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0. 대림 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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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성모 마리아의 순종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도 주님의 뜻을 따라,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굳센 소망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사무하 7:1-11,16
  • 시편 – 89:1-4,19-27 또는 성모송가(루가 1:46-55)
  • 독서 – 로마 16:25-27
  • 복음서 – 루가 1:26-38

대림 4주일입니다. 전례독서의 주제는 ‘찬미하여라, 계약을 성취하시려 우리를 영원한 사랑의 집으로 삼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을’입니다.

대림절기는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대림절기는 ‘만왕의 왕’으로 인간 역사의 ‘마지막에 개입’해 오실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인간의 역사에 ‘이미’ 개입해 오신 아기 예수의 성탄이 우리 마음에서 새롭게 일어나도록 설렘으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오심 사이에 서 있는 우리 자신임을 자각하는 시기입니다. 이루어질 약속을 기억하고, 이미 성취된 약속이 나에게서 일어나도록 열망하며 거룩한 기다림의 여정 속에 있는 우리입니다. 참회와 절제로, 설렘과 희망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성찰하도록 초대받은 ‘거룩한 기다림의 시간’이 대림절기입니다.

이제 대림초의 모든 불빛이 밝혀졌습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대림초에 대해 여러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대림 1주일에 켠 첫 번째 초는 ‘기다림’, 2주일에 켠 두 번째 초는 ‘희망’, 3주일에 켠 세 번째 초는 ‘기쁨’, 4주일에 켠 네 번째 초는 ‘순결’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첫 번째 빛을 ‘희망’을 상징하는 ‘예언자의 촛불’, 두 번째 빛을 ‘믿음’을 상징하는 ‘베들레헴의 촛불’, 세 번째 빛을 ‘기쁨’을 상징하는 ‘목자의 촛불’, 네 번째 빛을 ‘평화’를 상징하는 ‘천사의 촛불’이라 말합니다.

그 외에도 차례대로 ‘희망’(믿음), ‘평화’(희망), ‘기쁨’, ‘사랑’을 상징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예언자’, ‘천사’, ‘목자’, ‘동방박사’를 상징하는 대림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간혹 다섯 개의 초를 마련하는 교회에서는 가운데 위치한 초를 성탄절에 켜면서 세상에 오시어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하느님의 참 빛,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전례적으로 획일화된 것은 아니니 자유롭게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전례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대림초를 밝혀왔을까요? 교회가 차례로 밝혀 온 대림초는 ‘그리스도의 오심’(탄생, 재림)을 고대하는 온 인류를 상징합니다. 대림 1주일에 켠 첫 번째 ‘보라색’ 초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희망’ 속에서 깨어 기다리는 ‘주님의 백성 된 우리’를 상징합니다. 대림 2주일에 켠 두 번째 ‘보라색’ 초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오심(탄생)을 ‘믿음’으로 선포한 ‘구약의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대림 3주일에 켠 세 번째 ‘장미색’ 초는 ‘참 빛’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기쁨’으로 준비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상징합니다. 오늘 켠 네 번째 ‘흰색 초’는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구세주의 집’(어머니)인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합니다.

그렇습니다. 해마다 대림 4주일은 ‘평화의 모후’이시자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의 희망과 믿음과 기쁨과 순종’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딱히 생각나는 혹은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천주교에서 전매특허처럼 쓰는 ‘평화의 모후’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런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들이 계신 데,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동안 기다림의 여정을 순례해 온 우리 마음이 이전보다 ‘순결’해졌는지(고요하고 평화로워졌는지) 살피는 일이 먼저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기쁨과 순결(평화)의 빛이 마음에 가득히 당기어졌습니까? 주님의 집이 되실 준비를 하셨습니까? 일상에서 어떤 성찰과 자각과 참회가 있었고, 감사와 찬미와 기도는 마음에서 살아있었습니까?

세상이 어둡고 소란한 중에도 다윗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실 약속된 ‘새벽빛’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계십니다. 대림초를 ‘어두운 짙은 색’에서 ‘밝은색’으로 차례대로 밝히는 것에서 그 의미가 더욱 드러납니다. 우리는 ‘순결한’ 성모 마리아처럼 구세주로 오시는 ‘참 빛’, ‘평화의 왕’을 맞아드릴 ‘마음의 집’을 잘 준비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영원한 계약’에 ‘헌신’할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초 하나보다 두 개가, 두 개보다 세 개가 어둠을 더 많이 몰아내듯이 굳센 믿음의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밝아집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초를 다 밝히고 한 사람의 ‘순결한 성모 마리아’가 되도록 초대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성모 마리아처럼 ‘사랑의 집’으로 변화되도록 초대됩니다. 성령께서 빚으시는 ‘순수한 사랑’을 잉태하고 세상에 낳는 거룩한 집, 즉 성모 마리아’로 변화되도록 초대됩니다. 비천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고 구원의 도구로 높여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성모 마리아처럼 찬미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됩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마음의 눈이 열려서 ‘계약’에 충실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됩니다. 대림 4주일을 맞이한 우리도 기쁜 노래로 계약에 충실하신 주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하는 오늘의 성모 마리아이기를 열망하고 축복하면서 <전례독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독서 《사무엘하》는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총과 사랑인 ‘다윗 계약’ 이야기입니다. ‘왕위’(王位)에 올라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던 다윗은 ‘하느님을 위한 집’, 즉 ‘성전’을 건축하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드럽게 거절하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영원히 지속될 집’, 즉 ‘영원한 왕조’(王朝)를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참고 시편 89:3-4). 다윗이 하느님을 향해 품었던 계획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아브라함을 불러 일방적(무조건적)으로 맺으신 ‘계약’과 성격이 같습니다. 이름하여 ‘다윗 계약’입니다. 훗날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아 사상’(이사야 9:6-7; 11:1-2; 예레 23:5-6)은 이 ‘다윗 계약’에 근본적인 뿌리를 둡니다.

본문을 듣다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생각이 났다면 고등학교 때 ‘국어’를 잘하신 분입니다. 맞습니다. 조선의 여러 ‘조종’(祖宗)의 위업을 찬양하고 후대 왕들을 ‘권계’(勸戒)하기 위해 제작된 그 용비어천가 말입니다. 본문도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다윗 가문을 칭송하는 이 이야기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부터 살피겠습니다.

사울 왕가의 몰락 후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왕위에 오릅니다(사무하 5:1-3). 그 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와 은혜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도’를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여부스인들이 살던 ‘시온 산성’(예루살렘 남동쪽 언덕)을 점령하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습니다(사무하 5:6-7). 그 도성이 바로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입니다. 다윗은 수도를 ‘시온’(다윗 이후로 예루살렘의 애칭으로 불립니다)으로 옮김으로써 민심을 안정시켰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사무하 5:9-12).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위협을 느낀 블레셋군이 쳐들어왔습니다(사무하 5:17). 다윗은 오래도록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그들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사무하 5:19-25). 정치, 군사적으로 다윗 왕국은 더 강대해졌습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왕국의 기틀을 확립한 다윗은 ‘통치 이념’(종교)을 서둘러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행한 일이 ‘주님의 궤’(계약궤)를 자신의 도성 ‘예루살렘’에 옮겨오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주님의 궤’(계약궤)는 ‘오베데돔의 집’에 있었습니다(사무하 6:11). ‘주님의 궤’가 그 집에 안치된 연유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 시절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군에 패하고 ‘주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사무상 4:1b-11). 그 후 ‘주님의 궤’는 블레셋 지방에 7개월을 머문 후(사무상 6:1) ‘벳세메스’를 거쳐(사무하 6:13-15) ‘키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었습니다(사무상 7:1).

‘주님의 궤’가 그 집에 안치된 지 약 10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왕정 체제로 바뀌었고 “양떼를 따라다니던”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며 정치, 군사적으로 왕국의 기틀을 다진 다윗은 ‘통치 이념’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계약궤’를 모셔오게 합니다(사무하 6:1-2). 우여곡절을 겪고 천신만고 끝에 ‘계약궤’는 다윗성, 즉 ‘예루살렘’에 안치됩니다(사무하 6:12-17). 이리하여 ‘예루살렘’은 정치, 군사, 종교적으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중심이 됩니다.

왕국이 태평성대를 구가(謳歌)하던 어느 날, 다윗은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큰 복을 주시어 자신에게는 송백으로 지은 멋진 궁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궤’는 ‘천막’(휘장)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이 ‘무례하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특별한 일’을 하기로 합니다. ‘천막’을 대체할 영구적인 건물을 건축할 참이었습니다. 예언자 ‘나단’을 불러 ‘하느님의 집’, 즉 ‘성전’을 지어드릴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나단’은 왕의 말을 ‘선’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뜻대로 하시라고 적극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이어지는 내용은 ‘나단’이 받은 ‘계시’입니다. ‘나단’은 예언자였지만 실수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한 말씀’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판단과 상식에 따라 ‘성급하게’ 대답했음이 밝혀집니다. 성전을 짓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은 ‘부드럽게 거부’하십니다. 지상의 특정한 장소, 즉 ‘천막’이나 ‘집’에 갇혀 계시거나 제한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하느님은 선조들의 역사를 상기시켜주도록 합니다.

‘자유인의 길’로 가기 위해 선조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를 먼저 상기시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은 천막이든 집이든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여기저기 옮겨 다니셨습니다. 모세든, 여호수아든, 이스라엘 어느 지파의 영웅(판관)에게도 ‘성전’(집) 건축을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하느님은 ‘무소부재’하시고, 그 어떤 공간이나 사람도 하느님을 붙들거나 독점할 수 없음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 ‘그들 가운데 현존’하기를 원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그들 모두’의 하느님, 그들 ‘모두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들 모두를’ 당신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거부하신 이유입니다. 물론, 《역대기》 역사서는 다윗의 성전 건축을 하느님께서 거부하신 이유를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여러 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많은 ‘피’(생명)를 흘렸기 때문입니다(역대상 22:8).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나단에게 지금까지 ‘다윗을 위하여’ 행하신 은총의 일들을 상기시켜주도록 말씀합니다. 사실, 하느님은 ‘비천하고, 보잘것없으며, 연약한 다윗과 함께’하시어, 그를 원수들로부터 지켜주시고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까지 앉히셨습니다. 한마디로 누구 덕택에 ‘통치자’가 되었는지 늘 새기고 살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 은총의 일들을 상기시켜 준 후에 본격적으로 ‘다윗 계약’이 선포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이름을 온 세상에서 위대하게 만드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이전에도 하느님께서는 “양떼나 따라다니던” 그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왕권을 널리 떨치게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느님께서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이름을 떨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그를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선조들, 즉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그 땅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그 땅을 탈출했으나 여전히 이스라엘은 광야를 헤매며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후 영웅인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의 침입으로 억압당하며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당신의 가련한 백성’이 뿌리를 박고 안전하게 살게 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느님의 참된 관심사입니다. 사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튼튼히 세우시고 자기의 왕권을 떨치게 하신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잘 되게 하시려는 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사무하 5:12).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연약한 백성들, 즉 “양떼나 따라다니던” 보잘것없던 다윗으로 대변되는 약자들과 앞으로도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한 ‘왕조’(王朝)를 일으켜 ‘다윗의 집안’을 위대하게 만드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을 세워 그 나라를 튼튼히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계약’입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집’을 지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히 지속될 집’, 즉 ‘왕조’(王朝)를 세워주실 것입니다. 다윗(하느님의 백성들, 인간들)이 하느님을 위해 ‘집’을 마련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하느님의 백성들, 인간들)을 위해 ‘집’을 만드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안’을 통해서 이루실 ‘영원한 왕조’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하느님을 향한 다윗의 사랑과 감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이 약속은 다윗의 집안을 위한 ‘세습 군주제의 약속’입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에서는 아들이 계승한 왕이 없었기에 하느님의 이러한 약속은 중요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왕조’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십니다.

다윗은 ‘비천한 자신’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신 이 ‘은총의 일들’을 기억하는 ‘겸손한 왕’이어야 합니다. ‘보잘것없는’ 민족을 긍휼히 여기신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통치해 나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은총의 약속을 기대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합니다. 불안해하는 연약한 백성들의 삶에 하느님처럼 관심을 기울여 ‘그들과 함께’하는 ‘성군’(聖君)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이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배워서 불안 속에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본문이 대림 4주일에 배정된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 계약’의 본질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영원한 계약’이 궁극적으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르고 ‘성전’을 지어 바칠 ‘그’(네 몸에서 난 자식, 사무하 7:12-15)는 일차적으로 ‘솔로몬’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것처럼(히브 1:5), 본질적으로 ‘그’는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집안)에 주신 ‘영원한 왕조’에 대한 약속이 멸망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 이야기에서 들은 것처럼, 약 1천 년 후에 ‘성모 마리아’를 통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루가 1:31-33). 정확히 말하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는(임마누엘) ‘다윗 계약’이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마태 1:1-17)와 루가(루가 3:23-38)가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시편》 대신 ‘희망의 노래’인 ‘성모송가’(聖母頌歌)를 노래했습니다. ‘마니피캇’(Magnificat, 찬양하다)이라 불립니다. 첫 구절이 이 ‘라틴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대림절기 <전례독서>는 해마다 한 번은 꼭 ‘성모송가’(聖母頌歌)를 부르도록 배정합니다(가해 대림 3주일, 나해 대림 3,4주일, 다해 대림 4주일). 그만큼 마리아가 부른 ‘희망의 송가’가 대림절기 여정 속에 있는 우리 마음에서도 힘차게 울려야 한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성모송가’(聖母頌歌)를 선택하든 아니면 <시편 89편>을 선택하든 1독서가 말하고자 하는 ‘정신’과 연결됩니다. 비천한 이들을 높여주시고 구원의 큰일을 해주시는 ‘계약의 하느님’(약속하신 자비), 인간을 당신이 거하시는 ‘사랑의 집’으로 삼으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며 바치는 ‘희망의 노래’라는 점에서 서로 통합니다.

먼저 고난 속에 있는 민족을 하느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89편>을 간단히 언급해 보겠습니다. <89편>의 주제는 ‘다윗 계약’(사무하 7:5-16)입니다. 시인은 ‘성모송가’처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자비)과 미쁘심(충실하심)을 고난 속에서도 찬미하며 기도합니다(시편 89:1-2; 5-18). 그의 신뢰의 근거는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은 계약’에 있었습니다(시편 89:3-4). 하느님은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막내둥이 목동 다윗을 ‘무조건적인 은총’(자비)으로 선택하시어 기름을 붓고 그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시편 89:19-20). 그 계약이 영원히 계속될 다윗 왕조의 터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붙들어 주시고 강하게 하시어 억압당하던 이스라엘을 도와주셨습니다(시편 89:21-23). 다윗에게 ‘진실’과 ‘사랑’으로 함께 하시며(시편 89:24) 그를 높여주시고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해 주셨습니다(시편 89:24-27). 그를 맏아들로 삼아 세상 임금 중에 가장 높은 임금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자비)을 영원히 간직하고, 그와 맺은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신다 약속하셨습니다(시편 89:28). 심지어 그의 후손들이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다윗을 기억하시어 ‘사랑’과 ‘성실’로 대하시고, 그 계약을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시편 89:29-34). 그토록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어여삐 여기셨고, 그와 맺은 언약을 영원토록 지키신다 맹세하셨습니다(시편 89:35-37). 하느님께서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일은 신약의 ‘교회’에 대하여 행하실 일을 예표 하기에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보기에 그 당시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처지는 하느님께서 ‘격노’하시어 그 계약을 폐기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시편 89:38-45). 왕과 백성의 형편은 이웃 백성과 원수들에게 약탈당하고 모욕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하느님께서 다윗과의 약속에 성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합니다. 눈물로 사랑과 미쁘심의 하느님께 간청합니다(시편 89:46-51). 다윗과 맺으신 계약에 근거해 자비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합니다(시편 89:49). 다시 한번 ‘새로운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고난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 기도가 ‘성모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믿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찬양하는 기도로 마칩니다.

이제 ‘희망의 노래’인 ‘성모송가’(聖母頌歌)를 묵상할 차례입니다. ‘성모송가’는 하느님의 자비, 즉 ‘약자들’을 돌보아주시고 높여주시는 하느님의 약속하신 자비를 찬미합니다. 이 ‘송가’는 야곱의 아내 ‘레아’의 고백 말고도(창세 29:35; 30:13)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와 비슷합니다(사무상 2:1-10).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약성경의 더 많은 인용문이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만일 이 ‘희망의 노래’가 온전히 성모 마리아의 것이었다면,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아는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그의 입술에 담긴 것이라 해도 성모 마리아가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감해지지 않습니다.

‘희망의 노래’는 성모 마리아의 시각에 따라 현재, 과거, 미래의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단락(루가 1:46-49a절)은 ‘현재’ 일에 대한 감격입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이어서 찬미하고 기뻐하는 이유, 즉 감사의 이유를 말합니다. ‘비천한 자신’(구원이 필요한 자신)을 ‘선택’하시고 ‘돌보신’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주님, 구세주, 전능하신 분,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여종’, ‘비천한’ 사람이라 부르는 ‘겸손’입니다.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감사의 이유를 말합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큰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 ‘큰일’은 자신이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하게 된 일입니다. 인류 구원의 도구로 선택된 일입니다. 다윗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러 오실 분의 ‘집’으로 선택된 일입니다. 엘리사벳이 칭송했듯이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루가 1:43)가 된 ‘복’입니다. 이제부터 오고 오는 모든 세대가 ‘복되다’ 칭송하는 복입니다. 성모 마리아에 일어난 일은 그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사건이기에 우리가 그렇게 칭송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락(루가 1:49b-53)은 ‘과거’의 일들에 대한 감격입니다. 하느님이 ‘온 인류’에게 베풀어오신 구원,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보이신 구원의 일들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단순화하면 한쪽은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힘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잘나간다고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었던 사람들은 낮추셨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단락(루가 1:54-55절)은 ‘미래’의 일에 대한 신뢰입니다. 과거에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이스라엘’을 도우셨듯이 미래에도 ‘약속하신 자비’를 ‘이스라엘’에게 충실히 이어갈 것임을 찬미하고 기뻐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믿은”(루가 1:45) 성모 마리아의 ‘희망의 노래’는 엘리사벳과의 ‘만남’을 통해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도 ‘희망의 세상’을 꿈꾸는 ‘주님의 집’인 ‘우리 마음’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2독서 《로마서》는 서신의 마무리인 ‘송영’(頌詠, doxology)입니다. 송영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처럼 기도 형식의 짧은 ‘송가’(頌歌)입니다. 몇 절 안 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본문이 원래의 편지에 속하는지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이유는 ‘사본’에 따라서 본문이 없거나 14장 23절, 또는 15장 33절 뒤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동번역 성경>에는 아예 생략되어 있지만 몇몇 고대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이 24절에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논쟁은 학자들의 몫으로 넘기고 우리는 본문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본문에는 사도 바울로가 편지를 시작하면서 밝힌 ‘복음의 알맹이’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바울로는 서신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복음’(기쁜 소식)에 대해 밝힙니다(로마 1:2-4). 그 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人性)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신성’(神性)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바울로가 전한 복음의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서신의 마무리인 본문에도 바울로가 밝힌 복음의 알맹이가 다시 요약됩니다. ‘시’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수미상관식’(首尾相關式) 구조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오랜 세월 동안 하느님께서 감추어두셨던 ‘심오한 진리’인데 이제는 명백히 나타났다고 증언합니다. 그 심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다’라는 약속입니다. 그 ‘심오한 진리’는 이미 ‘구약’에 명백하게 예언되었으며, 때가 되자 그 예언대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렇게 바울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과 ‘구약성경의 예언’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로마 3:22; 5:1-2).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는 은혜를 거저 제공해 주셨습니다(로마 3:21,24-30; 5:8).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를(로마 3:24-30; 5:6,8)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죄를 용서받습니다(로마 5:9).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이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허락하십니다(로마 6:3-5).

그렇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의 믿음’과 ‘하느님과의 화해’와 평화’에 이르게 하려는 하느님의 사랑의 뜻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은혜로 인간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사랑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가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육신’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이자 복음이라고 증언합니다. 바울로는 이 모든 구원의 능력을 지혜로 이루신 오직 한 분뿐이신 사랑과 은총의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 받으시기를 찬양하면서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멘’입니다.

끝으로 본문을 1독서 《사무엘하》와 연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안’을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영원한 왕조’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도들의 복음 전도(십자가와 부활)를 통해 세워진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야말로 다윗이 꿈꾸었던 ‘하느님의 집’의 성취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집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다윗 계약’과 ‘성모송가’에서 찬미하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아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약자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이야기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인 ‘수태고지’(The Annunciation)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의 집’을 ‘영원한 왕조’로 만드시겠다고 계약하신 지 약 1천 년이 지나 그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시겠다(임마누엘)는 ‘다윗 계약’이 성모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당신이 거하시는 ‘집’(교회)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 시작됩니다. ‘아기를 가져’(ἐν γαστρὶ, 루가 1:31)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가스테르’(γαστήρ)는 ‘배’,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성모 마리아는 9개월 동안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수태고지’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된 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이 있습니다. 전례성가 15장과 16장 외에도 일반성가 463장과 464장도 ‘마니피캇’이 주제입니다. 꼭 찾아서 고요를 유지하며 마음으로 찬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올려드리는 ‘수태고지’ 그림들도 잠시 묵상하면서 그 장면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마리아나 천사가 되어보기도 하고, 혹은 그 둘의 대화를 고요히 새기는 제3의 ‘누군가’가 되어보기도 하십시오. 분명 깊은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우선 분명히 유념할 일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수태고지의 핵심은 ‘성모 마리아’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인성’에 있습니다. 물론,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의 ‘순종’이 ‘성육신’의 통로였기에 ‘마니피캇’처럼(루가 1:48) 그는 ‘복되다’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이유는 ‘성모 마리아’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었다는 사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진정한 이유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진실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우리 가운데 오신 참 하느님’, ‘참 인간’이심을 증언하려고 기록된 이야기가 ‘수태고지’의 진정한 의도이자 알맹이입니다. 성모 마리아 역시 이 진실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게다가 이야기들, 특히 《루가복음》 1장에 담긴 고도로 세련된 극적 구조들과 소품들도 이 진실을 가리키는 은유들입니다. 이 점을 유념하고서 예수를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선포하기 위해 《루가복음》 기자가 전략적으로 배치한 예수 탄생 예고의 그림 속으로 한 발 더 다가가 보겠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특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낮’은 인간의 시간이고, ‘밤’은 영적 존재들의 시간이니 한밤중이 어울릴까요? 여러분은 천사의 방문이 어느 시간대였다고 상상하십니까? 계절은요? 물론, 교회력으로는 해마다 사순절 기간 속에 있는 3월 25일이 ‘성모수태고지’ 축일입니다. 그러면 봄이었을까요? 교회력이 정한 ‘수태고지축일’은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정했기 때문에 역산한 날짜일 뿐입니다.

‘수태고지’의 시간과 계절은 특정할 수 없으나 우리는 이야기 그림 속에서 분명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기치 않았던 ‘뜻밖에 사건’임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뜻밖에’라는 말도 전체 분위기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면 ‘뜻밖에 선택과 방문’처럼 보이는 ‘수태고지’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뜻밖에 시간, 장소, 인물’이 아니라 ‘예정된 시간, 장소, 인물’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물론 우리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한마디로 ‘결정적 시간’(카이로스의 시간), ‘거룩한 장소’, ‘은총의 인물’입니다. 이야기 그림에 좀 더 몰입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밤일지, 낮일지, 새벽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마리아’는 ‘뜻밖에 체험’ 속으로 빠져듭니다. 돌연 주위가 ‘빛’으로 가득하더니 이런 음성이 똑똑히 들립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 루가 1:28

‘마리아’가 받은 인사는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은총 따윈 필요 없어!’라고 자신에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 신앙이 성장했다는 것은 이 진실에 명확히 눈을 뜨는 시간의 축적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 받은 자’라는 ‘자각’이 우리 속에서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어서 아주 중요한 인사가 선포됩니다.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 루가 1:28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인사입니다. 우리는 이 인사말을 ‘감사성찬례’ 때마다 듣습니다. 사제는 <본기도>를 시작하면서, <복음서>를 선포하면서, <성찬기도>를 시작하면서, <축복기도>로 파송하면서 인사합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임마누엘, 또한 사제와 함께

그렇습니다. 감사성찬례는 우리가 오늘의 ‘성모 마리아’가 되는 거룩한 ‘수태고지’의 순간 속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제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는 ‘말씀과 성령’으로 ‘약속된 왕’, 즉 ‘임마누엘’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집’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통해, ‘영성체’를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모십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잉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우리의 ‘뱃속’에 거하십니다. 정말이지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만드십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이 사시는 ‘집’, ‘성전’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의 ‘자궁’에 당신의 ‘왕좌’(王座)를 두신 주님은 우리의 ‘뱃속’을 당신의 ‘왕좌’(王座)로 삼으십니다. 성찬례 속에서 주님은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의 은총과 전율을 맞이하기 전, 다시 말해 ‘거룩한 주님의 집’(왕좌, 성전)이 되기 전,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고 서둘러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을 제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그리고 우리는 더욱 서둘러 순종의 기도와 믿음을 고백합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 순종의 기도와 믿음의 고백은 ‘주님의 집’(성전, 왕좌)이 되기로 결단한 성모 마리아의 ‘순종하는 믿음’과 일치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가 1:38

이렇게 감사성찬례를 통해 ‘임마누엘’을 확인받고, 주님의 ‘성전’이 된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고난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라는 ‘임마누엘’(수태고지)을 알리는 또 한 사람의 ‘희망의 전령’(천사)이 됩니다. 따라서 오늘도 ‘임마누엘’을 확인받고, ‘약속된 왕’을 모신 주님의 ‘성전’이 된 우리가 결심할 삶의 모습은 이것입니다. ‘마니피캇’의 성모 마리아처럼(루가 2:46-55), 수태고지를 받은 신자와 교회답게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며 용감하게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삶입니다. 결연한 태도로 ‘구(舊)질서의 세상’에 ‘약자들을 위한 전복(顚覆)의 복음’, 즉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낳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복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모 마리아가 받은 ‘임마누엘의 인사’를 서로 축복으로 나눕니다. 그 뒷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 인사는 자칫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그 위험천만한 인사를 건넨 존재는 누구입니까?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גַּבְרִיאֵל)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나의 영웅, 전사’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은 ‘다니엘’이 본 ‘종말의 환상’을 풀어주었고(다니 8:15-26,9:21-27), ‘즈가리야’에게 나타나 요한의 수태고지를 합니다(루가 1:13). 그의 예고에 따르면 태어날 아기인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종말’에 오기로 예언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와서’ 백성들이 주님을 맞아들이도록 준비할 사람입니다(루가 1:19). 이처럼 ‘종말’과 관련한 일을 맡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때가 시작됨’을 암시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찾아들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천사’임을 직감했기에 당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당혹스럽고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나자렛 촌동네’에 살던 자신에게 천사의 방문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녀의 집은 천사의 방문을 감히 기대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곰곰이 생각했다”라는 말은 ‘식별하는 중이었다’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마리아는 두려워 떨며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천사가 나를 찾아오다니…
천사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격이 맞지…
거룩하다고 불리는 제사장을 만나야 격이 맞지….
예루살렘이나 지체 높은 집을 놔두고
이런 촌동네 우리 집을 방문하다니…
더군다나 나 같은 신분의 사람을 만나러 오다니…
그래, 어쩌면 나 말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마리아를 찾다가 잘못 방문한 것일 수도 있지…
이건 여러모로 격에 맞지 않아….

마리아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부’(富)는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저주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자에는 천사의 방문 같은 ‘호의’를 베풀 수도 있지만 가난한 집에는 절대 그렇게 하실 리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정말 천사가 주소를 잘못 찾아온 것일까요? 마리아가 두려워 떨며 식별하는 동안 전령인 천사는 ‘메시지’를 이어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 루가 1:30

가브리엘은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 ‘발현’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루가복음》에 보면, ‘즈가리야’ 같은 ‘제사장’도 성전 안에서 천사를 보고 몹시 당황했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루가 1:11-12). 사실, ‘성전’은 ‘천사’에게 어울릴 뿐 아니라 발현을 예상할 수 있는 이름처럼 ‘신성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마리아의 집’은 성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누추합니다. ‘제사장과 천사의 만남’도 있음 직합니다. 마리아는 어떻습니까? 그는 ‘제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에다 ‘약자인 어린 여성’(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여성의 지위를 생각하면 분명 파격입니다)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만남의 조건’(방문)에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구(舊)질서 체제’(옛 질서의 세상)에서나 통하는 그런 ‘조건들’에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리아를 안심시키려면 그에 어울리는 말씀을 해야 하는 데 도무지 경우에 맞지 않는 말씀을 계속합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 루가 1:31-33

세상에나!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마리아’가 느끼기에 그 방문은 ‘뜻밖에’ 일어난 일이기에 천사는 약혼 기간 중인 그를 좀 더 배려해야 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자칫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무례한 말씀’입니다. 물론, 다른 처지에서 들었다면 엄청난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마리아가 결혼한 지 1년쯤 지난 ‘부인’이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갓 약혼한 10대의 처녀(소녀)일 뿐입니다. 당시 약혼 기간은 1년쯤 됩니다. 그 기간은 ‘신부 수업’도 해야 하지만 신부에게 ‘흠결’이 없음을 보증하는 일종의 검증 기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천사의 메시지는 ‘복음’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습니다. 왜 이렇게 마리아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까? 어째서 수많은 여인 중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선택’해서 ‘아기 예수’의 엄마가 되게 하는 이 위험천만한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고요히 성찰해 보면, 마리아의 놀라움과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뜻밖에 방식’(시간, 장소)으로 찾아오시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주시는 ‘한 말씀’ 역시 이기적 욕망에 빠진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메시지를 전하라고 우리에게 보내시는 ‘전령들’도 ‘의외’일 때가 많습니다.

그 전령들은 ‘사제’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시’(詩) 한 줄, ‘그림’ 한 장, ‘영화’ 한 편, 저항하는 노동자가 들고 있는 ‘피켓 한 장’, 심지어 ‘동식물’이나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듣는 귀와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로부터 듣는 ‘메시지’가 ‘좋은 소식’일 때도 있으나 놀랍고, 불편하며,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2천 년 전뿐 아니라 오늘날도 하느님은 우리를 ‘놀라게’하는 데 선수십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만큼 무디어져서 그러시는 것일까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하느님께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마리아는 우선 ‘항변’합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루가 1:34

천사의 메시지는 자신이 ‘동정녀’(童貞女)이기에 ‘불가능하다’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아들의 어머니’나 ‘왕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꿈이란 뜻입니다. 천사가 잘못 찾아왔다는 항변입니다. ‘불가능하다’라는 마리아의 항변을 들은 천사는 이제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그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동원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 루가 1:35

그의 메시지는 마리아의 ‘어떻게’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랍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라는 선포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는 우리가 성찬례 때마다 <신경>으로 고백하듯이 ‘대속(代贖)의 진리’와 직접 연관되기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남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지만, 아담으로 말미암은 인류의 ‘죄’(원죄)를 상속받지 않으셨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은 전에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마리아와 함께’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겉으로 보기에 천사의 방문은 ‘뜻밖에 선택’, ‘뜻밖에 방문’, ‘예기치 않은 만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에 천사의 방문은 ‘예정된’ 선택, ‘예정된 방문’, 하느님의 ‘섭리’ 속에 일어난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뜻밖에 인물’이 아니라 섭리 속에서 은총으로 ‘예정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천사의 선포는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여러분(사제)과 함께”를 성찬례에서 순서와 순서 사이를 이어주는 ‘인사말’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단지 인사말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생명의 위협이라고 여겨서 항변한 ‘수태고지’(주님의 집)와 ‘똑같은 의미’의 무게를 갖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서로가 ‘주님의 집이 되라’(혹은 주님의 집이라)는 강력한 초대(확인)의 메시지입니다.

이 초대의 진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당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압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주님의 집’이 될 자격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꼭 영성체 직전에 가서 “주님, 주님을 제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순종과 믿음의 기도를 바칠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의 집’이 되는 일의 ‘책무’를 생각하면 ‘압박감’을 느낍니다. ‘주님의 물리적인 집’이었던 성모 마리아의 생애가 시므온의 예언처럼(루가 2:35), 우리 눈에는 결코, 축복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리아처럼 두려움 속에서 항변합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주님이 들어와 사시는 집이 된다는 말입니까? 나는 감당치 못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 루가 1:35

그렇습니다. 죄인인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주님의 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은총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시며, 자신의 몸을 단 한번 온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공로’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 십자가의 은총이 우리를 감싸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셔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들어와 사시는 집’이 됩니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받아 마셔라.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너희들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새로운 계약의 피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 성공회 기도서(마태 26:26~28; 루가 22:19~20; 1고린 11:23~25) –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받아 모시는 ‘성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그 몸입니다. 우리가 받아마시는 ‘잔’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의 ‘새로운 계약의 피’가 담긴 ‘새로운 계약의 잔’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주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영원히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친히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고, ‘당신의 집’이 되기에 합당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으나 그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합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희생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구원의 은총이 가능하냐고 놀라지 마십시오. 인간은 불가능하나 가브리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루가 1:37).

참으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나타나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집(사랑의 집)으로 삼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사랑의 주님과 하나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윗과 맺은 영원한 계약, 영원한 약속을 성취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은총에 감사하며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을 하느님께 드리어 산 제물이 되는 ‘거룩한 책무’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거룩한 책무’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집이고, 왕좌(王座)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고귀합니다. ‘교회’가 주님이 계시는 너무나 ‘거룩한 집’(성전)이기에 그 안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일은 ‘주님의 집인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이 머리이신 ‘교회’에서 다툼이나 분란이나 미움이 있어서는 안 되듯이 ‘주님의 집인 우리’ 자신도 이기적 욕망과 증오와 시기심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사랑과 평화의 왕이신 ‘주님의 집’이기에 사랑과 평화의 일이 어울리듯이 ‘주님의 집인 우리’ 자신도 사랑과 평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거룩한 책무’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사실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압박’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하나만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인간)가 ‘주님의 집’이라는 이 역설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축복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어떻게’라는 질문에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답변한 천사는 자신의 메시지가 진실임을 증거 하기 위해 ‘엘리사벳’ 이야기를 꺼냅니다. 구약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처럼, 엘리사벳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년에 아기를 가졌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 루가 1:37

이 결정적인 ‘한 말씀’이 그의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을 보내신 분은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고,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전능함이 마리아와 ‘함께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수태고지’, 정확히 말하면 ‘생명의 위협’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닥쳐올 엄청난 수치와 비난 앞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뜻밖에 선택’, ‘뜻밖에 방문’, ‘예기치 않은 만남’이 아니라 ‘예정된 선택’, ‘예정된 방문’, ‘하느님의 섭리 속에 일어난 은총의 만남’으로 확증할 ‘거룩한 책무’는 ‘마리아의 몫’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거룩한 의미를 갖는 시간과 공간으로 확증해야 할 ‘거룩한 책무’입니다. 자신이 ‘뜻밖에 인물’이 아니라 ‘예정된 은총의 인물’임을 확증해야 할 ‘거룩한 책무’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예정과 선택을 ‘현실화’하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사실, 성경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시고, 전혀 뜻밖의 사람들을 부르시는 거룩하신 하느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은 수많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창세 15:5). 하느님은 도망자 신세로 빈 들에서 잠든 야곱의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십니다(창세 28:10-22). 하느님은 ‘불붙은 떨기’ 속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출애 3:4). 하느님은 ‘나귀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민수 22:22-35). 하느님은 ‘타작마당’에서 기드온에게 나타나십니다(판관 6:37). 하느님은 ‘산꼭대기’에서 기도하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십니다(열왕상 18:20-40). 하느님은 ‘폭풍우’ 속에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욥 38:1).

이처럼 하느님이 그들을 만나신 곳, 나타나신 곳, 말씀하신 곳은 ‘성전’과 같은 화려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 예기치 않은 시간, 심지어 전혀 기대하지 않던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뜻밖에’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시간과 장소와 인물은 하느님의 ‘예정된’ 선택이고, 섭리였음을 우리는 이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이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가 1:38

‘목숨을 건’, 아니 ‘죽음을 넘어선’ 너무나 당당한 ‘고백’이고, ‘순종’이며, ‘믿음’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그 너머를 본 이의 ‘사랑’입니다. 오늘 1독서 《사무엘하》에서 들은 대로 하느님이 다윗과 맺으신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려는 순간입니다. 오늘 2독서 《로마서》 말씀처럼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해 오신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 ‘영원하신 구원의 계획’이 피어나려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전령의 사명을 마친 천사는 하느님의 어머니에게서 떠나갑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남긴 ‘시’(詩)는 말씀 나눔 마지막에 옮겨 놓았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수태고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뜻밖에 그 너머를 보라’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언뜻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뜻밖에’처럼 보입니다. 천사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자렛 촌동네를 찾은 것이 ‘뜻밖에’처럼 보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분이 예루살렘에 사는 통치자의 딸이 아니라 나자렛 촌동네 가난한 집 딸이라는 점이 ‘뜻밖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런 뜻밖에처럼 보이는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예정된 선택’, ‘예정된 방문’, ‘예정된 만남’, ‘예정된 은총’(섭리)을 알아차리는 눈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 섭리 속에 있다는 진실을 알아차리고 감사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연말이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불어닥친 ‘코로나19’로 “일상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고, 아직도 많은 사람이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깊어가고 경제는 극도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뜻밖에’ 불어닥친 재난으로 고통 속에 있는 약한 이웃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천사처럼 고요히 그들에게 다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나눔의 손을 내밉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우리가 당신과 연대하겠다’라고 손을 내밉니다.

그 순간 ‘뜻밖에’ 불어닥친 재난은 ‘예정된 만남’으로 바뀝니다. 그런 ‘실천들’이 많아질수록 인류에게 불어닥친 ‘뜻밖에’ 재난은 우리의 이기적인 삶을 일깨우는 ‘예정된 사건’으로 정체를 드러냅니다. 생명의 터전인 자연을 훼손하고 약탈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온 나를 ‘돌아서게’ 만드는 ‘은총의 사건’으로 정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나의 욕심과 이기적인 삶의 태도가 초래한 ‘안타까운 희생들’에게 기도 속에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합니다. 미래 세대에게 창조질서와 지구 생명이 회복된 새로운 세상을 물려주어야 할 ‘거룩한 책무’가 있음을 기도 속에서 발견합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 불어닥친 ‘뜻밖에 고난’은 ‘예정된 사건’이 됩니다. 우리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는 ‘거룩한 사건’이 됩니다.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새로운 나’가 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라는 천사의 선포는 진실임이 드러납니다.

정말이지 ‘뜻밖에’ 불어닥친 고난 속에 있는 세상은 ‘임마누엘’을 알려줄 ‘하느님의 전사’인 천사를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자각하도록 일깨워줄 ‘하느님의 용사’인 천사를 기다립니다. 거짓과 다툼과 죽음의 길이 아니라 진실과 평화와 생명의 길을 알려줄 ‘하느님의 영웅’인 천사의 방문을 사람들은 고대합니다.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로운 세상을 가져오실 분 앞으로 인도해 줄 ‘하느님의 심부름꾼’을 세상은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전사, 용사, 영웅, 심부름꾼이 누구여야 합니까?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 떠는 세상에 나가 하느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약’을 선포하라고 오늘도 교회를 천사로 파송하십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길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새 세상을 꿈꾸는 약자들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교회를 천사로 파송하십니다.

성탄절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신자들에게 ‘수태고지’나 ‘성탄 이야기’는 너무 익숙해져서 생명의 위협은커녕 별로 놀랍지도 않고 당혹스럽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천사’의 존재도 더는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더는 세상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차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손길, 그들이 얼핏 보인 아름다운 미소, 친절한 격려의 말 한마디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인식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를 ‘생명의 삶’으로 일깨우려는 ‘천사들의 방문’은 여전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일단 ‘멈추고’, ‘고요히 침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면 그렇다는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멈추어 서고 좀 더 고요해져야 합니다. ‘멈춤’은 소란한 ‘현실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일종의 ‘사다리’입니다. ‘고요’는 밖을 볼 수 없게끔 잔뜩 때가 낀 ‘마음의 창문을 닦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가 멈추어 서고 좀 더 고요해지지 않는다면 세상 속으로 ‘기습적’으로 침입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를 놓치기 쉽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의 주의를 끌고 싶어 하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실 길을 찾고 계십니다.

대림초를 바라보며 번잡한 마음을 멈춥니다. 고요히 두 손을 모으며 은총 안에 잠깁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우리를 둘러싼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차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께 인도하는 ‘별’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별’의 초대를 따라 ‘영원한 왕’으로 태어난 ‘거룩한 아기’를 만나러 벌써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도 ‘영원한 왕’을 알현하도록 별빛을 통해 초대된 동방박사들처럼 대림절기를 시작하는 ‘첫 번째 초’의 불빛을 보고 출발하였습니다. ‘영원한 계약’을 성취하는 ‘사랑의 집’으로 초대된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의 집,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도록 그 첫 번째 ‘희망의 초’를 통해 초대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놀라움, 그 불확실성에 빠지도록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때로 하느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뜻밖에 방식’으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그 역사하심은 천사의 수태고지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위협하시거나 방해하시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성모 마리아처럼 멈추고 고요해 짐으로써 ‘식별’해야 합니다. 그 일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선한 도구’(천사, 성모 마리아)로 사용하시려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계획)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요히 빛나는 네 번째 대림초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 이 진실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가 1:38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도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신 섭리’(계획)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비로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집’이 되는 ‘거룩한 책무’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마니피캇’(Magnificat)처럼 환희의 찬미를 부르며 타오를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눈부신 ‘새벽빛’이 오십니다. 어둠을 몰아낼 대림초의 ‘참된 주인’이 오십니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사랑의 선물’이 오십니다. 기쁜 노래로 주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하는 오늘의 성모 마리아가 우리이기를 축복합니다.

마리아!
우리는 한 아기를 위해
당신께 간청하러 왔습니다.
아기는 반드시 태어나야 하고
이 거룩한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칠 사람을 찾아
우리는 여태껏 기다려 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당신이
이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빚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마음을 열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라는 응답은
아기로 인해 당신에게 불어 닥칠
미래의 모든 고난과 슬픔까지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얼마든지 “아니요”라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라고 마음을 연다면,
우리는 여태껏 반복해 온
무의미한 방문을 그치고 쉼을 얻으며,
온 세상은 기나긴
기다림의 절망에서 깨어나
모두의 구원을 위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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