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15. 연중3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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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태초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시면 세상을 다스리시나이다. 비오니,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재능으로 이 땅에서 신자의 책임을 다하여 영원한 나라를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판관 4:1-7
  • 시편 – 시편 123
  • 독서 – 1데살 5:1-11
  • 복음서 – 마태 25:14-30

연중 3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주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나눌 착하고 충성스러운 우리입니다.

1독서 《판관기》는 하느님께서 들어 쓰신 ‘판관 드보라’ 이야기입니다. 먼저 《판관기》가 어떤 책인지부터 말씀드립니다. 이 책에 기록된 이야기들에 근거해 정확한 연대 추정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주전 1230년경으로 잡는다면, 《판관기》는 여호수아 사후 주전 1200년경부터 1030년경까지로 추정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때로부터 ‘초기 왕정’이 수립되기 전까지 대략 200년간입니다. 물론, 판관들이 직무를 수행한 기간을 합치면 410년에 이르기에 연대 추정은 여전히 난제입니다.

그 기간에 땅 분배를 마친 이스라엘은 각 지파의 수령들이 지역을 통치하는 ‘지파 동맹체’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가나안 입성과 정복을 주도한 여호수아는 ‘유언’(여호 23장)과 ‘세겜’에서의 ‘계약 갱신’(여호 24장)을 통해 ‘하느님만을 사랑할 것’을 교훈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던 자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죽자 ‘하느님과의 계약’(시나이산 계약)을 어깁니다(판관 2:7-13).

하느님께서 쫓아내라고 명령하신 그 땅 민족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데 실패합니다(판관 2:21-23). 오히려 그 땅의 문화에 동화되고 하느님을 저버립니다. 그 땅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바알과 아스다롯, 아세라)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릅니다(판관 2:11,13; 3:7). 그 결과 그들은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습니다(판관 2:12). 하느님께서는 그 땅 민족들에게 이스라엘을 넘기심으로써 그들의 배반과 배신을 징벌하십니다(판관 2:14-15). 한마디로 《판관기》는 진정한 ‘왕’이신 하느님께 ‘불충’(不忠)한 이스라엘의 배반과 배신의 ‘암흑기’ 역사를 전해줍니다.

그 불충한 암흑기에 출현하여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해방(구원)하고 다스린 ‘12명의 카리스마적인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전부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영웅들입니다. 원수에게 억눌린 이스라엘이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그 영웅들을 세우시어 구원하셨습니다(판관 2:16,18). 그들의 이야기가 중심인 책이 《판관기 判官記》입니다. 책 이름은 ‘재판관들’, ‘통치자들’을 뜻하는 히브리어 ‘쇼프팀’(שׁפטם)입니다. ‘쇼프팀’은 ‘재판하다’, ‘다스리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샤파트’(שָׁפַט)의 복수형입니다.

《판관기》의 중요한 특징은 일정한 도식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점입니다(판관 2:16-19).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악을 행합니다(판관 2:11-13; 3:7,12; 4:1; 6:1; 10:6; 13:1).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의 손에 그들을 넘겨주시어 징벌하십니다(판관 2:14; 3:8; 4:2; 6:1; 10:7). 이스라엘은 고통 중에 울부짖습니다(판관 3:9,15; 4:3; 6:6; 10:10). 그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판관들’(구원자)을 일으켜주십니다(판관 2:16, 3:9,15). ‘판관들’은 임무에 성공하고 이스라엘은 ‘평온’을 누립니다(판관 3:11,30; 4:23-24; 5:31; 8:28). 그러나 그 판관들이 죽으면 이스라엘은 다시 하느님을 저버립니다. 이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간단히 이스라엘의 죄악-하느님의 징벌(고난)-이스라엘의 회개-하느님의 구원-평화라는 다섯 단계 도식의 반복입니다.

이 주기적인 도식은 크게 두 개의 ‘일화’(17-21장)를 전하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타락과 혼란’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일화’는 포로기나 포로기 이후에 첨가되었을 것으로 말해집니다. 하나는 ‘미가’와 ‘단 지파의 종교적 음행’인 우상숭배(17-18장)이고, 다른 하나는 ‘베냐민 지파의 윤리적 악행’(19-21장)입니다. 특히 무명의 레위 지파 사제 ‘가족’(여성)을 향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기브아인들의 만행(蠻行, 집단강간)은 동족상잔(20-21장)으로 이어집니다.

《판관기》 기자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 때 제멋대로 살았다”(판관 21:25)라고 고발하면서 판관 시대를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단한 역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그들의 왕이셨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계약’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원이 필요할 때는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우러르다가도 평화를 누리면 하느님을 저버리고 배신을 반복하며 위태롭게 걷던 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판관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계약에 불충실한 그들이 고난 속에서 부르짖을 때 가련히 여기시고 ‘판관들’을 일으켜 세우시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세대들에게 ‘역사의식’을 갖고 주인이신 하느님께 순종할 것을 교훈합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우상’을 버리고 자유케 하시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지킬 것을 교훈하는 책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판관기》 4장과 5장은 동일한 사건을 한번은 ‘산문체’(이야기체)로 한번은 ‘운문체’(시적으로)로 기록했습니다. 함께 살피면 당시의 상황이 좀 더 실감 나게 복원되기에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특히 이스라엘 북쪽의 땅을 분배 받은 지파들인 납달리, 즈불룬, 이싸갈)은 갈릴래아 북쪽에 위치한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 동안이나 ‘억압’받았습니다. 그 억압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시’(詩)로 알려진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5장)는 이렇게 전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시대에도 야엘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큰길을 버리고 오솔길로 다녔네. 오, 드보라,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어머니 당신이 일어서기까지, 이스라엘의 촌읍들은 죽어 있었네. – 판관 5:6-7

여행자들이 큰길을 피해 오솔길(뒷길)로 다녀야 할 정도로 자유로운 통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촌읍들’은 죽은 듯 지내야 하는 공포의 형국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은 강력한 공포에 사로잡혀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유인’이었던 그들이 ‘자유’를 잃고, 이집트에서처럼 다시 ‘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출현을 기다리던 이집트 땅의 이스라엘처럼 그야말로 자유와 구원이 절실한 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처지’가 된 것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일”, 즉 ‘시나이산 계약’을 깨고 ‘불순종’하며 ‘우상숭배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죄악’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주님께서는 ‘하솔’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 야빈’에게 이스라엘을 ‘팔아’ 넘기셨습니다. 그들의 ‘죄악’(불순종)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그전에는 ‘가나안 땅 밖’의 민족들에게 압제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쫓아내는 데 실패한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억압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억압하던 가나안 왕 야빈은 ‘철병거’를 구백 대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오던 시절이니 ‘철병거’는 당시로는 ‘최첨단 무기’였던 셈입니다. 그 철병거를 부리는 야빈의 ‘군대 지휘관’은 ‘시스라’였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하솔’을 방문하여 궁전터와 솔로몬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고대 ‘병거성’(兵車城)을 답사하였습니다. 그곳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 15km 지점에 있으며, 고대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가나안의 중심지였습니다. 더욱이 중요 도로와 연결된 길목이어서 정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지였습니다. 《여호수아》에는 가나안에 있던 여러 왕국의 ‘종주국’으로 불리는 ‘강력한 성’(城)이었습니다(여호 11:1-11). 여호수아는 정복 전쟁을 통해 ‘하솔’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 왕을 처형한 바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 땅을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여호 19: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처지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룬 정복의 역사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승리의 노래는 사라지고 눈물의 노래만 퍼져갔습니다. 그 땅의 주인이어야 할 이스라엘이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노예처럼 고난을 겪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건의 주권자이심을 증언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세례성사의 언약’을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 자녀다운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세례성사의 언약을 깨고 불순종할 때, 즉 죄를 지으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인이 아니라 죄의 노예로 팔려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죄를 짓는 이마다 ‘죄의 노예’입니다(요한 8:34).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자유’를 소중히 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세례성사의 언약을 깨고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고난이 싫다면 우리는 아직 자유인으로 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거기에 ‘자유인의 길’이 있습니다.

심한 억압과 공포 속에서 이스라엘이 울부짖자 주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이 점 역시 ‘주목’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울부짖는 당신 백성을 ‘가련히’ 여기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의외의 인물을 세워주십니다. 누구입니까? ‘에브라임 지파’에 속하는 ‘예언자 드보라’입니다. 왜 의외입니까?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판관기에서 ‘대판관’으로 분류되는 6인(오드니엘, 에훗, 기드온, 입다, 삼손) 중 한 명입니다. 당시의 가부장 질서하에서 여성은 아버지나 남편에게 예속되었고, 불완전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엄혹한 시대에 ‘드보라’를 ‘판관’으로 세우셨습니다.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던 사회에서 파격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며 ‘여성다움의 굴레’를 씌우려는 모든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보라’는 ‘라삐돗의 아내’입니다. 히브리어로 ‘라삐돗’(לַפִּידוֹת)은 ‘횃불’(torch)을 의미하는 ‘라피드’(לַפִּיד)에서 유래하기에 ‘빛의 아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드보라’(דְּבוֹרָה)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요? ‘꿀벌’(bee)입니다. 이 낱말은 《신명기》 1장 44절, 《판관기》 14장 8절, 《시편》 118편 12절, 《이사야》 7장 18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꿀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꿀벌’은 꿀을 수집하여 저장합니다. 양봉업자들은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4년 안에 사라진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할까요? 이유는 ‘꿀벌’이 꽃꿀 수집과정에서 꽃가루(花粉) 매개 작용을 통해 식물이 수분(受粉, 가루받이)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런 ‘꿀벌’이 멸종하면 여러 식물이 씨앗을 맺을 수 없고, 싹을 틔울 수도 없습니다. 어쩌면 채소나 과일도 사라지고, 아침을 깨우는 ‘커피’도 마실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이나 인간을 포함한 다른 동물들 역시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꿀벌’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유지’를 위해 너무나 중요한 곤충입니다.

저는 ‘꿀벌’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서 ‘드보라’야말로 이스라엘에게 그런 ‘꿀벌’이었다는 묵상을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보라’는 ‘라마’(높은 곳)와 ‘베델’(하느님의 집) 사이에 있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밑에 자리했습니다(판관 4:5). 그냥 ‘종려나무’도 아니고 ‘드보라의 종려나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히 그곳에서 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판하던 모세를 보는 듯합니다(출애 18:13). 게다가 다른 나무가 아니고 ‘종려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아주 중요한 상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번성, 풍요, 다산, 승리, 부활을 상징하는(시편 92:12-15) ‘종려나무’(תָּמָר 타마르)는 ‘대추야자나무’(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립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들고 맞이했다는 그 나무입니다(요한 12:13). 큰 나무는 20m 이상 자라고, 부채모양으로 퍼지는 줄기는 3m 이상까지도 자랍니다. 한 나무마다 대략 10송이 정도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데 줄기가 휠 정도입니다. 작년 성지순례에 다녀와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 먹었던 과일 기억하시지요? ‘꿀’처럼 달았던 그 과일이 ‘대추야자’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열매를 ‘꿀’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꿀벌’인 ‘드보라’(דְּבוֹרָה)가 ‘꿀’이 풍성하게 열리는 ‘종려나무’ 밑에 있었다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상징입니다.

더욱이 ‘드보라’라는 종려나무 밑에 자리 잡고 재판했습니다. 그의 이름의 어원은 ‘말하다’(speak)라는 뜻의 동사 ‘다바르’(דָבַר)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꿀송이’처럼 달콤한, 정확히 말하면 ‘송이꿀’보다 달콤한 ‘하느님의 말씀’(시편 19:10; 119:103)을 선포하는 자리라는 상징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 즉 ‘말씀’을 떠나 살고 있을 때 ‘드보라’는 하느님의 말씀 안(아래)에 거하며, 그 말씀을 열심히 선포하고, 재판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드보라’가 재판하던 장소인 ‘드보라의 종려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언급된 ‘라마’와 ‘베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성소’입니다. ‘라마’는 훗날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인 ‘사무엘’과 관련이 깊고(사무상 1:1,19; 2:11; 7:15-17; 8:4; 15:34; 25:1), ‘베델’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관련이 깊습니다(창세 28:10-22; 35:11-15).

‘드보라’는 그 역사적 장소가 마주 보이는 ‘드보라의 종려나무’ 밑에 자리 잡고 ‘하느님의 뜻’을 펼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판가름’하여 ‘평화’를 가져다주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며, ‘기죽은’ 그들을 열심히 격려하였습니다. 그는 복음 이야기처럼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충성’을 다한 ‘착한 여인’이었습니다. 절망한 그들 사이에서 ‘희망’을 수분(受粉하는 ‘꿀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충실한 예언자’였습니다. 그 ‘엄혹한 시대’를 밝히는 ‘말씀의 빛’이자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어머니’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러른 ‘충실한 종’이자 이스라엘을 격려하고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드보라’(꿀벌)에게 ‘한 말씀’(송이꿀)을 주십니다. 그 ‘신탁’(神託)대로 드보라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בָּרָק)을 부릅니다. 그는 ‘납달리 지파 케데스’ 출신으로 이름의 뜻은 ‘벼락’(flash of lightning, 번갯불, 섬광)입니다.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빠르고 힘센 장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판관들’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했을 정도입니다(사무상 12:11; 히브 11:32). ‘케데스’는 야빈이 거주하던 성인 하솔에서 북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는 드보라의 부름에 ‘순종’하여 ‘벼락같이’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입니다. 힘센 장수가 자신보다 작은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상황입니다. 드보라의 인격적인 권위와 영향력이 자기 지파를 넘어설 정도로 강력했다는 뜻입니다. 드보라는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납달리 지파와 즈불룬 지파에서 만 명을 뽑아 다볼 산으로 이끌고 가거라. 그러면 나는 야빈의 둔대 지휘관 시스라를 키손 강으로 유인해 내겠다. 내가 그의 전군을 병거대까지 유인해 내다가 네 손에 부치리라. – 판관 4:6~7

그 예언은 하느님께서 ‘바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전쟁이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예언대로 순종하면 이스라엘은 승리할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납달리 지파 출신의 바락을 ‘선봉’으로 택하신 이유는 그 지파 사람들이 ‘야빈’으로부터 가장 심하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볼산’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진 ‘이스르엘 골짜기’에 있는 높이 588m 산입니다. ‘납달리’와 ‘즈불론’과 ‘이싸갈’ 지파가 서로 경계를 맞댄 산이기에 세 지파의 군인들을 모으기에 좋은 곳입니다. ‘키손강’은 ‘다볼산’에서 근원(根源)하여 이스르엘 골짜기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가는 길이 40km에 이르는 강입니다. 오늘 1독서 본문은 여기까지만 배정했습니다. 본문 배정이 아쉽습니다. 연속극도 아닌데 다음이 궁금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바락’은 드보라의 예언에 ‘두려움’을 드러내며 ‘조건부 순종’을 말합니다. 드보라가 동행하면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벼락’이 ‘꿀벌’을 ‘의지’하는 셈입니다. 드보라는 ‘동행’을 약속하면서 ‘소심한’(‘겸손한’이라고 읽습니다) 바락에게 ‘전쟁 승리의 영광’이 ‘다른 여인’에게 넘어갈 것임을 예고합니다(판관 4:9,17-22; 5:24-27). 야빈의 군대지휘관 ‘시스라’를 처단하여 ‘전쟁을 끝낼 영웅’이 ‘여인 야엘’이라는 점도 ‘드보라’가 판관이던 것만큼 놀랍습니다.

드보라의 예언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은 ‘바락’은 즈불룬과 납달리 지파의 군인들을 출동시킵니다(판관 4:10). 그들의 출동은 ‘바락’이 가나안 북부 지역을 다스리던 일종의 ‘지도자’(판관, 장수)였음을 말해줍니다. 결과적으로 ‘바락’은 승리합니다. 그 승리는 바락의 능력으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안겨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자신의 대리자를 통해 이루신 ‘거룩한 승리’입니다.

1독서 《판관기》의 하느님께서 들어 쓰신 ‘판관 드보라’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저지르는 ‘죄악’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허락하셔서라도 그 죄악으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시고, 회개하며, 구원을 간청하는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자비의 주님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의 일을 해 나가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일을 위해 시대마다 사람들을 ‘부르시고’ 쓰십니다. 더욱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쓰시는 일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의 손’을 들어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 가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연약한 사람의 손’에는 오늘도 ‘우리’도 포함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올바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드보라’처럼 세상과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지구생명의 회복과 유지를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사람들의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가중되고 있습니다. 지구 안에 고통의 울부짖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점점 ‘믿음과 희망의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꿀벌’ 같은 ‘드보라’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복음 이야기 ‘달란트의 비유’처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땅에 묻지 않고,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쏟아부은 좋은 예입니다.

우리도 ‘드보라’처럼, ‘말씀 위’에 바로 서서 세상을 위해 ‘중보’하고, 받은 은총을 동원해 서로를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기도와 사랑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감당할 ‘바락’이나 ‘야엘’ 같은 사람들을 더 많이 붙여주실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 교회도 ‘드보라의 종려나무’이기를 축복합니다. 꿀보다 단 하느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모이는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은 삶을 회개하고 말씀을 잘 새겨듣고 묵상하며 실천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리아’처럼 충실한 제자이기를 축복합니다(루가 10:39). 오늘도 성찬례에서 “자기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며”(로마 12:1) 응답하는 모두가 ‘드보라’입니다. 이 성찬례에서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아 믿음과 희망을 잃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퍼뜨리는(수분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꿀벌’들로 거듭나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23>은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모든 희망을 주님께 걸고, ‘주님의 자비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노래’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천한 종’으로 비유합니다. 주인이신 주님께서 자비 베풀어 주시기를 반복해서 기도합니다(3절). 구절마다 ‘애절함’이 묻어납니다. 사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궁극적 기도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불쌍히 보아주소서. – 시편 123:3

그 내용으로 볼 때, 배경은 바벨로 포로기 이후로 보입니다. 특히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던 때로 보입니다. 비웃음과 멸시와 모멸 속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가 1독서 《판관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울부짖음과 정확히 포개집니다.

우리도 악으로,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면서 <123편>의 주인공 같은 심정이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아프고 쓰라린 마음을, 영혼의 상처를 숨김없이 ‘하늘의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우는 마음을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어떤 환경이든지 굴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믿음의 눈을 ‘하늘의 주님’을 향하십시오. 기도는 짧아도 됩니다. 기도하며 하늘을 향하는 우리의 눈에 ‘자비의 빛’이 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고통 속에서 울고 있는 가련한 우리에게, 자비가 필요한 아기 같은 우리에게, ‘엄마’처럼 속히 내려오실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우리를 꼭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받은 비웃음과 멸시와 모멸은 ‘기쁨의 찬송’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금 평화와 안정 속에 있습니까? 고통 속에 울고 있는 이웃에게 ‘드보라’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엄마’이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를 교훈합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역사의 종말인 주님의 재림 일을 단언할 필요가 없습니다(1절). 그 때와 시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역입니다(마르 13:32). 그러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는 삶’입니다(6절).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2-3절). 바울로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한 사람은 도둑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해산을 앞둔 여인입니다. 그 재림의 날은 밤중의 도둑같이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재림 날은 해산의 진통처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림의 돌연성과 필연성을 명확히 한 셈입니다.

그 재림의 날이 성도들에게는 ‘도둑’처럼 덮치지 않을 것입니다(4절).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5절). 한때 우리는 ‘어둠의 자녀’였습니다. 한때 우리는 ‘밤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구원을 얻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9절). 밤과 어둠의 세상에서, 빛과 대낮의 세상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로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깨어 있는 삶이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다운 삶’이라고 교훈합니다. 그 깨어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바울로는 전투를 준비하는 ‘군인’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8절). 우리는 전투에 나서는 군인처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을 무장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써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군인의 가슴막이 갑옷은 목과 몸통을 보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간직한 ‘믿음’은 ‘불순종’과 ‘불신앙’을 조장하는 ‘악의 공격’으로부터, ‘사랑’은 ‘미움’과 ‘심판’을 조장하는 ‘악의 공격’으로부터 주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보호합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분리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투구’가 몸의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듯이 재림하실 주님을 향한 ‘구원의 희망’은 ‘거짓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우리의 미래가 안전할 것이라 교훈합니다(9-1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써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신과 악마로부터 구원을 받고 부활 생명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덕택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택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11절). 복음 이야기처럼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인 서로를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달란트 비유’입니다. 예수께서는 ‘종말’을 준비하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태 24:45). 지난 주일에 들은 ‘열 처녀 비유’가 ‘슬기로운 종’에 대한 설명이라면, 오늘 이야기는 ‘충성스러운 종’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우선, ‘달란트’는 그리스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을 번역한 말입니다. 영어로는 ‘탤런트’(talent)라고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달란트는 가장 큰 ‘무게’ 단위와 ‘화폐’로 쓰였습니다. 특히 ‘화폐’로 쓰일 때는 ‘금’이냐 ‘은’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1달란트’는 직장인이 15-20년, 혹은 그 이상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할 정도의 대단히 ‘큰돈’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사회에서는 ‘달란트’가 ‘개인의 타고난 재능’(재주, 소질, 강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한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코리아 갓 탤런트’라는 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선보였고, 일부는 ‘스타’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 탓인지 ‘달란트’라고 하면 대개는 ‘개인의 선천적 재능’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생물학’에서도 인간의 ‘유전자’(DNA)에 ‘특정 재능 정보들’이 새겨져 전달된다고까지 말합니다.

《마태오복음》 기자도 ‘개인의 재능’ 이야기를 하려고 ‘달란트 비유’를 기록했을까요? 물론, “주인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라는 표현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탁월한 재능’을 ‘유전자 정보’로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는 ‘달란트’란 말을 어느 때 사용합니까? 어린이 교회학교에서는 신앙교육 차원에서 ‘달란트 시장’을 열어서 시상하기도 합니다. ‘교회위원 위임식’에서는 위원들의 ‘직분’을 가리켜 그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위원의 ‘직분’이 귀하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면 달란트 비유를 전하는 《마태오복음》 기자도 ‘타고난 재능’, ‘역량’, ‘소질’, ‘강점’, ‘직분’을 강조하려고 ‘달란트 비유’를 기록했을까요?

어떤 사람(주인, 예수님)이 먼 길(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시고 사도들 곁을 떠나신 예수님의 ‘승천’을 떠올리게 합니다(요한 14:18, 16:7). 주인의 행동이 놀랍습니다. 그는 “종들을 불러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기의 재산을 맡겼습니다.” 현실에서는 자기의 재산을 맡기는 이렇게 자비로운 주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에 ‘공감’이 잘 가질 않습니다. 또 대부분의 독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라는 문자적 표현에 지나치게 집중합니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타고난 ‘재능의 차이’를 말한다고 너무나 쉽게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비교’에 익숙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다섯, 둘, 하나를 맡기는 주인의 처사는 ‘편애’나 ‘차별’처럼 보입니다. 현실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많은 재능(장점, 능력, 기회)을 가진 것처럼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듯 보입니다. 쉽게 말해 ‘삶은 공평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마태오가 자신이 속한 교회공동체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우화(allegory)이기에 ‘문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우화(allegory)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의해서 ‘암시적’(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와 유사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하는 소통의 기술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강조점은 그들 간의 타고난 재능의 차이도 아니고, 삶이 공평치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도 아닙니다. 오히려 비유의 강조점은 자비로운 주인이 “자기 재산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다”입니다.

“재산을 맡기었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인의 ‘신뢰’(은총)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들을 향한 ‘신뢰’(은총)를 보였습니다. 그 ‘신뢰’의 구체적인 형상이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재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한다고 하지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경우는 잘 없지요? 심지어 주인은 “먼 길을 떠나면서도”(본문에 따르면 오랜 시일이 걸리는 여행입니다)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종들에게 맡길 정도로 그들을 ‘신뢰’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능력’을 믿었고,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에 ‘기회’를 제공한 셈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인에게서 ‘은총’(보다 정확히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주인이 맡긴 재산’, 즉 ‘달란트’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위에서 ‘달란트’가 고대 근동에서 가장 큰 ‘화폐’ 단위이며, 대단히 ‘많은 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문자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우화’이기에 ‘달란트’의 문자 이상의 ‘암시’(상징)를 찾아내야 합니다. ‘달란트’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신뢰’를 표현하는 ‘엄청난 가치의 뭔가’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그렇게 값진 뭔가를 우리의 능력에 따라 맡겨주셨음을 상징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일생을 통해 찾아야 하고, 그것을 발견한다면 신명 나게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수 있는 ‘보물 같은 그 무엇’을 상징합니다. 간단히 ‘절대적인 임무’, ‘사명’, ‘과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나눔을 준비하면서 2017년에는 ‘달란트’를 뭐라고 해설했는지 보았습니다. 사도들에게 맡겨진 ‘복음 전도의 사명’, 즉 ‘대사명’(大使命)이라고 해석했습니다(마태 28:18-20). 예수께서 이미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도록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달란트’가 당시에 ‘가장 큰 화폐 단위’이듯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도록 살아가는 삶이 그렇게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예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긴 그 일이 ‘하느님 나라 운동’이며, 우리가 수행해야 할 ‘결정적인 한 가지 일’도 ‘하느님 나라 운동’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한 가지로만 한정적으로 ‘달란트’를 새길 이유는 없습니다. 본래는 ‘하느님의 소유’였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들을 상징한다고 폭넓게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재능’이나 ‘강점’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 ‘시간’, ‘믿음’, ‘재물’, 심지어 ‘삶’ 자체도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아무튼 각자가 받은 ‘달란트의 차이’를 ‘편애’나 ‘차별’, 즉 안타깝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라는 점이 나중에 주인의 ‘칭찬’과 ‘보상’에서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그릇’(능력)을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남의 ‘재능’(능력, 은총, 기회)을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능이 적다고 핑계를 대거나 불평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나를 ‘신뢰’하시어 은총으로 선물하신 그 ‘값진 보물’ 같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 재능(능력, 은총, 기회)을 발견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은총(재능)을 계발해서 활용하고 있는지, 그 재능(강점)을 활용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비유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은총’(재능, 능력, 강점)을 하느님께 선물 받아 이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맡겨진 ‘은총의 최종 목적’은 우리 자신의 안위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신뢰하시어 은총을 주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즉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있습니다(2고린 9:8). 우리는 자신의 ‘달란트’(은총, 사랑)를 생각할 때마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주인을 향한 종들의 ‘충실함’은 주인이 ‘부재중’일 때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주인에게서 받은 은총(사랑), 즉 그 ‘신뢰와 기대와 기회’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행동’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인이 재산(달란트, 신뢰, 기회)을 맡기고 떠난 후 그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두 부류로 나뉩니다. 두 종은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합니다. 주인이 자신들을 ‘신뢰’하여 허락한 ‘기회’를 선용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1달란트 받았던 종은 땅에 묻었습니다. 뒤에 보면 이런 행동의 차이를 만든 근본에는 ‘주인에 대한 이해와 오해’, ‘신뢰와 두려움’이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문제는 ‘오해’에서 시작하고, ‘이해’로 풀립니다. ‘신뢰’(신의)는 관계를 더욱 깊게 하지만, ‘두려움’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얼마 뒤에’(원문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합니다. ‘얼마 뒤에’라는 표현은 우리가 지난주 ‘열 처녀 비유’에서 보았듯이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았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종말이 ‘지연된다’라는 것, ‘역사가 많이 흐른 다음 종말이 온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으로 또다시 《마태오복음》 기자는 ‘종말 지연’을 교회에게 설명하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신랑이 온 것처럼, 멀리 떠났던 주인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2독서 바울로의 교훈처럼 종말 심판은 반드시 닥쳐옵니다. 다시 오신 주님은 당신에게서 받은 은총(사랑), 즉 그 ‘신뢰’와 ‘기대’와 ‘기회’에 ‘충실’했는지 셈하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충실성’을 셈하실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긴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 혹은 우리가 이 지상 여정을 끝내고 주님 품에 돌아갔을 때, 이 지상 생애 동안 받은 은총(사랑)들, 즉 생명, 시간, 재능, 재물뿐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무엇을 했는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 두 종은 두 배로 늘린 ‘달란트’(결실)를 주인에게 보여줍니다. 어떻게 그런 대단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중요한 점은 자신들을 향한 주인의 ‘신뢰’와 ‘기대’, 주인이 허락한 ‘기회’를 그들이 충족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떠났어도 ‘달란트’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새기며 살았습니다. ‘달란트’는 주인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하나의 ‘상징’(은총, 사랑, 신뢰, 기대, 기회)입니다. 그들은 그 관계를 늘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할 만큼 주인으로부터 ‘큰 신뢰’와 ‘기대’를 받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주인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 ‘신뢰’에 충실했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나타난 두 배의 결과는 주인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충실도’를 말해줍니다. 놀라운 점은 주인의 ‘칭찬’과 ‘보상’입니다.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 25:21,23

주인은 지금 ‘두 배의 성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인과의 관계를 잊지 않고 살았던 바로 그 점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성과’가 아니라 ‘그들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칭찬과 보상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안타까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근거입니다.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재산을 맡겼습니다. 생각하기 따라서는 ‘편애’나 ‘차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주인은 그들이 만들어낸 일의 ‘성과’에 상관없이 ‘똑같은’ 칭찬과 보상을 합니다. 이렇게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신뢰’와 ‘기대’와 ‘기회’에 ‘신의’ 있게 응답한 종들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 보상은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제 ‘1달란트’ 받은 종과 주인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 마태 25:24-25

그는 자신이 처음 받은 것과 똑같은 ‘1달란트’를 내놓습니다. ‘원금’입니다. 어찌 보면 그는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아닙니다. 《루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주인)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자를 쳐서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은 것 말고 크게 잘못한 점도 없어 보입니다. 그는 당시 관행대로 재산(돈, 귀중품)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확실히 안전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늘나라’를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유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13:44). 땅속에 보관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슬기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그가 당시 관행대로 한 것일 뿐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잠재적인 낭비’입니다. 분명 그는 ‘변화’를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종들처럼 ‘주인’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한’ 주인의 ‘신뢰’와 ‘기대’와 ‘기회’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까? ‘한 생각’ 때문입니다. 같은 주인을 섬기던 종들이지만 주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다른 종들은 재산을 맡긴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주어진 ‘기회’를 살렸습니다. 자신들이 주인으로부터 ‘큰 기대’와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재산을 맡길 만큼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여 주신 주인이라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1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그 ‘한 생각’이 결과적으로 그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습니다. 그는 1달란트를 땅에 묻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주인의 신뢰와 기대와 기회를 땅에 묻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인을 무시한 종’입니다.

심지어 그는 주인에게 ‘나쁜 태도’를 보였습니다. 주인을 가리켜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대단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을 정도의 주인”이라면, 그는 정말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이렇게 그 종의 말은 대단한 칭송처럼 보이는 데 어째서 주인은 호통을 쳤을까요?

결코, ‘칭송’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고발’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란 현실에서 누구입니까?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이’는 로또 당첨자처럼 일종의 ‘불로소득자’입니다.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이’는 ‘남의 것을 뺏는 이’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런 이는 ‘불의하고 포악한 왕’이나 ‘잔혹한 독재자’나 ‘날강도’뿐입니다.

그 종은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한 ‘그 한 생각’을 넘어서 비인간적이고, 불의하며, 엄한 사람이라 주인을 ‘비난’한 셈입니다. ‘자기 생각’에 속아서 감히 ‘주인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주인이 종에게 이런 비난을 받고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그가 그렇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다른 종들이 받은 달란트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비교’하다가 그리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편애’와 ‘차별’이라는 ‘불만’입니다. 주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리 한 것인데도 주인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가장 큰 잘못은 ‘한 생각’에서 비롯된 ‘주인과의 잘못된 관계’였습니다. 한마디로 ‘오해’에서 비롯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고, 주인이 그를 ‘신뢰’하여 투자한 ‘기회’를 날려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주인의 신뢰를 ‘땅’에 묻었습니다. 주인이 준 ‘기회’를 잡는 대신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며 ‘현상 유지’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자신에게 ‘재산’을 맡기며 신뢰를 표현한 주인의 ‘은총’과 ‘기회’를 완전히 무시한 행위였습니다. 인생일대의 ‘완전한 낭비’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오해, 두려움, 은총과 기회 무시) 주인으로부터 책망받는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우리도 그 종처럼 하느님을 ‘오해’하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은총, 신뢰, 기회)를 묻어두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오해’나 ‘두려움’은 우리를 ‘쇠약’하게 만듭니다. 특히, ‘두려움’은 우리의 생각과 말에 영향을 미치고 걸음걸이에도 영향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둠을, 곤충을, 동물을, 큰소리를,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질병을, 일의 실패를, 관계 맺는 일을, 심지어 일의 성공조차도 두려워합니다. 정말이지 별의별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단계로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인정, 수용하고) 그 두려움에 ‘이름’을 붙이도록 합니다. 감정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 문제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것은 ‘거인의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이 찾아낸 더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세상에는 두려워할 문제가 없다’라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 큰 소리를 듣게 되거나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본능적인’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안전’에 대한 위협이기에 정상적인 심리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붙잡히는 두려움은 ‘문제’라고 말합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닌 데 두렵다고 ‘인식’하여 생기는 감정, 즉 ‘인지 왜곡’(오해)에서 비롯한 ‘거짓 감정’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심리학의 이런 발견이 있기 훨씬 전에 우리가 ‘인지 왜곡’(오해)으로 갖게 되는 이런 ‘두려움’을 꿰뚫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두려움도 있지만(히브 12:28), 그 두려움을 제외하고는 반복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그 말씀을 풀어쓰자면, “이 세상에는 두려워할 일이 없다,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근거는 ‘은혜와 사랑의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격려합니다(신명 31:8). 하느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시며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직접 복을 주십니다(여호 1:9).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르 5:36). 폭풍으로 사나워진 호수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6:20). 부활하신 예수님은 빈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마태 28:10).

그런데도 우리는 거짓 감정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관계도, 신앙도, 일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다른 것을 ‘더 크게’ 보는 ‘인지 왜곡’(오해)입니다. 1달란트 받은 종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주인의 ‘신뢰’와 ‘기대’를 ‘오해’(인지왜곡)했고, 일의 실패를 더 크게 보았으며,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에게 엄청난 재산을 투자하고 위임해 준 ‘주인의 신뢰’(은총)와 ‘성의’, ‘기대’와 ‘기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주인은 그의 변명에 크게 분노했습니다(마태 25:26-27). 그를 향한 자신의 엄청난 투자, 즉 ‘신뢰’(은총)가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은 자기 재산이기에 그에게 아무것도 맡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 종에게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만큼 ‘신뢰했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명예를 높여주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주인의 신뢰와 기대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해’(인지왜곡) 와 ‘두려움’으로 자신의 과업(주인으로부터 보상을 받는)을 그르쳤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호통을 칩니다. 주인은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도록 명령 합니다. 그를 향한 ‘신뢰’와 ‘기대’, ‘기회’를 ‘완전히 거두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열 달란트를 만든 종은 더 넉넉해졌습니다. 결국 변명을 늘어놓던 그는 ‘악하고 게으른 쓸모없는 종’으로 판명 났기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깁니다. 자신이 땅에 묻었던 그 ‘돈’과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기 스스로가 초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을 오해하고, 무시한 종, 자신이 받은 재능(능력)이 적다고 핑계 대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종, 주인으로부터 은총을 선물 받고도 아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종은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여 엄청난 ‘달란트’(재능, 능력, 은총, 신뢰, 기회)를 맡기신 하느님께 충성하지 않는 이들, ‘자기의 안위만 구하는 이들’은 모두 그런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비유 전체의 맥락은 ‘은총’과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직 ‘주님의 귀환’까지 시간이 있는 동안 ‘주인에게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우리에게 ‘은총’(사랑)을 베푸신 주님의 ‘신뢰’와 ‘기대’에 ‘신의를 지키라’라는 뜻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판관기》를 통해 하느님께 충실했던 ‘판관 드보라’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꿀벌처럼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하느님의 백성을 위하여 쏟아부은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응답인 《시편》을 통해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하늘의 주님’을 우러르며 기도하라는 교훈을 들었습니다. 자비의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압제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처럼 분명코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깨어 준비하며 살라는 교훈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가올 재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이 빛의 나라에 속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며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들을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달란트 비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셨다고 들려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맡겨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풍성한 자산과 자원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오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돌려받으려 무엇을 꾸어주셨는지 꼼꼼히 헤아리고 계신 ‘쪼잔한 분’이 아닙니다.

분명 우리 개개인은 주님 앞에서 ‘특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뢰’와 ‘기대’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달란트 비유의 진실입니다. 어쩌면 이 비유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행동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하느님은 1달란트 받은 종처럼 자신의 ‘품위와 안위’를 지키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투신’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제한하여(자기를 비워)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닮은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불순종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으로 투신’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투신’하신 주님은 1달란트 받은 종처럼, 우리가 자신의 ‘품위와 안위’를 지키기 위해 ‘물러나’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만일, 예수께서 ‘신(神)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뒤로 물러나 계셨다면,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여 물러나 계셨다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가 두려워 겁먹고 물러나 계셨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셨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보다 아버지를 향한 ‘신뢰’ 속에서 당신이 지상에 오신 그 ‘기회’를 활용하여 “착하고 충성된 종”처럼 ‘구원의 일’을 충실히 완수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신 주님도 우리가 당신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달란트’를 활용하여 이 세상을 더 살맛 나게 하는 세상으로 만들기를 ‘기대’하십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우리의 달란트를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데 사용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먼저 이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와 사회 속에서 우리가 받은 달란트로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 일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도 합니다. 다섯,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그들은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게는 주인에 대한 ‘신뢰’와 ‘신의’를 지키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준 ‘기회’를 활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파송되면, 가서 하느님의 사랑을 용감하게 나누십시오.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퍼뜨리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더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 일은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사랑으로 투신’하신 하느님의 달란트(사랑, 은총)를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 복음 이야기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의 자녀’로 살아가는 ‘기쁨의 상급’을 ‘주님이 오시는 날’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는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시간, 재능, 능력, 강점, 재물을 보람 있는 일에 사용하기보다 ‘오해’(한 생각, 인지 왜곡)와 ‘두려움’으로 묻어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달란트’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꿀벌인 ‘드보라’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슬기롭게 활용하라고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 동안 ‘은총’(사랑, 달란트)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신뢰하며, 열심히 일하여 주님과 셈하는 날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날 주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에게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으로 ‘이타적’으로 살았느냐? 너에게 ‘시간’을 주었다. ‘영원’을 준비했느냐? 너에게 ‘예술적 재능’을 주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했느냐? 너에게 ‘문학적 재능’을 주었다.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했느냐? 너에게 ‘통솔력’(지도력)을 주었다. 사람들을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데 앞장섰느냐? 너에게 ‘재물’을 주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착한 일’을 했느냐? 네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는 데 사용하라고 그 선물들을 주었다. 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너에게 준 생명, 시간, 재능, 능력, 강점, 재물을 사용했느냐? 아니면 땅을 파고 묻었느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삶 자체마저도 주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이라 고백합니다. 주님은 그런 은총과 신뢰와 기대와 기회를 주실 만큼 우리의 명예를 높여주시고, 자유를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주님의 은총(신뢰, 기대, 기회)을 보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멀리 떠나신 주님은 아직 돌아오시기 전입니다. 따라서 일할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달란트’를 통해 주님을 기억하고,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이 시간, 고요히 눈을 감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돌아봅니다. 달란트를 주신 은총의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힘입어 당신께서 기뻐하실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 히브 13:21

끝으로 우리를 신뢰하고 기대하시며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15:11-32).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종들은 다섯, 둘, 하나를 받았듯이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사람도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는 1달란트 받은 종은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원금’이라도 돌려주었습니다.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이 사람은 ‘원금’은커녕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이 사람도 무능하고 한심한 데가 있지만, 아버지는 더 무능해 보입니다.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가족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다 날려버렸지만, 자신을 ‘신뢰’한 아버지 생각에 ‘용기’를 냈습니다. 아버지를 향해 가지고 있던 ‘신뢰’가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마음에 등불처럼 타오르던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발걸음을 돌려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보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쪽으로 더 기울어졌습니다. 아버지를 무서운 분이라 ‘오해’하기보다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쪽으로 더 기울어졌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주인)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 있다면 오직 이 ‘한 가지 생각’을 붙들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주인)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실패하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그를 멀리서부터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자신이 선물 받은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아버지의 재산마저도 다 탕진해 버린 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루가 15:21) 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아들이 ‘신뢰’했던 것처럼 자비로웠고, 이해심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 루가 15:22-24

비록 실패했지만, 아버지를 향한 신뢰만은 놓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니 1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을 오해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느님만은 꼭 ‘신뢰’하십시오. 우리의 실패나 허물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이 훨씬 크십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재능을 선물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십시오. 두려움으로 물러서기보다 받은 달란트를 동원하여 세상의 변화를 시도하십시오. 설령, 그 시도가 실패할지라도 세상을 살맛 나는 곳으로 만들어 가려던 우리의 마음만은 주님께서 꼭 알아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성찬례는 삶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선물임을 되새기며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셈’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뢰와 기회를 활용하다 실패하는 일이 아무 일도 안 하다가 나중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자리를 잃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 누구도 숨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셈하실 때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대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부디 주님의 날에 복된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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