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3. 공현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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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동방박사를 별빛으로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참 빛으로 인도하시어 온 인류가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0:1-6
  • 시편 – 72:1-7,10-14
  • 독서 – 에페 3:1-12
  • 복음서 – 마태 2:1-12

공현대축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다 와서 경배하여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왕께’입니다.

오늘은 ‘성탄대축일’ 후 12일 만에 오는 ‘공현대축일’입니다. 먼저 명칭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공현’(公顯, Epiphany)은 그리스어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를 번역한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ἐπιϕάνεια)는 ‘접촉’(on)과 뒷말을 ‘강조’(fitting)하는 전치사 ‘에피’(ἐπι)와 ‘밝게 하다’(lighten), ‘빛나다’(shine), ‘보여주다’(show), ‘나타나다’(appear)란 뜻의 동사 ‘파이네인’(φαίνειν)의 합성어입니다. 고대에는 ‘새벽이 옴’(동이 틈), 전쟁 중 ‘적의 ‘출현’, 도시를 방문하여 위세를 과시하는 ‘왕의 출현’, 특히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신들의 영광스런 출현’에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빛’이 있어야 모습을 볼 수 있기에 ‘빛’과 관련되며, “빛 속에서 확실히 눈에 보이게 나타남”(conspicuous appearing, appearance)을 뜻합니다.

교부들은 ‘공현’이라는 말을 가져다가 ‘성육신’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성탄일’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공현일’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빛’, 즉 공공연하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인도하시어 아기 예수님이 신성한 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십니다. 명칭에 대한 설명은 이만하고 이제 <전례독서>를 보겠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장차 회복될 시온(예루살렘)의 찬란한 미래상(60-62장)에 대한 서문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주전 8세기), ‘제 2이사야’(40장~55장, 주전 539년 이전), ‘제 3이사야’(56장~66장, 주전 537년 이후~510년 경)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더 자세한 설명은 2020. 2. 9. 연중 5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오늘 배정된 1독서 《이사야》는 제 3이사야에 속합니다. 본문으로 시작하는 《이사야》 60-62장은 구약 전체에서 ‘시온의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의 절정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애칭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제 3이사야는 앞 장들(이사 56:9-59:15)에서 암울한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죄’(특히 지도자들의 죄)를 고발하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60장부터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바뀌어 희망을 노래합니다. 고달픈 현실 속에 있는 민족을 향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큰 구원의 일’(새 시대)을 ‘빛’에 비유하여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가져다주실 시온의 완전한 회복’을 힘차게 선포합니다. ‘어둠(고통과 곤고함)의 시간’이 지나고 ‘빛(구원)의 시간’이 왔다는 희망찬 선포입니다. 그야말로 축하의 시간이 당도했습니다. ‘주님의 영광’(빛)이 갑자기 ‘시온 위에 나타나시고’, ‘주님의 구원’(빛)이 갑자기 ‘시온에게 찾아왔습니다’. ‘공현’(公顯, Epiphany), 즉 갑작스런 ‘하느님 영광의 발현’입니다.

그 빛을 받은 ‘시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당당히 일어나 비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반응입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본래 이스라엘은 세계에 빛을 비춰야 할 ‘사명’을 지니고 ‘선택’되었습니다(출애 19:5-6; 신명 7:6-8; 이사 42:6). 하느님께서는 이점을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분명히 하셨습니다(창세 12:2-3). 이스라엘은 그들의 존재가 다른 ‘민족의 운명’, 즉 ‘구원’에 유익이 되도록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한 ‘언약’에(출애 19:5-8; 24:3) ‘불순종’함으로써 ‘존재의 이유’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자신들을 선택했다는 그 진실에 불순종하고 교만해졌습니다. 문화 혼합주의와 우상숭배로 자신들을 더럽혔습니다. 정의보다 불의를 더 좋아했고, 윤리적으로 부패의 길로 갔습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봉사의 책무에 올바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의 빛이 되어야 할 사명에서 빗나갔고, 배타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왕국의 멸망이었고, 바빌론 유배와 디아스포라였습니다.

‘자비의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구원을 위해 친히 ‘개입’하십니다. 그 개입의 시작이 제 3이사야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어둠 속에 있는 시온 위에 빛을 비추심’입니다. 과거에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과 봉사에 실패했으나 이제는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던 ‘시온’이 그 빛을 받아 당당히 일어나 빛을 비춥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민족 사이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시온’으로 돌아옵니다. 명절에 귀향하는 자녀들을 맞이하는 ‘어머니’처럼, ‘시온’은 돌아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함박같이 웃습니다. 더욱이 ‘시온’이 발하는 ‘빛’을 향하여 아직 ‘어둠’(고통과 곤고함) 속에 살던 민족들과 제왕들이 모여옵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오며 귀한 예물들, 즉 금(황금)과 향료(유향)를 싣고 주님을 찬양하며 찾아옵니다. 시온은 ‘구원 얻은 모든 민족의 중심이 되는 영광’을 누립니다. 구원받은 모든 민족이 모여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선택과 온 세상을 향한 이스라엘의 봉사가 비로소 성취됩니다. 이처럼 ‘모든 민족’으로까지 구원이 확장됨(2독서 에페소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것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이라고 밝힙니다)을 예언하는 ‘보편주의’는 본문이 포로기 이후의 기록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장차 회복될 시온의 찬란한 미래상을 예언하는 이사야가 공현대축일 1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그것은 일어나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할 그 시온의 모습이 ‘주님의 교회’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존재가 어둠 속에 살아가는 다른 민족의 구원에 유익이 되도록 하느님께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 역시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태 5:14-16). 우리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고 부르심 받은 교회답게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불신앙과 체념과 절망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거짓과 미움과 분노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무지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욕심과 편견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의 자리에서 일어나 ‘착한 행실’로 어두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의 이유’이자 우리의 사명입니다.

물론, 우리는 빛 자체가 아닙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태양 빛을 받은 달처럼,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작은 빛’일 뿐입니다. 죄의 어둠에 묻혀 있던 우리에게 용서의 참 빛을 비춰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종지만 한 빛’일 뿐입니다.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생명의 참 빛을 비춰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한 조각 빛’일 뿐입니다.

절망의 감옥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희망의 참 빛을 비춰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미약한 빛’일 뿐입니다. 무지의 감옥, 자기만 아는 감옥, 편견과 고집의 감옥, 외로움의 감옥, 질병과 가난과 고생의 감옥,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갇혀 살던 우리에게 진리와 해방과 구원과 치유의 참 빛을 비춰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작은 빛’일 뿐입니다.

반사하는 ‘작은 빛’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 역시 어둠 속에 있는 이웃들에게 자신이 주님께 받은 진리로, 용서로, 사랑으로, 자비로, 희망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빛이 작기에 우리는 서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종지만 한 빛도 서로 모이면 함지박만 한 빛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탓할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본래부터 어둠’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왔습니다. 문제는 언제부터인지 교회마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잃고 점점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늘 1독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임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더욱이 장차 회복될 시온의 찬란한 미래상을 예언하는 이사야가 공현대축일 1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거룩한 탄생’의 기본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이 시나리오(오늘 1독서)에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상징적인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녹여서 ‘거룩한 탄생’ 이야기로 신학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열거하자면 오늘 1독서를 포함해서 ‘발람과 발락’(민수 24:17), ‘미가 예언자’(미가 5:1; 사무하 5:2), ‘솔로몬 왕과 세바 여왕’(열왕상 10:2,10)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신성한 이야기를 통해 마태오는 ‘아기 예수’가 ‘구약을 성취한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이 구원 얻은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을 성취하실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차 회복될 영광스러운 시온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의 예표’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72편>은 왕을 위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가 2015> 373장입니다. 내용을 보면 ‘왕의 대관식’을 위해 지어진 노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노래로써 이스라엘이 현실에서 어떤 왕을 기대하고 있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시인은 약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간직한 왕이 통치력을 올바르게 행사하여 세상에 정의(인권 존중)를 실현하고, 평화가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왕국은 흥망성쇠를 반복하더라도 그의 왕조는 영원하기를 시인은 기도합니다. 왕이 올바르게 통치력을 행사하면, 그 명성이 땅끝까지 이를 것입니다. 그야말로 왕국에는 축복이 넘칠 것이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풀밭에 내리는 단비처럼 땅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의 은덕 만인에게 내리리니 정의가 꽃피는 그의 날에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 넘치리라. – 시편 72:6-7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즉위식’ 때마다 이 노래를 봉헌하며 기도대로 성취되기를 간절히 염원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72편>은 하느님께서 ‘이상적인 왕’, 즉 ‘메시아’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사실, 우리도 성찬례에서 그들과 똑같은 심정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에서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공직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악행과 악습을 막으시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정말로 그들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고, 약한 자의 권리를 세워주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을 펴며, 평화와 정의를 국민에게 안겨주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속 시원히 응답받지 못한 듯합니다. 국민은 지난 4.16 총선에서 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권한을 남용하여 악행을 저질러 온 검찰을 개혁해 달라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짓 뉴스로 국민의 눈과 귀를 호도해온 언론을 개혁해 달라고 압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더는 반칙과 특권이 통용되지 않는 새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집권 여당은 제 1야당과 언론 탓만 하면서 새길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1야당은 자기당 출신의 대통령 2명을 감옥에 보냈으면서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청년들은 차별과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에서 보듯이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여전히 거리로 나와 정의와 인권회복을 위한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영세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의 생계는 갈수록 팍팍합니다. 정말이지 지도자들과 공직자들이 ‘공동선’을 위해 국민들로부터 부르심 받았음을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새 세상의 빛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미 마음에 임한 빛에 의지하여 끈기를 갖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며 지도자들과 공직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특히 시인은 세상의 왕들이 조공과 예물을 바치고 그 앞에 엎드리며, 만백성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라(10-11절) 노래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모든 이방인을 상징하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리는 공현대축일에 <72편>이 배정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독서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이 그 왕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소연하는 빈민과 도움받을 데 없는 약자,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권리를 세워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자비의 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여 모든 민족이 섬기게 될 그 이상적인 왕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한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메시아’이신 주님의 자비로운 통치가 어서 속히 온 세상 위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기도합니다.

2독서 <에페소서>는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심오한 계획’(신비, 복음)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증언입니다. 이전 세대들에게는 이 심오한 계획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성령의 힘을 빌려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하는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바로 그 심오한 계획(신비,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알리도록’ 은총을 받은 ‘복음의 일꾼’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로 자신이 ‘공현의 도구’가 되는 셈입니다.

하느님이 성령의 힘을 빌려 계시해 주신 그 심오한 계획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약속을 나누는 공동상속자와 한 몸의 지체(교회)가 되는 축복입니다(참고 에페 2:14-22). 1독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의 보편성’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라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갈라 3:16) 우리에게 성취된다는 ‘복음’입니다(갈라 3:22,29).

그렇습니다. ‘공현’은 이 ‘심오한 계획’이 ‘계시’ 된 시작일입니다. 물론 ‘십자가’에서 그 ‘심오한 계획’은 완성될 것입니다. 본문이 공현일에 배정된 이유는 《마태오복음》이 증언하는 것처럼 성육신 하느님, 즉 아기 예수의 성탄이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야기입니다. 《마태오복음》은 아기 예수의 방문객으로 《루가복음》처럼 ‘천한 신분의 목동들’이 아니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등장시킵니다. ‘동방’으로 번역한 그리스어 ‘아나톨레’(ἀνατολή)는 ‘해가 뜨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마태오가 신분을 ‘박사’로 번역한 그리스어 ‘마고스’(μάγος,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사제 계급)는 오늘날로 말하면 ‘천문학자’(점성가, astrologer, 賢者)라는 뜻입니다. 문맥에 맞추어 번역하면 ‘구도자들’(求道者)입니다. 참고로 마태오가 다소 긍정적으로 번역한 ‘마고스’(μάγος)를 《사도행전》에서는 ‘마술사’(Magian), ‘마법사(magician)’로 번역합니다(사도 13:6,8).

교회는 그 ‘마고스’들을 <구약>에 예언된(이사 2:2~3; 미가 4:1~2) ‘이방 민족들(만국, 만민,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들’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그들을 ‘왕’들로(이사 60:3; 시편 68:28-30; 72:10) 해석하기도 합니다. 언뜻 드는 생각으로도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의 품위에는 ‘마법사’보다는 ‘박사’나 ‘왕’이 더 어울려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도자들’(求道者)이 누군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교회 전승은 그들의 이름을 ‘멜기오르’(Melchior), ‘카스파르’(Caspar), ‘발타사르’(Balthasar)라고 밝히면서 방문객이 3명이라고 전해줍니다. 특히 ‘발타사르’는 영화 <벤허>에도 등장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우리는 오늘 1독서 《이사야》 때문에 그 ‘마고스’들이 ‘낙타’를 타고 왔을 것으로 상상합니다(이사 60:6). 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실제로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마태오는 단지 그 ‘구도자들’(求道者)이 이스라엘 오른쪽인 ‘동방’(the east, 해 뜨는 곳)에서 왔다고 밝힙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그 ‘동방’이 어디인지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지난 성지 순례 때 예수님이 탄생하신 동굴 위에 세워진 ‘예수 탄생 기념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방문 제한 시간이 오후 3시였는데, 가까스로 들어가서 탄생지 표시가 되어 있는 ‘별’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베들레헴에 있는 이 ‘예수탄생 기념성당’은 서기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때 재건된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서기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베들레헴을 점령할 때 ‘예수 탄생 기념성당’은 파괴를 면했습니다. 이유는 성당 벽에 그려진 동방박사들이 ‘페르시아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동방’은 ‘페르시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우세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유다는 멸망했고, 본토에서 추방당하여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 중에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위로’, 즉 유대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바빌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칙령 때문에 유대인들은 고레스를 ‘메시아’로 고백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습니다(이사 44:28~45:8).

하지만 그는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 칙령으로 많은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그 땅에 남기로 선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5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유대인들은 ‘고대근동’(古代近東) 각지에 흩어졌습니다. 어느 도시인지 특정할 순 없지만 ‘동방’에서(아마도 페르시아 지역) 온 그 ‘구도자들’(求道者)이 살던 땅에도 ‘흩어진 유대인의 후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점성가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특별한 별의 약속’을 유대인들로부터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민수 24:17). 사실 고대 신화는 고귀한 신분을 가진 ‘영웅’(일반적으로는 왕)의 탄생을 천문현상, 즉 ‘새 별’의 탄생과 연결 짓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수십 년 동안’ 하늘을 관측해 왔습니다. 세상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징조’를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새로운 통찰, 즉 지혜와 진리에 개방적이었고, 그것들을 진지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자료를 탐독했고, 어떤 표징과 경이로움을 찾아 밤하늘을 계속해서 관측해 왔습니다. 이렇게 진지한 구도자로 살아왔기에 그들의 노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밤하늘을 우러르다 ‘신비한 천문현상’을 목격합니다. 한 사람이 먼저 관측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알렸는지, 아니면 모두가 동시에 관측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새 별’을 ‘특별한 신호’로 알아차렸습니다. ‘왕의 탄생’입니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고대’하던 순간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그 별’이 어느 특별한 왕국에 태어난 ‘왕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빵 집), 즉 그 촌동네 가난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그 새 별과 연결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들은 마음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리’를 찾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제 생각으로는 그들에게 있는 달란트를 도구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들은 무수한 ‘별들’의 축복 아래 있던 ‘아브라함’처럼 자신들이 부르심 받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둠 속을 살던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들만은 그 ‘특별한 징조’를 분명히 알아차렸습니다. 그들 사이에 살던 ‘유대인들’과 심지어 ‘유다 땅에 살던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 ‘특별한 사건’을 그들은 알아차렸습니다.

다른 차원에서 그 ‘특별한 알아차림’을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진지한 ‘추구’와 ‘탐색’, ‘기다림’ 속에서 그들의 내면이 ‘더 높은 관점’으로 성숙했다는 상징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침내 그들이 ‘인생의 어두운 밤’ 속에서 ‘하느님의 관점’(빛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구도자’(求道者, 도를 추구하는 자)에서 ‘도’(道, 복음)를 획득한 ‘현자’(賢者)와 ‘전도자’(傳道者, 도를 전하는 자)로 바뀌어 가는 거룩한 이야기를 마태오는 시작하는 중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고대’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보다 ‘더 높은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성취했습니까?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관점을, 다툼이 아니라 ‘용서’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분열이 아니라 ‘일치’의 관점을, 움켜쥠이 아니라 ‘나눔’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독불장군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감’을,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만나는 진정한 ‘평화’의 관점을 성취했습니까?

그 구도자들은 길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일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밤하늘에 탄생한 ‘새 별’을 관측했을 때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끈질기게 추구해 온 일에 대한 ‘신의 계시’라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존의 지식과 정보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도 상황도 달라졌는데 아무런 만족이나 기쁨도 줄 수 없는 옛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눈과 귀를 닫고 지금까지 살아 온 안일한 방식(자기 고집)으로 인생길을 계속 걸어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여행 준비를 마친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이웃을 버리고 위대한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추구해 온 그 한 가지 ‘메시아 진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별을 따라가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별’이 가리키는 것을 찾아가기 위한 특별한 뭔가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것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은 아브라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성격상 언제나 ‘새로운 도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갖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그 여정이 자신을 위협에 빠뜨릴지라도 기꺼이 감내하는 ‘도전과 용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메시아’는 누가 나를 대신해서 찾아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도 이 진실에 실패한 ‘헤로데 대왕’과 그 주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언제나 ‘믿음’(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물론 건강한 ‘전례 공동체’는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전례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신앙’(믿음)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진실을 《성경》은 곳곳에서 들려줍니다. 정말이지 ‘믿음’은 부모의 유산처럼 저절로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했는지를 아는 지식과 정보의 차원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냉장고에 음식 재료가 쌓여 있어도 실제로 자신이 그것들을 꺼내고 다듬어서 요리하기까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이 특정 음식에 대한 ‘요리법’[요즘은 레시피(Recipe)라고 더 많이 하지요]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자신이 요리해 보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체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여정’은 언제나 나 자신의 인격적인 추구와 만남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나’의 신앙 여정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따를 것을 결정하고 그렇게 실행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공현’(公顯, Epiphany) 이야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이 주신 그 ‘특별한 신호’는 삶의 다른 모든 기쁨과 안전을 뛰어넘는 ‘힘’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진지한 추구’와 ‘기대’가 다른 모든 ‘가치’를 줄 세웠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다시 말해 ‘삶의 보물’로 발견하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어떤 기쁨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맹세가 담긴 성사가 ‘세례’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의 그 ‘불만족스러운 본질’을 확인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에게 반복해서 실망하고 세상에 절망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사람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는 이 진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출발한 그 ‘구도자들’(求道者)은 마침내 머나먼 여정을 거쳐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성가 2015> 173장은 그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 따라나섰다”라고 노래합니다. 성가야 낭만적이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요? 성탄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루가복음》에 쓰인 ‘아기’(그리스어로는 브레포스, βρέφος)라는 단어는 ‘젖먹이’(baby, 신생아, 유아)를 뜻합니다(루가 2:12,16) 참고로 루가 2:17절의 아기는 ‘파이디온’(παιδίον)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쓰인 ‘아기’(그리스어로는 파이디온, παιδίον)라는 단어는 ‘어린 아이’(child, 일반적으로는 7세 이하)를 뜻합니다(마태 2:9,11) 이렇게 두 <복음서>에 등장하는 ‘아기’는 명백히 차이가 있습니다. ‘세월이 흘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왕의 탄생을 계시한 그 별의 출현이 있고서 거의 2년여가 지난 후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에 당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태 2:7). 더욱이 이후에 벌어지는 사악한 ‘헤로데’의 ‘학살 명령’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충분한 단서가 있습니다(마태 2:13-18).

예루살렘에 당도한 그 구도자들은 거기서 ‘별의 주인’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은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이라면 당연히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경건하게’ 새로 나신 별의 주인을 찾아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 ‘그 별’을 더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분명 그들은 ‘올바른 지역’에 들어섰지만 정말 있어야 할 ‘바로 그 장소’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목적지 근처까지 인도한 ‘네비게이션’이 갑자기 통신 장애를 일으킨 격입니다. 그때 그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 마태 2:2

이것이 그들의 질문이자, 고백이었고, 그들이 여행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들의 질문과 고백은 의미심장합니다. ‘유다인의 왕’은 ‘메시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는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이 구도자들 이야기 속에 동쪽에서 온 또 다른 ‘박사’(마고스), 즉 구약의 ‘발람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녹여내고 있습니다(민수 24:17-18).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행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낯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대인들은 점점 ‘관계 맺기’를 ‘힘들어’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관계 맺기를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내보여져서 그것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결과적으로 ‘상처’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불편한 진실’이 내보여져서 결과적으로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겪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믿음, 제한적 신념)이 근본적 원인입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요청도 하지 않고 혼자서 인생을 우뚝 설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람 ‘인’(人) 자(字)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모습의 형상입니다.

사람 ‘인’(人) 자(字)처럼 그 구도자들은 서로를 의지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이 ‘헤로데의 왕궁’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유다인이 아닌 ‘에돔’(그리스어로는 이두매)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으로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방법이 옳았습니까? 그들은 이 탐구에서만큼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유다인의 왕’이라는 말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술렁거렸기 때문입니다. ‘술렁거렸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말의 원형은 ‘타라쏘’(ταράσσω)입니다. 이 말은 ‘동요하다’, ‘놀라다’, ‘고민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신적으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낄 만큼 ‘큰 충격’을 받았고, 감정이 몹시 동요했다는 뜻입니다.

박사들이 느끼기에 그들의 반응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박사들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약속된 왕의 탄생’을 크게 기뻐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섰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의 탄생’, 즉 약속된 왕의 탄생을 원치 않았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말씀에 무관심했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박사들이 이 탐구에서만큼은 ‘현명’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유다인의 왕’을 찾는다는 그 소식이 사악한 헤로데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유다를 다스리던 왕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정확하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장차 있게 될 ‘유아 학살’이라는 비극의 시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탐색하던 ‘박사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째서 구도자들이 그런 식으로 찾아다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지혜로 그 거룩한 일들을 다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뒷일은 당신이 책임지시겠다는 듯 이 경건한 ‘구도자들’(추구자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헤로데’ 대왕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헤로데’(그 이름의 뜻은 ‘영웅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가 그 아기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그 종교 엘리트들은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과 그 예언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오늘날도 ‘진지한 구도자들’을 인도할 다양한 방법들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도와줄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대부 대모, 보증인(후견인), 교회의 원로나 사제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제 역시 도움을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할 때 스스로가 용기 있게 공동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 구도자들처럼 고집부리지 않고 멈추어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볼 만큼 현명한가 하는 점입니다. 용기 있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다 알아서 해주는 공동체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공동체는 결코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를 살필 뿐입니다. 우리의 인사는 부족합니다. 아프면 남이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아프다고 소리치십시오. 한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가도 결국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제때 도움을 받는 사회입니다.

헤로데 앞에서 그 구도자들의 질문을 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답변합니다. 그 종교인들이 지명한 곳은 어디입니까?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 마태 2:6

‘베들레헴’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될 그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성경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식은 자신들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무가치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동방에서 온 그 구도자들을 무시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증언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 요한 1:11

사실, 마태오는 《미가》 예언자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미가 5:1)라는 문구를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로 수정합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표현은 다윗 왕과 관련 있습니다(사무하 5:2. 참고 사무하 3:18; 7:7-11). 이 같은 수정을 통해 마태오 기자는 ‘아기 예수’가 ‘새로운 다윗’이 될 것이라고 신학적으로 해석한 셈입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로부터 ‘베들레헴’이라는 말을 듣고 구도자들은 기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 놀랍기만 합니다. 박사들이 떠나기 전 ‘사악한’ 헤로데는 ‘별이 나타난 때’를 ‘은밀히’ 물어보며 부탁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온 그 구도자들이 자신을 대신해 새로 나신 ‘유대인의 왕’(메시아)을 찾아 주기 원했습니다. 찾은 다음 자신에게 알려주면 그때 가서 새로 나신 왕을 경배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입니다. 그는 새로 난 왕을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민의 구원을 위해 개입하신 ‘하느님의 계획’을 막아설 참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사악한 거짓말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의 ‘메시아’는 누가 나를 대신해서 찾아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믿음’(신앙)은 나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헤로데는 어땠습니까?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별’이 가리키는 바를 직접 찾아 나설 만큼 ‘용기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동방에서 온 구도자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은 지혜와 진리를 찾아 ‘몸소’ 먼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여정을 시작할 때 ‘아브라함’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별이 자신들을 어디로 이끌지, 그 여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그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마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단지 그 ‘특별한 신호’에 모든 것을 걸고 ‘위대한 도전’, 즉 ‘믿음’이라는 ‘존재의 용기’를 감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거룩한 책무’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출발한 그 여정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리스도’로 탄생하신 ‘약속된 새 왕’을 알현하고 경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헤로데의 부탁을 받고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분명 ‘베들레헴’은 그들이 유대 땅에서 처음부터 ‘기대’했던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그 ‘베들레헴’은 먼 여정에 ‘굶주렸던’ 그들의 ‘영혼’이 ‘배부를’ 수 있는 ‘생명의 빵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을 앞서” 인도해 갑니다(9절). 그 별이 안 보였다가 다시 보이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 별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죽은 도시였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앞서 인도하던 그 별이 ‘그 소박한 집’ 위에 멈추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기’(파이디온)가 있는 곳 위에 멈추었습니다(9절). 그 때의 심정을 마태오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를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합니다. – 마태 2:10

‘대단히 기뻐했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문장은 최상급의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들의 연속입니다. 그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장 큰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찼다는 뜻입니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정서는 당황한 헤로데나 두려움에 술렁거렸던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물론, ‘그 집’ 역시 그들이 ‘베들레헴’ 동네에서 기대했던 곳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리에 목마른’ 그들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생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집’이란 말을 통해 우리는 그곳이 이전부터 ‘요셉 소유의 가정집’이라는 ‘인상’(印象)을 받습니다. 그들은 밖에서 ‘집 안’을 둘러봅니다. 안에는 값비싼 살림살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새로 나신 ‘위대한 왕’ 앞에 있음을 증명해줄 만한 어떤 ‘표지’도 그 집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분명 눈에 보이는 다른 많은 ‘표지들’은 그들이 잘못된 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발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멈추어 선 ‘그 별’만은 ‘그 집’에 그들이 찾아온 ‘특별한 분이 계시다’라는 진실을 계속해서 알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진리’, ‘생명’을 주는 ‘지혜’가 거기 그렇게 있다고 조요히(照耀)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하나의 표지’를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유일한 계시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무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자’(賢者)였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의 진리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지혜는 간결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문제 상황 속에 놓일 때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표지’를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분명 응답하시고 ‘하나의 표지’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하나의 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기도 응답의 선물’이나 ‘표지’라면 다른 것과 달리 뭔가 더 ‘특별하고’, ‘풍요로워야 한다’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미 받은 표지’를 버리고 ‘다른 더 많은(복잡한) 표지들’을 요청합니다. 착각입니다.

더욱이 제 경험에 따르면, 우리가 매일 읽어나가는 《성경》의 한 말씀을 통해서, 가족과 식탁에서 나누던 대화를 통해서, 설거지 중에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성가’나 ‘복음성가’의 한 소절을 통해서, 드라마 속 한 장면이나 지난밤 꾸었던 ‘꿈’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고심해 온 일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메시지’를 주실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정말이지 특별한 시간, 특별한 장소, 특별한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특별한 방법만이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 집’ 앞에 서 있는 ‘구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너무나 빈약해 보이는 단지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그 하나의 표지를 통해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도 ‘현자’(賢者)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를 마주합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저분이 틀림없이 왕이시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기께”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경배하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는 ‘경의를 표하기 위해 무릎을 꿇거나 절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예배행위를 말합니다(마태 4:10).

실제로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기 때뿐 아니라 이후에도 경배를 받는 분으로 서술됩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8:2). ‘회당장’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9:18).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14:33).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15:25). 제배대오의 두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20:20).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이 예수님께 경배합니다(마태 29:9).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경배합니다(마태 28:17).

동방박사들은 아기께 엎드려 그들 자신을 바칩니다. 정말이지 이 아기는 새로운 시대의 창시자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왕국의 설립자가 될 것입니다. 그의 탄생에서처럼 그는 ‘십자가’에서도 똑같이 왕으로 불릴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양부이신 ‘요셉’ 성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요셉은 어디에 간 것일까요? 오늘날처럼 돈 벌러 일터에 출근했을까요? 다음에 주님께 여쭈어보십시오. 어째서 요셉이 부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이제야 밝히지만 그들 일행이 3명이었는지 아니면 30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태어나신 왕께 빈손으로 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온 ‘보물 상자’를 열어 ‘예물들’을 바칩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고대로부터 위대한 인물에게 바치는 예물의 전형입니다(이사 60:6). 그들을 3명이라고 말하는 전통도 이 예물들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교회사에서는 마태오가 특별히 언급한 세 가지 예물들이 갖는 각각의 상징을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황금’(크뤼소스, χρυσός)은 변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왕이신 예수님의 ‘영원한 왕권’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유향’(리바노스, λίβανος, 乳香)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향’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에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에 쓰였기에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몰약’(스뮈르나, σμύρνα)은 방향과 방부제나 약제로도 사용되었고, 나무에서 나온 응고된 수액(樹液)은 값비싼 ‘향수’로 유통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4kg쯤 가져왔다(요한 19:39)고 서술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몰약’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수도자들은 그 예물 봉헌을 ‘가난’, ‘정결’, ‘순명’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여정과 경배 행동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왕’, ‘제사장’, ‘구세주’로 경배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놀랍기만 합니다. 천문현상을 관측하던 그들이니 당대로 말하면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그들은 단지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한 ‘어린 아기’를 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아기를 ‘구세주’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는 현대인들을 경고하는 ‘현자들’입니다. 과학이 차지한 그 모든 왕관을 구세주의 발 앞에 어서 내려놓으라고 말입니다.

그들의 위대한 여정의 마지막은 어떻게 끝납니까? 그들은 ‘꿈’에 ‘헤로데’를 피하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 셈입니다. 헤로데나 또는 로마제국으로 상징되는 ‘거짓’과 ‘폭력의 길’이 아니라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인도하는 ‘정의’와 ‘평화’의 ‘새로운 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이사야》는 장차 회복될 시온(예루살렘)의 찬란한 미래상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의 빛을 받은 시온이 구원 얻은 모든 민족의 중심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는 예언입니다. ‘모든 민족’으로까지 구원이 확장됨을 예언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성취하실 구원의 보편성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복음 이야기에 기록된 ‘거룩한 탄생’의 기본 시나리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경배한 ‘아기 예수’가 구원 얻은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메시아 왕국’을 성취하실 분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72편>은 하느님께서 ‘이상적인 왕’, 즉 ‘메시아’를 세워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여 모든 민족이 섬기게 될 그 이상적인 왕이 동방박사들이 경배한 ‘아기 예수’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2독서 <에페소서>는 하느님이 계시해 주신 ‘심오한 계획’(신비, 복음)입니다. 그 심오한 계획은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약속을 나누는 공동상속자와 한 몸의 지체(교회)가 되는 축복입니다. 1독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의 보편성’이 동방박사들이 경배한 아기 예수를 통해 현실이 되었습니다.

복음 이야기를 통해 오래도록 인생의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던 ‘구도자들(求道者)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하늘을 ‘관측’하다 자신들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신호’를 향해 ‘믿음’의 도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특별한 신호’가 별들의 주관자이신 창조주께서 일으키신 일임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께서 계획하신 그 ‘위대한 사건’을 ‘직접’ 경험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지혜만으로 되지 않을 때 기꺼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긴 여정 끝에 찾아낸 곳이 자신들의 생각과 달리 평범했어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히 그 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참으로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선물 받은 이들임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늘 2독서 《에페소서》의 사도 바울로처럼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드러냈습니다(에페 3:3). 이방인이었지만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의 ‘신성’을 드러내는 거룩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에페 3:6). 그렇게 해서 ‘구도자’(求道者)에서 ‘전도자’(傳道者)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과 ‘용기’와 ‘지혜’를 이미 선물로 주시어 당신께로 이끄셨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기 전에, 아니 우리 마음을 바치기도 전에 주님이 이미 그 선물을 주셨습니다. 교회(시온)인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사도 바울로처럼, 주님이 이미 주신 선물로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구세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교회여! 너의 빛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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