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13. 연중24주일

대한성공회 송파교회

본기도

주 하느님, 교회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용서와 기쁨을 얻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4:19-31
  • 시편 – 114
  • 독서 – 로마 14:1-12
  • 복음서 – 마태 18:21-35

연중 24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용서의 실천,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이자 의무’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홍해’(갈대 바다)를 건넌 이야기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가 그들을 보호하셨고, 인도하셨다는 구원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과 이집트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간 ‘파라오의 잘못된 선택’이 빚어낸 ‘슬픔’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흥미롭게도 이집트 땅을 출발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코스인 ‘해안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홍해바다에 이르는 광야길’로 돌아갑니다. 어째서 그 코스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출애 13:18).

열 번째 재앙(최초의 과월절 사건) 후, 마침내 이스라엘은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떠납니다(출애 12:40-41).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성취되었습니다(창세 15:13-14).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 언약하신 대로 ‘약속의 땅’을 향한 역사적인 첫발을 떼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약속의 땅)까지 가는 ‘일반적인 코스’인 지중해변에 있는 ‘해안 길’로 갈 줄 알았습니다. 그 코스는 고대로부터 무역로였기에 편할 뿐 아니라 음식과 물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최단 코스’여서 4, 5일이면 넉넉히 ‘약속의 땅’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해안 길’로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안 길’은 이집트 국경수비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 그 코스로 가다가는 ‘블레셋’과 전쟁을 치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집트 땅을 갓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바뀌어 되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출애 13:17).

이 모든 일을 내다보신 하느님은 ‘최단 코스’가 아니라 그들이 ‘안전’할 수 있는 길을 친히 ‘선택’하셨습니다. ‘홍해 바다’에 이르는 ‘광야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길’로 행군하는 그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출애 13:21-22).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에게 임재하신 ‘하느님 현현의 상징’이었습니다. 시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향한 보호와 인도를 끊임없이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친히 해방하셨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친히 보호하셨으며, 약속의 땅에 이르는 모든 여정을 친히 주장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 제사에서, 특히 명절(과월절, 오순절, 추수절) 때마다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이 위대한 구원 이야기를 기념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옛 언약의 성취를 되새기며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혼란스럽게 들리는 지시를 모세에게 내리십니다. 그동안 가던 길을 돌이켜 해변에 ‘진’(陣)을 치라고 명령하십니다(출애 14:2). 군사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매복’(埋伏) 명령입니다. 《출애굽기》는 그 이유를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군대를 유인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출애 14:3-4).

모세를 위협하던 파라오는 장자의 죽음으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인가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출애 12:31-32). 그는 “모세가 말한 대로”(출애 5:1-3) 가서 하느님을 예배하도록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신 심판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도망쳤다는 정보를 듣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해 왔습니다.

해변에 진을 치고서 이 광경을 본 이스라엘은 질겁을 합니다. 홍해바다와 이집트 군대 사이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 악담과 조롱, 왜곡된 현실 인식을 쏟아냅니다. 그들의 말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신들의 구원이 다가온 순간, 마치 하느님이 멀리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불신앙과 공포로 반응했습니다. 모세는 그들 앞에서 큰 용기로 소리칩니다.

두려워 말라. 움직이지 말고 오늘 야훼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보아라. 너희가 오늘 눈앞에 보는 이집트인들을 다시는 보지 않게 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터이니 모두를 진정하여라. – 출애 14:13~14

이 선포를 하던 순간, 모세 자신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구원하실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출애 14:15-16). 그렇지만 그 결과만은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직접 구원하실 것이고, 이집트인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위대한 구원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들었습니다.

이처럼 1독서 《출애굽기》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회상이자, 자신들의 현재가 누구 덕택에 가능한지에 대한 찬미입니다. 그날 이스라엘은 오늘 《시편》처럼,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 군대로부터 건지셨다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출애 15:1-21). 하지만 저는 그 승리의 노래를 듣고서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기쁨을 승리의 노래로 담아냈지만, 하느님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왜냐하면, 홍해바다에서 몰살당한 이집트인들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출애굽기》는 이 모든 일이 하느님이 친히 주관하셨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날 이스라엘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그 연속된 구원의 사건의 맨 앞자리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 모세가 자리합니다. 모세는 그 모든 구원사건을 위한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특히 홍해바다를 건넌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모세가 하느님의 종임을 믿게 되었습니다(출애 14:31).

반면에 이집트인들이 겪은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의 맨 앞자리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하느님을 향해 대항한 ‘파라오’가 자리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 모든 불행한 사건의 원인임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 원인임을 보았다 하더라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자신의 손에 백성의 고통과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선택의 힘’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백성을 살리는 일이 파라오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과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공동체를 죽음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죽음을 가져온 원인이자, 특히 하느님의 슬픔의 원인이었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무엇을 배웁니까? 한 사람의 태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민족의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고, 민족에게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에 ‘책임’이 있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마저 고통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는 원인이 됩니다.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거룩한 구원 이야기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합니다.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과 의무’가 무엇인지 고요히 묵상해 봅니다. 또 자신이 탈출을 시도해야 할 그 옛길, 자신이 찾아서 걷고 있어야 할 ‘새로운 길’(선택)이 무엇일지 성찰해 봅니다. 1독서 《출애굽기》를 묵상해나가면서 그 옛길과 새길을 발견할 지혜를 기도하십시오.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그 ‘선택과 의무’는 복음 이야기에서 좀 더 깊이 다룰 것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14편>은 1독서 《출애굽기》로 낭독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는 찬미입니다.

《시편》에는 ‘할렐’(Hallel,‘찬양’이라는 뜻)이라는 제목이 붙은 세 묶음(113-118, 136, 146-150편)의 시(詩) 모음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함께 엮었습니다. 그중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구원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한데 엮은 시들이 있습니다. 이 시들을 ‘이집트 할렐시’(찬양시)라 부릅니다. <113편~118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할렐시’들을 ‘과월절 의식’의 일부로 사용했습니다. 전반부인 <113-114편>은 식사 전에, 후반부인 <115-118편>은 식사 후에 불렀습니다. 예수님도 ‘최후만찬’ 자리에서 이 전통을 따르셨습니다. 만찬 후에는 ‘할렐시 후반부’를 부르시며 유다의 배신이 기다리는 올리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마태 26:30).

그림: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고자 입맞춤하다, James Tissot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고자 입맞춤하다, James Tissot, https://www.brooklynmuseum.org/opencollection/objects/4555

전체적으로 <114편>은 질문과 답의 구조입니다. 물론 시인은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답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이 찬미하는 그 전능하신 분이 누구신지, 그 자비하신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라고 전례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신 분은 누구인지 맞추어 보라고 질문을 합니다(1절). ‘유다’를 자신의 ‘성소’로, ‘이스라엘’을 자신의 ‘영토’로 삼으신 분이 누구인지 맞추어 보라고 계속해서 전례적으로 질문을 합니다(2절).

이어서 자연, 즉 바다와 요르단강과 산들과 언덕들을 ‘의인화’합니다(3-6절).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에서 ‘홍해바다’는 도망쳤고, 그 여정의 끝에서는 요르단강은 뒤로 물러섰습니다. 산들은 염소처럼 뛰놀았고, 언덕들은 양처럼 뛰었습니다. 피조물인 자연이 그 같은 ‘경외심’으로 반응한 원인이 무엇인지 맞추어 보라고 계속해서 전례적으로 질문을 합니다.

마침내 시인은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합니다(7절). 피조물인 ‘자연’이 ‘경외심’으로 반응한 이유는 이스라엘과 함께 행진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땅마저도 자신의 주인이신 ‘창조주’ 앞에서, ‘야곱의 하느님’ 앞에서 ‘경외심’으로 반응하라고 불러세웁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특히 이 전례를 기념하는 공동체원들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임재 앞에서 더 ‘책임’ 있게 ‘반응’해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건을 더 언급합니다(8절). 하느님께서는 ‘바위’를 ‘못’으로 바꾸셨고 ‘단단한 반석’을 ‘샘’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은총으로 광야를 지나던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이 마실 수 있었습니다(출애 17:1-7; 민수 20:1-13). 이처럼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은총이었고, 온 천하는 경외심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강력한 임재 속에서 이루어진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원사건이자 그들 신앙의 근원입니다. 《시편》 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 속에서 일어난 출애굽’(구원)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절대적입니다. 정말이지 출애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옛 언약의 증거’이자 ‘구원 행위의 중심’입니다. 그들 삶에서 ‘의무’로 ‘기억’되어야 했고, 특히 그 구원의 날을 기념하는 과월절 전례(식사)에서 찬미로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느님의 임재’ 속에 이루어진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이 그리스도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육신’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덕택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주신 ‘새 언약의 증거’이자 ‘구원 행위의 중심’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신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끊임없이(의무로) 기억하고, 감사로 기념하기 위해 ‘성찬례’로 모였습니다.

일찍이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내신 후 그들을 자신의 ‘성소’와 ‘영토’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느님의 ‘선민’이 되고(신명 14:1-2), 하느님은 그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을 잘해서나 공로 덕택에 받은 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총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믿음 덕택입니다(창세 12:2). 그러나 그들은 이 ‘위대한 영광’에서 빗나갔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이제, ‘교회’인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1고린 6:19).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덕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써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교회인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7). 오늘도 우리는 감사성찬례를 바치며 이 모든 일이 진실임을 확인합니다.

특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바위’를 ‘못’으로 바꾸셨고, ‘단단한 반석’은 ‘샘’이 되게 하시어 광야를 지나던 목마른 그들이 마시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과 함께 ‘하늘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수를 얻습니다(요한 7:37-39).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선택’한 일이야말로 자신과 가족과 민족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입니다. 이것이 단지 하나의 구호가 아니라 진실임을 우리는 사랑의 삶으로 이 사회 속에서 살아내야 합니다.

2독서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이 ‘행동 선택의 기준과 의무’로 삼아야 하는 ‘대원칙’에 대한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행동 선택의 기준’을 바울로는 제시합니다. 다른 신자와 ‘신념’이 다를 때 어떤 태도로 행동하고, 교회의 평화를 이어가야 할지 실질적으로 권면합니다. 그 권면이 <14장> 전체에 녹아있습니다. 오늘 배정한 본문은 그 ‘전반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편지 수신인인 로마에 있는 교회는 다양한 신자로 구성된 일종의 ‘다문화공동체’였습니다. 그 안에는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처럼(사도 18:1-3),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도 있었고, 이방인 출신의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하층민과 노예 출신이었지만, 여러 지방 출신의 로마 시민권자도 있었습니다. 바울로는 편지를 쓰면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초대교회가 겪고 있던 ‘문제’(갈등)들이 전면에 등장합니다. 크게 보자면 그 문제는 ‘율법 준수’와 관련됩니다. 《사도행전》에도 전해지듯이 그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 내부의 갈등을 초래했습니다(사도 11:1-10; 15:5). 또 각 지역에 자리 잡아 가던 초대교회 사이의 교제에 있어서 갈등의 원인이기도 했습니다(사도 15:1-2; 1고린 8:1-10; 갈라 2:11-13; 골로 2:16, 20-23; 1디모 4:3-5). 특히 ‘할례’와 ‘음식 규정’을 따르는 문제가 그랬습니다. 본문은 ‘음식 규정’을 준수하는 ‘신념’을 두고 벌어진 ‘갈등’에 대한 건전한 행동 권면입니다.

유대교에는 지켜야 할 ‘음식 제한 규정’이 많았습니다(레위 11:1-47; 신명 14:3-21). 고대로부터 이 음식 규정들을 준수함으로써 자신들을 유대인으로 구별하였습니다(다니 1:8-13).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코셔 푸드’라고 해서 이 전통을 준수합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 때도 식사에는 유제품과 육류가 함께 나오지 않았는데,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도 그 ‘음식 규정’을 따르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정 음식(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채식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 중에는 먼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가 섞여 있었습니다(1고린 8:1-10).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고기는 ‘부정하다’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고기 먹는 일을 거절하고 ‘채식’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엄격하게’ 음식 규정을 지키는 ‘금욕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자들입니다.

반면에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음식 규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마셨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우상’이란 존재하지 않고(1고린 8:4),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善)하게 창조하셨으며(1디모 4:3-5),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마태 15:16-18)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신념’이 다른 이들이 한 공동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로는 이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갑니까? ‘믿음이 강하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나무라지 말고 반가이 맞으십시오. – 로마 14:1

자유롭게 음식을 먹고 마시던 신자들은 ‘음식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신자들’을 향해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특정 규정을 지켜가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신자들을 향해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로는 자칭 ‘믿음이 강한 사람’들을 향해 권면합니다. 나와 신념(확신)이 다른 믿음이 약한 사람을 시빗거리로 삼기보다 ‘그의 신념을 존중하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다음 두 그룹 모두를 향해 경고합니다. 서로를 판단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 서로가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점을 똑똑히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판단하는 사람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의 종도 아닙니다. 판단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그들의 주인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자 서로를 향해서 ‘형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주제넘은 월권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적절합니다.

이어서 바울로는 음식 문제뿐 아니라 ‘특정한 날’을 더 좋은 날로 기념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합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주장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는 안식일, 명절, 축제일 등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골로 2:16-22). 그런 유혹을 받는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갈라 4:9-11). 그러나 사도들은 ‘이방 세계’처럼 특정한 날을 ‘신성시’하거나, 특정 명절을 우선하여 지키는 일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특정한 날을 더 좋게 여겨 신앙을 위해 철저히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유인 출신의 신자들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일을 강요당하는 노예 출신의 신자들이나 하층민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 성찬례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주일에도 일해야 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평일 성찬례나 기도 모임 시간을 더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비상시국이니 정부 방역 지킴을 존중해야겠지요.

“어떤 날을 특별히 더 좋은 날로 여긴다.”라는 표현이 나왔으니 ‘교회력’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등은 교회력을 지킵니다. 교회력의 근간은 ‘대축일’과 ‘재일’입니다. 다른 날들보다 ‘최우선’하여 지키는 ‘특별히 더 좋은 날’인 셈입니다. 그 외에도 교회력에는 우선순위를 두고 지켜야 할 ‘주요축일’, ‘축일’, ‘기념일’도 있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는 상대적으로 좀 더 자유롭게, 바울로의 표현대로 하자면 “어느 날이나 다 같다”라고 여기며, 교회 형편에 맞게 신앙생활을 안내합니다.

어느 편이 더 옳을까요? 바울로에 따르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바울로는 그런 일로 논쟁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력 준수가 주는 유익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준수가 우리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음식 규정 준수의 문제처럼 명절이나 절기를 특별한 날로 지키는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 부차적인 일일 뿐입니다. 실제로 바울로는 여러 교회에 서신을 보내 그런 부차적인 일들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교훈했습니다(1고린 8:1-10; 갈라 4:9-11; 골로 2:16-22; 1디모 4:3-5). 오히려 그런 부차적인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이야말로 유대교와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루하루를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삼아 ‘감사’로 하루의 문을 열고, 감사로 하루의 문을 닫으면 될 일입니다. ‘사랑의 섬김’을 통해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나날들을 ‘가치’ 있게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날들, ‘열두 달’이라는 달들, ‘계절과 해’, 그 자체에 무슨 특별한 ‘기운’이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숭상하게 하는 유치한 미신에 속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무엇이 중요한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와 신념이 다른 이를 비판하며 죄를 짓기보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신념’(지혜의 빛,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될 일입니다. 한마디로 각자가 알아서 자기 신념대로 살아갈 일입니다(5절, 22절).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음식 규정 준수나 특정한 날(교회력)을 기념하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일”입니다(6-8절). 다시 말해 ‘주님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행동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대원칙’입니다.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행동 선택의 기준’입니다. 교회의 평화를 이어가는 힘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특정한 날을 지키는 일이든, 음식 규정을 지키는 일이든, 그렇게 하지 않는 일이든, 무엇을 하든지 행동 선택의 기준은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 목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유익이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진실을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인은 ‘삶의 주인’이 자기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소유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9절).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삶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지배하십니다. 우리를 이것을 고백했기에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서 ‘피 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형제’를 시빗거리로 삼거나 멸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10-12절) 바울로는 우리가 ‘형제를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라고 강하게 반박합니다(10절).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10절).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느님께 자백할 것이며(12절), 책임을 져야 한다고 경종을 울립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히 참된 주권자이심을(11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해 상기시킵니다(이사 45:23). 우리는 다만 그 주권 아래 있는 ‘하느님의 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비’로 관계해야 합니다. 차라리 ‘형제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제한’하는 이가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로마 14:13-21).

사실, ‘진정한 자유’는 자기 신념이나 생각대로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하는 ‘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는 그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나로부터의 자유’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의 ‘신념’(지혜의 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주님의 소유, 주님의 종이라는 이 진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부디 우리 행동 선택의 대원칙인 “주님을 위해서”를 실천하면서 ‘평화’를 이어가는 우리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하늘나라 시민의 삶의 태도인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택’,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의무’인 ‘용서의 실천’입니다. 형제(자매,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용서의 삶이 자신을 살린다.’라는 교훈입니다. 이것이 1독서 《출애굽기》를 다룰 때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입니다. 우리 자신이 찾아서 걷고 있어야 할 ‘새로운 길’입니다.

물론, 누구나 ‘용서’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용서’라는 말을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과 마음과 영혼에, 이 사회에, 우리의 미래에 엄청난 유익을 주는 일이 ‘용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진실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전반부(21-22절)는 베드로가 질문한 ‘용서의 빈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후반부(23-35절)는 하늘나라를 가르치는 ‘특례 비유’로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성품’과 ‘용서의 당위성’을 교훈하십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최근 자신을 괴롭혀 온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옵니다. 같이 생활하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문제 때문입니다. 사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제일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은 ‘좌우편’이라는 ‘자리다툼’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 마태 18:21

유대인에게 있어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창조 이야기’에서 듣듯이 ‘완전’, ‘완벽’, ‘최종’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그때까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최고의 빈도’를 말한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살다 보면 더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한계순간’이 있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습니다. ‘고의’라고 느껴질 정도로 반복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거나 ‘상처’를 안겨주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도 그런 ‘한계순간’을 맞이했을까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제자단은 함께 살아가기 버거운 사람들의 구성입니다. 그들 사이의 ‘서열’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그들 사이의 ‘서열’을 좀 더 명확히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런 ‘한계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관대한 사람’인지 ‘과시’하기 위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변의 동료들을 둘러보고 나서 ‘일곱 번의 용서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라면서 예수님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 정도 아량이면 제자 중에 자신이 ‘으뜸’이지 않겠느냐고 동의를 요청하는 눈빛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이미 정답을 말했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예수님은 빙긋이 웃으십니다.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마태 18:22

곁에서 듣고 있던 제자들도 우리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490번의 용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 알아들었습니다. 그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의 숫자’를 헤아리면서 490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에서 ‘용서의 계산기’ 자체를 내버리라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용서의 삶을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셀 수 없이 반복되는 ‘무한한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카인의 후예인 ‘라멕’이 부른 ‘복수의 노래’와 정반대입니다(창세 4:23-24). 라멕처럼 살아간다면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살아간다면 평화가 꽃피어나지 않을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술렁이고 있는 제자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후반부’입니다.

그림: 무자비한 종이 자비를 구하다, Eugène Burnand

무자비한 종이 자비를 구하다, Eugène Burnand, http://www.eugene-burnand.com/

후반부(23-35절)는 그 유명한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라고 제목을 좀 무시무시하게 붙여놓았습니다. 흔히 이 비유를 ‘특례 비유’라고 말합니다. 현실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그런 비유라는 뜻입니다. ‘용서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의도적으로’ 말도 안 되는 ‘빚의 대조와 탕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대조되는 ‘빚의 양상’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첫째 채무자가 진 빚은 ‘1만 달란트’이고 둘째 채무자가 진 빚은 ‘100데나리온’입니다. ‘1만 달란트’는 어느 정도의 돈일까요? ‘데나리온’이라는 화폐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데나리온은 예수님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1달란트’’(약 20~40kg의 금)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1달란트’는 ‘16년 치’ 품삯입니다. 비유에는 ‘1만 달란트’라고 했으니 ‘16만 년 치’ 품삯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터무니 없이 많은 액수입니다. 어쩌다 그리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사람보다 60만 배나 많은 빚을 ‘왕’에게 진 사람입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던 ‘왕’(하느님)은 그런 사람이 애걸하기에 ‘가엽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왕을 찾을 수 없기에 이해하기 어렵지만, 비유니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는 나가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진 동료’를 만나자 ‘무자비’하게 굴었습니다. 자기 동료를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던 다른 종들이 분개하여 왕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왕은 몹시 노하였습니다. 자기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그 ‘무자비한 종’을 다시 불러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비유를 듣고 ‘그 놈 쌤통’이라며 통쾌하게 여긴다면 비유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은 겁니다. 그 ‘무자비한 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우리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유에 따르면, 베드로와 우리는 하느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모든 인생의 그 ‘많은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이 일은 비유에나 존재하는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첫째 채무자처럼 형제(자매, 이웃)가 우리에게 ‘약간의 빚’(잘못)만 져도 ‘무자비’하게 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우리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형제의 잘못’은 우리가 하느님께 행한 잘못에 비한다면 ‘지극히 작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여기서 우리의 고민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나에게 잘못한 형제의 일이 결코, ‘작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와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며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 마태 18:35

‘용서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아피에미’(ἀφίημι)는 “멀리 보내다, 풀어주다, 허락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우리의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선택’(choice)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용서’는 단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통을 무시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정말이지 ‘용서’는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든 사람이 저지른 그 행동에 대한 나의 ‘의지적인 결정’(선택)을 수반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두 당사자 간에 화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기적적인 포옹과 눈물의 재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용서하기로 ‘선택’(결정)한 그 사람(이제는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은 우리가 그런 ‘의지적 선택’(결정)을 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압니다. 그 상처와 분노와 적의를 더는 짊어지고 다니지 않기로 ‘의지적인 선택’(결정)을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1만달란트나 되는 ‘짐’(빚)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용서하기로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순간 우리 어깨에 있던 그 무거운 짐이 내려졌음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습니까? 결코, 그를 용서하기 싫습니까?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형제(자매, 이웃)를 용서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1만달란트의 빚(짐)을 짊어지고 다닐 것인지, 내려놓을 것인지, ‘결정’(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감사성찬례는 그 빚을 벗는 의지적인 선택을 하라는 초대입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죄의 고백’과 ‘사죄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만큼 ‘용서와 화해’는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예배하는 삶의 핵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주의기도’를 바치는 이유도 ‘용서와 화해’에 있다는 점을 여러분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오늘’만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명백히 교훈합니다. 그것은 ‘용서의 실천’입니다. 작고 큰 ‘관계들’을 떠날 수 없는 우리에게, 자비의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결정적인 한 가지 일이 ‘용서의 실천’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나라 시민으로 초대받은 제자답게, 우리는 ‘용서’라는 ‘대원칙’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성품’과 ‘용서의 당위성’을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히 용서받은 은총의 사람이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만일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 ‘용서의 원천’(근원)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용서’는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선택’(choice)을 필요로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의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용서’는 우리의 ‘선한 감정’이 원천인 것도 아닙니다. 만일 용서를 우리 ‘의지’나 ‘감정’ 차원의 일로만 강조한다면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끊임없이 ‘죄책감’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심리학적으로든, 상담학적으로든 ‘용서’는 건강한 삶에 있어서 필수조건입니다.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 ‘용서’는 우리가 ‘외상 후 장애’로부터 더 나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용서를 통해 마음의 치유를 경험했다”라고 인정합니다. 어느 심리상담 프로그램이든지 치유 과정에 ‘용서하기’를 넣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분명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용서’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또 사회학적으로도 ‘용서’는 그 사회 전체의 의식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는 진정한 ‘변화의 힘’입니다. ‘넬슨 만델라’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물질이 풍요로워야 비로소 그 사회 전체의 의식이 성장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 ‘사회 정의’를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의’보다 ‘강한 힘’이 ‘용서’입니다. 우리는 자행된 ‘악’을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에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서’는 자행된 ‘악(惡)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현재의 자기를 성장’시키려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증오와 불의를 만들어낸 ‘과거의 사회적 조건’을 바꾸어 ‘용기 있게 미래 사회로 나가자’라는 엄숙한 요청이 ‘용서’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용서의 삶’은 그런 심리학적, 상담학적, 사회학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것 이상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용서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당위)라고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무’를 넘어선 인생의 가장 강력한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용서의 원천’은 연약한 우리의 ‘의지’와 ‘감정’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의 진정한 원천’은 우리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용서의 은총’입니다. 정말이지 우리를 향해 베풀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원천’입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에서 그 은총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용서는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한 결정적인 한 가지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1독서 《출애굽기》를 새기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쁨’과 대조되는 이집트 백성의 ‘슬픔’을 보았습니다. 이집트 백성을 살리는 일이 파라오의 ‘의무’였습니다. 그의 손에는 백성의 고통과 죽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선택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공동체를 살려야 할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죽음의 길로 이끌고 간 죽음과 슬픔의 원인이었습니다.

과월절 전례에서 부르는 ‘할렐시’ <114편>을 통해 우리가 누구이고, 성찬례가 무엇을 기리는 거룩한 시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임재 속에서 일어난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죽음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이제는 ‘교회’인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선택’한 일이야말로 자신과 가족과 민족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입니다.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신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끊임없이(의무로) 기억하고, 감사로 기념하기 위해 오늘도 ‘성찬례’로 모였습니다.

2독서 《로마서》를 통해 우리 행동 선택의 기준이자 의무로 삼아야 하는 대원칙이 ‘주님을 위해서’라고 배웠습니다. 그 대원칙에서 나온 행동만이 자신과 공동체를 살린다고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유익이나 기쁨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념’(지혜의 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형제(자매)를 판단하거나 멸시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소유,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자비롭게 대하면 평화가 함께 합니다.

복음 이야기를 통해서는 하늘나라 시민의 삶의 태도인 ‘용서의 실천’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용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용서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한한 은총 속에 살아가면서도 정작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자녀다운 삶에서 아직 멀리 있는 셈입니다.

분명, ‘용서의 실천’을 위해서는 ‘의지적인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용서’는 인간 ‘내면’에서 저절로 나오는 ‘미덕’이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의 ‘의지’와 ‘감정’이 용서의 원천일 순 없습니다. 용서의 진정한 ‘원천’은 우리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한량없는 용서의 은총’입니다. 정말이지 용서의 원천은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게다가 용서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해서’ 만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는 빚지고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일만큼이나 용서하는 일도 절대적임을 우리는 압니다. 한 번의 용서는 지옥으로 기울어진 내 삶의 저울추를 한 눈금 천국으로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를 통해 풀려나는 죄수는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용서는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한 결정적인 한 가지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이 대원칙이 제대로 작동할 때 교회는 빛을 발합니다. 교회 안에는 시빗거리를 찾는 사람이나 심판관이 아니라 용서를 실천하고, 평화를 일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서로를 향한 용서의 실천,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가장 위대한 선택이자 의무입니다. 성찬례는 우리가 용서와 화해자로 세상에 파송되는 시간입니다. 아무쪼록 하느님께 이미 선물 받은 용서와 기쁨의 은총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깊이 깨달아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신 참된 용서와 기쁨의 증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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