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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4. 연중3주일

본기도

은총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회개하라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처럼 옛생활을 버리고 새 생명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요나 3:1-5,10
  • 시편 – 62:5-12
  • 독서 – 1고린 7:29-31
  • 복음서 – 마르 1:14-20

연중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무한한 은총의 주님, 영혼의 감각을 열어주시어 수명이 아니라 생명의 시간을 살게 하소서입니다.

1독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입니다. 어느 날 ‘불현듯이’(이것이 복음 이야기의 때와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아미때’(אֲמִתַּי, ‘진실한’이라는 뜻입니다)의 아들 ‘요나’에게 내립니다.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진실한 이의 아들’인 ‘요나의 마음’은 큰 번민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못 들은 척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자신의 ‘일상’에 ‘개입’해 오신 하느님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그는 꾀를 내었습니다. 어떤 꾀일까요?

고대에는 신들이 자기 몫으로 통치하는 땅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살던 북왕국 이스라엘, 정확히는 ‘즈불룬 지파’ 땅에 있는 ‘갓헤벨’(열왕하 14:25; 여호 19:13)을 벗어나면 하느님께서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 땅은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갈릴래아’에 속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눈앞’(원문에는 ’얼굴‘이라는 뜻입니다)’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합니다.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니느웨’로 가는 일이 싫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는 어리석습니다. 피조물 중 누구도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도망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벗어나기로 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큰 물고기 배속의 요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처럼 《요나》는 처음부터 인간이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영토 안의 하느님이신가? 아니면 온 누리의 하느님이신가의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요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관’에 도전하는 면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변하는 분이신가? 아니면 불변하는 분이신가? 하느님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결코, 바꾸지 않는 분이신가?(사무상 15:29) 아니면 하느님은 사람처럼 후회도 하시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바꾸는 분이신가?(사무상 15:35; 출애 32:12-14; 요나 3:10) 하느님은 사람과 전적으로 다른 ‘절대타자’(Absolute Other)이신가?(민수 23:19) 아니면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창세 1:27)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요나》를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들에 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록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에 관해 끝까지 ‘괄호’로 처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째서 요나가 하느님께 불순종했는지를 찾기보다 나는 과연 주님께서 주신 ‘명령’(마태 28:19-20)을 ‘진실히’(충실히) 따르고 있는지, 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부터 먼저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명령’(사명)에 불순종할 이유가 요나보다 훨씬 적기 때문입니다. 《요나》를 꼼꼼히 묵상해 보시면 그 점을 명쾌히 발견하실 것입니다.

우선 《요나》 예언서에 관한 전체적인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요나》는 ‘아이러니 책’(a book of irony)이라 불립니다. 흔히 ‘아이러니’를 ‘풍자’라고들 알고 있는데, 좀 부족한 번역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자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저녁 기도회를 제안했습니다. 그날 밤 많은 신자가 기도하기 위해 성당에 모였습니다. 모두 “지금 비를 내려주소서!”라고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회 후에 신부님이 신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을 열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환호하면서 손뼉을 쳤습니다.

잠시 후에 우산을 가져오라며 집에 전화를 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은 자리에서 걸어 나오는 한 어린이의 행동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라고 핀잔을 듣던 그 어린이가 신부님을 향해 우산을 살살 흔들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믿음 좋다는 어른 신자 중에는 우산을 준비해 온 이들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 어린이만은 정말 ‘기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만, ‘이스르엘 평야’를 제외하고는 황무지, 광야, 사막, 산악지대입니다. 하느님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출애굽을 인도하셨다고 찬미하지만, 그 코스는 가나안 땅에 이르는 최장(最長), 최악(最惡)의 여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므나세’는 최악이었지만, 최장수한(55년 재위)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왕이었지만, 39세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아이러니’입니다.

《요나》에도 많은 ‘아이러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יוֹנָה, 비둘기, 기원전 8세기경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 열왕하 14:25)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하늘을 내시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느님 야훼(주님이라 읽습니다)를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 요나 1:9

그런데 정작 그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다르싯’으로 도망가려고 ‘배’를 탑니다(요나 1:3). ‘니느웨’는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로 이스라엘에서 동북 방향(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동부)에 있었습니다. ‘다르싯’은 오늘날의 스페인(그 당시로는 세상의 끝)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이스라엘에서 서북 방향입니다.

하느님(야훼)께서 바다에 바람을 일으켜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자 ‘뱃사공들’은 저마다 저희 ‘신’(엘로힘, 이 때는 gods의 의미)에게 기도합니다. 뱃사공들은 세계 종교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은 잠을 잡니다. 선장이 그를 깨워 ‘신’(神)께 빌어보라고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폭풍이 일어난 곡절(曲折)을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아보니 그가 ‘주범’으로 뽑힙니다.

요나는 자신이 ‘야훼’의 눈앞을 벗어나 도망치는 몸이라 고백합니다(요나 1:10).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하며 그를 책망합니다. 그가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 때문에 폭풍이 일어났으니 바다에 집어넣으라고 말합니다(요나 1:12). 하느님의 명령에 죽음으로 항거하겠다는 요나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죽어도 ‘니느웨’로 가지 않겠다”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뱃사람들을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겠다면서도 ‘니느웨’를 위해서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그러는 것일까요? 도대체 ‘니느웨’가 어떤 곳일까요?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관광’을 위해서라면 가볼 만한 곳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바빌론 제국’에 정복당하기(주전 612년) 전까지 고대 근동(중동)을 지배하던 ‘강대국’입니다(주전 10세기-6세기까지). 주전 8세기 말부터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강대국입니다. 특히 곡창지대가 있는 ‘갈릴래아 지방’을 아시리아는 우선 침략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이주민 정책을 펼쳤습니다(주전 732년). 이때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마태 4:15)란 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아시리아’는 하느님을 거스르며,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잔인한 ‘세상 권력’의 대표(원형)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니느웨 사이에 흐르는 정서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경험한 우리 민족과 일본의 관계입니다. 그런 ‘적국의 심장’으로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들기가 요나는 죽기보다도 싫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마지막에서 밝혀지듯이 그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요나 4:2). 한마디로 갈릴래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희망은 아시리아가 망하는 일입니다.

뱃사람들은 그를 즉시 바다에 던지지 않습니다. 그를 희생시키지 않고 위기를 벗어나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요나가 믿는다는 ‘야훼’(주님)께 기도합니다(요나 1:14). 그를 바다에 던지는 ‘죄값’을 묻지 말아 달라고 말입니다. 그를 바다에 집어 던지자 성난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야훼를 크게 두려워하며 제물을 바친 후 무사히 육지에 닿으면 다시 제물을 드리기로 서원합니다(요나 1:16). “하늘을 내시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느님 야훼를 공경”한다면서도 ‘불순종’하는 요나와 두려워하는 뱃사람들이 대비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하느님은 ‘큰 물고기’를 급파해서 요나를 구하십니다(요나 2:1). ‘고래’가 아니라 ‘큰 물고기’입니다. 여기에도 ‘아이러니’가 등장합니다. 큰 물고기로 대변되는 바다 괴물조차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요나는 거부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는 ‘사흘 밤낮’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사경(死境)을 헤맵니다.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였지만 막상 죽음에 직면하고 나니 살려달라는 외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기진맥진하여 ‘죽음의 구렁’(스올)에서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어쩌면 폭풍이 일어나는 ‘바다’와 ‘큰 물고기 배속’이 갖는 문학적 상징은, 야뽁 나루의 야곱처럼, 우리가 ‘자신의 불편한 진실’과 대면하고 ‘진짜 하느님’을 만나도록 ‘강요’당하는(그러나 종국에는 그것이 은총의 사건인) ‘절체절명의 고뇌의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자기 고집과 자기만의 가짜 하느님 상(우상, 요나 2:9)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에서 돌아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뇌의 순간’(은총의 순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요나는 그 절체절명의 고뇌의 순간 속에서 ‘자신의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고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의 호소대로 끝장난 줄 알았던 인생이 기적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합니다.

그 구원의 체험 후에 요나는 ‘감사 기도’를 바칩니다(요나 2:2-10). 그 ‘감사 기도’와 오늘 《시편》으로 노래한 <62편>이 연결됩니다.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라는 찬미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요나의 이 체험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적 표지로 봅니다(마태 12:40). 야훼(주님)께서는 ‘큰 물고기’에게 명령하여 요나를 뱉어내게 합니다(요나 2:11).

하느님은 또다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일러 준 말을 그대로 전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는 이번에는 ‘순종’합니다. “곧 길을 떠나 니느웨로 갔습니다.”(요나 3:3a) 니느웨는 ‘돌아다니는 데 사흘’이나 걸리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요나는 ‘단 하루’ 동안만 돌아다닙니다. ‘큰’ 도시와 요나의 ‘최소한’의 행동이 대비됩니다. 요나는 말씀을 전할 때 ‘야훼’로부터 받은 말씀이라고 밝히지도 않습니다. 그의 외침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히브리어로 5단어밖에 안 됩니다. 아마도 그는 역사상 가장 짧은 설교를 한 인물일 것입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

 

요나에게 ‘불현듯이’(이것이 복음이야기의 때와 연결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던 것처럼,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불현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생각지도 않았고,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설교가 살아 움직입니다. 단지 5단어밖에 안도는 그 설교만으로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성의 없던 설교 몇 마디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합니다. 역시 설교는 짧아야 ‘충격’(impact)이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어떤 하느님을 믿은 것일까요?

《요나》에는 두 ‘신명’(神名)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야훼’(יהוה Yahweh)이고, 다른 하나는 ‘엘로힘’(אלהים elohim)입니다. 《요나》의 저자는 이 두 신명을 엄격히 구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야훼’(Yahweh)는 ‘고유명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알려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야훼’라는 이름이 나오면 ‘아도나이’(אדני Adonay, 나의 주님) 또는 ‘하-셈’(השםha-shem, 그 이름)이라고 읽었습니다.

‘엘로힘’(elohim)은 ‘신’(神)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엘’(אל el) 또는 ‘엘로아흐’(אֱלוֹהַּ Eloah)의 ‘복수형’[남성복수형, ‘임(ים)’은 복수형 어미]입니다. ‘엘’과 ‘엘로아흐’도 <구약성경>에 등장하는데, 둘 다 지금부터 무려 4600여 년 전 고대 근동의 ‘셈족’들이 사용해온 ‘일’(il)과 ‘일라’(ilah)라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그 이름들이 각각 이스라엘로 건너와 ‘일’은 ‘엘’로, ‘일라’는 ‘엘로아흐’로 발음이 바뀝니다.

‘엘’(אל)은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고, ‘엘 샤다이’(אל שדי El Shaddai 창세 17:1, 출애 6:3), ‘엘 로이’(אל רוי El Roi 창세 16:13)처럼 다른 명칭과 함께 쓰이기도 합니다. 흔히 ‘엘 샤다이’를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번역하는데, 문법적으로 ‘하느님은 나의 가슴’이라는 뜻도 됩니다. ‘가슴’이라고 하니까 좀 엉뚱하게 들리지만,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가슴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따라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됩니다.

‘엘 로이’는 ‘나를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엘’은 특히 ‘사무엘’, ‘다니엘’, ‘이스라엘’, ‘가브리엘’, ‘미카엘’처럼 사람이나 천사 이름 뒤에 붙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7세기경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의 하느님 ‘알라’(Allah, ‘바로 그 신’이라는 뜻)도 셈족 전통의 신의 이름인 ‘일라’에 아랍어 정관사 ‘알’(al)을 붙여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신’(들)을 뜻하는 많은 이름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구약성경> 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들의 ‘신’을 ‘엘’, ‘엘로아흐’, ‘엘로힘’으로 부른 서로 다른 집단의 문서들을 기원전 4세기경 마지막으로 편집한 학자들이 배열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엘로힘’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 됐다고 주장합니다.

‘엘로힘’이 단어 형태로는 ‘복수’인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긴다는 그들이 어째서 이 이름을 선호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고대 근동의 모든 민족이 오랫동안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신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민족과 종교를 뛰어넘어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고대 근동의 신관과 신화(천상회의의 장면, 참고 창세 1:26)가 반영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구약성경>에서 ‘엘로힘’은 하느님(God, 야훼)과 동의로 쓰이기도 하고, 다른 민족과 나라들의 단수 ‘신’(god), 혹은 복수 ‘신들’(우상잡신, gods)을 지칭할 때도 쓰이며, ‘신성’(deity)을 뜻하기도 합니다. ‘엘로힘’이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는 문맥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God, 유일신) 야훼와 동의어로 쓰일 때는 ‘단수’ 동사나 형용사를 취합니다(창세 1:1; 1왕상 18:39). 엘로힘이 우상잡신(gods)을 뜻할 때는(여호 24:15-16), ‘복수’ 형태의 동사를 씁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 엘로힘이 ‘복수형’(정확히는 ‘남성복수형’입니다)이라는 것을 가지고 <성경>이 남성적 형상의 하느님과 여성적 형상의 하느님의 존재, 즉 아버지 하느님과 어머니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그리스도인을 현혹하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단’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또 엘로힘의 ‘복수성’을 단수로 해결하려는 이도[대표적으로는 현대 히브리어 사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제니우스’(Wilhelm Gesenius)가 있습니다] 있었습니다. 가령 복수형은 ‘위엄’이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수사학적 장치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을 ‘장엄복수’(majestic plural, 권위의 복수)라 부르는데 제가 배운 교수님에 따르면 잘못된 적용입니다.

《요나》는 ‘야훼’와 ‘엘로힘’이라는 이 두 신명을 엄격히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하느님과 요나 사이에는 야훼를, 이방인들(뱃사공, 니느웨 백성)은 언제나 ‘엘로힘’을 씁니다. 요나가 야훼의 존재를 알려주었을 때, 비로소 뱃사공들은 ‘야훼’께 기도하고 제물을 바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언제나 ‘엘로힘’을 사용합니다. 재밌는 것은 야훼께서도 니느웨 백성들과의 관계에서는 ‘엘로힘’입니다. 또 야훼께서는 요나에게만 명령하고 대화하시지 이방인들(뱃사공, 니느웨 백성)과는 한 번도 직접 대화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요나》는 대상에 따라 ‘야훼’와 ‘엘로힘’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요, 이방인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아직까지 야훼 신앙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의 목적이 ‘유대 중심주의’에 대한 논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요나는 니느웨에서 ‘야훼’ 하느님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을 버리고 ‘야훼 신앙’으로 개종한(conversion)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요나가 전하는 말이 어떤 ‘신의 신탁’(oracle)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불현 듯’ 그들 삶에 ‘개입해’ 오신 하느님, 즉 요나의 선포에 따라 ‘하느님’(elohim)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으며, 왕도 조서를 써서 ‘하느님’(elohim)께 부르짖도록 명령합니다(요나 3:8). 왕을 포함하여 니느웨 모든 사람이 ‘즉시’ 회개합니다. 심지어 소와 양떼까지 동참시킵니다. 삶의 ‘대전환’입니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 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다. …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 – 요나 3:5,10

이렇게 해서 ‘요나’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모범으로까지 제시할 정도입니다(마태 12:41). 그러나 요나는 놀라운 반응을 합니다. 잔뜩 화가 났습니다. 4장 1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요나에게 그것은(하느님의 용서) ‘큰 악’이었고, 그는 화를 냈다.

그는 퉁명스럽게 야훼께 기도합니다.

야훼님, 당장 이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요나 4:3

하느님은 “네가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고 요나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대답하는 대신 그는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볼 심산으로 그 도시의 동쪽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아주까리’(קִיקָיוֹן 키카욘, castor-oil plant, 박넝쿨)를 자라게 하시어 그가 더위를 피하게 해주십니다. 이튿날 벌레가 쏠아 먹어 아주까리가 말라 죽자 더위를 참다못한 그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라며 투덜거립니다(요나 4:8).

다시 하느님과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왜 화가 나지 않겠느냐며 항변합니다. 원문대로 하면, 화가 나서 죽을지언정 자신이 옳다는 강변입니다. 하느님과 ‘맞짱’을 뜨는 그 무모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하느님은 악한 니느웨 백성에게는 긍휼(자비와 은총)을 베푸시어 용서하셨으면서 자기에게는 아주까리 그늘까지 제거해 죽을 지경에 빠뜨렸다는 강변입니다. 하느님의 불공평한 처사에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요나》는 막을 내립니다.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워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 요나 4:10-11

하느님의 긍휼하심에는 제한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사건’을 통해 당신이 누구시고, 요나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 야훼는 하늘을 내시고,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창조주십니다. 아주까리를 기적적으로 성장시키고 말라 죽게도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반면에 요나는 보잘것없는 ‘아주까리’ 식물에 그의 목숨이 달린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큰 악’이라고 판단한 그입니다. 하느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긍휼이 여기시어(은혜의 하느님입니다) 용서하시고 수많은 생명을 구원했을 때는 죽여 달라고 화를 내던 그입니다. 자기 생명이 소중해서 아주까리 식물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요나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느님의 ‘분배적(分配的) 정의’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악한 니느웨 사람들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사랑으로 돌보시고 아끼십니다. 사랑과 자비를 모든 피조물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누어주시는 긍휼(은혜)의 하느님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이스라엘만의 독점물일 수 없습니다(참고 마태 5:45). 요나에게는 니느웨가 벌을 받아 마땅한 ‘응보적(應報的) 정의’의 대상’이었지만, 하느님께는 사랑과 자비가 필요한 ‘분배적(分配的) 정의’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1독서 《요나》의 전체 내용입니다. 참 궁금하게도 요나가 그다음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야훼를 ‘공경’하는 사람이라면서도 끝내 자기주장(생각)을 굽히지 않습니다. 회개는커녕 하느님의 말씀에 ‘불복’하고, ‘죽음으로 항거’하려 했습니다.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을 하느님이 용서하셨을 때, 그는 이 일을 ‘큰 악’으로 여겼고, 죽고 싶을 만큼 화를 냈습니다. 악한 니느웨 사람들도 회개하는 데 비해 하느님 야훼를 ‘공경한다’라는 요나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요나》에 등장하는 이방인들(뱃사람, 니느웨 백성)과 요나를 비교하면 ‘아이러니’ 천지입니다.

사실, 《요나》를 제외한 모든 예언서는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령 《아모스》는 아모스 예언자가 받아 전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아모스가 전한 말씀과 그의 행적을 수집하고 편집해서 책으로 남긴 ‘편집자’를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편집자는 편집자일 뿐, 《아모스》의 저자는 아닙니다. 따라서 《아모스》는 곧 ‘아모스의 책’입니다. 양자는 동일시됩니다.

하지만 《요나》는 다릅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은 《요나》를 기술한 ‘익명의 저자’가 따로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나》 저자는 ‘요나’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했고,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요나》는 요나에 ‘관한’ 책이지, ‘요나의 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요나》와 ‘요나’는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요나》의 저자는 ‘요나’라는 인물을 비판적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요나》에서 ‘요나’는 ‘영웅’이 아니라 ‘반(反)영웅’인 셈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요나는 야훼 하느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도망치려 했을까요?

야훼님, 제가 집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르싯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인 줄 어찌 몰랐겠습니까? – 요나 4:2

우리가 설교 첫머리에서 던졌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요나는 하느님 야훼를 자비롭고, 은혜로우셔서(긍휼이 여기는 분이어서) ‘악한’ 니느웨를 징벌하지 않고 용서해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과 뜻을 바꾸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야훼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억지로 니느웨로 간 요나는 야훼가 전하라는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역시 요나가 예상했던 대로 자비로우신(은혜로우신) 야훼는 니느웨를 심판하시려던 계획을 철회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제 니느웨의 심판을 외치고 다닌 요나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명기》에 보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신명 18:18-22). 전한 말씀이 성취되면 참 예언자입니다. 전한 말씀이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입니다. 요나는 ‘거짓 예언자’가 되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도망간 이유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인 해석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신 것은 야훼 하느님이 단지 자비롭기 때문만이 아니라(분명 하느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분인 것은 맞습니다)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야훼께서 용서하셨다는 더 중요한 진실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3가지 ‘길’(방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죄에 상응하는 ‘형벌’, 즉 ‘죄값을 치르는 방법’입니다(출애 31:15; 35:2-3; 민수 15:32-36). 이것을 ‘응보적(應報的) 정의의 실현’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응보적 정의의 공정한 실현자’이십니다.

 

두 번째는 ‘제의’(祭儀)를 통한 ‘속죄’(贖罪), 즉 ‘종교의식’을 통해서입니다(레위 4:20; 16:30; 17:11). 그런데 종교의식을 통한 속죄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속죄 받은 사람에게 내적변화(뉘우침, 참회)나 행동의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형식적, 제의적 종교’를 비판하고 질타하곤 했습니다(아모 5:21-24; 미가 6:7-8; 이사 1:11-15; 예레 7:9-10).

세 번째는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는 방법’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자비롭고 은혜가 많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합니다(시편 103:8-12; 요나 4:2; 민수 14:17-20). 대통령의 사면권처럼,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행위입니다. 이것의 문제는 하느님께서 악인을 용서하시는 일이 ‘응보적 정의’의 시각과 정면으로 대치(對峙)되고 반(反)한다는 점입니다. 결과적으로 악을 용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예언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야훼께서는 못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야 눈에 들어 귀여워해 주신다! 하느님이 공변되시다고? 그런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 말라 2:17

이렇게 보면, 요나가 야훼 하느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은 것을 ‘큰 악’이라고 하면서 화를 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의의 하느님’이시라면 반드시 ‘죄’(악)를 징벌해야 합니다. 즉 ‘응보적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은 ‘죄’(악)를 용인하는 분이시고, 죄(악)를 용인하는 것도 ‘악’입니다.

그는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도시’(요나 1:2), ‘피로 절은 저주 받을 도시’(나훔 3:1)인 니느웨를 하느님이 심판하시지 않고 용서하신 일은 하느님께서 거악(巨惡)을 용인(容認)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큰 악’이라고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응보적 정의’가 없는 세상, 거악을 용인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항변 했던 것입니다(요나 4:3).

그러나 그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4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제 4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4의 길은 ‘회개’입니다. 요나가 생각한 대로, 하느님이 단지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니느웨에 내리시려던 심판을 번복하고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악의 길에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 – 요나 3:10

여기까지 살피고 나니까 요나가 갖고 있던 ‘신관’과 ‘신앙의 한계’가 보입니다. 그에게는 ‘응보적 정의’는 있었지만, ‘회개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굵은 베 옷을 입고 단식하며 악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변경시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변화(회개)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변경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요나》의 참된 핵심은 ‘회개의 신앙’(신학)입니다.

사실,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회개의 개념’이나 ‘회개의 신학’이 없습니다. 오히려 《요나》 이후부터 회개가 신학적으로 밝혀집니다. 갑자기 이 개념이 생겨났다는 뜻이 아니라 《요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오경 안에 ‘회개의 신학’(신명 30:1-4절)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포로생활에서 추가된 부분이고, 이 ‘회개의 신학’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 ‘신명기 신학’이라는 것이 구약학계의 정설입니다.

실제로 남왕국 유다의 성전파괴 후에는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받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따라서 정통 유대교 학자인 ‘예헤츠켈 카우프만’(Yehezkel Kaufmann)은 “인간의 마음의 변화, 즉 회개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에서 획기적인 새로운 신학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과 연결되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뜻과 계획도 바꿀 수 있습니다.

The whale swallowing Jonah, miniature from the Jewish Bible of Joseph Assarfati, Hebrew manuscript from Cervera, 1299, Spain.

그렇습니다. 우리는 1독서로 짧게 읽고 넘어갔지만, 《요나》는 ‘유대인 공동체’를 향한 가혹하리만치 신랄한 ‘자기비판의 책’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이방인(뱃사람, 니느웨 사람)들보다 못한 ‘유대인’(예루살렘의 시민)들을 엄중하게 ‘고발하는 책’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선포했는데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하느님을 거스르며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타락한 도시 니느웨는 요나의 그 성의 없는 설교에도 불구하고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습니다.

또한 《요나》가 기록되던 당시 반(反) 아시리아 정서가 팽배해 있었을 텐데도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약성경> 안에 《요나》가 포함됐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만 합니다. 특히 《요나》는 ‘회개 신학’으로 신앙의 지평을 넓혀주었습니다(예레 18:7-8; 요엘 2:13). 악한 니느웨도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요나》 예언서의 저자는 ‘회개의 가능성에 낙관적’입니다. ‘하느님의 분배의 정의’를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회개 신학의 문’을 열어 준 책이 《요나》입니다.

우리도 니느웨 사람들처럼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그같이 ‘민감하게 즉시 반응’하기를 축복합니다. 40일이 상징하는 것처럼, 아직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을 ‘대전환의 시간’으로 만들기를 축복합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락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는 복음 이야기에 맞추어 연중 3주일에 이 책을 <전례독서>로 배정하고 읽는 이유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62>은 다윗의 시입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적들’에 둘러싸였던 ‘고난의 시간’ 속에서 ‘불현듯이 영혼의 감각이 열린’ 다윗의 노래입니다. 1독서 요나의 ‘감사기도’처럼(요나 2:3-10),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시라는 신뢰의 찬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고난의 시간’ 속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는 고난의 터널 속에서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시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피난처시며, 하느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공동체에게 자신의 이 같은 깨달음을 전합니다. 오직 전능의 하느님만 의지하고 하느님께 마음속 깊은 것들(걱정, 근심, 염려, 한 恨)을 토해내라고 교훈합니다. ‘인생’은 믿을 것이 못 되고 권력과 재물로 대표되는 ‘세상’도 믿을 것이 못 됨을 공동체에게 교훈합니다. 특히 다윗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시기에 ‘행실을 조심하라’라고 공동체에게 교훈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영혼의 감각’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영혼의 귀’가 활짝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의 덧없음을 깨닫고 모든 ‘희망’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자애로우신 구원(전능)의 하느님께’ 둘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행실대로 갚으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준비하고 살라는 사도 바울로의 교훈입니다. 전체 문맥은 ‘결혼’과 ‘독신 생활’에 관한 권면 안에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세상의 종말’, 즉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왔다’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본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바울로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우리가 보는 세상이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점점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니 ‘모든 관심’을 ‘영원하신 하느님께 두라’라고 당부합니다.

과연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인들조차 유행하는 세상 가치관에 물들어 ‘짝’(사랑)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칠까요? 세상에 너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면 지나칠까요? 감사성찬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되는 것들을 단호히 끊어냅시다. 특히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못된 행실’을 끊어버립시다. ‘하느님 나라’에 오롯이 관심을 두고 우리 앞의 ‘시간’을 단지 ‘수명’이 아니라 ‘소중한 의미의 시간’(생명의 시간)으로 만들어 갑시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생각’과 ‘착한 행실’로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와 첫 번째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위대한 시작을 이렇게 출발합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 마르 1:14

<공관복음>, 특히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의 때’를 ‘세례자 요한의 투옥 사건’과 ‘직접’ 연관 짓습니다. 상대적으로 《루가복음》 기자는 좀 더 거리를 둡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광야에서 회개의 사역을 펼쳤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갑자기 멈추어 섰습니다. ‘헤로데’(안티파스)를 꾸짖다 투옥되었기 때문입니다(마르 6:17). 기적 소리를 울리며 내닫던 기차가 갑자기 뚝 끊긴 선로를 만난 격입니다. 이것이 ‘잡혔다’라는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충격적인 분위기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가 갑자기 체포되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이요 자랑인 예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추종자들과 제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다음’을 듣고 싶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처지로 다시 내몰렸습니다. 이런 ‘상실’과 ‘혼돈’ 속에 있던 그들 사이로 《마르코복음》 기자는 ‘빛을’ 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 마르 1:14

이 구절에서 ‘연중시기’의 옛 이름인 공현절기(公顯, Epiphany)의 주제와 전례독서 채택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참 빛이신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를 갈릴래아로 결정하시고 그곳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가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라는 점은 여러모로 파격적입니다. ‘갈릴래아’는 중심이 아니라 ‘변방’이기 때문입니다. 곧 서울시장 보궐 선거가 있습니다. 서울시장에 여야가 관심하는 이유는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이자 중심지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에 동의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릴래아’를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선택하십니다.

사실,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선택하신 장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이 투옥됨으로써 백성들, 특히 기득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민중들, 가난한 처지에 있던 억눌린 이들의 삶은 거의 ‘죽은 것’처럼 되었습니다. 잠깐 환했던 그들의 삶은 불현듯이 ‘어둠’으로 내몰렸습니다.

우리도 불현듯이 ‘삶의 위기’를 맞습니다. 인생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 불가능할 것 같은 ‘캄캄한 절망의 시기’가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 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했던 예수님이 그들에게 ‘복음’으로,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희망은 없다고 손을 놓아버린 그 절망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우리는 새 희망, 새 생명의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물고기 배속의 요나처럼, 우리의 삶이 ‘깊은 구덩’이 속에 있을 때조차도 주님은 찾아오십니다. 적들로 인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다윗처럼, 실망과 상실 속에 있을 때조차도 ‘복음’(福音 기쁜 소식)은 들려 올 수 있습니다. 절망이 희망을 체포해 버린 그 어두운 시절조차도 ‘빛’은 항상 ‘발견’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복음’(빛)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진정한 ‘때’입니다. 그런 시간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결정적인 순간’이고, ‘복음’(빛)을 전해 주시는(비추어 주시는) 때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찾아가신 ‘억압의 땅 갈릴래아’는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 마르 1:15

도대체 어떤 ‘때’가 다 되었다는 뜻일까요? 일차적으로 그때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그러나 본질로는 ‘하느님께서 구원역사를 전개하실 결정적인 시점’(기회)입니다.

고대 그리스어로 ‘시간’(때)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χρόνος, k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입니다.

‘크로노스’(χρόνος, kronos)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linear time)입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따른 밤낮 ‘하루’와 ‘계절’의 변화처럼, 물리적 시계로 표시되는 객관적이고, 정량적인(Quantitative, 양이나 수치화하여 분석이 가능한) 시간입니다. 간단히 말해 단순히 흘러가는 ‘일상’, 어쩔 수 없이 흘려보내는 비인격적인 시간, ‘만물’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수평적인 시간’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kairos)는 그 크로노스 위에 ‘수직적’으로 ‘불현듯이 찾아든’(혹은 개입한) ‘결정적인 순간’(Absolute moment)이나 ‘적절한 시점’(The right moment)입니다.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기회’(opportunity)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실존적(인격적) 결단’이 중요하게 요청되는 주관적이고, 정성적인(Qualitative, 양이나 수치화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입니다. 간단히 말해 의미와 가치와 사건의 시간입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를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유한한’ 인생(시간)이 하느님, 즉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도 없이 ‘영원한 현재’이신 하느님과 만나(인생에게 드러나) ‘삶의 입체적 대전환’이 일어나는 ‘초월적인 사건의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실행되고 성취되는 ‘궁극적 기회’의 펼쳐짐입니다. 다시 말해 유한이 영원을 품게 되는, 영원성이 지금 여기서 성취되는 ‘질적 도약’의 순간입니다(믿음이라는 말이 이 뜻이라고 ‘인디아나 존스’ 영화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크로노스’가 죽어가는 ‘수명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카이로스’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크로노스 속에서 구현되는 ‘생명의 시간’, ‘의미의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수명의 시간’인 ‘크로노스’를 ‘생명의 시간’인 ‘카이로스’로 만드는 ‘삶의 대전환’을 감행한 이들입니다. 단지 ‘크로노스’(수명)를 살다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의 ‘부활생명’, 즉 ‘영원한 현재’를 자신을 위한 선물로 성취하라는 하느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의 결단’을 통해 그 초대에 ‘믿음’으로 담대히 ‘응답’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성찬례’는 이 ‘카이로스’로의 초대를 자기 안에서 이루어가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향연’(饗宴)입니다. 우리는 그 초대를 어떻게 완성해 가고 있습니까?

사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회’(시간, 행운)란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형상’(形狀)이 독특합니다. 앞머리는 길고 무성한데 뒤통수는 매끈한 대머리입니다. 옷을 벗고 다니는데 어깨에는 큰 날개가 있고 발뒤꿈치에도 작은 날개가 있습니다.

‘카이로스’를 이렇게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단 옷을 벗었기에 사람들 눈에 잘 띕니다. 하지만 길고 무성한 앞머리가 얼굴을 가려서 그가 ‘기회’(카이로스)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만일 처음부터 알아봤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앞머리가 길고 무성하기에 쉽게 붙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친 다음에야 뒤늦게 그를 알아차리고 잡으려 하면 뒤통수가 매끈한 대머리이기에 붙잡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있어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기회’는 단박에 알아봐야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신화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크로노스’(수명)를 어찌할 순 없지만, 하루하루 ‘영원한 생명의 기회’(카이로스)로 완성해 갈 수 있기를 빕니다.

다시 복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명백히 아셨습니다. 그때를 아셨기에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으로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광야로 내보내진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이기신 일은 전혀 ‘새로운 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지내시는 동안 천사의 시중을 받으신 일은 예수께서 낙원을 회복시키는 ‘의로운 분’(마지막 아담, 1고린 15:45)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타락 이전의 낙원, 즉 전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시는 ‘은혜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류는 오래도록 ‘그 결정적인 시간의 도래’를 기다려 왔습니다. 인류는 그곳으로 돌아갈 ‘결정적인 기회’를 오래도록 갈망해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시간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아차리셨습니다. ‘크로노스’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섭리가 결정적으로 구현될 ‘카이로스’, 즉 ‘생명의 시간, 의미의 시간이 다 되었다’라고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위해 전개하실 구원역사의 결정적인 시점(기회)이 다 되었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시간’은 인류가 오래도록 갖기를 고대해온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포는 ‘기쁜 소식’이며, 그 복음의 내용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모든 인생은 예수를 통해 드러난 ‘그 결정적인 은혜의 때’(카이로스)를 알아차리고 응답해야 합니다. ‘사라져갈 세상’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해 속히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지 않고 사라져갈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가면 결국 ‘멸망’합니다. 예수께서는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인생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어서 돌아서라”라고 선포하십니다. 돌아서는 일이 ‘회개’입니다.

본래 ‘회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일입니다. 어디로 돌아서는 일이냐면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누구에게로 돌아서는 일이냐면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시는 하느님’을 향해서입니다. 영원한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께로 속히 돌아서야만’ 합니다. 돌아서서 ‘기다리면’ 그 하느님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분을 따라 함께 걸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처지, 상황 속에 있느냐는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마음으로 지금의 처지와 상황을 ‘카이로스’(의미의 시간, 생명이 시간)로 만들어 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요나의 삶에 개입하신 것처럼, 당신의 성령을 통해 지금도 우리의 시간 속에 불현듯이 개입해 오십니다. 우리는 속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복음이, 하느님의 나라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등장한 것처럼, 어쩌면 모든 인간적 기대와 꿈이 무너져 내린 순간들이야말로 새 희망, 새 생명이 시작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점’(카이로스)입니다.

그러면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래아 오신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우리 삶의 어디로 오시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복음 이야기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십니다. ‘목적’이 있어서 그리로 가셨습니다. 어느 문화에서나 제자가 되고픈 사람이 스승을 찾아가는 일이 일반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 관습을 뛰어넘으십니다. 예수님께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때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부들의 일터인 호숫가로 찾아가시어 제자들을 부르실 참입니다. 그렇습니다. 호숫가는 ‘삶의 현장’입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으로 오십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 마르 1:17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그 부르심에 ‘민감하게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 삶에 소중했던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던 그 순간, 시인처럼 그들 ‘영혼의 감각’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은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와 삯꾼들을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 스스로 상상해 보란 식으로 끝까지 비밀로 남겨두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그들은 자기 생업과 가족을 버리고 이제 막 전도여행을 시작한 분을 따라나섰던 것일까요? 반면에 《루가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마태오복음》과 달리 대답을 시도합니다. 비교적 자세하게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직접적 계기가 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루가 5:1-11). <복음서> 중에 가장 나중에 기록된 《요한복음》도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직접적 계기를 “와서 보라”에서 찾았습니다(요한 1:35-42).

아무튼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절망의 시간)라는 언급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은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의 일터에 있다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크로노스’에 ‘카이로스’가 찾아든 겁니다. ‘일상의 시간’에 ‘생명의 시간’이 찾아든 겁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살던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된 양식’을 마주합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은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강한 ‘울림’을 그들 속에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기회’(카이로스)로 알아차리고, ‘민감하게 즉각적으로’ 응답한 일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말 외에는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반향’(反響)입니다.

“사도 성 야고보와 성 요한을 부르심”,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460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이 “곧”(즉시) 따라나섰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상실과 절망의 시간’(크로노스) 후에 자신들에게 다가오신 ‘영원한 현재’(카이로스)이신 예수님을 “즉시” 따라나섰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상실과 절망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을 때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 안에서 ‘희망’과 ‘목적’을 발견하는 ‘절대적 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리는 많은 사건처럼,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도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 관계가 어떻게, 또 왜 시작되었는지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이라서, 어떤 분은 미션스쿨에 다녀서, 어떤 분은 결혼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째서 나를 잉태한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지, 어째서 그 많은 학교 중에서 내가 다닌 학교가 미션스쿨이어야 하는지, 어째서 내가 사귀어 결혼하게 된 상대가 다른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어야 했는지는 아무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신비’입니다. 자기 삶의 현장인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담긴 ‘기회’를 알아차리고 응답한 제자들처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울림’이 우리 속에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다만 이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진실은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실제로 시작되었다는 점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성찬례를 봉헌하는 일도 신비하기만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러 왔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를 다 설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러 교회나 성당들을 지나왔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비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살이에도 해당합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분명 ‘동기’(긍정적 의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행동이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 작용한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부분을 합쳐서 하느님의 ‘섭리’(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전개하실 구원역사의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즉시’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운명 같은 ‘기회’를 ‘꽉’ 붙잡았습니다. 고기나 잡다가 사라져 갈 그들의 인생, 즉 ‘수명의 시간’을 ‘생명의 시간’으로 만드는 일에 ‘투신’했고, 종국에는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 세상에는 수명의 시간을 살다 가는 사람이 있고, 일상을 생명의 시간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수명을 살기보다 ‘생명’을 사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해마다 1월에는 그렇게 살다간 두 분의 ‘의인’을 기념합니다. 일본 유학 중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입니다. 금주간 의인 이수현씨의 20주기 추도식이 있습니다. 또 지난 14일은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의 선종 11주기였습니다. 분명 그들의 수명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참된 생명을 산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수명의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생명의 시간’(카이로스)을 살겠다고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영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주님과 사랑으로하나 되어 영원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겠다고 사랑을 다짐합니다. 우리의 그 따름, 그 사랑의 다짐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에는 ‘시간’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들의 ‘40’일을 ‘회개’를 통해 ‘카이로스’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들 생의 ‘결정적 시간’, ‘적절한 시점’, ‘궁극적 기회’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심판을 향해 흘러가던 크로노스를 ‘생명의 시간’, ‘의미의 시간’, ‘대전환의 시간’으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말입니다.

코로나19의 고통 속에 벌써 1년을 지냈습니다. 세계에 불어닥친 이 고통의 시간이 인류를 ‘회개한 니느웨’ 사람으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영혼의 감각’이 열린 시인처럼, 이 고통의 시간이 인류를 시인으로 빚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권력이나 재물의 덧없음을 깨닫고 ‘보다 숭고한 가치’를 향해 나가게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계에 불어닥친 이 고통의 시간이 그동안 그리스도인이 잊고 살아온 ‘종말의 시간’에 대한 ‘영혼의 감각’을 되살려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계에 불어닥친 이 고통의 시간이 우리가 진정으로 ‘투신해야 할 가치들’을 위해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영혼의 감각’을 되살려 주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디 우리가 니느웨 사람들처럼, 첫 제자들처럼,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즉각적으로’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시인처럼 ‘영혼의 감각’이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숭고한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영혼의 귀가 활짝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권력이나 재물의 덧없음을 깨닫고 모든 희망을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구원의 하느님께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눈이 활짝 열려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당부처럼 종말이 다가온다는 믿음으로 깨어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방해되는 것들은 끊어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오롯이 관심을 두고 우리의 일상을 의미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행동한 제자들이 우리여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크로노스)을 의미로 가득 찬 ‘생명의 시간’(카이로스)으로 만들어 주시는 희망의 하느님과 함께 한 해를 힘차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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