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31. 연중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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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신명 18:15-20
  • 시편 – 111
  • 독서 – 1고린 8:1-13
  • 복음서 – 마르 1:21-28

연중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하느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따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참 예언자가 오실 것이라는 모세의 선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광야 여정의 끝에 서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모압’ 경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가나안 입성’이 코앞입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 중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그 땅에 들어가 지켜야 할 ‘하느님의 율법’(말씀)을 ‘거듭 명령’합니다. 여기서 《신명기 申命記, Book of Deuteronomy》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되풀이한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신명기》는 ‘시나이산’(호렙산)에서 있었던 ‘첫 번째 계약 체결’(출애 19-24장)이 아니라 ‘모압 경계’에서 있었던 두 번째 계약 체결을 담고 있습니다(신명 12:1-26:15).

오늘 낭독한 단락은 모세가 하느님의 약속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그들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주실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지혜)을 들어야(순종) 합니다. 듣지 않는 이들은 하느님께 ‘추궁’(追窮, 벌)을 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을 대변하는 ‘참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참 예언자란 증거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가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짓 예언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말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제넘게’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생각’(추정, 의견, 주장)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멋대로 전할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의 종국은 ‘죽음’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어떤 맥락에서 이 ‘성령의 영감’(靈感)을 선포했을까요? 본문 바로 앞에 나옵니다(신명 18:9-11). 가나안에서 저질러지던 ‘발칙한 일들’(가증한 행위)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식을 불에 살라 바치는 ‘우상숭배’이고, 다른 하나는 ‘점’(占) 보는 문제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똑똑히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 모세는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라”(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단단히 일러둡니다(신명 18:13).

어떻게 하느님을 섬겨야 할지,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할지는’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모세 같은 참 예언자’를 일으켜 세워주시어 알려주실 것입니다. 게다가 ‘그 예언자’는 ‘모세처럼’ 백성들 앞에서는 ‘하느님’을 대변하고(대리하고), 하느님 앞에서는 ‘백성들’을 대변할 것입니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가 될 것입니다. 그 예언자는 모세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 예언자’이기에 백성들은 그가 선포하는 ‘메시지’(교훈)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이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은 민족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자신들에게 ‘하느님의 길’을 제시해 줄 ‘그 참 예언자’를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 사이에는 ‘그 예언자’가 ‘세상 끝날’에 나타나리라는 신앙도 형성되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 ‘그 예언자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한 1:21,25,45; 6:14; 7:40). ‘그 예언자’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요한 1:19-28).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살던 때를 ‘세상의 끝날’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다 약속하신 ‘그 참 예언자’가 ‘예수님’이라고 증언합니다(요한 1:45; 사도 3:22-23; 7:37).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보내신다 약속하신 ‘그 참 예언자의 성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참 예언자의 성취이신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의 복음’(말씀)에 ‘순종’하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는 ‘슬기’를 가진 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께 ‘추궁’(追窮, 벌)을 당할 것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11편>은 ‘주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관한 찬미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으나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교훈적인 의도로 지어진 ‘지혜의 잠언’임을 똑똑히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할렐루야’ 다음부터 각 행의 시작이 ‘삼행시’처럼, ‘22개로 이루어진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순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알파벳 시’(대표적으로는 111,112,119편)라고도 합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한 절에 2개씩의 자음으로, 9절과 10절엔 나머지 자음이 3개씩 차례로 이어지며 이루어진 시입니다. 시인은 어째서 이런 구조를 사용했을까요? 그만큼 주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여 ‘현재화’하고, ‘예배’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이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일입니다(6절). 다시 말해 과월절, 출애굽, 광야 여정의 동행, 가나안 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나이산 계약’을 통해 ‘율법’을 주신 일입니다(7절). 시인은 그 일들을 ‘예배 모임’에서 “마음을 다 쏟아”(전심으로) 감사하자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예배’는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행사’를 ‘기억’하고, ‘현재화’하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그의 선포를 통해 우리의 ‘예배’인 ‘감사성찬례’를 성찰합니다. 우리는 찬송할 때, 기도할 때, 성경을 낭독할 때, 봉헌할 때, ‘전심으로’ 예배하는지 돌이켜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에 마음을 빼앗길 일이 아닙니다. 나부터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자인 우리의 모습이 서로에게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비대면 예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는 혼자 드리는 예배여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합니다. ‘전심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예배는 ‘하느님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고, ‘경축’하는 ‘감사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주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끝으로 교훈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경외’(히브리어로 이라 יִרְאָה, fear)하는 일이며, 주님의 계명(히브리어로 미츠바 מִצְוָה, commandment 말씀)에 ‘순종’(히브리어로 샤마 שָׁמַע, to hear, 듣다)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지혜’(히브리어로 호크마 חָכְמָה, wisdom, 기술)입니다. 그런 삶이 ‘슬기’(히브리어로 토브 세켈 טוֹב שֶׂכֶל, beautiful insight, 선한 통찰력)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조차도 이 교훈에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경외’나 ‘순종’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지혜’나 ‘슬기’보다도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나 ‘즐기는 생활’을 더 추구합니다.

시인은 그런 우리를 일깨웁니다. <성경>은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태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칩니다(욥기 28:28; 잠언 1:7; 9:10; 전도 12:13). 주님을 ‘경외’하는 일이 ‘지혜의 근원’이며,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이야말로 ‘슬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지혜의 잠언’으로 ‘알파벳 시’를 마무리함으로써 교훈적인 의도를 더욱 강조합니다.

<111편>이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율법)대로 살아갈 것을 ‘거듭 명령’하는 1독서 《신명기》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들 역사를 돌아보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속전’(贖錢, 과월절을 의미)을 내어 구해 내시고, 계약을 맺으셨으며, 율법을 주셨다고 찬미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셨다고 찬미했습니다. 이렇게 1독서 《신명기》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정된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과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활동을 전하는 복음 이야기가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의 ‘최절정’, 즉 결정적인 ‘새 계약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편이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교훈하는 것처럼 지혜와 슬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며 자비롭고 인자하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 하시는 일이 정의와 진리라고 노래합니다. 세워주신 ‘모든 법’(율법, 말씀)이 진실하고 올바르다고 노래합니다. 특히 ‘속전’(贖錢)을 내어 자기 백성을 구해 내시고 영원히 지킬 계약을 맺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 그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계시해 주신 분이 ‘새 계약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111편>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의 ‘참 의미’를 깨우쳐 주는 ‘참 예언자’, ‘참 지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구원 계시의 최절정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이가 참으로 ‘슬기’를 가진 자입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사도 바울로의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에서 사랑으로 건너가라’라는 교훈입니다. 이 ‘사랑의 원리’는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는 문제에 관한 바울로의 대답에서 나왔습니다.

고대에는 가축을 ‘신’(神)에게 ‘번제’(불에 태움)로 바치는 일이 흔했습니다. 도살한 가축을 통째로 불사르지 않고 ‘일부만’을 상징적으로 불살랐습니다. 나머지는 ‘제사장’과 ‘봉헌자’가 나누어 가졌습니다. 봉헌자(또는 제사장)는 그 고기를 가져다 ‘잔치’를 벌이거나 ‘시장’에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 경우 ‘제의’(祭儀)에 사용된 고기와 그렇지 않은 고기가 섞여 있게 됩니다. 누군가 말해 주지 않으면 구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고대인들은 음식을 통해 악령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을 피하려고 가축이든 생선이든 선한 신들의 이름으로 미리 축복하곤 했습니다. 일종의 ‘축복식’ 같은 개념입니다. 이렇듯 고대인들이 먹게 되는 고기나 생선은 ‘신의 봉헌물’, 즉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 고린토교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고린토교회 안에 이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아니면 먹어선 안 되는지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먹으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오염된다)이라는 ‘지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금욕주의) 반대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긴 했으나 하느님만이 참된 아버지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예수님을 통해 만물이 존재한다는 ‘지식’을 아직 갖지 못한 이들입니다(6-7절). 반면에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지식’을 갖고 있던 이들은(열광주의, 우상은 실체가 아니다)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아마 서로의 ‘지식으로 패가 갈릴’ 정도였나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로는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신 ‘지식과 사랑의 원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둘 다 우리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로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사랑’은 사람을 ‘향상한다’(덕을 세운다)라고 명백히 교훈합니다(1절).

은유적으로 말하면 ‘지식’은 우리 자신을 ‘거품’처럼 부풀게 만듭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나무’처럼 튼튼히 자라게 합니다. 여러분은 결국은 터지고 말 ‘거품’ 같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향상’하는 ‘사랑’에 기초하기를 축복합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에 이바지해야 하지 상처를 주고 죽이는 데 쓰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진짜 중요한 지식은 무엇입니까? 시편에서 교훈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경외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신다는 지식입니다(3절).

이렇게 ‘사랑의 원리’와 ‘진짜 중요한 지식’을 가르친 후 여기에 근거해 그들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오염된다’라는 지식을 가진 이들에게 뿐 아니라 ‘사랑 없이’ 자기 ‘지식을 뽐내는’ 이들에 대해서도 ‘권위’를 가지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태도인지 교훈합니다. 그는 ‘믿음이 약한 이들’(하느님 가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내려놓는 ‘사랑’을 강조합니다(9절). 왜냐하면 ‘사랑’이 빠진 지식은 ‘거품’ 같은 ‘교만’일 뿐이고(1절), 복음 이야기에 언급된 ‘악령의 지식’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의 언어’인 ‘사랑’이야말로 사람을 향상하는 ‘지식의 완성’(지혜)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새 공동체’를 형성하신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펼치시는 전도 활동입니다. 예수님 일행은 ‘가파르나움’(나훔의 동네, 위로의 마을)으로 향합니다.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서북쪽 해안에 ‘로마식 도시’였습니다. 당시로는 갈릴래아에서 ‘가장 큰 상업 도시’(고대의 큰 도시는 대부분 우상숭배가 만연합니다)이자 ‘가장 큰 항구’가 있었습니다. 특히 ‘바다로 가는 길’(해안 길)이라 불리는(이사 8:23) 고대 도로가 지나고 있어서 ‘세관’도 있었습니다. 특히 빈번히 드나드는 배들을 통해 ‘갈릴래아 전체로 소식이 퍼질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마을’(마태 9:1; 마르 2:1), 즉 ‘제2의 고향’이라 불릴 정도로 ‘갈릴래아 전도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그 도시의 누구 집에서 사셨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신 곳이 ‘가파르나움’이라 말합니다(마태 4:12-20). 이 언급을 근거로 어떤 주석가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사셨을 것이라 주장합니다(마르 1:29-31). 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는 ‘베싸이다’ 출신입니다(요한 1:44). 그래서 다른 주석가는 예수께서 사신 집이 ‘시몬의 장모의 집’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아무튼 그들의 주장을 참고하자면, 예수님은 ‘무주택자’였던 셈입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가파르나움’에 들렀습니다. 베드로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배 모양의 기념 성당이 있고, 바로 옆에는 오늘 복음 이야기에 나오는 제법 큰 규모의 ‘회당’ 유적도 남아있었습니다. 그 회당은 나중에 증축한 유적이지만,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숨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영혼이 고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그 가르침 후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을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십니다. 그 일은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악령까지도 굴복하는 ‘권위 있는 새 교훈’(지혜,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께 탄복합니다. 삽시간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져’나갑니다. 항구 도시인 가파르나움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은 연중 4주일이지만, 본래 ‘사순절기’를 앞두고 지내는 ‘연중시기’의 이전 이름이 ‘공현절기’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공현’(公顯, Epiphany)은 ‘드러났다’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어두운 세상의 ‘참 빛’으로 숨김없이 드러나셨음을 기뻐하고 기념합니다. 이 공현절기의 의미(주제)에 맞게 주일 <복음서>는 선정되고, 다른 전례독서도 <복음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배정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권위 있는 새 교훈’(지혜,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이 ‘회당’ 안에서 ‘환하게 빛나고’ 계십니다. ‘소문’이라는 말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 소식이 사방으로 삽시간에 두루 퍼져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주시는 분(빛)으로 증언하는 이 위대한 이야기는 언제 있었던 일입니까?

…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 – 마르 1:21

구약성경에 따르면, ‘안식일’(히브리어로 Shabbat, 중지하다, 멈추다에서 유래, 쉬는 날이라는 뜻) 준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엄중한 ‘계명’입니다(출애 20:8-11; 신명 5:12-15).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영원한 계약의 ‘표’가 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출애 31:13-17). 하느님께서는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출애 20:11). 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였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하셨음을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신명 5:15).

‘안식일’은 매주 일곱째 날이지만, 오늘날의 요일 개념으로 금요일 해가 진 뒤부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동이 터올 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삼는 우리 문화와 비교됩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기록된 ‘밤, 낮 하루가 지났다’에서 유래했습니다(창세 1:5).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과 큰 마을마다 있는 회당 봉사자가 세 번에 걸쳐 ‘나팔’을 붊으로써 거룩한 날의 시작과 끝을 알렸습니다.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여러 규례가 있습니다(대표적으로는 39가지 금지조항).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이며(출애 16:29),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둥’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문화적 시온주의’ 제창자였던 ‘아하드 하암’(Ahad Ha-am 1856-1927)은 안식일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습니다.

‘회당’(會堂)은 유대공동체의 종교와 사회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회당을 히브리어로는 ‘베트 크네세트’(בית כנסת 모임의 집), 그리스어로는 ‘쉬나고게’(συναγωγή, 함께 모이다에서 유래)라고 하는 데 둘 다 ‘모임’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우선 천문학적으로 유대인들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배꼽)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이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중심’에는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그들 공동체의 한 가운데 머물러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된 곳으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회당’은 ‘거룩한 토라’(모세오경)를 필사하여 보관한 ‘거룩한 곳’(작은 성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것을 종교학에서는 ‘중심의 확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기도와 찬양, 성경 낭독과 설교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은 토라를 가르치는 ‘학교’, ‘집회장’, ‘재판소’의 기능도 하였습니다(마르 13:9; 사도 22:19; 2고린 11:24). 심지어 나그네를 환대하는 ‘여관’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회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솔로몬 성전이 있던 기원전 8, 7세기경으로 추정합니다. 어떤 학자는 기원전 6세기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라고 주장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의도적으로 세웠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학자는 포로기 이후인 기원전 4세기경에 회당 제도가 완성되었다 주장합니다. 이처럼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기원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복음 이야기에서 들었듯이, 안식일 회당 예배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가르치는 일이 예수님 시대에 이미 확고한 제도로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회당’에는 예배(재판,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의 책임을 맡은 ‘회당장’(율법학자이거나 바리사이파 출신)과 그를 돕는 시중꾼이 있었습니다(루가 4:20). 예배의 중심은 해당 날짜와 절기에 맞춰 ‘토라’(모세오경)를 낭독하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매번 ‘예언서’(유대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분류하는 구약성경의 역사서도 예언서에 속합니다)에서 한 단락씩 선택하여 낭독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례독서의 원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때 글을 아는(배운) 유대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발언)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루가 4:16-21; 사도 13:15). 그것이 당시 관습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다”라는 이야기의 시작이 특이하진 않습니다. 당시 관습 때문에 예수께서는 ‘회당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할 기회를 얻으셨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마르코복음》 기자는 예수님께서 낭독하고 가르치신(설교하신, 풀이해 주신)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침묵합니다. 암시조차 주지 않습니다. 《루가복음》을 참고하자면 예언의 성취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이었을 것입니다(루가 4:16-21). 그렇지만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 즉 그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분명히 묘사해 줍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 마르 1:22

흔히 우리는 자신의 말이나 글이 호소력을 갖도록 다른 ‘권위자’의 글이나 자료를 인용합니다. 그 인용을 통해 구체적인 근거를 확보한 후 자신만의 독창적인 주장을 내놓곤 합니다. 아마 ‘율법학자’도 그런 식으로 ‘전통에 기대어’ 가르쳐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나 지식을 언급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경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5:39,46).

예수께서 ‘설교’(가르침)를 시작하시자 회당 안에 있던 이들의 ‘낯빛’이 환해졌습니다. 그 말씀은 ‘빛내림’처럼 그들 몸을 통과해 들어왔습니다. 마음이 ‘영향’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소통’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듣고 경험해 온 이전의 많은 가르침(지식)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께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음을 ‘지각’(知覺)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권위’(權威)입니다.

‘권위’로 번역된 그리스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 authority)는 ‘힘’(power), ‘능력’(ability), ‘권세’(dominance), ‘자유’(freedom), ‘특권’(privilege)의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힘’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자유함’이 빛났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인정되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듣는 이들을 ‘힘’이 나게 했다는 뜻입니다. 듣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듣는 이들 속에 하느님의 백성이기에 갖는 ‘특권’을 자각시켰다는 뜻입니다.

어떤 때 그런 ‘소통’이 가능해집니까? 그 일은 ‘가르침’이 ‘머리’(지식)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일 때 일어납니다. 흔히 ‘사랑’이라고도 하고 ‘지혜’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나 동료가 선택을 못 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조용히 가슴(심장)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런 다음에 말해도 돼.

‘생각’은 ‘가슴’(심장)으로 하는 것이고, ‘말’(선택)도 ‘가슴’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이 주는 울림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이나 말이 ‘뇌의 신경적 연결의 산물’이라는 뇌과학 연구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가슴’(심장)이 가지고 있는 동서고금의 ‘상징성’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심장’은 ‘사랑’, ‘생명’, ‘핵심’, ‘진실’, ‘소통의 원형’으로 자리합니다. 몇 년 전 발표된 뇌과학 연구에 의하면 ‘심장’에도 ‘신경세포’가 있어서 ‘기억을 저장한다’라고 합니다. 생각이 오롯이 뇌의 차지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 ‘생각’, 심장에서 걸러지지 못한 ‘지식’(말)을 상징하는 ‘머리의 언어’가 갖는 한계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머리의 언어’(지식)는 어떤 특징을 갖습니까? 2독서 《고린토전서》에서 경고하듯이 ‘거품’처럼 자신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나와 너를 ‘경계’ 짓고, ‘비판’하며, 누가 옳은지의 ‘다툼’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말하며, ‘머리의 언어’를 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이성’이나 ‘논리’라는 것이 단지 ‘에고’가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수단’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말입니다. 그러나 언어 습관에서 보듯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생각은 가슴(심장)으로 해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언어가 상대방의 심장에 ‘울림’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슴’에서는 어떤 언어가 나올까요? 다시 말해 머리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가슴이 살아있으면’ 어떤 언어가 만들어질까요? ‘배려’, ‘나눔’, ‘협동’, ‘더불어’처럼 ‘공감(共感)의 언어’가 만들어져서 나옵니다. 이처럼 ‘가슴의 언어’는 ‘우리 지향적’입니다. ‘가슴의 언어’는 ‘음악’ 같습니다. ‘벽’이나 ‘경계’가 없기에 나와 너의 ‘소통’을 일으킵니다. 2독서 말씀처럼, 상대방이 ‘향상’하도록 돕는 ‘사랑의 언어’는 ‘가슴’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런 ‘가슴의 언어’를 배워가는 길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슴의 언어’야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 즉 ‘권위’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가슴의 언어’에 반응하고 끌립니다. ‘가슴의 언어’는 머리의 언어인 ‘지식’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가슴의 언어’는 ‘심장’에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의 근원인 ‘위로부터’ 오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머리의 언어인 ‘지식’은 너와 나의 ‘경계’를 짓고, ‘비판’하고, 누가 옳은지의 ‘다툼’을 일으키지만, 가슴의 언어인 ‘사랑’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공감’과 ‘소통’을 가져옵니다.

회당에 있는 ‘모세의 자리’

예수님 시대 ‘힘’(권력)의 상징은 ‘정치적’으로는 유다 총독 ‘빌라도’와 갈릴래아의 분봉왕 ‘헤로데’(안티파스)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토라’(율법=모세오경)를 ‘해석’하는 자리에 있던 ‘기득권’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누구’를 제외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권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줌 밖에 안되는 그 ‘힘’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특권’은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 배를 불리는 ‘거짓 예언자’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이 내놓는 ‘율법해석’은 자기중심적인 ‘머리의 언어’(지식)였습니다. 전혀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장’에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그 언어를 들으면 들을수록 ‘힘’이 빠지고, 억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비참해졌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힘’, 즉 ‘권위’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머리의 언어’(지식)로부터 ‘가슴의 언어’(사랑)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실제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솔직히 어렵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지도자들’로 상징되는 나의 과거의 ‘경험’, 즉 ‘머리의 언어’로 살아온 ‘에고’가 자신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가슴의 언어’(사랑)를 직면하는 일은 ‘악령 들린 사람’처럼 자신이 얼마나 ‘악하게’ 살아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진실’(악함, 약함)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하고 불편해합니다.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 점을 잘 다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과 약함’에 직면하느니 차라리 지금껏 자신에게 말이 되었던 그 ‘머리의 언어’에 더욱 집착하려 듭니다. 자신을 ‘머리의 언어’, 즉 자기중심적인 특징을 갖는 ‘악령’(어둠)에 붙잡혀 사는 이의 자리로 내몹니다. 물론 그런 고집스러운 우리, 회개하기 싫어하는 우리, 어둠에 갇힌 우리를 ‘해방’하고, ‘치유’하시러 ‘권위 있는 새 교훈’(지혜)의 주님, ‘빛’이신 주님이 오셨다고 오늘 복음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여기서 연중시기의 옛 이름인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와 전례독서 채택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런 식으로 예수께서 가지신 ‘진정한 힘’(권위)과 종교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가짜 힘’(권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1독서 《신명기》에서 모세가 언급한 ‘참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더 넓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력으로 황폐화한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나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복음’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나’해 동안 《마르코복음》을 전례독서로 읽어갈 것입니다(중간에 요한복음을 읽기도 합니다). ‘나’해의 여정을 걸어간 후에는 예수님을 ‘복음’으로, 즉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한 《마르코복음》 기자의 선포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빛내림’처럼 움직이기를 축복합니다.

복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권위’ 있게 만든 것은 그분의 ‘인격’(사람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순종’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특히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마태 3:15). 그런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로 하늘에서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순종’하여(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으나 그 유혹을 다 이기셨습니다(마태 4:1-10). 그런 예수께 천사들은 시중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요한 3:34) 어찌 ‘권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느님에게서 온 권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권위’를 세례 때부터 인증받으신 예수님은 다른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요한 5:19-47).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에 기반한 ‘아버지의 진리’였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들의 ‘심장’을 뛰도록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심장을 뛰도록 만드는 ‘가르침’ 말고도 당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다른 뭔가를 또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제 또 하나의 권위를 증명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때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 마르 1:23

<성경>에는 ‘사탄’ 말고도 많은 ‘악령들’이 등장합니다. ‘악령’은 사람에게 들어가 그를 장악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묘사됩니다. 일명 ‘빙의(憑依) 현상’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스캇 펙’이 지은 <거짓의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육체의 질병이나 당시로서는 불가사의한 ‘정신장애’(정신병, 정신질환)의 원인이 ‘빙의’에 의한 것이라 믿고 ‘악령’을 ‘추방’하는 ‘제의’를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무속인이나 일부 종교인들이 현대의학을 무시한 행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악령 들린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지장을 받습니다.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하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혹은 다른 이의 과거나 현재 상태를 ‘용’하게 알아맞히기도 하고, 자학(自虐) 행위를 하거나 평소 이상의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악령 들림’과 ‘정신병’(정신질환, 정신장애)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둘 다 ‘인격 장애’ 상태이지만 정신병의 원인은 생물학적인 ‘뇌 기능의 이상’(異常) 요인, 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같은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병합니다. ‘정신병’은 전문의의 ‘약물 처방’과 ‘상담’을 통해 개선할 수 있기에 빠른 치료를 받도록 권해야 합니다. 하지만 ‘악령 들림’은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뇌 기능 이상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약물에 치료적 반응을 보이지도 않습니다. 상담을 통해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더 힘센 ‘거룩한 영’의 사람이 ‘축마’(逐魔)를 통해 자유롭게 해줘야 할 상태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제가 드리는 말씀이 ‘미덥지 못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기록된 악령을 쫓아내신 ‘축마’ 사건은 예수께서 ‘메시아’(그리스도)이시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지 우리가 그런 ‘축마’에 몰두하라고 기록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 이유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얻어 ‘악령’을 물리치러 다니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의 ‘죄를 이기고’, ‘사랑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이 우리가 복음을 믿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한글판과 제 묵주입니다.

물론, ‘악령에 들린’ 사람이 있다면 ‘성령의 사람’인 우리는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고 기도하며 ‘축마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런 일을 하러 다녀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스캇 펙’이 쓴 <거짓의 사람들>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그런 분과는 제가 대화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학위’까지는 마치지 못했지만 제가 정신역동분석으로 박사과정을 공부한 적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한 ‘축마’보다는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는 자신 안의 ‘죄성’과 싸워야 합니다(에페 2:1-3). 자신에게 있는 ‘본능적인 욕망’과 ‘육정’과 싸워야 합니다.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을 좇는 것이나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1요한 2:16). ‘허공’을 다스리는 세력의 ‘두목’이 이 세상과 사회에 교묘하게 펼쳐놓은 온갖 ‘악한 일들’과 싸워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이 땅에 임한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가도록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는 ‘선한 싸움’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 ‘선한 싸움’에는 무관심하고 <복음서>에 기록된 축마 이야기들을 고작 개인 안에 있는 악령을 추방하는 일로 축소하여 몰두하는 일은 복음의 정신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아무튼 《마르코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설교’(가르침)를 듣다 큰 소리를 지르는 그 사람을 ‘악령에 들린’ 사람으로 보도합니다. 의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기 전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무시하진 마십시오. 분명 그 ‘악령’은 누구도 몰래 그 사람 속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가 ‘악령’에 들렸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빛내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자 갑자기 큰 소리를 지릅니다.

나자렛 예수님! – 마르 1:24

‘나자렛 예수’라는 말은 좋은 뜻이 아닙니다. 연중 2주일에 들었던 ‘필립보’와 ‘나타나엘’의 대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나자렛’을 경멸했습니다. 그 지명을 이용해 악령은 예수님을 향해 공격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단지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입니다.”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마주한 ‘악령’은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렇게 허세를 떨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짓’입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자신의 허세가 통하지 않자 곧 꼬리를 내립니다. 그러면서도 ‘배수의 진’을 치고 덤벼듭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 마르 1:24

이 악령의 말이 맞는 것 같으나 그는 또 틀렸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악령’(악마, 사탄)을 ‘완전히 없애러 오셨다’라고 증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에 다소 놀랄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아서입니다. 이때 본문에 쓰인 그리스어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완전히 파괴하다’(destroy utterly)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요한의 첫째 편지》는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다”라고 분명히 교훈합니다(1요한 3:8). 여기에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악마’가 아니라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키러”입니다.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ἔργα τοῦ διαβόλου)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를 짓게 하는 일입니다. ‘죄’로 번역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목표에서 빗나감’을 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는 일입니다(로마 3:23). 이 ‘죄의 문제를 해결’(그리스어로는 루오 λύω, to release, to dissolve)하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나게 하려고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러’(to release, 죄로부터 풀어주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마태 1:21).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3:16).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이것이 예수께서 오신 진짜 목적이고 그 절정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도’하러 오셨고(마르 1:38), 그것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악령을 쫓아내신 일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에 대한 ‘악령의 지식’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그의 말은 ‘진실’을 반영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 마르 1:24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 ‘용’하게 알아맞힙니다. 대단한 ‘지식’입니다. 악령인데도 ‘거룩’을 입에 담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지식’은 ‘참되다’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 시편은 “야훼(주님이라고 읽습니다)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10절)라고 교훈했기 때문입니다. 악령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진정함 ‘경외’도, 그 계명(말씀)을 지키는 ‘순종’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 자랑’일 뿐입니다.

더욱이 그의 지식은 예수님을 향한 일종의 ‘위협’입니다. 고대에 상대방을 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름’입니다. 누군가가 다른 실체의 이름을 안다면 그 이름을 사용하여 ‘영향력’(통제력,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고대인들은 여겼습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일도 그런 사고의 반영입니다(창세 2:19-20).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던 모세가 ‘이름’을 물었던 이유도 그 반영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으로 알아맞힌 이 대목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 예배에 참석할 정도이니 ‘율법 지식’이 있는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악령에 들린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신자가 신구교를 합쳐 1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코로나19 방역수칙 준수로 요즘은 어렵지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주일이면 ‘거룩하시다’를 노래하는 이른바 ‘거룩한’ 신자들로 성당과 교회들이 북적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힘’(선한 영향력)을 잃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성경 지식’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실천’되어야 할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와 ‘순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경건한’ 신자인 척 성당(예배당, 교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들>의 저자 ‘스캇 펙’의 통찰을 빌리자면 ‘거짓의 사람들’, 즉 자신을 속이는 악한 사람들(위선자들)은 역설적으로 ‘교회 안’에 가장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그런 위선자들, 가짜들에 물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 이야기의 ‘회당’처럼,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악령’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들어와 있기에 가장 안전한 곳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참으로 ‘일상에서’ 주님을 ‘경외’합니까? 나는 참으로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경외’와 ‘순종’이 ‘일상에서’ 함께 가지 않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일상에서 ‘경외’와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 ‘머리의 지식’은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일상에서 ‘경외’와 ‘순종’이 빠진 ‘머리의 지식’은 종국에는 예수님을 삶의 ‘간섭자’ 취급을 합니다.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 이야기의 ‘악령’을 단지 ‘영적 존재’로만 한정할 일은 아닙니다. ‘악령’은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첫째, ‘악령’은 우리를 병들게 하는 ‘오염된 생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현듯이 일어난 ‘오염된 생각’은 ‘자기’를 즐겁게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자기에게 즐겁지 않은데도 계속 그런 생각을 습관처럼 일으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그 ‘오염된 생각들’이 ‘자기 인격’을 죽입니다.

사실, ‘회당’은 ‘성전’ 다음으로 ‘거룩한 곳’인데 ‘악령이 들린 사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가 악령 들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정결법’을 따르는 그들이 막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몰래’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성령’을 모신 ‘성전’인 우리 안에도 ‘오염된 생각의 악령’이 몰래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각과 말과 행실에서 벗어난 순간들이 어쩌면 ‘악령’에 붙잡힌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맞지 않는 ‘일들을’ 계획하고 행할 때 그 역시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둘째, ‘악령’은 우리 자신이 고집하는 ‘사고의 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고의 ‘틀’을 갖는 일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여기기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생존전략’처럼 부지런히 ‘자신만의 틀’을 세워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고정된 사고의 틀’에 갇혀 자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됩니다.

셋째, ‘악령’은 우리 자신이 그어놓은 ‘자기 경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 경계가 이웃과의 소통과 공감을 차단해 버립니다.

넷째, ‘악령’은 요즘 유행하는 ‘거짓 뉴스의 선전’(선동) 같은 ‘사회적 거짓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일부 언론과 방송들이 교묘히 만들어내고 있는 ‘사회적 거짓말’에 속아 우리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다면 ‘악령에 들린’ 상태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더러운 ‘악령’에 들린 사람, 즉 ‘머리의 언어’에 집착하는 이는 맑은 ‘가슴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더는 ‘가슴의 언어’를 말하지 못하도록 ‘발악’하거나 교묘히 ‘훼방’을 놓습니다. 심지어 그 교묘한 훼방은 너무나 그럴듯해서 자칫 속기 쉽습니다. 복음 이야기에 기록된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 마르 1:24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에 비견할 만합니다(마태 16:16). 악령에 들린 사람을 괄호에 넣고 듣는다면, 너무나 훌륭한 ‘지식’이고,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십니다.

입을 다물어라. – 마르 1:25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입니다. ‘경외’와 ‘순종’이 빠진 머리의 지식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엄중한 꾸짖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입을 다물어야 합니까? ‘입’은 ‘말’이 나오는 곳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멈추어야 합니까? 급하게 대답하려 하지 말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들을 불편해하실까요?

그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에만 빠른 ‘악령의 말들’입니다. 오염된 생각들, 고정된 사고의 틀, 자기 경계에서 나오는 말들, 한 마디로 ‘머리의 언어들’입니다. 진실에 대한 추구도 없이 퍼뜨리고 있는 ‘사회적 거짓말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입을 다물어라”라고 꾸짖으십니다. ‘머리’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을 이제는 멈추라 꾸짖으십니다. 그런 언어가 계속해서 말해지도록 방치했기에 ‘가슴의 언어’,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들’이 구석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또 ‘악령’에게 꾸짖으십니다.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 마르 1:25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돈을 들여 성대한 ‘굿판’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단 한마디 꾸짖음만으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그때의 순간을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 마르 1:26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가르침’(말씀)과 ‘치유’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둘은 한 데 어울려 다닙니다. 마치 ‘첫 번째 천지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성취’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고, ‘치유’는 예수님께 ‘권위’가 있음을 증거 하는 또 하나의 ‘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는 가르침 말고도 사람들의 ‘심장’을 뛰도록 만드는 또 다른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회당’(오늘의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악령을 내쫓으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악의 힘이 참 생명이신 분 앞에서 자기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한마디 ‘꾸짖음’으로써 ‘악령’으로 고통받던 ‘거짓의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제야 ‘안식일’이라는 말에 맞게 그 사람은 ‘안식’(쉼)을 얻었고, 거룩한 ‘회당’이라는 말에 맞게 그 공간은 ‘정화’되었습니다. 사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스캇 펙’이 언급한 것처럼, ‘evil’(악)을 ‘live’(살다)로 바꾸시는 분입니다(‘evil’의 철자를 거꾸로 하면 ‘live’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악령에 들린 그 사람’은 ‘우리’를 상징하기에 그 치유는 ‘한 인간의 잘못된 인식’(認識)을 예수께서 ‘바로 잡으셨다’라는 뜻입니다. ‘사고의 거짓을 벗겼다’라는 뜻입니다. ‘오염된 생각들’에 속았고, 자기 사고의 ‘틀’과 ‘경계’에 속았으며, ‘사회적 거짓말’에 속았던 우리의 ‘인식’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속아 온 언어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언어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덕택에 “아, 그게 아니었네”라고 우리의 ‘눈이 열리고’, ‘제대로 보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 비추어 말하자면, 한때 우리 사회는 ‘반공’(빨갱이)의 악령, ‘안보’(좌파)의 악령, ‘지역감정’의 악령, ‘경제 성장’의 악령이 ‘국민을 장악’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악령’에 붙잡힌 이들이 여전히 그런 말을 쓰긴 쓰지만, ‘맑은 영혼을 간직한 시민’이 불편해합니다. 그 언어를 이용한 사람들, 사회적 거짓말을 퍼뜨려온 이들이 자기 배만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맑은 영혼을 가진 시민’이 더는 속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말하면 먹힐 줄 알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권’에 속았고, ‘언론’에 속았고, ‘검찰’에 속았던 국민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며 ‘깨어난 시민들을 통해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선포해야 합니다. ‘주권’을 가진 당당한 시민답게 이 시대의 악령들을 향해 “그 입 다물라”라고 항거하고, “이 나라에서 떠나라”라고 저항해야 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치유를 목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 마르 1:27

그들은 ‘심장’에 호소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울림’을 받았습니다. 예수 ‘예언자’(랍비, 율법교사)는 그들이 알던 ‘가짜 예언자들’과는 정말 다른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악령 들린 사람의 경우처럼 자신들 안에 있는 ‘더러움’이 낱낱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서 대놓고 말하진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두려운 중에도 ‘진실’을 말하며 탄복했습니다. 회당을 나온 그들은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억압의 땅 갈릴래아와 그 근방으로 두루 퍼져나갔습니다. ‘가파르나움’은 갈릴래아 전역으로 소문이 퍼지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신 이유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인생들을 위한 위대한 구원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죄와 죽음과 사탄(악령)과 세상 문화에 붙잡혀 살던 우리를 ‘십자가’로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우리를 이 거룩한 식탁으로 부르시어 진정한 ‘안식’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을 모세가 예언한 ‘그 예언자’, 하느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깨닫게 해주시는 ‘새 교훈의 주님’이라 증언했습니다. 그의 증언처럼 우리가 ‘진정으로’(전심으로) 일상에서 주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속에서 ‘악령들은 추방’당하고 ‘진정한 힘’이 솟아납니다. ‘묶임’은 풀리고 ‘자유’(안식)를 얻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위에서 ‘사랑의 언어’로 살게 됩니다. 그런 이들은 오늘 시편처럼 “주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시다”라고 감사와 찬미를 바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도 바울로가 교훈한 것처럼, 악령의 언어인 ‘교만한 지식’이 아니라 ‘가슴의 언어’인 ‘사랑’이 소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소통의 왕’이신 주님께 ‘경청’하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 서로는 ‘형제’, ‘자매’인 ‘하느님 안의 한 가족’이 됩니다. 경청과 순종이 없는 신앙생활은 ‘거짓’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시는 주님께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적인 ‘머리의 언어’(지식)로부터 돌아서서 ‘우리’ 지향적인 ‘사랑의 언어’를 충실히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그 일이 한순간에 완성되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깨어있는 안내자로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의 언어’를 말씀하시는 주님께 ‘경청’하고 ‘순종’(히브리어 샤마 שָׁמַע는 본래 ‘듣다’임을 기억하십시오)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질 때 어떤 일이 ‘교회’에서 일어날까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지혜’와 ‘슬기의 사람’으로 변화된 이들이 많아질 때 어떤 일이 ‘사회’에서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 진실을 따라 사는 이들이 많아질 때 ‘우리나라’는 어떻게 진보해 갈까요?

‘교회’는 비로소 ‘거짓의 사람들’(위선자들, 악령이 숨어든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에 기반한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빛날 것입니다. ‘사회’는 비로소 특권과 반칙과 속임수가 아니라 ‘자유’, ‘민주’, ‘시민’이라는 말에 어울린 모습을 갖춰갈 것입니다. 오랫동안 국민을 속여 온 ‘사회적 거짓말’은 자취를 감추고 이 나라에 ‘공정’, ‘나눔’, ‘평화’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부디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를 따라 살면서(경외와 순종)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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