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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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거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묵시 7:9-17
  • 시편 – 시편 34:1-10,22
  • 독서 – 1요한 3:1-3
  • 복음서 – 마태 5:1-12

‘모든 성인의 날’입니다. 영어로는 ‘All Saints’ Day’라고 합니다. ‘성탄일’, ‘공현일’, ‘부활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주일’, ‘삼위일체주일’과 함께 ‘대축일’(大祝日)에 속합니다. 우선 용어부터 정의하고 시작합니다. 영어 단어 ‘Saint’가 우리말로는 ‘성인’(聖人), ‘성도’(聖徒), ‘성자’(聖者)로 옮겨집니다. 공통적으로 ‘거룩하다’(聖)는 글자가 ‘사람’(무리)을 뜻하는 글자 앞에 붙습니다.

종교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때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자기 밖으로부터 엄습해 오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 즉 ‘벅찬 놀람’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적 경외감’에 붙잡힌 상태입니다. 이것이 ‘거룩’이라는 개념이 담고자 한 근본적인(핵심적인) 상태입니다. 인간은 그런 순간을 ‘자연’을 통해 경험할 수도 있고, ‘사람’을 통해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빛’의 아름다움을 몸이 감각 할 때 우리는 그런 상태에 붙잡힙니다. 사회적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사람의 눈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런 상태에 들어섭니다. 세상 풍조에 물든 ‘속’(俗)된 자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숭고한 사람 앞에 설 때 우리는 그런 상태에 빠져듭니다. 특히 사람에게서 그런 순간을 경험할 때 우리는 ‘공경심’을 표하게 됩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의 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라는 느낌이 엄습해 올 때 우리는 ‘거룩함’에 사로잡힙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거룩’(히브리어로 코데쉬, קֹדֶשׁ)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다르다’, ‘구별하다’, ‘떨어져 있다’, ‘거룩하다’라는 뜻의 ‘카도쉬’(קָדוֹשׁ)에서 유래합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은 피조물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하느님께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창조주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또 ‘거룩하신 하느님’께 바치려는 목적으로 ‘구별’하고, ‘분리’해 놓은 사물(성전의 물건을 성물이라 합니다)이나 사람(제사장)에게 ‘거룩’을 적용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거룩한’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하기오스’(ἅγιος)입니다. ‘하기오스’(ἅγιος)는 ‘거룩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를 옮긴 말입니다. 그리스어에서는 형용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면 명사가 되기에 ‘하기오스’(ἅγιος)는 그 자체로 ‘거룩한 사람’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인’(聖人), ‘성도’(聖徒), ‘성자’(聖者)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 ‘깨끗하게 구별된 사람’, ‘봉헌된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번역하듯 전부 ‘하느님과 연결된 사람’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성인’(聖人)이라는 호칭도 친숙하지만, 개신교인들에게는 <성경>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성인’(聖人)보다는 ‘성도’(聖徒)라는 말이 더 익숙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전례 전통이 강한 교회에서는 ‘성인’(聖人)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개신교회들은 ‘성도’(聖徒)라는 말을 더 많이 쓰며, 세상 사람들은 ‘성도’(聖徒)라는 말은 아예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히 ‘성도’(聖徒)는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어 형제와 자매가 된 무리를 ‘집합적’으로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많이 쓰입니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나 ‘성인’(聖人)이라는 말보다 ‘성도’(聖徒)라는 호칭이 훨씬 많이 나옵니다. 검색해보니 <공동번역 신약성경>에는 ‘하기오스’(ἅγιος)라는 단어를 ‘성인’(聖人)으로 번역한 곳은 《마태오복음》에만(마태 27:52) 1회이며, ‘성도’(聖徒)라고 번역한 곳은 68회에 이릅니다. 특히 ‘성도’(聖徒)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한 사람은 ‘사도 바울로’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뿐만 아니라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십니다. – 1고린 1:2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 에페 2:19

이렇게 ‘성도’(聖徒)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신자를 집합적으로 부르는 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도’(聖徒)에 속할까요? 서두에 말씀드린 ‘거룩’의 개념을 떠올린다면 주저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어떤 벅찬 감동을 줄 정도로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은 자신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감정과 상관없이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사랑 덕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총으로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선언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자 ‘성도’이며, ‘하느님 나라 시민’이자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선언처럼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한마디로 우리는 오늘 2독서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라”(그리스도를 닮도록, 1요한 3:2)고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교회’(성도)입니다.

특히 오늘은 이 집합적 의미의 ‘성도’(성인들)라는 말 앞에 ‘모든’(πᾶς, all)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전(全) 성인들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모든’이라는 수식어를 ‘성인’(정확히는 성도)이라는 말 앞에 붙였을까요? ‘어떤 성인들’(성도) 전부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런 이야기와 함께 이날을 기념하는 ‘목적과 의미’를 되새기려고 합니다. 먼저 이날의 ‘목적과 의미’부터 되새기겠습니다.

<성공회 기도서>는 ‘모든 성인의 날’을 지키는 ‘목적과 의미’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기도’와 ‘감사서문 특송’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성인들의 믿음과 헌신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앞서간 모든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아 주님의 진리를 이 세상에 증언하고, 마지막 날에 성인들과 더불어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성인들의 변함없는 신앙과 거룩한 업적을 본받게 하시고, 그들을 거울삼아 확고한 소망으로 그들의 유업을 이어서 마침내 그들이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도 받게 하시나이다.

우리는 성찬례 속에서 이 기도문을 바치며 오늘이 ‘천상의 성인들’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를 포함하는 대축일임을 확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겸손히 성찰하는 날입니다. ‘니케아신경’으로 고백하듯이 오늘의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옴”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신앙’과 ‘선교 정신’과 ‘비젼’(꿈)을 이어받은 ‘수많은 성인들’(성도), 즉 ‘천상에 있는 승리한 교회’의 믿음과 헌신 위에 오늘의 지상 교회가 서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천상에 있는 성인들’(성도)과 지금 여기의 우리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느님 안에서 ‘공통의 영적 유산’으로 굳건히 ‘결합’해 있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그 ‘공통의 영적 유산’이란 사도들이 전한 ‘신앙’과 ‘선교 정신’과 ‘비젼’(꿈)입니다. 좀 더 풀면, 하느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믿음’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재림의 희망’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사도들이 전한 그 ‘신앙’과 ‘선교 정신’과 ‘비젼’(꿈)을 이어받아 헌신한 ‘성인들’(성도)의 신앙과 거룩한 업적을 본받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인의 날’을 지키는 ‘목적’입니다. 우리도 천상에 있는 성인들의 유업을 몸으로 잘 이어갈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천상에 있는 ‘성인들’(성도)이 보이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본받아 세상에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 다짐대로 헌신하는 우리도 천상의 성인들처럼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역시 ‘한 사람의 성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인의 날’에 담긴 ‘의미’입니다.

더욱이 ‘천상의 성인들’(성도)과 지금 여기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적’을 위해 ‘서로 손을 맞잡은 한 가족, 한 팀’임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시는 성전의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성인들’(성도)은 그 기초 위에 쌓아 올려진 ‘벽돌’(산돌)이고, 우리는 그 ‘성인들’(성도) 위에 쌓아 올려진 또 한 장의 벽돌(산돌)이라고 교훈합니다(에페 2:20-22; 1베드 2:5). 그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건축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날이 오늘입니다. 이처럼 오늘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드높이는 거룩한 대축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기념하는 ‘성인들’(성도)과 교회력에 축일이 정해져 있는 ‘성인들’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선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성인’(聖人)으로 기념되는 분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서두에 용어 정의를 하면서 ‘성인’(聖人)이라는 말에 담긴 ‘종교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의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을 받게 하고, 우리 마음에서 놀람과 감동이라는 ‘신비적 경외감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성인’(성도)으로 부르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 역시 ‘성인’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분명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은총이자 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겸손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몸으로 응답한 사람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다 그만 그리스도를 닮아간 분들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자기 삶의 원동력이자 목적이었던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처럼 세상 사람이 추구하며 걸어가는 ‘넓은 길’을 걸어간 이들이 아닙니다. ‘성인들’은 ‘영원하지도 못할 복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진정한 행복’, ‘영원한 행복’에 모든 것을 걸고 그 ‘좁은 길’을 걸어간 분들입니다. 마침내 ‘영원한 행복’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간 분들입니다. 흔히 ‘신앙의 덕행’(성덕이라고 하는데, 우리 마음에 놀람과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이 뛰어난 분들입니다. 살아생전 보이신 삶의 모습이 후대 신자에게 모범이 된다고 공경받는 분들입니다. <히브리서>와 <야고보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은 분들입니다(히브 11:2; 야고 2:17-26).

예를 들면, 우리 주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와 양부이신 요셉, 베드로와 바울로를 비롯한 모든 사도들, 세례자 요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타,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안토니오와 니콜라, 세실리아와 헬레나, 모니카와 어거스틴,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클라라, 아빌라의 데레사와 루시아 같은 분들이 ‘성인’이란 칭호로 불리고 공경을 받습니다. 참고로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 교회 전통에서 공경해 온 ‘성인들’을 기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근현대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큰 공헌을 한 분들(마틴 루터 킹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성인으로까지는 아니라도 기념합니다.

<성공회 기도서>의 ‘월별 축일’이나 교회에서 나누어드린 ‘달력’을 보시면, 성인들의 이름이 해당 날짜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이분들의 ‘천국 생일’, 즉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날을 ‘축일’로 삼습니다. 축일 당일에 이분들을 기념함으로써 공경을 표현합니다. 우리도 이분들을 본받아 우리 앞에 놓인 삶의 길을 잘 달려갈 수 있는 은총 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울러 이분들과 같은 ‘신명’(세례명)을 가진 교우들에게 ‘축일’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줄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더라도 ‘교회사’에는 교회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겪거나 순교한 ‘익명의 신자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사실, 초대교회는 환난과 핍박 중에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신앙을 지키다 스러져 간 ‘신자들’(성도들)이 지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록 그분들의 이름이 역사 기록에 없어서 ‘교회 전통’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만은 당신 품에 찬란히 빛나는 ‘그 이름들과 거룩함’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눈이 열리기 전까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가장 위대한 거룩함도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자신의 거룩함을 알아봐 달라고 발뒤꿈치를 치켜올리는 성인이란 없습니다. 언제나 진정한 거룩은 하느님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만은 알고’ 계시는 그분들의 거룩한 삶을 오늘의 우리가 기념하는 일은 ‘공통의 영적 유산’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책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경전’으로 매일 대하는 ‘성경의 인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율법의 심부름꾼 모세와 사제 아론, 미리암과 여호수아, 드보라와 기드온, 한나를 어머니로 둔 사무엘, 민족을 구한 에스델, 이사야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의 삶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들 ‘구약의 인물들’만이 아니라 ‘신약의 인물들’은 또 어떻습니까? 특히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준비한 ‘여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 주님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뜻깊은 행동이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4:9). 또 바울로와 함께 유럽 대륙 최초의 교회인 ‘필립비교회’를 세운 ‘리디아’의 수고를 떠올려 보십시오. 누가 성경 속 이분들의 삶이 잊혀도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교회사에는 축일 날짜가 교회력에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에게 삶의 모범이 되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과 하느님께서만은 이름을 기억하시는 익명의 ‘성인들’도 많이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아시는 익명의 성인들과 성경의 인물들을 빠짐없이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날을 정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날입니다.

이제 그간 교회력에 자신의 축일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서 섭섭했던 분들은 오늘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성탄일’, ‘공현일’, ‘부활주일’, ‘승천일’, ‘성령강림주일’, ‘삼위일체주일’과 급을 같이하는 ‘대축일’(大祝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력에 ‘성인 축일’이 특정된 교우들도 대축일을 맞은 교우들과 함께 기뻐해 주시고 축하 인사를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은 하느님께서만은 그 이름들을 기억하고 계시는 ‘모든 성인의 날’이자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승리한 천상의 교회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는 모든 성인을 기억하는 대축일입니다. 또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의 기쁨을 표현하는 날입니다. 사제로부터 성인들의 이름을 ‘신명’(세례명)으로 받은 우리 역시 천상의 성인들처럼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함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도 천상의 승리한 교회에 있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날을 ‘희망’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이 진실을 증언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1독서 《요한묵시록》은 ‘승리한 천상의 교회’(하늘에 있는 의인들)를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서기 90-100년경에 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천국의 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지상의 교회’는 악한 세상과 전투 중입니다(참고 에페 6:12). 이것을 7장 전반부(1-8절)에서 들려줍니다.

그런 다음 요한은 ‘승리한 천상의 교회’ 모습을 보여줍니다(9-17절). ‘수많은 성인’의 무리가 하느님과 어린양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모든 민족에서 나온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중을 봅니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와 어린 양 앞에서 큰소리로 찬양합니다. ‘흰 두루마기’와 ‘종려나무’는 ‘거룩’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이 구절처럼, 우리 성찬례 감사송도 특송 후에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나이다.

원로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의 ‘선한 싸움’, 즉 ‘환난’을 통과하여(승리하여) ‘천상의 교회’에 들어간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기쁨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며 ‘영원한 평화’를 누립니다. 세상과 전투 중인 ‘지상의 교회’가 겪는 어떤 결핍이나 위협, 이별의 비애나 죽음도 없는 ‘영원한 지복’(至福)을 누리고 있습니다(에제 34:23; 이사 25:8). 저는 원로가 요한에게 알려주는 말씀을 묵상하다 말고 이렇게 바꾸어 읽어보았습니다.

저 사람들은 ‘대한성공회 송파교회’에서 온 사람들로서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 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 태양이나 어떤 뜨거운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요 …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승리한 천상의 교회’를 사모합니다. 지상의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악한 세상 문화와 악한 영들과 전투 중입니다(에페 6:12). 이런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저 높은 하늘을 향합니다. 삶이 고달플수록 우리는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 즉 ‘승리한 천상의 교회’를 더욱 바라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승리한 천상의 교회’처럼 우리도 승리에 참여할 날을 희망합니다.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에 따르면 ‘천상 교회의 성도들’과 ‘지상 교회의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에페 2:19; 1베드 2:9). 하늘에 있는 의인들과 지상에 있는 연약한 우리는 둘 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고, ‘하느님의 한 가족’이며,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같은 교회의 식구’이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신경은 ‘모든 성도의 상통’이라는 고백으로 담아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이 세상 ‘소풍’을 끝낼 날이 올 것입니다.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입니다. 문제는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세상살이가 ‘소풍’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으나 시인 같이 말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세상살이를 ‘전쟁터’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나그네 삶, 즉 영적인 전투를 마치고 ‘제대’(除隊)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환희와 평화만이 가득한 ‘승리한 천상 교회’로 옮겨갈 것입니다.

더욱이 ‘천상 교회의 성도들’은 악과 전투 중인 ‘지상의 교회’가 승리하도록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묵시 5:8). ‘교회 전승’(초대교회 교부들)도 이것을 가르쳐왔습니다. 그들과 우리는 ‘기도의 황금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느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욥기 42:8,10).

기도의 사람 사도 바울로조차도 교우들에게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1데살 5:25). 그를 따라 우리도 서로에게 늘 ‘기도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한 ‘연약한 우리의 기도’도 다른 이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있는 ‘성인들의 기도’가 어찌 연약한 우리를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승리한 천상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함께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성도의 상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승리한 천상 교회의 성도들’과 ‘기도의 황금사슬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즉 ‘모든 성도의 상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멤버십’은 결코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는다는 진실입니다. 이것의 근거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 마태 22:32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도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처럼 이 세상을 떠난 성인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다 살아있습니다. 생명의 영원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처럼, 《요한묵시록》은 그 성인들을 하느님 옥좌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까? 지금도 영적 전투 중인 지상의 형제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환난에서 승리하도록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모송 마지막도 “이제와 임종시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대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를 부탁할 수 있듯이 성인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우리 역시 그들처럼 승리한 천상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앞서간 성인들을 기억합시다. 그들과의 ‘기도의 상통’ 속에서 천상 교회를 향한 이 영적 순례를 잘 달려가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34>은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다윗의 노래입니다. 사울 왕의 살해위협으로 다윗은 블레셋(갓 나라)으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도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아둘람의 굴로 간신히 피신해 갑니다(사무상 21:11-22:1). 그 동굴로 피신해 갔을 때 지어진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고난이 연속되는 피난살이 중이었고 수치와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다윗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경외하는 사람으로 더욱 우뚝 섰습니다. 오늘은 자세한 본문 분석은 하지 않고 ‘모든 성인의 날’에 맞추어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이 노래가 지어진 주요 목적은 하느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미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특별하신 보살핌과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34편>은 1독서 《요한묵시록》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이 본 승리한 천상 교회의 찬양과 어울립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느님의 구속하심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노래 중 하나입니다.

야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 시편 34:22

2독서 《요한일서》는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합니다. 먼저 요한은 우리가 누구인지 격려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장차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처럼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뵈올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종말에 우리에게 성취될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간 ‘모든 성인들’처럼 자신의 삶을 순결하게 지켜나갑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그 유명한 산상수훈의 서두입니다. ‘팔복’으로 일컬어지는 참된 행복선언과 하늘에서 받을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교회가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의 신앙 덕행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행복선언문은 세속에 물든 우리들의 생각을 여지없이 뒤집어버립니다. 행복선언문에 나열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한 우리 시대의 통념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슬프고,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받고, 모욕을 당하는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온유하며, 평화를 위하여 사는 삶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딱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복을 보고 살아가지 않고 하느님을 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복을 기대하지 않고 하느님을 기대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느님을 기준’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복선언문을 ‘하느님과 연결’하지 않고 읽으면 다 잘못된 해석이 되고 맙니다.

모든 성인들의 후예인 여러분,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얻게 될 영원한 나라에 비추어 보면 ‘찰라’에 불과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지금의 고난이나 역경도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1백만 원을 투자해서 100억을 벌 수 있다면, 그 1백만 원을 아까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은 어찌 보면 그 ‘영원한 생명’을 위해 ‘순간의 수명’을 투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이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며 신앙 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 즉 그 시대의 행복에 대한 ‘통념’을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물러서지 않고 심지어 죽음마저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음을 믿고 사랑 속에서 나아간 이들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어두운 세상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순결하게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삶의 모습이 역사 속에서 미움과 증오라는 인간의 질서를 뛰어넘어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발생시켜 왔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세상 사람들은 놀람과 감동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상의 성인들은 지상에 있을 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사랑, 용서, 자비를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그 실천 속에서 그들이 흘린 눈물과 겪었던 고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그 삶은 어두운 시대의 질서와 통념을 넘어선 빛의 모습이었고, 새로운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역사 안에 실천하며 살아냈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행복선언 대로 살았던 영적인 힘은 성령을 통해서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단계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나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가슴에 담고 실행할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시작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를 살게 하시는 진정한 힘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입니다. 천상에 있는 승리한 교회와 지상에서 악과 전투 중인 교회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임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사도들’과 ‘수많은 성인들’(성도)의 믿음과 헌신 위에 오늘의 교회가 서 있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도 ‘사도들’과 ‘성인들’(성도)의 신앙과 거룩한 업적을 본받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영원한 잔치에 참여하여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천상의 성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성인’(聖人)이 되도록 부르심 받았고, ‘영원한 행복’으로 초대받았음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우리는 분명, 거룩한 어머니 아버지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학생, 연구원, 자영업자, 보험설계사, 은행원, 방문판매원, 상담원, 운전자, 농부, 간호사, 바리스타, 컴퓨터 프로그래머, 기술자, 노동자가 되도록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초대를 따라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여 살고자 응답한다면 지금 우리의 고백이 연약하고 불완전하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고백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비록, 미래에 완성될 행복이지만, 지금 여기서부터 맛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행복선언을 노래하고 있는 복음 이야기도 그 행복을 현재시제로 기록하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지금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신이 착하게 살고 있기에 ‘성인’(聖人)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가 고백했듯이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기 위해 선택하시고 불러주신 축복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연합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된 죄인들입니다. 자신의 공로 때문에 우리가 ‘성인’(聖人)이라 불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깨닫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자녀들을 ‘성인’(聖人)들로 양육할 거룩한 책무가 있습니다. 부모는 미래의 ‘성인’(聖人)을 양육한다는 태도로 자녀와 눈빛을 마주해야 합니다. 사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성인’(聖人)이 되는 일에는 출생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에 놀람과 감동을 주는 ‘성인’(聖人)이 되도록 오늘도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정말이지 주님의 교회에는 역사 속 과거로 남겨두어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적 시간의 기억에서는 과거가 된 ‘성인들’을 포함하여, 지금 여기의 우리와 장차 ‘성인’(聖人)으로 자라날 모두를 합쳐 성경은 거룩한 교회, 즉 ‘거룩한 성도의 상통’이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수명이 다한 뒤에야 천상에서 비로소 행복을 누리는 우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천상의 성도들께 악과의 전투 중인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지혜를 성령께서 모두에게 선물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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