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 6. 대림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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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회개를 선포하시고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에 귀 기울여 모든 죄를 멀리하고,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를 기쁨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40:1-11
  • 시편 – 85:1-3,8-13
  • 독서 – 2베드 3:8-15상
  • 복음서 – 마르 1:1-8

대림 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회개와 정의의 실천,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길 닦기’입니다.

해마다 성탄 무렵이면 많이 연주되는 아름다운 작품 중에 <예수, 인류의 소망과 기쁨: Jesu, Joy Of Man’s Desiring>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교회 칸타타’(성악곡)입니다. 그와 동시대 사람으로 ‘서양 음악의 어머니’라 불리는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이 있습니다. 어머니란 별칭이 붙었지만 그렇다고 여성은 아닙니다. 그의 ‘오라토리오’(줄거리가 있는 극음악) 중에 <메시아: Messsiah>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해마다 성탄 무렵이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품입니다.

예부터 음악과 노래는 우리 내면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말이나 글보다 오래갈 뿐 아니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만지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상황이라 연주회가 없을 테지만, 꼭 한번 검색해서 ‘바로크 시대’ 두 거장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마음의 위로와 고양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서양 음악사 이야기에 따르면, <메시아: Messsiah> 가사를 쓴 사람은 영국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입니다. 부자였던 그는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낱권으로 출간할 정도로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후원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신앙심 깊은 ‘국교회’(영국에서는 성공회를 그렇게 부릅니다) 신자였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이신론’(理神論, deism 신의 역사적 개입이나 기적을 부정하는 이론)에 맞서 예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심을 전하고자 <성경>과 <기도서>에서 발췌하여 ‘오라토리오’ 가사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Messsiah>라는 제목을 붙여 편지와 함께 ‘헨델’에게 ‘소포’로 보냈습니다.

독일 출신인 ‘헨델’은 영국으로 건너가 ‘오페라’(Opera) 작곡가로 활동했습니다. ‘오페라’는 ‘바로크 시기’에 시작된 ‘음악극’입니다. 영국 왕실이 그를 후원했고 영국민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영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의 전속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며 엄청난 명성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사업수완이 좋았던 그는 돈을 끌어모아 직접 ‘오페라단’을 운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흥행 실패로 그는 빚더미에 올랐고, 그 일로 쓰러져 오른손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습니다. 그의 나이 52세 봄날의 일입니다. 음악 인생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독일로 건너가 온천 치료를 통해 몸을 회복한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이때부터 그는 음악 인생의 방향을 ‘오페라’에서 ‘오라토리오’로 전환합니다. 실용적인 이유, 즉 오페라만큼 돈이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라토리오’는 그의 말년을 대표하는 장르가 됩니다.

이제 그는 50대 중반을 훌쩍 넘었고, 작곡 능력도, 명성도 더는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재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몹시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소포’가 전달됩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원고를 살펴보았습니다. 적어도 다음의 구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음으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 이사 53:3

그의 눈길을 붙잡을 만큼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의 처지와 포개졌습니다. 이 가사는 나중에 <메시아: Messsiah> 2부 23번 “주님께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네”로 작곡됩니다. 헨델은 처음부터 원고를 다시 살펴보며 자신이 받은 ‘영감’을 악보로 옮겨갔습니다. 그가 작곡하면서 겪은 일화들도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나눔 준비를 위해 <메시아: Messsiah>를 다시 들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1부 2번 “위로해. 내 백성”(이사 40:1-3), 3번 “모든 골짜기는 높아지리라”(이사 40:4), 4번 “주의 영광”(이사 40:5), 9번 “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여”(이사 40:9), 20번 “주는 목자요”(이사 40:11)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 말씀으로 만들어진 곡들입니다.

이 곡들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째서 ‘찰스 제넨스’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도 많은데, 굳이 《이사야》, 그것도 <40장>으로 <메시아: Messsiah>를 시작했을까? … 그리고 헨델은 왜 첫 구절을 그렇게 서정적인 선율로 노래하도록 작곡했을까?…

본디 잘 알려진 곡이 연주자에게는 제일 힘든 법입니다. <메시아: Messsiah> 1부 2번 “위로해. 내 백성”은 테너 ‘아리아’(Aria, 영창)입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다 보니, 첫 소절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청중의 ‘낯빛’과 연주회장의 ‘공기’가 달라집니다. 유튜브로 곡들을 감상하다 첫 소절이 맘에 안 들면 바로 다른 영상으로 전환하기를 몇 차례 했습니다. 그러다 정말 맘에 드는 음색의 테너를 만났습니다. ‘아리아’(이탈리아 말로 ‘공기’라는 뜻)란 말에 맞게 대단히 ‘서정적인 레가토’로 시작합니다. ‘서정적’이라는 것은 정서를 가득 담고 있다는 뜻이고, ‘레가토’는 둘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노래하는 기법입니다.

“Comfort ye, comfort ye My people” 저는 레가토로 연주되는 테너의 아리아를 들으면서,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확신에 찬 ‘희망’으로 밝아지는 음성을 들으면서, 제가 던진 질문들의 대답을 알 것만 같았습니다. 진실로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 그래, 낙원에서 추방당한 고달픈 인생들,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한 마디는 어쩌면 연민 가득한 ‘위로’이겠구나. 찰스 제넨스는 그것을 간파했구나. 그 마음을 이해한 헨델은 레가토로 연주되는 테너의 서정적인 음색 속에, 하느님의 그 마음을 담아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것이구나. 맞아. 고통과 절망의 어둠 속에 지친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연민에 찬 ‘위로’와 확신에 찬 ‘구원의 희망’이겠구나…”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코로나 19로 모두가 힘겹지만, 음악이 간직한 특별한 힘을 믿고 꼭 한번 감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제 <전례독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위로와 구원의 선포입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은(대표적으로는 1892년 Bernhard Duhm) 《이사야》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제 1이사야(1장-39장), 제 2이사야(40장-55장), 제 3이사야(56장-66장)입니다. 구분하는 근거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동기들의 차이 때문입니다. 간략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제 1이사야는 예루살렘(유다백성)의 죄에 대한 고발(기소)과 심판 선고가 지배적입니다. 제 2이사야는 심판이 이미 과거의 일이 되고, 하느님께서 유다 백성을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와 ‘희망’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제 2이사야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와 흥분, 희망과 위로, 낙관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제 3이사야는 실망과 좌절,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분위기가 강합니다. 오늘은 제 2이사야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바빌론에서 귀양살이 중인 유다 백성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선조들과 ‘언약’(내 백성)을 맺으신 ‘권능의 하느님께서 구원을 위해 곧 행차하신다’라는 약속입니다. ‘목자’처럼 그들을 고향으로 살갑게 인도하신다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한마디로 ‘제 2의 출애굽’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 있던 그들 위에 갑자기 ‘희망의 빛’이 쏟아져 내립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章)들의 서문 역할을 하는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8절)는 제 2이사야의 소명체험입니다. 후반부(9절-11절)는 시온, 곧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유다의 성읍들에 ‘주님의 승리’를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제 2이사야의 소명체험을 전하는 전반부(1-8절)부터 보겠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 중인 고달픈 유다 백성에게 ‘심판이 끝나고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라고 ‘첫 번째 위로’가 선포됩니다. 첫 도입부인 두 절에 사용된 주어와 동사 명령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 이사 40:1-2

제 2이사야는 첫 도입부를 위로와 희망의 근거인 ‘언약 관계’로 시작합니다. ‘나의 백성’과 ‘너희의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냅니다. 비록 그들이 바빌론에서 ‘복역 중’(죄값을 치르는 포로생활 중)이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조들과 맺으신 ‘언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것이 ‘해방과 구원이 온다’라는 첫 번째 위로 선포의 근거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디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일까요?

‘너희의 하느님’을 정확히 번역하면, ‘너희들의 하느님’입니다. 2인칭 복수입니다. 또 동사들 ‘위로하여라’, ‘일러라’, ‘외쳐라’는 모두 2인칭 남성 ‘복수’ 명령형입니다. 즉 하느님은 ‘복수의 대상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 ‘복수의 대상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구약성경> 학자들은 <40장> 도입부를 하느님이 주재하시는 ‘천상회의’(Heavenly Council)에 참여한 제 2이사야의 ‘소명체험’ 장면이라 해석합니다. ‘천상회의’에서 하느님은 메신저 역할을 할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 번이나 ‘위로하여라’가 반복되는 이유는 그만큼 그들의 처지가 ‘절박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위로하신다는 말씀은 한 번의 경우만을 제외하고(즈가 1:13) 모두 제 2이사야에만 나옵니다. 그들은 오랜 포로 생활에 지쳐 더는 구원(해방)도, 하느님도 희망할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총체적 절망 상태였습니다.

이런 참담한 처지의 그들을 하느님께서는 급히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조금만 지체해도 때가 너무 늦습니다. 그들 못지않게 하느님께서도 그만큼 ‘절박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라고 ‘천상의 존재들’(그리고 이 천상회의에 참여한 제 2이사야)을 보내십니다. 또 ‘위로하여라’라는 선포는 단지 말로만 안심시킨다는 뜻을 넘어 나쁜 상황이 달라지도록 ‘개입하시겠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 반복되었으니 ‘성취’에 대한 ‘확신’을 주님께서 강하게 피력하신 셈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이 전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복역 기간, 즉 ‘포로 생활이 끝났다’라고 ‘다정스레’(마음에 닿게, 테너의 아리아처럼) 전해야 합니다. 마치 엄마가 젖먹이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며 토닥이듯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집트 땅에 ‘모세’를 보내시어 이루신 ‘출애굽’ 장면이 생각납니다.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600년경부터 540년경까지 바빌론에서 포로로 두 세대 이상을 보냈습니다. 천상의 존재들(더불어 제 2이사야)은 주님의 백성을 격려하여 죄의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부드럽게 위로해야 합니다. 그 기간이면 하느님의 ‘징벌’을 충분히 받았고, 이제는 ‘구원’과 ‘위로’를 받을 때라고 ‘부드럽게’ 전해야 합니다.

더욱이 제 2이사야는 ‘포로 생활’이 유다 백성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처벌’(심판)이었다고 기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놀랍습니다. 바빌론 제국이 강대해서 그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빌론을 시켜 그렇게 ‘심판하셨다’라는 해석입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권자는 ‘하느님’이시라는 선포입니다. 정치적 차원의 행위가 종교적 차원으로 병합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죄과’를 ‘용서’받았습니다. 심판과 분노, 저주와 절망의 관계는 청산되었습니다. 자유와 회복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운명이 반전될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참된 회개를 했거나 행실을 바르게 해서가 아닙니다. 《시편》에서 노래하듯이(시편 85:2), ‘오시는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허물’을 ‘덮어주신’ 일방적인 은총 덕택입니다. 얼굴을 돌리신 주님께서 다시 ‘그들에게로 오시어’ 얼굴을 향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원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날 운명의 반전은 《시편》에서 노래하듯이(시편 85:10), 오로지 ‘오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은혜’(헤세드 חֵסֵד 사랑, 자비, 긍휼)와 ‘언약의 신실성’ 덕택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해방(구원)은 저절로 또는 우연히 얻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사람의 알량한 행실에서 구원이 올 수는 없습니다. ‘오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은혜’와 ‘주권적 결정’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위로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셨다면 잘하신 일입니다.

이처럼 제 2이사야는 자신이 들은 ‘위로와 구원의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절망 속에서 참담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그들과 ‘언약 관계’에 계신 분입니다. 저는 제 2이사야의 이 ‘위로와 구원의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소유, 자녀가 된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대림절기, 특히 코로나19의 어둠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를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제 2이사야는 유다 백성에게 ‘주님이 오신다’라는 ‘두 번째 위로’를 선포합니다. 그는 천상의 존재, 즉 ‘한 소리가 외치는 것’을 듣습니다. 그 ‘한 소리’는 ‘오시는 주님의 행차’가 편하실 수 있도록 ‘길을 미리 준비하도록 명령’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선포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한 소리’를 ‘세례자 요한’에게서 발견했습니다. 그 준비 명령이 ‘시’(詩)적 이미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3-5절). 여기 쓰인 ‘길을 내어라’, ‘길을 훤히 닦아라.’도 2인칭 복수 명령형 동사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인지 그 상대자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아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외치는 ‘한 소리’의 명령대로 사막에 길을 내고,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의 행차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제거하고, 주변의 길들을 ‘평평’하게 정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 앞에 미리 닦아놓은 준비된 길이 있는 ‘승리의 왕’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광스럽고 편안하게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한 소리’를 시켜 당신이 행차하실 길을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준비된 그 길을 통해 당신의 백성에게 의기양양한 왕처럼, 강한 용사처럼 행차하십니다(10절). 종국에는 유다 백성도 그 준비된 길을 통해 고국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들의 행렬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의기양양한 ‘승리의 행렬’이 될 것입니다.

이 길과 행렬의 이미지는 고대 바빌론의 종교행사를 반영합니다. 바빌론에는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그들이 섬기던 ‘신상’(神像)을 수레에 싣고 다니던 ‘화려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왕’이신 주님께서는 그 훤히 닦인 평탄한 길을 통해 ‘자기 백성’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10-11절). 이 모든 일을 명령하시고 성취하시는 이는 ‘주님’이십니다. 제 2이사야는 우상숭배자는 아니지만, 당신의 백성을 ‘목자’처럼 자상하게 인도하시는 이런 주님을 상상합니다. 그러니까 귀향하는 그 거대한 행렬은 단지 포로귀환이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신들의 싸움) 승리의 행차인 셈입니다.

그 ‘승리의 행렬’이 지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행차가 편하실 수 있도록 먼저 죽음의 땅인 사막에 길을 내야 합니다. 벌판에도 큰길을 훤히 닦아야 합니다. 사막과 벌판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선조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걸어야 했던 ‘시리아 광야’입니다. 또한 그 사막과 벌판은 많은 기적을 동반했던 ‘첫 번째 출애굽의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사막의 길과 벌판의 큰길은 ‘새 출애굽’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그 승리의 행렬, 즉 귀향길에 방해되는 주변의 길들을 ‘평평하게’ 정돈되어야 합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깍아 내리며,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야 합니다. 이 모든 명령은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듯이 유다 백성이 소홀히 했던 ‘정의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시편 85편> 맨 마지막 절에서 언급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소리’는 주님께서 친히 오시어 자기 백성을 해방(구원)하신다고 외칩니다. ‘모든 사람’이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 외칩니다(5절).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온 ‘인류’임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보편성’, ‘보편주의의 약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 요한 1:14

첫 번째 위로에서처럼 두 번째 위로의 선포에서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셨다면 잘하신 일입니다. 이제, ‘한 소리’가 예언자 제 2이사야에게 무엇을 외칠지 그의 책무를 명령합니다(6절).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이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 이사 40:6~7

주님의 백성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인간의(바빌론 사람들) 힘’은 풀과 꽃처럼 덧없다는 뜻입니다. 신뢰할 것은 오로지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 뿐이라는 선포입니다. 다시 말해 “복역 기간이 끝났다”(2절)라고 선포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권능’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거리와 아름다움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선포입니다.

여기까지가 제 2이사야의 소명체험입니다. <6장>에 기록된 제 1이사야의 소명체험과 비교됩니다. 특히 다른 점이 있다면 비록 그가 천상회의에 참여하고 있지만, 광경은 보지 못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음성과 천상 존재들의 음성만 들었다는 점입니다.

후반부(9절-11절)는 시온, 곧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유다의 성읍들에 ‘야훼의 승리’를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거의 폐허로 버려져 있던 예루살렘이 바뀌는 장면입니다. 귀환자들의 목적지는 유다 모든 도시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언덕입니다. 그 시온 언덕은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던 곳입니다.

<구약성경> 학자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를 두고 두 가지 상상을 내놓았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기쁨이 가득합니다. 하나는 귀향자 중 한 사람이 ‘전령’처럼 먼저 달려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유다 백성이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을 큰 소리로 전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빌론에 끌려가지 않고 황폐해진 예루살렘에 살던 이의 모습입니다. 애타게 동족들의 귀환을 기다리며 무너진 성벽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고 있었던 외로운 ‘파수꾼’입니다. 그는 거대한 귀환 행렬의 한 점이 지평선 저쪽으로부터 점점 커지는 것을 봅니다. 흥분과 기쁨을 담아둘 수 없습니다. 그는 높은 산에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 시편 40:9~10

그 ‘기쁜 소식’의 마지막은 대단히 파격적인 이미지로 끝납니다. 강한 팔로 다스리는 그런 남성적 권능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여성적인 이미지가 뒤따라 나옵니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뜯기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 이사 40:11

어머니처럼, 새끼 양들을 두 팔로 가슴에 안은 ‘다정한’(착한) 모성적 목자의 이미지입니다. 하느님께서 귀양살이하던 포로들을 ‘자상한 목자’처럼 고국으로 ‘살뜰히’ 인도하시는 광경입니다. 이 전에 이집트에서 그러하셨듯이 다시 한번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해방하시어 약속의 땅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우리 영혼의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게 하는 구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절기에 제 2이사야가 <전례독서>로 채택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심을 증언하는 구약의 복음서입니다. 성육신하시어 오실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사야》를 인용하고 있는(이사 40:3) 자기 복음서 첫 장의 첫머리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합니다. 로마제국의 황제에게만 붙이던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님께 붙였고, ‘새 황제의 등극’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시작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85편>은 민족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코라 후손들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세 단락(1-3절, 4-7절, 8-13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로 하느님의 ‘은혜’와 ‘구원’을 감사하며 간구하는 노래입니다. 역사적 배경은 유다 백성이 바빌론 귀양살이(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직후로 보입니다. 그들은 귀국했으나 그 거룩한 땅의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였고,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공동체 재건을 방해하는 주변의 강력한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공동체는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시인’(공동체)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와 ‘구원’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1-3절). 오래전 그들은 ‘언약’에 ‘불순종’한 죄악으로 인해 하느님의 ‘격분’과 ‘진노’를 사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1독서 《이사야》에서 들었던 ‘바빌론 귀양살이’라는 ‘징계’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징계’를 멈추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격분을 말끔히 거두시고, 타오르던 진노를 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절망 속에 있던 유다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허물이 주님 눈에 보이지 않도록 ‘덮어’주셨습니다. 꿈에 그리던 고국,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주님의 소유인 가나안 땅’(창세 12:7; 15:7-21; 레위 25:23; 민수 34:2-12)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과거에 베풀어주신 ‘은혜’와 ‘구원’입니다. 이 ‘회복’은 그들이 참된 회개나 행실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비하신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 덕택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은혜와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어서 ‘시인’(공동체)은 ‘현재의 구원’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4-7절). 주님의 격분과 진노가 말끔히 거두어졌다는 ‘안도감’ 속에서 ‘지금 여기’ 베풀어지기를 원하는 주님의 은혜, 즉 ‘사랑’과 ‘구원’을 간구합니다. 오늘 배정된 본문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처지를 생각할 때, 또 코로나19로 고통을 겪는 세계 사람들을 생각할 때 몹시 아쉬운 배정입니다. 우리뿐 아니라 인류가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의 구원’이 절실한 시절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베풀어주셔야 할 ‘사랑과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절망과 두려움의 어둠 속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공동체 중의 한 사람이(아마도 시인) 마치 예언자처럼, ‘오시는 주님’께서 ‘미래’에 베풀어주실 ‘은혜’, 즉 ‘평화’와 ‘구원’을 확신하며 찬미합니다(8-13절). 주님께서 오시면 그들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약과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는 백성에게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그들이 선물로 받을 구원 세상, 즉 그 거룩한 땅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모습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합니다.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 시편 85:10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그 땅의 모습이 사랑을 나누는 연인으로 ‘의인화’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헤세드’(חֵסֵד)입니다. ‘은총’, ‘자비’, ‘긍휼’(자선), ‘호의’, ‘선함’으로도 번역됩니다. 특히 ‘주님의 언약(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은총, 자비, 긍휼, 복)을 의미합니다(출애 20:6; 시편 23:6; 25:10; 36:10; 마태 19:17; 요한 14:21; 로마 10:17; 2디모 1:13; 히브 4:16). 그리스어로는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로 번역했습니다. ‘진실’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에메트’(אֶמֶת)입니다. ‘진리’, ‘충실’, ‘견고함’으로도 번역됩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쩨데크’(צֶדֶק)입니다. ‘옳음’, ‘의로움’, ‘정당함’으로도 번역합니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우리가 잘 아는 ‘샬롬’(שָׁלוֹם)입니다. ‘평안’으로도 번역하기에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샬롬’은 개인의 실존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구원의 상태’입니다. 창조의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생명력’이 넘치는 ‘온전함의 상태’입니다.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포괄하는 완벽히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모든 창조 세계를 포괄하는 하나인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바로 ‘샬롬’입니다. 유다 전통에서 이러한 ‘샬롬’(평화)은 ‘메시아’가 성취할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영광이 땅에 나타난 모습, 즉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에서 영감을 얻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요한 1:14,17).

그러나 시인의 말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우리 일상에서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짝’을 이루어 같이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을 통해 성찰해 보십시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려는 ‘사랑의 마음’과 이웃의 잘못을 끝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진실의 마음’이 우리 내면에서 충돌합니다. 그때 여러분의 내면에서는 무엇이 이깁니까? 어떤 마음이 이기든 이웃과의 관계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사랑과 진실’이 ‘짝’을 이루는 순간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진짜로 ‘사랑한다’라는 느낌이 들 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진실’을 직면합니다. 그때의 진실을 ‘불편한 진실’(자신의 추함, 연약함)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진실’을 직면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거짓’(허상, 망상)을 고집할 때가 많습니다. 그 순간 사랑과 진실은 짝이 아니라 원수입니다.

‘정의와 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정의’는 많은 경우 자기 기준, 자기 옳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욕심’으로 포장된 정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공동체의 ‘평화’는 요원합니다. 오히려 자기 옳음에 붙잡혀 살아온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인정하는 순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도 공동체에는 저절로 ‘평화’가 깃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불편한 진실에 직면함 없이, 자기 존재의 변화 없이 시도되는 모든 정의의 일은 오히려 인류에게 해악입니다.

하느님께는 어떨까요? 우리는 기도를, 사랑의 하느님, 진실(진리)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이라고 시작하곤 합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를 ‘하느님의 신성’(神性)인 것처럼 부르는 셈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안에서도 이 아름다운 말들이 충돌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총)이신 하느님은 타락한 ‘죄인’마저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진실’(진리)이신 하느님은 ‘거짓’(불법, 불순종의 죄)에 물든 타락한 인간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나 ‘진실’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죄’(거짓, 불순종)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죄’(거짓)는 하느님과 우리를 원수로 만듭니다.

더욱이 ‘정의’(의로움)이신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물으시면 인간의 결말은 멸망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옳음)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물으셨습니다(로마 3:21-26). 다시 말해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무셨습니다. 그 피흘림은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켰고,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즉 ‘평화’ 속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이신 하느님께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향한 모든 구원의 의무를 충돌 없이 다 성취하셨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주님이 오실 때 일어날 영광이 가득한 땅의 새로운 창조의 모습을 묘사합니다(11-12절). 땅에서는 새싹처럼 ‘진실’이 돋아 나오고, 하늘에서는 ‘정의’가 굽어봅니다. 주님의 복을 받아 땅에는 열매가 풍성합니다. 오시는 주님 앞에서 온 땅이 근본적으로 변화된다는 찬미입니다.

특히 그들이 실천할 올바른 행동, 즉 ‘정의’를 강조함으로 기도를 마칩니다(13절). 그 정의는 복음 이야기의 세례자 요한과 포개집니다. 마치 앞선 사람이 길을 닦고 나면, 그 길로 뒷사람이 따르듯이 정의가 먼저 주님 앞에서 걸어가면(실천되면) 주님이 주실 평화가 그 발자취를 따라간다고 노래합니다. 1독서 《이사야》와 연결하자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이 선조들과 달리 그 땅에서 ‘정의의 길’을 걸어가면, 그 정의의 길은 동시에 평화가 꽃 피게 하는 길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정의의 실천’이야말로 ‘평화의 주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준비가 된다’라는 찬미입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태양이신 예수님의 빛 아래에서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걷겠다고 따라나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잘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다른 길을 엿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실은 어렵고,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는 세상을 꿈꾸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오시는 주님을 잘 기다리고 있습니까?

2독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는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종말 시비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이들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곧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입니다. 그 생활이 도둑처럼 갑자기 올 주님의 날, 즉 주님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삶이 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 신앙의 신비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실 것입니다. 언제 오실까요?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날이 곧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다림의 기대가 길어질수록 신자들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한낱 풀포기요, 들꽃과 같은 우리도 무려 이천년을 기다려왔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연된 ‘종말’을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처럼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준비를 할 수 있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중이라고 교훈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시간관이고, 인내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2베드 3:8~9

그렇습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바로 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우리와 온 인류가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저주가 아니라 ‘모두’에게 기쁨이 되게끔 살아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 즉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주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생활이 하루하루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준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와 평화가 깃들여 있습니다 … 여러분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으니만큼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화목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 2베드 3:13~14

복음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교회력’을 시작하는 ‘대림 1주일’에 우리는 ‘항상 깨어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라는 ‘종말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성주간, 즉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과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야기 배정은 공생애 시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끝에서 단숨에 시작으로 되돌아온 배정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다림’ 속에 있는 교회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인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숨 좀 돌리자는 차원에서 대림절기 묵상 주제를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인 대림절기는 ‘동계재’(冬季齋)를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뉩니다. 일반적으로는 대림 1주일부터 대림 3주간에 있는 12월 16일까지입니다. 이 기간 교회는 신자들에게 ‘종말론적인 측면’에 맞추어 우리의 삶을 묵상하도록 안내합니다. 이어지는 12월 17일부터 12월 24일까지는 ‘곧 다가올 구세주 탄생 준비’로 초점이 자연스럽게 옮겨갑니다. <복음서> 배정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이야기(마태 1:1-17)부터 시작해서 《루가복음》 1장이 전하는 수태고지, 성모와 엘리사벳의 만남, 마니피캇, 세례자 요한의 출생, 즈가리야의 노래가 배정됩니다. 구체적으로 대림절기 각 주일이 갖는 묵상 주제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대림 1주일’은 재림하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교회의 종말론적인 자세’가 강조됩니다. ‘대림 2주일’은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인 회개의 삶’이 강조됩니다. ‘대림 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임박했으니 ‘기뻐하라’라는 주제로 전환됩니다. ‘대림 4주일’은 ‘구세주 탄생과 성취하실 사명의 예고’입니다. 이러한 묵상 주제의 의미를 참고하시면 더 뜻깊은 기다림의 절기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주님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한 세례자 요한의 선포입니다. 대림 3주일까지 <복음서> 배정은 세례자 요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광야에 나타난” 그의 소명과 삶이 세상에 오시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분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오실 주님에게로 향하게 하려고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풉니다. ‘광야의 인물’인 그는 ‘남’을 이기려 하기보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전형입니다. 사실, 시도해보면 남을 이기는 일보다 자신을 이기는 일이 가장 어렵고 힘듭니다. 그는 그 일을 해낸 예언자입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뭔가 ‘기쁜 소식’, 즉 ‘복음’(유양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이 있다는 선포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어느 세상에 살든지, 민족과 종교와 이념,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뭔가를 자신이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일은 실로 엄청난 주장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마르코나 우리에게, 즉 온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말씀 나눔을 시작하면서 바흐의 <예수, 인류의 소망과 기쁨: Jesu, Joy Of Man’s Desiring>을 언급했습니다. 마르코도 단도직입적으로 ‘예수가 복음’(Good News)이라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제국이 내세우는 선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선포는 반역의 소리처럼 들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복음’이라는 말은 로마 황제 숭배와 관련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은 ‘새 황제가 등극’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 ‘전령들’을 보내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황제는 시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로 숭배되었기에 새 황제 등극은 ‘복음’이었습니다. 특히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가 시민들에게 나누어줄 전리품과 노예들을 이끌고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야말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르코는 ‘복음의 주인공’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전 세계를 호령하던 최고 권력자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로마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예수’, 즉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가 ‘복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진짜 복음’인지를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펼쳐갈 것입니다. ‘나’해 연중시기 <복음서> 배정도 대부분 《마르코복음》입니다.

복음 이야기 후반부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마르코는 세례자 요한의 배경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그는 1독서 《이사야》에 기록된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한 소리’(광야의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참고, 출애 23:30; 말라 3:1). 그는 ‘선구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미지의 영역’이자 ‘새로운 시작의 장소’를 상징하는 ‘광야’에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와 죄 사함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그의 출현을 들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가 있는 ‘광야’로 나갔습니다. 회개와 죄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다루어 온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한 소리’인 세례자 요한에게로 가서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광야’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성전’이었던 셈입니다.

그의 차림새와 행동은 ‘엘리야’를 연상시킵니다(열왕하 1:8; 말라 4:5). 회개와 죄사함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은 더 중요한 일을 증언합니다. 자기보다 훌륭하신 분, 너무나 고귀하신 분,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곧 오실 메시아’를 선포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이 그 당시 로마제국과 긴장 관계에 있었듯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말도 당시 권력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요한의 선포를 ‘우리 자신을 위한 메시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어떤 면에서 우리가 마음의 방향을 바꾸고, 자기 변혁과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역시 구조악과 불평등 속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이 시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진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단지 먼저 나온 ‘시제품’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를 대신해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회개’하도록 ‘하늘의 소리를 전달’해 주기 위해 ‘자신을 이기고’, 기꺼이 ‘광야의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 인생길의 ‘잡초’를 제거해주고, 우리 사회의 ‘울퉁불퉁했던 길’을 평평하게 닦아준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길’ 역할을 해 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우리와 이 사회를 위해 보내주신 오늘날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았을 때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고 닦은’ 사람들의 그 같은 헌신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이 이제는 ‘우리’가 참된 인생길을 탐색하는 사람들, 미래 세대를 위해 길을 만들고 닦아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만일 우리 삶이 좀 더 정돈된다면, 우리도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길이 될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모두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에 벌써 그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오실 길을 닦아야 할지 <전례독서> 주제와 연결해서 두 가지 면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일이고, 다른 하나는 대사회적인 일입니다. 사실 둘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일입니다. 1독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 이사 40:3~4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 응답해야 할 차례는 이제 우리입니다. 많은 설교자가 ‘새 출애굽’을 암시하는 이 말씀을 ‘명상’(묵상)처럼 ‘내면화’해서 해석해 왔습니다. 본문에 누구에게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인지 상대가 명확지 않기에 개인적으로 내면화해서 적용하는 게 편했을 수 있습니다. 저도 기도할 때는 그렇게 내면화해서 자신을 바라보며 묵상해 볼 것을 권하곤 했습니다.

가령, ‘골짜기’는 깊이 파인 ‘감정의 골’이라는 말처럼 ‘감정과 상처의 골짜기’라고 적용합니다. ‘산과 언덕’은 한껏 높아져 다른 이들을 얕보는 ‘기분’으로 적용합니다. ‘절벽’은 독불장군처럼 버티어 서서 누구하고도 소통하지 않는 ‘마음자리’라 적용합니다. ‘비탈진 산골길’은 ‘선입견과 편견’, ‘자기만의 평가의 틀과 고집’이라 적용합니다. 이런 ‘내면적 태도를 알아차리고 회개’하는 삶이 ‘길을 내고 닦는 일’이라 해석해 왔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고 저에게는, 또 함께 기도하는 이들에게는 은혜로운 적용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좀 더 폭넓게 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점을 꼭 강조하곤 합니다. 이 말씀들을 우리 사회에 적용할 것을 권하곤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개인화하던 차원에서 ‘새 출애굽’의 암시에 맞게 ‘사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구조악과 불평등의 문제’는 단지 명상이나 묵상만으로 해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꼼꼼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의 ‘징벌’을 받아야 했던 이유도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징벌의 핵심에 ‘정의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의의 길’을 사회 속에서 무시했기에 하느님께 징벌을 당했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85편>에 따르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그들이 ‘정의의 길’을 걸어갈 때 하느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평화’를 ‘연인’으로 ‘의인화’했을 정도입니다. 정말이지 ‘정의의 길’ 위에는 어떤 ‘거짓’도 ‘편법’도 ‘불의’도 발붙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그들의 ‘진실’이 짝하고, 그들이 실천하는 ‘정의’에 하느님의 ‘평화’가 짝하는 법입니다.

2독서 《베드로의 둘째 편지》 역시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정의’야말로 주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이들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태도라고 교훈했습니다. 복음 이야기와 평행한 본문인 《루가복음》에도 세례자 요한이 외친 선포의 핵심에 ‘정의의 실천’이 자리합니다(루가 3:7-14). 따라서 우리는 자신 안의 ‘거짓들’을 ‘회개’하는 소극적 삶의 태도들, 즉 명상이나 묵상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오실 구세주를 맞이하려면 보다 적극적으로 일상에서 사회의 구조악과 불평등의 문제에 ‘저항’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개인이 많아질 때 사회는 변화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사회적’으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일입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해 온 내용입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리가 지금 어디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준비해야 할 ‘광야’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공약했던 것처럼 ‘적폐 청산과 개혁과제’를 실행해 왔습니다.

적폐의 온상으로 자리하면서 한국 사회를 오염시켜 온 ‘언론’을 개혁하겠다고 나섰으나 오히려 ‘맑은 정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정권을 쥐락펴락해 온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나섰으나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임이 더욱 자명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두 개혁대상이 똘똘 뭉쳐서 민주시민이 선택하고 위임한 권력에게 시도하는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깨어있는 시민이 이길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거짓 뉴스에 속을 일이 아니라 깨어있는 정신으로 ‘시대의 변화’를 읽고, ‘평화’를 위해 앞서 걸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우리 사회 ‘악의 근원’인 ‘친일 청산과 분단 고착화 세력들’을 ‘저지’하는 데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사막과 벌판에 길을 내듯이 그들이 오랫동안 장악해 온 ‘죽음의 사회 경제적 시스템’(구조악)을 개혁하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골짜기’처럼 갈수록 깊이 파이는 가난과 사회 양극화, ‘산과 언덕’처럼 높아져 있는 일부의 갑질과 특권의식, ‘절벽’처럼 소통 없이 자신들의 ‘성’(城)을 쌓는 일부 보수 언론 기자들과 검찰 권력들, ‘비탈진 산골길’처럼 암울한 패배주의를 고착시키는 ‘불평등 구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으로 사회를 바꾸어내도록 교회는 세례자 요한 같은 목소리를 이 정부를 향해 높여야 합니다. 울퉁불퉁 뒤틀린 사회 곳곳을 평평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한다면, 젊은 세대들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미움에서 사랑으로, 거짓에서 진실로, 불의에서 정의로 다툼에서 평화로 마음의 방향을 전환하여 길을 새로 닦는 ‘나’(우리)를 통해 이 땅에 오십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열과 분단 고착화를 통해 지배력을 강화해 온 ‘어둠의 세력들’을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감시하고 용기있게 저항해야 합니다. 사회의 약자들을 생각하면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분배의 복지’가 구호만이 아니라 현실이 되도록 문재인 정부를 향해 더 강력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강력한 군사력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이 땅에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평화’가 도래하게 하는 길입니다. ‘정의의 실천’을 통해 주님께서 주실 평화가 꽃 피게 하는 삶이야말로 대림절기 주님의 오실 길을 닦는 우리가 관심해야 할 진정한 회개의 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례’는 냉철한 머리에서 ‘따뜻한 가슴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회개’도 냉철한 머리에서 ‘따뜻한 가슴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시험’은 항상 머리의 생각에 대한 것이고, 그것을 이기는 일은 항상 ‘가슴’에서 나오는 ‘지혜와 용기’입니다. 지혜와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해 온 우리에게 주님은 이미 그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것들을 발휘할 상황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앞에 펼쳐 보이셨고, 우리를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 한가운데 두셨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교우 여러분, 대림절기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위로와 구원을 전하는 절기입니다. 스스로의 죄과로 인해 저주와 죽음과 옛 자아의 집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 주님 덕택에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다정스레’ 전해주는 절기입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새 하늘 새 땅, 즉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길’을 준비하라고 ‘다정스레’ 일러주는 절기입니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 자신이 주님이 오시는 길이 되는 준비의 절기입니다.

주님이 오실 그 길을 닦기 위해 우리는 내 안의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흠도 티도 없을 만큼 ‘자기 개혁’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 것이 아니라 ‘함께 세상의 질서를 바꾸는 일’, 즉 ‘정의’를 세우는 길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그 길을 닦기 위해 부끄러운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악과 불평등, 거짓, 불의, 편법, 부정부패라는 적폐를 닦아내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언론개혁, 검찰개혁이 반드시 성공하도록 기도로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런 삶과 기도야말로 이 시대에 하느님이 요청하시는 회개의 삶입니다. 주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참된 태도입니다. 주님은 그 길에 ‘평화’가 뒤따르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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