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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2.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본기도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만왕의 왕이 되셨나이다. 비오니, 온 세상에 자유를 주시어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과 통치 안에서 모든 민족이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에제 34:11-16, 20-24
  • 시편 – 100
  • 독서 – 에페 1:15-23
  • 복음서 – 마태 25:31-46

연중 34주일이자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영원한 사랑의 통치에 참여할 우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교회력’을 지켜왔습니다. ‘교회력’은 자연적인 ‘세속의 시간’(크로노스 chronos, 기계적 시간)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kairos, 사건적 시간)으로 성화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십자가의 여정과 죽음, 부활과 승천,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강림 사건, 재림의 약속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중요한 사건들을 ‘자연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달력 위에 위치시킵니다. 이것은 시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나, 과거의 사건을 단지 때마다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시간’(수명)을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쇠퇴해가는 우리가 그 시간(수명)을 ‘의미로 충만한 하느님의 시간’,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생명)의 시간’으로 ‘승화’시켜 가자는 의도입니다. 특히 그 중요한 사건들이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일부로 재현될 때 우리의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2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온전히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사건들이 되는 축복이 일어납니다.

A stained-glass window of Jesus wearing a crown is seen at St. Joseph’s Seminary in Yonkers, N.Y., Nov. 11. The feast of Christ the King, celebrated the last Sunday in ordinary time, is observed Nov. 20 this year. (CNS photo/Gregory A. Shemitz) (Nov. 18, 2011)

오늘은 ‘연중시기’를 마감하는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이면 ‘대림 1주일’로 다시 ‘기다림’이 시작됩니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시작한 ‘가해’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너무나 빠릅니다. 아시다시피 ‘연중시기’는 교회력에서 가장 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를 꾸준히 묵상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묵상해 왔습니다. ‘하느님이 참된 주인’이시고 우리는 다만 ‘청지기’임을 묵상해 왔습니다.

이제 교회력의 끝자락에서 주님이 우주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묵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삶의 발자취에 참여하면서 한 해의 여정을 걸어왔는지 성찰합니다. 힘없는 약자여서 존재감마저 부정당하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에게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처럼 사랑의 길을 걸어왔는지 고요히 돌아봅니다.

물론, 우리는 민주시민 사회를 삽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에서 ‘왕’이라는 ‘직함’은 낯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전근대적이고 반시민적인 칭호인 ‘왕’을 예수께 붙여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사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요한 6:15). ‘왕의 자리’를 탐하지도 않으셨습니다(마태 20:25-28).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왕’이라 불리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마태 27:11).

그러나 ‘빌라도’가 십자가 위에 ‘그 명패’(마태 27:37; 마르 15:26; 루가 23:38; 요한 20:19-22)를 붙인 이래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왕’이라 불러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거절’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시대와 나라와 민족과 지역을 초월하여, ‘예수는 우주의 왕’(만왕의 왕)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의 제정 의미부터 살피겠습니다. 교회사에서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진 다른 축일들과는 달리 제정된 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1925년 로마 가톨릭의 ‘교황 비오 11세’ 때 처음 제정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민족주의’(nationalism)와 무신론적인 현상인 ‘세속주의’(secularism)가 급부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파시즘’(독재적인 전체주의)을 강화하였고, 독일 전체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나치당’ 히틀러의 욕망(뮌헨 폭동)과 폭력 앞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떨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세계사적 물결 속에서 ‘위협받는 교회’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앙’이 점점 약화 되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 비오 11세’는 교회가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우며 그리스도인은 욕망에 가득 찬 ‘민족주의적인 의무’로부터 면제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웁니다. 각 나라와 민족,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해야 한다는 희망 속에서 이 축일을 제정했습니다.

처음에는 10월 마지막 주일에 지키던 것을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왕권을 가지고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일을 교회력의 끝에 배치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력의 ‘시작과 끝’이 다시 오실 예수께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의 시간을 사는 우리의 하루하루 역시 예수를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임이 명확해졌습니다. 교회인 우리가 모든 성도와 함께 하늘의 유산을 받는 ‘그날’까지 하늘나라를 향한 거룩한 순례 중임을 기억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시대와 지역과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예수는 우주의 왕’(만왕의 왕)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는 어째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끝낸 예수를 ‘나의 왕’이라 고백하는 것입니까? ‘나’는 어째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마르 15:32) 무력하게 죽은 예수가 실패자가 아니라 ‘나의 왕’이라 고백하는 것입니까? ‘왕’이라면 ‘왕국’도 있다는 뜻인데, 그분의 왕국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왕이라 고백하는 우리는 ‘어떤 왕국’(나라)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왕’(통치자)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왕’(임금)이라는 ‘직함’이 갖는 상징은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절대권력자’를 말합니다. 백성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왕국(세상)이 돌아가도록 ‘권력’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마태 20:25). 자신의 ‘지배욕’과 ‘안위’를 위해 경쟁자를 처단하고, 심지어 ‘자신의 불의’와 ‘거짓’까지도 감추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힘’을 오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왕이라 고백하는 이유는 이런 ‘세상의 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분은 분명 ‘왕’이셨습니다(요한 18:33-38). 하지만 ‘자기 중심성’과 ‘지배욕’과 ‘안위’를 주장한 그런 식의 왕은 결코 아니셨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여느 ‘왕’과는 사뭇 다른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나의 왕인 이유는 ‘그분의 삶’에 나타난 독보적인 면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 하나하나가 ‘연약한 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을 진정으로 묵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분이 왕이신 왕국(나라)의 백성’(시민)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가 전해주는 그분의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께서는 ‘자기 중심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백성들을(우리를) 강제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자신의 ‘지배욕’과 ‘안위’를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키는 파렴치한 왕이 결코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백성(우리)의 복지’를 중심에 둔 ‘섬김의 왕’이셨습니다(마태 9:35; 20:26-27). 십자가에 죽기까지 섬겨주신 왕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람들”(우리)을 ‘측은히’ 여기시는 ‘연민의 왕’이셨습니다(마태 9:36; 에제 34:5).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죄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왕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더럽히며, ‘죄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과 친구가 되신 ‘공감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1:19). 그렇게 ‘낮아진’ 왕을 ‘종교 엘리트들’(사회지도층)은 위험인물로 여기며 참아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교 엘리트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지운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시고 그들 편이 되어주신 ‘지혜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1:28).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병자들과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느끼며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풀어주신 ‘치유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4:14; 루가 7:11-17; 요한 11:33). 그 지혜와 해방과 치유의 왕을 종교 엘리트들은 ‘신성모독자’로 몰아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 정체를 발견한 제자를 한껏 치켜세우시며 안면 가득 웃음을 보이신 ‘기쁨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6:16-19). 맹세도 소용없이(마태 26:33-35) 손바닥 뒤집듯 당신을 배반한 제자마저도(요한 18:15-18,25-27) 책망치 않으시고 안아주신 ‘용서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8:21-22; 요한 21:15-19). ‘선민(選民) 의식’에 빠져 구원을 거부하는 영혼들 때문에 눈물 흘리신 ‘슬픔의 왕’이셨습니다(루가 19:41). 그 용서와 슬픔의 왕을 종교 엘리트들은 ‘국사범’으로 몰아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넘쳐흐르는 ‘사랑의 힘’으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봉헌하신 ‘희생의 왕’이셨습니다(마태 20:28). 세상을 창조하시고(요한 1:3), 인류를 구원할 만왕의 왕이시면서도 ‘나귀 새끼’를 타고 죽음의 길로 가신 ‘겸손의 왕’이셨습니다(즈가 9:9; 마르 11:1-7; 마태 11:29; 마태 21:2-7).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 권력이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는 ‘진리의 왕’이셨습니다(요한 18:37; 19:8). 당신을 조롱하며 죽음으로 몰아간 악인들조차도 품으시고 십자가에서 용서를 청하며 죽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마태 27:27-31,40-44; 루가 23:34). 죽기까지 자기를 비운 ‘비움의 왕’이셨습니다(마태 16:24-2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신 그분(사도 10:38), 그런 ‘자기 비움과 사랑의 왕’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사도 2:24). 그분을 높이 올려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 2:33,36).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기 ‘이익’(자기중심성, 지배욕, 안위)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 많은 사람을 위해 당신의 뜻을 기꺼이 내려놓으신 ‘순종의 왕’이셨습니다(마태 6:13).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당신의 의지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비우고 바친 자유의 왕’이셨습니다(마태 6:33).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자신을 봉헌한 ‘평화의 왕’이셨습니다(에페 2:14-19). ‘사랑의 힘’이 왕이신 그분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왕국은 영원하지도 못할 것에 토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왕국은 ‘힘의 사랑’(권력, 군사, 경제, 정보, 돈)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정치적 왕국’과도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경쟁적으로 ‘힘’을 추구하는 세상 왕국을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왕국은 세상 어디에도 ‘공간적으로’ 속하지 않았습니다. 거짓과 불의, 관념과 허상, 부정과 부패, 폭력과 억압에 토대해 있는, 겉껍데기뿐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분의 왕국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분의 왕국은 ‘하늘’(하느님, 영원)에 속했습니다. 그 기원을 ‘하늘’(하느님, 영원)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왕국이나 나라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당신의 왕국을 ‘하느님의 나라’(통치, 다스림)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왕국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영원하지도 못할 물질들, 즉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토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는 ‘팔복’에서 그분 왕국의 토대와 왕국에 초대된 시민의 성격을 제시합니다(마태 5:3-12). 그 토대와 성격은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이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련 속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왕국은 마음의 가난, 애통, 온유, 의로움, 자비, 순수, 평화, 박해(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정의에 토대합니다. 한마디로 사랑과 희생, 섬김과 나눔에 토대하고 그 왕국의 시민은 그렇게 삽니다.

그분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은 ‘십자가’입니다. 전쟁 영웅이 들어오는 ‘개선문’이나 왕궁의 ‘화려한 침상’이 아니라 그분이 누우신 ‘십자가’ 말입니다. 바울로도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가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그 왕국의 토대라고 교훈합니다(1고린 1:23). 특히 《요한복음》에 따르면 진리, 실상, 거룩함, 사랑, 평화, 영원 이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왕국의 참모습들입니다. 왕이신 그분의 권위도 로마 황제처럼 ‘땅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형식적 종교심’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기원했고,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접 곁에서 그분 삶의 면모와 십자가 죽음, 하느님이 하신 일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분이 참된 왕이심과 그분 왕국의 실상을 증언하는 데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순교로써 자신들의 증언을 완성했습니다. 그들 역시 왕이신 예수의 길을 따라 걸었기에 그 길 끝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그분의 왕국과 권위가 ‘하늘’로부터 기원했음을 하느님이 증명하신다고 오늘 2독서에서 교훈합니다(에페 1:20-22).

따라서 그분을 진정으로 마주한 이들, 즉 지금까지 존재해 온 여느 ‘왕’과는 사뭇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신 예수를 마주한 이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문자적인 왕이 존재하지 않는 민주시민사회의 바깥세상은 차치(且置)하고, 자기 마음의 왕국에서 스스로 왕으로 살아온 모든 이들 말입니다. 그분 삶에 나타난 ‘독보적인 면’ 때문입니다.

특히 그분의 삶 하나하나가 ‘연약한 자신’과 관련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세상 나라’(땅의 나라)로부터 ‘소속감’을 달리하고픈 강한 열망을 갖습니다. 시대와 지역과 민족을 초월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나의 왕’이라 기쁘게 고백하며, 그분 왕국의 백성이 되는 ‘충성 서약’(세례성사)을 통해 ‘소속감’을 달리해 왔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그분을 ‘나의 왕’이라 공공연히 고백하며, 그 왕국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예수를 왕이라 고백하고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왕과 사제’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1베드 2:9-10). 주님의 왕국과 왕권이 영원하듯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도 영원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충성 서약에 충실한지는 오늘 꼭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왕이신 그분은 그 영원한 하늘 왕국을 완성하시러 이 세상에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심장 박동을 느끼며 우리는 ‘희망의 미래’를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이제 <전례독서>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1독서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심판과 메시아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서 포로생활 하는 유다 백성에게 ‘예언자 에제키엘’을 시켜 ‘희망’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펼쳐질 ‘새로운 미래’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을 본고장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공평하고 정의롭게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주실 것입니다. 장차 ‘다윗의 후손’ 중에서 그들을 돌볼 ‘좋은 목자’(메시아)를 세워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에제키엘》 예언서의 배경을 설명하겠습니다. 주전 597년 바빌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열왕하 24:8-17). 그때 남왕국 유다의 왕은 ‘여호야긴’이었습니다. 그는 18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3개월을 다스렸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항복을 받아내고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화를 털어갔습니다. 왕과 고관들과 군인들, 예루살렘에 살던 전 시민들, 기술자와 유력자 등 약 1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대신 예루살렘에는 여호야긴의 삼촌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워 다스리게 하였고, 가난한 지방민만 그 땅에 남겨 두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시기에 제사장 출신의 ‘에제키엘’도 바빌론에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주전 593년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게 아직 완전히 멸망하기 전입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에제키엘’은 그런 희망은 잘못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1-24장). 죄악으로 가득 찬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왕국 유다의 처지는 에제키엘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포로들은 점점 ‘절망’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남왕국 유다가 바빌론 제국에게 완전히 멸망한 훨씬 이후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포로로 산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때부터 예언자 에제키엘이 선포하는 예언의 내용이 달라집니다(33-48장). 그는 절망의 ‘현실 너머를 보는’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본 ‘현실 너머’는 무엇입니까? 선조들이 살던 ‘약속의 땅’으로의 ‘귀향’입니다. ‘제2의 출애굽’입니다. ‘새로운 재건의 꿈’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살던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에제키엘은 보았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가 그 ‘절망의 시기’에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미래’(희망)를 노래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시는 ‘귀향’을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에제키엘은 절망 속에 있는 포로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가 본 ‘새로운 미래’에 대한 노래 중 하나가 본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목자’란 말은 ‘임금’을 고상하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의 통찰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목자’라 자칭하던 ‘왕들’(권력자들)은 백성들을 잘 돌보지 않았습니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인’(참 목자)일 수 없었습니다. 약한 양들을 튼튼히 먹이지도 않았고, 병든 양들을 치유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마저도 길 잃은 양처럼 굴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사악한 ‘목자들의 죄’ 때문에 남왕국 유다를 바빌론 제국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유다는 멸망하였고,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을 ‘희망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몸소 자신의 양떼를 찾아보고 돌보리라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불성실했던 목자들과 달리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양떼를 성실히 돌보실 것입니다. 목자다운 구실을 다하실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의 시비를 공평하게 가려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강한 자와 약자를 갈라놓으십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엄청난 약속을 주십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목자’(메시아)를 세워주시어 그들을 이끌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약속을 자신의 이름 때문에라도 꼭 지키실 것입니다(에제 36:22).

<복음서>는 《에제키엘》의 이 예언을 예수께서 성취하신 분으로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당신께로 돌아온 죄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라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며,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멸하시기 위해 나서시는 분”입니다(에제 34:16). 그야말로 목자의 구실을 다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입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온 죄인들을 마지 못 해 받아들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실 수밖에 없는 ‘애간장이 타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참 목자’이시자, 그들의 ‘참 주인’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인 우리가 당신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참 목자’이십니다. 찾도록 찾아 헤매시는 ‘참 주인’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누구의 가르침과도 달랐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비유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신 그 ‘하느님’이 바로 ‘당신’이심을 말씀하십니다(요한 10:11-18). 예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 약속에 근거해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도들도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의 성취로 믿고 따랐습니다.

더욱이 <신약성서>는 우리의 참된 목자요, 왕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인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펼쳐주시기 위해 꼭 오실 것이라 증언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인 하늘 왕국을 완성하시고,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기 위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니 깨어 준비하라고 증언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희망의 미래’를 꿈꾸며, 심판하러 다시 오실 왕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주일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0편>은 ‘감사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시편》에서 이 제목이 붙은 유일한 ‘시’(詩)입니다. 앞서 나오는 <47, 93, 95~99편>처럼 ‘우주의 왕이신 하느님의 주권’을 찬미하는 ‘신정시’(神政詩, theocracy)입니다. 온 세상(땅)을 향해 주님께 예배하자는 초대로 시작하여(1-2절), 주님을 알아 모셔야 할 이유(3절), 주님께 바쳐야 할 감사와 찬양(4절), 주님을 예배하는 이의 기쁨(5절)을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공회 기도서>로 꾸준히 ‘아침기도’를 바치시는 분들이라면 <100편>이 익숙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공회 기도서>에 실린 ‘아침기도’ 고정 《시편》 가운데 하나이기(다른 하나는 95편) 때문입니다. 문득,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시’(詩)가 있는데 어째서 <100편>을 ‘아침기도’ 고정으로 삼았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00편>이 ‘감사제’(감사의 예배)를 바치러 예배자들이 성전 문들을 통해 뜰 안으로 들어오면서 부른 찬미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1-3절은 성전 문으로 올라가는 행렬의 선두에 있는 ‘레위지파’ 성가대가, 4-5절은 뒤따르던 예배자들의 후렴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로, <100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본질)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절). 그 핵심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이것을 믿고(알고) 따르는 일이 신앙생활에서의 근본이자 ‘감사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이고, 주님의 백성이며, 주님이 기르시는 양떼들입니다.

사실, 신앙이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 자신과 어떤 관계에 계신 분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일입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서야 우리는 주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어지심’과 ‘사랑’은 ‘영원’하시고, 주님의 ‘미쁘심’(성실하심)은 모든 세대에 ‘지속’될 것입니다. 그 ‘어지심과 사랑과 미쁘심’이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영원한 이유입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핵심’(본질)을 담고 있기에 유대인들 역시 오늘날 회당 예배에서 <시편 100편>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100편>이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 배정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펼쳐질 ‘미래의 영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4절). 왕이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모든 천사와 대천사와 함께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의 문’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한 그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차지할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면서 ‘왕이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우리는 꼭 만나야 합니다. 그 영광과 희망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고난과 수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2독서 《에페소서》는 우주를 향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역사하심을 교훈하는 바울로의 기도입니다. 바울로가 전해주는 ‘보물’ 같이 소중한 ‘장’(章)입니다. 그 궁극적 계획과 역사하심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굴복시키고,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일입니다. 이 진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알기를 원했던 바울로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그대로 닿기를 축복합니다.

바울로는 전형적인 유대교 회당 기도 방식을 따라 먼저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알립니다(15-16절). 그는 에페소 교우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 역시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기억합니다. 교회를 향한 사랑의 수고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로는 그들이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17절). 그 일은 하느님께서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실 때 가능합니다. 또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18절). 이 일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실 때 가능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로는 에페소 교우들이 알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설명합니다(19-21절). 하느님이 역사하신 그 능력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있습니다. 분명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을 증언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능력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 나라에 불러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시편 110:1).

고대 근동에서 ‘오른편’이 갖는 은유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 ‘가장 총애를 받는 자리’, ‘왕과 같은 권한을 가진 자리’를 뜻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천신들처럼 초자연적인 존재뿐 아니라 현세와 내세의 모든 권력자들(이름들)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21절). 한마디로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왕’으로 올려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역사하신 하느님의 그 능력이 지금도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완성인 ‘교회’를 설명합니다(22-23절). 위대한 능력의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시편 8:6).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기에 그리스도의 주권에 절대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머리가 몸을 지배하듯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가 완전해지도록 계속해서 인도하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분 몸의 지체인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지배할 것입니다(묵시 20:4,6). 물론, 그 완전한 성취는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질 것이지만 이것이 진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축복받은 존재라고 바울로는 교훈합니다.

‘바울로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제 기도 제목들을 돌아봅니다. 바울로는 물질적 축복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물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바울로는 물질을 포함한 그 너머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바울로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지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편》의 찬미처럼 우리의 창조주시요, 목자이신 하느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비록 2천 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대사명’을 충실히 실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로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제키엘’처럼 ‘현실 너머’의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이야기처럼 우리가 봐야 할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으신 왕(임금)이신 예수께서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종말’ 내용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 직후 일어날 ‘최후 심판’을 묘사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사람의 아들의 도래’(마태 24:30-31; 다니 7:13-14)를 예고하신 바 있기에 이 이야기가 단지 ‘비유’가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요한묵시록》에 전하는 ‘흰 옥좌에서의 최후 심판’과는 여러 면에서 대조됩니다(묵시 20:11-15). ‘흰 옥좌’에서의 심판은 ‘천년왕국 후’(묵시 20:1-6)에 ‘하늘’에서 일어납니다. ‘모든 죽은 자들’을 포함하여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반면에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최후 심판’은 왕(임금)이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재림 직후’에 ‘땅 위’에서 일어납니다. 살아있는 ‘모든 민족들’이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 즉 ‘가난한 이들을 품위 있게 대우한 행동’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대상과 심판의 근거(기준)가 다릅니다. 더 깊이 들어가는 일은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본문은 생생한 종말론적인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치 낮 동안에 함께 풀을 뜯던 ‘양과 염소’가 저녁이면 갈라지듯이 모든 민족들이 단지 그렇게 ‘둘’로 나뉠 것입니다. 성지순례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저녁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 이유는 ‘양’보다는 ‘염소’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양’은 추위를 잘 견디지만, ‘염소’는 상대적으로 추위에 약해 보호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목자의 배려가 본문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들의 전형으로 염소가 표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염소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종말의 날,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으신 왕(임금)이신 예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 마태 25:35~36

임금(예수님)은 ‘일상’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사랑의 행위’를 열거하십니다. 모든 사랑의 행위가 총망라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도움이 필요한 이들’(가난한 이들)을 ‘품위 있게 대우한 행동’의 예에 불과합니다. 임금의 말씀을 듣던 그들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요?

임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 25:40

임금(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의인들이 ‘일상’을 살면서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한 일이 사실은 임금(주님)이신 예수님께 해 드린 ‘사랑’이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속에 임금이신 예수께서 현존하신다는 진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보잘것없는 사람’, 즉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이나 ‘을’(乙)의 위치에 있지도 못하는 ‘병’(丙) 취급받는 이들에게 순순히 손을 내밀었습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이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자원을 ‘선용’(善用) 하였습니다.

임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눈길이 향하시는 곳,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곳,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곳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사람과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원을 어떤 일에, 누구에게 사용해야 할지 분명해졌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들보다는 높은 사람과 으뜸이 되는 일에 관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섬김’과 ‘종’으로서의 삶에 더 관심하셨습니다(마태 20:25-27). <복음서>는 예수께서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의 친구이고, 그들과 공감하며 삶의 자리를 같이하신 분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께서는 섬기러 오신 분으로 자신을 제자들에게 증언하시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 섬김을 완성하셨습니다(마태 20:25-28).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진실을 잊고 높은 사람과 으뜸이 되는 일에 혈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금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 마태 25:42~43

그들도 똑같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주님, 언제요?

임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 마태 25:45

역시 임금(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이 ‘일상’을 살면서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던 일은 곧 임금(주님)이신 예수님을 외면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임금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던 이유는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옳은 일’, 즉 사랑을 실천할 그 순간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왔어야 할 그 순간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자원을 선용(善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임금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가 ‘미래’에 자리하게 될 오른편과 왼편을 ‘이미’ 결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취하는 각각의 결정과 행동과 함께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느님의 영원한 심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다가올 영원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답게 ‘인간의 품위’를 지키고팠던 이들, 즉 일상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오른편 의인들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신들의 자원을 그들과 은혜롭게 ‘사랑’으로 나누었습니다. 반면에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자원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오른편 의인들은 일상에서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이웃을 보았을 때 ‘연민’과 ‘사랑’으로 움직였습니다. 반면에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무관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선별적’(차별적)으로 그 자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힘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했지만 높은 사람이나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분명, 복된 의인들과 저주받은 자들은 둘 다 똑같이 일상에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집 없는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을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열거된 이 사람들은 ‘팔복’에 언급된 이들(마태 5:3-10), 특히 예수님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는 이들을 닮았습니다(마태 5:11-12). 다시 말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도록 도왔어야 할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 사람들은 똑같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왼편의 저주받은 자들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고팠던 ‘가난한 이들’(도움이 필요한 이들, 모욕과 박해를 받는 이들)을 단지 ‘불행한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반면에 오른편 의인들은 단지 불행한 사람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들이 할 일, 즉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들려진 예수님의 복된 음성을 종합해 보면, 그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도움이 필요한 이들, 모욕과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서 ‘예수님’을 본 셈입니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일상의 사람들 속에서 누구를 봅니까?

우리는 수도 없이 ‘최후 심판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 이야기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이 가르침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놓으시기 전 들려주신 ‘최후 설교’입니다. 마태오는 ‘팔복’으로 예수님 ‘설교의 문’(門)을 열었습니다(마태 5:1-12).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 예수께서는 ‘팔복 끝’에 당신 때문에 모욕과 박해와 비난을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설교의 문’(門)이 ‘고난받는 이들 안’(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그들)에 자신이 현존해 계심을 선언하는 ‘최후 심판 이야기’로 절묘하게 닫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절묘한 ‘최후 설교’를 교회력의 ‘종착점’에서 듣습니다. 너무도 명료하고,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이미 미래를 지켜보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종류의 심판을 선택하고 있는지 이미 지켜보고 계십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 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주십시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고픈 이들에게 ‘연민’으로 다가가십시오. 사랑의 도움을 준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도운 셈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 보상이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 마태 25:34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한 그들이 아버지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오늘 사랑을 실천’하고, ‘연대’하는 이들은 오른편으로 향하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무관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왼편으로 향하게 되고,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그 임금께서 그들을 하느님 나라나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잣대는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이웃, 정확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동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에게 우리가 마음을 열었는지, 아니면 닫았는지는 ‘예수님의 눈’에 결정적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형편이 좋을 때든 그렇지 않을 때든 우리가 수행해야 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궁핍과 곤경과 고난에 처한 모든 개인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실천이 없는 이론적 박애주의는 무가치합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냉철히 돌아봅니다. 나는 그저 입술로 예수님을 높이며 찬미하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행동으로, 실천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동 없이, 실천 없이 “믿습니다”를 반복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제자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에 걸맞은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착한 행실 자신을 ‘의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행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이들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친절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관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이며, 본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다면,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를 우리가 상속받을 것을 깨닫고 있다면, 우리는 안개처럼 일시적인 이 세상의 것들에 결코, 연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시민들이 고통 속에 지낸 지 어느덧 9개월이 지납니다. ‘백신’(vaccine) 이야기도 들리지만 아직은 인내해야 할 때입니다. 고난의 세월이 길다 보니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데 어째서 그런 감염병을 막지 않으시는 것일까? 어째서 하느님은 창조 세계에 재난과 가난과 불의를 허용하시는 것일까?” 마치 우리에게 그렇게 질문할 수 있는 권리라도 있는 듯 항변합니다. 그런데 고요히 침묵하고 있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게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어째서 너는 그런 고난과 불행을 겪는 사람을 보고만 있느냐? 어째서 너는 그들이 계속해서 아파하도록 허용하고 있느냐?”

다음 주일이면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대림절기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오셨음을 상기시킵니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 연약한 아기로 오셨음을 상기시킵니다. 2천 년 전, 가장 낮은 곳에, 보잘것 없는 나그네 가족의 일원으로, 아기로 오신 그분을 ‘메시아’(왕)로 알아본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주제와 함께 대림절기의 중요한 묵상주제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질문’하실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그 질문이 무엇을 담고 있고, 얼마나 깊은 사랑과 연민을 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이웃들의 마음에 가닿도록 일상의 언어로 전달해 줄 수 있을까요? 어찌 보면, 코로나19로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을 곳과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궁핍과 곤경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조건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오른편 의인들처럼 계속해서 ‘무조건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로 ‘가해’를 마감하고 다음 주일이면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어떤 모습이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따르는 이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운 한 해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한마디로 일상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 눈을 뜨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눈을 떠서 모든 이들을 예수님으로 대한다면 어떤 일이 안 일어날까요? 우선 우리 자신을 함부로 하는 일이 안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예수님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홀대하는 일이 안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삶이란 결국 이런 눈을 떠가는 여정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는 그 눈을 떴는가? 그 눈을 못 떴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 눈 뜸은 다른 모든 은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배웠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웃’, 특히 ‘사회적 약자들’ 속에 숨어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안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어 새로운 한 해의 여정을 ‘사랑의 눈’을 뜨고 힘차게 걸어가게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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