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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14. 연중6주일(공현후 마지막 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나눔과 섬김을 통해 어려움 속에 있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열왕하 5:1-14
  • 시편 – 30
  • 독서 – 1고린 9:24-27
  • 복음서 – 마르 1:40-45

연중 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죽음의 병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순종하며 세상을 치유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력은 ‘부활절’과 ‘성탄절’이라는 두 대축일을 기준으로 설정됩니다. ‘성탄절’은 해마다 12월 25일로 고정이지만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변합니다. ‘춘분’(春分) 후 음력 보름이 지나고 오는 첫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제외한 ‘평일 40일 전 수요일’부터 시작입니다. 그 첫날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지킵니다. 금주 수요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기 3일 전인 오늘은 ‘주님의 세례주일’ 이래로 계속되어온 ‘공현후 연중시기’가 마감되는 주일입니다. 하지만 마감된 줄 알았던 ‘연중시기’가 3개월여 후에 ‘성삼위일체주일’로 다시 이어집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이유로 ‘공현일’ 이후에 맞이하는 주일을 현재처럼 ‘연중(年中) 주일’로 부르기보다 ‘공현(公顯) 후(後) 주일’로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씀드려왔습니다. 즉 ‘연중시기’(年中時期)에 속하는 밋밋한 주일이 아니라 주제가 선명한 ‘공현절기’(公顯, Epiphany)에 속하는 주일로 지키자는 주장입니다. 사실, 연중시기(年中時期)는 ‘절기(節氣)가 아닌 때’라는 뜻으로, ‘작은 부활절’이기도 한 ‘매주일의 기쁨’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더욱이 ‘공현후 연중시기’ <복음서> 주제는 ‘공현’(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 빛으로 드러나심)에 명확히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1독서인 <구약성경>도 <복음서>에 걸맞은 본문이 배정됩니다. 다만 2독서인 서신은 <복음서>와 무관하게 배정한 책의 처음부터(복음서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준(准)계속 병행’이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설교자는 2독서인 <서신>을 ‘공현’(公顯, Epiphany) 주제에 무리하게 결부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교우들이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지켜온 ‘공현후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연중 6주일’입니다. 물론, ‘재의 수요일’이 시작되기 전인 화요일까지가 공현절기에 해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성공회는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3일 전인 오늘을 ‘주님의 변모주일’(The Feast of the Transfiguration)로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에서는 오늘을 ‘연중 6주일’로 지킵니다. ‘주님의 변모 주일’은 올해 8월 8일(본래는 8월 6일로 고정이나 가까운 주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에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나눔은 ‘연중 6주일’ <전례독서>로 진행됨을 밝힙니다(2018년 2월 11일 주님의 변모주일 설교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그동안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전례독서>로 말씀나눔을 하는 것도 은혜가 될 것입니다.

1독서 《열왕기하》는 하느님께서 엘리사를 통해 ‘나아만’ 장군을 치유하신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인 나아만을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적국인 ‘시리아 왕국’(오늘날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지역에 있던 고대국가) 사람입니다. 그는 그 나라의 ‘군사령관’(대장군)입니다. 유대 전설에 따르면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은 그가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숨진 것으로 전해집니다(열왕상 22:34-35).

나아만은 수행하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로 탁월한 ‘지략가’이자, 왕의 ‘총애’까지 받았습니다. 심지어 《열왕기하》는 적국의 ‘대장군’(군사령관)인 그를 “주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이라고 진술합니다(1절). 이러한 진술은 ‘이스라엘만’을 ‘하느님의 선민’이라고 부르는 관점에서 볼 때 놀랍기만 합니다(아모 3:2). 정말이지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많은 것을 소유한 ‘엘리트’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소유한 ‘한 가지’는 다른 많은 것들을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자신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둥병환자’(leper)였습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 구약에는 그와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문둥병환자’(히브리어로 ‘짜라’ צָרַע, leper), <복음서>에는 ‘나병환자’(그리스어로 ‘레프로스’ λεπρός, leprous)라 번역했습니다. 오늘날은 이 ‘용어들’이 갖는 차별과 편견과 혐오 때문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오역’(誤譯)인 셈입니다. ‘문둥병’은 ‘문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살이 문드러진 사람’이라 ‘업신여기며’(멸시하며) 부르는 말입니다. 또 한자어 ‘나병’(癩病)은 피부에 울퉁불퉁 많은 돌기가 있는 ‘두꺼비’에 그 사람의 살갗을 비유한 ‘혐오’의 말입니다. 한자로 두꺼비를 ‘나흘마’(癩疙痲)라고 쓰는데 그 ‘나’(癩) 자(字)를 쓰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그 병의 원인인 ‘나균’(癩菌)을 발견한 노르웨이 의사 한센(Gerhard Armauer Hansen, 1841~1912)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leprosy, Hansen’s disease)이라 부릅니다. 저도 본문에 나오는 그 단어들을 아래에서는 ‘한센병’으로 바꾸어 사용하겠습니다. 실제로 나아만이 ‘한센병’이었는지는 의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한센병’과 상관없는 ‘전염성’이 의심되는 ‘온갖 악성피부질환’까지도 <성경>은 ‘한센병’처럼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영혼의 치유와 구원’으로 이끄는 책이지만 의학 전문서는 아닙니다.

‘한센병’은 ‘나균’이 상처 난 피부와 상부 기도에 침투하여 조직을 변화시키는 질병입니다. 감염되면 ‘통각’(痛覺)이 ‘상실’되고 결과적으로는 ‘신체를 훼손’시키는 만성 전염성 질환입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치유법이 없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고,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러나 그는 한센병자였다”라는 이 한마디 진술은 그가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회복 불가의 불치병에 걸렸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에서 아무리 많은 성공과 성취를 거두었다고 해도 그는 이미 처참한 인생을 받아놓은 사람이입니다. 아직은 병의 상태가 ‘초기’입니다. 하지만 피부에 시작된 작고 붉은 반점들이 점점 커져서 흰색으로 변해가는 중입니다. 머잖아 온몸에 퍼지고 머리카락과 눈썹도 빠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다음은 ‘통각’(痛覺)을 ‘상실’하면서 손톱과 발톱이 빠지고, 손가락 발가락부터 썩기 시작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결국에는 ‘얼굴’까지도 일그러지고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는 ‘병’이 언제 자신을 집어삼킬지 알 수 없는 절망스러운 처지입니다. 정말이지 ‘한센병자’라는 자신의 처지에 비추어 볼 때 ‘군사령관’(대장군)이라는 지위도 ‘왕의 총애’도 덧없게만 느껴집니다. 그런 절망스러운 처지에 있던 그와 그의 집안이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된 ‘믿음의 여정’이 막 시작될 참입니다. 물론, 그의 여정은 단지 ‘믿음의 여정’만은 아닙니다. 다른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본문에서 밝히겠습니다. 통곡하던 슬픔이 ‘춤’으로 바뀌고, 죽음의 베옷이 아니라 ‘기쁨의 잔치옷’으로 갈아입게 된 경위는 이렇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급습한 시리아 군은 거기서 ‘어린 소녀’를 하나 사로잡아왔습니다. 소녀와 소녀의 집안에는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나아만과 그의 집안에는 결과적으로 ‘복’이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모든 일 뒤에는 ‘구원’(치유)을 위해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셨습니다. 나아만은 ‘영특해’ 보일 뿐 아니라 ‘밝은 기운’을 가진 그 소녀를 ‘아내의 하녀’로 삼았습니다. 소녀는 싹싹한 성품이었고 집안일을 잘 도왔습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고 자신의 ‘현재’에 충실할 만큼 ‘지혜’가 있었습니다. 부인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이 지혜로운 소녀를 신뢰했습니다. 집에서 지낸 지 석 달여로 접어들던 어느 날 나아만은 아내로부터 깜짝 놀랄만한 말을 듣습니다.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그가 한센병쯤은 쉽게 고쳐주실 텐테요. – 열왕하 5:3

그 소녀가 부인에게 해준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녀는 주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연민의 마음’(측은지심)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나아만의 어두운 가슴에 ‘빛’처럼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삶의 의욕이 솟구칩니다. 소녀의 말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이 순간, 소녀의 정체성은 보잘것없는 ‘하녀’가 아니라 ‘위대한 믿음 사람’임이 드러납니다.

그런 믿음은 ‘이스라엘의 왕’(여호람)조차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엘리사가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정확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엘리사를 사용하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경외’하는 ‘지혜’에서 나왔습니다. 문득, 소녀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런 믿음, 연민의 태도, 지혜는 하루아침에 생겨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신앙깊은 부모가 소녀를 그렇게 양육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그 소녀는 더 큰 선과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의 집안에 ‘파송하신 전도자’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이야기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비록 이름조차 없지만, 기쁜 소식의 전파자인 그 어린 소녀는 ‘우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입궐하여 그 정보를 자기 ‘주군’(主君)에게 전합니다. 시리아 왕은 ‘이스라엘 왕’(여호람, BC 849~842) 앞으로 ‘친서’(親書)를 써 주었습니다(6절). 그 친서와 함께 ‘많은 선물’까지 딸려서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그만큼 시리아 왕이 나아만을 총애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군’ 덕택에 나아만은 개인적 용무가 아니라 ‘국가 사절’, 즉 ‘국빈’으로서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이렇게 해서 ‘치유’를 향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은총의 사건’이 시작되고 있습니다(루가 4:27).

나아만은 이스라엘 왕을 알현합니다. 자기 주군의 친서를 건넵니다. 나아만은 ‘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왕의 허락으로 자신을 ‘살려줄’ 그 예언자를 만나러 갈 참입니다. 그러나 그 ‘친서’를 본 이스라엘 왕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한센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것은 그가 나에게 싸움을 걸려고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은 이 점을 분명히 살피시오. – 열왕하 5:7

이스라엘 왕은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한센병’을 고치는 일은 그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신들 앞에서 ‘자기 옷을 찢으며’ 화를 냈으나 속마음은 ‘두려움’과 ‘절망’이었습니다. 시리아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구실을 만들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꼭 알아야 할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나라에 있는 ‘예언자 엘리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믿음’이 없는 왕입니다. 사실, 그는 예언자 엘리사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않았습니다(열왕하 3:13-14).

왕과 대신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왕궁 안에 있는 예언자 중에 이 위기로부터 그들의 살길을 마련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왕은 나아만과 그와 함께 온 군사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며 빠져나갈 방도를 찾았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라는 소문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엘리사’는 왕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습니다. – 열왕하 5:8

엘리사의 이 말은 왕을 향한 일종의 부드러운 ‘질책’입니다. 왕이나 왕궁에 있는 예언자 중에는 ‘한센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나아만의 출현’은 왕국에 불어닥친 ‘큰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아닙니다. 우리 하느님은 ‘한센병’뿐 아니라 ‘어떤 병’이든 ‘치유’하실 수 있는 ‘전능한 치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왕이 ‘야훼 눈에 거슬리는 일’, 즉 ‘여로보암의 죄’(벧엘과 단에 성소를 세워 우상숭배 하게 한 죄, 열왕상 12:26-30)를 따름으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위기’입니다.

그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이제라도 왕이 ‘야훼 눈에 거슬리는 일’(열왕하 3:2-3)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려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나섰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의 참 예언자가 궁전 안이 아니라 궁전 밖에 있음을 보여주려고 나섰습니다. 주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무감각한 ‘여호람’이 주님께로 돌아와 다시 관계를 맺게 하려고 ‘엘리사’가 나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에게 하느님의 예언자가 그 땅에 있음을 알려주려고 ‘엘리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마디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이방세계에 알리려고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나아만’은 마차를 몰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에게로 향했습니다. 나아만은 집으로 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 나오며, ‘환영’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일국의 ‘대장군’으로 ‘대접받는 일’에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집 앞에 도착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엘리사’는 친히 나와보기는커녕 사람을 보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그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리하면 새살이 나서 깨끗하게 될 것이오. – 열왕하 5:10

단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나아만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의 ‘기대’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그 ‘지시사항’은 ‘터무니없는 초라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이런 푸대접과 터무니없는 초라한 소리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달려왔던가?’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정말이지 엘리사가 내놓은 ‘치료책’은 너무나 황당했고, 못마땅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그 단순한 한 말씀’을 전해 듣고 ‘자존심’이 짓밟혔습니다. 그는 발길을 돌리며 자기 행동의 이유를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그가 나에게 나와서 자기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부분을 손으로 만져 이 한센병을 고쳐주려니 했다. 이럴 수가 있느냐?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의 어떤 강물보다도 더 좋은 아바나 강과 발바르 강이 있다. 여기에서 된다면, 거기에 가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 – 열왕하 5:11-12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자기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이나 ‘논리’에 맞아떨어지는 ‘세상적인 방법’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해 주실 때 ‘믿음’을 갖고 ‘행동’하기보다 ‘자기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이나 ‘논리’와 맞아떨어지는 ‘복잡한 방법’(자기가 만들어낸 하느님의 방법)을 찾아 헤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치유의 기회마저 날려버립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는 많은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단순하고 쉬운’ 방법대로 하면 안 되는지 자기의 ‘복잡하고 어려운 주장’을 늘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교만’을 정당화합니다. 이처럼 크게 노하여 발길을 돌리는 ‘교만한’ 나아만을 그의 부하들이 “내 아버지여”’(히브리어로 아브, אָב, 공동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라고 부르며 담대히 막아섭니다.

만일 이 예언자가 더 어려운 일을 장군께 시켰더라면 장군께서는 그 일을 분명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장군께 몸이나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 열왕상 5:13

그들은 그야말로 ‘심복’(心腹)이었습니다. 정말 지혜로웠습니다. ‘진짜’ 잘 생각해 보라고 ‘논리적으로’ 권했습니다. 그 순간 나아만의 ‘내면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예언자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고자 하는 ‘교만한 자아’, 자기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대로 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자아’, 이런 자아들과 예언자의 말에 ‘따르자는 자아’가 그 짧은 수간에 투쟁 중이었습니다. 그 투쟁의 결과는 어땠습니까?

심복들 덕택에 나아만은 다른 ‘두 자아’를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 엘리사가 전해준 그 ‘단순하고 쉬운 하느님의 말씀’(정확히 말하면 황당한 방법)대로 ‘겸손히’ 따르기로 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이라는 ‘교만’을 버리고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신 안에 ‘믿음’을 불러일으킨 ‘그 소녀의 말’을 듣고 그 ‘믿음의 여정’을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차를 몰고 ‘요르단강’으로 내려갑니다. 벌써 해가 저물어 갑니다. 심복들은 경계를 서고 나아만은 옷을 벗고 강물에 들어갑니다. 한발 한발 물이 가슴 깊이에 이르는 곳까지 들어갑니다. 이제 각각의 횟수는 ‘치유의 하느님’을 향한 그의 ‘믿음의 여정’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만한 자신’을 내려놓는 여정입니다. 두 번, 세 번, 심지어 여섯 번을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합니다. 그런데도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실망하고 거기서 그만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일곱 번째는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그의 ‘완전한 겸손과 순종의 여정’을 뜻합니다.

나아만은 여섯 번째로 강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만 하더라도 오늘 시편에서 노래했듯이 하느님께서 자신을 건져주고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시편 30:1). 하느님께서 그를 ‘죽음의 위협’이라는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 그 ‘깊은 구렁’(스올)에서 건져주고 계심을 알지 못했습니다(시편 30:3). 자신이 ‘이미 시작된 치유의 여정 중’에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교만’하게 살아 온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는 과정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이것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교만’이라는 우리 ‘영혼의 치명적인 질병’이 치유되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느님께서는 그를 진정으로 살리기 위해 ‘회개의 여정’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겸손과 순종의 여정’, 즉 ‘회개의 여정’은 어떤 결과를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까?

그러자 새 살이 돋아 그의 몸은 마치 어린아이 몸처럼 깨끗해졌습니다. – 열왕하 5:14

그는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치며 물장구를 쳤습니다. 지켜보던 심복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믿음의 여정’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완전한 겸손과 순종의 여정’은 기적 같은 치유를 가져왔습니다. 그의 ‘회개의 여정’은 ‘영혼’을 소생시켰습니다. 그 어린 소녀의 말과(3절) 심복들의 말에(13절) 귀를 기울인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말씀을 들은 대가는 그를 살렸습니다.

이리하여 ‘전도자’였던 그 ‘믿음 깊은 소녀’가 한 말이 증명되었습니다. ‘엘리사’가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느님의 참 예언자’임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나아만처럼 사람 잘 만나는 ‘복’을 하느님께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을 살리라고 부르심 받은 우리, 지금 여기 존재하는 우리임을 늘 기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아만을 ‘죽음의 위협’이라는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 그 ‘깊은 구렁’(스올)에서 건져주셨고, 그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큰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나아만’(נַעֲמָן)은 ‘기쁨을 주다’라는 동사 ‘나엠’(נָעֵם, delight)에서 왔습니다. 그는 절망스러운 ‘한센병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은총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지금까지 복된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1독서는 여기까지만 배정했습니다. 그러나 몸뿐 아니라 영혼도 치유되고 변화된 그의 고백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기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를 찾아가던 길에 그는 ‘예언자’가 자기에게 나와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대했습니다(11절). 지금은 그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슈브’(שׁוּב, return)는 ‘회개’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로 ‘완전히 방향을 되돌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 앞에 서서 나아만은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 소인이 감사하여 드리는 이 선물을 부디 받아주십시오. – 열왕하 5:15

이것이 ‘예언자 엘리사’가 일국의 ‘대장군’이 찾아왔는데도 나가지 않고 단지 ‘하느님의 말씀’만 전달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그 치유는 자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실(그리고 하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도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한센병’을 나을 수 있다는 ‘정보’에 이끌렸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밖에는 온 세상에 신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개종’(改宗)선언 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로 거듭났습니다. 하느님이 참된 ‘신’(神)이심을 아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이야말로 ‘한센병’이 치유되는 일보다 더 소중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나아만의 치유가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4:27). 비록 구약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만’을 ‘당신의 선민’이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으나(아모 3:2) 그것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12: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처럼 구약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유명한 외부자들(이방인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이 대표적인 ‘외부자들’인데, 심지어 이들은 예수님의 할머니로 족보에까지 이름이 올랐습니다(마태 1:5).

<성경>에 따르면 우리도 본질적으로는 ‘외부자’(이방인)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내부자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외부자 취급을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성별, 피부, 민족, 종교, 학력, 사회경제적 지위, 성적지향, 연령, 정치적 이념이 그 이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본래부터 내부자였던 것처럼 여기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흔히 교회에서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복종(순종)의 미덕’에 관해 가르칠 때 들려줍니다. 물론, 그 ‘복종의 대상’은 성직자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성직자는 단지 엘리사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달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의 자비’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질병이 치유된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복음 이야기의 배경 역할을 합니다.

여담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나아만 장군은 가장 먼저 그 소녀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 소녀에게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상일까요?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상입니다. ‘게하지’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선물과 함께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지만 저는 자꾸만 그런 상상이 듭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30편>은 죽을 병에서 살아난 다윗이 바치는 ‘감사 찬미’입니다. ‘고통과 악’이라는 근본 문제에 대한 기도자의 물음과 대답이 역동적인 ‘춤’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래는 ‘하느님의 은혜’로 ‘죽을 병’에서(참고, 사무하 24:14; 역대상 21:13-14) 살아난 이의 ‘감사 찬미’인데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어째서 개인적인 ‘감사 찬미 시’(詩)에 이 같은 제목이 붙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시’(詩)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봉헌절 축제’와 관련 있습니다(요한 10:22-30).

기원전 2세 중엽,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리아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잔악한 박해자 ‘안티오쿠스 4세’입니다(마카베오상 1:1-10). 그는 유대 민족 전체에게 ‘그리스문화’와 ‘관습’을 강요하려는 일환으로 유대교 행사(할례와 안식일)를 금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합니다(기원전 168년).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도 금하고 거기에 ‘제우스’ 신상(神像)을 세웠습니다(다니 8:11-12; 마카상 1:54). 이 일이 나중에 ‘마카베오 혁명’의 계기가 됩니다(마카상 2:1-28).

마카베오는 훼손된 ‘성전’을 회복하고 꺼졌던 성전에 불을 밝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기원전 165년). 탈무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시편 30편>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봉헌가>라는 제목이 붙게 된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수리하고 빛을 밝혀 재봉헌한 이날을(마카상 4:59) 오늘날까지 ‘봉헌절 축제’(하누카, חנוכה, Hanukkah, 봉헌이라는 뜻)로 8일간 성대하게 지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빛’이시고, 십자가에 수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성전’이시며(요한 2:19-22),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가 ‘성전’이자 ‘세상의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제 이 ‘시’(詩)의 구조를 보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찬미’와 ‘감사’가 중심주제입니다. 1절(내가 주님을 높이 받들어 올립니다)과 12절(내가 주님께 영원히 부르리다)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과 끝이 같은 ‘수미쌍관’ 구조입니다.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은 어째서 자신이 그처럼 찬미와 감사를 바칠 수밖에 없는지 구구절절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의 위협’이라는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 그 ‘깊은 구렁’(스올)에서 ‘은혜로 건져짐’(구원) 받은 사람이 바치는(3절) ‘감사 찬미’로 감싸여 있습니다.

첫 단락(1-5절)은 건져주신 주님의 은총을 회고하며 ‘진노’는 ‘잠시’뿐이요, ‘어지심’은 ‘영원하다’라고 노래합니다. 두 번째 단락(6-10절)은 자신의 ‘교만’(오만)이 초래한 하느님의 징계를 회상하며 구원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마지막 단락(11-12절)은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느님을 영원히 노래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봉헌절 축제일’(보통 11월 말에서 12월 말 사이에 옵니다)도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시편 30편>이 전례독서로 배정되었을까요? 그것은 1독서 《열왕기하》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위협’에서 ‘은혜로 건져짐’(구원)을 받은 다윗의 처지와 나아만 장군의 처지가 정확히 포개집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총애를 받던 위대한 장군 출신이듯이 나아만도 일국의 ‘군사령관’(대장군)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위와 명성이 무색하게 나아만은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에 이르렀고, ‘깊은 구렁’(스올)에서 건져진 다윗처럼 ‘은혜로 건져짐’(구원)을 받았습니다(1, 3절). 그래서 이 시편은 다윗의 노래가 아니라 나아만 장군이 바치는 ‘감사 찬미’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이면 기쁘리라”(5절)라는 멋진 시적 이미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었던 ‘그 고통(눈물)의 시간’이 아주 ‘잠깐’인 것처럼 노래합니다. 그만큼 ‘치유의 기쁨’이 잠시 당한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라는 뜻입니다. 나아만도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은 일이 형통한 시절 가졌던 자신의 교만(오만)한 태도가 초래한(6절) 하느님의 징계를 회상하면서(7절) 자비를 기도합니다(8-10절). 회개하는 이런 다윗의 모습과 승승장구하던 자신에게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친 한센병, 그리고 낫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아만의 모습이 포개집니다.

그러나 둘 다 “통곡하는 슬픔”이(저녁) “기쁨의 춤”으로(아침으로) 바뀌었습니다(11절a). 주님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다윗을 치유하셨듯이 엘리사를 통해 주님은 나아만을 고쳐주시어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셨습니다”(11절b). 이렇게 ‘잔치옷’으로 갈아입히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두 사람(그중에 한 사람은 이방인)과 ‘자기 옷을 찢었던’ 이스라엘 왕 ‘여호람’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열왕하 5:7). 모두가 ‘어지신’ 주님이 고쳐주시고, 회복시키시며, 변화시키신 일입니다. 그래서 둘 다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영원토록 찬미하게 하시는 주님을 감사로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진노’는 ‘잠시’뿐이고 그 ‘어지심’은 ‘영원하신’ 하느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5절). 우리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시간이 홀로 눈물 흘리는 ‘외로운 저녁’이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아침’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고난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자신이 서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는 ‘완치의 길’이 보이지 않는 질병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중 어떤 이는 거듭된 고난으로 인해 ‘통곡’하며, 영원히 ‘베옷’을 벗을 수 없는 절망의 시간 속에 자신이 내버려진 것 같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고난’, ‘질병’, ‘슬픔’ 속에 있든지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분명코 주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 ‘기쁨의 춤’으로 우리의 통곡하는 슬픔을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11절a). 눈물 흘리던 저녁은 반드시 ‘새 아침’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베옷’을 벗기시고 ‘잔치옷’을 갈아입히실 것입니다(11절b).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 찬미’가 솟아오르도록 새롭게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자비의 주님이 고쳐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비의 주님, 측은지심의 주님이 함께하는 인생에 ‘죽음의 밤, 눈물의 밤’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밤과 낮이 교차하는 것이 하루이고, 슬픔의 저녁과 기쁨의 아침이 교차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슬픔의 저녁이 없기를 바라지만, 역설적으로 슬픔의 저녁을 지새워본 이만이 새 아침의 기쁨을 진실로 노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만을 바라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 ‘깊은 구렁’(스올)에서 건져주십니다(3절). 우리를 ‘은혜의 산’ 위에 든든히 세워주십니다(7절). 그 자비하신 하느님, 그 미쁘신 하느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하느님 나라의 상을 받도록 최선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하라는 사도 바울로의 교훈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합니다. 어째서 바울로는 다른 것도 많은데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한 것일까요?

작년에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020년 하계 올림픽’이 올해로 연기되었습니다. 아직도 개최 여부는 불투명합니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이며, 올림픽이 열리는 도시는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고린토’도 그런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서는 고대 올림피아 제전(祭典) 다음으로 큰 규모인 ‘이스트미안 제전’(Isthmian Games)이 2년마다 4, 5월에 열렸습니다. 말하자면 봄철 스포츠 제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라는 인물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신들을 속인 죄로 미움을 사서 저승에서 벌을 받습니다. 큰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벌입니다. 그 ‘시시포스’가 고린토 도시를 세웠고, ‘이스트미아 제전’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전해집니다.

‘이스트미아 제전’에서는 특히 육상경기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육상경기 우승자에게는 ‘월계수’ 가지를 엮어서 만든 ‘관’(冠)이 주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소박한 상이지만 그 관을 차지한 선수의 ‘명예’는 대단했습니다. 자기 고향 도시국가로 돌아가면 개선장군처럼 시민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마 바울로도 고린토에 머무는 동안 이 제전을 관람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특히 달리기와 격투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고린토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신앙생활을 그들이 잘 아는 운동경기에 비유했습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 1고린토 9:25

경기에 나서는 운동선수들은 먹고 마시는 일을 포함하여 경기에 방해되는 일들을 ‘삼가고, 절제’합니다. 그 당시 전통에 따르면 운동선수들은 무려 10개월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을 삼가고 절제하며 훈련했습니다. 그 의도는 단 하나입니다. ‘월계관’(명예)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한 월계관이라 하더라도 결국 시들고 썩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 ‘불멸의 월계관’이 상징하는 바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소망을 간직한 이들이라면 마땅히 믿음의 경주에 방해되는 일들을 ‘삼가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로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고기) 이야기를 했던 이유입니다(1고린 8장). 바울로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1고린 8:13). 더욱이 경기를 잘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달음질을 하되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를 하되 허공을 치지 않습니다. – 1고린 9:26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영원한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로는 ‘삶의 절제’와 ‘목표를 향한 투신’을 고린토교우들에게 당부합니다. 그러나 그는 당부만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런 태도로 살았습니다.

나는 내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합니다. – 1고린 9:27a

‘사정없이 단련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휘포피아조’(ὑπωπιάζω)는 ‘눈 아래 부위를 멍이 들도록 때린다’(strike under the eye)라는 뜻입니다. 권투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민첩하게 움직인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둘라고게오’(δουλαγωγέω)는 ‘노예로 만들다’(enslave)라는 뜻입니다. 전쟁이나 경기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을 복종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그 정도로 바울로는 ‘몸의 욕망’(탐욕, 식탐)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몸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에 순종하는 몸으로 만들려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로는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뭐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내가 남들에게는 이기자고 외쳐놓고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 1고린 9:27b

바울로는 가장 위대한 심판관이신 주님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운동경기 규칙’을 설명하고 전해 준 자신이 정작 주님으로부터 ‘상’ 받는 일에서 ‘실격’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실격’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도키모스’(ἀδόκιμος)는 ‘불합격’이라는 뜻입니다. 바울로는 이 마지막 경고로써 자신 역시 운동경기에 참여해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도입니다.

2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믿음의 경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 방해되는 일들을 ‘삼가고, 절제’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하느님 나라’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잘 달려가고 있습니까? 바울로처럼 ‘몸의 욕망’(탐욕, 식탐)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오늘을 살고 있습니까? 극기와 절제로 초대하는 사순절을 몇 걸음 앞둔 오늘 이것들에 대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예수님께서 ‘한센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갈릴래아 지역에서 펼쳐진 예수님의 전도활동을 들었습니다.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마르 1:14-20).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신 후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마르 1:21-28).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외딴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29-35). 기도 후에는 갈릴래아 지방으로 두루 전도 활동을 다니셨습니다(마르 1:36-39).

오늘 복음은 여기에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며 전도하실 때입니다. 제자들과 길을 가시는 예수님 앞에 웬 사람이 갑자기 달려 나와 엎드렸습니다. 일행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습니다. 옷은 찢어져 있고,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습니다. 게다가 피부는 몹시 상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앞에 ‘한센병자’(악성 피부질환자)가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병’을 하느님께서 죄인에게 내리는 ‘징벌’로 여겼습니다. 특히 ‘한센병’은 가장 두려운 질병이었습니다. 그 병의 증상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끔찍한지 1독서 《열왕기하》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제는 그 병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언급하겠습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사제가 의사 노릇도 했습니다(레위 13-14장). 고대에는 이런 일이 흔했습니다. 특히 ‘전염성’이 의심되는 ‘악성 피부질환’과 관련해서는 병의 ‘진단’과 ‘격리’, ‘완치 판정’까지도 사제의 역할이었습니다. 물론, ‘공동체’ 보호가 목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센병’에 감염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사제는 그를 ‘부정하다’라고 선언합니다(레위 13:3). 그 한마디가 선포되는 순간 그와 가족 모두에게 불행이 시작됩니다.

일차적으로 그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공동체 예배’에도 참여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키지 않도록 사제는 그를 ‘공동체’로부터 ‘격리’합니다(레위 13-14장). 그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처럼 옷도 찢어 입고 머리도 풀어야 합니다(레위 13:45). 누구에게도 가까이 갈 수 없고 만나서도 안 됩니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다가올 수 없도록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소리쳐야 합니다(레위 13:45).

이처럼 ‘한센병자’는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인격’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으나 ‘송장’ 같은 ‘낙인’이 찍힙니다. 이미 죽음 속에서 살고 있던 셈입니다. 상호작용을 거부당하고, 공동체로부터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 불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율법 규정’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상, 즉 율법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센병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라는 사실은 놀랍기만 합니다.

그가 그렇게 ‘용기’를 내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율법 규정과 모든 장애를 넘어서게 한 그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가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오게 한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 마르 1:40

그는 예수님께 대단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를 움직이게 만든 그 용기, 그 힘의 원천은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뵈러 오기 전에 이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마르 1:28). 누가 ‘예수의 소문’(가르침과 치유)을 전해주었을까요? 그 엄혹한 율법 치하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 ‘가족’이었겠지요. 그는 가족으로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자 나아만 장군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왠지 모르게 예수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분명 뭔가가 있을 같은 ‘직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한센병자’입니다. 율법 규정은 자신에게 사람 만나는 것을 허용치 않습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섰다가는 그나마 남은 목숨이 돌에 맞아 끝장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심장’은 행동하라고 말하는데, ‘머리’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에서 ‘두 자아’가 싸웁니다.

그 투쟁의 순간 그는 어느 ‘자아’에 경청해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 규정은 그의 ‘절박함’을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라고 믿었습니다. 본문에 ‘깨끗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카타리조’(καθαρίζω)입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절정 장면을 보면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고쳐주다’라는 단어는 없는데 <공동번역 성서>는 그 말까지 넣어서 의역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예수께서 자신을 신체적으로 회복시켜서 공동체로 복귀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일행은 그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아픈 사람’을 만나면 ‘측은한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한센병’의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신체 일부가 일그러지고 훼손된 모습 때문에 ‘측은한 마음’보다는 ‘거부감’(정확히는 혐오)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아마 일행은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그에게 분노하며 ‘돌’을 집어 들 태세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위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희망’을 갖고 ‘투신한’(무릎을 꿇은) ‘사람’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이 장면은 개인이 예수님께 직접 ‘믿음’을 고백한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께서 ‘한센병자’를 치유했다는 기록이 《마르코복음》에 없기에 그의 ‘믿음’은 정말 대단합니다. 더군다나 ‘치료법’도 없던 시절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한센병’을 ‘불치병’이라 여겼기에 만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런 일을 행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께서는 돌을 집어 들려는 일행을 향해 소리치시며 손을 드십니다. 단죄하려는 행동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혐오’가 아니라 ‘측은지심’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책망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다’(연민憐愍, 측은지심惻隱之心)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compassion)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이를 보고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흔히 ‘애간장이 탄다’라고 합니다. 아마 꼭 맞는 은유가 “아픈 자식을 보고 느끼는 어머니의 감정”일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를 자신처럼 여기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난 속에 있는 이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구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신속히 그의 삶에 뛰어 들어가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항상 그런 마음으로 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마음’으로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사람’을 보십니다. 그의 ‘한 맺힌 심장’에 ‘공감’하십니다. 그의 ‘피 흘리는 심장’에 ‘주목’하십니다. 그의 ‘고통스러운 심장의 외침’을 깊이 들으십니다. 율법 규정에 매몰된 이들은 다른 이의 ‘한(恨) 맺힌 심장’을 보는 데 실패합니다.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진 이들은 다른 이의 심장에서 ‘울부짖는 그 외침’(애원)을 듣는 데 실패합니다.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못 보고 못 들을 때가 많지만 예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사와 희망의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째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마을에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다고 내쫓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아프게 한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 부정’입니다. 누구도 그의 존재를 ‘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한 ‘격리’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마을로부터, 관계들로부터, 사회로부터 보기 싫다며 ‘분리’되고, ‘단절’된 채 지내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때, 공동체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 시기에 오히려 ‘격리’ 당했습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 취급받는 그 ‘한’(恨), 분명히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받는 그 피맺힌 ‘고독’을 누가 풀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그의 이러한 깊은 ‘한’(恨)과 ‘고독’을 ‘보셨고’, 그의 심장을 꽉 채우고 있는 ‘피눈물’을 ‘보셨습니다.’ 분명 ‘고통의 소리’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 마르 1:41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대십니다. ‘접촉’입니다. 한마디 말씀으로도 고쳐주실 수 있었지만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 손길, 그 접촉은 그가 간절히 원했던 한 가지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율법 규정은 아랑곳없이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율법 규정에 따르면 예수님도 그 순간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더는 ‘부정한 한센병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자 그의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 장면에서 ‘치료하다’, ‘고치다’라는 뜻의 ‘쎄라퓨오’(θεραπεύω)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한센병자’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한 단어와 똑같이 ‘카타리조’(καθαρίζω)라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몸뿐 아니라 죄로 인한 그의 깊은 내적 아픔도 치유되길 원했고,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께서는 “곧 그를 보내시면서 ‘엄하게 명령’”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 – 마르 1:44

율법에는 깨끗해진 나병환자가 공동체에 복귀하는 절차가 규정되어 있습니다(레위 14:1-32). 사제가 진단과 격리를 선언했으니, 완치 판정도 사제의 몫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존중하시어 사제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에는 ‘한센병자’(온갖 전염성 피부질환자)가 공동체로 복귀하는 예식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센병’이 저절로 완치되는 일은 없었기에 사제들은 이 예식을 한 번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한센병’이 완치되어 사제들이 이 예식을 거행하려 했다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증거가 됩니다. 어떤 증거일까요? ‘메시아의 도래’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감옥’에 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메시아’이신지에 관해 의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마태 11:2-6).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묻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의 증거를 이렇게 전달해 주도록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한센병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 마태 11:4-6

여기에 ‘한센병자가 깨끗해진 일’이 언급됩니다. 예수께서는 ‘한센병의 치유’를 통해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한 명령’을 들은 그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머물러 계셨다. – 마르 1:45

분명 그 사람의 ‘의도’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예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복음 전도의 일을 방해했습니다. 예수님은 더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고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독서 《열왕기하》의 나아만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사의 말씀이 아니라 처음에는 ‘자기 생각’(기대, 고정관념, 집착)과 ‘논리’를 고집했습니다. 예수님께 치유된 이 사람도 자신의 ‘선한 의도’를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는 복음 전도의 방해였습니다. 우리도 순종한 나아만처럼 자신의 ‘선한 의도’(기대, 고정관념, 집착)를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우선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님보다 더 나은 계획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이야기는 어떻게 끝납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들었다. – 마르 1:45

이 한 구절에 ‘공현절기’를 마감하는 오늘 복음 이야기를 배정한 이유가 밝혀집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밝히 빛나고 계십니다. 세상에 오신 그 빛이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있어도 온 갈릴래아로 두루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 빛을 향해 사람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십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를 통해 ‘질병’에서 치유된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통의 멍에’를 벗으려고 주님 앞에 나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로 나아온 그들에게 ‘질병’으로부터 자유와 기쁨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그런 자유와 기쁨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한없는 은총 덕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치유 이야기를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실로 인도됩니다. 그 진실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이 감염되어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 또 있다는 진실입니다. 이 질병은 ‘한센병’처럼 인간을 당장 집어삼키진 않지만, 서서히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 ‘하느님을 향한 감각’을 ‘파괴’하고, 종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 질병은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죄’라는 이 질병 앞에서 ‘한센병’은 명함조차 내밀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가장 무서운 질병입니다.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마저 허물어버립니다. 영혼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도록 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의 욕망을 따라 ‘자기만’을 바라보며 ‘자기’를 중심으로 살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살면 ‘한센병’처럼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런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습니다.

고맙게도 ‘죄’라는 이 ‘죽음의 질병’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이 질병으로부터 깨끗이 고쳐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라는 질병을 치유하시는 유일한 의사이십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우리 앞서 믿음의 경주를 열심히 달린 ‘복음 전도자들’ 덕택에 ‘죄의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인도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치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들처럼 ‘자격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깨끗이 고치심’을 받았습니다. 그 크신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는 값없이 ‘건지심’을 받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위협’이라는 ‘인생의 끝자리’(지하, 무덤), 그 ‘깊은 구렁’(스올)에서 건져주심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교회는 그런 은총을 입은 이들이 한 가족으로 사는 집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아직도 우리 안에는 ‘자기 생각’이라는 ‘교만(오만)한 마음’이 작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순종의 마음’이 꿈틀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복되신 말씀에 무감각한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풍파를 만나 고난 속에 있습니까? 관계에서 겪은 실망, 일의 실패와 좌절로 영혼이 지쳐있습니까?

‘용기’를 내어 다시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어서 다시 주님께로 겸손히 나아오십시오. 주님은 뉘우치며 당신께로 오는 사람은 누구나 맞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오염된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나를 만져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주님은 왜 그랬느냐고 우리를 책망치 않으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만져주실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영혼의 감각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웃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 주님께로 나아오면, 주님이 만져주시면, 누구라도 ‘새 아침’을 맞습니다. 통곡하는 슬픔이 춤으로 바뀝니다. 슬프던 마음은 위로받고 이생의 풍파는 잔잔해지며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나아만처럼 ‘교만한 마음’을 내버리고, 단순해 보이지만 복되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대로 살면 우리는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아 하늘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부디 이 축복이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치유하고 살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비록 이름조차 알 수 없지만, 절망 속에 있던 이들에게 ‘기쁜 소식의 전파자’였던 어린 소녀처럼 ‘영혼의 치유자인 예수의 전파자’가 되십시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연민’으로 대하고, 그들과 ‘공감’하며, 그들의 착한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믿음의 경주에 방해되는 일들을 삼가고 절제하십시오. ‘불멸의 월계관’을 목표로 자신을 단련하며 영원을 향해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죄의 병’으로부터 건지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택에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지켜주시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을 향해 걸어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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