그 ‘활’이 필요치 않기에 하늘에 걸어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무지개’는 ‘비폭풍의 종말’과 다시 돌아온 ‘평온함의 선포’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신호’(sign)였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도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가 녹아있습니다. 하느님은 대홍수 후에, 창조 이후의 안식과 같이(창세 2:2-3), ‘우주 질서(창조)가 수립’되었음을 선포하시며, 무지개를 ‘우주적 계약의 신호’로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은 혼돈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족쇄를 채우신 무시무시한 전사셨습니다. 하느님만이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그 힘을 발휘하실 수 있기에 ‘무지개’는 이 신성한 힘을 ‘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무지개는 인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하느님께 ‘영원한 계약을 상기시켜드리는 신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에 담긴 보다 중요한 세 가지를 주목합니다.

첫째 이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은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맺으셨다’라는 진실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함께 숨 쉬고 살아야 할 창조 질서의 대상’으로 하느님께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이것을 예표 했고, 광야에 계신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셨다는 이야기는 이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의 ‘평화로운 성취’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계약을 묵상하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회개’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자연’(피조세계)을 인간 중심으로만 바라보며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믿는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먹는 일, 마시는 일, 입는 일, 집 짓는 일 등등… 인간과 동식물이 창조의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 위에서 인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땅과 그 위에 ‘숨 쉬는 모든 생명체’(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 נפש חיהnephesh hayah)를 당신의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의 대상으로 부르신 분은 ‘창조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이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은 ‘다가올 모든 세대를 포함’합니다. 오늘의 우리뿐 아니라 미래 세대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연 자원은 우리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인간의 ‘탐욕’이 가져온 일들로 신음하는 지구의 울부짖음을 듣습니다.

지난 1월 28일 미국의 핵 과학자단체인 ‘핵과학자회’(BAS)는 ‘지구 종말 시계’를 작년과 같이 ‘자정 100초 전’으로 맞추었습니다. ‘핵과학자회’는 핵확산과 기후변화 등에 따른 지구 종말을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습니다. 2019년에는 2분 전이었는 데 벌써 20초나 당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지구 종말이 100초 전까지 다가왔다는 경고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 종말이 아니라 ‘인류 종말’입니다. ‘핵과학자회’는 여기에 인류를 위협하는 새 위협요인으로 코로나19를 지목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신앙을 고백합니다. 성공회 선교 정신 중에는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지구생명의 회복과 유지에 헌신하다’라는 조항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지켜내야 합니다. 지속 가능한 인류,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한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그 운동의 중심에 ‘무지개’를 통해 표시되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이 자리합니다. 모든 세대를 위한 하느님의 계약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는 ‘생태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끝으로 《창세기》에 기록된 대홍수의 상징은 원초적 혼돈으로의 복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2독서 《베드로전서》에서 다루듯이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당대에 노아만은 하느님의 마음에 든 사람이었습니다(창세 6:8). 그가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명령하셨고, 가족과 짐승들이 홍수의 징벌을 피할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대홍수 이야기의 ‘핵심’(중심)에는 하느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구원’이 자리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5편>은 겸손하고 경건한 이가 인도하심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약간의 불규칙이 있지만 히브리어 알파벳 22자의 차례를 따라 지어진 ‘알파벳 시’입니다. 시인은 “내 영혼이 하느님을 우러르고(1절), 믿고(2-3절), 기다린다(5절)”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걸어야 할 ‘하느님의 길’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4절).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25편>은 겸손하고 경건한 이가 ‘하느님의 길’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의 전통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정의의 길이나 악의 길처럼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 방향, 지향점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특히 ‘길’이란 말이 하느님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인류가 걸어가도록 ‘가리키시는(가르치시는, 원하시는) 생명의 길’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 자신의 ‘행동 방식’, 즉 ‘성품’을 의미합니다. <25편>에서 말씀하시는 ‘길’은 둘 다의 의미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행동 방식인 ‘성품’으로 ‘길’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1-5절), ‘계약’(6-7절), ‘바르고 어지심’(8-10절)에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선, 시인은 자신에게 일어나야 할 ‘구원의 성격’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1-5절). 그가 병들었는지, 인간관계로 곤란을 겪고 있는지, 자연재해의 위협에 처했는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지금 그가 ‘하느님의 구원’(인도하심)을 간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렇게 구원(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성품’을 찬미하고 감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이 사용하는 ‘계약의 언어’는 ‘자비’와 ‘한결같으신 옛사랑’에 강하게 나타납니다(6-7절). 본문에 ‘자비’(compassion)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라캄’(רַחַם)입니다(6절). 이 말은 일차적으로 ‘자궁’(레켐, רֶחֶם, womb)이라는 의미입니다. 산모와 아이처럼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애착’을 ‘자비’라고 합니다. ‘한결같으신’은 ‘계약 의무’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신실함)을 나타냅니다. 특히 계약의 지속성은, 1독서 《창세기》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와 ‘한결같으신 사랑’이라는 ‘성품’에 근거합니다(6절).

그는 계약을 지속시키는 하느님의 이 같은 ‘성품’, 즉 ‘일방적인 자비’와 ‘한결같으신 사랑’을 생각해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이 기억해 낸 젊은 날의 잘못과 죄들을 고백합니다(7절). 나이 든 지금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라 살고 있지만, 젊은 날 그는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걸었던 ‘죄책감’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죄책감을 하느님의 ‘성품’에 호소하고, 잘못을 하느님께 ‘회개’합니다(7절).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방적인 자비’와 ‘한결같으신 사랑’에 근거해(6절) 자신을 ‘용서’하시고, ‘생각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7절).

마지막으로 시인은 ‘길’(율법)을 가르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8-9절). 하느님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겸손한 이뿐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에게조차 ‘길’을 가르쳐주시는 분입니다. 사랑이며 진리인 ‘하느님의 길’(율법)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10절).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멸망하는 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차별 없이, 일방적으로, ‘숨 쉬는’ 모두에게 어지시고, 자비하십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하느님의 구원 행동이 차별 없이 일방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계명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향한 ‘응답과 순종’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지칭하여 ‘이미 구원받은 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습니까? 우리의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셨다면, 혹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영생의 관계로 들어섰다면, 우리가 이행해야 할 진정한 의무,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이 진정한 의무, 가장 근본적인 책임을 잘 이행하고 있습니까?

끝으로 시인이 호소한 “기억하시고, 생각해주소서”(6, 7절)라는 기도는 1독서 《창세기》의 ‘무지개’와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무지개를 보시고 ‘영원한 계약’을 ‘기억’(생각)하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 삶에 들이닥친 ‘홍수’ 같은 삶의 ‘혼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잠시 멈추고, ‘기도’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길’,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기억하고,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없이 삶의 혼돈으로 빨려 들어갈 일이 아닙니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우러르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걸어야 할 당신의 길, 즉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 안에 머뭅니다. 당신의 길을 가리켜 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소서.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보여주소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보여주소서.

2독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과 승리의 찬가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두 가지 조항의 모태가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이고(19절, 참고 4:6절), 다른 하나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22절)입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려면, 짧게라도 ‘위경’(僞經) <에녹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에녹서>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언급하겠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효력은 서신의 다른 의미들이 도출되는 주요 주제입니다(18절). 그리스도의 고난은 날마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지면서 제공되는 죄사함처럼 속죄의 봉헌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행해지고, 또 개인의 죄책감을 만들어내는 속죄물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단한번의 희생(죽음)은 모든 시대와 사람들에게 항상 유효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대신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이사야》에 기록된 ‘종’처럼(이사 53:4-6),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육체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종식하지 못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 계셨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에게 구원을 선포하러 가셨다고 사도 베드로는 교훈합니다(19절). 죽은 후에 일어난(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에 대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물론, 이 언급은 ‘종말론적 전통’에 대한 암시입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 선포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사람들이 옥에 갇혀 있듯이 죽음 안에 간직되어 있다는 사상을 전제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쩔 도리 없이 죽음에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자들에게도 역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언급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데 도대체 사도 베드로는 무엇을 참고한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몇 개의 다른 구절들을 모아 짜깁기한 <에녹서>라는 ‘위경’(僞經)이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고 알려진 ‘에녹’(창세 5:24)이 본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BC 1,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 불명의 이 책은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천사들의 타락, 거인의 탄생, 대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의 타락이 대홍수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기에(창세기 7-9장), 이 타락한 천사들은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택한 “하느님의 아들들”로 생각되었습니다(참조, 창세 6:1-6).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대홍수를 예고하시기 전, 이미 노아의 조상인 ‘에녹’을 타락한 천사들에게 보내십니다. 에녹은 그들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임을 선언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에녹서>를 재해석합니다. ‘노아’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대신합니다. 또 타락한 ‘천사들’을 향한 정죄를 ‘죽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바꿉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이 있는 세계’에 가시어 ‘복음’을 선포하신 명백한 이유와 그곳에 있었던 영혼들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구절은 교회사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았습니다(19절). 그러나 세부 사항은 이해되고, 전통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은 모두에게로 확장됩니다. 심지어 이승의 한계를 넘어 죽음의 세계에까지 확장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노아’와 ‘홍수’를 각각 ‘그리스도’와 ‘세례’의 유형으로 봅니다. ‘노아’가 홍수의 물에서 다른 사람들을(비록 가족이지만) 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최후의 멸망에서 구원하십니다.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그 ‘물’이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는 ‘세례의 물’을 예표 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 때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신실한 사랑’의 예표입니다(21절).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새 창조에 들어가기 위해서 홍수를 견뎌야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한 양심’(새로운 양심)을 얻기 위해서는 ‘세례의 물’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례가 단지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교훈합니다. 오히려 부활이 그리스도의 변형(변모)의 체험이었던 것처럼 세례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체험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음과 탐욕과 분노 속에 빠져 살아가던 우리가 <시편 25편>의 찬미처럼,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길’, ‘하느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는 인생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졌던 우리가 세례 성사를 통해 하느님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남(새 창조), 하느님과 연결됨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룬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21절).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18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얻어 하느님께 응답하게 되었습니다.

1독서 《창세기》와 《시편》으로 노래한 <25편>과 연결 짓자면, 인간뿐 아니라 짐승들까지 돌보시는 하느님, 겸손하고 경건한 이뿐 아니라 죄인들까지도 돌보시는 ‘자비의 하느님’ 덕택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려는 창조주의 자비 덕택입니다.

끝으로 사도 베드로는 승리의 찬가를 들려줍니다.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신 그리스도는 하늘로 오르십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하듯이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영예를 차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죄 없으나 죽으신 그리스도의 정당성이 입증되었고, 그리스도는 ‘지존’(至尊)이 되셨습니다. 다시 천사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반역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 천사와 천신들은 모두 영광스러운 구세주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의 찬가로 서신을 끝맺습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의 유혹과 갈릴래아 전도 시작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공생애 초기에 관한 간략한 서술입니다. 이미 주님의 세례 주일과 연중 3주일에 다룬 바 있습니다. 오늘 반복해서 나온 이유는 사순절의 기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12-15절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 나눔을 합니다.

광야에서의 유혹은 간결하지만 깊은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에는 풍부한 전통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내보내셨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에크발로’(ἐκβάλλω)입니다. ‘내보내셨다’라는 밋밋한 뜻보다는 ‘팽개치듯이 내던져버렸다’(throw out)라는 역동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몰아내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있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 1:11

이 하늘의 소리가 무색하게 성령께서는 예수를 광야로 팽개치듯이 내던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에게는 ‘광야’보다는 ‘꽃동산’이 제격 아닙니까? 어째서 사탄이 유혹하는 광야, 야생 동물이나 살아가는 광야로 내던지신 것일까요? 《마르코복음》 기자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령’은 하느님의 강력한 ‘힘의 현현’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판관들이 이스라엘을 원수로부터 구원하게 하셨습니다(판관 3:10). 성령께서는 다윗에게 부족들을 결속력 있는 민족으로 통합시키는 힘을 주셨습니다(1사무 16:13). 성령께서는 미천한 사람들을 세워서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이사 61:1). 이렇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활동하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광야’가 갖는 상징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전혀 낭만적인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야생 동물의 거주지였고, 도둑들의 피난처이자 사회로부터 버려진 곳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그곳이 ‘시험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 사회가 제공했던 모든 지원을 박탈당한 채,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오랫동안 ‘시험의 장소’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공관복음은 공통으로 예수께서 ‘40일 동안’ 그 광야에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어째서 10일이나 30일, 100일이 아니라 ‘40일’일까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40일’ 동안 계속된 대홍수를 떠올리실 것입니다(창세 7:4,12,17). 그때의 ‘40일’은 하느님이 정하신 ‘곤경의 기간’입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던 ‘40일’을 떠올리실 것입니다(출애 24:18; 34:28). 그때의 ‘40일’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는 ‘은총의 기간’입니다.

가르멜산의 ‘엘리야’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열왕상 18장) 그가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른 ‘40일’을 떠올리실 것입니다(1열왕 19:8). 그때의 ‘40일’은 그가 걸어야 할 다음 길의 준비, 즉 ‘사명 준비의 기간’입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거룩하신 하느님의 본질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려는 ‘사랑’이심을 발견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은 니느웨 사람들에게 경고된 ‘40일’을 떠올리실 것입니다(요나 3:4). 그때의 ‘40일’은 하느님께서 온 인류에게 돌이킬 기회를 다시 한번 선물하시는 ‘회개의 기간’입니다.

여기에 더 큰 수인 40년은 어떻습니까? 40년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고, 순종과 믿음을 시험하시는 교육의 기간이라는 전통도 있습니다(출애 16:35; 민수 14:33-34). 예수께서 40일을 광야에 계셨다는 공관복음의 진술은 이런 전통을 다 고려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원래 ‘사탄’은 일종의 ‘법적인 적’으로 여겨졌습니다. 피의자의 잘못을 낱낱이 밝히는 ‘고발자’(검사), 악의 선동과 묵인하려는 유혹자를 가리켰습니다. 포로기 후에는 《욥기》에서 보듯이(욥기 1:6-12) 하느님의 보좌 앞에서 사람들의 죄를 밝혀 아뢰는 하늘 재판정의 ‘고발자’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점차 하늘 또는 지하 세계에서 온 사악한 존재에 대한 여러 개별적인 특성들이 합쳐지면서 오늘 복음 이야기 같은 사탄의 그림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악의 화신’(化身)인 사탄은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그 ‘광야’로 내보내졌습니다. 성령께서는 ‘팽개치듯이’ 예수님을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평이나 원망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라면 어땠을까요?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이야기의 상징은 타락 이전의 에덴동산의 모습이(창세 2:19-20)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뜻합니다(이사 11:6-7). 이렇게 ‘마지막 아담’이신(1고린 15:45) 예수께서는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이 아니라 ‘광야’에 있었으면서도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르코복음》에만 나오는 이 진술은 예수께서 ‘생명력 없는 광야’ 같은 인생을 ‘생명력 넘치는 에덴동산의 삶’으로 초대하러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야처럼 그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사명의 여정’, 즉 ‘하느님의 길’(인생들을 살리는 생명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려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길, 즉 ‘사랑의 길’로 나설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 준비를 끝내고 행동에 나서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당당히 선포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 마르 1:15

너무나 짧은 선포이지만, 예수님 메시지의 주요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시간’(kairos)이 다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시간은 평범한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종말론적 사고에서, 그것은 ‘성취의 시간’입니다. 선포에 이어서 이 특별한 시간의 성격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통치(다스리심)의 도래(到來)입니다. 하느님의 현현(顯現)입니다.

우리가 몇 차례 들었다시피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느님의 통치’를 기다려 왔습니다. 끊임없이 더 강력한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왕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외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종교적으로 자유롭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고(metdnoia), 즉 마음을 바꾸고 당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메시지는 간단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도발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대의 주류인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처럼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일은 어렵고 힘든 과업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 어려운 일을 ‘당장 감행하라’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같은 선포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사순절의 의미가 우리의 필요와 욕망을 참아내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하기 위해 자기 욕구들을 포기하는 시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이라고 하면 극기, 고행, 단식, 이런 단어들을 먼저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은 <전례독서> 뿐 아니라 사순절에 우리가 읽는 <전례독서>는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먼저 행동하신 하느님이 자비와 선하심을 깊이 성찰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진 그 은총, 우리의 죄와 허물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더 깊이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부정하고, 부인할지에 먼저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라 그 크신 은총과 사랑에 눈을 떠 가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잘못된 삶은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사순절의 진정한 핵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하도록 의도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가 되어 ‘일방적’으로 행동을 개시(開始)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독서). ‘일방적’으로 희생을 개시(開始)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2독서). 우리를 위해 일방적으로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복음서). 이 하느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우리가 갈등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시편》을 제외하고, 각각의 독서는 우리가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 종류의 갈등은 1독서 《창세기》의 ‘홍수’처럼 사회적 갈등, 전쟁, 또는 자연재해 같은 세계를 뒤흔드는 격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통제 할 수 없는 그런 갈등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희생자가 되며 숨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는 상처 받기 쉬우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인간의 탐욕으로 수많은 동식물이 사라져갑니다. 하느님은 그 옛날 방주를 예비하시어 숨 쉬는 것들을 구원하셨고, 무지개로 영원한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무지개를 볼 때마다 교회는 이 시대의 모든 생명들을 위한 차별 없는 방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종류의 갈등은 2독서 《베드로전서》의 ‘깨끗한 양심’처럼,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충성과 불순종 사이의 투쟁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이 투쟁의 고통 속에 있으며,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세 번째 종류의 갈등은 복음 이야기의 ‘광야’라는 말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우리가 그렇듯이 유혹과 함께 고군분투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복음 이야기는 정말 냉철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의 모습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때로는 ‘유혹’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전례독서>는 우리가 갈등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전례독서>는 이 갈등의 한가운데를 사는 우리와 관계를 개시(開始) 하시려는 하느님을 묘사해 줍니다. 특히 1독서 《창세기》는 갈등하는 삶의 한가운데를 사는 우리와 일방적으로 ‘계약적 관계’를 개시(開始)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혼돈에 빠져있는 세상을 ‘일방적’으로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숨 쉬는 모든 것과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계약’을 상기하시려고 하늘에 무지개까지 거십니다.

2독서 《베드로전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들을 삶의 혼돈으로부터 구원해 줄 ‘세례’를 제공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복음 이야기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던지셨다고 증언합니다. 거기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승리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경우에 구원의 놀라운 행동을 ‘일방적’으로 개시(開始)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즉 무지개로 표시되는 영원한 계약, 세례, 도래한 하느님 통치의 선포 말입니다.

이처럼 오늘 <전례독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계약의 좋은 소식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세례’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좋은 소식이자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하느님의 통치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와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단지 회개를 선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든 선한 것은 하느님 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복음을 일방적으로 몸소 개시(開始)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으로 다시 나타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례는 이 영광스러운 통치에 들어서는 ‘문지방’입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우리는 이 계약 관계에 우리를 초대해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찬미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순절은 하느님의 성품, 즉 그 자비와 한결같으신 사랑과 바르심과 어지심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자비와 한결같으신 사랑과 바르심과 어지심에 적절한 행동으로 응답해가는 절기입니다. 하느님 안에 더욱 머무르는 절기입니다. 우리 모두 바르게 응답하여 생명의 사순절로 만들어 갑시다.

“2021. 2. 21. 사순 1주일”의 1개의 댓글

  1. 핑백: 2021. 3.14. 사순 4주일 –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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