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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0. 주님의 세례(연중1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창세 1:1-5
  • 시편 – 29
  • 독서 – 사도 19:1-7
  • 복음서 – 마르 1:4-11

연중 1주일이자 주님의 세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억하여라, 네가 누구인지’입니다.

‘주님의 세례축일’입니다. 공현일 후 첫 번째 오는 주일에 기념하도록 고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을 우리는 ‘공현대축일’로 지켰습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이방인 전체’를 상징하는 ‘동방박사들’에게 ‘아기 예수’를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이시자 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하늘의 별’을 통해 그들에게 계시하시고 인도하셨으니 ‘공공연’(公公然)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그들에게만 보였고, 그들만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들만 ‘그 집’에 들어가 ‘거룩한 아기 예수’를 ‘왕’으로 ‘경배’하였다는 점에서 아직은 ‘공공연한 비밀’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에 비해 ‘주님의 세례축일’은 더 ‘공공연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곳이 ‘그 집’처럼 ‘닫힌(비밀스런) 공간’이 아니라 ‘요르단 강’이라는 점에서 ‘개방적’입니다. 특히 다른 복음서와 달리 《루가복음》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물론 유대인이지만 동방박사들보다는 많은 사람이기에 신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이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예수님 위’에(그에게) 내려오심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반면에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은 ‘예수님’(당신 위에)만 보신 것으로 전합니다.

또한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은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께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전하지만 《마태오복음》은 ‘하늘의 소리’를 예수님께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거기 있던 사람들이 개관적으로 직접 들었다고 전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제 3자들에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공공연히 인정하고 선포한 본문은 《마태오복음》인 셈입니다. 아무튼 이런 종합적인 해석을 반영하여 전례력에서는 오늘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창조세계 전체의 그리스도’로 ‘드러내신 날’로 기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세례축일’은 ‘공현대축일’처럼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공공연히 드러났음(公顯, Epiphany)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 빛’으로 ‘성육신’하신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공공연히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육신 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출가하시어 ‘세례’를 받고 ‘새 계약’을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출발점입니다. 그 출발의 목적은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과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세례 일은 우리를 당신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이어받을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새로운 계약 관계의 출발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우리의 ‘세례성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새 계약’에 참여하는 ‘세례’를 받고 성령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받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났습니다(창조되었습니다). 그 세례 때 우리는 새 계약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겠다고 교회와 하느님 앞에서 ‘언약’했습니다. ‘작은 우주’인 우리 ‘마음의 왕국’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드렸습니다. 창조세계 전체의 구원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겠다고 언약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와 삶의 목적을 되새기며, 이미 은총 받은 사람답게 자기 정체성에 맞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복된 날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힘차게 올 한 해를 새롭게 살아가자고 초대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갖는 이런 구원사건의 의미를 되새기며 <전례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창세기》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창세 1:1-2:4a)의 ‘서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하느님의 ‘창조행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는 ‘창조신앙’ 고백의 서두입니다. 하늘과 땅, 즉 온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이시며, 자연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과 함께 창조된 공동의 피조물로서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하느님의 소중한 작품이라는 고백입니다. 창조신앙의 고백인 본문이 오늘 배정된 이유는 복음 이야기의 ‘배경’(암시, 예언, 보충, 조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세례’ 때 일어난 사건은 삼위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한 자리에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도 ‘삼위일체 하느님’을 계시하는 ‘단서들’(암시들)이 ‘밭에 묻혀 있는 보물’처럼(마태 13:44; 골로 2:2-3) 숨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임을 암시하는 ‘표지들’이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 담겨있다고 그리스도교는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주어’와 ‘동사’의 불일치(창세 1:1,27)가 그것입니다. ‘지어내셨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바라’(בָּרָא)는 ‘단수 동사’인데, ‘하느님’으로 번역한 주어 ‘엘로힘’(אֱלֹהִים, 하느님들)은 ‘복수 명사’입니다. 이점은 한 분 하느님의 세 위격에 관한 ‘암시’라고 그리스도교는 해석합니다. 또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음성’과 깊은 물 위에 휘돌고 있었던 ‘하느님의 기운’(바람, 숨, 영)도 ‘창조’라는 하나의 사업을 위해 ‘주체’로 참여하신 성자와 성령의 암시라고 그리스도교는 해석합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그 ‘말씀’과 ‘기운’이 갖는 삼위의 위상이 충분치 않고 밭에 묻혀 있는 보물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그 위상은 <신약>에서 ‘성육신’(요한 1:1-18)과 ‘주님의 세례’(마르 1:9-11)와 ‘오순절 성령강림’(사도 2:1-4)으로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본문은 ‘그 말씀’과 ‘기운’을 ‘창조’라는 하나의 사업에 포함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창조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기초)입니다(로마 11:36; 히브 11:3; 골로 1:16; 시편 104:30). ‘영원한 생명’을 은총으로(값없이) 선물 받는 그리스도교로 들어오는 ‘첫 관문’입니다(요한 17:3; 사도 16:31).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증언하는 ‘생명의 책’(요한 1:1-3,10,12; 3:16; 5:39)이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2고린 5:17)이 되는 ‘구원’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신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성찬례에서 고백하는 <니케아신경>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를 고백하는 창조신앙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믿나이다. 한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 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창조 이전’의 ‘영원한 상태’와 ‘창조의 과정’과 ‘완성’을 생동감 있게 전하는 또 하나의 본문이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추구할 최고 가치인 ‘지혜’를 전하는 《잠언》입니다. 지혜’를 여인으로 ‘의인화’해서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지혜’가 ‘이미 존재했다’라고 전해줍니다(잠언 8:22-29). 모든 것에 앞서 지혜를 지으셨고, 지혜는 이미 태어났다고 말씀합니다(잠언 8:22,26). 지혜가 우주의 창조에 적극 동참 했다고 말씀합니다(잠언 3:19; 예레 10:12; 지혜 9:9). 그 ‘지혜’가 야훼(주님이라 읽습니다)께서 창조하실 때 “붙어 다니며 조수 노릇을 했다”라고 말씀합니다(잠언 8:30).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말씀합니다(잠언 8:31).

이렇게 신적 속성을 가진 ‘지혜’가 우주의 창조보다 먼저 있었고, ‘지혜’를 수단으로, ‘지혜’의 도움을 얻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데 어째서 첫 번째 창조 이야기 첫 문장에는 ‘지혜’가 빠졌을까요? 이 문제는 창조의 근원으로 ‘지혜의 존재’를 밝히는 《잠언》을 통해 똑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잠언 8:22). 《잠언》에도 《창세기》 첫 문장과 똑같은 ‘한 처음에’를 뜻하는 히브리어 ‘베레쉬트’(רֵאשִׁ֣ית)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유대 철학자 중에 《창세기》 첫 문장의 ‘한 처음에’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비유적으로’ 해석한 인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혜’가 다른 ‘많은 이름’(한처음, 형상, 하느님의 모습)을 가졌다고 해석한 인물이 있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인 ‘필론’(Philon Judaeus, BC15-AD45)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로와 동시대 사람이지만 그의 철학은 초대 교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사용해 《창세기》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정도로 유대 전통과 그리스 철학에 능통한 유대인 철학자입니다.

고대 성경 주석의 하나인 ‘타르굼’(성경 본문에 해석을 덧붙여 번역한 고대의 성경 주석서)도 ‘한 처음에’를 ‘지혜’로, 지혜가 우주보다 먼저 ‘선재’(先在)했다고 번역했습니다.

지혜와 함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고 완전하게 하셨다. – 조각 타르굼(Fragment Targum) 창세 1:1

한처음에 지혜와 함께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 네오피티 타르굼(Neofiti I Targum) 창세 1:1

그리스도교는 그들의 이런 해석을 참고합니다.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고(지혜의 선재성), 창조의 근원이며, 창조자로서 창조를 도운 ‘지혜’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처럼 ‘창조신앙’에 따르면 우리는 ‘창조 이전’의 영원한 상태도 고백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창조 이전부터 무한한 사랑의 친교 속에 존재하시는 영원한 공동체이셨습니다. 저의 지혜가 짧아서 창조 이전(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그 ‘영원한 상태’(특히 무시간적 상태와 영적 존재들의 창조)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처럼,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눈에 보이는 우주를 ‘시간과 함께’(cum tempore) 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익숙하게 쓰고 있는 ‘창조’란 단어에 관해 질문할 차례입니다. ‘창조’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히브리적 사유’에서의 ‘창조 개념’에 관해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창조’라고 하면 이전에 없던(無) 뭔가를 처음으로 새로 만든(有) ‘신(神)적인 용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creation out of nothing)라고 ‘정의’해 왔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영원부터 존재하는 질료와 형상)이나 고대근동의 신화적 우주관(바빌론 창조신화의 마르둑과 티아맛의 전쟁)에 나타난 ‘신들’과 달리 하느님은 ‘아무런 재료 없이 우주와 그 만물을 창조하셨다’라는 신학입니다.

이 신학의 근거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1-3절을 제시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연구해 보면, 본문은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에 관한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설명해야 할 많은 ‘구문론적인 문제’가 얽혀있습니다. 실제로 구약학자들은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1-3절을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 지금도 논쟁하는 중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을 ‘독립 문장’(창세기 전체의 표제나 서언처럼)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 다음 2절부터는 최초의 창조된 상태에 대한 묘사나 창조의 ‘다음 단계들’처럼 읽히도록 번역해 놓았습니다. 무엇을 의도한 번역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에 고착된 번역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2절 처음이 접속사 ‘베’(וְ, 그리고, 그런데, 동시에)로 시작해서 2번 더 ‘베’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접속사는 말 그대로 단어, 구, 절 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용하는 접속사에 따라 앞뒤 문맥이 대등, 또는 종속처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베’(וְ)는 기능에 따라 ‘그리고’, ‘그런데’, ‘동시에’ 등으로 해석됩니다.

번역에서 생략한(붉은색 밑줄) ‘베’(וְ)를 살려서 ‘종속 접속사’로 번역하면 1절은 ‘독립 문장’(서언)이 아니라 2절의 ‘종속 부사절’(상황절)이 됩니다. 우리말 표준 새번역과 새번역도 1절을 ‘독립 문장’뿐 아니라 ‘종속 부사절’처럼 번역할 수도 있음을 여백에 ‘난외주’로 달아놓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Star Starry Sky Galaxy Milky Way Universe Night

어떻습니까? 우리가 읽어 온 익숙한 번역과는 느낌이 다르지요?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도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 처음이었다”로 옮길 수 있다고 여백에 ‘난외주’로 달아놓습니다. 그렇지만 2절을 1절의 ‘주절’처럼 해석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2절 처음에 나오는 접속사 ‘베’(וְ 그리고, 그런데)가 주절(독립 문장)이 되려면 3절처럼 접속사 다음에 곧바로 ‘동사’가 나와야 하는데 ‘그 땅’(האֶרֶץ)이라는 ‘명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1절을 ‘독립 문장’(서언)으로 번역하고, 2절을 시작하는 접속사 ‘베’(וְ)와 ‘땅’(אֶרֶץ, 에레츠)에 붙어있는 ‘정관사’(ה, 하), 그리고 2절에 2번 더 나오는 접속사 ‘베’(וְ)를 살려서 번역하면 2절은 1절에 붙어있는 상황 설명이 됩니다. 3차례에 걸친[접속사 ‘베’(וְ)가 3번 나오기에] ‘부연 설명’, 즉 ‘창조하기 이전 상황이 이랬다’라는 ‘종속 부사절’(삽입절)이 됩니다. 다시 말해 2절은 창조하고 난 다음의 단계들로 볼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절은 ‘독립 문장’(창세기 전체의 표제나 도입문장)이 아니라 2절까지 연결됩니다. 2절은 ‘창조했다’라는 1절의 ‘다음 단계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창조하기 이전 원시적인 혼돈 상황을 설명(전제)하는 2절까지가 1절과 하나로 연결된 문장입니다. 지금까지 설명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이다. (그런데) 그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혼돈)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으며(공허), (그리고)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리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저를 가르치신 고대근동어 학자인 선생님은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 처음에”로 번역하셨습니다. 제 선생님의 해석이 가장 좋은 해석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하늘’은 ‘둘째 날’(창세 1:6-8), ‘땅’은 ‘셋째 날’(창세 1:9-13)에 가서야 만드신 것으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절들을 통해 1절이 ‘독립 문장’(서언)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과 땅’을 만들기 전 이야기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이렇게 1절이 ‘종속절’이고, 3절 앞에 있는 2절이 1절에 대한 ‘세 번’(‘베’라는 접속사가 세 번 나오기에)에 걸친 부연 설명의 ‘삽입절’이라면, 주절은 3절부터이고, 창조의 시작은 독립 문장(서언)으로 번역한 1절이 아니라 3절부터인 셈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 상황이 1, 2절과 같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처음으로 창조행위를 하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정확히는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빛이 있기를 원한다. 그랬더니 빛이 생겨났다”입니다. 이렇게 창조의 첫 번 행위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첫 문장을 ‘독립 문장’(전체의 표제, 대명제), 또는 ‘종속절’로 번역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유에서 창조’가 될 수도 있고, ‘무에서 창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1절을 ‘이미 완료된’ 창조상태, 그것도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우주 전체’(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라고 하면 한반도 전체를 가리키듯이)가 하느님의 피조물임을 신학적(신앙적)으로 장엄하게 선포하는 ‘독립 문장’(서언, 대명제, 전체의 표제)으로 번역한다면, ‘무에서 창조’라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됩니다. 뒤따르는 문장들(2절부터 2장 4절a)은 자연스럽게 창조의 다음 단계들에 관한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1절을 종속 부사절, 2절을 부연 설명의 삽입절로 해석하면, 3절이 비로소 창조의 시작인 ‘주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빛을 창조’하시기 이전인 2절은 ‘이미 있었던 그 땅의 원시적인 혼돈상태’가 전제됩니다. 즉 그 땅은 ‘혼돈’(히브리어로 토후 תֹּהוּ, formlessness, confusion)과 ‘공허’(히브리어로 보후 בֹּהוּ, emptiness)로 완전히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둠’(히브리어로 호세크 חשֶׁךְ, darkness)과 ‘깊음’(깊은 물, 히브리어로 테홈 תְּהוֹם, deep, sea, abyss)도 완전히 뒤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기운’이 ‘그 물’ 위에 ‘휘돌고 있는’ 상태입니다.

‘휘돌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메라헤페트’(מְרַחֶ֖פֶת)는 동사 ‘라하프’(רָחַף)의 분사형입니다. 이 동사는 <성경>에 단 3차례(창세 1:2; 신명 32:11; 예레 23:9)만 쓰였기에 정확한 뜻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명기》에는 어미 독수리가 둥지 위에서 날개를 ‘파닥거리는’ 활력있는 동작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했고, 《예레미야》는 뼈마디가 ‘떨린다’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종합하면 하느님의 기운이 둥지 위의 독수리처럼 그 물 위에 맴돌며(hovering) 진동을 일으키는 동작을 하는 상태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 즉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데, 원시적인 혼돈 상태인 ‘어둠’과 ‘깊음’은 누가 창조했을까요? 분명 ‘빛’을 창조하시는 말씀은 있는데, ‘어둠’을 언제 창조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또 ‘그 물’은 도대체 언제 창조된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궁금이 있는데 본문에는 그런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1절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1절도 그냥 ‘하늘’이 아니라 ‘그 하늘들’(당시의 하늘 관이 반영)과 ‘그 땅’이라고 ‘정관사’(명사의 의미를 한정하고 특정하는)가 붙어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늘과 땅’에 ‘정관사’가 붙은 이유를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하늘과 땅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정관사’를 붙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전하는 2장 4절b의 ‘땅과 하늘’(순서가 이렇게 다릅니다)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것에 정관사를 붙인다는 그들의 설명이 곤란한 지점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과학적 사실 보도’가 아닙니다. 우주의 기원을 연대적으로 서술한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창조 이야기의 목적은 하느님께서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현대의 과학이론을 통해 증명해야 진리가 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현대 우주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138억 년 전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갇혀 있던 작은 점으로부터 우연한 ‘대폭발’(Big Bang)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현대 우주론에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한 처음에’가 맞아야 안심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며, ‘과학’이 <성경>의 진리성을 판별하는 기준일 수도 없습니다.

<성경> 첫 장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는 다른 신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일차적으로 유배의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제사장들이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나라가 망해버린 보잘것없는 포로민이 ‘그 당시의 지식’과 ‘세계관’을 토대로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이 온 누리의 창조주시라는 ‘믿음’을 ‘고백의 언어’로 표현한 ‘신학 이야기’입니다.

절대 강국 바빌론으로 대표되는 고대 근동의 신들과 달리 자신들의 하느님이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의미심장한 ‘질서’로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세계의 책임 있는 ‘대리자’로 세우신 ‘전능하신 창조주’시라고 선포하는 ‘믿음의 이야기’입니다. 그 창조의 하느님께서 귀양살이 중인 자신들을 구속하여 ‘약속의 땅’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말씀하실’ 것이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말씀하실 분’이라는 ‘믿음’을 ‘고백의 언어’로 표현한 ‘신학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첫 장부터 하느님의 백성에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호소하는 ‘믿음의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과학의 뒷받침 없이도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지혜를 주는(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간직한) ‘생명의 책’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는 ‘진리의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기원과 현재와 미래가 창조주 하느님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자각시키는 ‘깨우침의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 서로와 자연이 ‘복’ 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처럼, 서로 연결된 ‘생명공동체’로 함께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계시의 책’입니다.

분명 이러한 <성경>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신학은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을 교리로 가르칩니다. 저도 교리적으로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 따르면 우주와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자체가 ‘본래적’이지 않습니다. 선재하시는’(先在, pre-existence)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발적인 ‘창조’와 함께 ‘시간’과 ‘공간’은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갇혀 있던 작은 점으로부터 우연히 폭발하여 서로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고 현대우주론이 밝히고 있는 이 ‘우주’는 과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결코 ‘우연히’(저절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주와 만물은 ‘목적’과 ‘계획’을 간직하신 하느님의 자발적인 사랑과 은총 속에서 ‘시작’된 피조물입니다. 우주와 만물은 창조주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만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주와 만물은 존재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창조주 하느님께 의지합니다. 창조주와 그 대상 사이에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를 통해 시작된 우주는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으나(2베드 3:7) 하느님만은 필연적인 존재이시고 영원하십니다(이사 44:6; 48:12; 묵시 1:17; 22:13). 하느님은 창조하신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계시며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신 분입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우주 만물은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선포하신 우주 만물을 지탱하시고, 보호하시며, 지금도 섭리로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우주와 만물, 특히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그 존재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할 사명과 거룩한 책무(특히 예배와 창조세계의 보존)가 있음을 창조신앙을 통해 우리는 고백합니다(창세 1:26-28).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창조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우주와 그것의 존재양식인 시간과 공간의 ‘출발점’입니다. ‘우주’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 되었습니다(마카하 7:28).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이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더라도 그 신학을 교리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첫 번째 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구문론적인 문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지어내셨다’(창조하셨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바라’(בָּרָא)를 끌어들이는 일은 더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창조하다’라는 뜻을 가진 ‘바라’(בָּרָא)라는 동사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는 《창세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바라’(בָּרָא)라는 동사의 ‘주어’(주체)는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만들다’를 의미하는 다른 단어들, 가령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아사’(עָשָׂה, 만들다, 행하다, do, make, accomplish, 창세 1:7,11,12,16,25,26,31,2:2)와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야차르’(יָצַר, 형태를 빚다, 만들다, form, fashion, 창세 2:7,8,19)는 ‘인간’도 주어가 될 수 있지만 ‘바라’(בָּרָא)만은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단어는 언제나 ‘독점적’으로 하느님의 창조행위에만 쓰일 정도로 특별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단어만 ‘무에서의 창조’라는 개념을 갖고 있고, ‘만들다’라는 다른 동사들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를 시작하는 2장 4절b, “야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에서 ‘만들다’라는 동사는 분명 ‘아사’(עָשָׂה)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히브리적 사유’에 따르면 본문은 ‘완전한 무(無)에서 창조’를 논증하거나 강조하려는 목적의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에서 도출할 수 있는 ‘히브리적 창조의 개념’은 우리의 생각과 차이가 납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은 ‘히브리적’(성경적)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철학’(플라톤, 영지주의, 오리겐주의에 대항)에 맞선, 그러면서도 위에서 언급한 유대 철학자 ‘필론’(Philon Judaeus, BC15-AD45)처럼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산물’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는 우리가 교리적 논증으로 제시하고픈 목적과 달리 ‘첫 번째 창조 이야기’가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은 우주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만물의 제 1원인(Prima causa), 또는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 The Unmoved Mover)로 상정합니다. 제 1원인이라 하더라도 ‘신’(神)은 자유롭게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영원부터 이미 존재하는 ‘질료’(質料)를 가지고 영원부터 존재한 ‘형상’(形相, 이데아)에 맞추어 세상을 만드는 ‘우주의 조성자’입니다. 세상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자신이 가진 ‘질료에 제한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신’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없습니다. ‘플라톤’이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훗날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는 창조된 물질의 세계를 ‘악’으로 보았습니다.

 

‘부동의 동자’는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유출하는, 존재케) 하는 ‘일자’(一者), 즉 ‘신’(神)이라는 뜻입니다. 우주 만물은 ‘일자’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되어(흘러나와) ‘계층적’으로 존재합니다. 우주 만물의 기원이 창조가 아니라 ‘필연적인 유출’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비물질적일수록 상위이고, 유출의 제일 하위에 ‘물질세계’가 존재합니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로 대변되는 ‘유출설’입니다. ‘일자’와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흘러나와 존재하게 된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일원론적인 사유이자 ‘범신론’입니다.

‘플로티누스’의 유비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신의 자기결정이나 자발적인 창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영원히 충만한 분출인 ‘일자’로부터 우주 만물은 ‘필연적’(숙명적)으로 흘러나와(유출되어) 우연성을 가지고 존재할 뿐입니다. 일자는 만물을 유출하지만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근원이자 만물이 회귀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고백하는 ‘하느님’과 ‘창조’는 그리스 철학과 다릅니다. 하느님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와 달리 그 무엇에도 제한받지 않으시고, 전능하시며, ‘자발적인 창조주’이십니다. ‘물질’은 하느님처럼 이미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우주와 만물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플로티누스의 일자’처럼 피조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절대타자’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월자이시나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섭리 속에서 피조물과 긴밀히 직접 관계하십니다. 하느님만 필연적인 존재이시고, 우주와 만물은 하느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 즉 하느님의 의도 속에 창조된(분명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피조물’입니다. 우주 만물은 이제와 영원토록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정말이지 창조된 우주는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전체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 철학과 다른 ‘무에서 창조’를 교리로 믿더라도 본문은 ‘완전한 무(無)에서 창조’를 논증하려는 목적의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히브리적 사유에서의 창조 개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근거는 이 거룩한 이야기에서 ‘창조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바라’(בָּרָא, 창세 1:1,21,27) 못지않게 중요한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가 ‘바달’(בָּדל, 나누다, 갈라놓다, divide, separate)이라는 동사입니다(창세 1:4,6,7,14,18). 이 단어가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창조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 하늘과 위에 있는 물과 하늘 아래에 있는 물, 밤과 낮, 밝음과 어둠을 ‘말씀’으로 ‘질서’ 정연하게 나누십니다.

이 단어 속에 ‘히브리적 사유에서의 창조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를 통해 그들은 오늘의 우리처럼 형이상학적으로 ‘무에서 창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하느님께서 다 창조하셨다’라는 ‘무에서의 창조’를 말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혼돈’(무질서)에 ‘질서’(ordering)를 부여하고, 이미 있지만 뒤죽박죽 뒤엉켜있는 물질세계에 개입하시어 ‘나누는’(divide) 하느님의 구체적인 ‘분리’(separate) 활동을 ‘창조’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유는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무질서하게 뒤엉켜있는 것을 ‘분리하여’(나누어, 구별하여, 경계 지어서),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배치하는 일이 창조라는 개념입니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을 ‘본래의 자리’에 있게 하시는 ‘구체적인 활동이 창조’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창조의 정점인 인간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뭔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 즉 ‘무에서의 창조’를 뜻하는 ‘바라’(בָּרָא)가 그들(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제사장들)이 생각한 창조의 중요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한 개념이라면 이미 그들은 우리가 궁금해했던, ‘어둠’과 ‘깊음’과 ‘그 물’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바라’(בָּרָא)는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분명 ‘창조’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없는 것을 있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창조’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개념은 무에서의 창조보다는 ‘나누고, 구별하고, 경계를 짓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신학으로 선포하는 ‘무에서 창조’는 성경적 근거(마카하 7:28, 로마 4:17; 히브 11:3)가 그렇게 풍부하진 않습니다. 게다가 ‘무에서 창조’는 고도로 ‘사변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신학은 하느님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절대타자’이신 하느님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변적 신학에 빠지기보다 차라리 성경이 말씀하시는 만큼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새기는 일이 지혜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히브리적 창조 개념)에 따르면, 하느님의 위대한 창조 행동은 ‘분리’(seperation)로 진행됩니다. ‘나누기’ 위해서 하느님은 창조하십니다. 특히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고대 바빌론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처럼(마르둑과 티아맛) 다른 신들과 힘들여 전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있기를 원하신다”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그 빛을 보시며 ‘좋다’라고 승인하십니다. 창조하신 그 빛이 ‘참 예뻤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둠은 나쁘다’라는 가치 판단이 본문에 없다는 점도 주의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나누었다’는 그 자체입니다. ‘빛’(오르 אוֹר)과 ‘어둠’(호세크 חשֶׁךְ)을 나누고, ‘낮’(욤 יוֹם)과 ‘밤’(라일 לַיִל)을 나누어 ‘하루의 단위’를 창조하시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참고로 공동번역은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라고 의역했지만, 원문에는 “‘저녁’(에레브 עֶרֶב)이 되었다. 그 다음에 ‘아침’(보케르 בֹּקֶר)이 되었다”입니다. ‘밤’과 ‘저녁’은 다른 단어이고, ‘낮’과 ‘아침’도 다른 단어입니다. 쓴 단어가 분명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의 첫 번째 행동으로 ‘말씀’하시면 성취되고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피조물이 지닌 아름다움에 감탄하십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도, 해와 달과 별들도, 자연의 어떤 사물도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섬기던 것처럼 숭배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겨난 보시기에 ‘참 좋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분리’ 개념을 제시하는 ‘창조 이야기’를 ‘주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성사’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오늘 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례’야말로 우리의 ‘한 처음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초대에 응답해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연 ‘한 처음에’가 ‘세례’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심연)의 세상 속에 있던 우리의 삶에 새로운 ‘생명의 질서’가 태동한 날이 ‘세례’입니다. 우리를 ‘빛(낮)의 자녀’로 ‘빚으시는’ 거룩한 성사가 ‘세례’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의 세상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나누시는’ 거룩한 성사가 ‘세례’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으로 뒤엉킨 이 세상에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성령’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으로 뒤엉킨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세례성사를 통해 ‘빛’과 ‘낮’과 ‘밝음’의 천국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의 세상으로부터 부르시어 우리의 본래 자리인 하느님 나라의 자녀로 ‘창조해가시는’ 영성 이야기로 읽어야 바로 읽는 것입니다. 저 바깥세상 우주보다도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지금도 빚어가시는’ 거룩한 이야기로 읽어야 창조 이야기를 바로 읽는 셈입니다.

이처럼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서두가 선포하는 핵심은 시간과 공간, 우주와 만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구원의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어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시는 ‘창조의 하느님’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야기의 서술 방식은 고대근동의 보편적인 문학 방식, 즉 ‘깊음’(깊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테홈’과 메소포타미아 최초 혼돈의 여신인 ‘티아맛’은 어원이 같습니다)이라는 괴물과의 싸움을 소재로 한 고대 바빌론 창조 신화와 밀접한 관련(오히려 독특한 점이 드러납니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서두가 가리키는 바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당연히 형이상학적 사유에 익숙한 이들에게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존재의 시작’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습니다. ‘자기를 제한’하시어 ‘무(無)로부터’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자기비허의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는 연속성이 없는 ‘절대타자’(Absolute Other)이신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그런 형이상학적 사유자들을 위해 기록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브리적 개념으로 말하면,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갈라놓다’(분리하다, 나누다, 히브리어 바라에는 이런 뜻도 있습니다)라는 ‘구체적인 구원의 행동’으로 지금 여기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누다’라는 ‘구체적인 구원의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시어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증언하는 또 하나의 가장 적절한 본문은 《출애굽기》에 있습니다.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질문에 “나는 곧 나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십니다(출애 3:14). 물론 모세는 그 이름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 철학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에 맞서 주장한 것처럼,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타자’로서의 사변적인 하느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별 볼 일 없던 떠돌이들인 선조들을 끌어오십니다. 그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행동’을 하신 분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말입니다(출애 3:15).

우리 생각에 그들의 됨됨이는 어떻습니까? 훌륭한 인품의 사람들이라 말씀하시기 전에 《창세기》를 좀 더 꼼꼼히 읽어보십시오. 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형편없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부인을 ‘누이’라고 팔아먹을(거짓말할) 정도로 못난 남편들(아브라함과 이사악)이었습니다(창세 12:10-20; 20:1-18; 26:6-11). 심지어 자기 딸이 ‘겁탈’을 당했는데도 대응하지도 않고 자기 살길만 찼던 못난 아버지(야곱)였습니다(창세 34:1-3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결함투성이 그 인물들의 하느님으로 자신의 존재를 기꺼이 규정하십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행동하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시며 ‘영원히 그 이름’으로 불리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하느님은 허물투성이 그 인물들을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깊음의 세상에서 ‘불러내시어’(갈라내시어, 분리하시어) 그들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인 당신의 백성으로 끝내 빚어가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하시어 그를 ‘믿음의 조상’의 자리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이사악을 ‘순종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불리도록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편을 들어주시고, 그와 함께하시며 ‘이스라엘’(하느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로 불리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순종의 사람’, ‘이스라엘’, 그것이 ‘본래 그들의 자리’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결함 많고 형편없는 인물들의 삶 안에서 하느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시며 당신의 ‘형상’을 그들 안에서 성취하십니다(창세 1:26-27). 그리스 철학의 ‘신’(神) 개념처럼 ‘절대타자’로 초월해 계신 분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며’, ‘행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 복을 가져오는 ‘본래의 존재들’로 빚어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성경>에 기록된 고대의 먼 나라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바로 ‘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도 그들처럼 못난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허물 많은 인물은 우리 자신들이고, 그들의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서도 기꺼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고 편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다고 편애하는 분이십니다. 많은 허물이 있고, 보잘것없는 우리지만, 이런 ‘우리를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볼 때 이런 하느님은 전혀 ‘신’(神) 같지도 않고 ‘볼품’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하느님은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 철학에 물든 이들이 보기에 ‘결함투성이 인간’과 밀접히 관련을 맺으시는 하느님은 전혀 흠숭할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함투성이인 우리’,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혼돈에 빠진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켜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연약한 우리 삶에 함께하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하느님을 믿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친히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느님,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의 하나처럼 ‘세례’를 받으시고 입장의 동일함을 취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계신 ‘절대타자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물과 한숨과 병과 고통을 똑똑히 보시고, 찾아와 주신 하느님을 믿습니다(출애 3:16). 우리를 눈물과 한숨과 병과 고통으로부터 해방하시어(갈라내시어) ‘약속의 땅’, 즉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실 ‘구원의 하느님’을 믿습니다(출애 3:17). 한마디로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 같은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구원하시는 ‘창조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세례’를 기억하는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시어’(갈라내시어, 나누시어) 우리를 ‘본래의 자리’(질서)로 되돌리시고, 지금도 ‘거룩한 복의 자녀’로 빚어 가시는 창조의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연약한 우리와 오늘도 함께하시며 구체적으로 구원의 행동을 하시는 창조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혼돈(무질서)을 질서로 바꾸시고, 공허한 마음을 사랑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창조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어둠에 참 빛을 가져다주시어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고통 가득한 인생의 심연에 생명의 생수를 가져다주신 창조의 하느님을 말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특히 새해를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창조신앙으로 기쁘게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29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연 현상’인 ‘폭풍’과 그로 인한 ‘홍수’(거센 물결)를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적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킵니다. 특히 폭풍 속에서 들리는 ‘천둥소리’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미합니다. ‘폭풍’과 ‘천둥소리’는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자연(피조물)과 역사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며, 거룩한 백성에게 가르침을 주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서는 ‘그 물’(심연) 위에 휘돌고 있던 ‘하느님의 기운’(영, 바람, 숨)과 ‘빛’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가득했습니다. 여기에 상응해 이 ‘시’에는 창조주 하느님의 이름(야훼, 원문에는 18번)과 창조과정에서 울려 퍼진 하느님의 목소리(원문에는 7번)로 가득합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피조물과 관계하고 계심을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미하기 위해 공동체를 모이라고 초대한 다윗은 영원한 왕이신 하느님께 힘과 평화를 받아 누리라고 축복하면서 시를 마무리합니다. 물론, 피조세계에 울려 퍼진 그 목소리와 예수님의 세례 후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천상의 노래’가 상응합니다.

2독서 《사도행전》은 에페소 교우들이 성령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에페소는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에 이어 그리스도교가 전된 세 번째 중심입니다. 바울로는 거기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 알았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신도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준 목적을 주의시키면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명백히 구별합니다. 그들이 바울로의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을 세례를 받습니다. 바울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12명의 신도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 이야기처럼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으로 증언한 세례자 요한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오직 성령만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교회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성사한 신자답게 성령의 임재 속에 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위대한 증언’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하나는 ‘땅’에서 있었던 증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있었던 증언입니다. 어떤 증언이 중요할까요? 둘 다 중요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의 증언은 땅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증언은 사람의 증언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예수님의 세례 때 있었던 증언’입니다. 중요한 두 구절을 꼽으라면, 전반부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고, 후반부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증언부터 보겠습니다. 그의 증언은 예수께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창조)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한 세례자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간’ 숭고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잘 걸어간’ 사람입니다. 잠깐 흔들리기는 했어도(마태 11:2-6)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지요.

실제로 《루가복음》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야 할 인생길이 정해져 있었다’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줍니다(루가 1:15-17).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본래부터 있어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라고 천사를 통해 전해줍니다. 그의 아버지를 통해 ‘그가 가야 할 길이 선포되었다’라고 전해줍니다(루가 1:67-79). 그의 아버지를 통해 ‘그가 본래부터 있어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라고 전해줍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자신이 가야 할 길’,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발견했다’라고 전해줍니다(루가 1:80). 종교적 상징에서 ‘광야’는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을 발견하는 절대고독의 장소’입니다. ‘본래의 자기’를 발견하는 ‘고독의 성소’를 상징합니다. 한 단계 더 높은 의식의 수준으로 진입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영적 고독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길,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발견한 후에 꼿꼿이 ‘그 길’을 걸어간 숭고한 예언자입니다(루가 3:2-18; 마르 6:14-29).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가야 할 인생길이 정해져 있다’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까?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가 있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저마다 가야 할 그 길, 자신의 가능성, 자기 역할을 명령받아 이 세상에 ‘아기’로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르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 속에 있거나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죄’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핫타트’​이고, 그리스어는 ‘하마르티아’입니다. 둘 다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녁’은 일차적으로 ‘율법’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느님의 형상’, ‘기준’, ‘목표’, ‘길’을 뜻합니다. 따라서 ‘죄’란 간단히 말하면, ‘본래의 자리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느님이 주신 ‘자신의 가능성’에서 벗어난 상태(어둠)입니다. ‘자신의 최선’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공허)입니다. ‘자기 역할’을 못하고 있는 상태(혼돈)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 안’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본래의 그 자리’(좌표, 질서)에 있지 않고 ‘벗어난 상태’(혼돈)입니다. 인생에서 해야 할 ‘자기 사명’(일)을 모르는 상태(심연)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결정적인 결함(瑕疵)이고, 가장 근본적인 ‘죄’입니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뽑혔습니다. 자신이 번 돈으로 2019년, 강원도 춘천에 170억원을 들여 손흥민 축구공원까지 설립했습니다. 체육공원을 설립하기 전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170억으로 건물을 사면 너와 나는 앞으로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돈을 대한민국 축구산업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면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처럼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나가는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손흥민 선수는 이런 아버지의 권유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축구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손흥민 선수가 ‘축구의 길’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인생길 위에서 살고 있다면 어땠을까요? 축구가 그의 ‘본래의 자리’인데 거기서부터 벗어나 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자신의 길과 자리에서 ‘벗어나’ 어둠 속에 있는 삶을 총칭해서 《성경》은 ‘죄’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는 삶,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아는 삶,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을 발견하는 삶, 그것이 모든 깨달음과 성찰의 시작입니다.

앞으로 세례자 요한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점검하도록 하십시오.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 있지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발견하고, 충실히 ‘그 자리를 지켜나가려는’ 숭고한 삶의 태도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영적 지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에 대한 ‘영적 안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어둠과 혼돈에 빠진’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유일한 힘(빛)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라고 고백합니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어둠과 혼돈 속에 빠진’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돌이키는 유일한 힘’은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라고 고백합니다. 초대교회가 그것을 보여준 공동체입니다. 2독서 《사도행전》에서 들은 것처럼,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 보여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혼돈과 공허, 어둠과 탐욕, 분노와 어리석음의 심연에 빠진 ‘거짓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거듭난 존재’가 되는 유일한 힘은 ‘성령의 지속적인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빛의 공동체’가 초대교회였습니다. 성령을 통해 인간 전 존재를 새롭게 빚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전하는 일을 가장 가치 있다 믿은 ‘선교공동체’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만이 자신들을 다른 종교나 철학으로부터 ‘갈라내는’(나누는) 유일한 근거요, 희망이라고 믿은 ‘생명공동체’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이 인생의 전부인 이들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만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세례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 우리 삶의 구원자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례를 받았다’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상에 동조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릅니까? 우리는 진정으로 교회를 교회이게 하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것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오늘은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길’을 발견하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발견하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길을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기에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했기에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본래 누구인지’에 대한 ‘일깨우심의 출발’이 ‘세례’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일깨우심의 출발’이 ‘세례’입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인생길’, ‘그 본래의 자리’에 대한 ‘일깨우심의 출발’이 ‘세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입문하는 ‘첫 출발의 성사’인 ‘세례’가 갖는 무게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바빠서 우리는 자신의 세례에 대해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하면서, 또는 누군가의 세례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다시 영혼이 일깨움을 받습니다. 내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상기하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나’라고 하는 한 존재가 갖는 ‘가치’, ‘의미’, ‘무게’가 드러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보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허무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진실이 빛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죄인’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인받게 됩니다.

이 ‘본래의 자리’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난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께 ‘묻고 들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며 ‘교만’을 떨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주님께 묻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자기 앞의 생에 대해 고요히 묻고 듣는 ‘기도의 시간’은 ‘세례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 ‘세례’는 1독서 《창세기》에 나오는 ‘한 처음’, 즉 태초와 같은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그때부터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 빚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새로 빚으실 때 우리는 무엇에 ‘의미’를 두고, 무엇을 ‘가치’로 삼아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무십년’일 뿐인 어두운 세상 나라의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우리를 하느님께서 새로 빚어주실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삶의 의미와 가치로 삼아 그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숭고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우리를 하느님께서 새로 빚어주실 때 자기의 뜻과 욕심만을 성취하려는 이기적인 삶에서 돌아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길 위에 있게 됩니다. 세상의 ‘돈’과 ‘권력’이 주는 ‘거짓된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시는 ‘참 자유’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간 이들이 마침내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 노릇’하며 살게 된다는 것이 ‘세례성사’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세례받을 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이렇게 노래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 마르 1:11

<시편 29편>에서 다윗이 언급한 폭풍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와 예수님의 세례 후 하느님께서 들려주신 ‘천상의 노래’가 절묘한 대비를 이루며 감동을 더 합니다. 여러분도 세례 때 이 ‘천상의 노래’를 들었습니까? 듣지 못했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듣지 못했어도 하느님은 하늘에서 분명 그렇게 노래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주파수대를 ‘가청주파수’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청주파수대’는 약 20Hz~20,000Hz(헤르츠는 1초 동안 진동하는 횟수를 의미합니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가청주파수대보다 ‘고음’으로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못 듣습니다. 제 생각에는 하느님이 우리의 가청주파수대보다 ‘고음’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기쁜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당신의 자녀로 태어나는 그 순간이 너무 기뻐서 그만 목소리가 ‘고음’이 되셨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세례받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제’를 통해 ‘세례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새 이름’을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길,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발견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 아래에서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걷겠다고 따라나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시편 85:10-11). 지금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다른 길을 엿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본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잘 있습니까? 혹시 그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에 있지는 않습니까?

‘성찬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성찰은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 길’을 찾고, 충실히 그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발견한 사람, 자신이 ‘걸어야 할 그 길’을 발견한 사람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그 길’에 쏟아부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예언을 성취한 ‘세례자 요한’처럼 ‘새 시대의 도래’를 위해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는 오늘, 자신이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성찰하는 성찬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신이 ‘가야 할 그 길’에 대해,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성찬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년 후, 5년 후, 10년 후만이 아니라 평생토록 우리가 지켜야 할 본래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자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라는 자리입니다. 1년 후, 5년 후, 10년 후만이 아니라 평생토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야 할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도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물으실지 모릅니다.

너는 네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잘 살았는가? 너는 너에게만 주어진 그 유일한 사명(使命)을 알았는가? 네가 걸어야 했던 그 길을 알았고,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걸었는가? 네가 해야 할 생각과 말과 행실을 다하면서 살았는가?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주님의 세례축일에 우리가 깨달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말씀의 성육신과 주님의 세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너는 하느님의 딸이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다. 나만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딸)이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진실을 기억하고 살라고 일깨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줄 누군가를 찾아 여전히 바깥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실을 자기 안에서 발견했다면, 진정으로 이 진실을 받아들였다면, 아마 세상은 벌써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자신이 사랑이신 분의 자녀라는 진실을 발견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벌써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이 사랑 가득한 세상이 아닌 이유는 세례성사 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이 진실을 자기 안에서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면서도 진정으로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진실을 어디서 찾고 있느냐? 네가 본래 있어야 할 자리, 네가 걸어가야 할 그 인생길을 어디서 찾고 있느냐? 다른 사람 쫓아다니지 말고, 네 안에서 찾아라. 다른 사람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 말고 네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라. 네 안에서 진실을 찾아라. 네가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면, 네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의미가 없다.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 공공연히 선포하신 이유를 뭐라고 가르칩니까? <복음서>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게쎄마니’에서 바치신 기도 속에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 마르 14:36

예수님의 이 기도는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으로 꾸준히 아버지께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기도였습니다. 게쎄마니의 기도를 묵상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그 과정을 똑똑히 보아라. 내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한 그 길을 똑똑히 보아라. 나는 나의 십자가를 통해 이렇게 됐다. 너도 네가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의 자녀가 아니라 내가 이미 너를 성령으로 아버지의 자녀로 태어나게 했음을 네 행실로 증명하거라. 너의 길, 너의 십자가를 찾고, 그것을 짊어지고 나를 따라라. 네가 하느님의 딸(아들)이야. 네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해.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다. 하느님의 너희의 아버지다”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머리로 파헤치는 데만 열심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증명해 가신 그 십자가의 길과 과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찾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그 실천의 길(에페 5:1-10) 위에 있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해 놓은 ‘십자가 해석’을 붙들고 머리로 공부하느라 소중한 자기 인생의 시간을 허비해 갑니다. 남이 해 놓은 말씀 해석을 붙들고 앉아서 자기 인생을 수준 낮게 허비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한테 있는 십자가를 찾고,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가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증명해 가는 과정이자 길입니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게쎄마니’에서 바친 예수님의 ‘순종의 기도’처럼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 거룩한 한 말씀과 그 ‘십자가를 짊어짐’이 결국 ‘세례’에서 들려온 ‘천상의 노래’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었고,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순종의 기도’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 주시지 않는 하느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심연 같은 불평 속에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오히려 내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실만하고, 마음에 드실만한 ‘빛의 자녀’로 살고 있는지 먼저 돌아보십시오(에페 5:1-10). ‘구원’은 내 마음에 드는 하느님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나로 빚어져(창조되어) 가는 데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내 기도대로, 내 뜻대로 응답하는 하느님을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말씀해 오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나의 ‘순종’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받은 ‘거룩한 세례’를 온전히 성취하는 삶입니다.

또한 자기만의 십자가를 찾아 걷는 일을 이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세례에서 이미 들려온 ‘천상의 노래’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라고 오늘 마르코는 우리에게 이 거룩한 세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오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육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인 우리를 ‘신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본래의 자리’로부터 벗어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창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를 향한 출발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자녀로 만드는 길의 출발입니다. 비록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으나 이 은총을 감사하며 용기를 냅시다.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의 은총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합시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답게 합당하게 빚어져 가기를 축복합니다. 연약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고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창조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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