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3. 대림3주일

  • by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성자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지혜와 믿음을 주시어,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큰 영광과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1:1-4,8-11
  • 시편 – 126
  • 독서 – 1데살 5:16-24
  • 복음서 – 요한 1:6-8,19-28

대림 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뻐하여라, 참 빛을 증언하는 오늘의 세례자 요한들이여!’입니다.

어느덧 대림절기가 절반이 지났습니다. 전통적으로 ‘대림 3주일’ ‘가우데테 선데이’(Gaudete Sunday, 기쁨의 주일, 장미주일)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공회 ‘감사성찬례’는 그렇지 않지만, 오늘 천주교 미사(Mass) ‘입당송’(Introit)이 라틴어로 ‘가우데테 인 도미노 셈뻬르’(Gaudete in Domino semper, 기뻐하여라 항상 주님 안에서, 필립 4:4-5)라고 환호하며 시작하는 데서 유래합니다.

오늘(해마다 12월 11일에서 17일 사이에 대림 3주일이 옵니다)을 기점으로 대림절기 주제도 ‘전환점’을 맞습니다. 대림 1, 2주일 <전례독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이 기간 교회는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측면’에 맞추어 삶을 묵상하도록 안내합니다. ‘참회’와 ‘절제’와 ‘근신의 생활’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도록’ 신앙안내를 합니다. 한마디로 분위기가 엄격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다 대림 3주일이 되면 그간의 ‘엄격했던 기다림의 분위기’에 전환이 일어납니다. <전례독서>를 통해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기쁨’을 주제로 하는 <전례독서> 배정입니다. 엄격하고 무거웠던 기다림의 분위기 속으로 ‘기쁨의 빛’이 힘차게 쏟아져 내리고 공기 속으로 퍼져갑니다. 그간의 기다림의 여정이 수고로웠던 신자들은 ‘기쁨’을 주제로 한 위로와 희망과 격려의 말씀을 들으며 잠시나마 ‘쉼’을 얻습니다. 그 ‘쉼’을 통해 임박한 구세주의 성탄을 향해 설렘과 기쁨으로 나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오늘 이후부터는 대림절기의 주제는 아기 예수로 오시는 구세주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성당마다 엄격했던 분위기를 밝게 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시작합니다. 전례색이나 사제 제의도 오늘만은 ‘보라색’에서 ‘장미색’으로 변화를 줍니다. 잘 보시면 세 번째 대림초가 장밋빛을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림 3주일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기다림의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게 ‘기쁨의 빛’을 선포하는 <전례독서>를 차례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사명과 영원한 계약의 기쁨입니다.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새 세상을 꿈꾸는 ‘예언자의 기쁨’에 찬 선포입니다. 멸시와 천대 속에 의지할 곳 없던 약자들의 인생역전, 약자들이 기를 펴는 새 세상, 약자들의 인권이 회복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예언자의 기쁨’입니다. 메시아는 불의와 억압, 억울함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고난에 찬 사회와 정치 질서를 폐하고, 정의와 찬양이 넘치는 기쁨의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제 2이사야(40장-55장), 제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사실, 각각의 첫 장(1장, 40장, 56장)에 기록된 첫마디 말씀이 이어지는 ‘장’(章)들 전체의 메시지를 요약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 1이사야(1-39장)는 “나에게 반항하는구나.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2-3절)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책망과 심판의 선고’가 전체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제 2이사야(40-55장)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1절)고 하시며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이 전체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제 3이사야(56-66장)는 “바른 길을 걷고 옳게 살아라”(1절)라고 하시며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메시지임을 암시합니다.

오늘은 2이사야와 3이사야를 구분하는 신학적, 역사적 근거 몇 가지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제 2이사야(40-55장)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황폐화된 상황입니다. 선포의 대상도 아직 바빌론에 체류하고 있습니다(이사 44:26-28; 48:20; 49:19; 52:9). 심판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고,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되며(40:1, 9, 21-31; 41:10-14, 27; 43:18-21; 48:20-22; 49:13; 51:9-16; 52:7-12; 54:11-17; 55:1-13)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제 3이사야(56-66장)는 바빌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 포로시대는 끝이 났고, 포로 중의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귀향한 상황입니다. 즉 무대가 ‘예루살렘’입니다(56:8).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의인과 악인의 구분)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59:9-11; 65:13).

제 2이사야는 무너진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을 선포합니다. 종교의식, 제의에 관한 언급도 없습니다. 또한 사회, 윤리적 차원의 책망이나 언급이 별로 없습니다. 제 3이사야는 성전 건축은 이미 완료된 상태를 말해줍니다(56:7; 60:7). 그래서 안식일 준수의 강조, 금식에 대한 언급, 성전예배에 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56:2; 58:13; 66:23). 또한 윤리적 삶과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56:1,9-12; 57:1-13; 58:1-14; 65:1-12).

이런 배경 이해에 근거해 제 3이사야에 해당하는 1독서 본문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사야》 61장은 ‘예루살렘’(시온)이 받을 영광을 노래하는 60-62장 속에 위치합니다. 60-62장은 《이사야》뿐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시온(예루살렘)의 영광스런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의 절정입니다. 60장 첫머리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대상인 ‘너’는 ‘예루살렘’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위에 비치고, 그 영광의 빛으로 예루살렘은 빛을 발합니다(60:1-3). 흩어졌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60:4), 뭇 민족과 제왕들은 예루살렘으로 금은보화를 가져올 것이며, 그들도 하느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60:5-9,11). 하느님께서 불순종한 죄 때문에 예루살렘을 심판하셨으나, 이제는 이방인들까지 와서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쌓을 것입니다(60:10). 해보다 밝은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 예루살렘을 비추고, 예루살렘의 슬픔의 날은 끝날 것입니다(60:19-20).

특히, 61장 1절부터 3절은 한 신비스러운 인물의 도래와 사명을 예언합니다. 물론 1차적으로 이 말씀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다는 ‘자의식’을 가진 한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그의 사명은 ‘전령’(傳令)처럼 ‘구원의 복음(기쁜 소식)’을 시온(예루살렘)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포는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 사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즉 ‘구원의 선포’가 ‘구원 성취의 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이 말씀을 전령으로 파송된 ‘예언자 자신의 자의식’에 찬 선포라기보다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합니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온 인류에게 전하는 예언자’,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이루실 일에 대한 예언으로 말입니다.

《이사야》 11장, 36장, 61장에는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일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신비스러운 인물’의 가장 우선하는 ‘사명’은 ‘억눌린’(가난한) 자들에게 ‘복음’(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성취하는 일입니다. 찢긴(상처난) 마음을 ‘치유’하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성취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포로’나 ‘갇힌 자들’은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는 포로가 아니라 ‘빚’ 때문에 고통 하는 일종의 ‘채무 노예들’이거나 그 비슷한 처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인물(메시아)은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반겨주실 해, 즉 ‘희년’(은혜의 해)과 ‘원수 갚으실 기쁨의 날’(온전함의 회복)을 선포하고 성취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인물은 ‘지금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지금’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지금’ 재를 뒤집어쓰고 ‘뉘우치는’ 사람을 일으켜 ‘빛나는 관’을 씌워줍니다. ‘상복’을 대신하여 ‘기쁨의 기름’을, 침울한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게 합니다.

이처럼 메시아가 오시어 이루실 ‘장래의 변화’를 서로 대비되는 개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메시아가 오시면 ‘사회적 약자들의 인생 역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자들과 강자들 위주로 돌아가는 인간사회는 총체적인 면에서 전복될 것입니다. ‘성모송가’처럼(루가 1:46-55), 약자와 억울한 처지 사람들이 ‘기’(氣)를 펴는 기쁜 소식, 즉 새 질서, 새 세상의 아름다운 회복이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자 이사야는 꿈꾸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메시아가 오시어 성취하실 일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루가복음》 기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의 공생애 취임사’로 배치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 대목을 펴서 읽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 루가 4:21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 선언이 명확히 드러나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를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따르는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주님이 오시어 성취하실 새 질서, 새 세상을 고대하는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이들의 입과 피난처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도 사회적 약자와 억울한 처지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관심 속에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반(反)신앙적이고, 반(反)그리스도교적인 삶은 없습니다. 유다 백성은 바로 이 일들에 불순종했고, 무관심했기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역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억울한 이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참여에 무관심하다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말을 못 믿겠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후심판’을 떠올리십시오(마태 25:3-46). 정말이지 지금도 눈물짓는 사람들, 억울한 처지 사람들, 약자들과 마음의 자리를 같이 한 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면 깨어있는 삶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주신다고 선포합니다(8절). 적들의 조롱 앞에서 낙담한 그들에게 ‘하느님의 계약이 결코 파기될 수 없다’라는 확신을 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여전히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에 뭇 민족과 나라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일어난 그 모든 변화를 보고(4-8절), 하느님께 복 받은 자들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9절).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고 기뻐하는 ‘나’”는 예언자나 어느 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시온(예루살렘)의 ‘의인화’입니다(10절). 하느님께서 시온에 ‘구원의 빛나는 옷’과 ‘정의(공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입혀주십니다.

참고로 오늘 배정된 <시편 126> 대신 ‘성모송가’(루가 1:46하-55)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약자들의 인생역전, 약자들과 억울한 처지 사람들이 ‘기’(氣)를 펴는 새 질서의 세상을 꿈꾸며 기쁨의 찬미를 바친 ‘송모송가’의 정신이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던 세상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모송가’ 첫머리와 이사야 구절은 딱 포개집니다.

야훼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 이사 61:10a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 루가 1:46하~47

본문에 ‘구원과 정의’가 짝으로 쓰이는데, “옷을 입힌다”라는 비유는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맨 마지막 구절은 다시 3절 끝으로 돌아갑니다(정의의 느티나무 숨, 손수 심은 것). 하느님은 ‘정의’가 바로 서고 ‘찬양’이 넘쳐흐르게 하십니다(11절). 사실, 하느님께서 구원(정의) 행동을 하시면 구원받은 자들은 찬송하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정의’(구원)와 ‘찬양’이 굳게 결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교(政敎) 분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주로 꺼내는 말입니다. 그들은 오해합니다. 교회는 정치 권력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사야 말씀에 기반하여 ‘정의가 세워지는 일’에 관심을 둡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손들고 찬송할 권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찬송은 혼자서도 할 수 있으나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세상을 꿈꾸며 교회는 오늘도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3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가 불의와 억압, 억울함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고난에 찬 ‘구질서’(舊秩序)를 폐하고, 정의와 찬양이 넘치는 ‘새 질서’를 가져오실 것이라 내다보며 기쁨에 찼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루가 4:21). 그 말씀이 오늘을 사는 교회, 즉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 현실화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평하고 평화로운 세상,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기회와 과정이 보장되는 새 질서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선한 발걸음은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26편>은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해방)에 대한 기쁨과 감사, 그 일을 계속해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대림 1, 2주일에 배정된 다른 시편들(80편, 85편)처럼, <126편>도 ‘구원’(회복)이 주제입니다. 참고로 대림 4주일에 배정된 <89편>은 다윗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기다림의 절기답게 하느님의 변함없는 계약, 즉 그 사랑과 신실하심이 다시 한번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신 대반전을 노래하는 <126편>의 역사적 배경은 포로기 이후로 보입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유다 백성이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공동체를 ‘재건’(회복)해 가던 ‘고난의 시기’입니다. 포로민 전부가 귀환한 것은 아니고, 아직 일부는 바빌론에 남아있습니다. 아마 2차 포로 귀환의 주역인 ‘에즈라 시대’일 것입니다.

구원의 희망 가득한 이 노래는 짧지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1-3절)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후반부(4-6절)는 하느님께서 이루실 완전한 ‘구원’(회복)에 대한 기도와 기대입니다. 역시 전반부 못지않게 인상적인 이미지가 돋보입니다.

전반부에서 시인은 대반전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암울했던 바빌론 귀양살이를 끝내고 ‘예루살렘’(시온)으로 돌아온 ‘기쁨의 대사건’을 되돌아봅니다. 그 ‘해방’(구원)사건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권능으로 일어난 ‘대반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양살이 중에 예언자들로부터 ‘구원’(회복, 해방)에 대한 선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그 예언이 성취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해방’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맛본 그 ‘해방’(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이렇게 생생히 묘사합니다.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주시던 날, 꿈이든가 생시든가! 그 날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 같은 웃음 터지고 흥겨운 노랫가락 입술에 흘렀도다. – 시편 126:1~2a

마치 어린아이처럼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순수한 기쁨, 하느님의 위엄과 은총에 대한 경이를 찬미합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살던 그들은 슬픔과 탄식(신음)과 절망에 잠겨 있었습니다(시편 137). 그러나 하느님의 개입하심으로 그들의 상황은 대반전을 맞았습니다. 슬픔과 탄식과 절망은 기쁨과 웃음과 흥겨운 노래로 ‘역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날을 맞이했습니다. 심지어 “저들의 하느님은 어디 갔느냐?”(시편 79:10)라고 과거에 그들을 모욕하고 조롱했던 다른 민족들까지도(시편 79:4) 주님께서 행하신 ‘대반전’, 그 놀라운 ‘구원(해방)의 일’을 고백하고 찬미합니다(2절b).

후반부(4-6절)에서 시인은 ‘고난의 현재’를 사는 민족을 위로하며 공동체 재건을 위해 기도를 바칩니다. 그들이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도 어느덧 옛일이 되었습니다. 처음 그들이 귀향했을 때 그 거룩한 땅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였고,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눈물 속에서 공동체 재건에 나섰지만, 방해하는 주변의 강력한 적들 때문에 고난을 겪습니다. 그야말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공동체는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시인은 그런 처지의 민족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위대한 ‘구원의 일’을 하시도록 간청합니다. 민족의 운명을 어서 속히 ‘회복’시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실 ‘완전한 구원’(회복)을 확신하면서 상호보완적이고 인상적인 이미지들로 ‘민족에게 일어날 구원(회복)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는 ‘사막의 격류’(와디, wadi)이고, 다른 하나는 ‘농부의 파종과 추수’입니다.

우선, ‘격류’부터 보겠습니다. 시인은 사막인 ‘네겝’을 떠올리며 아직도 바빌론에서 돌아오지 못한 동족을 위해 기도합니다(4절). 죽은 듯 말라 있던 ‘네겝’ 강바닥이 ‘우기’(雨期)가 되면 ‘일순간에’(강력하고 빠르며 풍부하게) ‘물’로 가득 찹니다. 죽음의 땅이 ‘생명의 원천’으로 회복되고 변화됩니다. ‘우기’(雨期)가 되면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바빌론에 포로로 남아있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한꺼번에 모두’(강력하고도 풍부하게) ‘귀환’(구원)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민족의 구원’(회복)을 ‘우기’(雨期)의 ‘격류’(와디, wadi)처럼, 갑작스럽고 빠르게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시라는 기도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민족의 현재 삶을 ‘풍성한 생명력’으로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대반전의 힘’은 오로지 하느님께 있다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격류’처럼, 즉 인간이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구원’(회복)이 갑작스럽게 하늘로부터 선물처럼 주어진다면 거기서 인간이 얻을 ‘보람’은 없습니다.

이 점을 알았던 시인은 다른 한편으로 ‘농부의 파종과 추수’ 이미지를 동원합니다(5-6절). 이 이미지를 통해 ‘민족의 구원’(회복)이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음도 상기시킵니다. 그 ‘미래의 구원’(회복)이 오랜 시간 수고하고 기다린 후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이루실 미래의 ‘구원’(회복)에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만큼 ‘보람’도 크다는 이미지입니다. 모름지기 인생은 ‘눈물의 계절’이 선행한 뒤에 위대한 ‘기쁨의 계절’을 맞이하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구원’(회복)을 완성하실 때까지 그저 멍하니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새 세상을 주실 때까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실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주님이 이루실 ‘구원과 회복’, 그 ‘대반전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진실하신 주님은 곡식단을 안고서 노래하는 농부처럼, 분명히 우리에게 수고의 결실을 품에 안겨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 자녀 삼아주신 평화의 주님이 함께하시는 한(1데살 5:23-24) 결코 눈물이, 탄식이, 절망이 우리의 ‘마지막’일 수 없습니다. 우리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구원(회복)의 하느님이시며, 대반전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126편>은 고난의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근거를 선포합니다. 그 근거는 오로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께 있다는 확신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126편>을 묵상하며 가슴에 깊이 새길 교훈은 무엇입니까? 현재 어떤 ‘고난’(슬픔) 속에 있든지 그 고난은 ‘기쁨’으로(구원으로, 희망으로) 변화되기 위한 ‘필수과정’이라는 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고난’은 그 속에 ‘기쁨’(구원, 회복)의 씨앗이 은밀히 싹트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속에 장차 위대한 결실로 나타날 ‘신성한 씨앗’이 바로 고난입니다. 희망의 하느님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어 새로운 삶의 미래, 즉 영원한 기쁨의 미래를 열어 주시려고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새 질서의 세상을 향한 우리의 희망은 주님이 오시면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언론개혁과 검찰개혁의 고난 속에 있지만, 깨어있는 시민이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새 질서의 도래를 향한 우리의 기다림은 ‘영원한 기쁨’으로 대반전 될 것입니다. 대림절기의 주제입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주님의 재림에 근거한 사도 바울로의 권면과 마지막 격려의 인사입니다. ‘대림 3주일’을 ‘가우데테 선데이’(Gaudete Sunday, 기쁨의 주일)라 부른다고 했는데, ‘항상 기뻐하라’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기쁨’은 뒤따르는 권면인 ‘기도’와 ‘감사’와 더불어 ‘믿음의 3대 실천항목’이라 불립니다. 사실, 그의 권면에는 박해와 고난 시절을 살던 초대교회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3대 실천항목’이 쉽게 지켜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권면들에는 ‘항상’, ‘늘’, ‘어떤 처지’라는 부사(副詞)가 붙어 있습니다. ‘항상’과 ‘늘’이라는 부사(副詞)는 ‘시간’과 관련되고, ‘어떤 처지’라는 부사구(副詞句)는 ‘상황’(환경, 외적 조건)과 관련됩니다. 내용으로는 일맥상통하기에 ‘항상, 늘, 어떤 처지’에서든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바울로는 ‘믿음의 3대 실천항목’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느님의 뜻’이라고까지 선언합니다.

다시 질문해 보겠습니다. ‘항상, 늘, 어떤 처지’에서든 그의 권면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의지적 결단으로 될 수 있는 일입니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바울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쁨’이란 단순히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갈라 1:6)이자, ‘성령의 열매’(갈라 5:22)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권면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총과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사제는 ‘세례성사’를 베풀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이들의 마음을 채워주소서. … 이 물로 세례받는 이들에게 성령의 은총으로 새 생명을 얻게 하시며 … 성령의 힘으로 이들을 지켜주시고 그 마음속에 진리를 채워주시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소서. – <성공회 기도서 330~337>

주교는 ‘견진성사’를 베풀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종 ( )에게 성령을 내리소서. 그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시고 한평생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 <성공회 기도서 345>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세례성사’를 통해 ‘성령의 날인’(捺印)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해 세례의 책임과 신앙의 헌신을 다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바울로의 권면에 따르면 어떤 면에서 달라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2독서 말씀 묵상 그림으로 수태고지를 쓰는 이유는 바울로가 권면하는 신앙의 3대 실천항목이 성모 마리아에게서 가장 잘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기뻐하는 삶’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능력’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님처럼(루가 10:21) ‘아버지’로 인한 ‘기쁨의 삶’을 세상에서 ‘항상’(늘, 어떤 처지에서든지) 살아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하바꾹 예언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구원의 하느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선포합니다(하바 3:17-18).

바울로도 ‘항상 기뻐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권면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환경’(상황, 외적 조건)에 따라 ‘마음’이 휘청거립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랬으나 지금의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에 우리는 ‘환경’ 때문에 마음이 더는 휘청거리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세상의 어떤 환경(문제상황이나 고난)보다 크시다’라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마태 6:25-33). 우주의 한 점을 시작하시고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를 보존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은총과 능력’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기쁨의 근거와 원천’이 ‘환경’(외적 조건, 상황)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언제나’ 몸으로 드러내야 할 ‘거룩한 예배자’입니다. 우리의 ‘순수한 기쁨’이 ‘환경’에 지배받지 않으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점을 오늘도 성찬례를 통해 함께 고백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외적 조건’은 변할지라도 우리 구원의 하느님은 ‘항상’ 신실하시고 변함없으십니다. 사실, 우리는 그 ‘어떤 상황’도 앗아갈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녀들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이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지만 절망하는 이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중입니다.

둘째, ‘기도하는 삶’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가 18:1).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요한 17장),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루가 23:34). 다니엘 예언자는 ‘왕의 금령문서’를 알고도 ‘하루 세 번’ 정기적으로 기도했습니다(다니 6:10-14).

바울로도 ‘늘 기도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항상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자세를 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기도에서 ‘음성’이나 ‘특정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로의 권면은 ‘언제나 어떤 처지’에서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라’라는 뜻입니다(사도 16:25-34). 진정으로 하느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당신을 ‘늘 주인으로 인정하는 이’를 기뻐하십니다. 그에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며, 그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십니다.

정말이지 ‘성령의 은총과 능력’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도’는 ‘세상’(환경, 고난, 병)을 이기는 능력입니다(마르 9:29; 야고 5:13-18). 전능하신 하느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얻는 원천이자 통로입니다(에페 6:1). 세상이 대격변 속에 있음을 목격하는 요즘, 우리는 꾸준한 기도로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골로 4:2; 1베드 4:7). 더욱이 기도의 본질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우리 아버지’와의 소통입니다(마태 6:9).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와의 친밀한 대화’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늘 기도’하며 살아가는 이들임을 ‘착한 행실’로 드러내야 합니다.

셋째, ‘감사하는 삶’입니다. <복음서>는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전합니다(루가 10:21; 요한 6:11; 요한 11:41; 루가 22:19-20). 관련 성구를 찾아서 앞뒤 문맥을 통해 감사드리는 ‘그때의 상황’을 묵상해 보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눔 지역의 ‘선교가 실패’한 후에(루가 10:13-16), 1인분의 식량을 손에 들고 배고픈 군중을 마주한 ‘빈 들’에서(요한 6:5-10), 사랑하는 친구의 시체가 있는 ‘무덤’ 앞에서(요한 11:38-40), 십자가 수난을 앞둔 ‘최후 만찬’ 자리에서(루가 22:14-16) 드린 ‘감사’입니다.

바울로도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자 ‘하느님의 평화’를 얻는 길이라고 권면합니다(필립 4:6-7). ‘어떤 처지’라는 말은 ‘모든 상황’, ‘무조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감사는 상대적이고 조건적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상대적이거나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오는 감사도 아닙니다. 이 모습 이대로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합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입니다. 오직 구원의 하느님께 근거한 감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은총과 능력’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이들임을 확신에 찬 모습으로 증언할 거룩한 책무가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불평하고 비방하며 원망을 터뜨릴 일이 아닙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찬미한 바울로와 실라처럼(사도 16:25-34), 어떤 처지에서든 기도하고 감사를 찾아내며 찬미하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감사’는 모든 일의 ‘주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이들의 진정한 태도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런 삶의 태도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세상은 정말 아무런 희망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실천으로 ‘하느님의 뜻’을 펼쳐 보여야 할 차례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능력을 간청하며 용기를 내십시오. 코로나19로 삶이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2020년을 ‘도둑맞은 해’라고 말합니다.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염원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도둑맞은 해가 될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성찰하게 만든 ‘대전환의 해’가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우리가 자연을 향해, 사회적 약자를 향해 저질러 온 지금까지의 악행들, 즉 억압과 폭력, 약탈과 부정, 불공정과 차별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결국 녹아내리는 빙산보다도 더 빨리 인류는 사라져갈 것입니다. 사실, 슬픔과 고난에 찬 이 세상에 기쁨과 공평과 정의와 평화의 새 질서 세상인 ‘하느님 나라’를 가져다주실 ‘영원한 계약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문밖에 와 계십니다.

‘믿음의 3대 실천항목’을 권면한 후에 바울로는 ‘불’이라는 친숙한 이미지를 이용해 ‘성령’을 사모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불’을 자신에게서나 교회 안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를 내적, 외적 환경만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서로 모여 기도하고 감사와 기쁨의 찬미를 부르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사랑과 친절로 서로를 섬기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자신을 겸손의 위치에 두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부지런히 선행을 실천하고 좋은 일의 모범이 되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씀”(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억하고 깨어 기다리는 일은 자신과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밝히 타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 이야기와 불평과 비방과 원망의 소리 때문에 자신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무관심과 거부와 독선 때문에 자신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교만과 속임수 때문에 자신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분열 조장과 악행 때문에 자신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예언)을 멸시하기 때문에 자신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불’은 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로의 권면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성화의 삶’을 축복하는 격려의 인사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23-24절). 그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가 우리 안에 계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명백히 교훈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결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지만, 그 일은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했다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서 거룩의 삶을 이루시려고 구세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 《요한복음》은 ‘참 빛’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기쁨’입니다. 그는 스스로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하느님께 기원을 둡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왔을 따름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본문에 맞게 주님의 오실 길을 진실한 태도로 겸손히 준비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일’이 그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밝힙니다.

그의 사명과 관련하여 본문 속에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위대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진실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올바로 대답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할 것이며,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제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로마에 협력하던 사회종교적 기득권자들)이 요한에게 보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예루살렘에 살던 유다인들에게 기원을 둡니다. 요한이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고, 그의 증언이 하느님께 기원을 둔 것과 대비됩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묻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누구요, 당신은?”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명령할 권한을 ‘누가’ 주었소? … 당신의 추종자에게 세례를 주라는 권한을 ‘누가’ 주었소? … 우리에게 죄를 상기시킬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주었소? … 누구요, 도대체 당신은?

사실, “나는 누구인가?”는 수 세기에 걸쳐 인간 내면 가장 깊숙한 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 산중 어딘 가에서는 이 질문을 ‘화두’(話頭) 삼아 면벽(面壁)하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이 질문은 우리가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크게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신성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도 그 질문을 마주했을 수도 있고, 아직 아니라면 꼭 한번은 직면해서 풀어내야 할 실타래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대답해야 합니다. 그는 우선 분명한 사실, 즉 ‘쉬운 일’부터 대답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이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부터 먼저 대답하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부터 말하는 편이 분명하고도 쉬운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아주 단순합니다. 하지만 진지합니다. 자신은 엘리야도 아니고, 그들이 기다리던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라고 명백히 대답합니다. 참고로 《마태오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기록했습니다(마태 11:14). 이것은 《마태오복음》 기자의 신학이 《요한복음》 기자의 신학과 다른 데서 오는 차이점입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율법과 예언서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약 전통의 정점으로 본 신학을 펼쳤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 기자는 그런 전통의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전통’보다 앞선, 심지어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었기에 그가 이전의 누구와 같은지 따위의 자격증조차 필요치 않다는 관점입니다.

아무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나 스스로가 ‘누구가 아닌지’를 분명히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신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힘과 지혜와 자원에 의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더 위대한 분이심을 고백할 때, 그분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체험합니다.

혹시 ‘메시아 콤플렉스’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일종의 ‘과대망상증’인데,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자기 몫이라고 착각하는 병입니다. 이런 병증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어릴 때 주위 사람에게 들었던 말들 가령, “널 믿어. 넌 잘할 거야. 날 실망스럽게 만들면 안 돼!”와 같은 ‘기대의 말’을 들을 때마다 뭔지 모를 부담감이 강화되고 작동됩니다. 우리에게는 회피하고 싶으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내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 안에 있는 이 ‘메시아 콤플렉스’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특히 섬김과 봉사란 말에 자주 노출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부터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찾고 있는, 당신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당신’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다 합쳐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이미 채워져 있습니다. 단지 우리 모두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좀 더 덧붙이자면 나는 ‘샘’(泉)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옹달샘’조차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샘’(泉)이신 주님께 연결된 하나의 ‘파이프’입니다.

또 이미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것처럼, 나는 ‘참 빛’이 아닙니다. 나는 참 빛이 당기어진 ‘등잔’입니다. ‘등잔’이 주인이 아니라 ‘빛’이 주인입니다. 빛 덕택에 내가 존재합니다. ‘나’는 내 안에 현존하시는 ‘참 빛의 도구’입니다. ‘나’는 영원하신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 빛은 결코 어둠에게 지지 않습니다. 간혹 깜박이더라도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나는 영원한 ‘사제’가 아닙니다. ‘나’는 영원한 대사제이신 분의 ‘도구’입니다. ‘나’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는 ‘평화의 도구’입니다. ‘나’는 정의가 아닙니다. 나는 ‘정의의 도구’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종일뿐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물론, 나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어서 얼마든지 도구의 삶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성실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실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런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언제나 예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이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 시간 내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주님께 의탁하십시오. 그 짐은 집이나 일터에서의 문제나 갈등, 지나친 책임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 무엇이든지 겸손히 주님을 초대하고 이렇게 아뢰십시오.

주님, 저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당신의 도구입니다. 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그리스도는 제가 아니라 오직 당신뿐이십니다.

만약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안도감’이 찾아들 것입니다. 나를 짓누르던 비현실적인 책임감의 무게가 제거될 것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힘과 기쁨과 희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 바울로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조만간 일상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 필립 4:13

초조해진 대사제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다시금 다그치듯 묻습니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해 줄 말이 있어야 하겠으니 당신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 요한 1:22

그들의 물음은 ‘진리’ 앞에서 ‘인격적 결단’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경청하려는 태도 없이 물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고민이 아닌 남의 고민을 대신해 주겠다며 나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의 눈과 귀는 멉니다. 진리가 곁에서 빛나고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랬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를 못 알아차릴 뿐 아니라 종국에는 그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마저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제야 자기가 ‘누구인지’ 대답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이미 분명히 말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 그는 그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 요한 1:7-8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 요한 1:23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 대해 《마태오복음》과 달리 전통의 경로 밖에 있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바리사이파에서 보낸 사람들이 대화에 등장합니다. ‘전통’에 천착해 있던 그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 – 요한 1:25

그들의 질문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 놀라운 진술을 이어갑니다.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오. 그런데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분이 당신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이 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 요한 1:26-27

그 당시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의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돌아오면 흙과 먼지투성이 신발을 벗기기 위해서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굽혀야 했습니다. 놀랍습니다. 많은 추종자를 얻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던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낮춥니다. 자신이 ‘참 빛’으로 증언하고 있는 ‘그분’과 비교할 때 스스로는 노예보다 더 낮은 처지에 불과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알리고자 하는 분의 위대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겸손의 사람이기 이전에 ‘진실’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존중했습니다.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기쁨의 예언자’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들을 배워야 합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의 음식, 차림새, 거주지는 결코 선망(羨望)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당시 권력가인 ‘헤로데’의 ‘불의’를 꾸짖었다는 이유로 생의 마지막 시기를 옥에서 보냈고, 참수로 정의로운 생애를 끝냅니다. 오늘날 누가 그런 삶을 부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과업을 재어 보았을 때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칭송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 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다간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자신의 빛이 아니라 예수님의 참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그보다도 더 큰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어찌 보면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과 온 동네 사람에게 그의 존재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어린양’을 기대하며 살았던 희망의 예언자였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며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기쁨’과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라고 말하였는데 너희는 그것을 직접 들은 증인들이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7-30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삶을 묵상해 보면 어떤 특징들을 보입니까? 그들은 ‘진실’하고 ‘겸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자각한 사람’입니다. 항상 ‘공평’과 ‘정의’에 관심합니다. 공평과 정의는 하느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굴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합니다. 그들은 목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입니다. 게다가 목소리 없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우리를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이러한 예언자의 특징들을 봅니다. 대림절기는 사회적 약자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목소리 없는 하느님께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시기입니다.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공평과 정의의 세상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가 아닌지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대답했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의 행동도 바로 이 두 가지를 보여주는 중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참 빛’을 증언했습니다. 우리 또한 빛의 증인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레자 요한처럼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 오실 길을 닦으며 간직했던 ‘기쁨의 삶’은 우리에게서 응답 되어야 합니다. 돈의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빛’으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그 빛을 바라보는 기쁨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기쁜 소식을 선포할 용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진실히 증언해야 하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구임을 겸손히 말해야 합니다.

주님이 참 빛이시고, 저희는 그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주님이 그리스도이시고, 저희는 단지 종입니다. 주님이 제 삶의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살아가는 데서 우리 ‘기쁨’은 솟아올라옵니다. 우리가 대림 3주차를 사는 ‘기쁨의 세례자 요한’이기를 축복합니다.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