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4. 연중27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20:1-4,7-20
  • 시편 – 19
  • 독서 – 필립 3:4하-14
  • 복음서 – 마태 21:33-46

연중 27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그리스도인, 창조주 하느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돌보는 신실한 청지기들’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인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열 마디 말씀들’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 출애 20:2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선물하시면서 ‘이집트 종살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십계명은 ‘자유를 위한’ 선물입니다. 이스라엘(영적인 의미에서 새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도록 주신 선물이라는 천명(闡明)입니다. 그렇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분은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 ‘법’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지키면 ‘자유’를 얻을 것이지만, 어기면 불행해질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십계명의 1, 2계명과 9, 10계명의 분류를 놓고 교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에 근거해 다른 교파를 공격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우리 《성공회기도서》에 실린 ‘표준 십계명’은 이렇습니다.

  1.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2.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3.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4. 주님의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못한다.
  7. 간음하지 못한다.
  8. 도둑질하지 못한다.
  9.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10.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못한다.

십계명은 크게 둘로 그 내용이 나뉩니다. 하느님을 향한 의무인 1~4계명, 이웃을 향한 의무인 5~10계명입니다. 《성공회기도서》는 ‘의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각 계명에 담긴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교단의 ‘공식(公式) 해석’이기에 성공회 신자는 유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문20) 하느님을 향한 우리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는 일로써 다음 네 가지가 있습니다.

  1.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1계명)
  2.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2계명)
  3. 생각과 말과 행실로 하느님을 존경해야 합니다.(3계명)
  4. 하느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길(뜻)을 배우는(연구하는 일정한) 시간을 따로 정해 두어야 합니다.(4계명)

문21) 우리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답)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는 다음 여섯 가지입니다.

  1. 우리 부모와 가족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도우며, ‘공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5계명)
  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존중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기도하며, 악의와 편견과 증오를 마음속에 품지 말고,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 다정해야 합니다.(6계명)
  3. 우리의 모든 육체적 욕망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써야 합니다.(7계명)
  4. 모든 거래에 있어 정직하고 공정하며, 모든 사람을 위해 정의와 자유와 생명을 살리는 일을 추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하느님께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재능과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8계명)
  5. 진실에 침묵하여 다른 사람을 잘못 이끌지 않도록(誤導하지 않도록)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9계명)
  6. 시기와 탐욕과 질투의 유혹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의 재능과 행복을 기뻐하며, 우리를 불러 하느님과 교제하게 하신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10계명)

이것이 《성공회기도서》에 실린 ‘십계명’에 대한 ‘공적인 해석’입니다. ‘십계명의 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산다면 인류는 ‘평화’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원해서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삶의 대격변을 겪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누구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이집트를 탈출했기에 더는 ‘파라오의 백성’(노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착한 도시인’도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살다 보면 우리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새 일터를 찾고 있는 ‘자신’을 ‘누구’라 소개해야 할지 머뭇거립니다. ‘실업자’라고 말하기에는 ‘하고 싶은 일’과 ‘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혼한 자신을 ‘누구’라 소개할지 망설입니다. 맺고 있는 소중한 사회적 관계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사별 후 자신을 ‘누구’라 소개할지 주저합니다. ‘미망인’(未亡人, 아직 따라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서는 어떻습니까? 예전 같으면 쉽게 올라섰을 ‘계단’이지만 점점 차오르는 숨을 어쩔 수 없을 때 당황스럽습니다. ‘노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기에는 아직 ‘피’가 뜨겁기 때문입니다. 친척 중의 한 사람이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가족들에게 부담 줄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일들은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다른 한편 대단한 ‘성취들’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합니다.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듯이 말입니다. 탈출한 이후 자신들이 진정으로 ‘걸어야 할 그 길’을 몰라 헤매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정체성의 혼돈’ 속에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 즉 십계명은 ‘빛’이 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단지 복종해야 할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붙잡아 주는 ‘진리의 닻’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 즉 우리가 누구의 소유이며, 우리 서로는 어떤 관계인지를 명확히 알게 됩니다. 다시 본문의 첫 부분을 떠올려보십시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 출애 20:2

먼저, 하느님은 이 말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영적인 의미에서 새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하느님과 우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서로를 어떻게 존중하고, 관계하며, 창조질서와는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우리를 떠나더라도 하느님만은 함께하십니다. ‘삶의 기준’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례성사’를 되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 생명의 질서를 보존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청지기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선물해 주시면서 이스라엘이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을 깨닫고,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더욱이 떠돌며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이 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열 마디 말씀’을 들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우리는 직업으로, 역할로 정체성을 정의하곤 합니다. 만일 우리의 재능이나, 경력, 역할로 더는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살아오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定義)는 어떻게 달라져 왔습니까? 한때, 우리는 ‘죄와 죽음과 어둠의 나라’에서 종살이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의와 생명과 빛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로 초대되었습니다. 금주간 우리가 처해 있는 삶의 상황, 자리에 근거하여 십계명을 자신의 언어로 해석하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다고 믿는 열 마디 말씀을 기록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인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9편>은 ‘자연’과 ‘율법’이 세상의 주인(창조주)이신 하느님을 계시한다는 찬미입니다.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는(1-6절) ‘자연’ 속에 드러난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성가 260장>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생각납니다. 열거된 만물들, 즉 하늘, 창공, 낮, 밤은 섬길 대상이 아닙니다(2계명).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끊임없이 선포하는 ‘피조물’입니다. 비록 그 선포의 메시지(주파수)가 너무나 커서 귀에 들리진 않지만, ‘자연 자체’가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찬미합니다. 특히 ‘해’를 묘사하는 장면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고대근동 사람들은 ‘해’를 신(神)으로 섬겼습니다. 시인은 ‘해’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는 ‘창조 신학’(신앙)을 고백합니다.

후반부는(7-14절) ‘율법’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합니다. 첫 단락에서 묘사한 자연 자체의 선포, 즉 하느님께서 세상의 ‘창조주’라는 선포는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이들이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율법’(십계명, 말씀, 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줍니다. 이것은 ‘율법’이 하느님의 창조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바람직한 것으로 시인에게 간주 되는 이유입니다.

시인은 기쁨 속에서 ‘율법에 대한 칭송’으로 후반부를 장식합니다. 율법은 완전하고, 진리이기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과 지혜에 이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칭송하는 길은 입술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마감합니다.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시편 19:14

시인은 삶에서 ‘흠’이 없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삶의 목표’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생각과 말과 행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기도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차지하시는 삶’을 성취할 목표로 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하는 중입니까?

<19편>을 묵상하면서 ‘창조세계’와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봅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경탄과 감동은 과학자나 시인들만의 차지인 줄 알고 문을 닫고 지내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말씀’(십계명)의 가치를 발견하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몸으로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초’로 자리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는 ‘운동력’으로 작용하기를 축복합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구원의 주권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있다는 교훈입니다. 저는 이 단락을 묵상할 때면,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성가 332장>이 생각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내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어째서 이 성가를 언급하는지 모르시겠다면 오늘 서신 말씀을 찬찬히 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믿음의 싸움을 계속할 것을 권면한 바 있습니다(1:27-30). ‘그릇된 가르침’을 선포하는 ‘반대자들’(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고, 십자가 없는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유대주의 설교자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복음의 신앙’을 증언하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1:27-28). 심지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고난’을 겪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처럼 여기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1:29-30).

본문을 통해서는 사도 바울로가 ‘반대자들’과 논쟁하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할례’와 ‘율법의 준수’를 통해 이미 ‘구원의 목표점’에 도달했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이들로부터 ‘필립비 교회’가 물들지 않도록 단호한 어조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로는 구원의 ‘주인’(주권)이 오로지 ‘하느님’이라고 교훈합니다.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됨됨이, 즉 자신의 ‘출신 성분’(유대인, 베냐민 지파, 할례), ‘율법의 준수’, ‘쌓아 올린 지식’(교양, 인품)과 같은 ‘자기 의’(義, 옳음)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선물하신 ‘믿음’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라고 교훈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유익했던 것, 자신의 장점과 자랑하고 신뢰했던 모든 것을 ‘장해물’(쓰레기)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느님과 자신 사이를 막았다는 사실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로는 자신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친교)로 이끄는 일은 ‘율법의 성취’에 바탕을 둔 ‘자기 의’(옳음)가 아님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 즉 “하느님의 선물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손을 펴는 믿음에서 오는 의”라는 것을 ‘천명’(闡明)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은혜 안에서 먼저 붙잡아주심에 근거한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구원의 주인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먼저 내미는 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내미시고 붙잡아 주시는 은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반응입니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자기 의’(義)를 내세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달으며,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음으로써 하느님과 ‘완전한 친교’(일치, 올바른 관계)에 이르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는 이 ‘목표’를 향하여, 마치 ‘경기장’에서 ‘승리의 상’을 바라며 달리는 선수처럼, 자신이 ‘지금도’ 열성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다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도상 위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부터’(저 높은 곳에서) 부르신 하느님께서 그의 삶을 ‘영원 안에서 완성하실 때’에 비로소 그 ‘목표’(상)에 도달될 것입니다. 다른 서신에 보면 그는 ‘불멸의 월계관’(1고린 9:22), ‘정의의 월계관’(2디모 4:8)이라는 ‘상’을 사모했습니다. <성가 332장>처럼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있게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까? 혹시 우리가 안심하고 기대고자 하는 소유물, 즉 ‘인간적 됨됨이’나 ‘자기 의’(義)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장해물’(쓰레기)처럼 여길 수 있습니까? 지난 세월 동안 이룬 것(과거)은 다 잊고, 오직 ‘구원의 목표’를 향해 앞에 있는 것(미래)만 보면서, ‘오늘’(현재) 최선을 다해 달려갈 수 있습니까? 내가 되돌아보며 의지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주권(주인)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있음을 겸손히 인정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 바울로가 열망했던 그 ‘상’도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사악한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 복음서 배정은 ‘성주간’에 있었던 이야기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복음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과월절 축제’를 며칠 앞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 사회의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입니다. 특히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산헤드린의 원로들이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유다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들’입니다.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께서는 ‘성전 정화사건’을 벌이셨습니다(마태 21:12-13). 이 사건이 ‘사회의 특권층들’, 즉 종교·정치 지도자들(산헤드린)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던 ‘위선자들’입니다. 종국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를 잡아먹을 ‘이리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맞서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이 있은 다음 날,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유대 사회의 특권층인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그런 일을 벌였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신 대답과 두 아들의 비유에 담긴 의미는 지난 주일에 다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비유에 이어지며, 서로 밀접히 관련됩니다.

 

‘사악한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우화, allegory)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해집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주인의 아들을 죽였다’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입니다.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비유를 예수께서 직접 발설하셨다는 주장도 있고, 교회공동체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고 해석해 예수님 입에 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직접 발설하셨다면,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의 광기에 의해 희생당할 자신의 비극적 죽음을 예고하신 셈입니다. 교회의 말이라면,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잘 모시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입니다.

줄거리를 풀면 이렇습니다. 어떤 ‘지주’(하느님께서)가 ‘포도원’(이스라엘)을 만들었습니다(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울타리’(도둑과 짐승들을 막기 위한 가시덤불)를 둘러치고는 ‘큰 확’을 파고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포도원’을 ‘소작인들’(지도자들)에게 ‘도지’(세)로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포도 철’이 되자 ‘도조’(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요구하면서)를 받아오라고 거듭해서 ‘종들’(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지도자들과 패역한 백성)은 ‘종들’(예언자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며 죽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음모’를 꾸며 아들을 ‘포도원(예루살렘)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습니다. 소작인들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파렴치한 사람들입니다.

궁금증이 생깁니다. 어떤 ‘논리’와 ‘근거’로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남의 포도원을 가로챌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까? 그 대답부터 해보겠습니다. 처음에는 소작인들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부지런한 덕분에 포도 농사가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도조’를 바쳐야 할 철이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도 ‘지주’로부터 소식이 없었습니다. 소작인들은 점차 나태해졌고, 포도원에서 나온 소득으로 그들끼리 잘 먹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달갑지 않은 이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지주가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면서 ‘종들’이 왔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밀린 ‘도조’를 다 받아오라는 전갈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큰일입니다.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지주’가 보낸 ‘종들’인지 확인해보니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도조’를 내는 대신 ‘종들’을 향해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나중에는 ‘지주의 아들’이 포도원에 나타났습니다. 입은 차림새뿐 아니라 행동하는 품위가 틀림없이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면서 ‘지주’에게 변고가 생긴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마디로 ‘포도원 주인’이 죽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서 ‘음모’를 꾸밉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거리였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지주가 ‘상속인’ 없이 죽으면 ‘소작인’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작인들이 보기에 ‘주인의 아들’은 자신들이 차지할 수도 있는 포도원의 ‘장애물’인 셈입니다. 그래서 실행에 옮겼습니다. 대단한 ‘오산’(誤算)이었습니다. ‘지주’는 버젓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처벌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유 이야기를 마치신 후에 듣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 마태 21:40

그들이 대답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 마태 21:41

놀랍게도 그들의 대답은 ‘예언’이었고, 훗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AD 70년(주인이 돌아올 때)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지도자들과 패역한 백성들’(그 소작인들)은 처참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때에 ‘도조’(순종)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 즉 ‘교회’(1베드 2:9)에게 ‘포도원’(하느님 나라)을 맡길 것이라는 예언까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를 ‘거절’한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과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 마태 21:42(시편 118:22)

이 말씀을 들던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아마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서’에 ‘정통하다’라고 자부해 온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서를 진지하게 읽어본 적이 있기는 한 것이냐?’라는 투로 책망하셨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선 ‘모퉁이의 머릿돌’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로 번역한 그리스어 ‘오이코도모스’(οἰκοδόμος)는 ‘집’(house)을 뜻하는 ‘오이코스’(οἶκος)와 ‘건축하다’(to build a house)를 뜻하는 ‘데모’(δέμω)의 합성어인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 집을 세우다)의 명사형입니다. ‘직업’으로는 ‘텍톤’(τέκτων)이라 부릅니다. ‘돌과 나무를 함께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목수’(carpenter)라 번역하기보다 ‘건축가’(건축노동자)라 부르는 것이 낫습니다.

큰 규모의 집이나 건물, 계단이나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우리식으로 말하면 주춧돌, 초석, 모퉁잇돌)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퉁이’란 말이 붙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중심’(머릿돌)이 되는 돌입니다. 건물 전체를 받치는 튼튼한 기초와 기준, 두 벽 사이를 이어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돌들보다 ‘크고 사각형’이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큰 바위’에서 떼어냈는데 작업하다 보면 실수로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모양이 완전하지 않아서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란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기에는 불완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모퉁이 머릿돌이 갖는 ‘문자적’, ‘건축적’ 의미라면 ‘역사적 상징’은 무엇입니까? ‘모퉁이의 머릿돌’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버려진 돌’처럼 한때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며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런 비참한 처지의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방’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그들을 세상에 복을 가져오는 민족(창세 12:2)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에게 약속한 것처럼, 모든 민족 중에서 하느님의 소유인 ‘거룩한 백성’이자 다른 민족을 위해 중재할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출애 19:5-6). 그래서 이스라엘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거나 순례할 때면’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과 자신들에게 부여된 ‘특권적인 역할’을 찬미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부르려고 지어진 대표적인 ‘송축 시’(頌祝 詩)들이 전해집니다.

《시편》에는 ‘할렐’(Hallel, ‘찬양’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묶음(113-118, 136, 146-150편)의 시(詩) 모음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함께 엮었습니다. 그중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구원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한데 엮은 시들이 있습니다. 이 시들을 ‘이집트 할렐시’(찬양시)라 부릅니다. <113편~118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할렐시’들을 ‘과월절 축제 때 의식’의 일부로 사용했습니다. 전반부인 <113-114편>은 식사 전에, 후반부인 <115-118편>은 식사 후에 불렀습니다. 예수께서도 유대인이니 ‘최후만찬’ 자리에서 이 전통을 따르셨습니다. 만찬 후에는 ‘할렐시 후반부’를 부르며 ‘사랑하는 이’의 배신이 기다리는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마태 26:30).

<118편>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비유가 말해지고 있는 그 ‘격렬한’ 본문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 끝에 ‘예루살렘 성전 순례자’들이라면 누구나 기리던 노래인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과월절 축제 의식’을 준수하는 이스라엘 각 가정에서 곧 불리게 될 <118편>을 인용하십니다. 특히 ‘모퉁이의 머릿돌’을 인용하십니다. 이 구절을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위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말씀은 ‘집 짓는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집 짓는 사람들’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은총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은 구원받았다’라고 안심하던 ‘대사제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들은 집 짓는 사람들입니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에 들었던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b)라는 말씀이 다른 문장으로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예상과 상상을 초월한다는 진실을 지금까지 살펴왔습니다. 연중 19주일과 20주일에 낭독한 《창세기》의 한 인물이 이 ‘진실의 증인’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 말입니다. 어린 시절 요셉은 형들로부터 ‘버려져’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은 동생 하나쯤은, ‘버려진 돌’처럼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을 구원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요사이 낭독하고 있는 《출애굽기》의 ‘모세’가 이 ‘진실의 증인’입니다. 모세는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왕골상자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습니다. 이집트 공주가 구출하여 양자로 삼았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자기 동족을 구하려던 행동 때문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버려진 돌’처럼 미디안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기 민족을 해방하는 지도자로 우뚝 섰습니다.

이처럼 이 두 인물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버려진 돌’처럼 가련한 인생이었지만, 나중에는 민족을 구원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인간이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비합니다(시편 139:17).

오늘 서신의 사도 바울로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의 교회를 박해한 ‘죄인 중의 가장 큰 죄인’(魁首)으로 자신을 소개하였습니다(1고린 15:9; 1디모 1:15). 초대교회 교우들은 예수를 배반한 ‘가리옷 사람 유다’보다도 ‘사울’(바울로)을 더 미워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변했습니다(1고린 15:10).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쓰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의 덕입니다.

또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진실임을 증언해야 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예상과 상상을 초월한다는 이 진실의 증인이 되어야 할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더욱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궁극적으로 갖는 구원사의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교회가 그 위에 서게 되는 ‘주춧돌’(모퉁이의 머릿돌, 이사 28:16)이 되셨습니다(마태 21:44; 참고, 이사 8:13-15; 다니 2:34,44-45).

예수의 경고 말씀을 듣던 ‘유대 지도자들’의 머리에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 노래’가 스쳐 갔습니다(이사 5:1-7). 사실 그들은 ‘성서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사건이든 ‘성서’와 연결 지어 말해 줄 수 있는 ‘법 해석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오래도록 백성들로부터 ‘신망과 권위’를 넘겨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가장 먼저 초대’받은 이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의 ‘청지기’로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화의 물결’로부터 이스라엘의 ‘고유문화와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가르침’을 거의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철저함’을 보였습니다. 그런 철저한 태도 덕택에 백성들로부터 ‘율법 해석의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권위’이자 ‘권력’입니다.

최근 ‘조국 사태’와 ‘추미애 장관 사태’에서 보았듯이, ‘법’을 다루는(해석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큰 힘’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법 해석’을 통해 사람들을 ‘무지’로 인한 ‘두려움’과 ‘구속’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방식으로 ‘법 해석’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해석’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바로 세우려는 선한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놓친 ‘치명적인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민의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청지기’로서 자신들이 넘겨받은 ‘신망’과 ‘권위의 힘’을 잘못 사용했습니다. ‘율법 해석’을 통해 ‘자신들의 힘만’을 키웠습니다.

예수의 경고를 통해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 노래’를 떠올리던 그들의 ‘낯빛’이 변했습니다.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터져 나오기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경고의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 마태 21:43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 즉 실패한 지도력인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서 떠났다고 경고하십니다.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 즉 ‘모든 민족으로 이루어진 교회’에게(1베드 2:9) ‘포도원’(하느님 나라)이 주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도조’(賭租)가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문자적으로 ‘도조’는 소작인이 지주에게 ‘세’(貰)를 내기로 동의한 ‘계약사항’입니다. 자신들이 주인에게서 위임받은 ‘포도원’을 통해 ‘이익’과 ‘혜택’을 얻고 있음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소작인들’에게 베풀어진 ‘은총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도조’를 잘 내는 일은 주인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청지기’(소작인)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다 멸망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 즉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차리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포도원’(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전, 율법, 세상, 하느님 나라의 다의적 의미)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서 인류가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원하시는 일을 외면’(불순종)하고, 지나친 ‘탐욕’(이기심)으로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으로 행세하려 들기 때문에 인류의 시간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단지 은총을 입은 ‘청지기’(소작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속히 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인류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지금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이 우리 위에 부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은 항상 이 진실에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 사랑과 은총은 우리에게 고여 있지 않고, 흘러넘쳐서 ‘모든 피조물’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신 사랑과 은총에 우리가 바르게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일이 ‘바른 응답’입니까?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가는 일이 제때에 ‘도조’를 잘 내는 ‘청지기’(소작인)의 삶입니까?

‘성공회 선교정신’을 기억해 보십시오. ‘청지기’인 우리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지구 생명의 회복과 유지에 헌신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입니다.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섬으로써입니다. ‘사랑의 섬김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필요에 응답’함으로써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고 사는 ‘청지기’(소작인), 즉 ‘하느님 자녀의 의무’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자연과 불의한 사회가 만들어낸 사회적 약자를 ‘사랑’과 ‘평화’로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응답해 가는 일입니다. ‘십계명의 정신’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며 평화롭게’ 지내는 일이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지금 어떻습니까? 지구 생명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해마다 겪는 자연재해로 인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게다가 사랑보다는 ‘증오’가, 평화보다는 ‘전쟁의 기운’이, 특히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테러의 위협’이 여전합니다.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공정, 혐오와 차별, 폭력과 대립이 여전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의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대변되는 기득권자들(세계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힘과 영향력을 막강하게 해 놓았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참 주인은 여전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 세워놓은 힘과 영향력보다도 하느님이 더욱 크십니다. 하느님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수치심’에 ‘낯빛’이 몹시도 달라진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사악한 소작인’에 비유하심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을 찾으며 예수를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항이 두려워 뜻대로 못했습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군중이 갖고 있던 ‘예언자’라는 ‘인식’이 예수를 건져냅니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예언자’라는 말 속에서 ‘예수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비유 속에 등장한 ‘희생당한 종들’이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경제, 교육, 사법, 문화, 예술, 종교, 사회 전반이 ‘기득권자들 위주’로 돌아갈 때 ‘그 길은 잘못되었다’라고 외친 ‘시대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기득권자들은 그 길로부터 탈출하라고 외친 ‘시대의 예언자들’을 억압하고 괴롭혔습니다. 자신들보다 ‘세상과 삶의 진실’을 ‘넓고 깊게 보는 예언자들’을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기득권자들이 퍼뜨리는 그런 ‘낙관적 환상’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기만(欺瞞)이라고 쉬지 않고 외쳤지만 외면당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전태일_흉상.JPG

특히 우리 사회 ‘적폐’(積弊)의 근원인 친일행적, 부(富)의 독점과 분배구조의 모순, 독재와 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사상의 자유를 억압해 온 권력가들의 악행을 지적하는 순간, 예언자들은 목숨(사회적 매장)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기구한 팔자’(운명)라면 ‘팔자’(八字)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였다고 제가 말하려던 분들입니다. 지금도 시대를 앞서가는 예언자들의 말은 ‘기득권자들의 감언이설’(유튜브 거짓 뉴스와 일부 대형 언론들의 편향된 뉴스)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시민들에게는 위협적(종북, 좌파)으로 들리기에 ‘배척’을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스스럼없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기록합니다. 사실 예수는 구약의 예언자 전통을 계승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전통을 따라 새 세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고, ‘대안공동체’를 꿈꾸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핍박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포하심으로써 말입니다(루가 6:20-23). 그러나 ‘민중’은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거짓 예언자와 패역한 백성들)은 예수를 ‘국사범’(정치)과 ‘신성모독자’(종교)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워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오늘날도 하느님은 ‘행복의 기준’이 ‘돈’으로 ‘전복’(顚覆)된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런 이들을 알아차리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 자신’인 교회가 지금의 시대를 위해 하느님이 보내신 ‘종들’이고, 하느님이 세우신 ‘예언자’임 알아차리라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은 예수와 그리고 시대의 예언자들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가을빛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세계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한 옛날 하느님께서는 일방적인 은총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창세 12:1-3). 그의 믿음을 통해 세상에 ‘복’(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을 가져오는 ‘선민’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집트 땅에 몸 붙여 살다 ‘종’이 되어 버린 그들을 모세를 보내시어 해방하셨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새로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닫고, ‘약속의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기에 ‘십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다른 민족에게 ‘복’을 ‘중재’할 수 있는 ‘제사장 나라’(출애 19:5-6)로 세워주시기 위해 ‘십계명’(율법)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그들은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경고하시며 깨우쳐주셨어도 그들은 고집스럽게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느님께 버림을 받아 자유를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이 포로생활에서 울부짖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 덕택에 포로에서 귀환한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고 ‘민족의 갱신’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일치와 통일 운동은 실패했고, 그들의 신앙도 게을러지며 ‘형식주의’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그 성전마저도 세월이 흘러 썩을 대로 썩은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 ‘특권적 지위’와 ‘사명’에서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로마 12:30).

그러면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려는 그 위대한 ‘구원 계획’을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순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시켜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메시아)을 약속하시며 ‘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자 그 ‘구원의 계획’(메시아)은 성령을 통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안에서 인류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승천하신 아들을 통해 성령을 보내주시어 이 땅에 ‘새 민족’을 낳으시고, ‘큰 미래’를 열어갈 새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계속해서 현실로 ‘성취’해 나가십니다.

그 구원 계획을 계속해서 성취해 나가는 ‘새 민족’이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교훈하듯이 참으로 ‘교회’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이것이 ‘교회’에게 주신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방인인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베드 2:10).

또한 ‘사도 바울로’가 교훈하듯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방인인 우리, 즉 성령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교회’가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되는 ‘사랑’을 입었습니다(에페 2:19).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 덕택에 이방인인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는 일에 인종과 민족, 성별과 성정체성, 신체조건과 외모, 정치적 지향(이념)과 사회적 신분의 구별과 차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감사성찬례’를 바치며 이 진실을 확인합니다.

이렇게 구원 계획을 위해 항상 ‘먼저 관계를 시작’하시는 분은 늘 ‘성 삼위일체 하느님’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항상 ‘먼저’ 손 내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의 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성취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거저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에서 이것을 강력히 교훈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은 모든 것이 은혜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교회’인 우리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입증하신 것처럼,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만큼, 우리(교회)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처럼, ‘사악(邪惡)하고 무지(無知)한 소작인들’처럼, ‘포도원 주인’에게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았으면서도 ‘불순종’과 ‘이기심’(탐욕)으로 그 은총을 무효화 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무지’했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이기심’(탐욕)이 에덴동산의 혜택을 상실하게 만들었듯이 말입니다. 자기 ‘탐욕’에 깊이 빠져 자비하신 하느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걸음으로써 실상(實狀)은 ‘자신’을 ‘포도원’(하느님 나라)에서 내쫓고 있는 불행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옛 포도원’(예루살렘 성전의 은유로 율법의 가시적인 표현입니다)을 대신하는 ‘하느님의 나라’를 ‘교회’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포도원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지주’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한 노력이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친히’ 다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 나라로 불러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그 일을 위해 ‘교회’를 이 세상의 ‘청지기’로 세워주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으로 세워지는 그 일을 위해 거룩하게 쓰임 받는 ‘산 돌’이 되라고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가는 중입니다.

고요히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청지기)으로서 ‘도조’를 잘 내고 있습니까? ‘성경’은 시대가 바른길을 가도록 외치는 ‘예언자’가 교회인 ‘우리’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상이 두려워하는 ‘예언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도조’가 갖는 은유는 ‘사랑과 평화와 섬김의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열매 맺는 삶’입니다. 물론, 우리는 ‘소작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도조’를 내야 하거나 ‘품삯’을 계산해야 하는 관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새 민족’, ‘하느님의 한 가족’, ‘하느님의 자녀’로서 실천할 ‘사랑과 평화와 섬김의 책무’를 벗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는 책임을 맡은 이들로서 어떻게 사랑과 평화와 섬김의 모범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시편》의 시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에서 생기를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생살이의 깨우침을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마음의 기쁨’을 얻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으로 눈빛이 더욱 맑아졌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그 말씀대로 빚어져 가고 있습니까? ‘창조된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로처럼 이 세상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주권’조차도 하느님께 있음을 진정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은총의 선물로 주어진 능력이나 재능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청지기’라는 마음으로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불의한 사회를 변화시키며,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그 능력과 재능들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처럼, 우리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을 사는 내 기도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늘은 이것들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날마다 행하시는 분입니다. 부디, 그 사랑, 그 은총을 받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구세주 예수처럼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산 돌’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로처럼, ‘뒤’(과거)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미래) 있는 ‘목표’를 향해 ‘오늘’(현재) ‘믿음의 경주’를 온 힘을 다해 잘 달려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바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부터’ 부르신 하느님께서 주실 ‘불멸의 월계관’(1고린 9:22)과 ‘정의의 월계관’(2디모 4:8)이라는 ‘상’을 사모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상’, 하느님 곁에 있는 ‘상’(목표)을 사모했습니다. 그 목표를 향한 ‘길 위’에서 열성을 다하는 우리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 그 상을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기다리던 당신이 다시 오시는 그날,
저희를 저 높은 곳으로 인도하시어
당신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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