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11. 연중28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구원의 하느님, 주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오직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2:1-14
  • 시편 – 106:1-6,19-23
  • 독서 – 필립 4:1-9
  • 복음서 – 마태 22:1-14

연중 28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구원으로 부르신 하느님의 위대한 선택을 완성해 가는 우리’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금송아지 우상숭배와 모세의 첫 번째 중보기도입니다. 간단한 본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문학적 구성 형태나 전승의 관점에서 볼 때 십계명을 포함하고 있는 ‘시나이산 계약 체결’ 못지않게 복잡합니다(출애 19-21장). 대체로 학자들은 본문이 ‘여로보암 1세’(주전 926년)가 펼친 종교정책에 대한 정죄를 반영한다고 주장합니다(열왕상 12:26-29).

솔로몬왕의 사후 통일왕국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 1세’는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남왕국 유다로 제사하러 다니다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일을 막기 위해 그는 ‘금송아지 신상’ 둘을 만들어 ‘베델’과 ‘단’에 두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주신 신”으로 섬기도록 조치했습니다(열왕상 12:28). 그의 말은 오늘 본문에 쓰인 백성들의 말과 동일합니다(출애 32:4). 이 조치는 ‘시나이산 계약’에 대한 파기이자 변절입니다. 이렇게 ‘여로보암 1세’가 새로 도입한 ‘제의를 정죄’하려는 의도에서 본문이 쓰여질 당시에 추가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이해와 함께 본문을 보겠습니다. 두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절)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시나이산’(하느님의 산)에서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출애 24:1-11). 그 계약을 ‘시나이산 계약’이라고 합니다. 계약을 체결하신 후에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산’으로 올라와 머물도록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애 24:12).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려는 훈계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그에게 주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여호수아’를 데리고 시나이산으로 올라갔다는 ‘모세’는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초조’했습니다. 심지어 ‘40일’이 되도록 무소식이었습니다(출애 24:18). 그 ‘40일’ 동안 모세는 산 위에 머물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막’(성소)에 관한 모형과 각종 제도를 듣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산으로 올라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재’(不在)가 길어지자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불안’했습니다. 시나이산으로 올라가던 모세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라고 ‘장로들’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습니다(출애 24:14).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 ‘40일의 기간’은 다른 무엇을 할 시간이 아니라 단지 ‘기다려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세가 부재했던 그 ‘40일’은 하느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다림의 시간’, 즉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지연의 시간’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문득, 그들 머리에 ‘한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모세가 죽었구나….’ 이것이 그들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진 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실종’(정확히는 죽음)이라는 그 ‘한 생각’에 속았습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더는 못 기다려….’ 그들이 ‘불안한 감정’ 속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몰려갔습니다. 항상 집단의 심리적 불안이 개인이나 소수의 불안보다 성급하게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불안에 찬 목소리로 요청합니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출애 32:1

그들은 출애굽을 앞장서 인도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행위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의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인도할 ‘신’(神 원문에는 ‘엘로힘’, 즉 하느님)을 갖기로 합니다.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손으로 만지고 볼 수 있는 ‘신’(神), 즉 ‘우상’(偶像)을 원했습니다. 두 번째 계명을 어기는 ‘불순종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출애 20:4). 자신들의 불안은 모세의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며,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성찰’도 가능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본문에 ‘신’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엘로힘’(אֱלהִים)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엘로힘’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 ‘하느님’(엘로힘)의 인도 속에 ‘시나이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신’(神)을 만들어 달라는 것일까요? 더욱이 그들이 ‘시나이산’에서 ‘계약’을 맺은 ‘하느님’(엘로힘)은 “어떤 형상(우상)도 만들지 말고 절하여 섬기지도 못한다”하고 이미 계명을 주셨습니다(출애 20:4-5). 하지만 그들은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손으로 만지고 볼 수 있는 ‘하느님’(엘로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들이 ‘하느님’(엘로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하느님’(엘로힘)은 그들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엘로힘)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세의 상징물’로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요청한 그 ‘신’(엘로힘)은 ‘모세의 대체물’입니다. 근거가 무엇입니까? 흔히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하느님’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는 인간 모세에게 적용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모세를 ‘신’, 즉 ‘엘로힘’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출애 4:16; 7:1).

이런 이유로 그들의 요청을 ‘다른 신’을 요청한 것이라 해석하기보다는 ‘모세의 상징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은 더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출애굽의 주체를 하느님에서 모세로 대체하는 크나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을 앞장서 인도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 사건을 망각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불안에 찬 목소리로 ‘모세의 상징물’을 요구하는 행동 역시 2계명에 위배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하느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기다림의 시간’을 고통스럽게만 여겼고 잘못 반응했습니다. 그들의 불안에 찬 반응을 통해 누군가를 발견합니다. 우리 자신 말입니다. 우리도 불쑥 일어난 ‘한 생각’(허상, 망상, 공상, 망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속을 때가 많습니다. 형체도 없으면서 불쑥 일어난 ‘감정’이라는 놈에게 끌려다니기 쉽습니다.

더욱이 우리 시대 사람들은 ‘지연의 시간’, 즉 ‘기다림’에 익숙지 않습니다. 사실, 과학기술은 우리에게서 ‘희로애락’을 일으키는 ‘한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게’(보게) 하기보다 ‘기다림’을 없애는 쪽으로 발달해 왔습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앱’(app)을 스마트폰에 깝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두 가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보다 중요한 일은 ‘자신의 어둠(한 생각과 감정)을 보는 눈’(빛)을 갖는 일임을 말입니다. 인생길과 세상사에는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이 꼭 있다’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다림의 시간, 지연의 시간 속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잉태와 탄생 말입니다. 누구도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이 원초적인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없습니다. 더욱이 탄생 이후는 어떻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 발달단계들의 어느 순간도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발달단계의 흐름을 참지 못하고 성급히 개입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아이가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고, 사랑과 직업과 인생의 소명을 찾는 일도 그렇습니다.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럽더라도 부모가 할 ‘돌봄의 일’과 자녀 스스로 할 일을 ‘식별’해야 합니다. 온전히 자기 몫으로 주어진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승화’시켜 가야지 비로소 진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됩니다.

농부는 또 어떻습니까? 봄에 씨앗을 뿌리고 ‘지연의 시간’을 반드시 견디어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추수’라는 시간을 온전히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히 씨앗을 뽑아 올린다거나 물을 많이 준다고 ‘추수’ 때가 빨리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몫의 일을 하고 ‘지연의 시간’을 고요히 견디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늘에 맡기며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일,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을 ‘침묵’으로 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물며 칼에 베인 상처가 아무는 데도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는 일은 필수입니다.

이 외에도 인생길과 세상사에는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이 꼭 있다’라는 말은 진실입니다. 물론 그 ‘기다림의 시간’이 갖는 상징은 우리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다릅니다.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미리 지정하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기다림의 시간’(지연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인 죄’에 빠집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됐어!’ 이러면서 자기 마음대로 ‘기다림의 한계’를 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다림의 시간’(지연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미리 지정하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심’을 깊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 ‘지연의 시간’을 허상, 망상, 공상을 일으키는 ‘한 생각’(망념)과 ‘감정’에 속거나 끌려다니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알아차리고’, ‘보는 수행’(修行)을 이어가야 합니다. 생명의 잉태와 탄생, 발달단계와 성장에서 보듯이, 또 농부의 추수에서 보듯이, ‘기다림의 시간’은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나무에 달린 열매처럼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영글게 하려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자기 ‘마음’(생각과 감정)대로 기다림의 한계를 정하기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맡기며 단지 기다려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도)대로 돼야 한다(유심, 有心)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림의 시간을 ‘순수’(무심, 無心)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 말고 다른 바람이 없는 ‘순수 무심’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어느새 ‘기다림’(지연의 시간)은 ‘설렘’이 되고, ‘설렘’은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느님께서 미리 지정하신 기다림의 시간, 즉 언제 돌아오실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 이루어질 ‘주님의 약속된 재림’, 그 ‘지연의 시간’을 기다리는 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마음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돌보면서” 그 ‘기다림의 시간’(지연의 시간)을 영글게 하라고 교훈합니다.

아론은 그들의 ‘성화’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사실, 그는 몰려드는 그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을 이끌어 줄 신을 만들어 달라”는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금고리를 가져오라”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으로 ‘신상’(神像)을 만들 참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보다 ‘사람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일’을 더 우선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론마저 큰 죄악에 동참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을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습니까? 절대다수의 사람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은 아닐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과 ‘권력 분산’이 핵심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하느님의 뜻으로 치환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교회위원으로 위임받는 분들은 이 점을 잘 새겨야 바랍니다.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일은 ‘다수결’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를 응답해야 하지만 그 출발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백성들은 금고리를 아론에게 가져왔습니다. 놀랍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일에 자신들의 재물마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자신들을 해방하시고, 광야 여정에서 인도해 오신 하느님께는 지금까지 무엇하나 ‘감사’로 봉헌하지 않았던 그들입니다. 배은망덕도 이런 배은망덕이 없습니다.

아론은 ‘어떤 신상’(神像)을 만듭니까? 그는 자신이 이집트 땅에 있을 때 보았던 힘 센 동물을 떠올렸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그 동물을 ‘신’(神)으로 섬겼습니다. 이름하여 ‘황소 신 아피스’(Apis)입니다. 황소는 이집트에서 ‘힘’과 ‘정력’(생식력, 다산, 풍요)과 ‘권력’의 상징입니다. 한마디로 ‘풍요의 상징’입니다. 아론은 그 ‘아피스’를 본떠 ‘어린 수소[히브리어로 ‘에겔’(עֵגֶל)은 송아지라기보다는 3년 정도 된 어린 황소] 상’을 만듭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이방 신상’(神像, 혹은 모세의 상징물)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온 우리의 신이다. – 출애 32:4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만든 ‘금송아지 상’(이방신을 나타내는 우상)을 ‘신’(神, 하느님 또는 모세의 상징물)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어린 황소상’(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나타내는 상징물, 또는 이방 신상)을 ‘하느님’(출애굽의 주체인 하느님)으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그 ‘신상’(이방 신상, 또는 모세의 상징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상’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 왔다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그들의 영광을 풀이나 먹는 ‘황소상’과 바꾸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껏 하느님을 ‘힘과 정력(풍요)과 권력’을 주실 분으로 신앙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이 힘과 정력과 권력의 욕망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의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기(욕망)의 노예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이것은 오늘의 우리 사이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러 나라의 ‘증권거래소’를 상징하는 동물상은 ‘황소’입니다. 그래서 ‘강세장’을 ‘불 마켓’(Bull Market)이라 부릅니다. 세상 사람만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 해 왔다는 신자가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본의 상징인 ‘황소상’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교회는 ‘돈과 풍요와 권력’으로 자유롭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는 누구를 섬깁니까? ‘황소상’으로 상징되는 내 욕망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고 믿는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그런 욕망에 사로잡힌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하느님입니까?

그때 아론이 진정한 지도자였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이 ‘금송아지 상’을 ‘신’으로 ‘추대’하는 일을 따랐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군중의 욕망에 영합했다’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신상’을 보고 백성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것에 ‘우쭐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아론은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길’로 가도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신상 앞에 제단까지 만들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일 야훼 앞에서 축제를 올리자. – 출애 32:5

아론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만든 그 ‘신상’이 ‘주님’이라고 아첨하고 있습니다. 그 신상을 통해 ‘합법적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그들은 일찍 일어나 번제를 드리고 친교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론은 단지 ‘신상’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 신상을 숭배하여 ‘신’(神)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축제를 벌였습니다. 먹고 마시다가 정신없이 뛰놀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성적으로 부도덕한 짓을 대대적으로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이제 후반부(7-14절)가 시작됩니다. 모세의 첫 번째 중보기도와 그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산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세에게 ‘정확히’ 알려주십니다. 백성들은 하느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렸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돌아올 때까지 잘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몹시 ‘진노’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감정이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십니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라고 그들에 대한 ‘모세의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어찌나 진노하셨던지 “내 백성”이 아니라 “너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니라 모세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시겠다는 엄포입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나 하십니다. 고집이 센(고삐를 잡히지 않으려고 목을 뻣뻣하게 하여 저항하는 소나 말처럼 구는) 백성, 우상숭배와 난잡한 짓거리에 빠진 이스라엘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모세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시겠다”라는 제안입니다. 모세와 함께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제안입니다. 한마디로 ‘모세를 아브라함으로 삼겠다’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모세를 향한 일종의 ‘시험’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아론’처럼 흔들리거나 우쭐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고집이 센(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몸을 던져 홀로 ‘애원’합니다. 중보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중보자(중재자, 화해자)입니다. 그 중보의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기억’(記憶)을 통해 하느님으로 하느님을 대항하게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는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로 일어난 ‘구원행위’와 ‘맹세’를 ‘기억’(記憶)시켜 드립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상기’(想起)시켜 드립니다. 자기 백성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의 백성’임을 분명히 ‘기억’시켜 드립니다. 자신은 ‘신’(神)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神)임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다시 말해 이집트 땅에서 행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명성’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스라엘)에게 주신 ‘은총의 맹세’(약속)를 ‘기억’시켜 드립니다. 그 ‘선택과 명성과 맹세(약속)의 하느님’과 ‘지금 멸하시겠다’라고 ‘진노하시는 하느님’은 다른 분이시냐는 모세의 항변입니다.

이처럼 ‘기억하시기를 촉구’하며 기도하는 모세는 정말 지혜롭습니다. 하느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모세는 정말 현명합니다. 그는 은혜와 자비, 선하심과 약속에 근거해 기도했습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 삶은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 선하심과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멈추시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성품에 의지하여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은혜와 자비, 선하심과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하느님은 결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그 중보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모세의 기도가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어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면 자신이 갖고 계신 ‘본래의 목적’과 ‘뜻’을 바꾸시는 변덕쟁이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변화되는 대상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모세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본래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품고 계신 본래 목적대로 기도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낸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 한 민족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애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이 이겼습니다. 누구의 사랑이요?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말하자면 모세가 믿었던 대로 본래적인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와 선하심의 옷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 덕택에 ‘기도의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하느님의 성품을 깨닫고, 모세처럼 이 땅에 사는 이웃들을 향한 기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모세처럼 하느님의 마음을 공유하는 인생들이기를 축복합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6편>은 민족의 반복된 죄악에도 불구하고 계약에 충실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찬양시입니다.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 계약’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행위와 은총을 번번이 잊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그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에 ‘신실하셨다’라는 ‘민족적 참회’와 ‘회상’입니다.

오늘 발췌된 본문 전반부는(1-6절) ‘찬양과 기도’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어지심과 영원하신 사랑을 찬양합니다(1절). 주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을 찬양합니다(2절). 순종하는 이의 행복을 노래합니다(3절). 시인은 선민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도 은총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4절). 구원의 하느님께서 민족을 돌봐주실 때 자신도 생각하고 돌봐주실 것을 기도합니다(5절). 공동체와 개인이 하나라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악함’을 고백하기 시작합니다(6절). 역사에서 반복된 이스라엘 선조들의 실패와 망각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실패를 과거의 일로만 보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지른 조상들과 현재 세대(자기 자신)를 동일시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감사성찬례 첫 순서에서 ‘공동으로’ 바치는 ‘죄의 고백’입니다. 선조들처럼 현재 세대도 하느님의 어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공동의 죄의 고백’으로 역사에서 자행된 민족의 죄가 차례로 회상됩니다.

후반부는(19-23절) 민족의 죄에 대한 회상의 일부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의 내용인 ‘우상숭배’와 ‘모세의 중보기도’입니다. 이미 살폈으니 생략합니다. 다만, 후반부를 묵상하며 다짐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 은총을 ‘기억’한다면 이스라엘 선조들처럼 신앙적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어지심과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렇더라도 목이 뻣뻣하고 고집 센 어리석은 백성들처럼 굴 것이 아닙니다. 망각의 자리로 자꾸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먼저 베풀어진 은총을 늘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성찬례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의 가치관과 태도로 하느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필립비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로의 ‘사랑 가득 찬 사목적 권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별의 권면’입니다. 옥중서신임에도 교우들에게 ‘기쁨’을 권면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축복하는 그 마음이 참 곱습니다. 우선 ‘하늘의 시민’답게,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신자답게, 부활을 희망하는 신자답게, 주님을 믿으며(주님 안에서) 굳세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3:30-4:1). 그가 얼마나 교우들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며, 자랑스러워했는지 절절히 묻어납니다.

‘나의 기쁨’, 그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참 ‘시’(詩)적이고 아름답습니다. 그들이 바울로에게 ‘기쁨’을 주는 원인과 근거라는 뜻입니다. 또 경기장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주어지던 ‘보상’(償)을 떠올리면서 그들을 ‘나의 면류관’이라 부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그들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자랑’이 될 것이라는 선언합니다. 저 같은 사제는 이런 ‘친밀한 관계’가 참 부럽습니다.

그런 다음 ‘특정 성도들’을 떠올리며 권면합니다. ‘유오디아’[Εὐοδία, 행운(성공)이 함께 하는 여행, 좋은 길]와 ‘신디케’(Συντύχη, 행복한 만남)에게 ‘한마음(같은 마음)이 되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2절). 두 사람은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바울로의 복음 선교를 위해 헌신한 일꾼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올라있습니다(묵시 3:5; 13:8; 17:8; 20:12,15; 21:27).

그러나 이 ‘명예’가 무색하게 지금 그들은 필립비 교회 안에 생긴 분열의 원인이었습니다. 바울로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책임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지혜로운 길을 갑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강조합니다. 그 공통점은 ‘주님을 믿는다’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주님의 종’이라는 점입니다. 이 공통점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다른 점’은 없다는 조언입니다. 그들의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순종하신 분입니다(필립 2:6-8). 그 주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간직하라는 당부입니다.

그런 다음 ‘공동체’에게 당부합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진실한 협력자’(σύζυγος, 단어 뜻대로는 ‘한 멍에를 멘 자’)에게 그 여자들을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3절). 공동체가 ‘화해의 책무’를 나누어지라는 당부입니다. 우리는 그 ‘진실한 협력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 여자들을 화해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어쩌면 원로나 리디아, 참고 사도 16:11-15)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만큼 바울로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바울로의 권면을 들으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일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도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가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클레멘스’와 ‘다른 협력자들’처럼 요약될 수도 있고, ‘유오디아’와 ‘신디케’처럼 요약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책무를 상기시킨 다음 이 서신의 주요 주제인 ‘기쁨’을 힘차게 반복합니다(필립 1:4,18,25; 2:2,17-18,28; 3:1; 4:1)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 필립 4:4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항상 기뻐하라”라고 명령합니다. 다시 말해 ‘행복’할 것을 명령합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이 서신을 쓸 때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뻐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뻐’(행복)할 수 있는 근거를 ‘상황’이나 ‘환경’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뻐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무엇에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에 우리 기쁨(행복)의 근거가 있습니다.

더욱이 《필립비서》에서 바울로가 강조하는 기쁨은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만이 아니라 순교를 포함하는 기쁨입니다(필립 1:18,20).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이처럼 바울로는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일”이 모든 불화와 분열의 치유제임을 그들에게 교훈합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산다면 그의 권면이 진실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관용, 관대함, 온화한 태도, 부드러움, 인내)을 보이라”라고 명령합니다(5절). 이유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주님께서 우리 가까이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다투지’ 않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복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어 모든 일을 심판하시고 바로 잡으실 것이기에 때문입니다.

또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6절).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로는 살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기도 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말하면 ‘걱정’은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걱정’하느라 ‘불신앙의 자리’에 빠져들지 말고 오히려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명령합니다. ‘기도’가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마음의 소통’을 말한다면, ‘간구’는 아이처럼 ‘삶의 필요’에 대해 하느님께 직접 ‘요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일을 기도 제목(소원)으로 삼아도 좋다”라고 명백히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관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무엇을 요청할지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당신께서 우리 삶에 하시려는 일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더욱이 모든 ‘살아있는 기도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함께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확신 속에서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 속에서든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버리고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기도 생활’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 필립 4:7

‘평화의 약속’입니다. 그 평화는 모든 사람의 ‘이해력’(이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세상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력마저도 초월합니다. 그 평화는 사람이 명상이나 수행으로 만들어내거나 터득하는 경지가 아닙니다. 세상의 평화처럼 일시적이지도 않습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평화입니다. 그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고대로부터 지정의(知情意)가 자리한다고 믿은 내적 공간]과 생각(내적 공간인 마음에서 나오는 지혜와 판단)을 강력한 군대처럼, 굳건한 ‘요새’(城)처럼 지켜 주실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로는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할 8가지 덕목들”을 그들에게 당부합니다(8절). 마음을 ‘성찰’하라는 당부입니다. 참된 것, 고상한 것,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영예로운 것, 덕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들입니다. 이 8가지 덕목들은 ‘하느님의 평화’가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때 우리에게서 맺어지는 열매라고 바울로는 가르치는 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자, 하느님 나라의 가치라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성찰’합니다. 지금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삽니까? 마음을 어디에다 두고 삽니까? 지금 내 마음자리는 어떻습니까? 마음을 성찰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마음속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5:18-19). 우리는 이 8가지 덕목들을 마음에 품고 ‘실천’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성찰과 실천은 양 날개처럼 균형을 이루며 같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도 “실행하라”라고 명령하는 일로 자신의 권면을 마감합니다(9절). 그는 필립비 교우들에게 “나를 본받으십시오”(필립 3:17)라고 이미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의 권면이 부럽습니다. 과연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듯이 여러분은 나를 따르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의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평화의 하느님’께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는 ‘실천’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하늘나라’를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일에 비유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한 잔치구나’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랑 같습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전반부(1-10절)는 임금의 잔치 초대를 거절한 이들에 대한 ‘참혹한 심판’입니다. 초청받은 손님들이 한 사람도 오지 않은 임금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임금’이 잔치 초대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초청받은 이들도 ‘격’(格)이 높은 귀족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종들을 보내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종들’을 학대하고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처형하고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 ‘참혹한 심판’이 ‘출처’(원자료)가 같은 것으로 보이는 《루가복음》의 ‘큰 잔치 비유’(루가 14:15-24)와 대조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마태오’에서는 ‘심판’이 강조되는 반면 ‘루가’에서는 ‘하느님의 은혜로운 초청’이 강조됩니다. 참혹한 심판 후에 임금은 ‘아무나’(외부인들) 초청해 자리를 채우게 합니다. 여전히 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잔칫상과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는(11-13절) ‘혼인 잔치 자리’를 가득 채운 ‘외부인들’(아무나)과 임금의 만남 이야기입니다. ‘자격 없던 외부인들’이 귀빈처럼 손님으로 참여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때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옵니다. 임금이 손님을 위해 제공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눈에 띕니다. 임금은 그를 ‘책망’하면서 ‘추방과 징벌’을 명합니다. ‘참혹한 심판’입니다. 이 역시 《루가복음》에 없는 부분입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와 차이를 보이는 이런 이야기들에 각각의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는 ‘신학(신앙)적 입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이상하게만 보이는 ‘혼인 잔치 비유’의 큰 ‘취지’(대의)만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역사의 종말’에 메시아가 오시어 잔치를 베푸신다는 믿음, 즉 ‘메시아 잔치’에 대한 ‘예언’(大望)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비유는 그 예언의 성취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들에 대한 ‘종말론적인 심판’을 전해줍니다. 그런 종말론적인 측면뿐 아니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추방과 징벌’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마태오 공동체’ 교우들의 ‘신앙생활 실태’와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는 동안 ‘궁금증’이 많이 생깁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임금의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거절하다가 ‘참혹한 심판을 당한 그들’은 누구입니까? 심부름 간 ‘종들’은 누구입니까? 나중에 잔치에 초대된 ‘외부인들’(아무나)은 누구입니까? 임금이 제공하는 입어야 할 ‘예복’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복’을 입지 않아서 ‘추방과 징벌을 받은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명령하는 ‘임금’은 누구입니까? ‘혼인 잔치’인데 정작,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어째서 안 보입니까? 이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교회와 우리 자신과는 이 비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많은 ‘질문’과 이야기 속에 뭔가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답’하고 함의된 ‘의미’를 찾기에 앞서 비유가 어떤 배경에서 발설된 것인지부터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비유가 발설된 상황입니다. 마태오는 이 비유를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성주간), 즉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유대 지도자들과의 논쟁 중에 발설하신 것으로 편집해 놓았습니다. 이 장면이 ‘출처’(원자료)가 같은 것으로 보이는 《루가복음》의 ‘큰 잔치 비유’(루가 14:15-24)와 대조해 볼 때 명확히 다른 점입니다. ‘잔치’라는 말의 ‘상징’이 갖는 ‘기쁨’이 무색하게 어떤 ‘비장함’이 묻어납니다. 마침내 결판을 내겠다는 예수님의 단단한 의지가 묻어납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당일 ‘성전 정화사건’과 ‘메시아적 행보’를 벌이십니다(마태 21:12-17). 그날 성전 뜰 안에서 행한 예수님의 치유 기적은 구약에 약속된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다는 표시이고, 아이들이 외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구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바이사이파 출신)은 그런 아이들을 향해 ‘화’를 냅니다. 예수께서 벌이신 ‘성전 정화사건’과 ‘메시아적 행보’을 못마땅해 여겼다는 뜻입니다. 다음날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와 가르치고 계실 때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서 그런 일(성전 정화사건과 메시아적 행보)을 하느냐?”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이 종교적으로 예루살렘 중심의 현 체제를 부정한 사건이라면, 메시아적 행보는 정치적으로 반로마적인 행보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서 발설하신 ‘일련의 비유들’이 지난 두 주일 이래 오늘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 ‘포도원을 차지하려던 사악한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6)에 숨겨져 있는 ‘함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비유들은 명백히 ‘유대 지배계급인 지도자들’(대사제들, 원로들)과 ‘지식인들’(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그 좋은 ‘하느님 나라’에 스스로 옳은 체하면서 반응하지 않던 그 ‘특권층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그 좋은 ‘하느님의 나라’가 실패한 지도력인 유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초대에 응답한 이들, 하느님의 뜻에 ‘순종’(도조, 열매 맺는 삶, 사랑)하는 이들(세리와 창녀 같은 공동체 외부자들과 가난한 천민들, 이방인들)에게 그 좋은 ‘하느님 나라’(포도원)가 주어질 것이라는 ‘함의’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보이신 ‘파격적인 행보’와 ‘가르침’이 자비하신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보여주는 행동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군중들이 놀랐다고 보도합니다(마태 7:28-29). 율법학자들(바리사이파 출신)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새로운 율법 해석이었다는 뜻입니다. 또 공동체로부터 거절당한 사람들을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 공동체’로 받아들였다고 보도합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직업상의 죄인들(세리), 윤리상의 죄인들(성매매)과 어울려 식사하시곤 했습니다(마태 9:10; 11:19). 그 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입니다.

유대 사회 지도자로 행세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비난’하곤 했습니다(마태 9:3,11,34; 10:25; 12:24). 자신들의 가르침과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를 오래전부터 ‘눈엣가시’로 여겼고, ‘없애버릴’ 방도까지 모의하였습니다(마태 12:14). 예수께서는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위선자들’(마태 15:7; 22:18; 23장), ‘눈먼 길잡이’(마태 15:14), ‘눈먼 인도자들’(마태 23장), ‘뱀 같은 자들, 독사의 족속들’(마태 23:33)이라고 추상(秋霜)같이 비판하고 단죄하셨습니다.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없애버릴 기회를 찾던 그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성전 정화사건’과 ‘메시아적 행보’(반로마적인 행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 중심의 현 체제를 부정하고, 정치적으로는 반로마적인 행보)을 하느냐?”라고 따져 묻습니다. 그들의 물음을 되치기하며 발설하신 ‘일련의 비유들’ 속에 ‘혼인 잔치’ 비유도 자리합니다.

결국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초대를 거절한 유대 지배계급인 지도자들(대사제들, 원로들)과 지식인들(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한통속이 됩니다. ‘사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처럼, 예수께 ‘신성모독’과 ‘국사범’이라는 ‘죄목’을 걸어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예수께서 발설하신 그 일련의 비유 내용대로 하나씩 차례로 성취되었으니 비유의 전체 내용도 진실임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실패한 지도력과 패역한 백성들’(유대인들)을 떠났고, ‘하느님 나라 초대에 응답’한 외부자들, 즉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새 민족’(교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비유 연구자들은 《마태오복음》 기자가 전승에서 물려받은 ‘원자료’(출처)를 자신의 ‘구원사의 시점’에 부합하도록 ‘우화’(allegory)로 바꾸어 기록하고 편집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옮겨가게 된 이유를 담아내기 위해 전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비유를 ‘우화’로 바꾸었다는 주장입니다. 한마디로 “마태오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된 비유가 혼인 잔치 비유”라는 주장입니다. 참고로 ‘우화’(allegory)는 어떤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사물에 의해서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그와 유사한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하는 소통의 기술입니다.

그러면 “마태오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되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마태오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몇 년 전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합니다. 그 역사적 사건이란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파괴’입니다. 그 사건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둘째 아들, 사악한 소작인들,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도를 포기하고, 오로지 ‘이방인들’(큰 아들, 다른 소작인들, 나중에 초대된 외부인들)만을 상대로 전도하게 됩니다. 마태오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오늘 복음이야기 전반부(1-10절)에 ‘우화’로 담아 편집했다는 주장이 정설입니다.

궁금증으로 제기된 여러 질문에 대답하고 함의된 의미를 찾기 위해 ‘전반부’(1-10절)부터 한 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 ‘임금’(하느님)이 자기 ‘아들(예수님)의 혼인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는 ‘함의’입니다. 예언자 ‘이사야’에 따르면 온 세상의 임금이신 하느님은 ‘최후의 날’에 모든 민족을 큰 잔치에 초대하십니다(이사 25:6-9). 한마디로 이사야는 ‘(혼인) 잔치’의 상징을 통해 최후의 날에 있을 ‘구원의 때’를 예고합니다. 마태오에 따르면 바야흐로 그 ‘구원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비유 속에 ‘함의’된 의미입니다.

초청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습니다(3절). 오래전부터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장차 올 구원에 대비하여 준비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초청받은 손님들(특히 유대 사회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임금의 거듭된 초청에도 불구하고 거절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오기를 거절하면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4-6절). 언뜻 듣기에 나름대로 이유 있어 보이는 거절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임금의 초대보다 ‘자신들의 일(이윤)들을 우선’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예언자)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은 임금을 ‘무시’하는 처사를 넘어 ‘반역’입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풀어 응징합니다(7절). 이 응징이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파괴라는 ‘암시’입니다.

이처럼 마태오는 멀게는 ‘하느님 나라 초대’를 거절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 가깝게는 그리스도교 전도자들(스테파노, 야고보, 베드로, 바울로)의 복음 전도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행하신 일(마태 23:7절, 참고 21:40-41)이 ‘예루살렘 성전 파괴였다’라고 자기 공동체에 들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큰 충돌 없이 지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각 지역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여서 예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이미 오신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교의 차이점이 점차 명백히 드러나면서 긴장과 갈등이 형성됐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멀어지게 된 계기는 위에서 말씀드린, 주후 66-70년 있었던 ‘1차 유대 독립전쟁’입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은 항쟁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피난하였습니다(마태 24:15-16). 결국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겁하게 도망쳤다며 비난하고 증오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해 갔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오늘 ‘혼인 잔치 비유’에 녹아 있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아무나’(외부인들)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는 임금의 명령입니다.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초청해 오라고 명령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보편적인 초청’,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상의 은총’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왕궁(하느님 나라, 혼인 잔치)에 들어 올 자격 없던 사람들이 기회를 얻습니다. 우선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입니다. 공동체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세리나 창녀까지 포함하여 유대 사회 특권층들로부터 ‘죄인’으로 정죄 된 사람들입니다.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옵니다. 임금(하느님)의 명령처럼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나 ‘자격’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자비하신 하느님(임금)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자격 없던 사람들을 ‘초청받은 손님의 위치’로 격상시킵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결별하고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벌였다는 ‘암시’입니다(8-10절). 물론, 이 암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대사명’(지상명령, 至上命令)으로 공식화될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 마태 28:18-20

이 ‘지상명령’처럼 사도들의 사명 수행을 통해 ‘초대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본래 죄인인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거룩한 식탁에 앉는 귀한 손님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교회 안에 뒤섞여 있게 되었습니다(10절). ‘성’(聖)과 ‘속’(俗)의 뒤섞임, 그것이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실태’였음을 보여주는 ‘암시’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는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말씀의 정신을 깨닫고 충실히 신앙생활 하는 ‘알곡들’(예복을 입은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과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신자들을 이용하며 상처 주는 ‘가라지들’(예복을 입지 않은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성속(聖俗)의 뒤섞임’이 그때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일반화이겠습니까? 타종교는 왜 비판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한국 그리스도교에는 없다는 경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같은 ‘혼합공동체’라는 통찰은 이미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 기록한 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태 13:3-9,18-23),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36-43)입니다.

후반부(11-14절)는 임금이 잔치에서 손님들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모든 교우에게 ‘종말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라는 엄중한 ‘경고’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비유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담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반부에서 보았듯이 하느님 나라 공동체라는 ‘교회’ 안에는 윤리적(도덕적)으로 ‘좋은’(선한) 사람들과 ‘나쁜’(악한) 사람들이 섞여 있습니다. 진짜와 가짜 그리스도인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임금이 오시면 ‘나쁜, 가짜 그리스도인’은 추방과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보편적인 은총, 즉 구원 잔치의 초청에 응답했지만 ‘입어야 할 예복’(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 말입니다.

본문에 ‘예복’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는 ‘엔듀마’(ἔνδυμα)입니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옷’(apparel, garment, raiment)이라는 뜻입니다(마태 3:4; 6:25,28; 28:3). 여기서는 ‘특정한 종류의 겉옷’(clothing, the outer robe)이라는 뜻으로 ‘예복’으로 번역했습니다. 본래는 ‘자격’이 없었으나 무상으로 초청받아 잔치에 참여하는 귀한 손님이 된 이가 입고 있어야 할 그 ‘예복’(겉옷)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궁금해하는 그 ‘예복’에 대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옷’을 입고 삽니다. 몸이 커갈수록 ‘옷’을 바꾸어 입고, 간혹 특별한 자리에 갈 때는 좀 더 멋진 ‘겉옷’을 차려입기도 합니다. 또 군인이나 경찰, 소방관처럼 특수 업무 종사자들은 그에 맞는 ‘특정한 복장’을 갖춥니다. 이런 ‘물질적인 옷’ 말고도 우리가 평생토록 입고 사는 특별한 ‘정신적인 옷’도 있습니다. 그 옷을 ‘가치관’이나 ‘세계관’ 또는 ‘신념’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옷’을 복음 이야기 ‘낱말’로 표현하자면 ‘예복’입니다.

어떤 분은 한 번 입은 그 ‘정신적인 옷’을 평생 입고 삽니다. 어떤 분은 ‘지혜’가 자라면서 ‘새 옷’으로 갈아입거나 ‘수선’해 입기도 합니다. 누가 강제로 입혀준 것이 아니기에 언제든 벗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결단)해서 더 나은 ‘가치관의 옷’으로 ‘교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류가 입고 있어야 할 보다 ‘보편적인 옷’, 즉 지혜가 자랄수록 입고 있어야 할 ‘보편타당한 가치관의 옷’은 무엇입니까? 인류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어느 때든, 어느 자리든 입고 있어야 할 그 옷은 무엇입니까? 어떤 옷이 기후 위기에 봉착한 인류를 파멸로부터 지키고, 지구라는 행성에서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까? ‘생태 위기’가 초래한 ‘식량 위기’를 사는 우리입니다. 더욱이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환란 속을 사는 우리입니다. 한 사람의 ‘종교인’으로서 점점 깊은 고민을 하게 하는 요즘입니다.

사실, 종교는 그 ‘정신적인 옷의 원천’이고, 역사마다 그 옷을 ‘재생산’해 왔습니다. 유교를 따르는 이들은 ‘공자의 옷’, 불교를 따르는 이들은 ‘붓다의 옷’,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이들은 ‘예수라는 옷’을 입습니다. 다른 말로는 ‘양심’이라는 옷, ‘자비’라는 옷, ‘사랑’이라는 옷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힌두교나 자이나교도 각자의 ‘옷’이 있습니다. ‘생명’, ‘비폭력’, ‘평화’, ‘공감’, 그리고 ‘삶의 신성함’이라는 ‘옷’입니다. 그 ‘정신적인 옷’을 쉬운 말로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절대로 남에게 시키지 말라)을 가르칩니다. ‘유대교’ 랍비 힐렐은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은 타인에게도 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힌두교’는 “모든 창조물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마치 자신에게 하듯 그들에게 하라”라고 가르칩니다. ‘자이나교’는 “수도자는 모든 존재를 자신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대로 대우해야 한다”라고 가르칩니다. ‘붓다’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것이니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께서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고 가르칩니다. ‘이슬람교’ 코란은 “나를 위하는 만큼 남을 위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라고 가르칩니다.

고요히 성찰해 보면, 각 종교의 ‘황금률’(黃金律)은 일맥상통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로 삼을만합니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인 옷’입니다. 물론, 철학자나 비종교인들도 각자 자기 나름의 ‘황금률’을 주장했고, 지금도 그 옷을 입고 삽니다.

어떤 옷이 자신에게 잘 맞는지는 ‘머리’가 커나갈수록 각자가 ‘사고’하고 ‘선택’할 일입니다. 타문화권과의 접촉이 어렵던 고대에는 다른 선택지를 갖지 못한 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과 ‘종교의 옷’을 자연스럽게 입고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타문화권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살아갈지 폭넓게 사고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전처럼 ‘자녀들’에게 자기가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부모가 입은 그 옷을 자식들도 ‘입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부모부터 잘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현명하게도 각각의 종교는 신도들이 ‘황금률의 옷’을 입고 잘 걸어가도록 안내합니다. 자신이 입은 그 옷이 얼마나 ‘품위’ 있고 ‘가치’ 있는지, 그리고 오염된 옷을 ‘세탁’하거나 ‘수선’하게 하게 하는 정기적인 ‘예식’(예불, 예배, 미사)을 봉헌합니다. 성직자(목사, 신부)나 수도자들(수사, 수녀, 스님)은 신자 ‘스스로’ 선택해서 입은 그 ‘옷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점검하여, 인생길을 잘 걸어가도록 일종의 ‘강론’(설교)이나 ‘설법’도 하고 ‘행실’로 본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가장 잘살고 있어야 할 이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성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성찬례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하늘 잔치’라고 말합니다. 이 ‘하늘 잔치의 초대’에 응답해 참여한 우리는 성찬례 전체를 통해서 자신이 입은 ‘옷’을 점검합니다. 어떤 분은 그 옷을 잘 세탁하거나 수선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성찬례 전체를 통해서 제공되는 ‘옷’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세탁하려 하지도 않고, 수선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하늘 잔치’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입은 옷이 ‘하늘 잔치’에 어울립니까? 우리의 ‘가치관’이 ‘하느님 나라’에 ‘부합’합니까? 정말 이 시간과 공간에 어울리는 옷입니까?

시간과 공간에 어울리는 ‘옷’과 관련하여 지난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겪은 경험을 하나 말씀드립니다.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을 방문했습니다. 아브라함(사라), 이사악(리브가), 야곱(레아) 부부의 묘가 있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긴장이 있는 곳입니다. 먼저 유대인이 추모하고 기도할 수 있는 구역인 회당, 즉 아브라함과 사라 묘지의 절반이 보이는 복도(유대인과 아랍인의 분쟁으로 묘지를 서로 반반씩만 볼 수 있습니다)와 야곱과 레아 묘가 있는 큰 방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 구역을 나와 이슬람교 신자들(아랍인들)이 추모하고 기도할 수 있는 구역인 회당, 즉 아브라함과 사라 묘지의 절반이 보이고 이사악과 리브가의 묘가 있는 큰 방을 방문하기 위해 밖으로 나와 이동하였습니다.

긴 계단을 올라가 아랍인들이 추모하는 구역으로 들어가는 실내 입구에서 가이드가 잠깐 멈추어 세웠습니다. 건물 ‘입구’에는 ‘모자가 달린 망토 비슷한 하늘색 옷’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일종의 ‘차도르’(이슬람 여성의 전통의상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만 내놓는 검정색 옷)였습니다. 복음 이야기와 연결 짓자면 ‘예복’입니다. ‘여성’들은 모두 ‘그 옷’을 입어야 실내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마치 비유대인 남성이 유대인들의 ‘성소’(예루살렘 통곡의 벽이나 홀로코스트 추모관)를 방문하려면 반드시 머리에 ‘키파’(Kippah)를 써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의무’이기에 방문한 유대인의 ‘성소’ 입구에는 외국인 남성 관광객들을 위한 ‘키파’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랍인 구역 건물 회당 실내로 들어가니 외국에서 온 여성 관광객들은 모두 ‘차도르’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복음 이야기에 나오는 ‘예복’도 그런 식으로 ‘잔치 입구’에 비치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차도르’ 모양의 옷을 입지 않은 여성의 회당 내부 입장이 불가하듯이, 그리고 남성들이 ‘키파’를 쓰지 않으면 유대인 성소 입장이 불가하듯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면 임금이 입구에 비치해 놓은 그 ‘예복’을 반드시 입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복 입기를 거부한 사람은 자격 없던 자신을 초청하고, 고귀한 손님으로 격상시켜 준 임금의 위엄과 명예를 손상했다는 뜻입니다.

교회사에도 복음 이야기의 ‘예복’에 대답하려는 여러 설교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부’였던 ‘터툴리안’은 ‘육신의 거룩함’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금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로를 따라 ‘사랑’이라고 대답했습니다(1고린 13; 1디모 1:5). 멋진 해석들입니다. 특히 ‘어거스틴’의 해석이 지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입고 있어야 할 옷은 당연히 ‘사랑’(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사도 바울로는 이 ‘예복’(옷)을 무엇이라고 가르쳤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 갈라 3:27

이처럼 사도 바울로는 ‘예복’(옷)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죽음과 악마를 이기셨습니다. 은혜로우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승리에 우리를 연합시키셨습니다(로마 6:3-11).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승리가 우리에게 옷처럼 입혀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세례로 그리스도를 옷 입었습니다. 믿음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동참시킵니다. 믿음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옷’이 우리에게 전가되게 합니다. 믿음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옷처럼 덮게 합니다. ‘루터’가 좋아하는 ‘이신칭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사도 바울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할 의무(실천)가 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그 옷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옷이 자기 몸에 맞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에다 그리스도라는 옷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옷에다 내 몸을 맞추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옷에 몸이 맞지 않은데 입고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거추장스럽기만 하겠지요.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몸에 맞는 옷처럼 입으려면, 우리의 영적 몸이 성장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처럼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복’ 이야기를 언급한 《마태오복음》 기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 역시 ‘예복’에 관심이 참 많았습니다. 어떤 ‘예복’일까요? 복음서 중에서 마태오는 유독 ‘실천’(참여)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 마태 7:21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 마태 7:24-27

또 ‘최후심판’ 이야기에서도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기준이라고 강조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 25:40

‘마태오’는 ‘아버지의 뜻’을 실제적으로 ‘실천함’(실행), 산상수훈을 실천함, 사랑과 자비를 실천함이 우리의 ‘예복’이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에 ‘완전히 참여하는 삶’입니다. 이 외에도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서 ‘실천(행함)이 예복’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은 ‘주님, 주님!’ 부르기만 하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입니다. 참여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예복을 입지 않아서 내쫓긴 사람처럼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종말 심판 때’에 ‘단죄’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역시 오늘 서신 마지막에서 하느님 나라에 맞는 ‘옷’을 권면한 바 있습니다. 기쁨, 너그러움, 감사, 참된 것(진리), 고상한 것(거룩함), 옳은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영예로운 것, 덕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높은 도덕성)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필립 4:8). 그런 다음 마태오처럼 ‘실천’(참여)이야말로 참된 ‘예복’임을 강조합니다(필립 4:9). 그 ‘실천’을 통해 우리는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존재들임을 증언합니다.

이처럼 ‘예복을 입고 있다’라는 함의는 ‘믿음의 세례와 진정한 회개와 말씀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부합된 삶(가치관)을 지금 살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이익과 안전’을 우선하던 삶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삶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변화된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초대해 주신 은총의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구원을 사모했던 세리와 죄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부합된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비참한 운명을 미래에 맞을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마태오는 비유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 마태 22:14

교회 안에 들어 온 모든 신자에게 ‘자만심’에 도취하지 말고 ‘자신을 살피라’라는 경고입니다. 어쩌면 진짜 그리스도인보다 가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탄식인지도 모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혼인 잔치’인데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좀 이상했을 것입니다. 사실, 비유가 말하려는 요점은 거기에 있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진짜 요점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미 우리 서로는 임금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혼인으로 태어난 ‘자녀’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과 한 가족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친교 상통하는 한 몸입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시켜 ‘기쁨’과 ‘감사’와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 초대는 무상의 은총이고 보편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소중한 줄 알아서 이미 응답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초대에 ‘믿음의 세례’(회개)로 이미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오실 주님을 기억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맞게 마음이 변화되고 인격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초대에 별 관심이 없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 때문입니다. 교회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올바로 반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쁨’과 ‘감사’와 ‘평화’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사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깨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되고,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회가 변화되는 일에 헌신해야 하고, 창조 세계의 보존과 지구 생명의 회복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 ‘실천’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무한한 은총에 바르게 응답하는 삶이고 예복을 입은 삶입니다. 임금이신 하느님의 가족이라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모세가 그렇게 자기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실천한 인물이고, 사도 바울로가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그렇게 헌신하고 실천한 인물입니다. 오늘 모세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 앞에서 계약을 ‘기억’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시대도 모세 같은 기도의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시인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에게 계약에 신실하신 하느님을 기억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바울로도 주님의 재림을 기억하면서 기쁨과 감사와 평화 속에서 한마음으로 복음 선교를 위해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복음 이야기도 우리가 이미 받은 부르심의 은총과 입어야 할 ‘예복’을 기억시킵니다.

오늘도 성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늘 잔치’인, 구원의 성찬례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임금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들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혼인 잔치를 시작하셨습니다. 믿음의세례로써 우리에게 ‘그리스도의의 의의 옷’(구원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전례독서>를 통해 ‘성경’이 무엇을 참되다, 고상하다 가르치는지, 어떤 일을 옳은 일, 순결한 일이라고 가르치는지 잘 배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을 사랑하셨고, 어떤 일을 명예롭게 여기셨는지 잘 듣는 일은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무엇을 양심에 맞는 일이라고 가르쳤고, 어떤 삶의 태도를 칭찬했는지를 잘 배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태오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실천’입니다. 실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먼저 베푸신 이 무한한 은총에 바르게 응답하는 삶이고 예복을 입은 삶입니다. 사실, ‘실천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비유 결어(結語)처럼 ‘뽑힌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우기만 하고,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가짜 그리스도인이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기 위해 ‘실천’하는 은총을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실천’이 우리가 입고 있어야 할 ‘예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천’이 언젠가 하느님이 베푸실 어린 양의 영원한 혼인 잔치에 앉아 있는 우리 서로를 발견하게 할 것입니다. 모세처럼, 바울로처럼 민족과 교회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받은 우리입니다. 날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녀임을 증명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초대를 ‘기도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완성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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