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6. 연중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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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해마다 9월 첫 주일은 대한성공회가 여성선교 활성화를 위하여 지키는 여성선교주일입니다. 올해는 안전한 교회 만들기라는 주제로 전국의 모든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해 오신 수많은 여성들을 통하여 오늘의 교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앞으로도 하느님 나라 선교에 헌신하는 더 많은 여성 교우들과 지도자들이 육성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기도

주 하느님, 우리보다 항상 앞서 가시며 이끌어 주시나이다. 구하오니,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어 언제나 바른 길로 가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나라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로 여성들을 불러 주셨나이다. 비오니, 대한성공회의 여성들이 교회의 선교를 이끌고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또한 이 땅에서 수 많은 차별과 혐오, 폭력이 자행되는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와 안전이 깃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12:1-14
  • 시편 – 149
  • 독서 – 로마 13:8-14
  • 복음서 – 마태 18:15-20

연중 23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교회, 시대를 살리기 위해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하느님께서 친히 과월절을 제정하신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정체성의 상징이 된 과월절의 유래입니다. 《출애굽기》라는 이름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집트 노예로부터 자유민이 된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지속시키는 연대의 중심에는 이 명절(과월절 축제)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이 명절을 지키며 ‘선민’(選民)이라는 자의식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 명절을 지키는 ‘의식절차(儀式節次)와 식사법’에 대한 ‘세부지침’이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월절에 대한 지침부터 세우십니다. 먼저 그들은 ‘달력’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새해’는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달로 시작’해야 합니다. 어째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달력부터 새로 만들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것이 변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달은 그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새롭게 출발한 인생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기 2020년’에도 이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Before Christ; BC)과 기원후(Anno Domini; AD)가 나뉩니다.

그런 다음 각 가정은 과월절을 지키기 위해 ‘새끼 양’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새끼 양으로 해야 할 ‘의식’(儀式), 즉 ‘희생 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7절). ‘새끼 양을 잡는 일’로 대표되는 그 ‘의식절차’의 시작은 새해의 시작, 즉 그들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달 십사일 해 질 무렵’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였을 때 치러야 합니다(6절). 이 구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가 ‘과월절 희생양’을 도살하던 ‘성전 전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삽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부터 이 ‘의식’(儀式, 희생 제사)은 ‘성전’이 아니라 ‘가정단위’로 치러졌습니다. 다시 말해 ‘성전 전례화’되기 이전부터 ‘가정단위’로 이 명절을 기념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이 파괴된 후 바빌론 포로 살이 중에도 유대인들은 이 명절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포로기 이후 이 ‘의식’(儀式, 희생 제사)은 성전에서 봉헌되는 전례로 공고히 되었습니다. 특히 신약시대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 오는 가장 큰 명절(과월절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던 그 시간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과월절 어린양’이 희생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의식절차와 식사법’에 대한 ‘상세한 지시사항’은 본문이 모세 당시보다는 ‘포로기 이후’(기원전 539년)의 산물이라는 더 명확한 증거입니다. 결국 ‘포로기 이후’에 그들이 기념하던 방식으로 본문이 전체적으로 채색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그들 정체성의 상징인 이 명절(과월절 축제)을 기념하는 의식절차와 식사법의 중심에 ‘새끼 양’이 있습니다. 그 새끼 양의 희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무엇인가(누군가)의 희생과 죽음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이치이자 원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일을 체험합니다. 오늘 아침 식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의 밥이 된 쌀 한 톨마다 땅과 하늘, 햇빛과 구름, 바람과 비, 농부의 수고와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쌀은, 은유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위한 밥이 됩니다. 우리는 식탁에 올라온 그 밥이 거룩한 희생의 산물이자 많은 사람(특히 아내나 어머니)의 수고가 담겨 있음을 감사하며 먹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살리는 밥(희생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먹습니다.

아기들이 자라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과 죽음으로 내어주는 엄마의 사랑 덕택에 아기는 생명을 영위합니다. 엄마(나중에는 어머니)의 생명력은 날마다 새어 나가지만 아기(자녀)의 생명력은 날마다 커갑니다. 물론, 엄마(어머니)는 자신의 그 희생과 죽음을 기뻐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났고, 언젠가 자녀들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명을 이어가고, 삶을 영위하는 이치(원리)는 무엇인가가(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과 죽음의 선순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체 상호의 돌봄과 생명 제공의 사슬 관계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희생과 죽음은 손실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생명이고, 또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생은 이 원리(이치)를 역행하려 합니다. ‘자기희생’을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밥이 되어주기보다는 타인을 자신의 밥으로 삼으려고만 합니다. 확실히 ‘죽음’은 인류에게 ‘원수’(敵)입니다. 그러나 삶의 원리처럼 어떤 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는 역설도 진실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과월절은 ‘새끼 양의 죽음’이 가져올 역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있게 될 새끼 양의 죽음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죽음은 노예와 억압, 그들 가운데 군림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는 ‘거룩한 희생’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집트인들 사이에서 있게 될 ‘죽음’은 ‘파멸과 비극’이 될 것입니다. 새끼 양의 죽음은 그의 생명을 끝내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앞으로 나서게 될 ‘자유인의 여정’(旅程)을 향한 ‘양식’과 ‘삶의 희망’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처럼 ‘새끼 양의 죽음’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원수(敵)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문’입니다. 죽음의 역설이고 삶의 이치입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과월절을 친히 제정하신 그때는 언제였습니까? 이집트 땅에 마지막 재앙을 예비하고 계셨을 때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이 달 십일에 사람마다 한 가문에 한 마리씩,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마련해 놓아라… 너희는 그것을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 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 출애 12:3~6

이 명령은 그 죽음의 밤을 적어도 닷새 정도 남겨둔 시점에 내려집니다(3절, 6절). 그만한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희생 제사’에 사용할 ‘새끼 양’이 흠이 없음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흘 동안 새끼 양은 가족과 함께 있으며 마치 가족처럼 소중히 여겨집니다. 닷새째 되는 날 엄청난 수의 ‘새끼 양’이 애도 속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이 자신들에게는 ‘생명과 구원’을, 이집트에게는 ‘죽음과 파멸’을 가져올 사건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 그 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가면서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조리 치리라 … 집에 피가 묻어 있으면, 그것이 너희가 있는 집이라는 표가 되리라. 나는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피를 보고 너희를 쳐 죽이지 않고 넘어가겠다. 너희가 재앙을 피하여 살리라. – 출애 12:7, 12~13

과월절의 유래입니다. ‘죽음의 역설’, 즉 ‘삶의 이치’를 발견합니다. 이집트에게는 무시무시한 재앙이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과월절 식사를 하기 전 그 피를 집의 출입구 윗면과 양옆에 발라야 합니다. 그 ‘피’는 인간이 차지할 몫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드리는 유일한 희생물입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갈 것입니다.

이어서 ‘그날 밤 식사법’(첫번째 과월절 식사)에 대한 ‘상세한 지시사항’이 나옵니다. 각 가정에서는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합니다(8절). 내일 아침을 위해 그중 일부를 저장해 두어서도 안 됩니다. 머리, 다리, 내장까지 ‘완전히’ 다 구워서 먹어야 합니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미련을 갖지 말고 불에 살라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중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장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 출애 12:11

그들에게 약속된 해방(구원)의 시간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명령과 함께 즉시 그 땅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 속에서 ‘그들 모두가’ 그것을 먹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과월절 준수에 있어서 필수사항이었습니다. 과월절은 그들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 행사여야 했습니다.

이 모든 ‘의식절차(儀式節次)와 상세한 식사법’이 의도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야기의 끝부분에 전해집니다(14절).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을 ‘해마다’ 기념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인 과월절을 통해 자신들이 한때 ‘노예’였고, ‘떠돌이’였음을 기억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과 자유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임을 해마다 기념했습니다. 그 구원의 날, 자신들을 대신한 ‘새끼 양의 희생과 죽음’을 해마다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마다 과월절 축제를 지켜야 하는 더 근원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못지않게 후손들도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현재 사건’으로 다시 경험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과월절에 희생되는 새끼 양을 통해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 쌓인 ‘적폐’(積弊), 즉 하느님을 망각하게 하는 일들을 ‘청산’(淸算)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현재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식탁에 올려진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기억하게 하려는 목적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혜와 구원을 생생한 현재로 체험하게 하는 ‘원천’이 과월절 축제 준수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사성찬례’에도 해당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과월절 유래를 읽으면서 우리 민족(다문화가정을 차별하는 말이 아닙니다)의 현재를 성찰해 봅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스라엘처럼 한때 주권을 상실하고 억압과 모멸과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스라엘처럼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벌써 75주년이 지났습니다. 해마다 광복절이면 ‘자유민’이 된 우리의 삶을 경축합니다. 다시는 타국에 지배받는 어리석은 민족이 되지 않겠다며 광복절 행사를 거행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라기보다는 외세가 주도한 해방이었다는 점이 민족 분단과 적폐(積弊)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올해 광복절에 있었던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를 두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친일을 청산하라, 대한민국을 광복하라’라는 그 연설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새로 구성된 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반대로 해체되었습니다. 결국,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 세력이 독재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놀랍게도 그들과 그 후손들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지도층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후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문화예술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또 그들이 소유한 부와 권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적폐청산’(積弊淸算)은 아득히 멀게만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민주공화국을 숙주(宿主)로 하여 사회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은 ‘가치관의 전도’(顚倒)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명 비상식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일들이 여전히 정상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수구(守舊) 언론의 조작질이 너무도 심합니다. 기득권자들의 불의는 조직적으로 은폐됩니다. 구속되더라도 풀어주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론을 조작합니다. 국가 경제에 기여(寄與)해 왔다는 논리를 폅니다. 진정한 기여는 수많은 노동자가 하였지만, 그 공로(功勞)는 재벌총수가 차지하는 셈입니다.

더욱이 언제부터인지 우리 국민 사이에는 ‘옳은 일’ 보다는 ‘성공’(성과)이 중요해졌습니다. ‘방향’보다는 ‘속도’가 중요해졌습니다. 정의로운 삶보다는 불의한 출세가 추앙받고 있습니다.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들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른바 ‘학습된 패배주의’가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정서로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군분투하는 오늘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뒤집힌 ‘가치관’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의 비극은 반복됩니다.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방해하는 반민족세력이 건재하다는 점입니다. 비록 외세가 주도한 성격이 강했다 하더라도 ‘다시 빛’(光復)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모두 깨어나서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친일반민족세력과 적폐청산 없이 해마다 기념되는 광복절은 단지 하나의 옛 사건으로 머물 뿐이며, 생생한 현재로 작용하지도 못합니다.

꼭 민족 문제가 아니더라도 가정과 개개인의 삶에도, 빛을 잃고 헤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울부짖던 우리를 하느님께서 건져주신 체험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으로부터 무엇을 배웠습니까? 자신의 삶에 쌓여있는 적폐를 발견했고, 그것들을 청산했습니까? 자신의 고난과 과거로부터 배운 이들만이 비로소 새길을 갑니다. 그들에게만이 진정한 미래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이들만이 자신이 걸어온 시간을 기념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과월절’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과월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과월절 희생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새끼 양은 희생당하기 전 ‘가족과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가족과 함께’ 지냈습니다. 사랑받는 아들이었고 형제였습니다. ‘흠 없는 새끼 양’은 ‘가족’을 위해 한 해의 첫 달인 14일에 희생당했습니다. ‘흠도 죄도 없으신’(히브 7:26) 예수님도 ‘인류라는 가족’을 위한 ‘과월절 양’으로서 아빕월(=니산월 3, 4월) 14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1고린 5:7).

희생된 새끼 양의 ‘피’는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발라야 합니다. 피가 발라진 모양새가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피’는 그들을 죽음의 사자, 즉 하느님의 심판으로부터 지켜주는 ‘계약의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인류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죄와 죽음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1고린 11:23-26). 새끼 양의 고기는 자유를 향해 출발할 ‘가족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몸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생명 양식’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고기를 남김없이 다 먹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도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사역 모두를 다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 고기는 전부가 불에 구워졌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심판과 진노의 불을 ‘온몸’으로 받으셨습니다(요한 1:29; 로마 5:9; 2고린 5:14-15; 히브 2:9-10; 7:26-27; 9:26-28; 10:4-5; 12).

참으로 그 ‘새끼 양’은 장차 오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의 그림자였습니다. 과월절 준비일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요한 19:14,30-31). 그 새끼 양과 과월절 축제라는 그림자를 따라가서 만나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히브 10:4). 그렇습니다. 과월절이 자유인으로 가는 새벽이었듯이 과월절 준비일에 있었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서막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인류와 교회의 영원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히브 10:10-14).

이처럼 ‘그때 거기서’ 일어난 ‘새로운 계약과 구원의 사건’은 오늘 교회가 봉헌하는 ‘감사성찬례 속에서 현재화’합니다. 이천년의 세월을 넘어 성령을 통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는 능력으로 현재화합니다. 해마다 기념하는 과월절 축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 현존의 선포였습니다. 감사성찬례도 교회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성삼위일체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제와 신자 공동의 집전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49편>은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찬미입니다. 1독서 《출애굽기》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의 영광을 주신 하느님을 향한 공동체의 찬미’입니다.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경축하는 ‘예배시’입니다. 그 핵심에 ‘성모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처럼 삶의 역전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비천한 사람을 높이시고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셨다고 노래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 루가 1:51~54

시인은 1독서 《출애굽기》가 전하듯이 짓눌린 공동체를 어여삐 여기시고 삶을 역전시켜 주신 하느님께 찬미(예배)를 바치자고 초대합니다. 동시에 그 예배 행위는 하느님의 구원을 현재에도 살아있는 사건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예배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스런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우리도 감사성찬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그렇습니다. 감사성찬례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영광을 찬미합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된 우리 서로를 감사성찬례 속에서 축하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영원한 승리, 그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거룩한 도구로 성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송됩니다.

2독서 《로마서》는 교회공동체가 부여받은 ‘사랑의 의무’와 ‘단정한 처신’에 대한 당부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랑의 의무’를 통해 교회의 존재 이유를 명백히 제시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 로마 13:10a

교회는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이 말씀 앞에 ‘코로마19 확산’ 원흉으로 지목된 오늘의 교회 모습이 자꾸만 겹쳐집니다. 다음 말씀은 제가 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한없이 부끄러운 교회의 자화상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성경》에는 이 《로마서》 말씀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교회사에서 ‘단정한 처신’을 교훈하는 문단은 ‘성 어거스틴’ (Augustine)의 회심을 가져온 구절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백록」 8권에서 자신의 나이 32세 때 있었던 회심을 기록합니다. 내면의 고뇌로 눈물을 흘리던 그는 근처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을 집어 읽어라. 그것을 집어 읽어라.

The Conversion of Saint Augustine

그는 이 노랫소리를 《성경》을 펴서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알아듣습니다. 그가 집어 든 책은 사도 바울로의 서신이었고, 눈길이 처음 닿은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 로마 13:13~14

이 구절을 읽고 난 후의 감흥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확신의 빛이 밀물처럼 내 마음에 들어오고 모든 의심의 어둠이 사라졌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본문을 들었습니다. 확신과 평안함이 찾아들었습니까? 사도 바울로는 자신의 편지로 그리스도교 물줄기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낸 한 ‘위대한 인물’을 얻었습니다. 방탕하게 살아온 한 인생이 ‘빛의 전사’로 거듭났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삶의 가치를, 삶의 빛을, 충실히 지켜가는 위대한 신앙의 영웅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은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밤거리의 현란한 ‘네온 불빛’에 정신이 팔려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네온 불빛’을 참 빛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참 빛이신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가 구약의 모세처럼, 바로 이 시대의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세우신 보초이고, 파수꾼입니다(에제 33:7).

본래 ‘예언자’는 ‘미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교회는 ‘네온 불빛’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참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여기에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침묵했기에 생겨난 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교회에게 물으십니다(에제 33:8).

1독서 《출애굽기》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모세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라는 그 명령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두의 ‘죽음’, ‘파멸’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사랑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고, 단정하게 처신함으로써 자신들이 참 빛의 자녀임을 증거 해야 합니다.

물론, 남 말하기 전에 자신은 잘하고 있는지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불의’, 자신 안에 있는 ‘적폐’부터 청산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어둠인 교회는 시대의 빛일 수 없습니다. 정말 단정하게 살면서 시대를 향한 예언자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오늘날 교회는 먼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우리 안의 어둠은 무엇인지 성찰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교회 생활, 즉 하늘나라 자녀로 초대받고 예수공동체로 들어 온 이들에게 요청되는 삶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교회 안에 생겨난 갈등 해소의 방법, 교회에 부여된 사죄(赦罪)의 권위, 사랑을 간직한 기도의 힘에 대해 차례로 교훈 받습니다. 《마태오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5묶음의 설교’로 되어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관련설교는 2020. 6.21. 연중 12주일의 복음 이야기를 보십시오). 오늘과 다음 주일 복음 이야기는 ‘네 번째 설교 묶음’인 <18장>에서 배정했습니다. 네 번째 설교 묶음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교회 생활,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하늘나라 시민의 삶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주제입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네 번째 설교 묶음’을 통해 무엇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어느 인간사회나 마찬가지로 마태오가 지도자로 있는 교회공동체에서도 평화를 깨는 ‘교우 간의 갈등’이 주요문제였나 봅니다. 사도 바울로도 ‘교회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교우 간의 갈등’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교훈 한 바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십시오. – 갈라 6:1

사도 바울로는 ‘교회 생활’에 있어서 ‘온유한 마음’과 ‘자기 성찰’을 요청했습니다. 마태오는 평화로운 교회 생활을 위해 예수님의 어떤 말씀과 정신을 모아두었는지 배우기 위해 <18장> 첫머리부터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벌써 ‘두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마태 17:22-23) 뒤, 예수께서는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논쟁 중이었습니다. ‘하늘나라’라고 묻고 있지만, 실상은 ‘메시아 왕국’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왕이 되실 때 그 ‘왕국’에서 그들 중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정말 철없는(탐욕스런) 제자들입니다.

만일 ‘신앙고백’을 통해 칭찬을 들은 베드로가(로마가톨릭이 주장하듯이) 그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이미 낙점되었다면 이런 질문조차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오는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높아지려는 마음’, 즉 ‘명예욕’과 ‘권력욕’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를 부르십니다. 유대인들이 숫자에 넣지도 않던 어린이를 ‘겸손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심지어 어린이를 예수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제자들은 크게 실망했을 것이고,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자녀로 초대받고 예수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은 생각과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주목받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픈 명예욕과 권력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냄새나는 마음’을 품었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을 ‘형제애’로 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정신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조직이나 단체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교회 안에도 그대로 작동한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만일 명예욕과 권력욕에 빠진 이들 때문에 평화에 금이 가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따라서 예수공동체에 들어온 모두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을 예수처럼 받아들이고, 서로를 사랑으로 돌보는 ‘형제애’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겸손과 사랑에 기초한 예수공동체가 명예욕과 권력욕에 기초한 세상공동체와 다르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이 교훈에 이어집니다. 마태오는 평화로운 교회 생활을 위해 예수께서 강조하신 겸손과 사랑의 섬김을 교훈한 후 평화를 깨는 또 다른 주요 요인을 다룹니다. 그것은 교회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죄’의 문제입니다. 본문에 ‘잘못한 일이 있거든’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동사는 ‘하마르타노’(ἁμαρτάνω)입니다. 본래는 “과녁을 빗나가다”란 의미입니다. ‘궁수’(弓手)가 ‘화살’을 쏘는 이유는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맞추어야 할 과녁’은 일차적으로 ‘율법’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하느님의 형상’, ‘기준’, ‘목표’, ‘길’을 뜻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느님이 창조하신(주신) 자신의 가능성, 자신의 최선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 안에서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좌표(질서)에 있지 않고 벗어난 상태, 인생에서 해야 할 자기 일(사명)을 모르는 상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갖는 결정적인 결함(瑕疵)인데, 성경에서는 이런 상태를 ‘죄를 지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마태오는 그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잘못한 일’로 공동체 안에 생겨난 ‘갈등’을 예수님의 정신에 맞게 다루는 법을 교훈할 참입니다. 율법교사 출신으로 보이는 마태오는 《레위기》와 《신명기》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먼저 《레위기》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 레위 19:17-18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에 맞게 공동체 안에 생겨난 갈등을 다루는 기본 정신이자 첫 번째 절차입니다. 그 기본 정신은 ‘정직’(서슴지 말고 타일러 줌)과 ‘아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어른다운 성인의 태도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정직’과 같이 갈 마음은, 2독서 《로마서》 말씀처럼, ‘사랑’(온유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긴 하지만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 정직과 사랑의 마음이 내 안에 세워졌다면 첫 번째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직면’(直面), 즉 ‘직접 만나는 일’입니다. 직접적인 의사소통, 이것이 첫 번째 절차입니다. 좀 이상합니다.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사과’해야지 어째서 잘못한 일도 없는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교회공동체에 상처를 준 그 사람과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혹은 발뺌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에 따르면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그 사람을 ‘내가 먼저’ 만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하느님을 향해 죄지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사건이 ‘성육신’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닮은 겸손의 미덕이 없다면 ‘자기 옮음’(義)만 내세우며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그 사람에게 찾아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른다면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사실, 겸손은 모든 관계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더욱이 ‘내가 먼저 만날 책임이 있다’라는 말은 ‘주도적이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내버려 두면 결국 교회는 논쟁에 휘말릴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속닥거리지 말고 그를 찾아가 둘이 앉아서 ‘사랑’ 안에서 ‘형제적 훈계’(정직, 서슴지 말고 타이름)를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음 주일 복음 이야기에 기록된 것처럼, ‘끝없이 용서할 자세’를 가지고 만나야 합니다(마태 18:22).

실제로 살면서 보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상대방 ‘앞에서’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기 옳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인 사람만이 직접 만나, ‘앞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목적이 아닌 사람은 앞에서 말하지 않고 ‘뒤에서’ 말합니다. 전문용어로 ‘뒷담화를 한다.’라고 합니다. ‘흉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고 갈등과 오해는 더욱 커집니다. 우리는 ‘흉’을 많이 보는 편입니까? 아니면 ‘사랑’을 많이 하는 편입니까? 흉은 언제나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지만, 사랑은 허다한 죄를(허물) 용서해 준다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 1베드 4:8

저는 사제생활 동안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이 편을 갈라 대치하는 모습을 지켜본 아픔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만남의 목표가 화해와 회복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사제생활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화해’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해와 회복, 용서와 사랑의 궁극적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첫 번째 절차인 개인적인 만남에서 ‘회개’나 ‘관계회복’(화해)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신명기》에서 두 번째 절차를 가져옵니다.

어떤 나쁜 짓이든 어떤 잘못이든,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증언이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고소할 수 있다. – 신명 19:15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고, 갈등을 풀고자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을 더 데려가서라도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뒷담화’를 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랑으로 설득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두 번째 절차를 밟는 유익이 있습니다. 항상 관계에서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라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우리는 독단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간 교우들을 통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오류가 바로잡아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성숙한 다른 교우들의 도움으로 잘못을 저지른 교우가 깨닫고, 관계회복의 장으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절차는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라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그를 교회공동체에 계속해서 남겨두려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방법입니다.

두 번째 절차에서도 ‘회개’나 ‘관계회복’(화해)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 마태 18:17a

세 번째 절차는 전체 회중, 즉 교회에 내놓아야 합니다. 이쯤 되면, 그와 관련한 일은 비밀이 아니라 ‘공개’가 됩니다. 교회공동체가 그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사랑의 책임’을 맡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교회가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을 보여주라’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고맙게도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기도가 응답 된다.’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단 두세 사람만이라도 형제를 얻기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면 거룩하신 주님의 현존이 그들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는 다른 무엇이 중심이 아닙니다. 사랑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화해이신 ‘예수를 머리’로 모인 ‘신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가리키는 하느님(神)은 무엇보다도 사랑과 화해에 있어서 전능하십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 자신에게 하느님을 닮은 그런 ‘사랑의 마음’이 있는가, ‘사랑의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속일 수 없는 것이 나를 통해 우리 공동체의 수준이 드러나고, 공동체의 수준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법입니다. 우리 서로는 교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더욱이 교회(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하느님의 나라)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하늘나라’(하느님의 나라) 자녀로 초대받은 우리(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진짜 하느님 나라, 진짜 하느님의 다스리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사랑과 생명입니다. 화해와 일치입니다. 상처 치유와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과 생명, 화해와 일치, 용서와 평화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과 생명, 화해와 일치, 용서와 평화의 사역이 교회(우리) 안에서, 교회(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짓 교회’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모든 일이 단 두 사람의 ‘사랑의 기도’로 가능하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면 ‘가정’에서도 바로 실천 가능합니다. 언제나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고, 교회의 건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우리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랑조차 받으려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 절차가 나옵니다.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 마태 18:17b

무서운 독설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으로 여기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을 모든 절차를 마무리 짓는 최후수단, 즉 파문이나 축출로 이해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주님의 거룩하신 현존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이것은 예수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그같이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예수께서는 베드로뿐 아니라(마태 16:19)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 마태 18:18

교회에 부여된 ‘사죄(赦罪)의 권위’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축출이나 파문으로까지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처음부터 이 마지막 절차인 파문이나 축출을 의도하고 만나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만나는 목표는 ‘형제를 얻는 것’이고, ‘화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이야기 말미도 ‘함께 기도하는 사랑의 책임’과 ‘사랑을 간직한 기도의 힘에 대한 약속’으로 끝맺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는 예수께서 ‘이방인이나 세리들’을 어떻게 대하셨다고 보도합니까? 예수께서는 결코, 그들을 내치시지 않았습니다. 비난하고, 판단하며, 정죄하시기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공감으로 그들을 대하셨고, 믿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1:31).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동체에서 누구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마태 18:10-14).

사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마태오’가 있습니다. 그는 ‘세리’ 출신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공동체’로부터 내침을 당하는 이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 ‘파렴치’, ‘매국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저자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마태오의 이런 경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조차도 포기하지 말고 ‘화해 사역’을 계속하라고 교회공동체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절차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공동체로부터 축출하라고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좀 더 기다려라.’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기다리다 보면 또 기회는 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는 ‘자존심’ 때문에, 혹은 얼마 동안은 상처가 너무 깊어서, 누구의 말도 듣고 싶지 않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성령께서 ‘시간’이라는 ‘약’을 사용하십니다.

자, 그러면 무엇을 원해서 마태오는 이렇게까지 하라고,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자신의 공동체에게 교훈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명’(使命)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깨어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할 헌신적인 ‘생명 공동체’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결론을 다시 한번 새깁니다.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마태 18:19~20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단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기를 원하십니다. 혼자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칫 그런 신앙생활은 고립이나 오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관계의 하느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힘을 북돋아 주시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우리의 믿음, 희망,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의 관계도 사랑이어야 함을 삼위일체 속에서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관계가 완전한 사랑의 일치 속에 있어야 하고,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삼위일체는 계시합니다.

분명 마태오에 따르면, 예수님의 정신은 ‘교회가 논쟁과 갈등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도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마태 18:1)라는 정도의 질문이 아니라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마르 9:33-37)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초대교회’조차도 때로는 ‘긴장과 불일치(불화)를 경험했다’라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사도 11:3, 15:2, 39).

그 긴장과 불일치는 교회사에도 전해옵니다.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을 넘어 점점 확장됨에 따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다른 규범과 관습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긴장과 불일치 속에서도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를 찾아냈습니다. ‘철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신학’을 세웠고, 그 시대의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성경》을 각 나라말로 번역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요즘처럼 그리스도교(개신교)가 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린 때에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비판에 저항하기보다 그 속에서 ‘자기혁신’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의 파수꾼’이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평화의 도구’였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억울한 처지의 ‘사회적 약자들’(가난한 사람들, 새터민,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족, 난민, 소수자)과 연대하는 피난처였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어둠의 행실’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서 속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의 실천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희망을 볼 수 없다며 돌아선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설지도 모릅니다. 교회 자체의 생존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고난 속에 있는 이웃들’을 ‘형제애’로 돌보고 섬기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질 때, 교회 내부의 갈등도 줄고 세상도 교회를 다르게 볼 것입니다. 사실, ‘최후심판’ 이야기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들’은 ‘변장한 예수님’입니다(마태 25:31-46).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전례독서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시대를 살리기 위해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생명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단지 혼자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의 구원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신뢰도 손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할 것이 아니라 예언자의 심정으로 잘못한 형제(자매)의 마음을 바로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접근은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나와야 하고, 형제(자매)를 구원하려는 ‘사랑의 마음’에 기초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자녀로 초대받은 천국 시민의 자질과 태도입니다.

그림: "선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1890

“선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1890

항상 교회공동체의 건강은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사명감’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다면 교회공동체는 무너집니다. 교회의 건강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이웃에게 동참하는 삶,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음으로써 역설적이게도 교회는 삽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이 시대의 문화에 좀 더 유연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품어내지 못할 문화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두 사람의 ‘사랑의 기도’가 삶의 위기, 신앙의 죽음에 처한 형제를 다시 회복시킨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가정에서 바치는 기도가 교회를 지키는 힘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사랑 가득한 공동체의 기도와 실천이 길 잃어버린 바 된 형제를 살린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월절 희생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쳐 구원하신 형제를 다시 ‘생명 공동체로 회복’시킨다고 약속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아무리 위대하고 좋아도 실천, 즉 ‘자기화’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사실, 기도는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이기적 자아는 죽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하느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시간입니다. 삶의 위기에 처한 형제는 살아나고 흉보는 우리는 죽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모아 구하여야 할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욕심’이 아닙니다. 이웃과 겨레의 아픔을 하느님께서 굽어살펴주시기를 구하는 사랑의 기도여야 합니다. 교회공동체가 그 사랑의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해방의 하느님께서는 코로나19의 고난 속에서 신음하는 온 겨레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의 성취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믿고 기도하는 모든 교회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비록 ‘사회적 거리 두기’로 따뜻한 체온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라’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그 간절함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도 성령 하느님은 제단을 바라보는 우리 가정의 심정을 위로하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있는 자리는 달라도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제단을 바라보며 뜨거운 뭔가를 느낍니다. 감사성찬례는 우리 안에 사랑과 생명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만나고, 우리가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로 새로워지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한때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세계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과월절 희생양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덕택에 우리는 빛의 세계로 옮겨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한없는 은총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잘못된 일들을 회개합시다. 우리 본분에 맞지 않는 일들을 털어냅시다. 함께 있을 때 더 사랑하지 못한 서로에게 용서를 청합시다. 이제 우리가 사랑과 생명, 화해와 일치, 용서와 평화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시대를 살리는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사랑과 생명, 화해와 일치, 용서와 평화의 일을 하도록 성령 안에서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사랑을 간직한 기도의 힘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시대를 살리기 위해 작은 사랑의 의무라도 실천하는 하늘나라 공동체가 우리 교회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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