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30. 연중2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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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설교

성경 본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 1독서 – 출애 3:1-15
  • 시편 – 105:1-7,23-27,45
  • 독서 – 로마 12:9-21
  • 복음서 – 마태 16:21-28

연중 22주일입니다. 전례독서 주제는 ‘제자, 행동하시는 주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의 미래를 열기 위해 자신을 산제물로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온 겨레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세 억제를 위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의사들의 파업까지 겹치며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더욱이 세상의 소금과 빛인 교회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온 교회가, 이웃의 건강과 안전을 해하는 파렴치한 단체로 조롱당하는 엄중한 상황이 사제로서 부끄럽습니다. 모임을 주도했고, 검사를 거부하며, 거짓 뉴스로 ‘분열’을 조장하는 이들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에게 주고자 하시는 ‘한 말씀’을 듣기 위해 두 손을 모아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는지 성찰해 봅니다. 진정으로 ‘그 소중한 것을 찾았다’라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인지 성찰해 봅니다.

 

오늘 <전례독서>도 우리가 인생에서 찾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종교’에서는 인생들이 찾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상징적으로 ‘길’이라 표현합니다.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도’(道)라고 말합니다. 장인(匠人)처럼, 가장 소중한 것이 직업에 적용될 때는 ‘천직(天職)’이라 불립니다. 교회에서는 인생들이 찾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본분’(Duty), ‘사명’(Mission, 책무), ‘소명’(Calling), ‘꿈’(Vision, 미래)이라는 말로 부릅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참 좋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불의한 세상에 오게 하는 데 ‘부르심’을 받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부르신 자녀(교회)답게 살면서 하느님이 주신, 자신이 찾은 ‘꿈’을 성취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 ‘본분’에 맞게 살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자신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제자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앙의 경지는 스승이신 예수를 닮는 삶입니다. 자신을 통해 이웃들이 예수를 보게 하는 삶입니다. 스승이신 예수의 삶은 어땠습니까? 제가 배우고 묵상해 온 예수는 ‘사랑’으로 모든 ‘경계’를 허물고, ‘섬김’으로 ‘하나’가 되는 일에 자신을 바치신 분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섬김’으로 ‘타인의 자기화’(自己化),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길을 걸으신 분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삶을 닮겠다’라고 따라나섰습니다. 문제는 ‘타인의 무엇을 자기화’하느냐입니다. 오늘 전례독서의 정신을 묵상해 보면 ‘고난 속에 있는 타인의 눈물과 아픔’에 자신을 동일화하고 참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심을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공감’, ‘측은지심’으로 ‘이웃의 필요’를 위해 자기를 ‘봉헌’하는 ‘사랑’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이것이 빠진 채 자기유익과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는 새빨간 거짓입니다.

연중 21주일부터 <전례독서> 1독서《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두 번째 책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쉐모트’(שמות, Shemot)라 부릅니다. ‘쉠’(שם)은 히브리어로 ‘이름’이라는 뜻인데 ‘쉐모트’는 복수형으로 ‘이름들’(the names)이라는 뜻입니다. 책에 쓰인 두 번째 낱말입니다. 실제로 이집트로 내려 간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붉은색 네모가 ‘쉐모트'(이름들)이라는 낱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은 이 책의 이름을 ‘엑소도스’(Ἔξοδος)라 붙였습니다. 이 낱말을 한 낱말로 취급하는 이들은 그 어원을 out과 through에서 찾고, ‘떠남’, ‘나옴’, ‘벗어남’, ‘출구’, 비유적으로는 ‘죽음’이라는 의미로 새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탈출한)된 대사건에 초점을 맞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라틴어와 영어 ‘exodus’를 거쳐 우리말로 《출애굽기》가 되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엑소도스’(έξοδος)를 한 낱말로 보지 않고 ‘ex’와 ‘hodos’의 합성어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ex’는 ‘~로부터 밖으로’(out of), ‘hodos’는 ‘길’(way), ‘여행’, 비유적으로는 ‘도’(道)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길 밖으로’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로부터 ‘벗어나 다른 길’로 걸어가는 여정(旅程)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길, 어떤 여정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집트는 ‘피라미드’가 상징하듯이 고대 근동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습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은 이집트를 풍족한 곡창지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집트’는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세상 문화의 물질적 풍요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그 풍요의 이집트가 우리를 ‘노예’로 삼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첨단 과학기술이 가져온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질이 풍성해지고 소유가 늘어날수록 그것들에 묶이며, ‘필요를 더 많이 느끼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임을 겨우 눈뜨는 우리입니다. 바깥세상이 아니라 진짜 문제는 ‘내면 세상’임을 깨닫기 시작한 우리입니다. 마음, 즉 ‘자기’가 문제임을 이제는 누구나 다 압니다. 그 ‘자기로부터’ 우리는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자기를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안에서 다룰 것입니다. 그 일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출애굽’(exodus)은 ‘이집트’로 상징되는 ‘거짓 풍요와 탐욕의 유혹’, ‘물질적 풍요와 편함이 주는 죽음’, ‘정신적 익숙함이 주는 죽음’, ‘몸에 밴 과거의 습관이 주는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道)을 모색하며 ‘떠나는 영적인 여정’이라 새길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갈구하며 걷고 있는 ‘세상의 길’(탐욕의 길, 과거의 길, 옛자아)로부터 ‘탈출’해 자신이 진정으로 ‘걸어야 할 새로운 길(나로부터의 자유의 길, 미래의 길, 새자아)을 찾는 여정’입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세상의 길’이 사실은 ‘고통과 죽음의 길’이었음을 깨닫고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행복의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 ‘세상의 길’들로부터 탈출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마음의 길’(영적 세계의 길)을 찾는 여정’입니다.

간단히 공동번역 성경 《출애굽기》의 이름처럼 말하자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집트로 상징되는 ‘세상의 지배’로부터 ‘탈출’하여 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해방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연중 29주일까지 《출애굽기》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묶고 있는 그 세상’(물질에 대한 탐욕과 거짓)이 무엇인지 살펴볼 것입니다. ‘자신이 탈출해야 할 그 길’(죽음과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하느님이 지시하시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기 위해 자신이 찾아서 걸어야 할 그 ‘새로운 영적인 길’(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인생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위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묵상하는 동안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존재하신 창조주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황’을, 우리의 ‘고난’을, 우리의 ‘고통’을, 우리의 ‘눈물’을 언제나 ‘가장 먼저 보고, 듣고, 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출애 3:7). ‘자기 백성의 고통이 하느님의 고통’입니다. ‘자타불이’의 하느님입니다. ‘출애굽’이 필요한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하느님은 굽어보고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코로나19의 고난’ 속에 있는 오늘의 우리 겨레에게도 진실입니다. 참으로 ‘희망의 하느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우리 겨레를 위로하시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게 치유와 소생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낭독한 <전례독서> 구약은 이 위대한 여정의 맨 앞자리에 있는 ‘모세’를 하느님께서 부르신 이야기와 찬미입니다. 차례로 보겠습니다.

1독서 《출애굽기》는 ‘모세의 소명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삶 자체가 일종의 ‘엑소도스(exodus, 떠남)’의 연속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모세는 부모의 집에서 ‘나와서’ 왕골상자로, 왕골상자에서 ‘나와서’ 공주의 집으로, 공주의 집에서 ‘나와서’ 미디안으로 이렇게 벌써 몇 차례 ‘떠남’과 ‘새 여정’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그 역시 우리 인생처럼 영원한 ‘안식처’(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출구)을 찾고 있었던 셈입니다.

젊은 시절 모세는 고생하는 자기 동족을 구하려다 이집트인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었습니다. 한 사람만 해치운다고 자기 동족이 해방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장가들어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양 떼도 아니고 ‘장인(丈人)의 소유’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맡겨진 할 일, 걸어야 할 길인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길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무려 40년에 이르는 ‘목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긴 세월을 그는 어떻게 견뎠을까요? 단지 양 떼만 돌봤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성취하시려고 ‘몸소’ 행하시는 ‘선택’이란 그런 식으로 시시하게 결정되지 않습니다.

‘광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드바르’(מִדְבָּר)는 ‘사막’(wilderness), ‘버려진 공간’(chaos)이라는 뜻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가파른 산이 전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오갑니다. 어느 때는 양 떼를 비탈에 버려둔 채 정상에 올라 사막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봅니다. 가슴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낍니다. 절규하며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집트 왕자에서 일순간에 살인자로, 도망자로, 떠돌이(나그네)로 전락한 회한(悔恨)과 고독(孤獨)입니다.

모름지기 ‘고독’은 사람을 키우는 법입니다. 그 고독 속에서 모세는 점차 ‘자연’으로 눈을 돌립니다. 어느 봉우리로 해가 떠오르고, 달은 어느 때 가장 밝으며,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언제부터 찾아드는지 샅샅이 그 ‘변화’를 관찰합니다. ‘광야’는 점점 ‘익숙한 삶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마지못해 시작한 목자의 일이었지만, 가족을, 자신의 공동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모세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관찰’로 점차 옮겨옵니다.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하는 사람으로 점점 성숙해 갑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아니라 ‘걸어야 할 길’을 묵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내면에도 ‘별’ 하나가 떠오릅니다. 가슴이 점점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긴 세월을 광야(사막)에 머물며 밤하늘을 보노라면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바람과 별’을 알아듣습니다(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시편 19:1). 쏟아져 내릴 듯 빛나는 별들을 보면서 인생을, 자신을 이끌어 온 운명의 힘을 묵상하다 보면 누구나 그리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는 파편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 우주를 하나로 연결하는 최고의 존재, 즉 ‘신’(神)에 대해 집중하고 묵상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영성가’로 세워져 가는 시간입니다. 그가 ‘큰 눈’과 ‘큰 귀’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 갑니다. 비로소 ‘광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드바르’(מִדְבָּר)의 뜻을 성취합니다. 미드바르’는 ‘사막’(wilderness), ‘버려진 공간’(chaos)라는 뜻 이외에 ‘말씀, 입’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장소’라는 뜻으로 확장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광야’는 ‘산’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음성’, 즉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자 ‘자기 자신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느님이 쓰실만한 영웅으로 빚어져 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통 속에 신음하는(출애 2:23-25) ‘내 백성 이스라엘’(출애 3:7)의 ‘출애굽’을 위해 하느님께서 준비시킨 사람이 ‘모세’입니다. 한마디로 40년 광야 생활은 내면의 ‘신성’(神聖)과 마주하는 자기 단련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때까지의 ‘오래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만나는 결정적인 모험을 감행합니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을 만나는 위대한 모험을 감행합니다. 자신이 걸어야 할 ‘진정한 길’을 찾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는 ‘깊은 산’으로 향합니다.

그가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 출애 3:1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을 40년간이나 단련시켜 온 “광야를 지납니다.” 그 ‘광야’는 양 떼를 이끌고 지겹도록 다녀본 ‘익숙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 광야를 지나 좀 더 들어갑니다. 원문의 일차적 의미는 “광야 뒤편으로”입니다. 평소와 달리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까지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라는 뜻입니다. ‘알 수 없는 곳’, 어쩌면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깊은 곳’, ‘자기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끌림’을 당했습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고 묵상하면서 무르익을 대로 익은 그를 하느님께서 불러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왜요?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은 ‘하느님의 산 호렙’입니다. 호렙은 ‘시나이산’이라고도 불립니다. 평소에도 많이 보며 지나다닌 산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산이냐면 ‘하느님의 산’입니다. 하느님의 소유, 오로지 하느님만이 계실 수 있는 ‘가장 거룩한 곳’(지성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까진 알지 못했습니다. 뭔가 ‘신비한 힘’에 이끌려 거기까지 갑니다. ‘하느님께로’, ‘자기 내면 더욱 깊숙한 곳으로 갔다’라고 읽을 수 있는 ‘상징’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자연법칙을 넘어선 초자연적이며, 초과학적인 현상을 목격합니다.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 하느님께서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다. – 출애 3:3-4

지난 40년 동안 자신이 그토록 대면하기 원했던 ‘운명의 힘’, 즉 ‘하느님께서’ 떨기의 불꽃을 매개로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모습으로 ‘현현’(顯現)하십니다.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광야의 그 흔한 식물인 ‘떨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어떤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그가 늘 보았고, 다녔던 호렙산, 즉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십니다. 이 ‘불붙은 떨기’는 모세의 외부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내면’에 타오르는 ‘신성(神聖)의 불꽃’(자기 자신이 되라는, 최고의 선(善)을 추구하라는)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모세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했다(느꼈다)는 것은 은유적으로 말하면 이제 그가 평범한 것 속에서조차 전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큰 눈’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가 새로운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본문은 그가 자신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즉각 알아듣고 반응했다고 표현합니다. 그 음성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이자 모세 자신의 심연에서 울리는 내면의 음성, 즉 ‘마음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 출애 3:4

그가 간직한 ‘새로운 시각’이 서둘러 그를 죽음으로부터 보호합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 출애 3:5

하느님의 ‘현현’(顯現)은 모세가 지겹도록 다녔던 삶의 현장에 잇닿아 있습니다. 그는 그런 곳에서 ‘신’(神)을 ‘알현’(謁見)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평범한 땅을 ‘현현의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유한하고 부정한 인간으로서 ‘거룩한 신의 현존’ 앞에 서 있는 ‘가련한 모세’는 삼가야 합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하느님을 묵상하며 살아왔다 하더라도 ‘알현’(謁見)의 허락은 ‘신의 몫’입니다. 사실 ‘광야’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켜온 ‘바깥뜰’입니다. 그 ‘산’은 태고(太古)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이 이미 점령하고 있는 ‘성전’(聖殿)입니다. 단지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지금 ‘불붙은 떨기’는 하느님을 모신 ‘지성소’(至聖所)입니다. 이렇게 그가 서 있는 그 평범한 땅은 ‘우주의 중심’입니다.

더욱이 그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왜 ‘신발’입니까?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고 ‘신발’을 신습니다(모자도 쓰고, 장갑도 끼지요). 일반적으로 옷과 신발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격리하는 ‘첫 경계’이자 자신을 보호하는 ‘첫 사물’입니다. 이것을 아담과 하와를 떠올리며 ‘원죄’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실용적인 목적 외에도 고대에는 ‘신발을 신는다’라는 것이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나타냅니다.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정체성이자 사회가 자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기대와 역할’이 ‘신발’에 담겨있습니다. 따라서 ‘신발을 신고 있다’라는 것은 지금까지 사회가 부여한 자신의 ‘정체성과 기대’(역할)를 계속 따른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신발’은 한 개인의 소중한 재산이자 그가 연결되어 살아온 ‘과거’를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오랜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 ‘신발’입니다. 이만큼 한 존재에게 ‘신발’은 소중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신발’을 벗도록 명령하십니다. 단지 ‘예의’를 갖추라는 차원을 넘어서 ‘과거의 자아와 단절하라’라는 명령입니다. 표면적으로 그의 신발은 ‘신성’(神聖)에 물든 땅과 ‘속’(俗)된 자신을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자신을 경계 짓는 ‘첫 것’을 벗고 ‘신성’(神聖)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땅과의 접촉을 잃어버린 사람은 하느님과의 접촉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발을 벗고 지구의 피부인 ‘대지’와 맨살을 접촉함으로써 하느님과 재결합(연결)해야 합니다. ‘심층적’으로는 오늘 복음 이야기처럼, 자신이 소중히 여기며 살아온 ‘과거의 자아’와 단절해야 합니다. ‘오랜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새 시대의 길’을 여는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명’(使命)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그 ‘신’(神)이 누구길래 그런 명령을 한단 말입니까?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리라. – 출애 3:6~8a

모세에게 ‘현현’(顯現)하시고 말씀하시는 ‘신’(神)은 자기 선조, 이스라엘이 믿어온 바로 그분입니다.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허구가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소개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그 땅에 남겨두신 고생하는 사람들, 즉 ‘떠돌이들’을 모세에게 ‘상기’시킵니다(출애 12:38).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고생을 ‘보고’,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고생을 ‘아시는’ 분입니다. 이집트의 ‘신’(神)들은 인간의 고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선조들의 하느님’, 즉 그 ‘광야의 하느님’은 인간의 고생에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고통이 하느님의 고통’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자기 백성 안에’ 계시려고 ‘광야’를 떠나실 참입니다. 정확히는 ‘하늘 거처’를 떠나실 작정입니다. 그들과 ‘하나’ 되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행동’(개입)하실 참입니다.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 출애 3:10

이것이 모세가 받은 ‘사명(使命)의 내용’입니다. 그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은 홀로 출애굽의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습니다. 모세를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진실입니다. 모세가 그 ‘사명’ 앞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머뭇거리며 고집스레 사양한다는 것이 《출애굽기》 4장까지 이어지는 중심내용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은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12절a)라고 다시 약속하십니다. 즉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어 파송하실 때 “함께 있겠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임마누엘’입니다.

우리도 모세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 ‘임마누엘’을 믿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우리 자신 말입니다. 가끔은 ‘모세처럼 하느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 말씀의 핵심도 결국 ‘임마누엘’일 텐데도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임마누엘’을 믿지 못하고,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는 사명을 성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이것입니다. ‘사명 성취’는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계속된 모세의 ‘머뭇거림’에 하느님께서는 그 ‘사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끈질긴’ 설득입니다.

너는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다음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리라. – 출애 3:12b

이것이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새로운 미래’입니다. 단지 ‘정치적 억압에서의 해방’만이 아닙니다.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계약공동체’로 세우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과의 계약’을 통해 인간다운 생명, 자유, 평화를 누리는 ‘평등공동체’로 세우시려는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향한 예배’야말로 모든 인간관계를 새롭게 하는 ‘평등공동체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출애굽의 목적’에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시는 그 ‘미래의 사명’을 ‘몸소 이루시기로 이미 확정하셨다’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합니다(13절). 자신이 선조들의 하느님을 만났다는 증거를 댈 수 있게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 ‘신’(神)들은 다른 ‘신’(神)들과 구별하기 위해 ‘고유명사’(이름)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름’은 단지 다른 것과 구별하는 표 이상으로 ‘그 이름을 지닌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 줍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히 하느님께 ‘스스로를 정의해 보라’는 ‘자기선언의 요청’입니다. 재밌게도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이름을 서로 다른 세 개의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나는 곧 나다, 나, 야훼.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 셋을 같은 이름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가 배운 선생님은 별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좀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이 중에서 신학자들이 가장 관심한 이름은 “나는 곧 나다”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이렇습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

《출애굽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처음으로 이 ‘이름’으로써 자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을 그렇게 칭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나다’라고 칭하시지만 우리는 ‘그분’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물론 이 이름을 알려주신 이유는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모세가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동족에게 가서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모세의 마음은 아마 더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집트 ‘신’(神)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 자체로 완전하고, 충만하며, 유일한 참 ‘신’(神)이시기에 ‘상대적 관계’임을 보여주는 ‘고유명사’마저 필요 없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사실, 이 ‘이름’은 문장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문법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는 문장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장에서 서술어는 주어를 설명하거나 수식합니다. 이 ‘이름’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이 ‘하느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대답과 연결하여 하느님의 ‘속성’을 밝혀주는 문장이라 주장합니다. 어떤 속성이냐면, ‘무소부재’(無所不在)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존재하고 싶은 곳에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인간들과 달리 ‘원인’과 ‘결과’라는 ‘상대성’과 ‘의존성’을 벗어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세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했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네가 나를 몰라서 그러나 본 데 나는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단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불러 인생길의 ‘사명’을 주시고, 당신의 도구로 삼으신 하느님은 뒷짐 지고 물러나 계신 분이 아닙니다.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 ‘사명의 미래’, 그 ‘새로운 미래’를 성취하시기 위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당신 홀로 인간의 모든 ‘미래의 일’까지도 성취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여는’ 그 ‘거룩한 일’(사명)에 우리를 ‘동참’시켜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나는 곧 나다”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은 상대적인 다른 무엇에 의존해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 자체로만 정의되는 존재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 개념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분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모세는 지금 “나는 곧 나”인 하느님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자기 내면의 소리’(자기 본분에 대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누구가 아닌 나여야 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는 이집트 땅의 떠돌이로 와있던 노동자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왕골상자’(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tebah)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임)에 실려 나일강에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식구들처럼 물에서 건짐을 받고 이집트 공주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본분’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습니다.

성인이 된 그는 ‘자기 의’(義)를 세우려다 낭패를 당했습니다.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로 전락했습니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목자’로 출발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과 ‘자신’과 ‘신’(神)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점점 변화되어 갔습니다. 지금 그는 어떤 특별한 곳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평범한 식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자기 바깥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신성의 불꽃’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가 되는 이 사명의 체험, 자기 본분의 자각을 통해 마침내 그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 ‘걸어야 할 길’, 즉 ‘자기 본분에 맞는 사명의 길’로 출발하려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일상’ 속에 이미 ‘침입’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의 인생길을 걸어왔던 이미 우리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땅 위에 발을 딛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발밑은 ‘우주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받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이것에 ‘눈을 뜨는 일’입니다. 모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불붙은 떨기’, ‘신성의 불꽃’, 즉 ‘위대함’을 ‘묵상’하는 삶입니다. 모세뿐 아니라 ‘우리 내면에도 불붙은 떨기’가 있습니다. 그 떨기는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을 건넵니다. “나는 나여야 한다.”라고 말씀을 겁니다. 이 말씀을 건네는 분은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나는 나’여야 합니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종종 나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 적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순간도 나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나는 곧 나다”라고 계시하셨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진짜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이 놀라운 광경을 가서 보아야겠다.”라는 ‘호기심’이 없습니다. ‘내면의 음성’을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때로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가르침을 흔한 ‘유사(類似) 영성’이라는 생각으로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된 자신의 숭고함’을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자신을 ‘광야의 떨기처럼 흔한 존재’라 여기고,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자신만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든, 친구든, 교우든 ‘옆에 있는 사람이 흔하다.’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나 같은 사람 속에, 저런 사람 속에 무슨 하느님이 계시겠어, 무슨 불붙은 떨기, 무슨 신성의 불꽃이 있겠어.’ 이러면서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내면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찾아다닙니다. 그 결국은 ‘탓’, ‘원망’, ‘불평’, ‘자책’, ‘타인을 향한 폭력’, ‘우울’, ‘자신을 향한 폭력인 자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밖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지금까지 찾아 헤맨 것에 대한 해답을 준 순 없습니다. 답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불붙은 떨기’, 즉 ‘신성의 불꽃’인 ‘성령’이 계십니다. 그 떨기 속에서 하느님은 “나는 곧 나다”라고 속삭이십니다. 지금도 그 불붙은 떨기, 신성의 불꽃은 우리의 눈과 귀를 기다립니다. 모세를 광야로 데리고 나가 자연과 자기 자신과 인생이 걸어야 할 최고의 ‘선’(善), ‘자기 사명’, ‘자기 본분’을 묵상하고 몰입하게 하신 이는 하느님입니다.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신 분은 “나는 곧 나다”라고 자신을 알려주신 ‘무소부재의 하느님’입니다. 모세는 비록 그 ‘본분’ 앞에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자신이 묵상한 대로 ‘우주의 주인’이자 모든 만물을 하나로 연결하시는 ‘하느님의 종’이 되어 자신이 가야 할 ‘진정한 목자의 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말입니다.

《시편》으로 노래한 <105편>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계약’에 대한 찬미입니다. 보잘것없던 그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해 주신 하느님의 주권적 언약 성취를 감사하고 찬미하는 ‘역사시’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조들과 ‘계약’을 맺으신 때로부터 그들이 ‘선민’으로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민족형성사’를 ‘성찰’합니다.

그 ‘성찰’을 통해 이스라엘은 은총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셨음을 깨닫습니다.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며 ‘계약’에 신실하셨던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계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시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과 역사의 주관자(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가장 기초가 되는 주제를 담고 있는 <105편>은 ‘가’해 <전례독서>에 무려 ‘4차례’(연중 17, 19, 22, 25주일)나 배정됩니다.

오늘 발췌한 단락은 1독서 《출애굽기》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모세와 아론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향한 찬미입니다(23-27절).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고난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요셉’처럼(17절)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려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몸소 뽑으신’ ‘선한 도구’였습니다. 다시 말해 요셉처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걸은 신앙의 영웅들입니다. 그런 다음 훌쩍 건너뛰어 45절을 배정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와 계약의 주인이신 하느님, 행동하신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계약을 맺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그들 ‘본분’에 맞는 ‘선민’임을 드러내야 한다는 당부입니다.

2독서 《로마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교우들과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指針)입니다. 이 둘의 뿌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산상수훈’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그 정신과 일치하는 구절들도 등장합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이 재밌습니다. 원수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은 마치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라 교훈합니다. 대단한 ‘은유’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원수진 사람에게 저주를 퍼부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힘써 ‘사랑을 실천’하면, 그들의 내면에 부끄러움이 일깨워져서 잘못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존재의 내면에는 사랑의 하느님이 현존’하시기에 ‘사랑’이라는 ‘마중물’을 통해 그들 안에서 ‘사랑’이 활동하게 하는 일만큼 좋은 일은 없습니다. 고착상태에 있는 오늘의 남북관계, 한일관계에 적용했으면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 생활규범 앞에 세웁니다. 나는 마음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사랑)으로 ‘악’(거짓과 탐욕)을 이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는 하느님의 자녀인 본분답게 ‘선’(사랑의 일치)으로 ‘악’(분열)을 이기는 평화의 교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선)을 행함, ‘겨레의 화해와 일치’, 이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알아듣고 있습니까?

복음 이야기 《마태오복음》은 ‘첫 번 수난예고’, ‘베드로의 반대’, ‘제자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제자들은 1독서 《출애굽기》의 모세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을 ‘새로운 생명의 미래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지난주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고백 후에 예수님은 ‘암울한 예언’을 하십니다. ‘첫 번 수난예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찾아낸 ‘거룩한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필연’에 따라서 ‘자신이 걸어야 할 그 최고의 길’을 가실 참입니다.

그 ‘사명’을 들은 베드로는 안 된다며 펄쩍 뜁니다. 어디 베드로뿐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수난예고’를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 끝에는 ‘부활이 있다’라는 ‘전말’(顚末)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수난예고’가 어떻게 들렸을까요? 예수님을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예고였습니다. 정말이지 ‘수난의 메시아’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상징이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수난’으로써 인류와 영원한 구원의 ‘새 계약’을 맺으시려는 예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예고는 예수님이 ‘범죄자’ 취급을 받을 것이란 뜻이 담겨있기에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대에 ‘원로’와 ‘대사제’와 ‘율법학자’는 어떤 이들입니까? 그들은 오늘날의 ‘최고 법원’(또는 의회) 격인 ‘산헤드린’ 구성원입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기구’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도층’, ‘명망가’(名望家), ‘권력가’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할 정도라면, 예수님께 큰 ‘죄목’(罪目)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동료들의 대변자라도 되는 듯 나섭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위대한 신앙고백을 한 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로 꼭 붙들고 반대합니다.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마태 16:22

“안 됩니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힐레오스’(ἵλεως)는 ‘자비’란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예수님을 지켜달라는 일종의 ‘기도’(외침)입니다. 좋은 뜻처럼 들리는 ‘외침’(기도)이더라도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또 본문에 ‘말리었다’로 번역한 그리스어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는 ‘꾸짖다, 책망하다, 강력히 경고하다’란 뜻입니다. 스승이 하시려는 일이 ‘틀렸다’는 일종의 ‘꾸짖음’입니다. 세상에나! 좀 거칠게 말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다투었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속내는 이렇습니다.

선생님, 그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이 만일 범죄자 취급을 받고 생을 끝내버리신다면 지금껏 따라다닌 우리 꼴은 뭐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 지금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는 ‘산헤드린’이 아니라 ‘로마’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안전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는 ‘저항’입니다. 더 깊은 속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자신이 붙여드린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칭호에 맞게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왕이 되어달라’는 요구입니다. 권력과 영광의 ‘유혹’에 빠진 베드로입니다. 냉정히 말해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권력과 영광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안 그렇고 베드로만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십니까?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인간적 사랑’ 때문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사탄’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선한 도구’가 되기를 원하지만 때로는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탄에게 동조’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문재인 정부를 향해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좌파정부’라고 몰아세우면서,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고 분열시키는 데 이용당한, 한국교회의 경도된 성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빠졌던 그 유혹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서 ‘수난의 길’, 즉 ‘거룩한 사명’을 막으려는 ‘사탄의 유혹’(목적)이 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마태 4:8).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던 그자가 여기 나타났습니다. 그 목적이 성공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돌아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 마태 16:23

조금 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만 하더라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전령’으로서, ‘하느님을 위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마태 16:17). 그러나 지금 그는 ‘사탄의 전령’으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그가 ‘사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조정하려는 사탄의 유혹을 빠져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탄을 위하여’ 말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를 원문대로 번역하자면 “가! 내 뒤로, 사탄”입니다. 이 점이 평행본문인 《마르코복음》과의 차이점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그리스어로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 예수님이 “가! 내 뒤로,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마르 8:33). 베드로의 자리는 예수님 앞이 아니라 항상 뒤여야 합니다. 하지만 《마태오복음》에는 베드로를 ‘꾸짖었다’(그리스어로 ‘에피티마오’, ἐπιτιμάω)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다만 “가! 내 뒤로,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뒤에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걸림돌, 함정, 올가미)라는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마르코복음》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요. 《마태오복음》은 ‘친(親) 베드로적’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하느님의 ‘계시’(지혜)를 받은 ‘반석’에서 일순간에 ‘장애물’로 전락합니다.

이런 세부적인 차이점보다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로 그의 생각(믿음)이 온통 오염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 ‘수난의 종인 그리스도’라면 ‘사람의 일’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정치적인 왕’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사람의 일’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남을 지배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일’은 자신의 것을 나누고, 낮아지고, 섬기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 즉 ‘신성’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1독서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하느님께서 모세를 끈질기게 설득하신 모습에 비하면 매몰차 보입니다. 왜 그토록 매몰차게 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생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사명, 본분)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려는 이를 막아서고 방해하려는 이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 즉 ‘가장 신성한 일’은 ‘자신이 가야 할 길(사명, 본분)을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고, 자신이 발견한 그것을 충실히 지켜나가려는 삶의 태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런 믿음, 자각, 신성을 방해한 셈이니 “가! 내 뒤로, 사탄.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라는 책망을 들을 만합니다. 반면에 1독서 《출애굽기》의 모세는 그 진정한 길을 찾기 전이었기에 하느님이 끈질기게 설득하신 셈입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제자도’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본분)에 비추어 당신을 끝까지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충성심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따르기 싫으면 그만두고 다 돌아가도 좋다는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로 모인 우리 ‘손발’에 새겨져 있어야 할 ‘한 말씀’입니다. ‘인생길의 최우선 기준과 가치’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우리 영혼에 ‘울림’을 주시는 ‘한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 마태 16:25~26

사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미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10:38-39). ‘예수의 사람’이 되려면 스승과 다른 운명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이가 제자입니다. 분명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의 ‘말씀’을 듣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스승처럼’,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따름에 있어서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참여’ 아니면 ‘불참’입니다. 정말이지 그 요구를 듣는 제자들의 마음은 섬뜩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언급하셨을 때 그들은 무슨 뜻인지 명백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 ‘나무에 달려 처형’당하는 일은 ‘저주’입니다(신명 21:23; 갈라 3:13). 게다가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 반역한 ‘정치범’(국사범)을 처형하는 끔찍스러운 ‘사형 도구’입니다.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처형 장소까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요한 19:17). 당시 권력이 예수님께 걸어 넘긴 죄목도 ‘국사범’(정치범)과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총독은 종교적인 차원의 ‘신성모독’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 했다는 고발은 그에게 골칫거리였습니다.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에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 보다는 ‘착한 목자’ 이미지를 대중적으로 더 선호했습니다. 수 세기가 흘러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면서 마침내 십자가는 끔찍스러운 처형 도구에서 ‘정화’되어 ‘전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죽음 외에 다른 목적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는 날마다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형 터, 즉 일방적인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이 요구 앞에 날마다 자기를 세웁니다. “자기를 버린다.”라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한 ‘극기’(克己)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위해서 ‘금식’(금육)하거나 특정 목표를 성취할 때까지 오락을 ‘절제’합니다. 물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은 자기 절제보다는 ‘욕망의 탐닉’을 원하기에 이런 노력을 얕볼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를 버리는 일’은 ‘자기 유익’을 위한 ‘극기’ 차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자기(자기 유익)를 중심’에 두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의 유익(특히 고난 속에 있는 이웃들)을 중심’에 두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고난’ 속에 있는 ‘타인’을 ‘자기화’(自己化)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더 큰 ‘선’(하느님 나라)이 통치하는 세상을 위해, 고난 속에 있는 ‘타인의 삶에 참여’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고난)을 감행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그런 분이셨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이 같은 행동을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성취하신 분이셨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자기 유익’을 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온 세상의 유익을 중심’에 둔 실천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중심에 둔 ‘자기 봉헌’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요구는 똑같은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신이 이미 이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에 두려는 욕망’에 대해 ‘사형 선고’(자기 죽음)를 받았음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일’, 즉 ‘세상적 가치’를 추구해 온 ‘옛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정말이지 십자가는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도 아니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수단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려는 일”은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기에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심사숙고’할 것을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계속 따를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이지 양자택일하라고 그 자리에서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 마태 16:25

아시다시피 인간에게 있어서 ‘목숨’만큼 절대적인 것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절대적’ 목숨을 “나를 위하여” ‘봉헌’할 각오로 ‘참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목숨을 ‘옛사람의 완성’(자기 유익)과 ‘세상적 가치’(자기 과시)의 실현을 위해 봉헌할 일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봉헌하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그 ‘참여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그 ‘사명 완수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생명’을 얻습니다(27절). 스스로 제 목숨을 살리려는 ‘이기적인 자’(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는 파멸할 것이지만, 그 요구에 참여한 이의 목숨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참된 생명’이 그를 기다립니다. 그 ‘봉헌의 결과’는 명백합니다. 종말에 있을 ‘영원한 영광’입니다(27절). ‘사람의 아들’은 ‘타인의 유익(특히 고난 속에 있는 이웃들)을 중심’에 두고 행한 우리의 ‘자기 버림의 실천’을 종말 심판에서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길을 걷는 이들 편에 서 준 우리의 그 ‘십자가의 실천’을 종말 심판에서 다 보상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 속에 다시 오시는 날 ‘새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워 줄 것입니다. 천하고 낮은 이 몸이 길이 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말씀 나눔을 마칩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라고 나서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새 상품이 나올 때마다 기업들은 그런 식으로 홍보합니다. 그 상품을 가지면 ‘삶’이 바뀔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적격이라고 홍보합니다. 그러면서 ‘칼끝’을 다른 이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너 자신부터 나의 삶에 동참하여라”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소원성취나 권력을 기대하는 그런 탐욕, 집착을 버리고, 혁신의 대상인 자신을 직시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욕심 많은 우리 머리에 ‘숯불’이 올려진 것처럼 화끈거리게 합니다.

사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도 세상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지구 생명의 회복과 유지를 위해 세상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세상을 직접 바꾸시지는 않습니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변화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덜어낸, 정확히는 ‘옛 자아’에 대해 죽은, ‘우리의 태도’를 보고 세상이 영향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림: "선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1890

“착한 사마리아인”, Vincent van Gogh, 1890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권력, 자기성공과 번영이라는 세상의 가치에 눈멀어 살아가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최고의 선’(善, 사랑)과 ‘가치’(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하는 우리를 보고 세상이 영향받기를 원하십니다. ‘고난 속에 있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새사람’인 우리의 태도를 보고 세상이 영향받기를 원하십니다.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일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태도를 보고 세상이 영향받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하여 걷고 있는 우리를 통해, 신성한 우리를 통해, 오염된 세상이 정화되고 영향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흔히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거창하게 말합니다. 그만큼 ‘코로나19’가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는 티끌만큼도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물질과 권력, 자기성공과 번영에 눈멀어 살아가는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인간들은 ‘코로나19’와 상관없이, 혹은 ‘코로나19’를 구실삼아 더 움켜쥐고, 증오하며, 차별합니다.

영적 스승들은 진정한 혁신과 변화는 외부에서 출발하지 않고 항상 내면에서 출발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한 제자도(십자가 사랑)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힘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만큼 세상은 변화된다는 말씀은 언제나 진실입니다.

지금도 ‘성령 하느님’은 우리 내면에 ‘불붙은 떨기’로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 의식의 가장 중심을 차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아파하는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기꺼이 열어 보이십니다. 그 아픔은 1독서 《출애굽기》가 선포하듯이, 당신 백성의 고생과 눈물 때문입니다. 억울한 하소연 때문입니다. 당신 백성이 아프면 하느님도 아프십니다. 당신 자녀가 눈물 흘리면 하느님도 눈물 흘리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을 내리누르는 그 고통으로부터 ‘어서 당신을 건져내라’라고, ‘어서 당신을 해방해라’라고 오늘도 일상의 평범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또 ‘한 사람의 모세’가 되어 달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전례독서를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 할수록,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고통 하는 마음’을, ‘그리스도의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 ‘아픔’을 치유해 주기 원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이라면 그 일에 응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모세의 ‘신발’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의지 삼고 살아온 ‘과거의 익숙한 자아’,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아’, ‘자기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아’를 버리는 일이기에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를 따르는 일은 모세처럼, 평소에 가지 않던 곳으로 더 깊이 가야 하는 ‘위대한 모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를 따르는 일은 모세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로 인도하시는 그 길로 가야 하는 ‘자기 봉헌의 여정’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우리 내면에 ‘불붙은 떨기’로 현존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런 모험과 봉헌의 여정, 귀 기울임은 ‘익숙한 이기적 자기’가 죽어야 하는 일이기에 두렵고 위험해 보입니다. 언제나 ‘자기 변화와 혁신의 시도’는 고통스럽게 보이기에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며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신 하느님, ‘함께 행동하실 것을 약속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여정에도 늘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땅’임을, 이기적 자기를 뛰어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발아래가 ‘우주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손길’이 받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자기중심적인 익숙한 나를 버리고, 역사 속에서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는 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 진정한 우리 자신(교회)으로 사는 길이라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정말이지 ‘제자’란 행동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자신을 ‘산제물’로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말씀 나눔을 듣는 이 시간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모세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이 걸어야 할 최고의 선’(善), 즉 ‘사명’을 발견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처럼 ‘사탄의 전령’이 될 것이 아니라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하느님의 전령’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우리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의 삶에 참여하는 우리의 발밑이, 하느님께서 함께 행동하시는 ‘우주의 중심’임을 알아차리는 큰 눈과 귀를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목숨을 주님께 ‘봉헌’하여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는 복된 인생 여정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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