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7. 연중26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게 하시어, 우리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7:1-7
  • 시편 – 78:1-4,12-14
  • 독서 – 필립 2:1-13
  • 복음서 – 마태 21:23-32

연중 26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자기비허(비움)의 주님을 따라 사랑과 순종(겸손)으로 이웃을 섬기는 하늘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연중 21주일부터 《출애굽기》를 1독서 말씀으로 낭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은 ‘이집트’로 상징되는 세상 문화의 풍요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는 ‘새로운 여정’이라 했습니다. 연중 29주일까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내가 탈출할 ‘이집트’가 무엇인지, 내가 발견해서 걷고 있어야 ‘약속의 땅’에 이르는 ‘새로운 길’(일)이 무엇인지 찾자고 했습니다. 오늘이 연중 26주일인데 이것들을 찾아내셨습니까?

1독서 《출애굽기》는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온 생명의 물을 마신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은총의 사건이지만 ‘바위에서 터져 나온 물’ 자체보다도 그들의 ‘불평’과 ‘반역’이 더 도드라집니다. 여기서 훗날 그곳 지명을 ‘르비딤’(휴식처)이 아니라 ‘므리바’(다툼)와 ‘마싸아’(시험)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유래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지시’에 ‘충실한’ 모세의 ‘순종’(믿음)과 ‘반역’을 일삼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불신앙)이 대조됩니다.

《출애굽기》를 묵상하다 보면, 수수께끼 같은 점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그들의 광야 여정은 분명 ‘주님의 지시’에 따른 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은 그들이 느끼기에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번번이 ‘불평’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한 코스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주님께서는 좀 더 쉽고 편안한 길로 그들을 인도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주님의 지시’대로 진지를 옮겨가며 광야 길을 전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르비딤’(평야, 원기를 회복하는 휴식처라는 뜻)에 도착합니다. 천막을 치고 ‘식수’를 찾았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큰일입니다. 원래 ‘르비딤’은 ‘휴식처’라는 이름처럼 여러 샘과 개울이 있던 일종의 ‘오아시스’ 지역입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가뭄으로 물이 말라버린 상태였습니다. 분명 ‘주님이 지시’하신 여정인데도 ‘식수’를 구할 수 없다는 점은 그들에게 ‘시험’ 거리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삶의 인도자’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그 인도의 방식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항상 ‘좋은 환경’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무엇이라 증언합니까? 그 인도하심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낫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는 우리이지만 때로는 ‘문제 상황’이라는 ‘광야’(사막)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광야’임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미성숙한 사람’이 ‘문제 상황’에서 보이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의 대상, 비난과 공격의 대상을 찾았습니다. 모세가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을 집어 들고 모세를 위협하며 먹을 물을 내라고 들이대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빠져있던 환경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잊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자신들을 인도해 주신 주님,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던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망각’은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점입니다. ‘목마름’이라는 ‘문제 상황’에서 ‘주님의 지시’를 기다릴 만큼 인내심도 없었습니다. 성급하게 모세를 몰아세웠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주님을 향한 불충실이자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문제 상황을 단지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문제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눈, 즉 ‘영적인 문제’로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모세 말입니다. 그는 ‘삶의 자리’(문제 상황)를 전혀 다르게 보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느냐? 어찌하여 야훼를 시험하느냐? – 출애 17:2

모세는 그들과 다르게 행동했습니다. 우선 자신을 향한 공격이 부당하다고 ‘항변’(抗辯)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부당한 공격이 자비하신 주님을 향한 ‘반역’임을 경고합니다. 지금까지 인도해 주시고, 함께하신 주님을 ‘기억하자’라고 엄중히 질책합니다. 문제 상황에 성급히 빠져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할 일을 ‘지시’하실 주님의 ‘한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일’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문제 상황’은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충실하게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교육의 자리’라는 ‘통찰’입니다. 불충실과 불신앙으로 반응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기억’하며, 그 상황에서 할 일을 지시하실 주님의 ‘한 말씀’을 충실히 기다리자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문제 상황’이라는 ‘광야’(사막)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모세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문제 상황에 사로잡혀 불평하고 낙담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삶을 인도해 오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에서 할 일을 ‘지시’하실 주님의 ‘한 말씀’을 충실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 문제 상황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깨달음’(배움, 지혜)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 문제 상황이 우리를 ‘성장’으로 이끄시기 위해 주님께서 마련하신 ‘교육과 훈련의 자리’라는 ‘깨달음’(배움, 지혜) 말입니다.

그런 ‘깨달음’(배움, 지혜)이 우리에게 일어나면 ‘문제 상황’을 이전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문제 상황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문제 상황을 대하는 자신이 성장했고, 그만큼 자신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움’(깨달음, 지혜)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더 높은 단계의 삶으로 인도해 가신다는 말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모든 ‘곤경’(고난)은 그 곤경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는 교육의 기회이며, 거기서 ‘배움’(깨달음)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곤경의 자리’에서 옮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배움’(깨달음, 지혜)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런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경고와 질책에 어떻게 행동합니까? 그들은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장 목이 말라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 여정을 걸으며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새로운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자신들을 인도하는 중인지 신뢰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가는 모세에게도 ‘의심의 화살’을 날렸습니다. 그를 따르기로 한 일이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지도자인 모세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실제로 광야 여정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자신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는 결함투성이 지도자를 신뢰하기로 한 것은 아닌가 자책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모세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을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약속하신 땅’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출애 3:8, 4:30). 하지만, 몇 달째 광야를 지나는 중인데도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땅 ‘르비딤’은 ‘휴식처’(원기를 회복하는 땅)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엇도 흐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따라나선 것을 후회합니다. 꿈이 좌절된 상태에 사로잡힙니다.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소리칩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왔느냐? 자식들과 가축들과 함께 목마라 죽게 할 작정이냐? – 출애 17:3b

요즘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 힘들어 죽겠다. 옛날이 좋았어. 다리가 너무나 아파. 발이 다 부르트고 물집이 잡혔어.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푹신한 침대가 그립다. 모세, 당신은 우리가 길을 잃도록 만들었어.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어. 당신은 틀렸어. 우리는 결코,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할 거야. 우리가 겪는 이 불행의 원인은 당신이야.

인간은 어째서 이런 식일까요? 서로 ‘협업’(협동)해서 문제를 헤쳐나가기보다 불평과 원망의 대상, 즉 ‘희생양’ 찾기에 빠른 것일까요? 어째서 인간은 주님의 신실하심과 돌보심을 ‘신뢰’하는 대신,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일까요? 사실, 그들의 불평과 원망, 비난과 공격을 모세가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곳에 물이 없던 것은 모세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모세는 ‘출애굽’을 부추긴 당사자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구제책을 마련해야 한다’라는 논리입니다.

‘해방의 영웅’에서 ‘희생양’으로 전락한 모세가 안쓰럽습니다. 한 번쯤 ‘리더’ 역할을 해 본 분이라면, 모세를 그렇게 바라보는 이 심정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모세를 ‘믿음과 온유(겸손)의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불붙은 떨기를 통해 소명에 응답한 모세는 주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이집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지팡이 하나로 여러 기적을 그 땅에서 행해 보였습니다. 파라오는 ‘민족의 꽃’이라는 ‘맏아들’을 잃은 후에야 마침내 이스라엘을 내보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고된 노역과 오랜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홍해를 건넜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자유의 여정을 모세의 인도로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양식마저도 하늘로부터 공급받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모세는 자신을 ‘과시’(誇示)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과 온유의 사람’, 즉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고, 그것을 충실히 지켜가려는 ‘겸손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세가 지금 상황에서는 몹시 흔들렸습니다. 목숨을 걸고 도우려 했던 그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세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모세의 위대함은 그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는 공동체가 겪는 문제를 가지고 모든 문제 위에 계신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이 백성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 저를 돌로 쳐 죽일 것만 같습니다. – 출애 17:4

그는 ‘한 말씀’ 듣는 일, 즉 ‘기도’가 문제로부터 빠져나오는 ‘문’(門)을 여는 ‘열쇠’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부르시어 사명을 주신 주님께 문제 상황을 맡겨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흔들리는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한 말씀)하십니다.

나일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오너라. -출애 17:5c

먼저 주님은 모세에게 ‘확신’(자신감)을 주기 위해 ‘기억’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기억의 도구는 ‘지팡이’입니다. 본래 그 지팡이는 양 떼를 돌보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지팡이를 사용하였을 때 주님의 능력(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전에 사용하였던 그 지팡이를 들고 오라고 지시하십니다. 이 지시를 듣던 순간 모세는 다시금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며 확신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그 확신은 자기 능력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호렙의 바위 옆에서 네 앞에 나타나리라. – 출애 17:6a

이 약속은 다른 말로 하면 ‘임마누엘’입니다. 그를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출애 3:12a). 사실 ‘임마누엘’은 모세뿐 아니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주님은 광야 여정에서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고, 만나를 통해 아침마다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시는 중이었습니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이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 – 출애 17:6b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그 도움은 ‘호렙(시나이산의 다른 이름)의 바위’를 중심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는 순간, 모세는 주님의 현존과 도우심을 경험할 것입니다(하느님 자신, 시편 78:35). 물이 나올 것이라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그 바위’가 백성들의 ‘목마름’을 적셔 줄 ‘생수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그 바위’는 목마르다는 이유로 모세를 죽이려던 그 불충실한 백성들, 즉 주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의심하던 그들에게 하느님의 임재를 ‘상기’시켜 줄 ‘표지’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지시’가 우리 귀에는 어떻게 들립니까? 죽음의 위협에 처한 그를 도울만한 은혜로운 ‘한 말씀’(지시, 해답)처럼 들립니까? 동시에 불충실과 불신앙에 빠져 ‘반역’하는 그들을 진정시킬 방법처럼 들립니까? ‘나’라면 그 ‘한 말씀’을 ‘믿고, 순종’하겠습니까?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면,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마시게 되리라”라고 하시는데, 과연 그 ‘한 말씀’에 ‘소망’을 걸란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따지기 좋아하는 저는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올 리 있느냐?’고,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약속’이라며 도망쳤을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 출애 17:6c

결국, ‘믿음과 순종의 사람’ 모세 덕택에 이스라엘은 예기치 못했던 풍성한 ‘생수’(은총)를 마십니다. 100% 천연 암반수입니다. 분명 모세가 사용한 ‘그 지팡이’는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 이집트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게 했던 도구였습니다(출애 7:20). 이제는 그 지팡이가 ‘생명의 도구’입니다. 장로들은 이 일의 목격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어 돌보시고 이끄신다는 진실의 증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꼭 ‘필요한 순간’에 모세 앞에 나타나시어 자신의 현존을 보이셨습니다. 풍성한 은총으로 ‘믿음과 순종의 사람’ 모세를 도우셨습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하느님의 온 집안을 위해서 충실하게 일했습니다”(히브 3:2,5). 주님께서는 반역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실, ‘한 사람’의 ‘믿음과 순종’은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생명을 가져옵니다. 공동체가 ‘협업’(협동)하는 일은 소중하지만, 그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서는 일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며 그곳 이름을 붙입니다. ‘므리바’(מְרִיבָה, 다툼, 불화, 논쟁)와 ‘마싸아’(מַסָּה, 시험, 유혹)입니다. 그런 불명예스런 이름보다는 멋진 이름을 붙여야 어울릴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충실’과 ‘불신앙’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는 이름들입니다(신명 6:16; 9:22; 33:8; 시편 78:15-20; 히브 3:8-9). 분명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셨지만(임마누엘), 주님의 현존과 능력을 시험한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기도 때마다 《시편》으로 노래하는 <95편>도 이 불신앙적이고, 불명예스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시편 95:8-9).

1독서 《출애굽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합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으며 살아갑니까? 우리는 ‘므리바’와 ‘마싸아’의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에 있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날마다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 상황을 경험하더라도 삶을 ‘인도’해 오신 신실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할 일을 ‘지시’하실 주님의 ‘한 말씀’을 듣기 위해 고요히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억’은 그 자체로 ‘신앙’이자 ‘충실’이지만, ‘망각’은 그 자체로 ‘불신앙’이며, ‘불충실’입니다. 한마디로 ‘기억’하는 이는 ‘기도’하고 ‘순종’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에 속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공동체라 하더라도 문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미성숙한 교회공동체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실을 ‘망각’하고 불평과 원망의 불길에 휩싸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다시 ‘므리바’와 ‘마싸아’의 광야로 돌아간 셈입니다. 지도자, 즉 사제, 원로, 교회위원을 향해서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날리며 서로를 불태워버립니다.

건강한 교회공동체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자비하게 인도해 오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할 일을 ‘지시’하실 주님의 ‘한 말씀’을 듣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고요히 기다립니다. 함께 ‘고난의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서로 ‘협업’(협동)하고, ‘지혜’를 모읍니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믿고, 주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한 말씀’에 순종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여정에서 이 진실을 배워야 했습니다. 불평과 원망, 비난과 희생양 만들기가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임마누엘’을 믿어야 했습니다. 주님을 ‘기억’하고, ‘신뢰’하며, 충실히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여정으로 미성숙한 공동체를 주님께서 인도해 가신 이유입니다.

이제, 본문을 배정한 가장 중요한 목적을 살필 차례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무엇 때문에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온’ 이 구원사건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바위’(반석)와 ‘그 바위(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 장면을(참고, 민수 20:1-13) 해석하면서 이렇게 교훈합니다.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 1고린 10:4

바울로는 주님의 현존을 드러낸 ‘그 바위’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고린토교회에 해석해 줍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의 영감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분은 바위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바위로 하여금 샘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 시편 114:8
그분은 사막에서 바위를 쪼개시고서 심연처럼 많은 물을 마시게 하고, 반석에서 시냇물을 터뜨리시어 강물처럼 흐르게 해 주셨다. – 시편 78:15-16

시인은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쳤을 때’, 주님께서 그 바위를 ‘못’과 ‘샘’이 되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쳤을 때’, 주님께서 그 바위를 쪼개시어 ‘깊은 샘’에서 솟아오르는 물처럼 모두가 흡족히 마시게 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쳤을 때’, 주님께서 그 반석에서 ‘시냇물’이 솟아오르게 하시어 ‘강’처럼 물이 흐르게 해 주셨다고 노래합니다.

이렇게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친 행동’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시다시피 모세는 ‘율법’을 대표(상징)합니다. 예수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율법학자)들은 ‘모세의 제자’임을 자처했습니다(요한 9:28). 그들이 보기에 나자렛 출신의 예수는 ‘율법을 어긴 자’였습니다(마태 11:19; 12:1-14; 15:1-20; 마르 2:15-17; 5:35-43; 루가 7:11-17; 13:10-17; 14:1-6; 요한 5:1-18). 그릇된 율법해석으로 백성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 ‘산헤드린’에 고발했습니다.

산헤드린의 구성원인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역시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라 자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심문하고, 신성모독자와 국사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빌라도에게 강요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친 것처럼, 율법에 충실하다는 그들이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의 ‘수난’에 앞장섰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친 것처럼, 자신들의 ‘권력’으로 예수의 몸에 ‘상처’를 내는 일에 먼저 일어섰습니다(이사 53:4-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친히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내셨습니다(갈라 3:10-14). 그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요한 19:34). 그러나 그 몸의 상처, 그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는 인류의 ‘죄’를 씻기는 ‘용서의 샘’이 되었습니다. 인류를 ‘죽음’의 권세에서 풀려나게 하는 ‘생명의 샘’이 되었습니다. <성가 416장>처럼, 누구든지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가면, 그 샘에 몸을 적시면, 영원한 도우심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갈망’해 온 ‘영원한 구원의 반석’이시고, ‘영원한 용서의 샘’이시며, ‘영원한 생명의 샘’이십니다. 특히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요한 4:10,13-15). 그 ‘생수’를 마신 사람(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수’ 자체가 마신 사람(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지금 여기서부터 가슴 뛰는 삶, 가치 있는 삶에 투신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 ‘생수’를 마시면 ‘사랑과 용서’가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그 ‘생수’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성령 안의 새 생명)을 상징합니다(요한 7:37-39). 사실,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일보다 우리 마음에서 ‘사랑과 용서’가 솟아 나오는 일이야말로 진정으로 일어나야 할 기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78편>은 ‘아삽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있습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라는 ‘지혜시’입니다. ‘역사를 회고’하는 ‘시’(詩) 중에서 가장 깁니다. 출애굽으로 시작해서 다윗왕의 통치 기간에 이릅니다. 이 ‘시’(詩)가 주는 교훈은 ‘죄악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배반의 역사를 기억하라’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께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배정된 본문은 <78편>에서 발췌했습니다(1-4절, 12-14절). 이 시를 쓰는 안내(1-4절)와 이집트 땅에 내리신 재앙들(12절), 홍해를 건넘(13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14절)에 대한 찬미입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경험했고,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10-42절). 그러나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빨리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잊고’ 변덕을 부립니다. 하느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힙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거듭거듭 시험합니다(18절, 40-41절).

이것은 시인에게 일종의 ‘역사 속 수수께끼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선조들을 그토록 친절하게 인도해 주셨는데도 불평하고 반항함으로써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시인은 지혜의 스승처럼 당부합니다. ‘예배’(성전 제사)에 참여한 ‘공동체’에게 하느님이 친히 행하신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여러 예를 들어 광야의 삶을 ‘상기’시킵니다. 아울러 선조들의 불순종을 ‘상기’시키면서 공동체가 교훈을 얻도록 합니다(7-8절).

이와 연결하여 우리의 예배인 ‘성찬례’를 돌아봅시다. 성찬례는 ‘공동체의 행위’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사건을 경축하는 ‘공동체의 기억’(기념)과 ‘감사의 행위’입니다. ‘창조’가 하느님 백성의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라면, ‘구원’은 ‘기억(기념)의 대상’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성’(교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단독자, 개별자를 넘어 서로 연결된 한 몸(교회, 공동체)임을 발견합니다. 불평과 원망, 비난과 불순종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받는 공동체임을 발견합니다. 그 발견들이 하느님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세상을 향한 선한 의무를 실천하도록 이끕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존의 ‘작은 공동체’(가족과 마을)가 급속히 붕괴하고, ‘더 큰 새 공동체’(국가와 시장)가 그 자리를 대치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작은 공동체가 개인에게 학대를 가할 경우 더 큰 공동체의 개입은 개인의 해방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인간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더 큰 공동체의 ‘해악’(害惡)도 존재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더 큰 공동체는 갈수록 개인을 수단화하고, 부품화하며, 소외시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괴물(국가 권력)로 변한 더 큰 공동체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위기를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소홀히 해 온 기존의 작은 공동체를 그리워합니다.

이런 세대에 교회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개미》나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를 참고하자면, 인류의 희망은 개인의 영특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특히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위대함은 개체나 단독자가 아닌 ‘공동체로 환경에 적응’하며, ‘지식을 축적’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화이론(과학)’의 입장을 참고하자면, 개체의 생존이 아니라 집단의 공존, 즉 공동체성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사피엔스’(sapiens, 라틴어로 똑똑하다는 뜻)’의 지능 때문만이 아니라 ‘언어와 사회성’(공동체성, 협업)의 발달이 가져온 승리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AI)을 이길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의 사회는 개인의 지능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이 한데 어울려 증폭시키는 ‘협동의 힘’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흐름을 간파한 ‘구글’과 같은 회사는 미래에도 살아남는 전략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능력’, 즉 ‘협업의 언어’가 뛰어난 인재를 뽑기 위해 다양한 단계의 면접을 시행합니다. 문제는 ‘구글’만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그런 정신이 정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분명 우리 사회는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키우는 교육이나 문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과 공공선’을 조화시킬 수 있는 ‘시민’의 양성이 시급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시대적 요청을 성찰하면서 우리의 성찬례를 다시금 주목합니다. 성찬례야말로 ‘새 언어’를 배우고, ‘공동체성’을 기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성찬례는 삼위일체(공동체로 하나이신) 하느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그 사랑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며, 하늘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길러 세상 속으로 파송 받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비대면 예배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는 성찬례에 담긴 이런 숭고한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함께 숙고해야 합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교우들의 일치 권면(1-4절), 그리스도 찬가(5-11절),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루라(12-13절)는 교훈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낭독 중인 2독서는 《필립비서》입니다. ‘필립비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2차 전도 여행 때 유럽 대륙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사도 16:9-15). 그만큼 바울로에게 있어서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바울로의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1:5; 4:10-18), 물질로도 여러 번 후원할 만큼 ‘친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4:10-18; 2고린 8:1-5).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의 협력에 ‘감사’하면서(1:3-11)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개인적 상황’을 알립니다(1:12-26). 교우들이 염려할까 봐 자신이 옥에 갇힌 일이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고 안심시킵니다(1:12,14).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믿음의 싸움을 계속할 것을 권면합니다(1:27-30). ‘그릇된 가르침’을 선포하는 ‘반대자들’(할례와 율법 준수를 요구하고, 십자가 없는 복음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유대주의 설교자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복음의 신앙’을 증언하라고 권면합니다(1:27-28). 심지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고난’을 겪더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처럼 여기라고 권면합니다(1:29-30).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성령 안에서의 교제(친교, 애정, 동정)와 격려, 위로를 상기시키는 말로 오늘 본문을 시작합니다(2:1). 그가 이 말로 시작하는 이유는 교회 안에서 싹트기 시작한 ‘불화’(분열의 악습) 때문입니다. 바울로는 교회를 향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바 있습니다(1:15-17). 교회에 생겨난 ‘불화(당파)의 소식’ 때문입니다(4:2-3). 그는 ‘이기적 야심’(경쟁심, 다툼)과 ‘허영’(헛된 자만심)이 교회 ‘불화’(분열)의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2:3-4). ‘마음을 낮추지 않은 이들’로 교회의 ‘일치’와 ‘친교’가 심각히 위협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로는 진정한 영적 교제, 즉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같은 뜻, 한마음이 되어 그 불화를 끝내라고 권면합니다(2:2). 한마디로 ‘사랑’과 ‘겸손’(순종, 섬김)의 마음에 기반을 둔 ‘친교’(일치)가 교회다운 모습이라는 교훈입니다(참고 마태 20:26-28). 무엇보다도 ‘사랑과 겸손’의 ‘궁극적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태도라고 교훈합니다(2:5). 그 교훈을 위해 바울로는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 있던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그리스도교 신조)를 인용합니다(2:6-11). 그 인용을 통해 모든 신자가 ‘섬김의 모범’(모델)으로 삼아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을 들려줍니다. ‘다른 존재를 위해’ 기꺼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시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그리스도 찬가’는 신학적으로도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인간’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 내용은 ‘낮아지심’(6-8절)과 ‘높아지심’(9-11절)의 단계로 나뉩니다. ‘낮아지심’을 좀 어려운 말로 ‘케노시스’(κένωσις)라 합니다. ‘자기비허’(自己卑虛), ‘자기비움’, ‘자기하강’, ‘자기제한’, ‘권리포기’라는 뜻입니다. ‘높아지심’도 좀 어려운 말로 ‘고양’(高揚, elevation), ‘승귀’(昇貴), ‘승영’(昇榮)이라 부릅니다.

먼저 ‘낮아지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과 본질(본성, 신성, 모습)이 같은 분이셨습니다(선재하심, 先在, pre-existence, 요한 1:1-5; 17:5, 히브 1:3). 하지만 ‘동등한 존재’(영광 안에 거주함)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으셨습니다’(권리포기, 자기제한). 신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종의 신분’(형상)을 ‘취하시어’(자기비허, 자기비움, 가난)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육신)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자신과 다른 존재가 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어(겸손, 신성의 ‘감추심’)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최저점’이며(humiliation, 완전한 수치),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최절정의 사건’이었습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어째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비허(자기비움), 권리포기의 길을 걸으셨습니까? 인류를 위한, 정확히는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로마 5:8; 참고 2고린 8:9). 그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자기비허’(자기비움, 권리포기)라는 모든 행동의 진정한 동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교우들에게 이 마음을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서로를 분열시키는 ‘이기적 야심’과 ‘허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말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을 본받으라고 말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초대교회 교우들은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공유했기에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 교훈은 오늘의 우리를 향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비허’(케노시스, 자기비움)는 ‘하느님의 본성’일 뿐 아니라 그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 역시 그 본성에 있어서 ‘케노시스’(자기비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입니다. 이웃 종교의 수도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그 ‘비움’(케노시스)은 자신만을 위한 ‘비움’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다른 존재’를 위한 ‘비움’(섬김)이어야 합니다(마태 20:28).

끝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자기비허(권리포기, 비움, 겸손)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대우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최고로 높이 올리시고(궁극적 고양, ultimate exaltation, 승귀, 부활과 승천) 그 이름을 ‘우주 만물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9-11절). 이처럼 ‘낮아지심’이 종국에는 ‘높아지심의 길’이었습니다. 본래의 하느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자기비움, 케노시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의 순종, 즉 철저한 ‘자기비움’(사랑과 겸손)을 통해 하느님 자신에게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역시 ‘자기비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삶에서 그 길이 없는 신앙은 ‘악’이며, ‘죄’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를 확장’(자기 힘의 추구)하려는 ‘이기적 야심’(경쟁심, 다툼)과 ‘허영’(헛된 자만심)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 아들 예수를 본받기 원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자기비움’을 통해 만물을 자신 안에 창조하셨고, 만물을 지금도 유지하시며, 그 길(사랑과 겸손, 비움과 순종)을 통해 하느님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오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겸손)을 교훈한 후에 바울로는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이라고 다정히 부릅니다.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힘써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라고 권면합니다(12-13절). 특히 하느님(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살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일으켜 주십니다. 그렇게 할 ‘힘’을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정말이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이야말로 모든 ‘선’(善), 즉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바울로의 교훈을 기억하며 오늘의 교회를 성찰합니다. 교회는 ‘자기’를 확장하려는 신자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으로 ‘분열’합니다. 특히 성직자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분열’이라는 악습의 제일 원인입니다. 교회는 그런 헛된 권력 추구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비허’(자기비움)의 예수님을 모범으로 살아가는 ‘하늘공동체’로 존재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겸손(비움과 순종),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교회를 통해 드러날 때 세상은 비로소 예수를 주님이라 찬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 그 ‘길’에 온전히 순종할 신자와 성직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러 갈래로 분열하여 서로를 원수처럼 멸시하는 오늘의 사회가 치유되도록 자신을 ‘순종의 제물’로 바칠 교회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성주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부터 ‘연중시기’ 마지막 주일(왕이신 그리스도주일)까지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잡히시기 전날까지의 사건들을 들을 것입니다.

본문은 두 단락이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전반부(23-27절)는 예수님의 권한(권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때는 과월절 축제를 며칠 앞 둔 날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다 사회의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입니다. 특히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산헤드린의 원로들이 ‘예루살렘 성전체제’로 대변되는 유다 사회의 ‘가장 큰 수혜자들’입니다.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 정화사건’을 벌이셨습니다(마태 21:12-13). 이 사건이 ‘사회의 특권층들’, 즉 종교·정치 지도자들(산헤드린)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지도자 행세를 하고 있지만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멍에를 부과하고,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던 위선자들입니다. 종국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잡아먹을 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맞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음에도 ‘고발’과 ‘공격’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정화사건’이 있은 다음 날,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습니까? – 마태 21:23

그들은 ‘성전 정화사건’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마태 21:12-13). 성전을 지켜온 자신들의 권위가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위협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에게 예수는 오래도록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공생애 동안 예수께서는 ‘하늘나라’(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마태 4:17). 회개란 한마디로 ‘지금 여기 와 있는 하늘나라로 눈’을 돌리는 일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활동이 모든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회개의 눈을 뜬’ 이들에게는 ‘복음’(기쁜 소식)이었지만, 회개의 눈을 ‘감아버린’ 이들에게는 ‘위협’이었습니다. 특히 당대의 ‘사회의 특권층들’, 즉 종교지도자들과 권력가들에게는 그랬습니다.

‘사회의 특권층들’(원로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과 ‘전통’을 신성시했습니다. 그것들은 그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하는 힘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신성시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느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유일한 중재소라는 주장을 허망하게 여겼습니다(요한 2:19; 4:20-24; 마태 23:38; 24:2). 예수님은 율법이나 전통의 권위에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전권(全權)을 받은 분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특히 ‘안식일 법’ 준수와 관련한 거짓된 선민의식에 저항하셨습니다. 병자는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에만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정해 놓은 그런 규정을 어기셨습니다(마태 12:9-14). 생명이 위태롭든 그렇지 않든 병에 묶인(귀신들린 자들) 이들을 고쳐주심으로써(마태 4:23-24) 어떤 규정도 사람이 자유와 치유를 얻는 것보다 소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 본래의 뜻을 되살리셨습니다. 즉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한 숨 돌릴 수 있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베푸신 자비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안식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마태 12:1-8). 또한 ‘정결법’에 아랑곳하지 않고 죄인(소외된 자) 취급 받던 이들(세리와 창녀)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곤 하셨습니다(마태 11:19).

이러한 실천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실천이었습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인간의 철학이나 종교, 전통이나 제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천이었습니다.

‘사회의 특권층들’(원로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즉 특히 종교지도자들 눈에는 이런 예수님이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성전 정화사건’은 예수님을 위험인물로 낙인찍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구실을 잡기 위해 질문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질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도 예수님처럼 ‘사회의 특권층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했던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으로써 그들의 ‘허위’(虛位, 실권이 없는 지위)와 ‘허위’(虛威, 겉으로만 그럴듯한 위세)를 벗겨내시는 중입니다.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하늘이 준 것이냐? 사람이 준 것이냐? – 마태 21:25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인이기 전에 정치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답변하지 않기로 합니다. 답변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대답에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꼭 인사청문회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 같습니다. 그들의 교묘한 꼼수를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 마태 21:28

여기서부터 복음 이야기 후반부(28-32절)입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 하라고 시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대놓고 ‘싫다’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나중에’ 아들을 돌아서게 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라는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불효로 만들어버린 자식입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순종) 사이의 대립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비유의 아들들처럼, 살아 본 경험이 많기에 아마 본문 이해가 잘 될 것입니다.

‘싫다’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순종한 맏아들’은 ‘회개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직업(세리)으로 윤리(창녀)로 죄 속에 있었지만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느님의 말씀(마음)을 외면했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접하고서는 회개하고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들입니다.

반면에 ‘가겠다’라고 대답하고서 ‘순종하지 않은 둘째 아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마태 23:3). 그들은 자신들을 회개할 필요한 없는 ‘의인’이라 여겼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따르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며 ‘회개하라’ 촉구하시는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늘나라로 들어오라’라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들을 대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며 비판하신 셈입니다. 그들은 말 만하고, 실천(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표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겉치레에 빠진, ‘경건한 척하는 자기기만’의 대변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만’해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비유입니다. 가슴이 철렁입니다. 비유 끝에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 충격적인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 마태 21:31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해도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구제불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생각을 전복시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너희보다 ‘먼저’ 들어간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중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너희는 못 들어가지만, 그들은 들어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문이 아예 막혀 있진 않습니다. 회개한다면 그들 역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비유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참 뜻’을 찾아봅니다. ‘회개’와 ‘순종’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도 잘하고, 순종(실천)도 잘하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이들이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맏아들입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입니까? 중요한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행동입니다(마태 7:21-26, 야고 1:22-25).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 안에는 둘째 아들 같은 모습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감동이 올 때는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불순종’합니다.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을 읽을 때는 ‘그럼요’라고 약속해 놓고선 어느 순간 ‘미움’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합니다. ‘용서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는 ‘당연하지요’라고 대답해놓고선 어느 순간 ‘평가’하고, ‘판단’하며, ‘비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감사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말씀 앞에 심호흡까지 하며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불평과 원망’의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고요히 기도합니다. 이런 둘째 아들 같은 삶의 태도를 성령 하느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삐걱거리고 녹슨 마음을 닦아주시고, 고장 난 마음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뉘우치는 마음을 받아주시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사랑의 사람’, ‘용서의 사람’, ‘감사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에서 살핀 것처럼, ‘과거’에 얼마나 위대한 신앙체험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신 주님의 은총을 ‘오늘 기억’하는 일이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오늘의 구체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실, <전례독서>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므리바’와 ‘마싸아’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신앙’(불충실) 하던 이스라엘 백성 같은 모습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출애굽만 하면 완전히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 것처럼 기대를 모았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대에서 어긋났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었으면서도 ‘순종’하기는커녕 번번이 ‘불평’과 ‘불충실’로 반응했으며, 심지어 그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시험’까지 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함께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을 ‘망각’하고 살아가던 이스라엘 선조들 같은 모습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시인은 선조들의 불순종한 역사를 ‘기억’시키면서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공동체에 교훈합니다. ‘이기적 야심’과 ‘허영’에 빠져 ‘불화’하던 필립비 교우들 같은 모습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오늘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라’라고 당부합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초대’와 ‘회개의 요청’에도 돌아설 줄 모르는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같은 모습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의 삶이란 입술의 말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순종’하는 삶임을 두 아들의 비유에서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몸으로, 행동으로, 하느님을 향한 ‘순종의 삶’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는 모세처럼, 세리와 창녀들처럼,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날 때도 있어서 감사합니다. 모두가 그런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할 힘을 주신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느님’ 덕택입니다.

언제나 살아있는 신앙은 생각과 말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항상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오늘의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구원에서 빗나가기를 원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오늘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불순종의 행위를 버릴 것을 다짐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에 눈멀게 하는 불평과 원망의 말을 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일은 ‘입술의 거짓 고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몸으로,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구원의 은총이 감사한 이들은 진정으로 ‘오늘 순종’합니다.

오늘도 ‘영원한 생수’를 주시는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변화시키는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겸손하게 나오라고 요청하십니다. 주님의 이 부르심과 요청 앞에서 어제까지의 불순종했던 삶의 태도에서 탈출하여, ‘오늘’부터는 몸으로 순종하는 길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어제까지의 불순종했던 삶의 길을 벗어나, ‘오늘’부터는 ‘행동으로 충성’하는 길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이들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말로는 고백하지만, 행동으로는 먼 이들이 아니라 ‘오늘’ 그렇게 사는 이들의 차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항상 ‘오늘’을 위한 것입니다. 어제까지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불순종하며 살아온 인생이라도 ‘오늘’ 회개하여(새 마음, 새 뜻을 품고) 순종의 길 위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교회는 이렇게 용납해 주시는 하느님의 언어인 ‘사랑’을 배우고 익히며, 그 사랑의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하늘 공동체’입니다.

더욱이 ‘감사성찬례’는 주님의 ‘자기비허’(자기비움)와 ‘사랑과 순종’(겸손, 섬김)을 배우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 세상의 개인주의, 물신주의, 이기적인 야심과 허영이 자리할 수 없는 ‘사랑과 겸손’, ‘자기비움’의 ‘하늘공동체성’을 익히고 기르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익히고 기른 ‘사랑의 언어와 하늘 공동체성’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기 위해 파송 받는 ‘생명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야말로 ‘주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이웃에게로 향합니다. 사랑(섬김)을 살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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