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7. 연중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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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무상 3:1-20
  • 시편 – 139:1-6, 13-18
  • 독서 – 1고린 6:12-20
  • 복음서 – 요한 1:43-51

연중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성전인 우리 몸으로 사랑의 하느님을 드러내시오입니다.

1독서 《사무엘상》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이 예언자로 세워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 기도해서 얻었다’입니다(1사무 1:20).

Samuel Dedicated by Hannah at the Temple by Frank W.W. Topham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자 낳기 전에 서원한 대로(사무상 1:11) 아기를 하느님의 전에 바쳤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성전에서 자라납니다. 그는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환히 아시는 하느님의 품’ 안에서 성장해 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의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보고 계셨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점지해 주신 분입니다. 그의 나날 중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앞으로 걸어야 할 모든 길을 하느님은 정해 놓으셨습니다.

어느 날 소년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성전에서 자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참 의외입니다. 오랫동안 침묵하시고 숨어계셨던 하느님이 제의에 ‘능숙한’ 사제 ‘엘리’가 아니라 ‘어린’ 심부름꾼 ‘사무엘’에게 나타나십니다. 장면의 ‘대조’가 재미있습니다. ‘순백’의 어린이와 ‘오염된’ 노인, 하느님의 ‘성전’과 인간의 ‘잠자리’, 성전 안의 켜진 ‘등불’과 초점 잃은 노인의 ‘어두운 눈’,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가 대조됩니다.

처음에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내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하느님은 소년 사무엘에게 앞으로 행하실 일을 첫 번째로 말씀하십니다. ‘엘리’ 가문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엘리의 자식들은 2독서 《고린토전서》의 말씀처럼 자신들의 배경을 이용해 ‘식탐과 음행’을 저지르며 하느님을 모독했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일을 환히 ‘아셨고’, 이미 ‘엘리’에게 경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사무상 2:27-34). 하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아들들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소년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세월이 흘러 사무엘은 하느님이 세우신 예언자로 드높여집니다.

1독서 《사무엘상》 말씀을 묵상하다 제단에서 봉사하는 어린 ‘복사들’을 축복했습니다. 드보라와 세실리아도 매주일 주님께 봉헌되어 감사성찬례를 섬깁니다. 사무엘처럼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거룩하고 복되게 자라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자녀를 양육하는 우리 부모들이 진실을 알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자녀들도 하느님의 소유임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하기를 기도했습니다. 특히 엄마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아이의 첫 번째 신앙 교사이자 신앙의 안내자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특히 저 같은 사제들은 엘리처럼 마음의 눈이 어둡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궤’ 옆에 있는 사무엘은 늘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맑고 밝은 사람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합니까? 처음에는 알아듣기 어렵더라도 꾸준히 말씀을 읽고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 삶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뜻을 똑똑히 알아듣고 응답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이, 밝혀져 있던 성전 등불처럼, 하느님의 거룩한 몸인 우리를 망가뜨리려는 시대의 어둠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내면의 빛’이 됩니다. 식탐과 음행처럼 하느님을 모독하는 시대의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옹골차게 하는 ‘내면의 힘’이 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9>은 전지(全知)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느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 《사무엘상》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를 이미 환히 알고 계시는 하느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나와 너무도 친밀히 계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렇게 찬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손수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대한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찬미입니다. 전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의 손 안에 우리의 인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통찰을 전해주는 시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배정에서는 제외되어 있지(19-24절), 모함을 받던 시인이 자기변호를 위한 동기에서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동기에서 지어진 시가 다른 전례독서와 만나니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궤’ 옆에서 자라난 사무엘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비단 사무엘뿐이겠습니까? 하느님은 몸소 지으신 우리를 늘 지켜보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 말씀처럼 우리 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 ‘값이 지불된’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처럼 우리를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어머니 몸속에 지어지기 전부터, 우리가 살아갈 인생길을 다 계획하시고,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지으셨고,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하느님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도, 삶의 어려움이 있어도, 큰 틀에서 우리의 삶은 자비로우신 창조주 하느님의 손에 붙잡혀 있습니다.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나 깨나 우리를 아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반응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이 믿음으로 올 한해 우리 교우들이 용기를 내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이 내신 이 몸,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이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교훈합니다. ‘몸’이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몸에 대한 이 같은 언급을 통해 ‘고린토교회’가 처해 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안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식탐과 음행이 큰 문제 거리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두 가지는 크고 작은 죄악의 씨앗들입니다. 참고로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엘리의 집안뿐 아니라 사무엘 예언자가 인생 말년에 이르자 그의 아들들도 판관의 직책을 남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몸이 갖는 의미를 명백히 교훈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의 몸, 즉 육체와 정신과 영혼,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환히 아신다고 찬미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바울로는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라고 교훈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과 내가 둘도 없는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값을 치르고’ 우리의 몸을 ‘사셨기에’ 우리의 참 소유권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고 교훈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교훈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성전’인 우리 ‘몸’을 어떻게 돌보고 있는지, 하느님께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전례독서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우리 몸의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증거들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의 이름은 “하느님께 빌어서 얻었다”라는 뜻이고,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타나엘’은 “하느님이 주셨다”라는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임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이들은 쾌락 추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로의 권면처럼 자신의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에 봉헌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로의 이 같은 권면에서 우리가 요즘 지내고 있는(비록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를 없앴다 하더라도) ‘공현’(公顯, Epiphany)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는 이 몸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삶이 아닙니다. 내 욕망, 내 뜻대로 다 할 수 있어야 자유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를 가장한 ‘욕심’이고, ‘방종’입니다. 오히려 그런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야말로 자유가 진정으로 뜻하는 바입니다.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내 소원대로 되어야 한다는 그 욕망으로부터, 그 욕망덩어리인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그런 자유에 이르는 최고의 비결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산 제물로 바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겠다고 ‘세례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두 제자를 부르심과 약속(계시), 사명입니다. 특히 복음 이야기의 배경인 1독서 《사무엘상》과 《시편》과 짝을 이루어 ‘나타나엘’을 이미 환히 ‘아시는 주님’이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약속’하십니다. 물론, 부르심이 ‘먼저’ 있었지만,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의 처지에서는 자신들이 찾아온 ‘보화’(목표, 목적)를 발견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믿음’이라는 말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다.

《요한복음》 1장은 이 ‘믿음의 정의’에 딱 어울리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특히 19절부터 51절까지는 자신이 찾아온 ‘보화’를 발견한 이들의 ‘환희에 찬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이 인생에서 발견한 가장 소중한 보화, 목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화’로 발견한 이들은 한결같이 ‘신앙고백’으로 자신의 찾음을 마무리합니다(요한 1:36, 39, 41, 45, 49). 그런 다음에는 ‘절친한 친구’(절친)에게 다가가 자신이 발견한 그 ‘보화’를 체험하도록 ‘초대’합니다(요한 1:41, 45). 초대의 방식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와서 보라”(요한 1:39, 46). 이른바 ‘관계 전도’입니다. 우리는 이 초대의 이야기를 통해 초대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 하나의 모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모형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제 복음 이야기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봅니다. 어부 출신의 첫 번째 제자 그룹을(이 부분은 중 3주일 다룹니다) 얻으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을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결정하십니다. <복음서>는 이 결정이 ‘예언의 성취’라고 보도합니다(이사 9:1-2, 마태 4:15-16). 그 지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아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갈릴래아’가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라는 점은 ‘안드레아’뿐 아니라 ‘유대인’의 예상을 완전히 깬 것입니다. 첫 번째 제자 그룹에 속하는 ‘안드레아’는 자기 형에게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소개했습니다(요한 1:41). ‘메시아’에게 어울리는 ‘첫 무대’는 누가 생각하든지 당연히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릴래아’를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선택하십니다.

이제 그 ‘갈릴래아’로 떠나실 참이었던 예수님은 또 한 그룹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그들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나 제자가 되고픈 사람이 스승을 찾아가는 일이 일반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화적 관습을 뛰어넘으십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가 제자로 부르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필립보’도 그런 경우입니다. 다만 《요한복음》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베드로’, ‘나타나엘’이 주님께 찾아왔다가 제자가 된 경우입니다.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안드레아, 베드로, 필립보, 나타나엘)의 공통점은 ‘메시아’를 찾고 대망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필립보’는 베드로와 동향(同鄕)인 ‘베싸이다’(고기잡이하는 집이라는 뜻) 출신입니다. 《요한복음》은 자세한 이야기를 생략했으나 ‘동향’이라는 말을 통해 그들이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제자가 된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필립보’ 역시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깊은 감동과 확신을 얻은 것으로 추측 해 볼 수 있습니다.

‘필립보’라는 이름은 “말(馬)을 좋아하는 사람, 말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은 “하느님이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지난 성지 순례 때 나자렛 근처 도시인 ‘가나’에 들렀습니다. 그곳에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념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방문하고 나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바르톨로메오 기념 성당’이 있었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교회사에서는 9세기 이후 ‘나타나엘’을 사도 ‘바르톨로메오’(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와 동일 인물로 추정해 왔습니다. ‘나타나엘’이 ‘가나 출신’이기 때문입니다(요한 21:2). 그렇다면 그도 《요한복음》이 전하는 첫 번째 표징을 체험한 셈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 필립보는 얼른 ‘나타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만큼 ‘나타나엘’을 소중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5절). 이 말은 나타나엘 역시 ‘메시아’를 찾고 대망해 온 인물임을 말해줍니다. 필립보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 즉 <구약성경> 말씀에 근거해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증언합니다. 그가 다른 말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자기주장을 펼쳤다는 사실은 그만큼 ‘나타나엘’이 <성경>에 ‘일가견’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 요한 1:45b

어째서 이런 말을 덧붙였을까요? 나타나엘이 어디 출신이라고 했습니까? ‘나자렛’ 옆 도시 ‘가나’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필립보는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란 말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나엘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그는 경멸하는 어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 요한 1:46

어찌 이리 ‘무안’(無顏)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자렛에서 정말 ‘신통한 것’(메시아)이 나온다면 어쩌려고 그랬을까요? 그는 자신만만하게 나자렛을 ‘개쓰레기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나자렛’이라면 훤히 안다는 뜻입니다. 또 그가 그렇게 핀잔을 줄 수 있었던 근거 역시 <성경>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특정한 인물을 ‘메시아’로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언급했을 뿐입니다(신명 18:15).

<구약성경>에 따르면 ‘메시아의 첫 번째 조건’은 다윗 왕처럼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합니다. 그가 듣기로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조건에도 맞지 않는 분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는 유다에 살던 기득권자들, 즉 예루살렘 중심적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이미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비하되어 불렸습니다(마태 4:15-16; 마르 14:70).

본래 갈릴래아(Galilee)는 ‘비옥한 곡창지대’였으나 주전 8세기경 아시리아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유대로부터 고립되고 소외됩니다. 이어진 점령군들은 이 지역에 여러 민족이 섞여 살게 했고, 이로 인해 유다로부터 ‘이방인의 갈릴래아’라 낙인찍힙니다. 그 땅에 살던 이들은 고아처럼 버려져 이스라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살려가는 일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문화와 싸워야 하는 ‘한(恨)’ 많은 땅으로 변합니다. 더욱이 가난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킬 수 없었던 민중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기득권자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이라는 ‘멸시’와 ‘박해’도 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 땅은 ‘지배자들’(대지주)에게 ‘살림’이 거덜 난 이들이 찾아드는 곳이 되었고,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열혈당’(젤롯당)의 본거지가 됩니다(루가 13:1). 열혈당원들은 예루살렘에 살던 ‘대지주들’, 즉 왕족이나 대사제들 같은 ‘기득권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더는 잃을 것이 없던 ‘가난한 민중들’은 대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해 자주 ‘봉기’했고, 예루살렘에 살던 ‘기득권자들’이 ‘갈릴래아의 대지주들’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릴래아’라고 하면, 기득권자들 눈에 ‘불순분자’나 ‘반란자’와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나자렛’은 너무나 하찮은 곳이어서 <구약성경>이나 초기 유대교 문헌들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자라나셨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 운동의 첫 무대로 결정하신 그 지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멸시’와 ‘천대’, ‘약자’와 ‘소외’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 ‘나타나엘’의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의 ‘핀잔’은 단지 자신의 <성경> 연구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기득권자들이 퍼뜨린 ‘유언비어’(불순분자, 반란자)의 영향도 받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은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정작,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이 하나도 없다”(요한 1:3)라는 이 진리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 모두 자기주장의 근거를 <성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자기 옳음을 주장할 때도 보면, 꼭 자기주장의 근거를 <성경>에서 끌어다 대잖습니까! 자신의 성경 지식은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지 그 반대면 죄짓는 일입니다.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필립보는 더는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간단히 이렇게 초대합니다.

와서 보시게 – 요한 1:46

필립보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초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나타나엘이 갖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메시아를 만난 체험’입니다. ‘보면’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문자를 쓰자면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입니다. 경전이 있기 전 ‘체험’이 먼저였듯이 그리스도교는 분명 책의 종교 이상입니다. 묵상이나 명상의 종교 이상입니다. 종교가 본디 체험 위에 세워지듯이 그리스도교 역시 ‘체험’ 위에 세워졌습니다. 아는 것을 넘어 ‘보는’(체험) 신앙으로의 초대가 그리스도교입니다. 나중에 그 초대는 나타나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와서 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초대입니다. 찾고 발견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초대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성공회’라고 하면 ‘서울대성당’이 하나의 상징처럼 쓰입니다. 여러분, 건물이 성공회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어버린 이 비극적인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 나가야 할까요? 신자 중에는 유리타일로 모자이크된 제단화와 색유리로 장식된 성당 내부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대한 십자가를 앞세운 순행 행렬과 화려한 제의를 입고 제단을 채우고 있는 성직자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빛 찬란한 파이프 오르간과 성가대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직자의 설교를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있고, 교회 프로그램과 성당의 복지시설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해마다 6월이 오면, 6.10 민주항쟁의 진원지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관광이나 방문 목적으로 온 이들이 그런 것에 주목하고, 또 그런 것들을 통한 ‘초대’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초대장’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낼 수 있을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건축미’를 따지자면 이 세상에는 대성당보다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에 잠깐은 감탄할지 모르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목(耳目)을 끌던 것들도 익숙해지고 나면 더는 감동을 주지 못하는 법입니다(사람도 그렇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뇌’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는 건물이나 음악이나 분위기가 아니라 성당을 찾아온 한 인격이 좀 더 일찍 ‘예수’를 ‘체험’하도록 모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건물은 내세울 만한 건축미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감사성찬례가 화려하거나 세련된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의미 있는 성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누구를 보고 있고, 또 누구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와서 보라”는 필립보의 그 확신에 찬 초대가 우리 자신의 것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 하고, 보여줄 수 있는 분은 우리 속에 계신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곁길로 빠집니다.

우리는 올 한 해 교회의 존재 이유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합니다. 자기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갈구합니다.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을 갈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공동체’가 있음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와서 예수를 보라”고 초대할만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구원의 일을 하시는 예수를 “와서 보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와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들어보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처럼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미’ 환히 알고 계신 주님을 만나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저부터 그렇게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사랑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설교를 준비할 것이고, 우리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설교를 준비할 것이며,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맛보게 하는 설교를 준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 안에서 더욱 새로워져야 합니다.

The First Two Disciples – John 1:35-42

필립보의 초대로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오자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 요한 1:47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낚싯밥을 ‘미끼’라고 합니다. ‘미끼’는 언뜻 안전해 보이지만 일종의 거짓이자, 속임수이며, 배신입니다. 물고기 잡는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간관계를 그런 식으로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럴듯한 말, 거짓말, 속임수, 유혹, 덫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미끼’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시며 기뻐하시는지를 봅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입니다. ‘나타나엘’ 말입니다. 1독서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순백의 사무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예수님께서 감탄하신 ‘이스라엘’과 ‘거짓이 없다’라는 말씀 속에 생각나는 이름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그의 이름처럼(창세 27:35-36) 한평생 ‘속임수’와 거짓의 명수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야뽁’ 나루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한 후에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창세 32:23-33). ‘씨름’이라는 말속에는 그가 ‘빛’이신 하느님과 대면하여(하느님을 보고) 자신의 ‘어두운 진실’을 직면한(본)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속이는 자로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추함을 더는 외면치 않고,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과의 화해가 일어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대면하여 자신의 진실을 ‘본’ 사람은 더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깨달음을 추구하며 ‘영적 씨름’(체험) 속에 살아온 ‘나타나엘의 속마음’을 알아보시고 기뻐하시고 감탄하신 셈입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며 살아온 ‘영적 여정’을 초자연적으로 다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나타나엘은 깜짝 놀랐습니다. 필립보에게 보였던 그의 싸늘한 반응과 경멸의 어투가 후회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 요한 1:48a

두 눈이 동그라진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합니다. 사실 《요한복음》에는 ‘앎’이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거의 매장마다 알아보고 알아듣는 이야기의 연속입니다.(요한 1:10,33; 3:11; 4:10,25-26,29,42; 5:39; 6:35-58,60-65,68-69; 7:25-29; 8:12-19, 21-32,39-47; 9:35-41; 10:1-6,14-15,27-30; 14:4-14,15-21; 16:13; 17:3,6-8,23-26). 그의 표정을 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 요한 1:48b

전부터 나타나엘을 ‘눈여겨 보고’(알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금 《시편》으로 노래한 <139편>이 포개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고, 아무도 보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를 환히 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눈여겨보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보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 놀라운 대답에 나타나엘은 ‘경계심’을 풀고 맙니다. 마치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듯 나타나엘은 즉시 마음을 바꿉니다. 도대체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세계 거의 모든 종교에는 ‘성스러운 나무’라는 상징이 있습니다. 나무가 ‘주기적 생명의 순환’이라는 ‘우주의 속성을 재현한다’라고 고대인들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나무는 재생, 풍요를 넘어 하늘, 땅, 지하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의 중심축’(우주목), ‘신’(神)이 평범하고 속된 세상과 접하는 ‘매개’, 성스러움이 내려오는 ‘통로’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나무’ 또는 ‘나무 아래’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가령, 도교에서 ‘복숭아나무’는 이상향(理想鄕), 선계(仙界)의 상징입니다. 불교에서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기에 보리수 자체를 붓다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단군신화에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지상으로 처음 강림한 나무인 ‘신단수’(神壇樹)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나무를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원죄’의 빌미가 되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 ‘무화과나무’[일부 고대 랍비들은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무화과나무를 먹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창세기》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9), 즉 지식의 나무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 ‘종려나무’가 그렇습니다. 특히 십자가(十字架)를 ‘십자가 나무’라고 부르며 경배합니다. 언제 그렇게 합니까? 성주간 전례 중 성금요일 구주수난 예식에서 ‘십자가’를 높이 들면서 사제가 이렇게 초대합니다.

구세주께서 달리신 십자가 나무를 보라.

이때의 ‘십자가 나무’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초대교부였던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도 보면, 그가 ‘회심’하게 된 계기가 된 장소가 재미있게도 ‘무화과나무 아래’였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종교학 관련 이야기를 언급하다 보니 좀 멀기까지 간 기분입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 문화를 봐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마을 어귀마다 나무로 만든 ‘장승’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요즘도 농촌에 가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신목(神木), 신수(神樹)라 불리는 ‘당산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분명 ‘나무’, 또는 ‘나무 아래가 갖는 상징’은 ‘이상향(理想鄕)’, ‘깨달음’, ‘구원’, ‘성스러움의 통로’와 연관됩니다.

복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에서 잎이 가장 크고 그늘을 짙게 잘 만드는 나무는 단연 ‘무화과나무’입니다. 또 익어가는 무화과에서 달콤한 향내가 풍겨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장소로 그 나무 아래를 이용하였습니다. 실제로 랍비 문헌에도 율법을 전심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간사하지 않은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런 배경을 참고해 보면,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율법(성경)을 ‘연구’하거나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의 나라’(평화의 나라)를 기다리며 전심으로 ‘기도’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가’와 ‘즈가리야’ 예언자도 예루살렘이 평화의 중심이 되는 날을 선포하면서 ‘무화과나무 아래’를 언급합니다(미가 4:4; 즈가 3:10). 어쩌면 그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중심이 되는 그날’(하느님의 나라)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던 중에 ‘깨달음’ 혹은 ‘신비체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영적 씨름’의 골방, ‘배움’의 골방, ‘기도의 골방’, 즉 속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예수님이 단박에 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풀면, “네가 연구하고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나요, 네가 전심으로 기대하던 그 ‘하느님의 나라’가 지금 임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씨름과 간절한 염원, 자신의 영적 체험과 깨달음까지도 한눈에 알아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압도당한 나타나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맙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요한 1:49

남이 전해 준 지식과 정보에 바탕 한 신앙이 ‘진짜’를 만나 ‘진리’를 ‘보는’(체험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이스라엘 사람’이라 불렀으니 예수님이 자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 모두를 가리키니 예수님이 야곱의 후손 모두의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게다가 그의 고백은 《이사야》 예언서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그의 구세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 이사 44:6

이렇게 그는 자신을 환히 아시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이제야 ‘진짜 앎’이 시작된 그에게 예수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혀주시며 약속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한 1:50-51

예수님의 이 약속은 ‘야곱의 꿈’을 연상시킵니다(창세 28:10-22). 꿈에 야곱은 땅에서 하늘에 닿는(하늘이 열렸다는 뜻) ‘층계’를(종교학에서는 이 층계를 ‘우주목’ 또는 ‘신수’의 상징으로 봅니다.) 오르내리는 천사를 봅니다. 놀라워하는 그 옆에 하느님이 나타나 ‘복’을 주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시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도망자 야곱의 생애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꿈에서 깨어난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삼고, 꼭대기에 기름을 부어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 명명하며, 하느님께 세 가지를 서약합니다.

이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예수님은 ‘나타나엘’(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모든 이들) 역시 ‘무화과나무 아래서’ 본(깨달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느님이 행하실 위대한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정말 잘 들어두어라”(원문에는 ‘아멘’으로 시작됨)로 시작하실 정도로 보증하십니다.

‘하늘이 열렸다’라는 말씀은 “무화과나무 아래”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는 일종의 ‘성소’ 같은 특별한 장소였지만 이제 하늘과 땅을 잇는 ‘새 베델’, ‘참 성전’이신 분이 드러났기에 더는 그 나무 아래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자신이 ‘성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따르는 이들, ‘십자가 나무 아래로’ 나오는 이들은 ‘야곱’ 같은 주인공이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에 높이 들려질(요한 3:14)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을 이끌어 당신께로 오게 하실(요한 12:32) 그 사람의 아들을 믿는 이들이 ‘야곱’ 같은 주인공이 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나타나엘뿐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하느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통하여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파괴되었고 후에 재건된 즈룹바벨 성전과 헤로데가 증축한 성전도 더는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원형’ 앞에서 ‘모형’(그림자) 노릇하던 지상의 성전은 사라져야 합니다(마태 24:1-2).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신 ‘참된 성전’이 나타났습니다(요한 2:19-22).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외아들이신 예수를 통해서 사람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은 사라졌습니다. 하느님은 성전이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과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함께 하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느님과 영원토록 연결될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교제가 구체화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에게 하신 약속은 ‘참사람’(사람의 아들)으로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 즉 십자가 나무를 통해 이루실 ‘구원’ 역사에 대한 암시입니다. 그 십자가 나무 아래 있는 이들, 그 십자가 나무로 나아오는 이들, 그 성전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는 ‘새로운 성전’을 하나 더 소개합니다. 2독서 《고린토전서》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 1고린 6:19

우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셨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도 ‘성전’이라 말씀합니다. 이 축복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무시하고 내 뜻, 내 욕심만 고집하며 살던 이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본래의 자로’로부터 벗어난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삶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기에 우리는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느님의 집’이 되는 ‘거룩한 존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전’인가? 아니면 ‘돼지우리’인가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증명해 줍니다. 우리 안에서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화해’가 일구어지며, 이해와 배려, 경청과 격려, 사랑과 나눔, 꿈과 희망이라는 ‘믿음의 에너지’가 퍼져나간다면, 여러분이 저처럼 ‘제의’(예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향기로운 성전인 것이 분명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를 환히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 존재는 사무엘처럼, 나타나엘처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불러 그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초대하십니다. 나타나엘은 곧바로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2021년을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의 몸을 어디에 바칠 것입니까?

하느님의 성전에서 자라난 ‘사무엘’처럼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맑은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필립보’처럼 우리의 ‘절친’들을 우리 인생들의 진정한 ‘선물’(보화)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복된 인생이어야 합니다. 거짓과 속임수와 배신, 편법과 유혹이 난무한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엘’처럼 정직한 영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면 ‘엘리의 집안’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의 인생이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십자가 나무 아래’서 쉼을 얻을 뿐 아니라 이 쉼이 필요한 이웃을 ‘십자가 나무 아래’로 인도하는 복된 인생이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로의 권면처럼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값을 치르고 사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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