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연중3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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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쳐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4:1-12
  • 시편 – 시편 90:1-6,13-17
  • 독서 – 1데살 2:1-8
  • 복음서 – 마태 22:34-46

연중 30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사랑,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미 들어간 이의 삶’입니다.

1독서 《신명기》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느보산의 모세와 그의 유산(遺産) 이야기입니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출애굽기》를 낭독했는데, 갑자기 ‘모세의 유언’(설교)에 해당하는 《신명기, 申命記》로 넘어왔습니다. 게다가 첫 장도 아니고 ‘마지막 장’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오경’ 전체의 ‘마지막 장’을 낭독하도록 배정했습니다. 혹시 10월 ‘마지막 주일’이라서 그렇게 한 것일까요? 사실, 오늘 낭독한 단락이 ‘모세의 죽음’ 이야기이고, 《시편》으로 노래한 <90편>도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기에 ‘마지막’이 갖는 상징성이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우선, 《신명기》가 어디에 속하는 책인지부터 짧게라도 살피는 일이 전체 ‘묵상’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유대인은 ‘율법’이라는 뜻의 ‘토라’라고 부릅니다)이라 부릅니다. ‘모세오경’은 우주와 인류의 ‘기원’, 특히 하느님 백성의 기원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계약’을 맺으십니다.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다음, ‘종살이’하던 그들을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해방’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시킵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내려주시어 그들이 다른 민족에게 복을 가져오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려는 뜻을 계시하고, ‘예배’ 규정도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동행하시는 전과정이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선택과 약속의 성취를 들려주는 책들이 ‘모세오경’입니다.

사람들은 ‘모세오경’이라는 이름 때문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가 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낭독한 부분을 읽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사람이 나중에 있을 자기의 죽음과 장례식마저 자세히 묘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구약학자들은 우리가 읽은 단락이 《신명기》의 ‘부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명기》 대부분은 ‘주전 8세기 중엽’에 쓰였습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아 왕’(주전 621년) 때 일차 편집작업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계속 발전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뒤에 ‘신명기 역사가’(구약학자 ‘마틴 노트’가 주창)가 추가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학계에서는 우리가 낭독한 부분을 ‘신명기 역사서’의 ‘서론’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신명기 역사서’란 낯선 말에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의 중심사상과 여러 개념(율법과 교훈적인 언어들)을 빌려서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훗날 재해석하여 기록한 책들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중심사상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오늘 복음 이야기에 등장하듯이 예수님의 입에 담겨 있습니다(마태 22:37-38; 신명 6:4-5).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시나이산 계약)을 기억하고 충실하면, 약속의 땅에서 번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사상입니다(신명 4:1,40; 5:32-33; 6:2-3; 30:15-16,19-20). 하지만 그 계약을 잊고 불충실하면 불행해지고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신명 4:23a-28; 6:14-15; 30:17-18).

그러면 《신명기》의 중심사상에 기반하여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재해석하여 훗날 기록한 책들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신명기 역사서’에 해당하는 책들은 무엇입니까? <공동번역성경>에는 ‘역사서’로 분류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전기예언서’로 분류하는 《여호수아》, 《판관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가 ‘신명기 역사서’에 해당합니다. 참고로 <구약성경>에는 ‘역대기 역사서’로 불리는 책들, 즉 《역대기상하》, 《에즈라》, 《느헤미야》도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훗날 재해석하면서, 선조들이 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비극이 하느님께서 다른 신들보다 ‘무능’해서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고대에는 민족과 국가의 싸움이 ‘신들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은 다른 민족(국가)의 신들에게 ‘야훼 신’이 패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패배한 민족에게는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역사가’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명기 역사가’는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일이 그들의 ‘죄악’ 때문이라는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재해석’합니다. 그 ‘죄악’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시나이산 계약’(출애 23-24장)과 ‘예루살렘 성전제의’를 충실히 지키지 않은 일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주님 한 분만을 예배하기로 한 그 계약에 불충실했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대로 출애굽 2세대를 향한 모세의 ‘거듭된 설교’(경고, 유언)를 그들이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명기, 申命記》라는 말은 ‘신(神)의 명령’(命令)이라는 뜻의 ‘신명기’(神命記)가 아닙니다. ‘신신당부’(申申當付)라는 말처럼, ‘거듭 강조해서 하느님의 뜻(계명)을 들려주는 설교’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어긴 그들을 이미 모세를 통해 경고하신 대로 다른 민족의 손을 빌려 치시고 그 땅에서 내쫓으셨다는 ‘재해석’입니다(신명 4:23a-28; 6:14-15). 그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난 비극, 즉 하느님께서 행하신 ‘역사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신명기》의 예언적인 관점에서(과거를 통해 그들의 현재를) ‘신명기 역사가’는 재해석합니다. 물론, 《신명기》의 중심사상에 기반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돌아오기를 촉구합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미래가 있습니다(신명 4:29-31; 30:1-10).

이런 이해와 함께 《신명기》의 ‘부록’이라고 불리는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모세가 출애굽 2세대와 함께 약속의 땅인 가나안 입성을 두 달 열흘 앞둔 시점입니다. ‘모세오경’ 전체의 ‘마지막 장’이면서 새로운 ‘출발점’을 알리는 ‘시작 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이라는 새 역사의 문이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세는 40년 광야 여정을 마무리하는 기착지인 ‘느보산’(해발 817m) 정상(‘비스가’는 ‘꼭대기’라는 뜻)에 서 있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본문에 나오는 ‘느보산’에 있는 ‘모세 기념성당’을 방문했습니다. 현재는 그곳이 요르단의 영토입니다. 그 산 ‘전망대’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며 보여주신 온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1-3절).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모릅니다. 마침 날이 맑아서 ‘염해’(사해)와 ‘예리고’는 물론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세가 그 산에 올랐을 당시에도 날씨가 무척 맑았던 셈입니다.

그 전망대에는 ‘지오바니 판토니’(Giovanni Fantoni)가 제작한 ‘놋뱀 기념물’이 ‘십자가’ 형태로 세워져 있습니다(민수기 21:4-9). 너무나 맑은 날, 서쪽으로 저 멀리까지 바라보이는 그 약속의 땅을 조망하는 모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그는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자신의 두 눈으로 내려다봅니다. 그토록 간절히 소망했던 땅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발꿈치를 들고 볼 수 있는 한 최대로 멀리까지 그 광활한 전경을 보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은 거기로 건너가지 못할 것입니다(4절). ‘므리바’에서의 실수 때문입니다(신명 3:27; 출애 17:1-7; 민수 20:1-13; 신명 1:37; 4:21).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을 그 땅의 문지방까지 인도해 왔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손에 닿을 듯 너무나 가까이 ‘약속의 땅’ 앞에 서 있음에도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먼 그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그래도 그는 그 땅을 볼 수 있는 은총은 받았습니다.

모세의 생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는 거기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자기 삶의 마지막, 즉 자기 사명의 마지막 결과도 보았습니다. “이것이 …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라는 음성도 들었지만, 동시에 그는 ‘온유한 사람’에게 허락된 천국의 땅을 보여주시며 그의 영혼을 맞이하러 오신 ‘하느님의 음성’(야훼의 말씀)도 그 마지막 순간 들었을 것입니다(마태 5:5).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입맞춤’하심으로 120년 동안 그의 몸에 거하던 ‘영혼’을 취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죽는 방법 중 최고라고 합니다. 실제로 <공동번역 성경>에 “야훼의 말씀대로”(5절)로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은 ‘야훼의 입’(페, פֶה, mouth)입니다.

이리하여 위대한 모세의 생애는 한바탕 꿈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는 이집트 왕자로 40년, 광야에서 목자로 40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로 40년을 타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이룰 도구로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 무려 80년이나 준비시키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숫자’라는 괴물에 속으면 안 됩니다. 하늘이 우리를 부르는 그 날까지 오늘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숫자에 속는 인생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장례, 이스라엘의 애도와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 이야기가 계속됩니다(6-9절). ‘신명기 역사가’는 하느님께서 친히 모세를 장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신약성경 《유다서》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장사한 ‘모세의 시체’를 두고 ‘대천사 미가엘’과 ‘악마’가 다투며 논쟁했다고 합니다(유다 1:9). 왜 다투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지나친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모하신 그 산에 모세가 엘리야와 함께(마태 17:1-3) 나타나게 할 목적으로 그를 친히 장사하셨습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모세의 ‘묘비명’을 단 몇 자로 적었습니다. 그게 어디 있느냐고요? 잘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야훼의 종 모세”(5절). 이것이 ‘신명기 역사가’가 그에게 바친 ‘가장 영예로운 묘비명’입니다. 아마 저 같은 사제들도 훗날 ‘주님의 종 애단’, 이렇게 불릴 수 있다면 잘 산 인생일 것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죽은 후에 빛나나 봅니다. 그가 죽자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30일 동안이나 슬퍼하고 곡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특별한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자신들을 위해 하느님께 목숨 걸고 중보한 기도의 사람, 온유와 겨몬으로 자신들을 대했던 그가 ‘참된 지도자’였다는 인정과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애도하는 기간이 끝나고 순조롭게 지도자 교체가 일어납니다.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9절). 앞으로 나아갈 시간이 그들 앞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은 계속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의 계획은 모세나 여호수아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세상에 성취하시려는 구원의 일은 오늘날도 부르심 받은 우리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모세의 탁월한 유산에 대한 회고로 ‘모세오경’은 마무리됩니다(10-12절). 그의 업적과 인물됨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합니다. 그는 최고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친구처럼 하느님과 친밀히 얼굴을 마주한 제사장(중보자)이었습니다. 온갖 기적과 표적을 행하여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여 사명을 성취한 ‘주님의 종’으로 죽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영광스럽게 그 모든 직분을 감당한 영웅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라고 말해집니다.

모세의 삶과 죽음, 그와 동행한 이스라엘 백성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찰합니다. 문득, 그의 인도를 받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들인가라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또 그와 동행한 이스라엘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참으로 알아들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그들보다 우리가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에게는 모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기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완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착한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 떼’여야 한다는 진실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90편>은 하느님의 영원하심을 찬미합니다. ‘하느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제목대로 하자면 《시편》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시’(詩)인 셈입니다. 누구라도 이 ‘시’(詩)를 읽는다면, 모세가 고백하는 ‘인생의 덧없음’에 동의할 것입니다. 학자들은 <90편>이 원래는 1-12절, 13-17절 이렇게 두 단락으로 따로 존재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오늘은 1-6절, 13-17절을 발췌했습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전반부(1-6절)는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인생의 참된 피난처이심을 찬미합니다. 먼저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피난처 되심이 출애굽이나 광야 여정에서 시작된 일이 아님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즉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대손손 그들의 피난처와 보호자가 되어주셨습니다(1절). 그 하느님의 기원이 어디서부터인지 깨우쳐줍니다. 만물이 존재하기 전, 한 옛날부터 영원히 하느님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입니다(2절). 더욱이 《창세기》 말씀처럼(창세 3:19), 인생을 ‘심판’하시어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교훈합니다(3절).

이어지는 아름다운 ‘시구’(詩句)는 세월을 아껴 현명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줍니다(4-6절). 마치 작은 《전도서》를 읽는 엄숙함이 흐릅니다. 인간의 본질을 모세는 정확하고도 깊이 있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가련한 존재가 인간임을 분명히 합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가련함’과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 인간 ‘수명’(壽命)의 ‘덧없음’과 하느님의 ‘영원성’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은 너무나 다릅니다. 시간을 묘사하는 모세의 시적 감성은 정말 놀랍습니다.

연속되는 아름다운 ‘시구’(詩句)처럼, 예언자 ‘이사야’도 비슷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이사 40:6-8). 게다가 인간의 ‘수명’은 ‘죄악’으로 인해 더욱 짧아질 뿐 아니라 ‘죄악’은 인생들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7-12절). 그렇습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처럼,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돋아났다 말라버릴 풀”과 같습니다(5-6절).

이 ‘시구’(詩句)는 셰익스피어의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순적인 모습과 내면의 본질을 비극적으로 잘 드러낸 작품입니다. 특히 5막 5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맥베스의 독백’은 모든 이들의 마음에 떨림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인간적인 애정과 연민까지 들게 만드는 명대사입니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듣게 될 소식이었다. 내일, 내일, 또 내일. 정해진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매일 조금씩 기어가고 있다. 과거는 어리석은 이들을 비추어 한낱 먼지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밝히어 왔다. 꺼져라, 꺼져라, 덧없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제시간이 되면 무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말없이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한 바보들의 떠드는 이야기일 뿐.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선물 된 유한한 시간을 잘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짧은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지혜’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교훈합니다(12절).

후반부(13-17절)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조명해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가련한 인생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간구하는 중보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하신 자비와 사랑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들려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노래했고, 또 셰익스피어가 윤색한 것처럼, 인간의 본질이 말라버릴 풀이요, 꺼져갈 촛불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절망뿐입니다. 인간 자신을 볼 때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무상’입니다. 하지만 인생들을 가련히 여기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다른 대답을 선물 받습니다(13절). 오히려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동특녘’(아침)이라는 표현처럼 그 소망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있습니다(14절).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이 비참한 인생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느님만이 우리를 ‘인생무상’(덧없음, 무의미, 허무, 파괴, 죽음)에서 풀어주실 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참된 행복’(생명)을 추구하는 인생이(15-17절)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영원하신 사랑의 하느님’뿐입니다. 인생은 오직 ‘영원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안에서만 ‘영원한 피난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감사성찬례를 봉헌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우리에게 고백하는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느님입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는 사도 바울로의 데살로니카에서 펼친 선교활동에 대한 회상입니다. 그는 그 도시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작은 공동체가 ‘데살로니카 교회’입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가 보여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는 복음 전파의 동기가 순수하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 그들을 ‘부드럽게’(너그럽게) 대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위했습니다. 참으로 바울로 일행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것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바울로에게도 그들은 ‘극진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결실이 데살로니카 교우들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바울로가 보여준 그 ‘태도’와 ‘사랑’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 속에 복음 전도의 열정이 되살아나도록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바울로가 고백한 그런 ‘순수한 사랑’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바울로처럼 순수한 사랑의 최고 결정체인 십자가 사랑에 우리가 붙잡히기를 축복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인 ‘사랑의 이중 계명’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은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나왔고,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로잡아주시는 말씀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질문에서 나왔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삶을 살아갈 것을 명령하시는 하느님의 화신(성육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마태오복음》은 증언합니다.

특히, 전반부(34-40절)인 ‘사랑의 이중 계명’은 그리스도교에서 너무나 중요한 ‘경구’(警句)입니다. 따라서 3년 주기 전례독서(Revised Common Lectionary)는 이 계명 이야기를 매년 <복음서>로 읽도록 배정했습니다. ‘나’해는 연중 31주일(마르 12:28-34), ‘다’해는 연중 15주일(루가 10:25-37)입니다. 전반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성주간으로 과월절 축제를 며칠 앞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 사회의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입니다. 성전 뜰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거기서 사회의 특권층들, 즉 유대 지도자들(대사제들, 산헤드린의 원로들) 및 지식인들(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십니다(마태 21:23-22:33).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유다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들입니다. 그들은 지도자와 지식인 행세를 하지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지게하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던 위선자들입니다. 종국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잡아먹을 이리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맞서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침묵시킬 정도로 논쟁에서 탁월함을 보이십니다. 본문은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앞으로 나섰습니다. ‘속을 떠보다’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입니다. ‘시험하다’, ‘유혹하다’, ‘부추기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마태오복음》 22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함정’(올가미)에 빠뜨리려는 이들의 시도가 이미 두 번이나 실패한 것으로 나옵니다. 한번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 당원과 함께 제기한 ‘세금’ 문제였고, 다른 한 번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제기한 ‘부활’ 문제였습니다. 이미 두 번 실패의 쓴잔을 마셨기에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은 ‘율법교사’라는 제대로 된 ‘저승사자’를 골라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의 뛰어난 학식이 나자렛 출신의 촌뜨기를 올가미에 걸려들게 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시 율법교사들은 ‘바리사이파 출신들’로 율법과 전통, 종교적 관행의 모든 복잡한 분야에 ‘전문 식견’을 가진 당대 최고 지식층이었습니다.

사실, 율법교사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은 존경받는 ‘율법교사’입니다. 반면에 그가 올가미에 넣어 제거해야 할 ‘예수’라는 인물은 ‘촌동네 나자렛’에서 온 ‘목수’(건축노동자) 출신의 떠돌이 예언자입니다. ‘격’(格)이 맞아야 하는데, 신분이나 스펙 자체가 비교가 안 됩니다. 말하자면 산골 출신의 노동자와 법학대학원 교수가 논쟁의 자리에서 만난 격입니다. 그는 ‘지식’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의 ‘전문분야’를 꺼내 듭니다. 초장에 예수님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 그랬겠지요. 아니, 이 질문으로써 그동안 누구도 못 잡은 독 안에 든 쥐를 한 방에 잡겠다는 속셈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다소 굵은 목소리로 위압적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 마태 22:36

‘페이스북’이라는 세계 최대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있습니다. 이용자들에 따르면, 글을 올리는 일종의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화면의 한 바닥에 들어오는 글을 쓰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팔로워’들은 ‘짧은 호흡’을 원하지, 긴 호흡은 잘 안 본다는 뜻입니다. 저처럼 설교문을 길게 쓰는 사람은 뜨끔합니다. 어쩌면 페이스북이 요즘 세태의 반영인지도 모릅니다. 긴 글, 생각하게 하는 글은 싫어합니다. 짧고 달콤한 글을 좋아합니다. 지루하게 길게 말하지 말고, 간단히 결론만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요즘만이 아니라 고대에도 있었나 봅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이 그런 흔적입니다.

그가 말한 ‘율법서’는 구약성경의 첫 다섯 두루마리인 ‘모세오경’(유대인은 ‘율법’이라는 뜻의 ‘토라’라고 부릅니다)을 말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시키는 영예로운 선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모세오경’을 ‘613개’(십계명 포함)로 요약한 ‘율법조문’(계명, 규정)이 통용되었습니다.

율법학자가 이 질문을 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당시 율법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자주 논의되곤 했습니다. 특히 ‘바리사이파 출신’의 율법학자들은 ‘613개’(부정적 금지 율법 365개, 긍정적 훈계 율법 248개)나 되는 ‘율법조문’(계명, 규정)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에 ‘경중’(輕重)을 따질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계명들 하나하나를 ‘동등한 의무감’으로 지킬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많은 ‘율법조문’을 통합하는 ‘상위법’에 해당하는 계명을 찾는 일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지성은 항상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지요.

흥미로운 점은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는 ‘상위법’에 해당하는 계명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12:28-33). 그는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율법학자이면서도 결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도하는, 심지어 같은 사람의 질문(마태오는 가장 큰 계명, 마르코는 첫째가는 계명)인데도 <복음서> 내에서 서로 충돌을 벌이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율법학자가 613개나 되는 ‘율법조문’(계명, 규정)들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물은 점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계명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지 ‘시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 질문의 의도성을 갖고 묵상하는데, 문득 그 질문이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 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이 제게 물으시는 말씀처럼 다가왔습니다.

애단아, 밖으로 나가지 말고 네 안으로 들어와서 대답해 보거라. 율법서에 기록된 613개의 계명이나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대답을 찾지 말고 대답해 보아라. 네가 네 인생에서 스스로 찾아낸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 네게 새겨져 있는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이냐? 너는 그것을 찾아서 알고 있느냐? 아직 모르고 있느냐? 모른다면 왜 나에게 묻지 않느냐?

먼저 ‘가장 큰 것’이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여럿’(복수)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큰 것은 여럿 중에서 ‘으뜸’, 다른 모든 산의 ‘꼭대기’입니다. 다른 모든 사물을 정렬시키는 ‘기준’, 다른 모든 돌이 쌓아 올려지는 ‘기초’입니다. 다른 모든 싹이 움터 나오는 ‘뿌리’, 다른 모든 존재의 ‘어머니’입니다. 즉 ‘한 처음’의 ‘하나’를 뜻합니다.

그 하나를 낱개의 하나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럴 땐 수학적 정의가 도움이 됩니다. 일(一), 즉 하나는 그 이상 나눌 수 없는 ‘전체’를 말합니다. 영성적으로는 자신 안에서 자기 외에 다른 무엇을 만날 수 없는 ‘온전한 하나’입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있을 때 바로 그런 ‘온전한 하나’를 알아차리지만, 대부분은 잊고 ‘분열’되어 살아갑니다.

일단 내 안에 있는 ‘여럿’이 무엇인지를 ‘한 말씀’해 주시기를 주님께 간청합니다. ‘생각들’입니다. 우리 내면에서는 하루 동안도 무수한 ‘생각의 코끼리들’이 일어납니다. ‘생각’이란 본래 저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끌려다닐 일이 아닙니다.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면 됩니다. 하지만 어떤 생각의 코끼리들은 ‘정서들’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생각들은 ‘무엇을 원해서’ 일어난 것인지, 그 감정의 역동들은 ‘무엇을 원해서’ 일어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면서’ 점점 ‘심연’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맨 밑에 가 닿으면, 더 물어갈 수 없는 하나의 ‘원함’, ‘기대’, ‘의도’, ‘동기’를 만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초적 갈망’(욕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온갖(여러) 갈망들’이 정렬되지 않은 채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 갈망들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불현듯 생각으로, 즉 ‘연속된 생각의 코끼리들’로 하나씩 ‘가면’을 쓰고 ‘의식의 표면’에 올라왔을 뿐입니다. 때로 우리는 바다 위를 떠가는 배처럼, ‘표면의식’ 차원에서만 그 ‘생각들’을 고려합니다. 가령,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커피를 마십니다. 친구와 통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스마트폰을 집어 듭니다. 또 다른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생각의 코끼리를 따라 그 ‘원함’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밖’으로 돌아다닙니다. 그때에는 일어난 그 생각이 나의 주인이 되어 이 몸을 이끌고 다닙니다. 바닥 모를 심연처럼, 채워도 도무지 만족을 모릅니다. 그런 삶이 싫다면 ‘물어야’ 합니다. ‘가면’을 쓰고 ‘표면의식’에 생각의 코끼리로 나타난 그 갈망들이 어디로, 무엇을 향하여 가고자 하는지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자신에게 물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잠깐 멈추어 ‘침묵’합니다. 일어난 ‘생각의 코끼리’를 ‘알아’차립니다. 심층의 어떤 갈망과 연결되어 일어난 것인지 ‘관찰’합니다. 생각이 주인이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주인입니다. 관찰로도 안 될 때는 주님께 정직하게 질문합니다.

‘주님, 이 생각은 제 안의 어떤 갈망과 연결된 것인지요?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서 이런 생각들을 퍼 올려 주시는 것인지요?…’

사실, 그 갈망들이 충족되는 순간 우리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쁨, 평화, 행복감 같은 ‘긍정 정서’입니다. 반면에 그 갈망들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분노, 슬픔, 죄책감 같은 ‘부정 정서’입니다. 이처럼 갈망은 우리 ‘정서의 문’(門)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의 갈망들을 알아차리고, 건강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충족시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성숙하여 통합의 눈을 갖게 되면, 밤과 낮이 있어야 하루가 되듯, 긍정이라는 것도 부정이라는 것도 나를 성장시키는 ‘하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갈망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주님 앞에서 또 묻습니다. 묻고 물으며 이 많은 생각들을 데려온 ‘한 가지 생각’, 그 많은 소망들을 줄 세운 ‘한 가지 소망’, 그 많은 기대들을 쌓아 올린 ‘최초의 기대’, 그 모든 갈망들의 ‘어머니’, 그 모든 것들이 싹터 나오는 ‘뿌리’, 다른 모든 것들이 창조된 ‘한 처음’을 찾아갑니다. 다른 모든 ‘친구들’을 데려오는 그 한 친구, ‘가장 큰 그것’을 말입니다. 한마디로 ‘오직(참된) 한 생각’, ‘오직 한 감정’, ‘오직 한 행동’, ‘오직 하나’ 말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하십니다.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당신이 찾아낸 답이었고, 그렇게 사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613개나 되는 율법조문 중에서 ‘상위법’을 갖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다 말씀하신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와 같은 ‘경구’(警句) 가 그 반영입니다(참고, 마르 2:27). 예수님이 말씀하신 ‘상위법’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보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를 바라보시며 노래하듯이 들려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 마태 22:37-40

정말 간결하고 명확한 대답입니다. 이름하여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교사가 그토록 숭상하던 ‘전통’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하셨습니다.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신명 6:5; 레위 19:18)을 인용해 단 두 문장으로 613개나 되는 율법조문(계명, 규정)을 ‘정의’(定義) 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찾아내신 ‘오직 하나’, 즉 삶의 모든 목적과 가치가 명확하고 간결하게 정리됩니다. 인간 행동의 모든 갈망과 지침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말씀(사실은 하나)으로 요약됩니다. 누가 이 대답에 논쟁을 걸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사용한 ‘사랑하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가파오’(ἀγαπάωo)입니다. 명사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페’(ἀγάπη)입니다. ‘아가페’는 느끼는 감정적인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眞)이기에, ‘선’(善)이기에, 아름다움(美)이기에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행위입니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염려하여 그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의지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비움’의 행위입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자비’(慈悲), 또는 ‘이타심’이라 불립니다. 영어로는 ‘컴패션’(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아가페’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도 느끼는 정서적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의지적인 행동’의 총칭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원수였던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우리의 필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고, 당신 자신을 의지적으로 헌신(희생)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2독서 《데살로니카전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교우들을 향해 ‘사랑했다’고 말할 때 쓴 단어도 ‘아가파오’의 형용사인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을 하느님께 간구하며 내 모든 갈망의 뿌리인 사랑이 그렇게 성숙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께서 ‘전통’에 대한 인용 후에 결론으로 덧붙인 “율법과 예언서”라는 표현은 당시 <구약성경>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골자’는 ‘요점’,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과 예언서, 즉 구약성경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요, 요점(요약)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미 이보다 더 간결하게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명백히 밝히신 적이 있습니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 마태 6:12

‘황금률’이라 불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은 ‘이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대전제’이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 즉 그 두꺼운 구약성경을 꿰뚫는 정신을 이 한마디로 ‘정의’(定義)하신 셈입니다. “다른 사람 잘 대하기, 즉 사랑하기.” 정말 속이 뻥 뚫릴 정도로 명쾌합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드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김’이 빠질 테지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그 ‘요점’과 ‘정신’의 ‘시초’(始初)가 아닙니다. 《루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묻던 ‘율법교사’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이 두 계명(신명 6:5, 레위 19:18)이 율법 전체를 ‘요약’(정의)한다는 사실을 이미 말하고 있었습니다(루가 10:27). 예수님은 그에게 “옳은 대답이다”라며, “그대로 실천하면 살 수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10:28). 그가 대답한대로 이 두 계명이 율법의 골자이자, 정신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만큼 높은 가치를 갖는 ‘오직 하나’, 즉 ‘신성한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전하는 ‘황금률’도 예수님만의 ‘독특한 정신’(요점)이 아닙니다. 비록 율법 전체의 요약이라는 말은 없지만 제 2경전인 《토비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 토비 4:15a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파의 두 거장 중 한 명인 랍비 ‘힐렐’(Hillel)도 ‘율법 요약’을 묻는 ‘그리스인’에게 이 ‘경구’(警句)로 대답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율법 전체가 이 경구의 ‘각주’(脚注)인 것으로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이 ‘긍정의 형태’라면, ‘힐렐’은 ‘공자’의 가르침처럼(己所不欲勿施於人) ‘부정의 형태’로 제시한 셈입니다. 종합하자면 ‘사랑의 이중 계명’, 즉 율법의 ‘골자’이자 ‘정신’으로서의 ‘황금률’은 예수님 말고도 당대의 다른 ‘랍비’들도 동의할 수 있던 ‘본질적 정의’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이중 계명’에 나타난 예수님의 ‘독창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레위기》 말씀은 이렇습니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 레위 19:18

고대 유대 문화에서는 가족, 친지, 함께 사는 ‘동족’이 ‘이웃’입니다. 그들의 ‘적’(敵)은 ‘이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이웃’을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하십니다(루가 10:29-37). 심지어 우리의 ‘적’(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그 뜻입니다. 따라서 이웃은 ‘모든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다른 율법학자(랍비)들의 ‘이웃’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이웃을 확장하여 살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확인한다’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이웃을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하신 예수님의 태도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반(反)종교적’이고, ‘반(反)사회적’이며, ‘반(反)문화적’입니다. 다시 말해 너무나 ‘반(反)유대적’이어서 유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예수님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물음은 달라집니다. 누가 ‘율법’(율법의 정신)을 잘 요약한 ‘시초’(始初)인가? 누가 독창적(originality)인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물음의 방향을 우리 자신’에게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인생에서 ‘가장 큰 것’, ‘오직 하나’를 찾았는지,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질문들과 대답들로 이어지는 《마태오복음》 22장의 이 일련의 사건을 마태오가 여기에 기록한 ‘직접적 이유’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에 말씀 나눔을 닫으며 아래에서 꼭 언급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전통’에 대한 큰 경외심을 예수께서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 마태 5:17-18

이처럼 예수님은 ‘전통’(율법)에 대해 큰 ‘경외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율법 조문을 동등한 의무감으로 거의 문자적으로 지킬 것을 가르치던 바리사이파와는 해석을 달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위법’ 개념을 갖고 계셨습니다. 율법교사는 단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가장 큰 계명’을 요청했으나 예수님은 그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전통에 기대어 두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따르면, 두 계명은왼발 오른발처럼 함께 갑니다. 각각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으며, 서로를 지탱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첫째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둘째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이 첫째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증합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지정의’(知情意)를 다해 하느님을 ‘충분히’, 하느님을 ‘최선으로’, 하느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고, 똑같은 호흡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서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을 잘 알아듣고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그 계명에 담긴 진정한 뜻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 ‘말씀의 순서를 뒤집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의 본뜻은 “내 모든 것, 즉 온 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요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이라는 뜻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계명의 본뜻은 ‘오직 사랑만이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정신, 생각, 힘, 의지)을 다하도록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해본 분이라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감정이나 기분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순서를 뒤집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이지 ‘사랑하는 이’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정신, 생각, 힘, 의지)을 다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정신, 생각, 힘, 의지)을 다한 끝에 ‘도달’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면’ 이미 그렇게 삽니다. 항상 ‘진정한 사랑’이 먼저고, ‘행동’은 그 사랑에 뒤따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안에 이미 살고 있으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보면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면’, ‘이미 사랑 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미 사랑 안에 들어갔을 때는 순서가 바뀝니다. 그것이 이 계명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 뒤집어야 한다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만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을 온 존재로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계명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둘째 계명을 실천하는 힘은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으로부터 나오고, 둘째 계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 살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이미’ 사랑하는 삶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두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구한말 동학(東學)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주창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하늘 같이 섬기라”라는 ‘경구’(警句)가 이미 예수님 입에서 나온 셈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져 있음을 ‘최후심판’ 이야기에서 똑똑히 들려주십니다(마태 25:31-46).

진실로 하느님은 가난하지 않으므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도울 때, 마치 우리가 하느님을 돕는 것처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이웃 없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줄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행동’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찾아낸 ‘오직 하나’입니다.

저 역시 제 안에서 찾고, 들은 그 ‘오직 하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갈망’을 통해 오늘도 내게 말을 거시며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니,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모든 것이 여기로 돌아가는 것을, 모든 것이 여기서 나온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한 처음’이며, ‘어머니’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그 ‘하나’(사랑)로 돌아가면, 그 하나(사랑)가 내 안으로 돌아오면, 그 하나(사랑)가 진정으로 마음에서, 목숨에서, 뜻(정신, 생각, 힘, 의지)에서 살아나오면, 그때야 비로소 너와 내가 둘도 아닌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네 이웃을 내 몸같이”입니다.

정말이지 먼저 자신에게서 이 ‘사랑의 갈망’을 ‘알아차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 거지’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왕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깡통을 들고 밖으로 구걸하러 다니는 ‘거지 신세’입니다. 이 ‘사랑의 복지’(福祉)가 자기에게서 일어나지 않으면, 이웃을 향한 사랑의 복지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사랑의 복지’를 외면한 채 ‘남의 사랑의 복지를 위한다’라며 참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진짜 이웃은 자기 내면에 거지로 있는데 밖으로만 쏘다니는 격입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찾아진 ‘사랑의 갈망’ 외에 ‘하느님’과 ‘나’와 ‘이웃’과 ‘하나’(일치) 되는 길은 없습니다. 모든 것의 처음이자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인 사랑을 진정으로 알아차리면, 너와 나는 별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인 ‘사랑의 발현’임을 알아차리면, 비로소 너는 내 안에, 나는 네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요점, 핵심)이며, 생생한 삶입니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는 하나에 하나를 합쳐서 둘이라고 말합니다. 너와 나를 합치면 둘이 됩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내 옆에 너를 놓아서 둘이 된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직선 가운데에 선을 그으면 둘이 되듯, ‘하나’ 위에서 구별되는 둘이지만 여전히 하나 안에 있습니다. 즉 하나에 또 다른 하나를 갖다가 더한 둘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전체)이신 주님 안에서 한 형상을 너와 내가 나누어 받은 둘입니다. 온전히 하나이신 주님 안에서 한 형상을 나누어 받은 셋이고, 그렇게 무한한 동그라미(圓) 위에서 한 형상을 나누어 받은 70억 명이 지구에서 꽃처럼 피고 지고 있습니다. 하느님 밖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말입니다. 사랑 밖에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그 무한한 직선, 무한한 동그라미 위에서 <시편 90편>의 모세의 기도처럼 ‘찰라’에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명멸(明滅)하는 ‘점’들입니다. 그리고 ‘수학적 정의’에 따르면 그 이상 쪼갤 수 없는, 길이도 면적도 가지지 않는 ‘점’은 사유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의 정의는 어쩌면 그리 우리 인생들에 꼭 맞는지 모릅니다.

복음 이야기 후반부(41-46절)는 지금까지 질문을 받으시던 예수께서 먼저 질문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에 ‘율법교사’ 뿐 아니라 주변의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동원한 모든 방법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질문이 던져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이 자신들이 공격하던 예수님의 질문이었다는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모여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 마태 22:42a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물었던 질문과 비슷합니다(마태 16:13-15). 거기서는 ‘제자들’을 향해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메시아) 개념에 대해 물었습니다. 메시아의 혈통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들은 별걸 다 묻는다는 투로 대답합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 마태 22:22b

‘다윗의 자손’이란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지칭하는 칭호 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역사서’에 속하는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은 왕궁을 세운 뒤에 ‘나단’ 예언자를 불러 ‘하느님의 집’(성전)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사무하 7:1-17).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복을 주시고, 한 왕조를 일으켜 세워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실 것이라 ‘언약’(言約)하십니다(사무하 7:17). 이 ‘언약’에 기초하여 유대인들의 ‘메시아’ 개념이 싹터났습니다(예레 23:5-6; 이사 9:5-6). 이것은 ‘수태고지’에도 반영되어 있고(루가 1:31-33),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언약을 따라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그리스도)가 나와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유대인이 ‘정치, 군사적 메시아 왕국을 꿈꾸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 대답인 듯 들렸습니다. 그러나 《시편 110편》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물어오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 마태 22:45

그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느님의 아들’이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다윗의 자손’이라는 그들의 대답은 부분적으로 옳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처음에 밝힌 것처럼(마태 1:1), 예수께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자손’입니다(로마 1:3; 묵시 22:16). 동시에 예수께서는 ‘거룩한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님’입니다(로마 1:4).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신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신을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해와 연결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백히 말씀하시며 반대자들과 맞서셨습니다. 결국 이 질문과 대답으로써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그들의 시비와 시험으로부터 예수님은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물론, 십자가 수난이 있기 전, 단 며칠뿐이었지만 말입니다. 마태오는 성전 안에서 시작된 기나긴 논쟁의 마지막을 이렇게 종결합니다.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 마태 22:46

당대 최고 지식인 집단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든 질문의 대답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비로소 그들은 ‘지혜’로는 예수님을 도저히 함정에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면 던질수록, 오히려 자신들이 곤경에 처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게 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반대자들에게 남은 한 가지는 ‘폭력’뿐입니다. ‘십자가’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위에서 던졌던 ‘그 질문’에 답할 차례입니다. 다시 말해 질문들과 대답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마태오가 여기에 기록한 직접적인 이유 말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락은 마태오가 마지막에 기록한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연중 28주일’부터 낭독해 왔듯이 22장은 질문과 대답의 연속입니다. 마태오는 이 질문들과 대답들로써 무엇을 의도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들이 갖는 모든 의문과 질문들의 ‘대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물음’ 많은 우리 인생들의 ‘그리스도’이심을, ‘구세주’이심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찾아 헤매는 질문들, 궁극적으로는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대답’입니다. 특히, ‘십자가’라는 그 대답은 유대 사회 지도자들과 당시 지식인으로 자처하던 대사제들과 원로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율법학자들이 원하던 방식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에게는, 초대교회 공동체에게는,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대답이야말로 ‘진리’입니다.

말씀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신명기》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느보산의 모세와 그의 유산(遺産)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을 해방한 위대한 영웅이었으나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시편의 노래처럼, 그의 인생 역시 한바탕 꿈이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풀잎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시편의 노래를 통해,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우리 존재의 ‘유한성’을 알아차립니다. 이 유한성은 없지 않고 있고자 하는 존재의 갈망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는 아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숭고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이 숭고한 인생을,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데살로니카 교우들에게 편지하는 사도 바울로처럼, 오직 하나의 ‘사랑’으로 물들이며 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삶’이야말로 이 유한한 생명의 불꽃이 꺼지더라도 저 언덕(彼岸) 너머의 세계에서 ‘다시 불붙는 유일한 길’임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고(마태 25:31-46), 몸소 실천하여 십자가와 부활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보다 행동하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의지’를 갖고 ‘지속적’으로 행하는 ‘어머니의 헌신’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필요들을 우리의 ‘몫’(책임)으로 삼는 ‘의지적인 헌신’(희생)에 가깝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다시 듣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는 ‘오직 하나’를 찾았느냐?

우리는 대답합니다.

사랑이요.

주님은 미소 띤 얼굴로 묻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살고 있니? 정말?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곤혹스럽고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쯤은 맞닥뜨리게 될 어려운 질문들, 즉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와 같은 ‘궁극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온갖 갈망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 삶은 의미 있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대답입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러 갑시다.

찬미하올 하느님, 제 모든 갈망들을 통해 저를 당신께로 불러주시니 감사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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