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7. 성탄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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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구원의 주님, 성자께서는 참 빛으로 오시어 이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 빛을 따라 이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1:10-62:3
  • 시편 – 148
  • 독서 – 갈라 4:4-7
  • 복음서 – 루가 2:22-40

성탄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찬미하여라,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드높여주신 그리스도 예수를’입니다.

1독서 《이사야》는 장차 이루어질 ‘시온의 회복’(구원)에 대한 예언자의 기쁨에 찬 선포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애칭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궁극적으로 ‘시온’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본문 끝에서 다룰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달픈 현실 속에 있는 민족을 향해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큰 구원의 일’(새 시대)을 다양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선포합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주전 8세기), ‘제 2이사야’(40장~55장, 주전 539년 이전), ‘제 3이사야’(56장~66장, 주전 537년 이후~510년 경)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더 자세한 설명은 2020. 2. 9. 연중 5주일 설교를 참고하십시오).

오늘 배정된 본문은 제 3이사야에 속합니다. 그중에서도 장차 ‘시온’이 누리게 될 ‘영광’(회복)을 노래(선포)하는 60-62장 속에 위치합니다. 60-62장은 《이사야》뿐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시온의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의 절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향민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들이 ‘주님께 축복받은 민족’(61:8-9)이 될 ‘메시아 시대의 도래’가 주제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60-62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에 ‘깊은 한숨’과 ‘탄원’(고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귀향민들은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즈가 6:15; 이사 66:2~4). 성전이 파괴된 지 70년만인 주전 515년의 일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재건’되면 다윗과 솔로몬왕 시절의 옛 영화를 되찾을 것이라 믿었습니다(하깨 1:8; 2:7~9; 즈가 8:1~23). 한마디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 그들이 고대하던 ‘새 시대’, 즉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안정’은 ‘성전재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원망이 점점 일어났습니다(이사 58:3a).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어째서 ‘새 시대’는 오지 않고, 여전히 현실이 고달프고 고난 속에 있느냐는 탄원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예배와 기도가 어째서 응답이 없느냐는 원망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탄원과 비슷하다면 억측일까요?

예언자는 그들의 ‘위선적인 예배’와 ‘우상숭배’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잘못된 생활 태도 때문이라고 책망합니다(이사 57:1-13; 58:3b-7; 59:3-14; 65:1-12; 66:1-4). 하느님께 구원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죄악’ 때문이라고 책망합니다(이사 59:1-2).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과 반역 때문에 기도와 예배를 외면하실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이사 64:4-6).

그들이 이 책망을 듣고 돌아섰을까요? 그들은 예언자의 고발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바빴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역사로부터, 즉 ‘귀양살이’로부터도 배운 바가 없었습니다.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둠 속을 허둥대는 ‘악인’의 길로 갔습니다(이사 59:9-14).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하느님을 믿고 바라는 소수의 남은 이들’도 있었습니다(이사 57:13c). 이름하여 ‘의인’들입니다.

‘소수의 의인들’은 우상에게 무릎 꿇지 않고, 민족의 구원을 기다리며 ‘신앙의 정절’을 지켰습니다. 악인에게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들입니다(이사 66:2).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에 충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패역한 ‘다수의 우상숭배자들’에게 ‘미움’과 ‘배척’을 당했습니다(이사 66:5).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이 심하다’라는 점이 ‘제 2이사야’에 없는 ‘제 3이사야’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 같은 그 같은 현재 상황 속에서 ‘탄원’합니다(이사 63:7-64:11). 이 ‘탄원’은 마치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귀양살이가 시작될 때 바쳐진 의인들의 탄식처럼 들립니다. 예언자는 과거 출애굽 역사를 회상하며 연민의 정과 자비가 가득하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약을 기억하시고 진흙 같은 자기 백성을 돌아봐 주실 것을 ‘탄원’합니다(이사 64:7-8). 제멋대로, 자기 욕망대로 살아가는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호소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어 ‘새 시대’를 열어주실 것을 호소합니다(이사 63:19).

비록 《이사야》에는 이 탄원이 본문보다 뒤편에 있지만 이런 순서로 이해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기도 속에서 힘을 얻은 예언자는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보실 것이라 선포합니다. 장차 이루어질 구원의 새 시대, 즉 ‘시온(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해 선포합니다. 그 선포가 60장부터 62장까지 이어집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이 같은 개입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계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로 연결됩니다(이사 56:1~7; 65:1; 66:18~21). 이렇게 배경을 이해했으니 이제 본문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 전반부(10-11절)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시온’(예루살렘)이 반드시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말하는 사람 ‘나’는 예언자가 아니라 ‘시온 자신’입니다. ‘시온’은 계약의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과 정의’에 대해 기뻐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10절). 영광스럽게 회복된 시온의 모습을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구원과 정의의 옷’(이사 59:17; 시편 132:9,16)으로 입히셨다고 비유합니다.

‘시온’에게 입혀주신 ‘옷’의 이미지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그들과 새로 맺으실 하느님의 ‘영원한 계약’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이사 61:3; 출애 39:28; 에제 24:17; 44:18),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창세 24:22,53) 시온을 영광스럽고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듯’(10절) 하느님께서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반드시 이루실 일입니다(이사 55:10-11). 정말이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만백성 앞에서 시온의 정의와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온 세상도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에 동참할 것입니다.

후반부(62:1-3)는 위에서 말씀드린 ‘깊은 한숨’과 ‘탄원’(고발)이 배경입니다. 기도 끝에 예언자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영광을 누리게 될 ‘시온’(예루살렘)의 미래를 경축합니다. 말하는 사람 ‘나’는 예언자이고, 듣는 사람인 ‘너’는 ‘시온’입니다. ‘시온’은 사랑받고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시온’에게 주신 ‘정의’와 ‘영광’을 뭇 민족과 제왕이 볼 것입니다. 모든 민족과 왕들로부터 ‘시온’은 인정을 받을 것이고, 온 세계가 ‘시온’으로 몰려올 것입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시온’에게 ‘새 이름’, 즉 ‘새로운 신분’을 주십니다. 그 신분이란 무엇입니까? 한때 버림받은 신부처럼 보였던 ‘시온’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내’가 됩니다(이사 62:4-5). 그러니까 하느님과 부부관계가 됩니다. ‘시온’은 ‘거룩한 백성’, ‘주님께서 구해내신 자들’,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불립니다(이사 62:12). 이제 시온은 주님의 손에 들린 화려한 관처럼 빛나고, 왕관처럼 어여쁠 것입니다. 이처럼 1독서 《이사야》는 구원의 하느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어 ‘이스라엘’의 불행한 처지가 기적적으로 바뀌게 될 ‘영광스러운 구원의 새 시대’를 예언합니다. 이름하여 ‘메시아 시대의 도래’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본문이 성탄 1주일에 배정된 것입니까? 그것은 본문이 복음 이야기에 기록된 시므온의 노래와 안나의 증언에 대한 ‘서곡’(序曲)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증언하듯이 성전에 봉헌된 ‘아기 예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아기 예수는 시온, 즉 ‘자기 백성’에게 ‘의로움’과 ‘구원’을 가져오시는 영광스러운 분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장차 ‘구원의 옷’도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 즉 ‘새 신분’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들은 하느님의 손에 들린 화려한 관처럼 영광스럽게 됩니다. 이렇게 ‘시온’과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며, 제 3이사야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서 성취됩니다. 구원받은 교회는 영광스러운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묵시 2:17; 3:12),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신부가 되었습니다(묵시 19:7-9; 21:2). 그 왕관이 하느님의 손에 있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있습니다. 우리 말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48편>은 온 누리 모든 피조물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흔히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146~150편)은 ‘대송영’(the Great Doxology)이라 불립니다. 이유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찬미하라”라고 용기를 북돋는 “할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로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은 150편의 처음과 끝에만 ‘할렐루야’를 번역해 놓았지만 원문에는 다섯 편 모두 처음과 끝에 ‘할렐루야’가 붙습니다).

시인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누어 찬양을 명령합니다. 먼저 ‘하늘’(우주)에 있는 것들을 불러서 명령합니다(1-6절). 천사들, 군대들, 해와 달, 별들, 하늘 위의 하늘들, 하늘 위에 있는 물들을 향해 명령합니다. 물론 이 명령에는 ‘하늘’에 대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위에는 하늘이 있고, 가운데는 땅과 바다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지하세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천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에 있는 것들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보존하시는 ‘보호자’이시고, 다스리시는 ‘통치자’시라고 선포합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땅’(지구)에 있는 것들을 불러서 명령합니다(7-12절). 십계명에서 금지하듯이 우리는 창조된 자연물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모든 것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찬양해야 합니다. 지위고하, 남녀노소, 모두 한데 어울려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교회가 그런 곳이고 성찬례는 그런 시간입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만물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하느님만이 홀로 높으시고 그 위엄을 땅 하늘 위에 떨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하느님 외에 땅 하늘 어디에도 찬양과 경배를 받아야 할 다른 존재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하느님으로 인해 존재케 된 만물이 하느님을 향해 ‘충성’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물이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하느님이 더 커지거나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만물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그 어떤 찬양보다도 한없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오시어 구원하시고, 그들의 영광을 드높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창조하신 만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시지만, 특히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오시어’ 극진히 돌보십니다(14절).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런 축복과 특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 하느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문자적으로는 선민인 이스라엘이지만, 영적으로는 ‘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찬양은 우리의 ‘보편적 의무’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고 돌보지만 당신의 백성, 즉 당신의 신도들과 특별한 관계에 계신 분입니다. 이처럼 <148편>은 우리와 모든 피조물이 할 일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임을 교훈합니다. 요한묵시록은 시편의 이 명령이 성취된 장면을 목격합니다(묵시 5:11-13).

이제 질문입니다. 세계교회가 함께 사용하는 3년 주기 ‘개정 공동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에 따르면 시편 <148편>은 ‘가, 나, 다해 성탄 1주일’에 공통으로 배정됩니다. 게다가 <148편>은 ‘다해 부활 5주일’에도 배정됩니다. 같은 <시편>이라도 어느 ‘절기’에 배정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전례독서들과의 관계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물론 전례독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의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명령하는 <148편>을 ‘성탄절기’에 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례독서의 중심은 항상 ‘복음서’입니다. 1독서는 복음 이야기의 ‘배경’(보충, 조화, 예언, 암시) 역할을, 2독서는 복음 이야기의 적용 역할을 합니다. 이 원칙에 따라 1독서가 배정되면 시편은 항상 1독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선정됩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가 하느님께서 회복시켜주실 ‘시온’의 기쁨과 찬미입니다. 따라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높여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명령하는 <148편>은 1독서에 ‘상응한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기다 오늘 같은 경우는 직접적으로 ‘복음 이야기의 배경’ 역할도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 이야기의 장소는 어디입니까? ‘성전’입니다. 이 성전과 <148편>이 연관됩니다. 시인은 모든 피조물과 민족들을 하느님께 찬양을 바치도록 차례로 불러냅니다. 그들을 어디로 ‘소환’(召喚)할까요? 우주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우주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그 성전에서 “그 이름, 그분 홀로 한없이 높으시고, 땅 하늘 위에 그 위엄 떨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자고 모든 백성을 소환합니다(13절). 특히 복음 이야기는 그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주시려 한 아기로 자기 집에 가까이 찾아오시자 시므온이 알아보고 찬양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148편>은 단지 이스라엘만을 ‘선민’으로 보는 관점입니다(14절). 아직 세계 만민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편주의’(universalism)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민족으로까지 구원이 확장됨을 예언하는 구약 신학의 최고봉 중의 하나인 ‘보편주의’는 후대에 쓰인 《이사야》에 나타날 것입니다(이사 2:2~4; 11:6~9; 19:19~25; 56:1~7; 66:18~21). 우리는 ‘성육신’하시어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보편주의’를 실현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2독서 《갈라디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되었다는 교훈입니다. 성탄절기에 맞게 ‘예수 탄생의 신학적 의미’를 해석한 사도 바울로의 편지가 배정되었습니다. 바울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와 일치합니다. 복음 이야기는 성가정이 율법에 충실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로가 율법을 언급하는 진정한 초점은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인류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이 희망하는 구원’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증언입니다.

그 구원의 성취를 위해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짤막한 문구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계획과 정하신 시간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바울로는 고백합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하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때가 찼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다시 오시어 온 세상의 통치자로 군림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의 일은 우주의 창조주이시자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느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덕택에 우리는 ‘종’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약속의 상속자(선민)가 되는 은총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의 성전봉헌’ 이야기를 전하는 《루가복음》을 다룰 차례입니다. 갈수록 세상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가 가진 재력 정도가 사람대접의 기준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취급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힘(생산력)없는 약자들, 특히 어린이와 가난한 부부와 노인은 무시당하고 홀대를 받기 쉽습니다. 그나마 선거철 ‘표’가 있는 성인과 노인은 반짝 주목을 받지만 ‘표’가 없는 어린이는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역사입니다. 비록 타락한 세상은 사회적 약자들,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과 노인을 무시하고 홀대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그들이 사랑받고 존중받는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어린이는 고단한 일상에 ‘위안’을 가져오는 존재들로 축복을 받습니다. 경쟁에 지친 청소년들은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미래가 불안한 청년 세대들은 자신 안에 있는 ‘빛’을 주목하도록 지지받고 격려받습니다. 중년 세대들은 이루어낸 성과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가정과 사회에서 수행해 온 책무만으로도 충분히 존중을 받습니다. ‘원로’(노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 특별한 통찰력으로 희망을 증언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추앙받습니다.

우리는 그 새로운 세상을 어디서 먼저 생생히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까? ‘하느님의 성전’(교회)입니다. 우리는 ‘성전’에 모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전례를 통해 기억하고 경축하는 공간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아도 성찬례가 봉헌되는 이곳은 분명 ‘성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모이는 성전은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은 우리 서로가 존귀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곳입니다. 세상에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전’(교회)이라 불리는 곳은 ‘사랑’ 말고 세상에 있는 것이 다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찾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에서 더는 ‘사랑’을 찾지 않습니다. 비극입니다. 올해를 돌이켜보십시오. ‘코로나19’로 불안한 국민이 질타했던 대상 첫머리에 교회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단인 ‘신천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랑제일교회’가 있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리스도교회를 부끄럽게 만든 교회 이름에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한때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피난처’였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에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교회가 감당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피난처’나 ‘길’을 가리키기는커녕 세상에 길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복음 이야기를 통해 ‘성전’과 오랜 기다림 끝에 ‘그 주인’이신 분과 만나는 ‘예언자’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전’이 어떤 곳인지를 교훈 받습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성전에 모인 우리는 다시 ‘처음’을 목격합니다. ‘마지막’을 상징하는 두 노인이 ‘처음’을 상징하는 ‘아기’와 ‘과정’을 상징하는 ‘부부’를 ‘성전’에서 만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모든 세대가 그 주인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한 데 어울리는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은 ‘마지막’(노인)이 ‘처음’(아기)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과거’(노인)가 ‘미래’(아기)를 만나 생의 통합을 노래하는 거룩한 현재가 성전입니다. ‘처음’(아기)이 ‘마지막’(노인)을 만나 참된 기쁨을 선물하는 거룩한 공간이 성전입니다. ‘미래’(아기)가 ‘과거’(노인)를 만나 구원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는 거룩한 공간이 성전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복음 이야기의 사건을 ‘주의 봉헌 축일’로 지켜왔습니다. 해마다 2월 2일은 성탄 후 40일째가 되는 날인데 그날 축일을 지킵니다. 주의 봉헌 축일이 갖는 전례적 의미는 그날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에 충실해 보겠습니다.

《루가복음》 2장은, 2독서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세 번에 걸쳐 성가정이 율법에 순종하는 가정임을 들려줍니다. 하나는 아기 예수의 ‘할례’이고(21절), 다른 하나는 12살에 있었던 예수의 ‘성인식’이며(42절), 나머지 하나는 오늘 복음 이야기에 나오는 ‘첫아들에 대한 의무’와 ‘산모의 정결례’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할례’와 ‘성인식’과 ‘첫아들의 의무’는 모두 언약, 즉 ‘율법의 아들’이 되는 절차입니다.

우선, 성가정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출애 13:1-2,14-15). 다른 하나는 산모의 ‘정결례’를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레위 12:1-8).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이며 의무였습니다.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머물다 성전으로 올라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머물다가 올라간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이든 ‘처음 난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처음 난 것을 돌려드림으로써 하느님께서 ‘생명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그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 있습니다(출애 13:2, 12-15; 34:19-20; 민수 3:11-13; 18:15-17). 다만 사람의 경우에는 첫아들 대신 다른 제물을 드림으로써 도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출애 13:13; 민수 3:11-13; 18:16). 성가정도 다른 ‘대치 제물’을 바치고 ‘첫아들’을 도로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루가복음》 기자는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루가’는 이 아기는 다른 이스라엘 가정의 첫아들처럼 “값을 지불하고 되찾을 수 없는”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 ‘특별한 분’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장차 이 ‘특별한 아기’의 죽음이 모든 인류를 ‘대속’(代贖)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에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성가정이 예수님을 도로 찾지 않고 성전에 온전히 봉헌한 일은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1사무 1:11, 21-2:11). 사무엘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성별 되어 한평생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실 분임을 루가는 예수님 생애 초기부터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루가는 예수님이 ‘누구’(어디)에게 속하는지를 생애 초기부터 분명히 하는데, 그 절정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 루가 2:49

또 율법에 따르면 출산한 산모는 ‘정결례’를 치러야 성전에서 하느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레위 12장). 아들을 출산하면 40일 만에, 딸을 출산하면 80일 만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만 가난한 집 산모는 본래 규정된 것(번제로 드릴 일 년 된 양 한 마리와 속죄제물로 드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 대신에 그보다 작은 제물을(집비둘기 한 쌍이나 산비둘기 한 쌍을 구해서, 한 마리는 번제로 나머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한 이 규정을 따라 성가정은 제물을 준비합니다. 참고로 복음 이야기에서 루가는 구약에 기록된 ‘정결례’ 제물 규정을 다르게 해석한 점도 발견됩니다(루가 2:24; 레위 12:8).

‘예루살렘 성전’ 경내는 그날도 율법의 의무를 이행하러 온 수많은 인파로 북적입니다. 거기 있던 사람 중에 이 평범해 보이는 성가정을 주목하거나 아기에 대해 증언해 줄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 보입니다. 심지어 제사장 중 아무도 이 ‘특별한 아기’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분이 가까이 왔는데도 알아차리는 눈이 없었습니다. 부자들의 예물에 마음이 빼앗겨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참된 예물을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증언’이 유효 하려면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합니다(신명 19:15). 오늘 복음 이야기도 ‘한 아기’에 대한 증언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엘리사벳과 성모 마리아를 통해 이 ‘특별한 아기’에 대해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천사들과 목자들을 시켜 이 ‘특별한 아기’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들 말고도 이 성가정과 아기에 대해 증언해 줄 ‘성령 받은’ 다른 두 사람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성전 안에 있던 오로지 두 사람만이 이 성가정과 아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도록 영감받은 예언자들입니다. 둘 다 기도의 삶을 살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구세주를 만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 중 첫 번째는 ‘시므온’입니다. 그는 그날 왠지 서둘러 성전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것 자체로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주 성전에 올라가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오래도록 기다리던 노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1독서 《이사야》의 말씀처럼 ‘메시아’와 ‘메시아 시대의 실현’입니다(이사 40:1-2; 49:13; 52:9).

더욱이 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십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으나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라고 성령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일입니다. 그는 그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데, 그는 아직 거기까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성전 경내 첫 구역인 ‘여인의 뜰’에 들어간 시므온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스라엘인의 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갑니다. 그때 아기를 품에 안은 한 부부가 조심스레 ‘여인의 뜰’로 들어 옵니다. ‘성가정’입니다. 아기를 안은 엄마 옆에 집비둘기 새끼 꾸러미를 든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뜰을 지나 오직 남자만 제물을 바치러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인의 뜰’로 들어갈 참입니다.

시므온의 눈에 맞은 편에서 들어오는 이 ‘성가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었을지 모르나 시므온의 눈에는 그 부부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오묘한 ‘빛’이 선명하게 감각되었습니다. 백발이 지난 그에게 여태껏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는 바로 이 순간을 ‘말라기’ 예언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는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다. 그가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 말라 3:1하

시므온의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로 저기 오신다.

그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라져 그 부부에게로 향합니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의심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은 ‘바로 저기 오신다’라는 음성은 틀림없는 성령의 지시였습니다. 그가 더 가까이 가자 ‘그 빛’은 부모가 아니라 품에 안고 있는 아기의 것이었습니다. 다시 성령의 음성이 내면에서 들렸습니다.

이들이 바로 약속된 그 가정이다. 그들의 ‘아기’가 그리스도(메시아)시다!

시므온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오, 하느님, 맙소사! 그리스도(메시아)가 ‘아기’라니요!

시므온은 약속하신 그리스도(메시아)를 지금껏 다르게 상상해 왔습니다. 갑옷을 입은 힘센 남자이거나 어떤 초인적인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 순간 엄마 품에 있던 아기가 ‘꼬물락’ 거립니다. 그 모습을 보자 시므온의 ‘내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부부에게 ‘샬롬, 샬롬’이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아기 예수님이 시므온의 품에 선물처럼 인도됩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살던 그였지만 ‘참 빛’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기도와 찬양을 바쳐 올립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 루가 2:30-32

시므온의 찬양은 오늘 우리가 노래한 시편 <148편>과 맥을 같이 합니다. 자신이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기’를 통해 실현되었다며 ‘평안’을 노래합니다. 지금의 순간을 수도 없이 꿈꿔 온 그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꿈꿔 온대로는 아니었으나 그의 기도가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노래입니다. 그가 눈으로 본 것과 목자들이 본 것은 일치합니다(루가 2:15,17). 나중에 예수님은 자신을 보았던 이들의 행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사실 많은 예언자들과 제왕들도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루가 10:2-24

이제 이 아기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베푸신 ‘구원’(메시아)이기에 이방인들마저도 이 ‘빛’을 자신들의 빛(메시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욱이 이제 이 아기 덕택에 1독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모든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이사 60:1-3).

시므온이 부른 찬양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주님의 구원’을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 위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풀처럼 피어나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떠오르는 그런 ‘구원 세상’을 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가 예언자 시므온의 노래를 이 성탄절기부터 더 힘차게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어둡게’ 느껴지더라도 분명코 주님은 교회의 노래가 현실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시므온을 쳐다봅니다. 성탄 이야기에서 들었듯이, 최근 성가정에는 아기의 탄생을 둘러싼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있었습니다. 출산 날 새벽, 낯선 목자들이 그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밤하늘에 나타난 천사로부터 구세주가 탄생했으니 가보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목자들은 아기에 대해 천사가 한 말을 친절하게 전해 주었습니다(루가 2:8-12, 17).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별로 놀라워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목자들은 거짓말도 잘하고, 잘 씻지도 않으며, 냄새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아기의 엄마인 마리아만 목자들이 전하는 말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빠인 요셉의 마음도 움직였습니다. 왠지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이 노인의 알 수 없는 기도와 노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기는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라는 천사의 말처럼(루가 2:10), 시므온의 기도와 노래 속에 드러난 구원사의 지평 앞에 그들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놀라움과 감격 속에 조용히 서 있는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시므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 루가 2:34-35

시므온의 예언은 《이사야》 예언서의 인용입니다(이사 8:14-15; 28:16). 메시아이신 아기를 통해 실현될 미래입니다. 아기가 무엇을 넘어뜨리고, 무엇을 일으킨다는 말일까요? 밖으로 나가지 말고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성탄주간을 지키는 요즘 우리 안에서 넘어뜨려지고 일으켜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자신은 너무 잘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묵상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무너뜨리고, ‘마음’은 일으켜 세우십니다. <복음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뜨리시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독차지하려는 유대인들의 신관, 선민의식, 안식일로 대변되는 율법관, 역사와 자연, 이웃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세계관, 정치적 메시아관 등, 그들의 편견, 판단, 평가를 무너뜨리십니다. 한마디로 ‘머리’를 잘라버림으로 그들 자신을 무너뜨리십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은 일으켜 세우십니다. 사랑을, 연민을, 자비를, 회개를, 감사를, 희망을, 믿음에 무감각해진 그들의 마음, 감수성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 즉 ‘가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예언이 더 마음에 걸립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그 일이 ‘성모’에게는 어떻다고 합니까? 영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애통함’입니다. 얼마나 아픈 예언인지 모릅니다. 아기는 장차 우리가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의 ‘영광’이 되고, 하느님이 우리 내면에 들어오시어 ‘평화’가 되는 십자가의 일을 하실 터인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성모에게는 그토록 힘들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십자가 아래의 성모 마리아는 무참히 죽어가는 아들의 절규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의 예언은 아기를 받아 안고 바친 기도와 노래, 또 부부에게 해 준 축복의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만약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장차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목수가 되어 당신 집 살림이 필 것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말을 했다면 얼마나 받아들이기 쉬웠겠습니까? 예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을 반대하는 유다 백성들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아들’은 사람들의 어둠을 드러나게 하시는 ‘참 빛’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이 가슴 아픈 예언을 들은 마리아의 표정이 어땠을까요? 《루가복음》 기자는 마리아가 목자들이 전해 준 말을 이미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전해줍니다(루가 2:19). 마리아는 이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또 한 명의 예언자가 반가운 얼굴로 지팡이를 짚고 다가옵니다. 《루가복음》은 그녀를 파누엘의 딸로서 아셀 지파 혈통을 이어받은 나이 많은 예언자 ‘안나’라고 소개합니다. 시므온과 짝을 이루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홀로 되었지만, 성전(정확히는 여인의 뜰)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84년 동안 하느님을 섬겨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성전을 출입하며(정확히는 성전에서 살며) 하느님을 섬겨왔다는 말뜻은 영적으로 ‘온전히 다듬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가난했을망정 ‘삶의 내용’은 온통 ‘하느님’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안나 예언자의 기도 제목은 시므온처럼 하느님께서 어서 역사에 개입하시어 ‘예루살렘이 구원되는 날’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안나 예언자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도 안나 예언자처럼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느님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은 과연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삶이라고 자녀들과 이웃들이 증언해 줄 수 있는 삶입니까? 하느님의 구원을 알아차리고 그 구원을 만나고 있습니까?

안나 예언자는 그날도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군중 속의 일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나아가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침침한 눈으로 살아온 그녀였지만 한 곳에서 ‘빛’이 발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성가정 곁으로 다가온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환하게 펴집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더니 기쁨의 미소가 안면 가득 번져갑니다. 그녀 역시 시므온처럼 이 아기가 ‘주님의 구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바치며 어깨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어서 와서 보라”며 아기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자신의 손자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손짓합니다. 이 아기가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이 될 것이고, 억눌린 백성들을 위한 하느님의 생생한 구원이 될 것이라 증언합니다. 이 위대한 증언으로 아기 예수의 성전봉헌 예식은 끝이 납니다.

여러분, 거기 있던 군중들이 시므온과 안나 예언자의 증언을 귀담아들었을까요? 《루가복음》은 침묵합니다. 다만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시므온과 안나에게 구세주를 살아생전 만날 것이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 구세주를 약속하시고 용서와 축복과 새 힘을 약속하십니다.

복음 이야기 마지막은 이렇게 서둘러 끝이 납니다.

아기의 부모는 주님의 율법을 따라(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자기 고향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 루가 2:39

어딘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당혹스러워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얼굴이 보이는 듯합니다. 아기는 다시 잠들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놀라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은 ‘성가정’만이 아닙니다. 성탄이 끝나고 목자들은 들판으로 돌아갔고, 천사들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마태오복음에만 등장하는 동방의 박사들도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고향이나 어딘가로 돌아가지 않은 또 다른 한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어딘가로 돌아가시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나자렛에 돌아온 성가정의 몇 년은 평안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두 사람과의 만남을 가슴에 간직했습니다. 그 감격스런 만남과 기도와 노래, 예언과 증언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가슴에 새겼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종의 ‘심화학습’을 진행했다는 뜻입니다.

이 거룩한 봉헌 이야기를 들은 우리도 마음에 새기고 그 의미를 ‘심화학습’ 해야 합니다. 인생살이에는 깨우침이 삶으로 나오는 과정이 있고, 내적으로 깨우쳐져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적으로 깨우쳐지기도 전에 삶으로 먼저 가져갑니다. 그러다 보니 ‘어설픈’ 이야기, ‘어설픈’ 실천이 됩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자렛으로 돌아간 아기는 어떻게 성장합니까?

아기는 날로 튼튼하게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었다. – 루가 2:40

우리도 날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에게서도 이 두 가지가 자라고 풍부해져야 합니다. 몸이 자라고 지혜가 풍부해져야 합니다. “몸이 자란다”라는 것은 우리 ‘믿음’의 크기가 자란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풍부해진다”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찬례가 진행되는 이 성전이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저는 복음 이야기 처음에 ‘성전’은 거룩한 곳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도 성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성전 안에서 아기, 젊은 부부, 노인으로 상징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만납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아기는 환영을 받습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어린이는 하느님의 계획이 함께하는 중요한 존재로 존중받습니다. 성전 안에서 모든 어린이는 하느님이 영원히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하나의 거룩한 표지가 됩니다. 성전 안에서 한 젊은 부부는 자신들을 향해 하느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의도를 발견했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성전 안에 살면서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한 이들은 ‘노인’이 되어서도 그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언젠가 하느님이 그들을 본향으로 부르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린이가 무시당하고, 젊은 세대들은 미래를 꿈꿀 수 없을 만큼 일상에 압도당하며, 중년 세대들은 존중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며, 노인들은 갈 곳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돈’을 사랑하다 그만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 교회, 즉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은 바로 ‘사랑과 구원과 존재의 기쁨’입니다.

오늘 한 젊은 부부는 율법에 순종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납니다. 거기에서 구원의 노래(이야기)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교회는 사랑의 노래, 구원의 노래, 지혜의 이야기, 소통의 이야기, 존재의 기쁨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입니다. 교회는 돈을 섬기는 세상과 달리 아기, 어린이, 젊은이, 노인 모두가 존경받고 명예롭게 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가 삶의 참된 양식을 공급받은 곳입니다. 이 교회에서 참된 구원의 기쁨과 양식을 공급받아 힘을 얻은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 모두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는 소중한 존재들임을 널리 퍼뜨려야 합니다. 새해에도 우리가 그런 평화의 일꾼으로 힘차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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