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20. 연중25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주님의 자비와 용서는 무한하시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항상 풍성하게 베푸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기꺼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 마침내는 주님이 주시는 큰 상급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6:2-15
  • 시편 – 105:1-7,38-45
  • 독서 – 필립 1:21-30
  • 복음서 – 마태 20:1-16

연중 25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감사와 찬미, 대자대비하신 하늘 아버지를 향한 마땅한 태도’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대로 ‘하늘 양식’을 내려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하늘 양식이란 ‘메추라기와 만나’입니다. 본문의 주요 관심사는 ‘만나’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민수기》에도 전해집니다(민수 11장). 거기에는 ‘만나’에 싫증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원하자(민수 11:4-6, 18-23) ‘메추라기’를 보내주신 것으로 전해집니다(민수 11:31-32). 이런 차이점들 외에도 본문 자체에는 ‘중복되는 구절들’(특히 7-8절)이 나타납니다. 여러 전승이 짜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사건들부터 언급하겠습니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을 통해 자신들과 이집트인들을 구별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경험하였습니다(출애 7-12장).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임재’와 ‘보호’를 경험하였습니다(출애 13장). 홍해바다를 건너며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권능’을 경험하였습니다(출애 14장).

홍해바다를 건넌 그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사흘 동안 그 광야를 지나갔지만 마실 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라’(쓰다는 뜻)에 다다랐으나 그곳 물은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투덜’거림을 듣고 모세가 하느님께 부르짖자 ‘나무 한 그루’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단물’이 되었습니다(출애 15:22-25a). 거기에서 하느님이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주시고 ‘시험’하셨습니다(출애 15:26b-26). 일종의 ‘순종 교육’을 그들은 받았습니다. 그 시험 후에 그들은 ‘낙원’ 같은 ‘엘림(큰 야자나무 숲이라는 뜻) 오아시스’로 이동하여 ‘진’(陣)을 치고 ‘쉼’을 얻었습니다(출애 15:27).

그들은 이 일련의 구원 사건들을 통해 자신들이 하느님 덕분에 ‘생명’을 이어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자유인의 길’로 들어섰음을 감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나타나있듯이 그들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기보다는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기에 더 빠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출애굽 후 두 번째 야영지인 ‘엘림’ 오아시스를 떠나 ‘씬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날은 그들이 출애굽 여정을 시작한 지 한 달 보름이(5월경) 되는 날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 또 투덜거리는데,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 투덜거림입니다(출애 14:11-14, 15:24).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 출애 16:3

이유가 있었습니다. 출애굽 할 때 갖고 나온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으로 흥분했습니다. 이미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경험했지만, 현실의 ‘배고픔’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미래’(약속의 땅)는 팽개친 채 왜곡된 현실 인식을 쏟아냈습니다. 자신들의 불평과 원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선별적으로 기억하며 왜곡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강제 노역은 잊어버린 채 먹던 음식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그 ‘음식 타령’마저도 거짓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왔다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불평과 원망은 ‘주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다’라 는 뜻입니다. 이집트에서의 해방과 파라오의 군대로부터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을 향한 ‘배은망덕’이자 ‘반역’입니다. 아직도 그들이 이집트에서의 ‘고난의 시간’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는 홍해바다를 건넌 사건을 통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분명 그들에게 ‘양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할 때 데리고 나온 수많은 ‘가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기 가축을 도살하기 싫다는 항변일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고요히 묵상해 보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비난하는 그들 사이에서 모세가 보여준 ‘지도자’로서의 굳건한 태도는 감동적입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가장 중요한 길과 이스라엘이 가야 할 진정한 여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모세에게 ‘구제책’이 있을 것이라 약속해 주십니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 출애 16:4a

그 ‘구제책’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방법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황당한 약속’입니다.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하늘’에서는 비나 눈이 내리는 것이지 ‘음식’이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런 세상이라면 다툼이나 전쟁도 없을 것입니다. ‘보편’이냐 ‘선별’이냐를 두고 논쟁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먹을 것을 내려주실 때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알려주게 하십니까?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 출애 16:4b

이것이 하느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주시는 ‘지켜야 할 명령’(순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는 어머니처럼,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다 음식을 직접 먹여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루의 필요’를 위해 ‘날마다’ 나가야 합니다. 단지 하루의 필요만을 거두어들여야지 필요 이상으로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출애 16:19-20).

하느님께서는 이 명령으로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출애 16:4c).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시는 ‘선물’(은총, 축복)에 대해 인간은 ‘믿음과 순종’을 보여야 합니다.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라’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여섯째 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차려보면 다른 날 거두어들인 것의 곱절이 될 것입니다(4b-5절). 이유는 다음 날이 ‘안식일’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출애 16:22-30). 이렇게 그들은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을 ‘날마다’ 요청받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하느님이 주시는 구제책, 즉 그 ‘황당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아론과 함께 다가올 ‘하느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는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내신 분이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야훼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 출애 16:6-7a

이 선포가 어떻게 들립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제책도 황당하지만, 이 선포 역시 ‘이상하고 놀랍게’ 들립니다. 선포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이끌어내신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없던 것으로 들립니다. 《출애굽기》 앞부분(7-14장)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구원의 사건들’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신들’을 심판하신 재앙들과 과월절, 홍해바다를 건넌 기적과 이집트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일들 말입니다. 그 ‘위대한 구원의 사건들’에 나타난 ‘막강한 힘’(권능)을 통해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주님’(야훼)이심을 ‘이미 확실히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인 모세가 보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구원의 사건들’을 체험했으면서도 ‘주님’께 대한 ‘확신’을 ‘아직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런 ‘막강한 힘’을 ‘체험’했으면서도 그들의 ‘내면’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이어지는 ‘책망’에 등장합니다.

야훼께서는 너희가 당신께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너희는 우리에게 불평하느냐? … 야훼께서 당신께 불평하는 너희의 소리를 들으셨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이냐? 너희가 하는 불평은 우리에게가 아니라, 야훼께 하는 것이다. – 출애 16:7b-8c

정말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전능하신 힘’이 가져온 ‘위대한 구원 사건들’을 이미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에게서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숭배하는 ‘전능하신 힘의 체험’, 즉 ‘주님의 권능’을 맛보았음에도 그들의 ‘마음’(정확히는 노예 근성)은 그대로였습니다. 그 정도 체험들이면 주님을 관계하는 ‘태도’가 바뀔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아론의 선포가 ‘이상하고 놀랍게 들린다.’라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믿음도 없고, 변화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정곡’을 치르는 모세의 이 같은 ‘책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속성’(성품)을 언급할 때, 흔히 ‘힘’(전능성)에 주목하곤 합니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처럼, 다른 신들을 ‘정복’하시는 ‘하느님의 힘’, 다른 신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또 그런 ‘위대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라며 ‘은사’를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에 따르면 그런 ‘힘의 숭배’처럼 보이는 ‘신앙’은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힘’(권능)이 가져온 구원 사건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 ‘힘의 체험’이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결정적으로 바꾸어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 반복되는 내용이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낼 수 있다고 선포합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을 어떤 분(속성, 성품)으로 경험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선포합니까?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통찰입니다. 지금 모세와 아론은 ‘자비와 선하심’ 또한 주님의 속성(성품)이며, 그 속성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리라고 선포하는 중입니다. 마치 철부지 자녀들을 항상 가엽게 여기고 먹이는 어머니처럼, ‘배은망덕’한 그들을 자비와 선하심으로 대하는 주님의 ‘공급하심’을 통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다가올 ‘공급하심’을 통해서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 또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의 표시’로 ‘하늘에서 양식이 공급’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구제책을 통해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주님’(야훼)이시고, 주님의 ‘성품’이 어떤지를 ‘확실히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경험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에도 점차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녁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메추라기 고기’를 잡아먹음으로써,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주님’(야훼)이심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아침이 되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배불리 먹음으로써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이지 모세의 ‘통찰’은 생각할수록 놀랍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영광’을 보여주시는 방법을 사람들이 숭배하는 ‘힘의 체험’, 즉 ‘권능’을 통해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속성’과 ‘영광’을 보여주시는 방법은 ‘배은망덕’하고 ‘반역’하는 백성을 그 ‘강력한 힘’으로 ‘처벌’하심으로써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사랑, 긍휼)를 통해서입니다. 불평과 원망에 빠진 ‘악한’ 그들을 그 ‘권능’으로 ‘처벌’하심으로써가 아닙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깨닫기까지 참아주시는 ‘선하심’(후대하심)을 통해서입니다. 믿음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는 철부지 같은 그들에게 ‘하늘 양식을 제공하시는 그 방법’을 통해서 주님의 속성(성품)이 드러날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영광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모세의 그 깊은 통찰은 주님의 속성과 영광을, 자칫 ‘힘’(권능) 일변도로 치닫기 쉬운 우리의 견해를 바로 잡아 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자비’와 ‘선하심’(후한 처분)을 받을 만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 자신의 ‘성품’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복음 이야기가 전하는 비유에도 녹아 있습니다. 그 자비와 선하심의 체험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길입니다.

이런 통찰을 간직한 모세는 한 번 더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비난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들이 찾아낸 ‘번지수’가 틀렸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알아차리는’ 그런 ‘마음의 눈’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자신의 ‘부정적인 행동’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차릴 때 그 행동을 삼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내뱉는 모든 불평과 원망과 비난은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 우주의 시간성과 공간성과 인과성 속에 살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계와 인생살이 모두는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이어서 미래의 ‘첫 번째 제사장’이 될 아론이 모세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회중을 주님 앞에 소집합니다. 그때 “주님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서”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지적이 정확히 맞았을 뿐 아니라, 곧 하늘 양식을 공급하시겠다고 재차 확신시켜 주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 출애 16:12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다가왔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대로 그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그들 모두는 누구도 예외 없이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풍성한 선물’을 체험합니다. 말하자면 ‘보편복지’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의 선물’은 그저 말뿐이지 않습니다. 항상 ‘구체적’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차별(선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양식’(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관계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까? 단지 《성경》에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으로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도시가 발달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들이 느꼈던 배고픔은 낯섭니다. 사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익숙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낯설고 두려운 풍경이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던 첫날처럼 말입니다. ‘광야’는 그들에게 걱정스럽고 긴장되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 있지 않고, ‘세련된 도시’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안전하다고 느낍니까? 도시에 사는 수많은 연인이 부푼 기대를 안고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결혼생활이 행복할지 후회합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청년이 부푼 기대를 안고 직장 생활을 시작합니다.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의 직업이 안정적일지 회의합니다. 도시에 사는 부모는 자식을 낳고 기르며 공부를 시킵니다. 세월이 흘러 ‘몸의 힘’이 약해질수록 노년에 자식들에게 ‘짐’(부담)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합니다. 이처럼 ‘광야’에 있든, ‘도시’에 있든, 인간의 삶이 두렵고 걱정스럽기는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복지국가에 산다고 떠들어대지만 배고픈 이들도 많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적 거리 두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진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자비와 선하심으로 함께 계십니다. 1독서 《출애굽기》 말씀이 그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삶도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은총의 자리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는 한,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때로는 그 방법이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기에 놀랍기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저녁에도 놀랐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놀랐습니다. 사실, 《민수기》를 참고하자면 놀랐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민수 11:21-22). 그 ‘황당한 약속’처럼 하느님이 내려주신 ‘양식’으로 지면이 ‘가득’ 덮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모세 사이의 대화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 출애 16:15b

“이게 무엇이냐?”는 히브리어 ‘만 후’(מָ֣ן ה֔וּא)를 번역한 말입니다. ‘만’(מָן)의 어근인 ‘마’(מָה)는 의문대명사로 무엇(what, how, anything)이란 뜻입니다. ‘후’(הוּא)도 3인칭 대명사로 그(he, she), 그것(it)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만나’(manna)라는 이름이 왔는데(출애 16:31; 민수 11:6,7,9), ‘무엇’(what)이라는 뜻의 ‘만’(מָן)을 ‘70인역 성서’(그리스어)에서 ‘만나’(manna)라고 번역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 ‘만나’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길갈’이란 곳에 ‘진’(陣)을 치고 예리고 평야에서 과월절을 보낸 다음 날, 즉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뒤로는 내리지 않았습니다(여호 5:10-12).

이처럼 ‘만나’는 먹을 것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선물(은총)입니다. 그들을 ‘후대하시는’ 주님이 ‘선하시다는 표시’입니다. 매일 아침 ‘만나’를 볼 때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의 영광, 즉 주님의 현존을 발견합니다. ‘주님 덕택’에 자신의 ‘생명이 이어진다.’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는 ‘양식’이자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경우에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양식’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에덴의 아담과 하와가 실패한 것처럼, 뱀의 사악한 음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양식을 먹기 전에 먼저 ‘진정한 배고픔’을 느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굶주림’ 말입니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먹으려는 유혹’에 빠지고, 먹지도 못할 ‘다른 양식’을 구하려다 낭패를 당합니다.

이제, 본문을 배정한 가장 중요한 목적을 살필 차례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무엇 때문에 ‘만나’를 내려주신 이 장면에 주목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가는 새 길의 여정에 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하느님이 공급하시는 양식을 먹으며 그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세례성사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와 죽음의 세상’(이집트)을 탈출하여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새 길의 여정’에 있습니다. 이 새 길 여정은 자비하시고 선하신 ‘주님이 내려주시는 양식’을 먹어야만 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 우리가 먹어야 할 ‘진정한 양식’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가 《출애굽기》를 묵상하는 진정한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요한 6:30-35, 48-58). 예수님도 이렇게 ‘자기선언’(Ἐγώ εἰμι 나는 이다)을 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 요한 6:35,48-51,58

사도 바울로도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 1고린 10:3-4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은 자비와 선하심의 하늘 아버지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성찬례가 그 ‘생명의 양식’, 즉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하느님 외에 다른 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얻으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진정한 양식’이 되지도 못할 일들에 지나치게 시간을 바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먹이시고 인도해 오셨는지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되셨음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들에게도 차별 없이 ‘생명’으로 관계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가슴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계약’에 대한 찬미입니다. 보잘것없던 그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주권적 언약 성취를 감사하고 찬미하는 ‘역사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조들과 ‘계약’을 맺으신 때로부터 그들이 ‘선민’으로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민족형성사’를 ‘성찰’합니다.

그 ‘성찰’을 통해 이스라엘은 은총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음을 깨닫습니다(42-44절).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며 ‘계약’에 신실하셨던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시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제를 담고 있는 <105편>은 ‘가’해 <전례독서>에 무려 ‘4차례’(연중 17, 19, 22, 25주일)나 배정됩니다.

오늘 발췌한 단락은 하느님의 말씀인 1독서 《출애굽기》에 대한 응답입니다. 특히 ‘배고픔’에 시달리던 선조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하늘 양식을 내려주시어 배불리 먹이셨다고 감사와 찬미를 바칩니다(40절). 그 일어난 일들이 ‘주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증명한다.’라고 감사와 찬미를 바칩니다. 그러나 감사와 찬미는 단지 ‘입술’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율법’에 대한 ‘순종’(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45절). ‘자비와 선하심으로 행동’하신 하느님, ‘이스라엘 역사와 계약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선민(選民)다운 삶’을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4차례에 걸쳐 묵상해 온 <105편>의 결론입니다.

‘행동으로써 선민다운 삶을 살라’라는 시인의 마지막 당부를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우리는 단지 생각, 말, 기도만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까? 우리의 생각, 말, 기도는 어떻게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시인은 역사시를 통해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야말로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교훈합니다(1베드 2:9a). 교회인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크신 자비와 선하심, 그 업적을 널리 선포하는 일이야말로 교회다운 삶이라 당부합니다(1베드 2:9b).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었으니(1베드 1:18-19), ‘하느님께 복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라’라고 교회에게 당부합니다(1베드 1:14-17). 2독서 《필립비서》에서 바울로 역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라.”라고 교회에게 당부합니다(필립 1:27).

교회인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입술만이 아니라 행동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입은 자녀다운 삶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입니까? 《성경》의 정신을 종합해보면, 그 삶의 모습은 하느님을 향한 순종, 즉 사랑의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행동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섬김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난하고 배고픈 이웃들, 사회적 약자들을 단지 ‘생각’과 ‘말’로만 섬깁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으로, 자비와 선하심을 나타내시며 그들을 ‘어머니처럼’ 섬겨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그 강력한 힘으로 처벌하시지 않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길이 참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1베드 1:19). 이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 자비, 선하심을 받은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도 ‘행동’이 절박하게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풍요를 누리지만, 동시에 인류를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핵과 군비경쟁의 위협 속에 있습니다. 현실로 닥친 기후 재앙 앞에서 쩔쩔매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인문학자도 당해낼 수 없는 ‘인공지능’의 예견된 공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일자리가 로봇들로 대체될 것이고, 거부하려 해도 도시에 사는 한 ‘사물 인터넷’이 삶의 환경을 점령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보다 인간이 만든 ‘사람’이 유전적으로뿐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훨씬 우월할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인간이 자신이 만든 사람의 하느님이 되고, 어쩌면 더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는 무엇으로 정체성과 그 존재 이유를 드러낼 것입니까? 교회는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자녀 공동체’입니다(마태 5:3-12; 로마 12:1-2). 교회는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기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무엇이 생명과 평화의 일인지, 용서와 화해의 일인지 시대를 향해 분별해 주고, 교회 자신이 생명과 평화, 용서와 화해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대 속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증언하고, 하느님께서 행하신 ‘자비의 일들’을 알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시편 105:1; 1베드 2:9). 인간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며 부품화하는 세태 속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약자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의 ‘입’과 ‘피난처’로 존재하고 있어야 합니다. 되돌릴 수 없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지구 생명의 회복과 유지에 헌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 ‘데이터’나 ‘통계치’ 만을 들여다보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존중받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맛’을 사람들이 느끼도록 교회는 세상 속에 ‘소금’으로 녹아 있어야 합니다(마태 5:13).

정말이지 교회는 이 시대의 ‘구원과 평화’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불편함’과 ‘자기희생의 고난’까지도 감수하는 공동체입니다(필립 1:29). 고난은 교회가 ‘하느님 편에 서 있다’라는 표시입니다. 교회는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그들에 의해 행해진 불의와 부정에 저항해야 합니다. ‘인간 중심’으로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모든 이기적 욕망과 환상의 병폐를 고발해야 합니다. 인간의 ‘피조성’과 ‘죄성’을 외면하게 하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인 양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악한 이들의 ‘음모’를 몰아내는 ‘빛’으로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마태 5:14-16). 개인주의가 극에 치달은 세대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생각이나 기도나 말만이 아니라 좀 불편하더라도 행동하는 구체적인 ‘섬김의 실천’으로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 구약본문을 묵상하면서 찾아 나서야 할 ‘새 길’은 생각이나 말만 하는 옛길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새 길’입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배고프다고 불평하던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여전히 이집트에 속한 옛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2독서 《필립비서》는 필립비 교우들을 향한 사도 바울로의 절절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사랑)와 선하심의 표상인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걸었던 사도 바울로의 당당한 격려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 편지를 쓸 때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필립 1:19). 그는 자신이 서 있던 ‘갈림길’을 고백합니다. 한쪽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차원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입니다. 다른 쪽은 고난을 겪더라도 지상의 교회와 함께 나란히 서서 용기 있게 ‘복음’을 위해 분투하는 차원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죽는 쪽이 나을까? 살아있는 쪽이 나을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 길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교회와 함께 지상에 머무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한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온 생애가 그리스도께 붙잡힌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납니다(21절).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자신의 사명인 ‘사도’를 만납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온전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과 사명을 충실히 지키려 한 ‘위대한 성인’(聖人)입니다.

그의 후예라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에게도 차별이 없습니다. 그 자비와 사랑의 은총 덕택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당신의 전부인 것처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느님이 전부입니까? 사도 바울로처럼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까? 그렇다고 고백한다면, 이 목숨이 있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얻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생명을 헌신할 것입니까? 매주일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어떤 이들과 연대하고 생명의 시간을 나누며 살아갈 것입니까?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자비로운 포도원 주인의 비유’입니다. 《마태오복음》에만 전해지는 ‘하늘나라 비유’입니다. 어쩌면 그때 예수님 일행은 포도원 근처를 지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장터에 나가는 주인에 비유하십니다. 주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자비로우면서도 절대적인 주권’을 가졌습니다. 저는 이 비유의 주인을 묵상할 때면, 항상 자녀를 향해 ‘긍휼함’(자비함)이 넘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사실, ‘자궁’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켐’(רֶחֶם, womb)과 ‘긍휼, 자비,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캄(רָחַם, compassion, love)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맨 나중에 고용된 일꾼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고용된 사람들과 똑같이 ‘1데나리온’(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의 ‘품삯’(은총)을 ‘관대한’ 주인에게 선물 받습니다.

그들과 모두에게 주어진 ‘1데나리온’은 무엇일까요? 복음 이야기 마지막에 가서 이것을 언급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보다 먼저 다룰 내용이 있습니다. 어째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셔야 했습니까? 그 맥락은 본문 첫머리에 드러나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원문’ <20장>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Ὁμοία(호모이아) γάρ(가르) ἐστιν(에스틴) ἡ(헤) 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 τῶν(톤) οὐρανῶν(우라논).” 중요한 어휘만 살펴보면, ‘Ὁμοία(호모이아)는 품사가 ‘형용사’로 ‘~같은’(like, the same as)이라는 뜻이고, γάρ(가르)는 품사가 ‘접속사’로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는 ‘왕국’(나라, kingdom), οὐρανῶν(우라논)는 ‘하늘’(heavens)이라는 뜻입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이와 같기 때문이다.”입니다. 이처럼 문장을 연결하는 ‘접속사’인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앞에 하신 ‘어떤 말씀’에 대한 ‘설명’(원인), 즉 왜 그런지를 설명하려는 맥락에서 발설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앞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9장>을 보겠습니다. <19장> 후반부는 ‘부자 젊은이와 예수님의 대화’를 전해줍니다. 말씀 나눔이 끝날 때까지 이 대화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왜냐하면, 이 대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그만큼 복음 이야기의 핵심을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젊은이는 예수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다른 말로 하면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선한 일’(τί ἀγαθὸν, ‘티 아가쏜’)을 하면,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ζωὴν αἰώνιον, 조엔 아이오니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선한 일’을 행하는 자신의 ‘공로’(행위)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셈입니다.

“계명을 지켜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 젊은이는 “다 지켰습니다”라고 호기롭게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촌철살인의 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그 말씀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풀이 죽어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결국 ‘행위’(공로)로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렸다는 뜻입니다.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 마태 19:24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 마태 19:26

이 말씀이 그 젊은이와 시작된 대화의 결론입니다. 이 말씀이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의 마음에 깊은 울림이 되었나 봅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자신들은 그 젊은이와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 마태 19:27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십니다(마태 19:28). 새 세상, 즉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오시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으실 날이 올 것입니다(이사 65:17; 2베드 3:13; 묵시 21:1,5). 그날을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의 하늘나라가 임하는 날이라 부릅니다. 그날, 그들은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통치)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그 ‘젊은이와 달리’, 모든 것을 버린 그들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은 그들의 ‘공로’, 즉 가진 것을 버리고 따른 일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보상의 약속 뒤에 ‘경고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마태 19:30

‘하느님의 보상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는 다르다’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 세상이 오는 날”, 즉 ‘새 하늘 새 땅’이라는 ‘하늘나라’가 오는 날, ‘대반전’(大反轉)이 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많은 반전’이 그날에는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첫째라고 해서 ‘자만’해서도 안 되고, 꼴찌라고 해서 풀이 죽을 일도 아닙니다.

왜 그런 반전이 일어납니까? 무엇이(비유 마지막에 따르면 ‘불평과 감사의 마음’입니다), 누가(비유에 마지막에 따르면 ‘자기 자신과 하느님’입니다) 그런 반전을 일으킵니까? 그 이유 설명, 그 대답이 오늘 복음 이야기입니다. 그냥 독립된 ‘하늘나라 비유’가 아니라 어째서 그런 보상과 영원한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며,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대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원리 설명’(대답)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비유의 배경입니다. 부디 우리가 이 비유의 의미를 잘 새기기를 기도하면서 자세한 설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는 지금이 막바지 포도수확 철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0월 말이 그 철입니다. ‘우기’(雨期)가 시작되기 직전이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포도수확은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기에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일반적으로는 아침 6시경) ‘장터’(고대에는 장터가 ‘노동시장’이었습니다)에 나갔습니다. ‘장터’는 노동력을 제공하려는 가난한 많은 사람으로 오늘도 붐볐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하루 치 품삯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용직 노동자들입니다.

그 주인은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쳐주겠다며 일꾼들을 뽑았습니다. 당연히 뽑힌 그들은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서 우월했습니다. 그들도 선뜻 1데나리온을 약속하는 주인을 보고 ‘인심 좋은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일도 이 ‘인심 좋은’ 주인의 눈에 띄기를 고대하면서 서둘러 주인을 따라 포도원으로 향했습니다.

주인은 9시쯤 다시 장터에 나갔습니다.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9시가 되도록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불안했습니다. 노동시장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노동력을 구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은 그들과도 ‘일한 만큼의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다소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하루 치 품삯’에 대해서는 불평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일한 만큼의 품삯’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12시, 3시에도 장터에 나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장터에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장터에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그만큼 ‘실업자’가 많이 있었다는 시대상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지만, 고용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초조했습니다. 정말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일한 만큼의 품삯을 준다는 말에 무조건 따라갔습니다. 일꾼을 구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인은 놀랍게도 ‘오후 5시’에도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다섯 차례나 장터에 나가서 일꾼들을 고용합니다. 그만큼 주인의 포도원이 컸고, ‘우기’를 앞두고 있어서 일이 급했습니다. 물론, 이 비유 이야기를 가지고 오늘날의 개념인 ‘근로계약서 미작성’까지 말한다면 무리입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품삯’을 치를 시간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치르도록 ‘관리인’에게 지시합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부터가 아닙니다. 《성경》의 정신이 항상 강조하는 ‘약자 우선성의 원리’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음이 드러납니다. 더욱이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직업상의 죄인들(세리들), 윤리상의 죄인들(성매매), 병자와 장애인과 허약한 사람들, 마귀들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어린이들,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오후 5시, 즉 맨 나중에 온 일꾼들이 ‘1데나리온’의 은화를 관리인에게 받습니다. 그들의 휘둥그레진 눈이 보이십니까? 석양빛에 반짝이는 은화 한 닢을 들어 보이며 뛸 듯이 기뻐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입니까?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몸의 힘조차 없는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본문에는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6절). 이 말은 그들이 ‘게으르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의 힘(능력)이 한 참 떨어져서 아무도 그들을 고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루해가 저물어가도록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 생각에 애가 탔습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보다”라며 낙담했습니다. 그 시간이면 일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겨우 1시간 남짓 일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누가 그런 일자리를 제공한단 말입니까? ‘오늘도 이렇게 하루해가 지는구나’라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비로운 주인을 만납니다. ‘마지막 시간’(꼴찌 시간)에라도 자신들을 쓰겠답니다.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그들도 고용되었습니다. 기꺼이 주인을 따라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빠른 손놀림으로 포도를 수확해 보지만 해가 저뭅니다. 하루해가 그토록 야속한 적이 없었습니다. ‘품삯’을 치를 시간이 되었는데 자신들부터 ‘먼저’ 받으라고 불렀습니다. ‘민망한 손’(오늘날 노동 개념으로는 정당한 손이지만)을 내밉니다. 세상에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은화 한 닢’을 건넵니다. ‘최소한’으로 일하고 ‘온전한 하루 치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대우였습니다. 과분한 자비(후한 처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그 포도원에서 노동이 아니라 ‘자비의 시간’을 맛보았고, 넘치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갑자기 일꾼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이들이 ‘하루 치 품삯인 1데나리온’씩이나 받았다는 말이 뒤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일꾼들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들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치르게 했던 이유입니다. 일꾼들 사이에서는 ‘플러스 알파의 보상’이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넘실거립니다. 그들이 관리인 앞에 서기 전까지 말입니다. 기대가 빗나갔습니다. 오후 3시, 12시, 아침 9시에 온 사람들 모두 똑같이 ‘은화 한 닢’입니다.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과분한 대우입니다. 그들도 행복했습니다.

이제,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율법’에 충실하다고 ‘자만’하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유대인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기대감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은화 한 닢’입니다.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자신들의 ‘우월성’(정확히는 자만심)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가장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 섭섭함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지나가던 맨 나중 온 사람들에게 눈을 흘기며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사실, 맨 나중에 온 이들은 그들보다 앞서 포도원에서 일한 이들의 노동에서 이득을 얻은 셈입니다. 다른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셈입니다.

관리인에게 1데나리온을 받아든 그들은 주인의 처사가 ‘불공정하다’라며 따집니다.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라는 불만입니다. 일종의 ‘노조형성’입니다. 그들은 그 ‘항의’가 다른 일꾼들(9시, 12시, 오후 3시에 온 일꾼들)을 대신하는 ‘의분’(義憤)이라고 말하는 중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주인’은 너무한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하느님’(구약성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복음 이야기 끝에 그 주인이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옵니다)을 가리키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분 같습니다. 차라리 맨 먼저 온 그들부터 ‘먼저’ 품삯을 받게 했다면 그런 불평이나 의분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우리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이웃이 영예를 얻으면 함께 좋아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만 압니다. 남들이 영예를 얻으면 배 아파합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약자 우선성의 원리’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특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어떤 한 지체가 영예를 얻으면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두가 아픕니다. 이 원리가 작동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고 하느님의 한 가족도 아닙니다. 만일 맨 나중에 온 이들이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의 가족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더욱이 지금 그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보입니까?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뽑힐 정도로 ‘몸의 힘’(능력)을 갖춘 이들입니다. 주인이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들을 ‘선택’했을 때, ‘자신들의 우월성이 증명되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내일도 ‘장터’(노동시장)에서 남들보다 먼저 뽑힐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맨 나중까지 장터에 남겨진 약자들처럼 ‘절망’할 일도 ‘걱정’할 일도 적은 강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우월했고, 훨씬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요? 진실을 말하자면 주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주인은 결코, 그들을 속이거나 불공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하루 치 품삯은 1데나리온으로 정해져 있었고, 지금 그들 손에는 ‘약속의 표시’가 들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다른 이들에게는 불공정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9시, 12시, 오후 3시에 나가서는 품삯조차 정하지 않고(오늘날 개념으로는 근로계약서 미작성으로 근로자의 기본권 위협에 해당합니다) ‘일한 만큼 주겠다’라고 말하며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들 손에도 ‘주인이 정한’, 그들이 만족할만한 ‘일한 만큼의 품삯’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에게는 품삯을 얼마로 한다는 구두 약속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주인 마음대로’ 품삯을 치렀지만, 그들은 주인의 ‘후한 처사’에 ‘대만족’이었습니다. 손에 쥐어진 은화를 만지작거리며 남과 비교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한 누구에게도 불공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다른 사람들(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주인의 ‘관대함’(후한 처사, 자비)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판단’하면서 생겨난 ‘욕심’ 때문에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감사’를 놓쳤습니다. 남과 비교함으로써 ‘감사의 마음’은 사라지고 ‘불평의 어둠’이 몰려왔습니다. 약자에게 베풀어진 ‘후한 처사’(관대함, 자비)와 은총의 선물을 ‘시기’하다가 자신들을 ‘불행의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남들이 강제로 그들을 빠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구덩이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몫’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자기 품삯이 손해 난 것도 아닌 데, 약자들에게 베풀어진 주인의 ‘후한 처사’(정확히는 ‘선하심’인데 이것은 아래에서 언급합니다)에 대해 투덜거리고 따졌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마음이 이것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남을 판단’하는 태도는 우리 속에서 ‘욕심’과 ‘시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이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인생의 축복과 감사의 일들마저도 변질시킵니다. 더욱이 그들의 말 속에는 포도원에서 보낸 하루에 대한 ‘부정적 정의’(定義)가 드러나 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에서 보낸 시간을 ‘주인의 자비’나 ‘선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행한 ‘수고’(공로)라고 투덜거리고 따졌습니다. ‘일한 기회를 준 주인’이 아니라 ‘일한 자기들’만 보였던 셈입니다.

그들이 내뱉은 ‘수고’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바로스’(βάρος)입니다. ‘짐’, ‘압박’, ‘부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포도원에서 보낸 하루를 ‘무거운 짐’을 진, ‘압박과 수고의 시간’으로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오후 5시에 들어갔던 이들은 포도원에서 보낸 1시간을 뭐라고 정의했을까요? ‘관대함의 시간’, ‘은총의 시간’, ‘감사의 시간’이라 회상했을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재수 좋은 날’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 하루를 ‘자비’와 ‘은총’과 ‘감사의 날’로 기억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맨 먼저 온 사람들과 맨 나중에 온 사람들 간에 대조가 뚜렷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압박과 부담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부담이나 압박,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지만, 매일 같이 출근하면서 ‘오늘도 나는 무거운 짐을 지러 간다.’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가족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더 높은 가치’와 ‘의미’로 향할 때 비로소 불평이 그치고 감사가 나오는 법입니다. 기쁨도 보람도 다 거기서 가능합니다.

이 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2독서 《필리비서》의 사도 바울로입니다. 그는 우리의 ‘일상’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단지 먹고 사는 ‘생존’이나 ‘자아실현’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에 연결되어 있다’라고 그는 정의합니다(필립 1:20). 옥중에 있으면서도 그처럼 당당하게 말한 사람이 누가 있던가요?

우리도 사도 바울로처럼 하루하루를 그런 마음과 태도로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우리가 수행하는 일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주어졌음을 날마다 스스로에게 말해 주십시오. 주부로서의 살림살이든, 학생으로서의 공부든, 무슨 일이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과 연결’하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일상의 일들은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수고의 가면을 벗을 것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상으로 바뀔 것입니다. 자비와 은총의 얼굴을 나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하던 그들, 다시 말해 약자들에게 무자비한 채 자기 이득에만 눈멀었던 그들에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주인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고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 사람은 ‘노조위원장’에 해당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 마태 20:13

원문에는 “동료여(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없소.”인데, 공동번역은 ‘동료여’라는 말을 생략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그를 단지 일꾼이 아니라 ‘동역자’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처음의 ‘근로계약’을 상기시킵니다. 약속에서 어긋난 점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약속에도 없는 ‘탐욕’을 부린 쪽은 그들입니다. 이어서 ‘엄중하게’ 다음과 같이 ‘반문’함으로써 자신의 ‘권한’을 드러냅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 마태 20:15a

“내 마음대로”, 즉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이것이 주인이 ‘후하게’(관대하게) 행동한 유일한 이유입니다. 자신에게 품삯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이 있다는 뜻입니다. 일꾼들에게 ‘후한 처사’(관대하게)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은 포도원 주인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일꾼들의 공로’(수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주인은 ‘자만’하고 ‘불평’하는 이들에게는 엄중했습니다. 하지만 약자들과 감사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관대한’(후한) 주인이었습니다. 이 ‘관대한’(후한) 주인은 그들이 먹여 살릴 가족도 생각해 주었던 셈입니다. 사실, 주인의 이 반문은 ‘자기선언’, 즉 자신에 대한 증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히 ‘후하다’라는 말은 ‘인색하다, 야박하다, 짜다’의 ‘반대말’로 쓰입니다. 친구끼리도 씀씀이가 넉넉할 때 쓰는 말입니다. 본문에 ‘후한 처사’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아가쏘스’(ἀγαθός)입니다. 본래 어떤 뜻에 가까울까요? 이 말은 ‘선한’(good),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지나치게 의역을 했습니다. 다소 평범해 보이더라도 본래의 의미대로 번역하면 오히려 대조의 뜻이 더 살아납니다.

내가 선하기 때문에 당신이 악하게(나쁘게, 안 좋게, 불쾌하게) 보는 것이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문장은 “나는 선하다”(공동번역은 “내 후한 처사”라고 번역했습니다. “나는 후하다”는 말입니다)입니다. “나는 후하다”란 문장과 “나는 선하다”란 문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좀 더 깊은 본문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에고 아가쏘스 에이미’(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입니다. 어디서 많은 들어 본 ‘이름’이 나왔지요? 지난 부활절기에 자주 들었던 ‘예수님의 자기선언’인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나는 이다) 말입니다.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는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의 이름’(자기선언)인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Ehyeh asher Ehyeh, I am who I am), 즉 “나는 곧 나다”를 그리스어로 옮긴 말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주인은 자신에 대해 ‘에고 아가쏘스 에이미’(ἐγὼ ἀγαθός εἰμι, 나는 선하다)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갖는 무게감을 느끼기 위해 복음 이야기 서두에 말씀드린 《마태오복음》 <19장> 후반부의 ‘부자 젊은이와 예수님의 대화’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젊은이는 예수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왜 너는 나에게 와서 선한 일에 대하여 묻느냐?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 마태 19:17a

예수께서 말씀하신 “오직 한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만이 선하십니다.” 여기에도 ‘아가쏘스’(ἀγαθός)가 쓰였습니다. 이렇게 비유에 등장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속성(성품)이 ‘선하신 분’임을 예수께서는 가르쳐주십니다. 특히 하느님의 ‘선하심’은 강자들이 주장하는 식의 ‘정의’(正義)를 훨씬 넘어서는 ‘관대함’(자비, 후한 처사)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선하심’은 ‘약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공정한 대우’(후한 인심)로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후한 처사, 관대함, 자비)은 도토리 키 재기식인 인간의 모든 ‘공로’(행위)를 ‘훨씬 능가한다.’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의 ‘선하심’(후한 처사, 관대함, 자비)은 ‘인간의 공로’(수고)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선하심’(후한 처사, 관대함, 자비)은 오로지 ‘하느님 자신에게서 기원’하는 것이지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부르심의 ‘선택’과 그 ‘후한 처사’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절대 주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대자대비’하신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이 보상을 받을 것이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해주시고, 어째서 그런 ‘대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상 원리’를 명백히 설명해주십니다. 대자대비하시고 절대주권자이신 하느님의 보상 원리가 인간의 방식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인간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55:8-9). 그래서 한 번 더 대반전의 경고 말씀으로 비유를 끝맺는데, 이번에는 비유처럼 순서를 바꾸십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 20:16

끝으로 복음 이야기 서두에서 던진 ‘1데나리온’이 갖는 상징에 대해 말할 차례입니다. 그들이 똑같이 품삯으로 받은 ‘1데나리온’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19장>에 기록된 그 부자 젊은이와 예수님의 대화를 참고하자면 ‘영원한 생명’(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두에게 ‘은총’으로 선물 되는 ‘영원한 생명’(구원) 말입니다. 사실, 주인이 장터에 나갈 때마다 포도원에 고용했던 일꾼들은 우리 서로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각자의 ‘인생 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빛의 세계’(구원세계, 하늘나라)로 초대되어 들어온 우리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청소년기에, 어떤 사람은 성인기에, 어떤 사람은 노년기에, 심지어 어떤 사람은 회개한 십자가의 오른편 강도처럼 생의 마지막에 빛의 세계로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데나리온’을 ‘빛의 세계’로 초대된 모든 인류(정확히 말하면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죄의 용서’와 먼저 연결 짓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도 ‘죄의 용서’가 ‘먼저’ 은총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죄인인 인류에게 ‘죄의 용서’가 ‘관대하게’(후한 처사) ‘먼저 일어나야지’ 그다음 ‘희망’(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비유뿐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정신에 따르면, 죄인인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죄의 용서’, 즉 그 ‘첫 번 희망’(복음)은 누구에게 ‘먼저’ 베풀어지고 성취됩니까? ‘맨 나중에 온 일꾼들’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 그들은 누구를 가리킨다고 했습니까? 직업상의 죄인들(세리들), 윤리상의 죄인들(성매매), 병자와 장애인과 허약한 사람들, 마귀들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어린이들,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곤 했습니다. 당시에 그런 행동은 파격적인 처신(후한 처사)입니다. 그때마다 ‘포도원’에 맨 먼저 들어온 일꾼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마태 11:19; 마르 2:16-17, 루가 7:33-34, 15:1-2). 오늘 비유는 그들의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시는 이유입니다. 그 행동, 그 ‘후한 처사’가 ‘선하신’ 하느님을 본받은 행동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변호하시는 신상발언(身上發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교훈처럼 죄의 용서가 먼저 필요하지 않은 인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 3:23). 한마디로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바울로는 교훈합니다(로마 6:23). 따라서 이런 ‘죄인인 인류’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일은 ‘죄의 용서’입니다. 여기서 예외인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의 용서’ 없이 인류는 어떤 ‘희망의 내일’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죄인인 인류에게 찾아오셔서 ‘죄 용서의 자리’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장터에서 일자리를 찾던 일꾼들처럼, 특히 ‘이른 아침부터’ 고용된 일꾼들처럼, 그 초대는 죄인인 인류에게 너무나 놀라운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의 핵심처럼 하느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사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봉헌은 죄인인 인류에게 죄 용서의 은총을 가장 먼저 가져다주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인인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거저 선물’(후한 처사)로 허락하셨습니다(로마 6:23). 우리는 ‘1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아들고 ‘맨 나중에 온’ 일꾼들처럼 기뻐합니다.

이렇게 ‘죄 용서의 초대’는 이른 아침부터 고용된 사람들처럼,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거저 베풀어 주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맨 나중에 고용된 사람들처럼,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지만 장터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일꾼들, 즉 9시, 12시, 오후 3시까지 고용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더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점점 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어떤 이들이 보입니까? 이 세상에는 자신이 저지른 큰 죄로부터 결코 헤어나올 수 없다고 낙담하는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과 그 결과가 사람들에게 끼친 해악이 너무 커서 ‘용서’를 꿈꾸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는 법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큰 죄악의 대가인 ‘죽음’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절망하는 이들입니다. 맞습니다. 작든, 크든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죄인인 인류는 이것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진실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만 진실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하느님이신 그 생명, 그 ‘보배로운 피’로 인류의 모든 ‘죗값’을 무셨습니다. 장사 되셨을 때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죄도 그 무덤에 묻혔습니다. 사흘 만에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그 무덤 속에 남겨두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같은 죄 용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더욱이 그 은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원수’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역사와 사회에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친 이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죄 용서의 은총은 ‘자신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라고 절망하는 이들도 포함합니다. 교회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언제나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은총이 베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똑같이 죄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보다 그들의 죄가 훨씬 더 크기에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만일 그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른 아침에 온 그 일꾼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맨 나중에 온 이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했다”라고 자신들의 ‘공로’를 주장했습니다. 똑같은 대우는 부당하다고 따졌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자신을 내세울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성실히 신앙생활 해 왔는지 기억해달라고 주님께 항변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재미를 멀리하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달라고 항변할 때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친 자신과 엉터리로 신앙생활 한 그들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말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얘야, 나는 너에게 잘못한 일이 없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고, 너의 죄와 허물을 내 피로 덮어 용서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를 위해서도 죽었고, 그의 죄와 허물도 내 피로 덮어 용서했다. 네게 이미 선물한 그 은총에 좀 더 집중하려무나. 오늘도 너를 내 식탁에 데려온 나의 마음을…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죄 용서에 있어서 주님보다 관대한 분은 없습니다. 더욱이 죄 용서의 은총, 그 관대하심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죄 용서를 받을 만큼 거룩하게 살아온 사람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은 누구도 죄 용서의 은총으로부터 제외되지 않으니 절망하거나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큼 공로를 쌓아온 사람인지 돌아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죄 용서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은 인간의 공로(행동)와 상관없이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 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자기 공로로, 자기 행동 따위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그런 착각은 멀리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내용이자 복음의 핵심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는 인간의 불평과 하느님의 자비가 대조됩니다. 인간의 악함과 하느님의 선하심이 대조됩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사건을 경험하고도 불평과 원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약속된 품삯을 받았으면서도 타인이 누리는 은총을 시기하며 불평하는 일꾼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런 불평의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을 간직한 바울로의 교훈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생의 모든 것으로 삼은 ‘사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다 고난을 받는 일마저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교훈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날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나 행동을 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뿐 아니라 희망 없던 모든 인류를 위해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연약한 우리를 불러 하늘나라 일에 참여시켜 주셨습니다. 1데나리온으로 상징되는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도 똑같이 선물해 주셨습니다. 더욱이 하늘나라를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오늘도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도록 거룩한 식탁에 모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어난 기쁜 소식입니다. 보상하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을 기대하십시오. 대반전의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남과 나를 비교하다가 꼴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자신이 받아 누리고 있는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소중합니다.

사실, ‘감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미 받은 ‘자비의 표시’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감사’는 다른 이들이 이미 세상에 행한 ‘착한 행동들’을 기억하는 ‘가장 숭고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에 베풀어진 이러한 ‘자비와 은혜와 선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특히 오늘날도 우리 곁에는 오후 5시가 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족에게 필요한 양식을 구하지 못해 절망하는 이웃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 시대의 약자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자들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존재합니다. 기쁜 소식이 되는 삶, 선한 이웃이 되는 삶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우리가 주님의 자비와 은혜와 선하심 아래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디, 우리를 하늘나라로 초대하시고 죄용서와 영원한 생명까지 선물하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칩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회의 약자들’에게 ‘자비와 착함(선함)과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됩시다. 왜냐하면, 자비(착함, 사랑)는 또 다른 자비(착함, 사랑)를 계속해서 불러오기 때문입니다(마태 5:7).

감사와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제게 베푸신 그 자비와 선하심과 사랑을 저 역시 이웃에게 나타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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