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8. 연중3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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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깨어있으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의 등불을 밝혀 들고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여호 24:1-3상, 14-18
  • 시편 – 시편 78:1-8
  • 독서 – 1데살 4:13-18
  • 복음서 – 마태 25:1-13

연중 32주일입니다. 전례독서는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영원에 이르는 우리’입니다.

저는 여름 무렵부터 오금공원에서 ‘맨발걷기’를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결심’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고 몸이 자연스럽게 시켰습니다. 잘 정돈된 산책로보다 좁다랗고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분주했던 마음마저 고요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대지의 피부와 발로 입맞춤하고 있으면 예언자 모세라도 된 것처럼, ‘거룩함의 감정’이 온몸으로 퍼져갑니다. 내딛는 한 걸음이 어느 때는 걷기명상이 되고, 어느 때는 묵주기도가 되고, 어느 때는 단지 ‘지금 여기’가 됩니다. 요사이 입맞춤을 시샘하는 낙엽들이 수북이 쌓이며 점점 길을 감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익숙한 발이 머리보다 먼저 길을 찾아냅니다.

어제는 맨발걷기를 마치고 성당으로 돌아와 사무실 앞에 쌓인 은행잎들을 한바탕 쓸었습니다. 바람이 스쳐 가면 노래하던 나무들은 비질한 공력도 몰라준 체 찬란했던 한해의 빛을 또다시 떨구어냅니다. ‘너는 도대체 언제쯤 마지막 잎새가 될래?’ 창밖을 내다보는 입에서 이런 푸념이 흘러나왔습니다. 올여름도 시원한 그늘을 선물한 공력이 있는데 미안한 마음에 얼른 말을 바꿉니다. ‘그래, 너도 올 한 해 수고 많았다.’

그러고 보니 교회력으로 한 해의 ‘끄트머리’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끝’이라는 말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아직은 2020년에게 작별을 고하기가 아쉽습니다. 그 ‘시작’에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시작이 있으니 끝도 있는 것이 세상사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얼굴에 세월의 계급장이 늘어갈수록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끝’은 결코 ‘끝’이 아니었으며 늘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말입니다. ‘시작’과 ‘끝’이라는 자식을 낳는 ‘어머니’는 ‘시간’이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결심’이었습니다. ‘결심’이야말로 ‘시작’의 ‘시작’이고, 그 ‘시작’을 언제든 ‘끝’으로 만드는 ‘끝’이며, 그 ‘끝’을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만드는 ‘어머니’였습니다. 여전히 그 ‘어머니’는 작별을 아쉬워하는 지금 여기 우리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시작과 끝의 어머니인 ‘결심’이 주제어로 그 바탕에 자리합니다. 지금 여기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결심’할 수 있다면 ‘끝’은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음을 교훈합니다. 더욱이 ‘끝’이 ‘시작’이 될 뿐 아니라 그 시작이 ‘영원’으로 잇닿는 ‘특별한 결심의 신비’를 들려줍니다.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독서 《여호수아》는 세겜에서의 ‘계약 갱신’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분배를 마친 영도자 여호수아도 어느덧 생의 ‘끝자락’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שְׁכֶם)에 소집합니다. ‘세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목할만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창세 12:6-7)과 ‘야곱’(창세 33:18-20; 34장, 35:1-5)이 직접 관련된 곳입니다. 처음 두 번(창세 12:6-7; 창세 33:18-20)은 ‘소명과 헌신(예배)의 장소’로 기억되고, 나머지 두 번(창세 34장, 35:1-5)은 ‘부끄러운 장소’(살해와 우상숭배)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더욱이 ‘세겜’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첫 단계를 마친 후 ‘모세의 법’ 사본을 생돌들에 새긴 곳이기도 합니다(여호 8:30-35).

‘여호수아’는 그 ‘역사적인 장소’에 비장한 각오로 섰습니다.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연설’을 할 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온 백성 앞에서 차례로 회고합니다(1-13절). 먼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계약’을 맺으신 일부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약속대로 많은 후손을 주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오늘 배정된 단락은 여기까지만 언급하고 이삭의 출생 이후부터 야곱 자손이 이집트로 내려간 일,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 가나안 땅 정복 및 정착 이야기는 생략했습니다.

그 역사 속 ‘구원 사건들’을 회고함으로써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던 민족들처럼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참고로 ‘히브리’(Hebrew, 히브리어로는 ‘이브리’, עִבְרִי)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용어인 ‘하비루’(Hapiru, 떠돌이, 오늘날로 말하면 이주노동자)와 같은 어원이며, ‘건너가다’의 뜻인 히브리어 동사 ‘아바르’(עָבַר)의 복수명사형이 ‘이브림’(עִבְרִים)입니다.

그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출애 3:18; 5:3)은 그 강 건너 저편에 살던 ‘아브라함’을 은총으로 불러내시어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셨습니다(창세 14:13). 그와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들을 ‘계약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더욱이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출애 7:16; 9:1, 13; 10:3)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억압당하는 그들(하비루)의 삶에 개입하시어 ‘해방’하시고(출애 20:2) 광야의 40년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종국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자유인’으로 살며,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구원의 역사’를 회고한 후 잠시 연설을 멈춥니다. 그런 다음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주님을 경외하고 섬길 것을 촉구합니다(14-15절). 이름하여 선택과 헌신, 즉 ‘계약 갱신으로의 초대’입니다. ‘역사의식’이 바로 선 민족이라면 그렇게 선택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대마다 ‘갱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계약 갱신으로 초대’하면서 “나와 내 집은 주님을 섬기겠소”라고 자신의 ‘일편단심’을 먼저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수아를 따라 ‘일편단심’으로 오직 주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16-18절).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의 ‘다짐’에 부정적으로 답변합니다(여호 24:19-20). 곰곰이 생각하여 ‘제대로 결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약속을 하라는 경고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말고, 깨뜨릴 약속은 아예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이(또는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오직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어째서 여호수아는 ‘계약 갱신으로 초대’해 놓고 그렇게 부정적으로 경고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는 ‘죄악의 요소’가 여전히 산재해 있는 ‘가나안 땅의 문화’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깨어 있지’ 않으면 악한 세상에 물들 것이고, 지금까지의 ‘구원 역사’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경고에 그들은 다시금 ‘다짐’하고, ‘투신’을 약속합니다(여호 24:21-24). 이렇게 백성들로부터 ‘거듭된 다짐’을 받은 후에 여호수아는 ‘계약’을 맺고 큰 돌을 가져다가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증거로 삼았습니다(여호 24:25-27). 비로소 역사의식에 입각한 ‘계약 갱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계약 갱신’ 이야기 후에 영도자 여호수아와 엘르아잘 제사장의 죽음으로 《여호수아》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들이 과연 ‘세겜’에서의 ‘계약 갱신’을 ‘일편단심’으로 지켰을까요? 가나안 정복에 동참한 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 백성들은 ‘양다리’를 거치지 않고 계약에 충실했다고 전합니다(여호 24:31).

1독서 《여호수아》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우리는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버려야 할 ‘우상’은 없습니까? 우리의 ‘역사의식’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분명 ‘세례의 강’을 건너 ‘어둠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태워’ 우리를 ‘죽음의 나라’에서 ‘생명의 나라’로 데려오셨습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증언한 역사 속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아직도 강 저편에 있지는 않습니까?

끝으로 이제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째서 ‘계약 갱신’을 주도하는 여호수아 이야기를 다른 <전례독서>의 배경으로 주목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일편단심’으로 계약 갱신을 주도한 ‘여호수아’가 한 일이 ‘새 계약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와 ‘예수’는 ‘구원’이라는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더욱이 ‘세겜’에서의 ‘계약 갱신’ 장면은 <복음서>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떤 장면입니까?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 후에 있었던 ‘생명의 빵’ 이야기 말입니다(요한 6장).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라는 가르침을 듣고 말씀이 어렵다면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치 여호수아처럼, 남아있는 제자들을 향해 비장한 태도로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 요한 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엄숙한 태도로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 요한 6:68

새 계약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 한 베드로의 이 고백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 앞에서 했던 다짐이 서로 통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 여호 24:16

이것이 지난 역사에서 그들이 배운 교훈이자 다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세례성사’를 통해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세례의 강’을 건너 빛의 나라, 생명의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성공회 전통에 따르면, 우리의 ‘세례 언약’은 1년 단위로 갱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 모르시겠다고요? <성공회 기도서> ‘부활밤예식’은 설교 후에 ‘세례 언약 갱신’ 순서를 갖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142-145페이지).

올해도 우리는 그때 ‘서약 갱신’을 했습니다. 그 서약대로 올 한 해 잘 걸어오셨습니까? 그 ‘서약’은 다른 사람이 대신 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했습니다. 그 ‘서약’을 책임지고 있습니까? 오늘은 ‘새 계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지금까지 걸어 온 ‘삶의 길’(공동체의 신앙 역사)에 대해서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78편>은 ‘아삽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지혜시’에 속합니다. ‘출애굽’(주전 1400년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윗왕의 통치 기간’(주전 971년경)에 이를 정도로 ‘역사를 회고’하는 시(詩) 중에서 가장 깁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역사의식’의 강조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죄악의 역사’가 또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역사는 하느님이 행하신 장한 일들에 대해 망각한 인간의 배반 때문에 반복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신실하신 도우심과 인간 배반의 역사를 기억하라’라는 교훈입니다. 한마디로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순종하라’라는 교훈이 주제입니다.

오늘 배정된 본문은 <78편>의 서론에 해당합니다(1-8절). 먼저 그는 현재 세대에게 과거로부터 교훈을 배워 미래로 나아가자고 초대합니다(1-4절). 역사는 단지 흘러간 일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교훈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절). ‘아삽’은 자신의 가르침과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사실, 귀를 기울여 잘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듣는 일에 실패합니다. ‘공감과 배움’을 목적으로 듣지 않고 판단하고, 평가하며, 충고하고, 조언하기 위해 듣기에 실패합니다. 공감과 배움을 목적으로 들을 때야 만이 ‘관계’는 변화됩니다.

아삽은 가르침을 위해 새로운 것을 내놓지 않습니다(3절).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 즉 그들 선조로부터 전해 들은 ‘하느님의 신실하신 구원 역사’를 전합니다(4절). 주님의 영예와 크신 능력과 이루신 위대한 일들을 전합니다. 그는 그 이야기야말로 후손들에게 전하고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遺產)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해주고자 합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자식들과 후손들에게 전해주길 원하십니까? 우리도 아삽처럼 자식들과 후손들이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신앙으로 잘 살아야 합니다. 사실, 부모보다 좋은 인생의 교사도, 신앙의 교사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찬송과 아버지의 기도보다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이어서 아삽은 오늘 1독서 《여호수아》 말씀처럼 ‘언약’을 언급합니다. 주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신 위대한 일들 중의 하나인 ‘율법’, 즉 ‘하느님의 말씀’ 주심을 언급합니다(5절; 참고 로마 3:2). ‘계약의 하느님’은 그 ‘말씀’(율법)을 후손 대대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6절).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을 기억하며, 분부하신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7절). 그 말씀이 ‘반복적’으로 가르쳐지지 않을 때 자식들과 후손들은 선조들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렇게 ‘계약’을 깬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우리도 자식들과 후손들이 ‘일편단심’으로 신앙 안에서 자라가도록 늘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역사를 가르쳐야 합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가 다짐한 것처럼, 오직 하느님께 삶의 ‘희망’을 두고,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 말씀과 구원 역사를 반복해서 들을 때 자식들과 후손들은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있는 영원한 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1데살 5:17; 묵시 19:7,9:).

끝으로 아삽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을 망각한 이스라엘 선조들의 죄악의 역사를 장황하게 묘사합니다(8절). 그들은 반항적이었고, 불순종했으며, 불충실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반항적이었고, 불순종했으며, 불충실했는지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시편 78:9-64). 하느님께서는 ‘일편단심’을 저버린 그들을 심판하셨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죄악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비와 은혜로 구원 역사를 면면히 이어 나가셨습니다(시편 78:65-72). 하느님이야말로 역사에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일편단심’인, ‘역사의식’이 투철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렇게 <78편>은 역사를 회고하며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바람직한 관계 속에서 살도록 교훈합니다. 한마디로 ‘죄악의 역사’가 또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 백성다운 역사의식’에 대한 강조입니다. 우리의 ‘역사의식’은 어떻습니까? 제가 배우기로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종교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일어난(종말에 일어날)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록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사건들’을 회고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주의 통치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강조한 여호수아처럼, 우리도 창조주 하느님을 ‘역사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정말 깨어 있는 ‘역사의 파수꾼’입니까?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웠고, 오늘을 어떻게 바꾸어가며,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줄 것입니까? 한주간 ‘역사’를 이야기하는 <전례독서>들을 묵상하면서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의미 있는 ‘죽음’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가오는 13일인 금요일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50주기’입니다. 그의 정신을 잇기 위한 ‘포럼’들이 금주간에 열립니다. 그는 복음 이야기의 ‘등잔’처럼, 자기 몸을 ‘정의’를 위해 불태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라며 자신을 한 알의 ‘밀알’처럼, ‘탐욕적인 역사’에 희생제물로 드린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 숭고한 죽음 이래 50년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의 노동환경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으로서(전태일의 묘비명은 ‘기독청년 전태일’이며, 그는 창현교회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의 죽음에 부끄럽지 않은 정의로운 세상, 약자들이 마음 놓고 숨 쉬며 사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역사로부터 배우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밀알이었던 전태일을 여전히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저를 포함하여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느님 나라’는 언제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까? 역사의식이 부재한 그리스도인은 가짜입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는 반드시 일어날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장례성찬례 ‘서신’ 독서로 주로 배정되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카 교우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주님의 재림이 곧 있을 것이고, 그때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자신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주님의 재림’은 점점 ‘지체’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 ‘죽어가는’ 교우들로 인해 마음에 ‘슬픔’이 차올랐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들이 자신들처럼 영광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로가 디모테오로부터 전해 들은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문제 상황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로는 그들을 향해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교훈합니다. 그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몸’(영체, 마땅한 말이 없습니다)으로 주님과 함께 있으며, 마지막 ‘부활의 몸’을 입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2고린 5:1-10). 다른 하나는 ‘주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주님으로부터 ‘부활’에 대한 계시를 직접 들었다고 밝히는 중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로에게 있어서 부활 신앙은 그가 전한 복음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의 부활도 확신했습니다.

특히 바울로는 ‘죽은 교우들’이 살아남아 있는 교우들보다 불리하지 않다고 위로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역사의 종말’에 재림하실 때 죽은 교우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이끌려 올라가서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로는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구름’은 성경에서 ‘주님의 거룩한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간다’라는 말씀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듯이, 우리 몸이 자연법칙을 초월할 정도로 전혀 ‘새로운 변화의 몸’(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인 누구도 불리하지 않습니다. 비록 삶의 자리를 달리한다 해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만나러 오시는 그 종말의 날, 모든 성도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처럼 우리는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도가 받을 상입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교회와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로 서로 위로하며 주님의 재림을 향한 오늘 나의 ‘기다림’은 어떤지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로도 서신을 썼을 때 바로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1데살 4:1,3). 우리도 ‘기다림의 점검’, 즉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준비하며) 오늘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성찰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찬례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 믿음과 희망의 참된 기초인 ‘신앙의 신비’를 선포하며 ‘기다림의 태도’를 올곧게 세우는 중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십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열 처녀가 기다리는 혼인식 비유’입니다. 《마태오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여러 측면들을 가르치시는 ‘5묶음의 설교’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설교묶음 후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표현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마태 7:28; 11:1; 13:53; 19:1; 26:1).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설교 묶음은 도래한 하늘나라에 요구되는 삶을 가르치시는 ‘산상수훈’입니다(5-7장). 두 번째 설교 묶음은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파견되는 사도들을 위한 ‘파견설교’입니다. 세 번째 설교 묶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시는 ‘7개의 하늘나라 비유’입니다(13장). 네 번째 설교 묶음은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예수공동체의 삶의 태도를 전하는 ‘교회생활’입니다(18장). 다섯 번째 설교 묶음은 ‘하늘나라의 완성을 깨어 기다리라’는 ‘종말에 대한 설교’입니다(24-25장).

본문은 다섯 번째 설교 묶음에 속합니다. 예수께서는 신부를 위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신부 들러리)에 하늘나라를 비유하십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귀환 준비’를 강조하는 비유들(마태 24:45-51; 25:14-30) 사이에 위치합니다. 다시 말해 ‘돌아올 주인의 부재’(不在) 동안 종들의 ‘올바른 행동’을 강조하는 비유 사이에 위치합니다. 종들의 ‘신실함’은 주인이 부재중일 때 하는 ‘충실한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역시 그런 맥락에 속하지만, ‘주인(신랑)의 귀환’이 예상보다 ‘지연될 수도 있다’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비유의 전체 배경은 ‘혼인 잔치’입니다. 세상에서 ‘혼인 잔치’처럼 모두에게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새 삶을 시작하는 최고의 순간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신랑(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신부(아내)로 자주 묘사합니다(이사 54:4-8, 62:4-5; 예레 2:2; 호세 1-3장). 특히 ‘혼인 잔치’는 이스라엘의 모든 희망을 실현하는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운 통치의 때, 즉 새로운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합니다(이사 61:10-11; 62:1-5; 호세 2:16). 사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처음 오심으로 그 구원의 때를 알리는 ‘혼인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마태 9:14-15). 그렇게 시작된 ‘혼인 잔치’는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묵시 19:7,9; 21:3-4).

그렇지만 이 비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화 같은 아름다운 결말이 아닙니다. 신랑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너무나 가혹한 외면으로 끝납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리인 ‘혼인 잔치’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이 권장하는 ‘나눔’이나 ‘자비’라는 가치들과도 상충합니다. 비유의 세부 사항들도 일반적인 ‘혼인 잔치’와는 다릅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무화과 익는 향기가 퍼져가는 어느 마을에 오랜만에 ‘혼인 잔치’가 열렸습니다. 약혼식이 있은 지 1년여 만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출발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혼인 잔치’는 1주일가량 계속되었고, ‘혼인식’은 신랑이 도착하면 치러졌습니다. 정확한 도착 시간은 관습적으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신부(또는 신랑을 포함하여)가 긴장감과 기대감을 품도록 ‘의도적’으로 도착을 ‘지연’하는 일이 전통이었습니다.

이렇게 ‘혼인식’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있었습니다. 대개는 밤중에 치러졌기에 멀리서부터 신랑 행렬이 오는 등불이 보였습니다. 초대된 ‘신부 들러리들’도 이 순간을 기다렸다가 ‘등불’(횃불)을 들고 마을 밖으로 나가 ‘신랑 행렬이 오는 길’을 밝혀야 했습니다. 신부는 도우미들에 둘러싸여 성대한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친구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열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부의 들러리들로 친구들 사이입니다. ‘열 명’이 신부 들러리 행렬로 초대된 규모로 보아 평범한 가정의 혼인 잔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그들을 나눈 기준은 단 하나,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그들도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고 ‘신랑의 지체’까지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은 ‘예복’을 입지 않고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과 비슷합니다(마태 22:1-14).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그릇’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그릇에는 여분의 ‘기름’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만큼 적극적이었고 혹시라도 지체될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까지 ‘충분히’ 한 셈입니다. ‘앞일’을 내다 볼만큼 ‘사려 깊었다’라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열 처녀 모두가 끝까지 혼인 잔치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적어도 신랑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깔깔거리며 놀던 그들은 낮 동안 혼인 잔치를 돕는 일로 피곤했기에 모두 졸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자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밤중’은 예기치 않은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 마태 25:6

갑자기 집안이 활기를 띱니다. 잔치집은 ‘어둠’을 밝혀야 했습니다. 졸다 잠든 열 처녀도 황급히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등잔’을 밝히며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의 ‘등불’이 ‘꺼져가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릇’에 ‘기름’을 담아 가지고 온 친구들에게 나누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함께 나누기에는 ‘기름’이 모자란다며 ‘거절’합니다. “가게에 가서 사다 쓰라”라고 조언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올리브나무의 열매를 따서 기름을 3차례 이상 짜냈습니다. 가벼운 돌을 올려 ‘처음으로 짠 가장 품질이 좋은 기름’[흔히 엑스트라 버진(Extra Virgin)이라고 하지요]은 ‘성전’에 바쳐 ‘금촛대’를 밝히거나 ‘왕과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했습니다. 좀 더 무거운 돌을 눌러 두 번째로 짠 기름은 ‘식용’으로, 세 번째로 더 꽉 눌러 짠 기름은 ‘가정용 등잔’을 밝히거나 ‘화장품’과 ‘의약품’으로 사용했습니다. 찌꺼기는 가축의 사료나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마침내 ‘신랑 행렬이 당도’했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 즉 ‘신랑이 자신들의 예측과 달리 더 늦게 올지도 모른다며 기름까지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잠겼습니다. 그 뒤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간청하였으나 신랑은 그들을 외면합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그들’, 즉 ‘신랑이 자신들의 예측보다 더 늦을지 모르는데도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식’에 들어오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고, 한번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지연될지도 모르는 신랑의 도래를 준비하는 일에 실패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도대체 서로 나눌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이 문제의 ‘기름’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해석을 참고할 것인지 신중해야 합니다. 신약성서 학자 중에는 이 비유를 ‘우화’(allegory, 사전적으로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의해서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 쉽게 말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와 유사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하는 소통의 기술입니다)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랑’은 ‘예수님’이며, ‘교회’는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기다리는 ‘처녀들’이라 해석합니다. 또 신랑의 ‘지체’는 ‘재림의 지연’이며, ‘신랑의 당도’는 ‘갑작스런 재림의 도래’(到來)라 해석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에 대한 신랑의 ‘냉혹한 거부’는 ‘마지막 심판’이라 해석합니다. ‘등불’이나 ‘기름’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등불’은 재림에 대한 ‘믿음’이나 ‘희망’으로, ‘기름’은 ‘선행’이나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 신약성서 학자 중에는 이 비유가 예수께서 평소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일반적인 다른 혼인 잔치 비유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령, 친구 사이인데도 ‘나누기’를 냉정하게 부정하는 인상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일반비유’가 아니라 ‘특례비유’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평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특례비유’라 주장하는 이들은 이 비유에도 그 선포가 담겨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느님이 친히 다스릴 때가 임박했으니 회개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경우 신랑은 ‘하느님’을(이사 62:5),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를 표상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또 비유 이야기의 ‘결론’을 《마태오복음》 저자가 추가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비유의 세부 사항을 검토하면 무리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친구 혼인식에 ‘등불’만 준비하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이 다섯 명에 이른다는 사실. 열 처녀 모두 잠들었다는 사실. 친구 사이인데도 ‘기름’ 나누어주기를 매몰차게 거절했다는 사실. 신부와 친한 사이인 것이 분명한데도 미련한 처녀들이 좀 늦게 왔다고 신랑이 문을 잠그고 입장시키지 않았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의 이런 논쟁과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과 의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복음 이야기에 담긴 중요한 교훈과 의미는 ‘기다림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오복음》은 서기 80-90년 사이에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50년이 지나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의 차별과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던 당시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어서 속히 재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림은 ‘지연’되고, 그 시간 간격은 점점 더 길어지고 지체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일부 신자들은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신약성서 학자들은 《마태오복음》 저자가 ‘재림의 희망’, 즉 ‘재림의 믿음’(등불)을 잃어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 ‘종말’이 올 것이고, 그것도 ‘갑작스럽게’ 올 것이라는 ‘경각심’(警覺心)을 일깨우기 위해 이 비유를 기록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바라는 것처럼 재림이 ‘곧 올 필요는 없다’라는 점도(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았다) 마태오는 담아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경우 ‘신랑’ 이미지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등불’은 ‘재림의 희망’이나 ‘믿음’을, 신랑이 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신랑이 늦도록 오지 않아 처녀들이 모두 ‘졸다 잠이 들었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신자들의 기다림이 해이해졌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1세기 교회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은유로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곤 했습니다(2고린 11:2; 묵시 19:7, 21:2,9). 본문에서는 신부 대신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특례비유처럼 본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를 발설하셨는데, 교회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비유로 ‘재이해’한 셈입니다. 그뿐 아니라 아주 흥미로운 점이 비유에서 발견됩니다. 결론이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경고 형식으로 끝나지만, 놀랍게도 이 비유에서는 ‘졸음’이나 ‘잠’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열 처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을 만큼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비유의 요점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될 수 있음을 인정하도록 교회를 가르칩니다. 심지어 자신의 예측을 뛰어넘는 그 지연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역사에 종말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어떤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기다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교회를 가르칩니다. 누구도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릅니다. 더욱이 재림의 때는 지체될 수도 있지만 해이해지지 말고 항상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당연히 잘 ‘준비’하는 일은 ‘기름’을 충분히 마련하는 삶이고, 그렇지 않은 일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삶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도대체 서로 나눌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그 문제의 ‘기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밑그림부터 그리겠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다림’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실제로 지난 2,000년의 세월이 말해 주듯이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대가’(大家)가 되어야 합니다. 대하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마지막 대단원(최종결정)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며’ 나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용기를 내서 역사의 종말에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날마다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비유가 ‘기다림’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점을 깨우쳐줍니다. 우리 중 누구도 ‘주님의 재림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지금 당장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항상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말씀하시기 위해 새로운 은유들(metaphors)을 만들어내시기보다 ‘농사일’로 하늘나라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시곤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 때든 원한다면, 발달한 건축기술 덕택에 날씨나 계절에 상관없이 집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과를 따는 일이나 벼를 수확하는 일은 단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농사일에서는 기경(起耕)해야 할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지만, 반드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다리는 일’에 익숙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렵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구하기 쉽고, 즉각적으로 식욕에 만족을 주는 ‘즉석식품들’과 함께 성장해 왔습니다. 보통 음식의 소비단계는 장보기, 운반, 전처리 및 준비, 조리단계(가열, 간 맞추기, 물리적 변형), 식사단계(그릇에 담기), 뒤처리(설거지 및 쓰레기 처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즉석식품은 이 단계들을 최대한 줄여 음식 소비의 편리성을 제공하려는 목적입니다. 이런 즉석식품들과 함께 성장하다 보니 젊은 세대들은 기다리는 일이 어렵습니다.

물론, 꼭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구라도 어떤 일의 결과나 확답을 빨리 받으려 하지 결코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 지도’(규칙)는 ‘기다림’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도하고, 바라며, 또 기다려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나리라.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 – 이사 40:31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기다림’의 명수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너진 탄광의 갱도나 건물더미 속에 갇혀 있다가 생존해 돌아오는 이들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기자들의 인터뷰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견딜 수 있었습니까?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습니까? 왜 낙심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미래에 대해 희망적일 수 있었습니까?

어쩌면 인터뷰 주인공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중요한 암시를 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기다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기다림’ 말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내가 사 온 김밥을 친구와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같은 팀원끼리 역할을 ‘분배’하여 맡은 사업을 완성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웃에게 ‘빌려주거나 빌려서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집들이하는 이웃집에 그릇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집에 없는 연장을 옆집에서 ‘빌려다’ 가구 수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세상에는 ‘나를 위해’, ‘너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식당에 늦게 도착하는 나를 위해 친구가 음식을 ‘대신’ 주문해 줄 수 있습니다. 피곤한 친구를 위해 내가 운전을 ‘대신’해 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세상에는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이웃에게 ‘빌려주거나 빌려올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어떤 일들이 있는지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을 찾아내는 일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에 필수입니다. 내면으로부터 ‘정말 그렇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 관계는 좀 더 새로운 차원을 맞이할 것입니다.

꼭 영성가가 아니더라도 연륜이 깊으신 분들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이 이런 일들의 ‘식별’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누구도, 심지어 가족이라도 ‘나눌 수 없는 일’, ‘빌려주거나 빌려올 수 없는 일’, ‘대신해 줄 수 없는 일’, 오롯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들부터 ‘식별’하면 갈등이나 다툼들도 많이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귀해도 부모가 ‘대신’ 공부해 줄 수 없고 시험을 쳐 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는, 신앙에는, 남이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는 일들,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에게조차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일들,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스스로 돌봐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에는 우리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것을 ‘기름’이라는 상징에 담아냈습니다. 결코 나눌 수 없는 일, 남이 나를 위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 내가 준비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좀 나누어다오”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나눌 수 없는 무엇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친구의 ‘성격’이나 ‘성실성’은 나눠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지혜’나 ‘사심 없는 봉사’는 빌릴 수 없습니다. 그가 쌓아온 ‘기술’이나 ‘착한 행실’은 나눠 받을 수 없습니다. 그의 ‘유모어’나 ‘재치’는 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를 우리는 나눠 받을 수도, 빌려올 수도 없습니다. ‘기름’은 이런 것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수렁에 빠집니다. 만일 여러분도 슬기로운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과 ‘기름 나누기를 거부했다’라는 사실에만 집중한다면 수렁에 빠질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의 ‘거절’은 ‘나눔’이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좀 황당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은 나누기를 권하는 분이십니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마라. – 마태 5:40-42

그러나 웬일인지 이 비유에서 ‘신랑’(나중에 주님이라 불림)은 ‘기름 나누기’를 거절한 처녀들에게 오히려 ‘혼인식 참석’이라는 ‘상’(償)을 줍니다. 반면에 ‘기름’ 준비가 안 된 처녀들은 외면당합니다. 그들이 그 늦은 시간에 가게에서 ‘기름’을 사 왔을 리는 없습니다. 어째서 기름 나누기를 거절한 그 이기적으로 보이는 처녀들이 상’(償)을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이 비유임을 기억해야 하며, 비유 안에는 무리한 요소들이 많습니다. 진짜 중요한 교훈을 찾기 위해서는 비유 안에 있는 무리한 요소들과 모순점들을 넘어서 더 깊은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면 인생에는, 신앙생활에는, 분명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없는, 다른 이들에게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다른 이들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기름’은 그것을 찾아내라는 상징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픈 우리를 돌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원의 일부를 우리와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격려하고 지원과 영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선택’을 결코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느님께 결코 ‘대신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영적 열매를 거두기 위해 스스로 마음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기름’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빌릴 수 없습니다. 오직 본인 자신만이 그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쌓아 올린 ‘영적 수행’이나 ‘영적 자산’, 즉 ‘깨달음’이나 ‘거룩함’에 의존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분명 인생에는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없는,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는, 자기 스스로 획득하고 쌓아 올려야만 하는, 자기만의 ‘영적 자산’(믿음, 깨달음, 거룩함, 착한 행실)이 있는 법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만의 책임’이 분명 있는 법입니다. 지금 이것을 깨닫고 여기서부터 그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중에는 늦습니다.

‘인품’(덕성)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애 전체’에 걸친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인품’을 길러갑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우리는 편협하고, 부정적이며, 비열한 ‘결정’(선택, 다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관대하고, 친절하며, 용기 있는 ‘결정’(선택, 다짐)을 이어 나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는 ‘하루하루’ 자신의 ‘인품’(성품, 덕성)과 ‘영적 자산’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구축’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대신’ 영접해 줄 수 없는 법입니다. 비신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은 예수를 믿지 않지만, 신앙생활 하는 아내나, 남편, 또는 할머니의 신앙의 힘 덕택에 자신이 나중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신자 중에도 자신은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성직자라서, 교회 원로라서, 혹은 위대한 사역자라서 자신에게도 그 같은 신앙의 은총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성직자라고 해서 저절로 성직자의 믿음이나 사명을 갖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공동체’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인격적’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나부터 신앙 안에서 바르게 살고, 그 영향력이 자녀들에게 발휘되어야 합니다. 세례도 그렇습니다. 세례 고백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어야 세례를 받습니다.

유아 세례는 예외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유아 때는 ‘대부모’가 대신 신앙을 고백해 주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면, ‘스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공동체 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성체 교육이거나 아니면 견진 교육에 해당합니다. 아무튼 누구도 ‘나의 고백’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영적 성장’을 ‘책임’집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단’이며 ‘책임’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녀나 친구, 교우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또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 모두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영적 성장’이란 ‘믹스 커피’ 타 먹듯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커피를 타기 위해 ‘물주전자’에 물을 채워 넣듯이 ‘영적 성장’이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채우고 있는 오래된 자아를 내버리고,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영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만일, ‘영적 성장’이 그렇게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라면, 사목은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가 아무리 신자들을 사랑하더라도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끔은 사목 생활 중 사제가 ‘회의감’이 드는 이유는 아무리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서 선포해 보아도 그저 제자리걸음만 계속하는 것처럼 보여질 때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제의 기도나 설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영적 성장은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신앙생활이 오래지 않은데도, 몇 년 안에 성실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 하는 교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사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채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봐온 사제는 그처럼 빨리 성장하고 변화한 모습이 익숙지 않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영적 삶에서의 ‘변화’는 ‘내면에서부터’ 일어나야만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변화나 성장을 결심할지라도, 그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이지 살과 피를 가진 역사 속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름길’이란 없습니다. 항상 ‘영적 성장’은 ‘자기비움’, ‘자기부인’ 같은 ‘날마다의 수행’을 요구합니다.

분명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킬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삶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실제로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웃을 향한 ‘봉사’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우리가 자신의 이기심 너머를 성찰할 수 있을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먹는다고 내 배가 부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이 배부르도록 대신 먹어 줄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영적으로 성장해 줄 수 없습니다. ‘영적 성장’은 오로지 ‘자기 수행을 통해 자신이 감당할 책임’입니다. 삶의 공부와 수행은 오로지 자신의 세포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기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 점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직접적’입니다. 어떤 처녀들은 슬기로웠고 어떤 처녀들은 미련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미련한 사람입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기름’처럼 인생에는, 신앙생활에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일,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오롯이 ‘내 책임’인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내 개인사 속에서 ‘하루하루’ 쌓아져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결정합니다. 미래에 가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결정되고 있습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는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섬길 것을 ‘다짐’(결심)했던 우리의 세례 언약에 대해서 성찰했습니다. 《시편 78편》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백성다운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함을 들었습니다. 자식들과 후손들이 ‘일편단심’으로 신앙 안에서 자라가도록 늘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역사를 가르쳐야 함을 성찰했습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을 들었습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교회와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위로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 나의 ‘기다림’을 점검했습니다.

복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임을 성찰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성찬례에서 우리 자신의 ‘기다림’을 점검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이나 시간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날과 그 시간을 아십니다(마태 24:36). 더욱이 주님의 재림은,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경우’처럼,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연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히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4:44). 주님이 오시면 고대하던 영원한 혼인 잔치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천년이 흐르는 동안 제자인 우리는 스승의 부재에 익숙해졌습니다. 그 익숙한 부재 속에서 어떤 이들은 기다림을 그만두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이신 주님은 제자인 우리가 ‘일편단심으로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기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안에 밝혀 주신 그 ‘믿음의 등불’(빛)을 잘 돌보기를 기대하십니다(마태 5:14).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행동할 것을 오늘 다시 ‘결심’합니다. 그 결심은 우리를 새로운 시작으로 인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시어 완성하실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간직한 사람만이 어두운 세상, 죄악 세상에 물들지 않고 신실하게 준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백성다운 역사의식을 간직하고 여호수아처럼, 전태일처럼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입니다. 우리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영적 수행’을 통해 ‘날마다’ 꾸준히 성장하면서 오실 주님을 충실히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추구해가도록 초대하신 정의와 평화와 생명으로 대변되는 그 팔복의 삶(마태 5:3-12), 그 ‘애덕행’(자비행, 착한 행실, 거룩함)을 오늘도 ‘성실히 수행’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마태 7:21, 24).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나부터 그렇게 살고 우리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손을 잡고 도와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어 완성하실 하느님 나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그 ‘영원한 시작의 날’을 기다리며,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고 성찬례에 왔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신비를 선포하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계약의 주인공임을 확인합니다. 비록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주님은 반드시 오시어 당신의 약속이 진실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영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야말로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영원에 이를 것입니다. 역사의 끝은 영원의 시작입니다. 그날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아멘.
<성가 45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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