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 29. 대림1주일

  • by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게 하시나이다. 구하오니,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으로 늘 새롭게 하시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이사 63:19하-64:8
  • 시편 – 80:1-7,17-19
  • 독서 – 1고린 1:3-9
  • 복음서 – 마르 13:24-37

나해 대림 1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주님, 성큼성큼 오시는 당신을 항상 깨어 기다리도록 새 힘을 주소서’입니다.

‘대림절기’가 되면 생각나는 ‘시’(詩)가 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입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은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아주 서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이 ‘시’(詩)는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일종의 ‘참여시’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너’는 사랑하는 존재를 넘어 ‘자유’, ‘민주화’, ‘열린 세상’,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중의적 성격을 갖습니다. 이런 중의적인 성격을 모르더라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그 기다림이 낳는 ‘기대와 설렘’, ‘초조와 실망’, ‘좌절과 고통’, ‘재회’에 대한 ‘희망의 의지’가 돋보입니다.

특히 시인은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라고 말함으로써 ‘기다림’의 고통을 넘어 ‘만남’에 대한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의 변화’를 보입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시인의 기다림과 고통, 만남에 대한 역설적 믿음과 희망, 의지의 변화가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너무나 닮았습니다. 대림절기 때마다 이 ‘시’(詩)가 기다림의 최고봉처럼 느껴지고 좋은 이유입니다.

여러분에게 ‘기다림’이란 말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옵니까? 본디 ‘기다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요청되는 태도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지에 따라 다르겠으나 ‘기다림’은 지금 여기 ‘그것(누구, 무엇)의 부재’(不在)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더욱이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순간 그 기다림은 더욱 불타오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재(不在)하는 지금 여기는 초조와 불안을 필연적으로 발생시키기에 누구에게나 기다림은 고통스럽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하는지를 통해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의 정도(程度)가 약한 이들은 고통 앞에서 ‘그것’을 향한 기다림을 포기합니다. 언제나 ‘숭고한 기다림’은 ‘그것’을 만나기 전, 그것의 부재(不在)가 가져온 지금 여기의 고통을 껴안는 일을 동반합니다. 마침내 그 고통을 껴안고 ‘다른 무엇으로’ 승화한 이들은 ‘성숙’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기다림’은 ‘삶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겸손한 인정이자 수용의 태도입니다. 기다림을 감행하는 우리 역시 ‘그것’의 부재(不在)를 다른 무엇으로 승화시키는 ‘내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 다함께 고백하며 찬미합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 니케아신경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 신앙의 신비

우리는 사랑하는 임,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참여합니다. 그것, 즉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은 ‘부재’(不在)하지만,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십니다. 공의와 평화가 성취된 사랑의 세상, 더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 새 질서의 창조, 즉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그날 이 세상은 두루마리처럼, 텐트처럼 접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영광과 사랑의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재림(再臨)의 부재’(不在) 속에 기다림의 고통을 껴안은 우리에게 ‘내적인 힘’, 즉 ‘승화’의 원천입니다. 무려 이천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림’이 발생시키는 ‘가슴 아리는’ 고통을 ‘성찬례’ 안에서 ‘희망’으로 승화시키며, 고단한 일상을 견디어냅니다. 더욱이 성찬례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더 깊은 진실을 깨닫습니다. 팔 벌린 십자가의 주님이 바라보이는 순간, 우리만큼 오랜 세월 우리를 기다려오신 아픈 주님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를 이천년이나 기다리게 하시는 주님을 향한 원망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시인처럼 “아주 먼 데서 오랜 세월을 다해 지금도 오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도 또한 일어서서 걸어갑니다.

오늘은 교회력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 1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인간 역사의 마지막에 다시 개입해 오실 그리스도를 깨어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역사에 이미 개입해 오신 아기 예수의 성탄을 준비하며 깨어 기다리는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오심 사이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거룩한 기다림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대림절기’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대림초’를 축복합니다. 제단에서 고요히 빛나는 ‘대림초’처럼 여러분 안에도 ‘기다림의 촛불’ 하나가 당기어졌는지요? 이렇게 어둠 많은 세상에 그리운 임께서 잘 찾아오시도록 등불 하나 깨어 밝혀 드셨는지요? 아직은 가질 수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랑이신 우리 주님이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지금도 오고 계시는 주님을 만나러 갈 적극적인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렇게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하는 교회력의 첫날, 공교롭게도 우리는 <전례독서>를 통해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습니다. ‘오시는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교회의 종말론적인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대림 1주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이제 오늘의 <전례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이사야》는 주님의 ‘강림’을 호소하는 이사야의 기도입니다. 자기 민족을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대림절기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드러낸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디 하느님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약속의 땅’을 잃었고, 포로 생활의 곤경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에서 귀환했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계명을 외면했고 우상숭배를 고집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부터 배운 바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절망적인 민족’을 대신해 ‘하느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청합니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늘의 하느님이 당신의 자발적인 ‘의지’로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어” 지상의 만물을 새롭게 만들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늘이 지상의 구원에 개입해 달라’라는 뜻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청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굽어살펴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소유, 자녀, 작품인 ‘지상의 이스라엘’을 ‘은혜’로 “굽어살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 간절한 기도 속에 담긴 정신은 우리가 평생 간직해야 할 신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하느님이 왕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비로소 지상의 만물은 새롭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느님께 자비와 도우심을 간청할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구원’은 하느님의 자발적인 ‘의지’와 ‘은총’ 덕택입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로 굽어 살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기는 아기 예수의 성탄 준비뿐 아니라 하늘의 왕이신 주님이 직접 이 세상과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소유’임을 또렷이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자녀’임을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인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필요함을 선포하는 절기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하느님께서 ‘은혜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절기입니다. 오직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오시는 하느님의 자발적 ‘의지’와 ‘은총’에 있음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 강력한 메시지에 감동한 인물이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입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하느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기를” 호소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그 간절한 기도가 500년이 지나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취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 《마태오복음》이나 《루가복음》 기자가 ‘조용하고 순탄한 열림’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마르코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강력한 호소처럼 ‘과격한 진동을 동반한 열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 마르 1:10

오늘 우리는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해 다시 ‘비대면 성찬례’를 봉헌합니다. 우리야말로 이사야 예언자처럼 주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속히 오시어”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인류의 탐욕 때문에 고통과 신음 속에 있는 지상의 만물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지구 생명을 훼손한 우리 자신의 죄악을 회개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어서 속히 오시어(개입하시어) 새롭게 해 주시기를 다시금 기도합니다(로마 8:18-23; 묵시 22:20). ‘절망 세상’이 ‘희망 세상’으로 회복되는 일에 우리가 도구로 쓰임 받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80>은 ‘민족의 구원을 호소’하는 노래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우리 민족과 나라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본문은 1-7절, 17-19절만 발췌했습니다. 배경은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멸망 당하기 직접입니다. 그 수난의 시기에 시인(아삽의 후손)은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자’이신 하느님께 간청합니다(1-3절). 하지만 그의 기도뿐 아니라 백성들의 기도 소리를 하느님께서는 외면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분노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4절). 이것이 시인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더 나빠집니다. ‘북왕국 이스라엘’(포도나무)이 겪고 있는 수난과 비참한 처지가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눈물의 빵과 싫어지도록 눈물을 마시게 하심(5절), 시빗거리와 비웃음(6절), 포도원 울타리가 부수어지고 열매를 따먹힘(12절), 멧돼지와 들짐승의 먹이(13절)라는 표현은 그들이 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북왕국 이스라엘 어디서도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없었던 시인의 아픔이 절절히 묻어납니다.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시인은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난날 선조들에게 베푸신 은총과 역사 속에서 이루신 일들, 즉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과 다윗에게 허락하신 번영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8-11절). 비록 현재는 민족이 고난과 시련 속에 있으나 속히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포도원과 포도나무를 돌보시기 위해 행동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12-16절).

시인이 이렇게 끈질기게 간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민족을 ‘회복’시켜 달라는 시인의 기도가 응답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민족을 살려달라는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기도는 거절당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하여 눈물의 빵을 먹고 멸시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80편>이 대림 1주일에 선택되었을까요? 하느님께서 “힘을 떨치시고 오시어 민족을 회복시켜달라”(2절)는 그의 간절한 기도 때문입니다. 그는 이사야 예언자처럼 하느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어” 그들의 역사에 ‘개입’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느님입니다. 더욱이 <80편>이 대림 1주일 <전례독서>로 배정된 이유는 “당신 오른편에 계시는 그분”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물론 시인이 이 표현을 쓴 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뜻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에페 1:20; 히브 8:1).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인류 중보자시고, 구원자시며,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굳건히 세워주신 분”, 즉 예수 그리스도 강생의 은총으로 하느님께 불순종했던 인류의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택에 하느님과의 관계는 평화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기도는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수 세기 후에 응답이 된 셈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의 지도’ 아래 있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밝은 얼굴을 보게 되었으며, 영혼이 소생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은혜의 일’을 수행하러 강생하셨을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분을 깨어 기다리는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2독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는 ‘바울로의 감사 기도’입니다.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고린토교우들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의 선물들을 먼저 언급합니다(4-7절a). 그런 다음 그들이 고대하는 것처럼,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나무랄 데 없는 사람, 흠이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날, 즉 재림을 맞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7b-8절). 끝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러주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임을 교훈합니다(9절).

바울로의 기도를 통해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몹시 고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로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로마제국의 부패한 통치를 끝내시러 곧 다시 오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세대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희망하고 기다리며 깨어 있는 것 말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에 대해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날에 대해 희망하고, 기다리며, 깨어 있는 것 말고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바울로 같은 위대한 사도, 성인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초조함과 불안감을 넘어 우리 믿음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코로나19가 증명해주듯이 많은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9절).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은 세상 끝날까지 성령을 통해 우리를 견고히 지키실 것이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르코복음》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깨어 준비하라’라는 내용입니다. 《마르코복음》 13장은 복음서의 ‘소묵시록’(마태 24장, 루가 21장)이라 불립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의 기록 연대를 주후 70~73년경으로 잡습니다. 그 시기는 ‘로마의 대화재’로(주후 64년) 야기된 ‘네로’(Nero, 로마제국의 제5대 황제)의 그리스도인 박해, ‘유대 독립전쟁’(주후 66-73)으로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시절입니다.

시절이 몹시 혼란스럽고 어려우면 누구나 ‘현재 세상’이 어서 속히 끝나고, ‘새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합니다. ‘종말 신앙’입니다. 《마르코복음》 기자는 바로 이 ‘종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교회’에 대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을 기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답은 종말의 날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신자의 바른 삶이라는 교훈입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 13장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낯선 묵시 문학적 언어, 즉 유대 역사와 사상(사람의 아들, 야훼의 날)을 반영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몇 가지 주제가 본문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그리스도의 재림, 종말을 앞두고 있게 될 박해와 고난에 대한 예언이 그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예수님의 말씀이고, 어디까지가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기록된 교회의 말이며, 종말에 대한 계시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3장에 대한 이런 이해와 함께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복음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께서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입니다(마르 11:1-11).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동안 ‘성전 정화사건’이 있었고(마르 11:15-19), 유다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논쟁’도 있었습니다(마르 11:27-12:34).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대변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맞서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그들을 향한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논쟁에서 탁월함을 보이셨습니다. 논쟁에 지친 예수님을 ‘위안’(慰安)한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가난한 과부’였습니다(마르 12:41-44). 자신의 모두를 털어 넣은 과부의 봉헌은, 완전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전부를 봉헌하실 ‘십자가 사건의 예시’(豫示)였습니다.

성주간의 사흘째 날 해 질 무렵, 논쟁을 끝내신 예수님은 ‘베다니아’로 가기 위해 “성전을 떠나 나오십니다.”(마르 13:1) 그때, 제자 한 사람이 ‘웅장한 대성전’의 모습에 감탄하며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의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 마르 13:2

그 말씀에 제자들은 넋이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천문학적으로 ‘지구’를 ‘우주의 중심’(배꼽)이라 믿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천동설’이라 합니다. 천동설은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세 때까지의 보편적인 세계관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배꼽)에 위치한다 믿었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예루살렘은 유다 사회의 정치, 종교, 경제의 ‘중추’였습니다.

지구의 배꼽인 예루살렘 중심에는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성전’이 자리합니다. 이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룩한 백성인 그들 한가운데 계신다는 물리적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이 계신 ‘가장 성스러운(거룩한) 곳’이라는 ‘중심 위치’를 차지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속’(俗) 된 곳으로 취급받았기에 성(城) 가까이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렇듯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에게 있어서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유대교의 멸망’을 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종말’입니다.

정신을 차린 제자들은 그 ‘재난의 일’, 즉 ‘역사의 종말’이 ‘언제’ 일어날지, 그런 일이 이루어질 무렵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날지 여쭈었습니다(마르 13:4). 예수님은 ‘시기’와 ‘징조’에 대해 바로 답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듣기에 겁나는 이야기를 계속하십니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 난리와 전쟁의 소문, 지진과 흉년, 박해와 고난, 순교와 무서운 재난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들 후에 본문이 이어집니다.

복음 이야기 첫 단락(24-27절)은 ‘우주의 대파국’입니다. 종말, 즉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게 될 징조들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에 의존합니다.

하늘의 별들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떠도 침침하고 달 또한 밝게 비치지 아니하리라…하늘이 두루마리인 양 말리고 포도 잎새가 말라 떨어지듯, 무화과나무의 낙엽이 지듯, 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 이사 13:10; 34:4

구약에서 이런 일들은 분노하신 ‘하느님의 심판’이나 ‘야훼의 날’에 수반되는 현상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천체가 지상의 피조 세계에 밀어닥친 혼란에 빠져듭니다. 오늘날 천문학의 업적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비과학적이어서 믿기 어렵습니다. 만일 ‘문자적’ 표현 그대로라면, 정말 공포를 느낄만한 ‘우주적 대파국’입니다. 아무튼 과학적 사실 논의는 차치(且置)하고라도 첫 단락이 강조하는 속뜻은 ‘그 종말의 날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날 것이다’입니다.

두 번째 단락(28-31절)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 재난의 일, 즉 역사의 종말이 ‘언제’ 일어나고, 어떤 ‘징조’가 나타날지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시기와 징조에 대해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의 변화를 통해 여름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듯이 다른 어떤 것이(종말) 가까이 다가왔음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조짐(마르 13:6, 적그리스도의 출현)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성장 이야기를 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마르 13:30-31

여러분에게는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만일 본문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들이라면, 예수님은 실언하신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후로도 ‘수많은 세대’가 왔다가 사라졌습니다. ‘천체’는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역사의 종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이 실언하신 것입니까?

신약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들이 ‘은유적’ 표현과 ‘사실적인 이야기’가 결합 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여부는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으니 논외로 합니다. 오히려 ‘은유적’ 표현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현대 과학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합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은유적 표현’이라는 말은 ‘희소식’입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본문을 ‘임박한 종말’에 대한 ‘문자적’ 표현 그대로라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더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가 ‘칼빈’(John Calvin)조차도 본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별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충격이 심할 것이다”라고 해석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바깥세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무너져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 자신의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옛 자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면, 예수께서는 실언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무너져야 할 그 ‘웅장한 건물’이 가리키는 속뜻이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옛 자아’라면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옛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은 어찌 보면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작은 종말의 순간’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성전)를 차지하시게 하는(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은 우리의 ‘거대한 옛 자아’, 즉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아’를 ‘마음의 왕좌’에서 내쫓는 ‘종말의 순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 종말은 먼 훗날이나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에 가서나 일어날 일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야 오히려 ‘복’입니다.

사실, ‘참 빛’이신 주님이 어두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 즉 그 ‘왕좌’에 ‘오늘’ 당도하시면, 내 안에서 벌어지는 ‘징조’들이 있습니다. 실상과 허상, 진상과 망상이 대판거리로 싸우는 일종의 ‘난리 상태’가 됩니다. 새 세계관과 옛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 상태’가 됩니다. 그동안 자신을 안전하게 구축해왔던 ‘토대’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태’가 됩니다. 자신을 지탱해 왔던 ‘기존의 인식’(관점)들이 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진 상태’가 됩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즐겨 먹어왔던 ‘음식’(돈, 권력, 명예, 성, 마약, 술 등등)을 더는 먹을 수 없는 ‘기근(흉년) 상태’가 됩니다. 그 음식이 먹어야 할 진짜 양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상태’가 됩니다. 더는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그런 가짜들이 더는 자기 인생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마치 ‘되찾은 작은 아들처럼’(루가 15:11-32) 말입니다.

《루가복음》이 전하는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흉년’이 들자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쥐엄나무 열매가 자신이 먹어야 할 양식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방탕하게 살며 먹어온 그 음식들이 자신이 먹어야 할 참된 양식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먹을 양식이 많을 뿐 아니라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첫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있어야 할 자리와 먹어야 할 양식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빛’이신 주님이 어두운 우리 안에 ‘오늘’ 들어오시면, ‘진실’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의 성전’(왕좌)에 ‘오늘’ 당도하시면, 우리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즐겨 먹어왔던 ‘음식’들이 먹을 수 없는 가짜였음을 말입니다. 더는 그런 가짜들로부터는 먹을 수 없음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먹어야 할 ‘참된 양식’을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찬례는 바로 이 ‘참된 양식’을 받아 모시는 순간이고, ‘기근’(흉년)에 시달리던 우리 영혼을 살리는 ‘한 말씀을 듣는’ 순간입니다.

더욱이 주님이 내 ‘마음의 왕좌’(성전)에 당도하실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종말의 징조’는 우리 자신이 ‘새로 빚어지고 탄생하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세계에서 무너질 것들이 무너지는 ‘종말’을 맞이해야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집’을 다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종말은 새로운 시작의 처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마음’에서 ‘거대한 옛 자아’를 무너뜨리는 일, 즉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기를 비우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저항도 있습니다. 그래도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고통스러움을 감행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깨달은 바에 따르면 ‘거대한 옛 자아’를 무너뜨리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기도수행’입니다. 사실,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으면, 괴롭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께 묻고 한 말씀 듣습니다. 진짜 무너지기(비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진짜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시 빚어지고,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 무너짐, 자기 비움의 기도를 감행하여 ‘옛 자아의 종말’을 맞이하려는 ‘용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다시 세워지고 빚어지는 숭고한 삶의 시작은 ‘사랑의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그런 종말의 징조들이, 다시 말해 ‘어둠’이 가장 깊었을 때가 ‘새벽’이 가장 가까운 시간입니다.

또한 종말의 시기와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힘든 시기’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면 예수께서는 실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코로나19를 통해 세계가 실감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불안’합니다. 테러, 전쟁, 각종 사고가 언제 어디서 터질지 우리는 두렵습니다. 가정도, 학교도, 일터도, 사회도, 국가도 더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나만 잘하면, 우리 가족만 잘하면, 안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는 아닙니다. 나의 안전이 너의 안전에 의존해 있고, 너의 안전이 나의 안전에 직접적인, 그런 ‘사슬 관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대변되는 감염병을 포함하여 그런 재난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후위기’ 비상사태는 또 어떻습니까?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후 위기’가 만들어낸 ‘비상사태’는 인류가 대처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정도로 자연재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구 자체의 조절 시스템이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절망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민족을 위해 기도한 예언자 이사야처럼, 시편의 시인처럼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징조들’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힘든 시기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기후 위기 비상사태’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시행착오를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경고인지도 모릅니다. 인류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을 수도 있다는 하느님의 경고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류를 둘러싼 바깥세상만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우주’가 무너지고, 더는 ‘해’와 ‘달’과 ‘별’이 빛나지 않는 것 같은 ‘어둠의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나’라고 하는 실존이 파괴되는 것 같은 감정적인 ‘우울’ 상태는 불현듯 ‘나’에게 침입해 들어옵니다. 실직, 이혼, 질병, 실패, 사별 등이 이런 상태를 유발합니다. 그야말로 해와 달과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무너져 버린 것 같은 힘겹고 어두운 일들은 우리 자신의 삶에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인류가 처한 보편적인 문제인 기후 위기 비상사태는 차치하고라도, 나 자신의 ‘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위기들’에 대해서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우주적인 우울’, ‘삶의 어둠’은 기후 위기처럼 대응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 따르면, 그런 ‘어둠의 순간들’은 종말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의 징조(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 마르 13:29

참 놀랐습니다. 인간 실존이 겪는 실패와 좌절, 고난과 우울, 즉 우리가 삶에서 맞이하는 ‘어두운 밤’의 문 앞에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이 다가와 계십니다. ‘어둠’이 단지 어둠만은 아니고 그리스도를 만나는 ‘희망의 징조’라는 역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대림절기에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더욱 알아차릴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인간 실존에 침입해 들어오는 ‘우주적인 우울’, ‘삶의 어둠’은 일회적이지 않고, 언제든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순간들은 우리에게 그 너머의 것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지금도 당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우리가 삶에서 겪는 우주적 대파국이 다시 희망의 ‘봄’(春)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에서 일어나 살아갈 이유와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덕택에 우리를 포로로 잡았던 ‘어둠의 힘들’이 오히려 당황케 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덕택에 현재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빛의 힘’을 얻습니다. ‘오시는 예수님’ 덕택에 우리 안의 어둠들이 죽고, 새로운 무언가가 우리 자신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 새로운 무언가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마치 삶의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이들이 이제부터의 삶은 덤이고, 지금 여기가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오시는 예수님 덕택에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복음 이야기 세 번째 단락은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 마르 13:32-33

예수님이 제자들이 역사의 종말로 동일시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재난의 시기에 대해 모른다고 대답하십니다. 사실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오직 ‘아버지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마르 13:32). 그러나 역사에서 이 권한을 넘본 어리석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날짜를 특정했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했습니다. 가령 구원받을 사람을 ‘십사만 사천’ 명으로 ‘제한’하여 주장하는 이들입니다(묵시 14:1). 이 숫자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로서 구원으로의 초대가 ‘일부’로 제한된 것이 아니라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아전인수(我田引水) 해석을 하면서 문자적인 ‘십사만 사천’ 명에 들어야한다고 홀리는 집단이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날짜를 특정하거나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까지 문자적으로 집착한 이들은 결국 실패했고, 실패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제자들이 묻던 그 ‘언제’(역사의 종말)를 예수께서 특정 날짜로 확정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권한으로 못을 박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에서 ‘무너져야 할 그 웅장한 건물’을 ‘바깥세상’으로만 한정해서 볼 것은 아니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 ‘웅장한 건물’이 가리키는 속뜻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옛 자아’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자아’가 무너지는 순간은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작은 종말의 순간’이라 해석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의 왕좌’(성전)를 차지하시게 하는(성령이 오시는) 그 순간은 우리의 ‘거대한 옛 자아’, 즉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아’를 ‘마음의 왕좌’에서 내쫓는 ‘종말의 순간’이라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 ‘종말’은 먼 훗날 우리 종생(終生)의 순간이나 특정 날짜에 가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야 진정한 ‘복’입니다. 그 ‘복’은 ‘만복의 근원’이신 우리 하늘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항상 깨어 있어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것이 대림 1주일의 묵상 중심주제입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어라’가 문자적으로 잠자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자세’, ‘지금 여기 나’를 돌아보라는 명령입니다. 그 날이 언제 올 것인지 계산하느라 옆길로 빠질 것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을 잘 기다리기 위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하라는 뜻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으로서의 ‘시간’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를 더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성찰하라는 뜻입니다. 눈을 밖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향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맞이할 ‘나’를 정성스럽게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이 발생시키는 고통을 성찬례 안에서 희망으로 승화시켜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깨어 있음은 기다림의 때가 무르익기를 바라며 조용히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침묵’입니다. 날짜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리면서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수용’입니다. 마음의 한계를 정하기보다 내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할 ‘빈방’을 만드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먼 데서,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계시는” 주님의 일을 하실 터이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이 명령은 ‘지금 여기’를 껴안고 잘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다림을 삶의 온전한 동행으로 사는 이들에게 언젠가 그 시간은 열매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끝으로 교회가 대림절기를 살아가는 모든 ‘문지기’(마태 13:34)에게 당부하는 세 가지 삶의 태도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깨어 있는 삶’, 즉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는 지금 여기 나의 깨어 있음’을 위한 세 가지 수행을 가르쳐 왔습니다. 회개, 화해, 용서의 삶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들입니다.

첫째, 회개의 실천입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완성하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은 그 나라에 맞지 않는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의 길을 닦고 고르게 하러 왔던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마르 1:3-5). 예수님도 이렇게 전도하셨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 마르 1:15

우리는 자신만을 이롭게 하려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악행을 회개해야 합니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태도로 전환하는 ‘자기 변혁의 길’을 가야 합니다. 변혁의 대상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철저한 인식입니다. 이런 자기 변혁의 과정이 깨어 있는 삶이며, 주님의 재림, 즉 새 하늘 새 땅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신자의 바른 삶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희망입니다.

둘째, 화해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던 원한을 풀고, 가족과 형제와 이웃과 화해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마태 5:23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무시한 채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무엇이 먼저여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셋째, 용서의 실천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가 필요한 이를 우리 마음의 감옥에서 놓아주는 삶입니다. 특히 용서에 있어서는 스스로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마태 18:22

자신이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는데도 상대방이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제 상대방의 문제가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은 우리가 ‘회개’, ‘화해’, ‘용서의 실천’, 즉 ‘사랑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할 때, 우리의 영혼이 ‘소생’함을 맛볼 수 있고, 이미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거룩한 기다림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을 듣는 고린토교우들처럼 됩니다. 만왕의 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오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주 먼 데서”부터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이 슬픈 역사에 개입하기 위해 ‘지금은 성큼성큼’ 오시는 그리스도의 발자국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립니다. ‘힘없는’(보잘것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해 오신 구세주의 성탄을 기다리며 기도로 ‘마음의 빈방’을 준비합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오심 사이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성찰하며 기다립니다.

비록, 성큼성큼 오고 계시는 주님의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은 없지만, 오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깨어’ 기다립니다. 삶의 속도를 조금 더 늦추고, 침묵 속에서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에 귀를 기울이며 ‘깨어’ 기다립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나’를 정성스럽게 보살피며 ‘깨어’ 기다립니다. ‘회개’와 ‘화해’와 ‘용서’라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작품으로 온전히 빚어지기를 기도하며 ‘깨어’ 기다립니다. 박해의 어둠 속이었으나 오히려 ‘믿음’과 ‘희망’으로 ‘깨어’ 기다렸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늘 깨어’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처럼, 시편의 시인처럼 코로나19로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위에 주님께서 은혜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인류 구원의 근거는 오시는 주님의 자발적 ‘의지’와 ‘은총’에 있음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지금도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어둠 저쪽에서부터 ‘성큼성큼’ 오고 계심을 믿습니다. “아주 먼 데서 오랜 세월을 다하여” 천천히 오시던 주님이 지금은 ‘성큼성큼’ 오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밤이 아무리 길고 힘들더라도 ‘여명’(黎明)은, ‘승리’는, 기어이 옵니다. 우리가 어떤 ‘어둠’ 속에 있든지 그 어둠을 ‘낮’으로, ‘봄’(春)으로 변화시키실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은 아주 먼 데서부터 ‘성큼성큼’ 오고 계십니다. 날마다 가까이 오심을 알려주는 마음속 모든 쿵쿵거리는 발자국을 식별하며 기다리는 동안 우리도 주님께로 가고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일어선 우리도 ‘기도의 문’을 통해 성큼성큼 주님께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대림의 여정’을 출발한 우리 내면에서 한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 마르 13:37

 

찬미하올 주님,
성큼성큼 오시는 당신을 항상 깨어 기다리도록 새 힘을 주소서.

댓글 남기기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