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7. 연중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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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병든 이들을 고치시어 몸과 마음을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한 몸과 영혼을 치유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0:21-31
  • 시편 – 147:1-11
  • 독서 – 1고린 9:16-23
  • 복음서 – 마르 1:29-39

연중 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우리를 치유하시어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주시는 열정 가득한 생명과 권능의 주님’입니다.

1독서 《이사야》는 ‘절대지존’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슬기)에 대한 선포입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포로민에게 찾아오시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새 힘’과 ‘기력’(기운)을 주실 ‘권능의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어 ‘해방’하시고(제 2의 출애굽) ‘새로운 공동체’로 출발할 수 있도록 ‘창조’해 가실 ‘열정’ 가득한 ‘지혜의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주실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지식’과 ‘믿음’을 올곧게 세우라는 선포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주전 8세기), ‘제 2이사야’(40장~55장, 주전 539년 이전), ‘제 3이사야’(56장~66장, 주전 537년 이후~510년 경)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배정한 1독서는 ‘제 2이사야’에 속합니다. 시대 배경은 유다 백성의 바빌론 ‘포로 생활’이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배반한 ‘죄’로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두 세대 이상’을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중입니다. 오랜 유배 생활에 ‘지쳐’ 그들의 마음은 무너져 있었습니다. 해방에 대한 희망도, 하느님을 향한 경외의 믿음도 더는 고백할 여력조차 없습니다. 총체적 ‘좌절과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곤비한 처지’에 있는 포로민을 향해 제 2이사야는 ‘약속의 말씀’, 즉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로 예언 활동을 시작합니다(이사 40:1). ‘창조주’ 하느님께서 권능과 지혜로 자기 백성에게 열어주실 ‘새로운 구원의 미래’, 즉 ‘새로운 출애굽’(새로운 창조)을 선포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포로 생활에 지친 자기 백성들의 ‘삶에 자리’에 ‘개입’하시어 그들을 ‘해방’하실 것입니다. 다정한 ‘목자’처럼 몸소 자기 백성을 데리고 ‘예루살렘’(약속의 땅)으로 ‘행차’하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것을 내다보며 ‘한 소리’는 그 자기 백성들과 함께 귀향하실 ‘하느님의 길’을 닦도록 선포합니다(이사 40:3).

오늘 우리가 낭독한 단락은 ‘새로운 출애굽’(새로운 창조)의 ‘약속’을 ‘현실화’하실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를 선포합니다. 아마도 제 2이사야의 선포를 들은 포로민은 의심하며 반문했을 것입니다. 왜 반문했을까요? 아시다시피 고대의 모든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의 패배’는 그 민족이 섬기는 ‘신의 패배’이기도 했습니다. ‘두 세대 이상’을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중인 후손들은 자기 선조들의 하느님께서 ‘바빌론 제국의 신’(마르둑)에게 정복당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포로민은 제 2이사야의 선포를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을 것입니다. 그 반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우리가 낭독한 단락입니다. 본래는 12절부터 시작인데 전례독서는 18절부터 배정했습니다.

제 2이사야는 ‘절대지존’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일로 그 대답을 시작합니다. 이 우주 어디에도 ‘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21-22절, 25절). 이 세상 어디에도 주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제 2이사야는 이어지는 장에서 이 선포를 연이어 반복합니다. ‘유일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은 그 지으신 우주와 만물에 ‘생명’을 주십니다(창세 1:1-5). 창조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시어 지금도 그 지으신 만물을 ‘유지’,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지상의 민족과 나라와 통치자들을 몰락시키는 ‘운명의 주관자’이십니다(23-24절). 그 ‘강력한 권능’ 앞에서는 하늘의 ‘별들’, 즉 바벨론 사람들이 운명을 결정짓는 ‘신들’이라 믿던 그 별들마저도 꼼짝 못 합니다(26절). 그러니 바벨론 통치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별들에 대한 제 2이사야의 언급은 ‘첫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 1:16)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던 하느님(창세 15:5)을 생각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야곱’과 ‘이스라엘’도 ‘계약’을 생각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렇게 제 2이사야는 포로민의 그릇된 ‘신관’(神觀)을 바로 잡아주는 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제 2이사야의 이런 선포가 포로민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그들은 지금 ‘두 세대 이상’을 바벨론에서 ‘포로 살이’ 중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운명이 끝났다며 몸과 마음이 지치고 무너져 있습니다. 그처럼 ‘위대하시고 절대지존’이신 하느님이라면 어째서 자기 백성을 포로가 되게 했단 말입니까? 설명이 필요합니다.

제 2이사야는 40장 첫머리에서 이 질문에 대답했습니다(이사 40:2). 그것은 하느님께서 ‘권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유다의 멸망, 즉 귀양살이는 바벨론 제국을 도구로 사용한 ‘하느님의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역 기간’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습니다. 이제 ‘권능의 하느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주려 행차하실 것입니다(이사 40:1-4). ‘이스라엘’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래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선조들에게 행하셨듯이 하느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이사 40:9-11).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이 ‘위로’와 ‘희망’의 선포 앞에서 포로민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선조로부터 전해 들은 ‘하느님의 권능’과 ‘지혜’, 즉 ‘출애굽의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입니다. 먼저 그들은 입술에서 ‘원망’을 내버려야 합니다(27절).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선조들의 잘못’으로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그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원망’(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 알은 체도 않으신다. – 이사 40:27b

제 2이사야는 그런 철없는 ‘원망’일랑 집어치우라고 잘라 말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지식’과 ‘믿음’을 불러세웁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엄청난 ‘지식’이 있습니다. 이제 그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믿음’으로 옮길 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자신’에게서 곧게 세워야 합니다(28절). ‘권능’과 ‘지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자기 안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28절).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는” ‘권능의 하느님’,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열정 가득한’ 하느님을 ‘믿고 바라야’ 합니다(29-31절).

이처럼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믿고 바라면 무슨 일이 먼저 일어납니까? 그 사람은 ‘주님의 능력’을 받습니다. 그 모습을 제 2이사야는 생생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 보입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 이사 40:31

‘복음’입니다. 이것이 제 2이사야가 ‘창조의 하느님’ 이미지 속에 담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그 ‘위대한 권능’으로 실망과 좌절, 절망 속에 있던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을 ‘새로 창조’하실 것입니다. ‘한 처음처럼’ 권능과 지혜의 하느님께서 죽은 것 같은 그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어 ‘새로 창조’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힘’과 ‘기운’을 주시어 그들을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살려내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건설하도록 제 2의 출애굽을 일으키시는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바빌론에서 해방하여 ‘새로운 공동체’로 출발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실 ‘창조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열정 가득한’ 하느님,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하신 권능과 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 하느님을 믿고 실망과 좌절, 절망과 불신앙의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땅’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야 하고(26절), 독수리가 나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31절).

1독서 《이사야》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느님에 관한 여러 ‘지식’이 많습니다. ‘성경 지식’도 풍부합니다. 그래서요? 그 ‘지식’이 온전히 ‘나 자신의 것’이 되었습니까? 그 지식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까? 그 지식이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를 더 성장시켰습니까? 관계에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사랑을 가져오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요히 자신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우리 마음은 자유롭습니까?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의 배만 불리려는 ‘마귀 들린’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이기심의 악령’으로 병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자유인’ 같으나 때로는 세상 걱정과 자기 욕망의 ‘포로’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나름 괜찮은 신자 같으나 때로는 미움과 원망, 절망과 불신앙으로 마음과 영혼이 구렁텅이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그 많은 성경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은 ‘독수리처럼’ 하늘 높이 날지 못하고 여전히 ‘땅’에 붙어 있는 ‘메뚜기’ 같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하느님에 관한 여러 지식이 ‘우리 자신’을 더 자유롭게 못 한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 지식은 ‘악령에 들린 사람’도 갖고 있었습니다(마르 1:24). 우리의 ‘성경 지식’이 우리의 병든 마음과 영혼을 치유해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 힘, 새 기운, 새 생명을 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나 자신’이 ‘더 높은 관점’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 지식을 통해 ‘독수리처럼 자유롭게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눈을 들어 아브라함처럼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사람은” 그렇게 ‘새롭게 창조된다’라는 진실을 우리 자신이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으로 마음이 병든 우리를 가만두고 보지 못하고 찾아오십니다. 미움과 원망, 절망과 불신앙으로 영혼이 구렁텅이에 빠진 우리를 가만두고 보지 못하고 찾아오십니다. 울고 있는 가련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보듬어 안아 다독여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얼굴을 피해 세상으로 도망치던 우리가 돌아서서 ‘그 손’을 잡을 때까지 끝까지 따라와 손 내미시는 ‘열정 가득한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 은총의 하느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 손’을 잡으면 갑자기 마음과 영혼의 병이 치유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새 힘’이 솟아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새 힘’이 솟아납니다. 희망할 수 있는 ‘새 힘’이 솟아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새 힘’이 솟아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새 힘과 기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창조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창조의 하느님, 생명을 주시는 권능과 지혜의 주님, 이 사랑의 주님을 오롯이 믿고 바란다면 우리는 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창조의 하느님’,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주시는 ‘생명의 하느님’을 선포하는 제 2이사야가 복음 이야기의 ‘배경’(암시, 예언, 보충, 조화)으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새로운 힘과 기운을 주시어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살려내시는 ‘생명의 하느님’, ‘창조의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고난 속에 있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그 ‘열정’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는 인생들, 용기를 잃고 좌절한 인생들, 마음에 상처 난 인생들, 병으로 고통 하는 인생들, 악령에 붙잡힌 인생들, 걱정과 자기 욕망에 시달리는 인생들 곁으로 다가가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열정 가득한 분’이라고 복음 이야기는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로 창조하시는 일이라면 힘이 솟구쳐 피곤을 모르시는 분이라고 복음 이야기는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47편>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사랑으로 ‘돌보시는’ 우주와 역사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 《이사야》의 응답입니다.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다음에 지어진 전례용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2절).

우리가 함께 나눈 것처럼 1독서 《이사야》는 ‘절대지존이신 창조주 하느님’, 제 2의 출애굽이라는 ‘새로운 구원의 미래’를 열어주실 ‘생명의 하느님’을 선포했습니다. 그 약속대로 ‘위대한 권능과 ‘지혜의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무너지고 몸이 지쳐 절망 속에 지내던 바빌론 포로민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돌아온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 창조의 하느님, 강력한 권능과 지혜의 하느님, 열정 가득한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힘찬 ‘할렐루야’로 시작합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הללו-יה 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은 150편의 처음과 끝에만 ‘할렐루야’를 붙였으나 원문에는 다섯 편 모두 처음과 끝에 ‘할렐루야’가 붙습니다).

사실, 피조물인 인간이 할 수 있는 본질적 행동은 하느님을 향한 찬미입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며,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이사 43:7,21). 이처럼 시인은 ‘할렐루야’를 선포한 후 하느님을 찬미함이 좋은 일이며, 하느님께 찬미함이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라고 ‘초대’(명령)합니다(1절). 그런 다음 어째서 하느님을 찬미함이 마땅한지 그 이유를 차례로 밝힙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돌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던 그들을 ‘해방’하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들여 ‘새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상처받은 개인’도 자상하게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는 ‘치유의 주님’이십니다(3절).

다른 하나는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의 창조주’이시기에 그 정확한 ‘수효’를 일일이 알고 계십니다(4절). 낱낱이 ‘이름’을 붙여 불러주실 만큼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4절). ‘별들’은 고대근동 사람들이 섬기던 것처럼 ‘세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피조물’일 뿐입니다(이사 40:26). 여기서도 1독서 《이사야》에서 언급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 1:16)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던 하느님(창세 15:5) 이야기가 배경 역할을 합니다. 우주를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지혜’(슬기)는 누구도 헤아리거나 측정할 수 없습니다(5절). 참으로 하느님은 그 ‘존재’와 ‘권능’과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신’ 분입니다.

더욱이 창조주 하느님, 강력한 권능과 지혜의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별들만 아시고 ‘이름’을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은 우리’,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이름’도 아시고 ‘사랑으로’ 돌보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그 ‘사랑’과 ‘돌봄’이 오늘 복음 이야기인 ‘예수님의 치유’에서 자세히 전해집니다. 하느님은 ‘낮은 자’(겸손한 자)를 들어 올리시고, 악인들은 땅바닥까지 낮추시는 ‘운명의 주관자’이십니다(6절).

이어서 시인은 ‘자연’에 나타난 ‘우리 하느님의 위대한 권능’을 찬미하자고 초대(명령)합니다. 하느님은 비를 내려 풀과 곡식이 나게 하시고, ‘까마귀’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먹이고 돌보아주시는 ‘전능한 분’입니다(8-9절).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돌봄’ 속에 있습니다. 이런 ‘강력한 전능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찬미함이 아름답고 마땅한 일입니다.

끝으로 시인은 우주 만물을 전능한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교훈합니다. 인간은 ‘힘센 말’(駿馬)을 기뻐하고, ‘힘 좋은 장정의 다리’를 반깁니다. 사실, 고대에 ‘준마’와 ‘힘센 장정’은 세상의 ‘군왕들’(통치자들)이 기뻐하는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군왕들은 자기 권력의 기반을 ‘군사력’에 의지했습니다. 군왕들뿐 아니라 인간은 지금보다 더 많은 ‘힘’을 갖기를 원합니다. 돈이나 지식(정보)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이유도 그것들이 전부 ‘힘’(권력에의 의지)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조차도 신앙을 고백할 때 ‘창조의 권능’(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나이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크신 권능’으로 ‘준마’와 ‘힘센 장정’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힘센 피조물’ 그 자체나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 그 자체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10절). 하느님은 ‘힘’을 가진 사람을(권력가)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떤 이들을 기뻐하십니까?

당신 두려운 줄 아는 사람, 당신 사랑 믿는 사람, 그들만을 반기신다. – 시편 147:11

하느님은 힘센 이들, 다시 말해 ‘자기 힘’을 의지하는 ‘권력가들’(군왕들, 통치자들)을 반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생각’과 ‘힘’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그런 것에 포로로 살 일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강력한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가득한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 사랑을 믿으며’(그 사랑에 희망을 두며) 하느님을 알아 모시는 이들의 찬미를 하느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11절).

우리는 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사랑의 열정’이 가득한 분이신지를 들을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돌보아주시는 사랑의 주님을 경외하고 찬미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더욱이 가련한 인생과 짐승들과 울어대는 까마귀 새끼에 이르기까지 먹이를 마련하시는 그 창조의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고 믿는 우리입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사도 바울로가 갖고 있던 ‘복음 전도 전략’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교회 설립자입니다(사도 18:1-17). 당시에는 다른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과 베드로는 복음 전도에 전념하면서 초대교회로부터 ‘생계비’(보수)를 받고 있었습니다(1고린 9:5). 오늘날로 말하면 저 같은 ‘직무 사제’, 즉 ‘전임 사역자’입니다. ‘보수’(생계비)는 그들의 권리로 널리 인정되고 있었습니다(1고린 9:7-14). 바울로는 설립자일 뿐 아니라 그들의 사도였기에 당연히 고린토교회로부터 ‘생계비’(보수)를 받아 가며 ‘복음 전도’에 전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로는 이 ‘권리’를 포기하고 ‘노동’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렸습니다(1고린 9:6). 흔히 ‘자비량’(自備糧) 선교라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기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습니다(1고린 9:12). 그렇지만 바울로의 이러한 태도를 미덥지 않게 여긴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로서의 권위에 결함’이 있기에 바울로가 ‘보수’(생계비)를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라 떠들고 다녔습니다(1고린 9:3-4).

사실, 바울로에게는 사도직, 즉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의 제자(사도)가 아니었다는 일이 꼬리표처럼 달려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초대교회의 박해자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 9장 첫머리에 나오는 바울로의 ‘사도 자격’에 대한 논쟁입니다(1고린 9:1-2). 바울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자신이 ‘생계비’(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으나 어째서 그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게 되었는지 먼저 확신시켜 줍니다(1고린 9:1-15). 그런 후에 자신의 ‘복음 전도 전략’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보수를 받지 않고 ‘복음 전도’를 그처럼 열정적으로 감당하는 ‘이유’와 그 ‘가치’에 대해 대답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9:17). 그에게 있어서 ‘복음 전도’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부르심을 완수’해야 한다는 ‘강한 책무감’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선언할 정도입니다(1고린 9:16). 참으로 그는 ‘생명’을 주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자신이 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에 ‘모든 것’을 건 사도였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복음 전도에서 보여준 ‘열정’은 ‘예수님을 닮은 마음과 행동’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마치 ‘종’처럼 사역하신 예수님을 그의 사역에서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자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신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종’처럼 섬기신 일에 ‘동참’할 수 있었던 일 자체를 ‘보수’(상급)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의 열정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저 같은 직무 사제, 즉 전임(專任) 사제뿐 아니라 만인 사제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도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복음 전도를 위해 자신에게 있는 어떤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희생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다 말고 눈길이 한 구절에 가 머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 1고린 9:19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그 말씀 속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로가 보여준 ‘유연성’이 빛납니다(1고린 9:20-23). 그 ‘유연성’은 자칫 경건하게 신앙 생활한다면서 ‘배타적으로’ 흐르기 쉬운 우리 모두의 모범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축복, 즉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유’(명예)마저 기꺼이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1고린 9:23). 자신의 ‘자유’를 이기적으로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서 내려놓을 줄 알았습니다. 그 유연성은 오직 ‘복음’, 즉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신”(필립 2:7) 예수님과 포개지는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말씀은, 1독서 《이사야》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가 ‘독수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인간과는 전혀 다른 ‘높으신 관점’(지혜)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그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의 관점(의식, 지혜) 역시 한없이 커졌습니다. 좁아터진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이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옹색한 삶이 아닙니다. 어느새 그는 더 큰 관점, 더 큰 눈으로 세상을 보는 ‘통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그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모든 사람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율법과 자기 욕망(생각, 이기심)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복음’으로 해방한 그리스도의 ‘열정적인 사도’(使徒)였습니다. 복음 전도의 사명이 점점 퇴색해가는 오늘의 시대에 그가 보여준 ‘열정’과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도전이 됩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치유’와 복음 전도의 강한 ‘열정’과 ‘기도 생활’을 들려줍니다. 정말이지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주님 같은 그 ‘긍휼의 마음’과 ‘열정’을 지니신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인생들, 병으로 신음하는 인생들, 악령에 시달리는 인생들을 치유하시고 하느님 나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습니다. 그 회당을 나오신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 집에는 ‘열병’으로 ‘기력이 소진한 여인’이 누워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의 손’을 내밀어 그 여인의 마음을 만지십니다(주님, 우리의 마음도 만져주십시오). 여인은 치유되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듭니다. ‘회당’에서는 ‘남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지금은 ‘여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성별’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치유 사건을 통해 그 집은 ‘복음 전도의 거점’(교회)으로 변화됩니다(32-33절). 예수님께서 힘이 소진(消盡)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힘의 원천은 ‘기도’, 즉 고요 속에서 하느님과 보내신 ‘영적 교제’에 있었습니다(35절). 기도로 새 힘을 충전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십니다(39절). 세상 걱정과 자기욕망의 포로, 병과 악령의 포로로 살아가는 이들을 해방하는 복음 전도와 치유 사역의 ‘열정’을 불태우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열정의 주님이 계신 곳에는 치유와 해방, 기쁨과 생명이 회복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복음’은 없습니다.

이제 치유와 복음 전도의 열정과 기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복음 이야기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침 금주 목요일(11일)은 ‘병자들을 위한 기도일’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대에는 가난한 처지의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의사’를 찾아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둘째는 ‘민간요법’입니다. 의사를 찾아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지만 아무래도 치료 효과는 떨어집니다. 셋째는 ‘제의’(祭儀)를 통한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고대에는 ‘사제’(司祭)가 병을 치료하는 일까지 겸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제물’(祭物, 희생물)이 필요하기에 가난한 병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이처럼 고대에는 가난한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더욱이 ‘병’(장애 포함)은 ‘신’(神)이 죄인에게 내린 ‘벌’(저주), 또는 ‘악령에 들린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자들(장애인들)은 ‘부정한’ 존재로 취급되었고, 가난한 병자들은 사회적으로 더 위축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그랬습니다. 흔히 예수님의 3대 사역을 ‘제자훈련’(가르침), ‘복음전도’, ‘치유’라고 말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통해 병자들(장애인들)에게 ‘주홍글씨’처럼 찍힌 당대의 ‘종교적 낙인’(烙印)과도 싸우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병(病, 장애)을 하느님께서 내리신 저주이거나 악령에 들린 것이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던 당대의 ‘그릇된 믿음’을 바로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한 인생을 돌이키시기 위해 ‘징계 수단’으로 ‘병’을 사용하시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민수 12:9-10; 신명 20:20-22,27-28). 이런 경우를 ‘목적론적’인 해석이라고 합니다. 또한 사탄(악령)에 의한 것으로 보도하는 장면도 읽어볼 수 있습니다(욥기 2:7; 루가 13:11-13).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시편에서 찬미하듯이 본질적으로 하느님은 ‘치유하시는 분’(야훼 라파)입니다(시편 147:3; 출애 15:22-26). 우리는 아픈 사람들을 ‘정죄’할 일이 아니라 치료(치유)를 돕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서>는 질병의 치유나 악령의 추방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하느님 나라’ 도래(到來)의 성취라고 말씀합니다(루가 7:18-22).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증거가 ‘치유사역’이라고 말씀합니다(요한 21:30-31). 사도 요한은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는 다시는 질병이 없을 것이라는 묵시(默示)에 도달했습니다(묵시 21:4).

이처럼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불가결한 ‘실천’입니다. 종교 권력의 정죄와 당대의 그릇된 믿음에 대한 ‘저항운동’입니다.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병자들이(장애인 포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여 공동체로 복귀하도록 돕는 ‘통합운동’입니다. ‘치유사역’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도래할 사건이 아니라 병자들(장애인들)로 대표되는 그 시대 ‘소외된’ 사람들의 삶 속에 ‘현재의 사건’으로 ‘현실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당시 종교기득권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안식일 법’과 ‘정결법’ 논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병자들(장애인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제’(排除)하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새로운 공동체)를 방해하는 각종 ‘법해석’과 ‘세력들’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을 아셨지만, 기꺼이 ‘치유사역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올해는 교회력으로 ‘나해’입니다. 나해 전례독서 중 <복음서>는 주로 《마르코복음》을 낭독하도록 배정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빠르게 행동’하는 ‘긴박감’이 특징입니다. ‘곧’(즉시)이라는 단어를 <복음서>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그 예를 ‘연중 3주일’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원문에도 29절과 30절에 2번이나 ‘곧’(즉시, 그리스어 유쎄오스 εὐθέως, immediately, at once)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공동번역에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개역성경은 “회당에서 나와 곧”(29절),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30절)라고 옮겼습니다.

그만큼 이 단어를 통해 ‘행동하시는 예수님’(종으로서 섬기시는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는 《마태오복음》이나 《루가복음》에 있는 ‘성탄 축하 방문객’이나 ‘족보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런 일이 ‘종’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르코복음》 기자는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쉬지 않고 일하시며’, ‘신속히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심지어 그는 <복음서>를 이렇게 ‘서둘러’ 곧바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 마르 1: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의 치유와 복음 전도의 ‘강한 열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소의 차이도 나지만 치유된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티베리아 호수, 겐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리며, 바다라고도 불림) 서북쪽 해안에 있는 제법 큰 로마식 도시였습니다. ‘회당’을 나오신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 심방(尋訪)을 가십니다. 누구 ‘집’으로 가십니까? <공관복음서>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시몬(베드로)의 집’이라 하고, 《마르코복음》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이라 합니다.

그 집은 도대체 누구 소유일까요? 본래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의 고향은 ‘베싸이다’(요한 1:44)입니다. 어째서 가파르나움에 또 그들의 집이 있는지 의아합니다. 부자여서 그랬을까요? <복음서> 어디를 봐도 이유가 나오지 않으니 ‘상상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들의 고향이 ‘베싸이다’라는 점에 착안해서 시몬이나 안드레아가 아니라 ‘시몬의 장모의 집’이라 보고 설교를 진행하겠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가살이’는 할 것이 못 된다는 ‘가부장 사회’의 상징어이고, 차별적인 말입니다. 시몬은 ‘처가살이’ 중입니다. 어떻게 해서 ‘처가살이’가 시작된 것일까요? 그것은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고향 ‘베싸이다’ 집을 떠나 가파르나움으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가파르나움은 예수께서 고향인 ‘나자렛’을 떠나 거주하시던 곳입니다(마태 4:13; 9:1). 예수께서 무슨 큰돈이 있어서 그 도시에다 살 집을 마련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이 다 이사 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만 온 것인지, 친구 집이었는지, 친척 집이었는지, 월세였는지, 전세였는지 <복음서>는 침묵합니다. 회당은 여관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예수님은 가파르나움 여기저기 있던 회당들을 전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마태오복음》은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이주’한 사건의 중요성을 ‘이사야 예언의 성취’라고 기록할 정도입니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 4:14-16

<복음서>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때까지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된 땅의 대명사였던 ‘갈릴래아’(2021. 1.17. 연중 2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와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그곳으로 이주해 오심으로써 ‘복음 전도의 중심지’가 됩니다(마태 8:5-13; 14-15; 9:1-9; 마르 2:1-12; 9:33-50; 요한 4:46-54).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므로 나중에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책망’을 받는 곳으로 전락합니다.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 마태 11:23-24

이런 예수님의 예언대로 6세기경 ‘가파르나움’은 폐허가 됩니다. 나중에야 그렇게 되었지만, 그 도시는 예수님이 거주하시고, 복음 전도를 시작하신 곳이며, 제자들을 부르러 나서신 곳입니다. ‘베싸이다’ 출신의 시몬은 “나를 따르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는 곳을 방문해 보니 마침 그곳은 처가가 있던 ‘가파르나움’이었습니다. 잘 됐다 싶어 아내를 설득합니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생각하기보다 ‘행동’하기를 ‘빨리’하는 남편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의 ‘처가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주로 시몬의 아내뿐 아니라 ‘장모’의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딸네 식구만 온 것이 아니라 ‘혹’을 달고 왔습니다. 동생 ‘안드레아’도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없는 살림에 입이 늘었습니다. 게다가 사위는 더는 ‘고기잡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라는 무면허 ‘율법학자’를 따라다니느라 생업은 뒷전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집 떠나 지내는 날이 길어졌습니다. 사위가 미쳤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몬은 그동안 ‘어부’로 잔뼈가 굵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에다 일종의 자영업자였습니다. 생계는 누가 책임지란 말입니까? 기가 찰 노릇입니다. 딸이 불행해지는 것을 가만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라는 ‘예언자’ 탓입니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그럭저럭 어부로 잘살던 사위를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예수라는 사람을 찾아가 “내 사위를 내놓으쇼”라고 단판을 벌일 참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사위와 딸이 돈 때문에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은 뒤로는 너무 속상해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습니다. 마침 입맛도 없던 차에 그렇게 아픈 체를 하면 사위가 마음을 돌이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 5일 전부터는 열이 나더니, 좀체 떨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다른 한편, ‘갈등’하기는 시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이나 야고보 형제처럼 온전히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도, 일꾼들도, 배에 남겨둔 채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르 1:20). 자신은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반쯤’ 발을 걸쳐놓았습니다(마르 1:18). 여차하면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도 이런 태도가 마뜩잖습니다. ‘마음’(가슴)에서 시키는 대로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라가자니 ‘가족’이 걸리고, 그렇다고 성격상 ‘반쯤’ 참여하자니 내키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돈 때문에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장모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참을 걸 그랬습니다. 그 일 이후로 장모가 드러누웠습니다. 며칠째 ‘열병’에 시달리는 데 큰일 났습니다.

‘열병’(그리스어로 퓌레소 πυρέσσω, fever)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주석가들은 ‘말라리아’ 같은 일종의 ‘풍토병’이라 추정합니다. 오늘날은 ‘해열제’가 발달해서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지 모르나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열병’을 단지 ‘몸’(육체)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열병, 즉 최근에 일어난 일 때문에 생긴 ‘울화병’(鬱火病)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몸이 고통스러운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고통은 언제나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슴)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다쳐서(혹은 닫혀서)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 고통이 몸의 증세로 나타납니다. 가슴에서 ‘열불’이 나고 답답한 상태인데 끌 수가 없습니다. 사실, ‘열병’(fever)은 다른 말로 ‘흥분 상태’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러다 정말 사람이 죽게 생겼습니다. 이상도 좋고, 꿈도 좋으나 예수님 때문에 한 가정에 불행이 찾아들었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오늘은 ‘안식일’인데도 불구하고 장모 걱정에 ‘회당’에 조차 가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시몬을 만날 줄 알았지만, 웬일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당 예배가 끝나면 예수님은 일행과 함께 그가 산다는 ‘집’으로 가실 참이었습니다. 이번에 만나면, 제자로 따라나서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자꾸 주저하고 있는 시몬과 단판을 치를 작정이셨습니다.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곧’ 심방을 가십니다. 그런데 집 앞에 가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그 집에 들어갔던 요한이 시몬을 데리고 나옵니다. 머쓱한 시몬을 대신해 요한이 상황을 전달해줍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고생하는데, 지금은 잠시 의식이 돌아왔다고 말입니다. 곁에 있던 시몬이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 1:31

별로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했다는 말도, 민간요법을 썼다는 말도 없습니다. 단지 ‘곁으로’ 갔습니다(이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잠시 후에 ‘손’을 내밀어 부인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일으키십니다.’ 그러자 열이 내리고 부인은 ‘시중’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급속도로 상황이 변화된 것일까요?

이런 상상을 해 봤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그 집에 일어난 일, 즉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나선 일을 두고 ‘상담’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가십니다. 시몬의 아내와 눈인사를 나누며, 그 부인이 누워 있는 방으로 다가갑니다. 딸로부터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자 어머니는 돌아누웠습니다. 당연합니다. 평안했던 집에 분란을 일으킨 분의 방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곁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고 가만히 계십니다. 부인이 말할 때까지 잠자코 계십니다. 민망한 시몬의 아내의 눈과 예수님의 눈길이 마주칩니다. 예수님은 그저 빙그레 웃으십니다. 이윽고 그녀의 어머니가 몸을 돌려 속상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그 부인의 화나고 속상한 감정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십니다. 아마도 부인은 자신의 말을 그렇게 경청해 주고, 존중해 주는 예수님께 처음에는 다소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 인격적 대접은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인의 이야기가 잦아들자 예수님은 가만 손을 대십니다. 이렇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런 다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어째서 예수님께 시몬이 필요한지, 무슨 꿈을 갖고 계시고,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것인지, 시몬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찬찬히, 그렇지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십니다. 이야기를 듣던 그들의 마음에 ‘평화’가 솟아납니다. 예수님의 눈빛을 보며 상담을 하다 보니 어느새 막힌 ‘기운’이 확 뚫린 기분입니다. 이런 분은 살아생전 처음 만나봅니다. 그간의 의구심과 궁금증이 싹 풀립니다.

이제 일어나 보지 않겠느냐고 예수님이 ‘손’에 힘을 주시는데 그 손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잡은 손에서 뭔가 ‘특별한 기운’이 전해져 옵니다. 언제 열이 났느냐 싶게 부인의 열이 내립니다. ‘열이 내렸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가슴의 세계’를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고 자기 나름대로 ‘내적 경험’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부인의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은 ‘한번’이고, ‘시작’일 뿐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한 번만으로도 부인은 ‘일어설 힘’이 났습니다. 일어서고 보니, 예수님은 ‘내 집’에 오신 귀한 ‘손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주인으로서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는 게 맞습니다.

그 부인은 ‘분노’의 포로에서, ‘걱정’의 포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더는 ‘열불 난 병자’가 아닙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열병으로 죽은 것처럼 누워 있던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이것도 ‘부활’입니다. 미움과 원망의 사람이 용서와 섬김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도 ‘부활’입니다. 본문에 ‘시중들다’(디아코네오 διακονέω, diakoneo, 섬기다, 돌보다, 봉사하다, serve)로 번역한 그리스어의 명사형이 바로 ‘섬김’(디아코니아 διακονια, 돌봄, 봉사, service), ‘종’(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일꾼, 복음전파자, servant)입니다. 결국 그녀의 ‘정체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으로 읽어도 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존엄과 삶의 목적을 찾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은 그 부인 역시 ‘제자’가 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사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의 관점(의식)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던 삶에서 더 큰 관점, 더 큰 눈으로 보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길 위에 제자가 있습니다.

이 치유 사건으로 가장 ‘수지’(收支)맞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시몬 베드로’입니다. 장모와 아내의 ‘시중’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도 좋다는 마음의 변화를 보여주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몬도, 그의 아내도, 장모도 살린 셈입니다. 이제 시몬은 자신을 가둔 환경적 ‘제약’에서 풀려나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가 되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치유’가 마을 전체로 번집니다.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 데려왔으며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시며 자기 일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귀들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마르 1:32-34

“해가 지고 날이 저물었다”라는 표현은 ‘안식일이 끝났다’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쳐주거나 운반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시작되었기에 안식일 법에 저촉(抵觸)되지 않습니다.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이 갑자기 밀려오는 이유입니다. 집이 어느새 ‘병원’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문 앞에 모여듭니다. 물론,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많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는 ‘예언자’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시고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오로지 그 일만 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진짜 정체성은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십자가’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5:39). 그렇지만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하느님, 상처 입은 마음을 고치시고 터진 상처를 싸매 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마르코복음》 기자는 벌써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과 마귀 들림이라는 어둠 속을 사는 이들이 ‘참 빛’을 보았습니다. 열불 났던 ‘그 집’이 예수님을 세상의 ‘참 빛’으로 드러내는 ‘거룩한 집’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 일행의 ‘활동 거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가정 교회’의 시초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한 여인의 치유와 삶의 변화가 가져온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일으켜짐’(부활)과 ‘섬김’이 어둠 속을 살던 수많은 인생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은(恩)은 자기보다 높은 분에게서 받는 일을 말하고, 혜(惠)는 자기가 받은 것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의 설립에는 시몬의 장모 같은 수많은 여인의 ‘시중’(섬김)이 작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의 변화, 즉 삶의 부활을 경험한 여인들 말입니다(마르 15:41). 훗날 시몬의 부인도 이 위대한 퍼즐의 한 조각이 됩니다(1고린 9:5).

복음 이야기 후반부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과 열정 가득한 ‘전도 여행’입니다.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계셨다. – 마르 1:35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인데도 일어나 ‘외딴 곳’으로 ‘홀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일상을 잠시 ‘멈추었다’라는 뜻입니다. ‘시간을 따로 떼어냈다’라는 뜻입니다. 무엇하기 위해서입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 속에서 성찰하고 해야 할 일을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행동하시는 분이셨지만 그렇다고 일에 매몰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성찰과 분별의 힘은 ‘멈추고 기도’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부르셨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신만의 ‘특별한 사명’이 있는 법입니다. ‘일중독’으로 자신을 소진(消盡)할 일이 아니라 때로는 멈추어서 자기 마음을 돌보야 합니다. ‘예’라고만 하고 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니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을 돌보는 일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본문에 ‘외딴 곳’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레모스’(ἔρημος, solitary, desolate)는 ‘버림받은’, ‘텅 빈’, ‘고적한’,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 즉 ‘광야’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집’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꼭 물리적인 ‘광야’라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외딴곳, 즉 ‘광야’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기도하십니다.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마르코복음》 기자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기도 시간이 예수님께 갖는 의미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의 ‘유일한 인생길’(사명)을 발견하셨고(마태 4:1-11),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새 힘’을 얻으셨습니다. 기도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분별’했고(마르 14:36), 기도 속에서 ‘쉼’을 얻은 후 충전된 몸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기도로 새 힘을 공급받고 제자훈련, 치유사역, 복음전도 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사실,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앞에 머무는 그 ‘고독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분별’했고, 사명을 수행할 ‘새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의도적으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우리 자신만의 독특한 길(임무, 소명)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 새 힘을 공급받고 세상을 섬기는 우리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떼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하느님과 더 깊은 영적 교제의 시간을 보낸다면 아마도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치유와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기도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 사목해 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면, 가장 위대한 기도는 ‘인내’라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신자가 기도하기 위해 일상의 시간을 떼어내는 일은 비교적 잘합니다. 하지만 ‘인내’에는 실패합니다. 하느님의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 너무나 빨리 포기해 버립니다. 우리에게는 “주님, 한 말씀 하여 주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인내’할 ‘용기’가 있습니까? 더욱이 내 뜻과 바람대로 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내 뜻을 거스르는 ‘그 시련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까?

때로는 그저 고요히 앉아서 침묵 속에 주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참고 견디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도’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기도’는 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일단 우리는 잠시 멈추고, 기도 속에서 우리의 길을 찾기를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기도하러 간 사이, 그 집 앞에는 아직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시몬의 일행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예수님을 찾아다닙니다. ‘찾아다녔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 ‘카타디오코’(καταδιώκω)는 ‘치열하게 샅샅이 수색했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는 삶에서 기도가 빠진 이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기도가 먼저가 아니라 세상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아 몰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들의 ‘기대’와 예수님의 ‘분별’은 달랐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는 말에 예수님은 동의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가파르나움’으로 가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곳에는 치료가 필요한 ‘많은 병자’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으로 돌아가면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선택을 하십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들 ‘모두’를 당신이 일일이 ‘다 치료해 줄 수 없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해결책을 다 가지고 있지 않음을’ 분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니오’라는 결정은 일상을 잠시 멈추고 수행하는 ‘기도’ 속에서 일어난 분별입니다. 기도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임무를 분별한 이의 당당함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 마르 1:38

‘동네’라고 하니까 우리는 뭔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전도의 열정으로 타오르신 예수님은 더는 그런 한적한 곳으로 찾아다닐 새가 없습니다. 실제로 본문에 ‘동네’란 말로 번역된 그리스어 ‘코모폴리스’(κωμόπολις, a country town)는 ‘시장이 서는 마을’(market town)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바쁜 곳’, ‘큰 동네’, ‘삶의 현실’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이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곳은 산속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 ‘한가운데’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삶을 위한 것이고, 삶은 기도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드디어 ‘공현절기’의 주제처럼, 예수님의 빛이 사방으로 두루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빛은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의 방문 때처럼 사람들이 다가올 때까지 더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혹은 우리 내면)의 어두운 곳으로 ‘열정적으로’ 찾아가십니다. 그 모습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렇게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셨다. – 마르 1:39

여기까지가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치유 이야기를 둘러싼 아주 짧은 본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련의 이야기를 자신의 내면으로 가지고 들어와 내적 수행의 과정으로도 묵상해 보십시오. 시몬의 장모, 병자, 마귀 들린 사람은 해결되어야 할 ‘몸과 마음의 문제’를 가진 사람을 상징합니다. 1독서 《이사야》에서 묵상한 것처럼, 어딘가에 포로로 잡힌 사람의 상징입니다. 잘못된 인식, 허상, 망상, 공상,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서 자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외딴 곳’에서 기도한 예수님처럼 우리는 기도 속에서 이런 우리 자신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다니십니다. 우리도 기도 속에서 내면의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찾아가야 합니다. 자신도 인정하기 싫고, 회피하고픈 약한 부분, 아프고 쓰라린 상처, 불편한 진실이 있는 ‘내면의 갈릴래아’ 말입니다. 한마디로 갈릴래아는 ‘그리스도의 빛’이 필요한 우리 안의 ‘어둠의 영역’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방 세계’를 두루 다니며 전도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의 빛이 필요한 ‘이방인의 땅’, 즉 ‘외국’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안에 나로 통합되지 않은 내가 그렇게 많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땅과 ‘가나안’ 땅은 다른 곳이 아니라 ‘같은 곳’입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으로만 있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는 ‘예루살렘’이 세워져야 합니다(시편 147:2). 이것은 우리 내면이 하느님의 영역(통치)으로 온전히 ‘의식화’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 내면에 있는 ‘사랑’ 아닌 것들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삶’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 내면 안에 있는 갈릴래아와 이방 세계를 두루 찾아다니는 데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낸 우리 자신을 통해 내면의 선교지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지면, 비로소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해 온 ‘무의식의 상처들’이 치유됩니다. 잘못된 인식, 허상, 망상, 공상에 시달리던 우리의 의식이 바로잡아집니다. 우리는 ‘독수리’처럼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주님의 치유 이야기를 전하는 <전례독서>를 묵상하면서 아픈 우리 교우들을 떠올립니다. 치유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우리의 영혼에 강같이 흐르기를 축복합니다. 아파하는 우리를 그 자비하신 품에 안아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파하는 우리 마음을 주님이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분이 없음을 모두가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뿐임을 찬미합니다. 우리 안에 새 일을 행하실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주님이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 주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습니다. 지금도 ‘치유’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세상 걱정과 자기 욕망(이기심)의 포로로 사는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다정스레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우리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즉 부활(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간 마음으로라도 그 손을 꽉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원’의(부활) 은총을 경험한 우리가 ‘섬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이 교회처럼, 포로로 사는 이웃들 사이에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 ‘선교의 거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일단 멈추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일단 우리는 잠시 멈추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기도’ 속에서 ‘인내’하며, 우리의 길을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분명 어느 시점에서 복음 이야기의 예수님처럼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해결책을 다 갖고 있진 않으나 예수님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해야 할 바로 그 일’(사명)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자신의 내면을 ‘이스라엘’로 복음화한 이들을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르십니다. 자,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 근방 다음 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아, 나와 함께 가자.

예수께서 친히 우리보다 앞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손을 잡고, 세상 걱정과 자기 욕망의 포로로 사는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러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갑시다. 그것이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신 주님의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알았습니다. 우리에겐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생명이고 복음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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